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
“온 김에 민영이 보구 가.”
“안 시켜도 그럴 거예요.”
영지의 말에 지후는 입을 삐죽이며 대꾸했다.
“세미나 준비 때문에 어제도 병원에서 밤새웠어.”
아들의 표정을 고스란히 목격한 영지는 이번에도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말했다. 지후의 입꼬리가 조금 더 늘어지며 들릴 듯 말 듯 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신과 레지던트가 고민영 하나밖에 없나.”
“뭐라고?”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영지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지후는 입맛을 ‘쩝’ 다시며 딴소리를 지껄였다.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뭐?”
“설마, 고민영이 나이 들면 김영지 되는 건 아니겠지?”
진지한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영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럼 나 다시 생각해 보게.”
아들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하다. 영지는 웃음기를 싹 지우고는 매섭게 눈을 흘겼다.
“까분다!”
“어휴, 무서워.”
너스레를 떨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아들에게, 영지는 기어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애 밥 좀 먹여 놓구 가. 종일 의국에서 안 나온 모양이더라.”
“예, 예. 그렇게 합죠.”
*
“너 아침도 안 먹었었지?”
허겁지겁 밥을 떠 넣고 있는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민영이 묻자 다인은 언제나처럼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응.”
“너도 안 먹었다며.”
불현듯 나타나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남자에게 두 자매의 시선이 집중됐다.
“잉? 여기 웬일이야?”
“웬일은, 너 보러 왔지. 엄마한테 부탁할 일도 좀 있고…….”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지후는 대답을 뭉갰다. ‘부탁할 일’은 아직 그의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지후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올해도 어김없이 아프리카 의료 봉사 신청했다며? 이번만큼은 안 가겠구나, 했더니.”
지후가 잔소리를 시작하자 민영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콧소리를 냈다.
“왜 그래 또― 올해가 마지막일지도 모르잖아, 나는!”
민영의 애교에 슬쩍 미소를 짓던 지후는 단호하게 시선을 돌리며 괜히 이죽거리는 시늉을 했다.
“공부하랴, 봉사하랴, 연애하랴, 바쁘시구먼.”
“저 봐, 저 봐― 얼굴은 벌게서 콧구멍 벌름벌름하면서도 튕길 건 다 튕겨.”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리며 지켜보고 있던 다인이 기회를 놓칠세라 지후를 놀려 댔다.
“넌 형부가 좀 어렵고, 민망하고, 그런 게 전혀 없니?”
민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지만 다인은 순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왜 어려워? 왜 민망해야 하는데?”
능청스러운 다인의 대꾸에 지후는 한숨을 내쉬며 푸념 같은 말을 중얼댔다.
“내가 너무 잘해 줘서 그래. 처음부터 버릇을 확 잡아야 했는데.”
“그러니까, 언니고 형부고 다 맞먹으려 든다니까.”
민영이 맞장구를 치며 끼어들자 다인은 씩 웃어 보였다. 주거니 받거니, 맞장구를 쳐 가며 그녀를 흘겨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 애교스러운 윙크도 빼먹지 않고 날렸다. 두 사람의 입에선 더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근데 오빤 왜 교수님을 집에서 안 만나고 만날 병원에서 만나요?”
“오늘은 뭐 좀 부탁드리려고. 근데 이렇게 부실하게 먹고 체력이 남아나? 온 병원을 탭 댄스 추면서 돌아다니려면 더 든든하게 먹어야 하는 거 아냐?”
“그럼 형부가 맛있는 것 좀 사 줘 봐요, 좀!”
다인이 애교스럽게 ‘형부’라는 말에 악센트를 줘 가며 은근한 압박을 가하자 민영은 그런 다인을 다그쳤다.
“빨리 먹기나 해. 너 밥 먹여 보내느라 늦었다는 거 교수님이 아시면 나까지 미운털 박혀, 야.”
“어이쿠― 무서워라. 쳇!”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수저를 내려놓은 그녀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손등으로 입가를 쓱 닦은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언니, 형부. 즐거운 데이트하시어요. 소저는 이만 교수님 방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겠어요.”
울상을 지으며 말하던 다인은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민영의 손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살을 부려 가며 식판을 들고 멀어져 갔다.
테이블에 남은 두 사람은 다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구내식당의 모든 사람에게 알은체를 해 가며 고개를 꾸벅거리기도 하고, 호들갑스럽게 손을 흔들기도 하는 모습은 지켜보는 사람까지 미소를 짓게 하였다.
‘잘한 거겠지?’
지후는 속으로 물었다.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물음이었다. 권위 있는 정신과 전문의 김영지 박사의 선택을 굳게 믿고 있지만, 이번만큼은 조심스럽다. 촐랑대기 바쁜 저 꼬맹이의 머릿속에 어떤 것들이 들어 있는지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다.
‘믿어야겠지.’
그는 다시 한번 속엣말을 읊조렸다. 부디 엄마의 선택이 제대로 된 선택이었기를 바랄 뿐이다.
동생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민영의 얼굴엔 걱정이 떠 있었다.
‘왜 부르신 거지…….’
늦어도 오늘 안에 그 이유를 알 수 있겠지만, 궁금증은 좀체 사그라지지 않았다. 풀리지도 않을 문제를 붙들고 헛된 씨름을 하는 것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이다. 민영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거뒀다.
‘별일 아닐 거야.’
자신을 다독이는 속엣말을 읊조리며 지후에게 시선을 돌리던 민영은 멈칫하고 말았다. 지후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이는 것은 그녀의 착각일까. 남자 친구의 안색을 살피던 민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
“쭉 교수님 방에 있다가 오는 거야?”
“어?”
딴생각에 잠겨 있던 지후는 어눌한 소리를 한 번 내고서야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았다.
“응.”
황급히 표정을 정돈하며 이쪽으로 돌아앉는 지후를, 민영은 면밀히 관찰했다. 이 남자는 배우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표정을 열댓 번도 더 바꿀 수 있는, 지금처럼 순식간에 안색을 바꿀 줄 아는 사람이다. 민영의 머릿속이 아까보다 더 분주해졌다.
“무슨 일인데?”
“별거 아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는 지후에게 민영은 얼굴을 들이밀며 재차 물었다.
“얼굴엔 별거라고 쓰여 있는데?”
지후는 화들짝 몸을 뒤로 빼며 기겁하는 시늉을 했다.
“나 가지고 분석하지 말랬지, 무섭다니까.”
“분석이 아니라 딱 봐도 쓰여 있다니까.”
“이래도 써 있냐, 이래도?”
동그랗게 뜬 그녀의 눈앞에, 지후는 바짝 제 면상을 들이대며 장난스레 대꾸했다. 이번에는 민영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의심스러운 눈초리는 여전히 그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었다.
‘엄마한테 부탁할 일도 좀 있고…….’
얼버무리는 것 같았던 처음 그의 말이 어쩐지 마음에 걸려서 집요하게 굴고 싶었다. 그가 했던 ‘부탁’이라는 것이 다인이 호출당한 것과 연관이 있는 건지도 사실 헷갈리지만 말이다.
‘쯧’ 민영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연관이 있다 한들, 당장 해답이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막연한 걱정만 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럴 시간에 자료 한 장을 더 보는 것이 그녀에겐 백배 더 나은 일이었다.
체념한 듯한 그녀의 표정을 눈치챈 지후는 냉큼 화제를 돌렸다.
“밥 먹자. 배고파.”
민영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오후 4시가 다 된 시간이니 저녁밥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점심을 걸렀다는 소리다. 민영은 어이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밥도 안 먹고 여태 뭐 했어?”
‘사돈 남 말 하네.’
들키지 않게 속으로만 빈정거린 지후는 슬며시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다잡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를 완벽하게 속이려면 카메라 앞에서보다 월등한 연기력이 필요하다.
“엄마도 없고, 마누라도 없는 놈이 어디 가서 밥을 얻어먹어. 빨랑 일어나. 뱃가죽이랑 등골이랑 키스하는 소리 안 들려?”
지후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떡 일어서서 의기양양하게 배식대 쪽으로 향했다. 입을 삐죽이고 있던 민영도 마지못해 그를 따라 움직였다.
“실장님 오셨네. 요즘 왜 뜸했어요. 보고 싶어 눈 빠지는 줄 알았네.”
배식대 뒤에 서 있던 조리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민영은 흠칫하며 슬금슬금 게걸음을 걸었다. 그와 함께 서 있다가는 배식대에 온종일 붙들려 있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이모님 눈 빠질 때 됐지 싶어서 왔어요.”
“빠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미리미리 자진 납세 해.”
주거니 받거니, 깔깔, 껄껄대는 그들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음식을 고르기 시작했지만, 민영의 귀는 활짝 열려 있었다.
“이번 드라마 끝나면 아예 세끼를 다 여기서 해결할까요?”
“그럼 좋지! 우리 실장님은 날마다 특별 메뉴로 모시겠습니다.”
“우와 침 고인다, 침 고여! 오늘은 무슨 반찬에 이모님 사랑이 듬뿍 들어갔나…….”
지후의 너스레에 민영은 입꼬리를 늘이며 몸서리를 쳤다. 대체 어디서 저런 넉살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실장님 옷발 유지하려면 고단저지 드셔야지. 여기 찜닭.”
“고단저지가 뭐예요?”
“고단백 저지방. 내가 가슴살로만 골라 줄게요.”
킬킬, 까르르, 저쪽에선 또 한바탕 웃음이 번졌다. 배식대 근처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리조리 얼굴을 숨겨 가며 식판을 채운 민영은 종종걸음으로 배식대를 떠났다.
“갈수록 늘어요.”
테이블로 와 앉는 지후에게 민영은 쭝얼쭝얼 푸념을 쏟아 냈다.
“뭐가?”
“수다가. 갈수록 아줌마스러워.”
입을 삐죽이는 민영에게 지후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팬서비스야.”
“그건 팬서비스가 아니야, 그냥 수다지.”
민영이 눈을 부릅뜨며 수다였음을 재차 강조하자 지후는 테이블 너머로 몸을 숙여 속삭이듯 물었다.
“질투해?”
민영의 입이 딱 벌어졌다.
“뭐래, 하! 질투는 무슨.”
“맞는데, 뭐얼.”
느물대는 지후의 응수에 적당한 반박거리를 찾지 못한 민영은 눈을 흘기며 화제를 돌렸다.
“병원 출입 좀 자제해.”
“왜?”
지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많이 알려졌어. 노출이 너무 잦아.”
“결혼 날짜까지 다 발표한 마당에, 인제 와서 노출 줄이면 비밀 연애 되나?”
밉살스럽게 얼굴을 흔들어 대는 지후를 민영은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봤다. 그러곤 그의 빈정거림은 안 들린다는 듯 식판에 집중했다.
“엉큼하긴.”
지후는 끝낼 생각이 없었다.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아까보다 더 느물대는 어조로 그녀를 약 올렸다.
“은밀하게, 둘이서만, 이런 거 원해?”
민영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그가 과장된 연기를 선보일 때 자주 볼 수 있는 께름칙한 표정이다. 그는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남잔 줄 진즉에 알았어야 했는데.”
체념한 듯한 민영의 혼잣말에도 지후는 성의 있게 대꾸해 주었다.
“진즉에 알아 놓고 뭘 발뺌해.”
“몰랐어, 진심, 진짜, 하늘땅 별 땅 각기 별 땅!”
“퉤퉤퉤!”
민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말버릇에 잊지 않고 추임새를 덧붙이는 그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다.
깔깔대는 민영을 따라 지후도 웃었다. 그녀를 웃게 하는 일이라면 침 뱉는 시늉이 아니라 똥 싸는 시늉이래도 기꺼이 할 수 있었다. 팬들 사이에선 차도남으로 불리는 임지후가 이렇게 될 줄은, 아마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일단 한 번만 딱 만나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니까. 애가 예쁘고 착하고 센스 있고 다 좋은데 너무 공부만 해서 탈이야. 공부랑 지 사촌 동생밖에 모르니……. 네가 열 여자, 아니 백 명을 데려온대도 난 걔만큼 마음에 드는 애는 없을 것 같아. 병원으로 오든지, 아니면 내가 걔를 부를 테니까 집으로 오든지 결정을 해.’
장황하고도 끈질겼던 엄마의 설득에 그가 굴복당한 것은 꼭 5개월 전이었다. 그날은 하필 42시간 동안의 촬영을 마친 직후라 컨디션은 바닥이었다. 영지의 일방적인 시간 약속을 취소하려 줄곧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는 이뤄지지 않았고, 그는 결국 직접 찾아가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
“잠깐이면 돼, 시동 끄지 말고 기다려.”
“그럼 한 바퀴 돌아서 차 돌려 올게요. 형 나오면 바로 출발하게.”
지후가 내리자마자 밴은 골목 안쪽으로 사라졌다. 지후는 다시 한번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5시 10분.’
속엣말로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며 지후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시각까지는 50분이나 더 남았다. 취소하기에는 넉넉한 시간이다. 지후는 대문을 향해 당당히 걸어갔다.
“전화도 안 받으셔. 미치겠네.”
딩동, 딩동, 딩동.
초인종을 누르는 손길이 점차 빨라졌다. 민영은 흘러내리는 잔머리를 거친 손길로 걷어 귀 뒤로 걸고는 다시 전화기를 꺼냈다.
대문 근처에 세워진 짙푸른 빛깔의 비틀이 지후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누구 차야?’
궁금증이 이는 순간 웬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데, 다인이 근처에 있으면 바꿔 봐.”
누군가와 통화 중인 모양이다.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잠시 조용했던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핸드폰 되면 의국으로 했겠니? 아니다, 걔 찾을 필요 없겠다.”
차가운 목소리로 상대를 다그치던 여자는 이내 도리질을 치며 방금 했던 지시를 번복했다. 그리고 숨 쉴 틈도 없이 이어진 물음.
“혹시 교수님 병원에 계시니?”
지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자를 훑어봤다. 부모님 집 대문 앞에 서서 ‘교수님’을 찾는 젊은 여자라면…….
‘뭐 이렇게 빨리 왔어.’
소리로 내뱉지 못할 푸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지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의 행동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김영지 교수는 제자에게 거짓말을 해서 이곳까지 오게 하였고 그 제자는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온 것이다. 무려 50분이나 일찍.
하긴, 교수의 꿍꿍이가 뭔지도 모르고 왔을 테니 빨리 해치우자 마음먹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반쯤 체념한 지후는 아쉬운 대로 비틀의 선팅 된 창문을 거울 삼아 제 모습을 점검했다. 이틀 동안 잠이라곤 두 시간밖에 못 잤지만, 촬영용 메이크업을 지우지 않고 온 덕에 못 봐 줄 만큼은 아니다. ‘흠, 흠!’ 그는 목을 가다듬으며 대문간으로 다가섰다.
“누구세요?”
“온 김에 민영이 보구 가.”
“안 시켜도 그럴 거예요.”
영지의 말에 지후는 입을 삐죽이며 대꾸했다.
“세미나 준비 때문에 어제도 병원에서 밤새웠어.”
아들의 표정을 고스란히 목격한 영지는 이번에도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말했다. 지후의 입꼬리가 조금 더 늘어지며 들릴 듯 말 듯 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신과 레지던트가 고민영 하나밖에 없나.”
“뭐라고?”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영지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지후는 입맛을 ‘쩝’ 다시며 딴소리를 지껄였다.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뭐?”
“설마, 고민영이 나이 들면 김영지 되는 건 아니겠지?”
진지한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영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럼 나 다시 생각해 보게.”
아들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하다. 영지는 웃음기를 싹 지우고는 매섭게 눈을 흘겼다.
“까분다!”
“어휴, 무서워.”
너스레를 떨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아들에게, 영지는 기어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애 밥 좀 먹여 놓구 가. 종일 의국에서 안 나온 모양이더라.”
“예, 예. 그렇게 합죠.”
“너 아침도 안 먹었었지?”
허겁지겁 밥을 떠 넣고 있는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민영이 묻자 다인은 언제나처럼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응.”
“너도 안 먹었다며.”
불현듯 나타나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남자에게 두 자매의 시선이 집중됐다.
“잉? 여기 웬일이야?”
“웬일은, 너 보러 왔지. 엄마한테 부탁할 일도 좀 있고…….”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지후는 대답을 뭉갰다. ‘부탁할 일’은 아직 그의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지후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올해도 어김없이 아프리카 의료 봉사 신청했다며? 이번만큼은 안 가겠구나, 했더니.”
지후가 잔소리를 시작하자 민영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콧소리를 냈다.
“왜 그래 또― 올해가 마지막일지도 모르잖아, 나는!”
민영의 애교에 슬쩍 미소를 짓던 지후는 단호하게 시선을 돌리며 괜히 이죽거리는 시늉을 했다.
“공부하랴, 봉사하랴, 연애하랴, 바쁘시구먼.”
“저 봐, 저 봐― 얼굴은 벌게서 콧구멍 벌름벌름하면서도 튕길 건 다 튕겨.”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리며 지켜보고 있던 다인이 기회를 놓칠세라 지후를 놀려 댔다.
“넌 형부가 좀 어렵고, 민망하고, 그런 게 전혀 없니?”
민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지만 다인은 순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왜 어려워? 왜 민망해야 하는데?”
능청스러운 다인의 대꾸에 지후는 한숨을 내쉬며 푸념 같은 말을 중얼댔다.
“내가 너무 잘해 줘서 그래. 처음부터 버릇을 확 잡아야 했는데.”
“그러니까, 언니고 형부고 다 맞먹으려 든다니까.”
민영이 맞장구를 치며 끼어들자 다인은 씩 웃어 보였다. 주거니 받거니, 맞장구를 쳐 가며 그녀를 흘겨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 애교스러운 윙크도 빼먹지 않고 날렸다. 두 사람의 입에선 더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근데 오빤 왜 교수님을 집에서 안 만나고 만날 병원에서 만나요?”
“오늘은 뭐 좀 부탁드리려고. 근데 이렇게 부실하게 먹고 체력이 남아나? 온 병원을 탭 댄스 추면서 돌아다니려면 더 든든하게 먹어야 하는 거 아냐?”
“그럼 형부가 맛있는 것 좀 사 줘 봐요, 좀!”
다인이 애교스럽게 ‘형부’라는 말에 악센트를 줘 가며 은근한 압박을 가하자 민영은 그런 다인을 다그쳤다.
“빨리 먹기나 해. 너 밥 먹여 보내느라 늦었다는 거 교수님이 아시면 나까지 미운털 박혀, 야.”
“어이쿠― 무서워라. 쳇!”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수저를 내려놓은 그녀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손등으로 입가를 쓱 닦은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언니, 형부. 즐거운 데이트하시어요. 소저는 이만 교수님 방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겠어요.”
울상을 지으며 말하던 다인은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민영의 손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살을 부려 가며 식판을 들고 멀어져 갔다.
테이블에 남은 두 사람은 다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구내식당의 모든 사람에게 알은체를 해 가며 고개를 꾸벅거리기도 하고, 호들갑스럽게 손을 흔들기도 하는 모습은 지켜보는 사람까지 미소를 짓게 하였다.
‘잘한 거겠지?’
지후는 속으로 물었다.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물음이었다. 권위 있는 정신과 전문의 김영지 박사의 선택을 굳게 믿고 있지만, 이번만큼은 조심스럽다. 촐랑대기 바쁜 저 꼬맹이의 머릿속에 어떤 것들이 들어 있는지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다.
‘믿어야겠지.’
그는 다시 한번 속엣말을 읊조렸다. 부디 엄마의 선택이 제대로 된 선택이었기를 바랄 뿐이다.
동생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민영의 얼굴엔 걱정이 떠 있었다.
‘왜 부르신 거지…….’
늦어도 오늘 안에 그 이유를 알 수 있겠지만, 궁금증은 좀체 사그라지지 않았다. 풀리지도 않을 문제를 붙들고 헛된 씨름을 하는 것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이다. 민영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거뒀다.
‘별일 아닐 거야.’
자신을 다독이는 속엣말을 읊조리며 지후에게 시선을 돌리던 민영은 멈칫하고 말았다. 지후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이는 것은 그녀의 착각일까. 남자 친구의 안색을 살피던 민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쭉 교수님 방에 있다가 오는 거야?”
“어?”
딴생각에 잠겨 있던 지후는 어눌한 소리를 한 번 내고서야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았다.
“응.”
황급히 표정을 정돈하며 이쪽으로 돌아앉는 지후를, 민영은 면밀히 관찰했다. 이 남자는 배우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표정을 열댓 번도 더 바꿀 수 있는, 지금처럼 순식간에 안색을 바꿀 줄 아는 사람이다. 민영의 머릿속이 아까보다 더 분주해졌다.
“무슨 일인데?”
“별거 아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는 지후에게 민영은 얼굴을 들이밀며 재차 물었다.
“얼굴엔 별거라고 쓰여 있는데?”
지후는 화들짝 몸을 뒤로 빼며 기겁하는 시늉을 했다.
“나 가지고 분석하지 말랬지, 무섭다니까.”
“분석이 아니라 딱 봐도 쓰여 있다니까.”
“이래도 써 있냐, 이래도?”
동그랗게 뜬 그녀의 눈앞에, 지후는 바짝 제 면상을 들이대며 장난스레 대꾸했다. 이번에는 민영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의심스러운 눈초리는 여전히 그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었다.
‘엄마한테 부탁할 일도 좀 있고…….’
얼버무리는 것 같았던 처음 그의 말이 어쩐지 마음에 걸려서 집요하게 굴고 싶었다. 그가 했던 ‘부탁’이라는 것이 다인이 호출당한 것과 연관이 있는 건지도 사실 헷갈리지만 말이다.
‘쯧’ 민영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연관이 있다 한들, 당장 해답이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막연한 걱정만 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럴 시간에 자료 한 장을 더 보는 것이 그녀에겐 백배 더 나은 일이었다.
체념한 듯한 그녀의 표정을 눈치챈 지후는 냉큼 화제를 돌렸다.
“밥 먹자. 배고파.”
민영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오후 4시가 다 된 시간이니 저녁밥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점심을 걸렀다는 소리다. 민영은 어이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밥도 안 먹고 여태 뭐 했어?”
‘사돈 남 말 하네.’
들키지 않게 속으로만 빈정거린 지후는 슬며시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다잡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를 완벽하게 속이려면 카메라 앞에서보다 월등한 연기력이 필요하다.
“엄마도 없고, 마누라도 없는 놈이 어디 가서 밥을 얻어먹어. 빨랑 일어나. 뱃가죽이랑 등골이랑 키스하는 소리 안 들려?”
지후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떡 일어서서 의기양양하게 배식대 쪽으로 향했다. 입을 삐죽이고 있던 민영도 마지못해 그를 따라 움직였다.
“실장님 오셨네. 요즘 왜 뜸했어요. 보고 싶어 눈 빠지는 줄 알았네.”
배식대 뒤에 서 있던 조리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민영은 흠칫하며 슬금슬금 게걸음을 걸었다. 그와 함께 서 있다가는 배식대에 온종일 붙들려 있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이모님 눈 빠질 때 됐지 싶어서 왔어요.”
“빠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미리미리 자진 납세 해.”
주거니 받거니, 깔깔, 껄껄대는 그들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음식을 고르기 시작했지만, 민영의 귀는 활짝 열려 있었다.
“이번 드라마 끝나면 아예 세끼를 다 여기서 해결할까요?”
“그럼 좋지! 우리 실장님은 날마다 특별 메뉴로 모시겠습니다.”
“우와 침 고인다, 침 고여! 오늘은 무슨 반찬에 이모님 사랑이 듬뿍 들어갔나…….”
지후의 너스레에 민영은 입꼬리를 늘이며 몸서리를 쳤다. 대체 어디서 저런 넉살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실장님 옷발 유지하려면 고단저지 드셔야지. 여기 찜닭.”
“고단저지가 뭐예요?”
“고단백 저지방. 내가 가슴살로만 골라 줄게요.”
킬킬, 까르르, 저쪽에선 또 한바탕 웃음이 번졌다. 배식대 근처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리조리 얼굴을 숨겨 가며 식판을 채운 민영은 종종걸음으로 배식대를 떠났다.
“갈수록 늘어요.”
테이블로 와 앉는 지후에게 민영은 쭝얼쭝얼 푸념을 쏟아 냈다.
“뭐가?”
“수다가. 갈수록 아줌마스러워.”
입을 삐죽이는 민영에게 지후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팬서비스야.”
“그건 팬서비스가 아니야, 그냥 수다지.”
민영이 눈을 부릅뜨며 수다였음을 재차 강조하자 지후는 테이블 너머로 몸을 숙여 속삭이듯 물었다.
“질투해?”
민영의 입이 딱 벌어졌다.
“뭐래, 하! 질투는 무슨.”
“맞는데, 뭐얼.”
느물대는 지후의 응수에 적당한 반박거리를 찾지 못한 민영은 눈을 흘기며 화제를 돌렸다.
“병원 출입 좀 자제해.”
“왜?”
지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많이 알려졌어. 노출이 너무 잦아.”
“결혼 날짜까지 다 발표한 마당에, 인제 와서 노출 줄이면 비밀 연애 되나?”
밉살스럽게 얼굴을 흔들어 대는 지후를 민영은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봤다. 그러곤 그의 빈정거림은 안 들린다는 듯 식판에 집중했다.
“엉큼하긴.”
지후는 끝낼 생각이 없었다.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아까보다 더 느물대는 어조로 그녀를 약 올렸다.
“은밀하게, 둘이서만, 이런 거 원해?”
민영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그가 과장된 연기를 선보일 때 자주 볼 수 있는 께름칙한 표정이다. 그는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남잔 줄 진즉에 알았어야 했는데.”
체념한 듯한 민영의 혼잣말에도 지후는 성의 있게 대꾸해 주었다.
“진즉에 알아 놓고 뭘 발뺌해.”
“몰랐어, 진심, 진짜, 하늘땅 별 땅 각기 별 땅!”
“퉤퉤퉤!”
민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말버릇에 잊지 않고 추임새를 덧붙이는 그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다.
깔깔대는 민영을 따라 지후도 웃었다. 그녀를 웃게 하는 일이라면 침 뱉는 시늉이 아니라 똥 싸는 시늉이래도 기꺼이 할 수 있었다. 팬들 사이에선 차도남으로 불리는 임지후가 이렇게 될 줄은, 아마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일단 한 번만 딱 만나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니까. 애가 예쁘고 착하고 센스 있고 다 좋은데 너무 공부만 해서 탈이야. 공부랑 지 사촌 동생밖에 모르니……. 네가 열 여자, 아니 백 명을 데려온대도 난 걔만큼 마음에 드는 애는 없을 것 같아. 병원으로 오든지, 아니면 내가 걔를 부를 테니까 집으로 오든지 결정을 해.’
장황하고도 끈질겼던 엄마의 설득에 그가 굴복당한 것은 꼭 5개월 전이었다. 그날은 하필 42시간 동안의 촬영을 마친 직후라 컨디션은 바닥이었다. 영지의 일방적인 시간 약속을 취소하려 줄곧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는 이뤄지지 않았고, 그는 결국 직접 찾아가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이면 돼, 시동 끄지 말고 기다려.”
“그럼 한 바퀴 돌아서 차 돌려 올게요. 형 나오면 바로 출발하게.”
지후가 내리자마자 밴은 골목 안쪽으로 사라졌다. 지후는 다시 한번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5시 10분.’
속엣말로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며 지후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시각까지는 50분이나 더 남았다. 취소하기에는 넉넉한 시간이다. 지후는 대문을 향해 당당히 걸어갔다.
“전화도 안 받으셔. 미치겠네.”
딩동, 딩동, 딩동.
초인종을 누르는 손길이 점차 빨라졌다. 민영은 흘러내리는 잔머리를 거친 손길로 걷어 귀 뒤로 걸고는 다시 전화기를 꺼냈다.
대문 근처에 세워진 짙푸른 빛깔의 비틀이 지후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누구 차야?’
궁금증이 이는 순간 웬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데, 다인이 근처에 있으면 바꿔 봐.”
누군가와 통화 중인 모양이다.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잠시 조용했던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핸드폰 되면 의국으로 했겠니? 아니다, 걔 찾을 필요 없겠다.”
차가운 목소리로 상대를 다그치던 여자는 이내 도리질을 치며 방금 했던 지시를 번복했다. 그리고 숨 쉴 틈도 없이 이어진 물음.
“혹시 교수님 병원에 계시니?”
지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자를 훑어봤다. 부모님 집 대문 앞에 서서 ‘교수님’을 찾는 젊은 여자라면…….
‘뭐 이렇게 빨리 왔어.’
소리로 내뱉지 못할 푸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지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의 행동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김영지 교수는 제자에게 거짓말을 해서 이곳까지 오게 하였고 그 제자는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온 것이다. 무려 50분이나 일찍.
하긴, 교수의 꿍꿍이가 뭔지도 모르고 왔을 테니 빨리 해치우자 마음먹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반쯤 체념한 지후는 아쉬운 대로 비틀의 선팅 된 창문을 거울 삼아 제 모습을 점검했다. 이틀 동안 잠이라곤 두 시간밖에 못 잤지만, 촬영용 메이크업을 지우지 않고 온 덕에 못 봐 줄 만큼은 아니다. ‘흠, 흠!’ 그는 목을 가다듬으며 대문간으로 다가섰다.
“누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