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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담
3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남자의 방을 나서려다 걸음을 멈추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버지의 서재에도 책은 있었지만, 온통 제국주의 사상에 물든 내용이라 읽을 만한 책이 없었다.
내게 이렇게 많은 책을 접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까지만 해도 책을 자주 접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는 내게 책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마 제 소유의 인형이 똑똑해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리라.
다양한 종류의 책으로 채워진 남자의 책장은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책장 앞으로 다가서서 책을 훑어보았다. 시집, 인문학서, 다른 나라에서 수입하여 번역된 소설 등 다양한 책이 즐비해 있었다.
한 권만 읽어 보겠다는 생각은 어느새 여러 권이 되어 정신없이 책을 읽었다.
여러 책을 살펴보는데, 그 사이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이제는 종간 된 대중 잡지 <개벽>의 모음집이 있었다.
<개벽>은 시사와 정치 문제를 다루면서, 식민지 정책에 대한 비평과 풍자를 서슴지 않은 기사로 대중들에게 큰 호응을 받은 잡지였다. 총독부의 탄압으로 폐간되어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인데, 꽤 많은 양이 모여 있었다.
현재로써는 조금 위험한 물건이었다. 총독부의 눈에 띄면 불온 종자로 몰아세우기 딱 좋은 증거물이 될 터였다. 남자는 이걸 왜 모아 둔 걸까.
심각한 얼굴로 책장을 뒤지던 나는 다시 한번 놀라움을 삼켜야 했다. 수림! 수림의 글이 있었다.
탁.
갑작스레 문이 열렸다. 깜짝 놀라서 몸이 굳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감정 없이 새까맣고 깊은 눈에 잠깐이지만 당황함이 스쳐 지나갔다. 남자는 내가 아직까지도 자신의 방에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 그는 문고리를 잡은 상태에서 미동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애써 당황함을 숨기고, 들고 있던 책을 책꽂이에 꽂아 넣었다.
“……따분하기 짝이 없는 방이네요.”
남자의 시선이 내가 쌓아 놓은 책 더미로 향했다.
“그런 것치고는 많이 읽으셨네요.”
“읽은 거 아니에요.”
“원하시면 제가 없는 동안 읽으셔도 됩니다.”
남자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금서(禁書)가 많아 이 안에서 읽으셔야 하겠지만요.”
“안 읽어요.”
퉁명스러운 내 대답에 남자는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바닥에 늘어져 있던 책을 책장에 아무렇게나 꽂아 넣고 방을 나섰다.
방으로 돌아와 침상 위로 풀썩 몸을 뉘었다.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이 가라앉지 않아 길게 호흡을 내쉬었다. 수림의 글을 여기서 보게 되다니.
수림은 10년도 더 전에 D일보 문예란에서 소설을 연재하던 문인이다. 소설 속에서 현실을 비판하고, 식민지 체제의 모순을 지적하는 신랄한 내용을 다루곤 했다. 내용은 거칠지만 문장은 무척 아름답고 서정적이었다.
수림의 글을 처음 접했을 때의 기분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내게 글의 아름다움을 알려 준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독부의 압박으로 D일보가 폐간되면서 수림도 종적을 감추어 이제는 그 사람의 글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소설을 읽으려면 신문에 실렸던 조각난 글을 띄엄띄엄 찾아서 보아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남자의 서재에 온전한 책의 형태로 남아 있는 걸까.
정적을 비집고 시곗바늘 소리만 째깍째깍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뭘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던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침대에서 곧장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고, 남자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남자는 나를 바라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그건 아니고…… 볼일이 있어서요.”
“제 방에서요.”
“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볼일 보세요.”
남자는 다시 고개 숙여 제 할 일을 했다. 알다가도 모를 성격이다. 도대체 속에 무슨 생각을 품고 사는지 묻고 싶었지만, 서로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저 사람과 내 관계의 전부 같아 그냥 입을 다물었다.
책장 앞에 앉아 수림의 책을 읽었다. 이미 몇 번이고 읽었던 글이지만, 조각난 글이 아니라 완전한 책을 읽는 느낌은 새로웠다.
유명 문인들은 변절하여 일제를 지지하고, 옳은 글을 쓰는 문인들은 불령선인 취급을 당하는 시기에 수림의 글을 읽는 것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일이었다.
남자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는 듯했으나, 곧 시선을 떼고 서류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훑었다. 그렇게 남자와 나는 서로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고 각자 할 일을 했다.
책을 다 읽은 뒤에 말없이 남자의 방을 나왔다. 문을 굳게 닫는 동안에도 그는 내게 시선조차 옮기지 않았다.
*
“아가씨― 아니, 마님. 과일 드셔요.”
내가 새벽에 말없이 나간 일 때문에 화가 나 있던 덕연은 이틀이 지나고 나서야 내게 말을 걸어 주었다. 이제라도 말을 섞게 된 것이 기뻐 나는 밝게 미소 지었다. 덕연은 그런 나를 보며 샐쭉 입을 내밀었다.
“웃음이 나오세요?”
눈을 접으며 웃었다. 덕연은 상처 난 내 뺨을 조심히 어루만졌다.
“예쁜 얼굴에 흉이라도 지면 어떡해요.”
손바닥에 장난스럽게 입을 맞추자 덕연은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흉 좀 지면 어떠니. 사람답고 좋잖아.”
“그런 말씀 마셔요.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미안해.”
“다음부터 그러지 마세요, 정말.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덕연은 내 얼굴을 얄미운 듯 바라보더니 제가 가져온 사과를 내밀었다.
“이것 좀 드세요. 맛이 좋대요.”
“너부터 먹어.”
“아가씨, 아니지. 마님이 안 드셨는데 제가 어떻게 먹어요.”
항상 그랬다. 덕연은 저보다도 내가 우선이었다. 주인과 하녀의 상하 관계 때문이었다. 그것이 싫었지만, 내가 먼저 먹지 않는다면 덕연은 입에도 대지 않을 터였다. 마지못해 나는 덕연이 내민 사과를 받아먹었다.
“맛있다. 너도 먹어 봐.”
그제야 내가 건넨 사과를 받아먹는다. 오물오물 사과를 씹어 삼키는 입술이 예뻤다.
“그런데 아까는 어디 계셨던 거예요?”
“그 남자 방에.”
“주인어른이요?”
“응.”
“어…… 뭐 하셨어요?”
어째선지 덕연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왜, 이상한 짓이라도 했을까 봐?”
짓궂은 말에 순진한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그런 덕연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책 읽었어. 그 남자 방에 책이 많더라구.”
“책이요? 무슨 책이요?”
“그냥 이것저것. 거기에 수림의 책도 있더라.”
“아가씨가 좋아한다던 그 문인이요?”
“응. 그 남자가 책을 모으는 취미가 있나 봐. 이것저것 많던걸. 금서도 많았어.”
“금서요?”
덕연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러다 큰일 나면 어떡해요!”
“괜찮아. 돈이 권력인 세상 아니니. 그 남자 앞에서는 왜놈들도 몸을 사린다더라.”
“그래도…….”
“걱정하지 마.”
덕연은 석연치 않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덕연의 입에 과일을 넣어 주었다. 덕연은 오물오물 과일을 씹어 삼키고는 말했다.
“주인어른께서는 책을 많이 읽으시나 봐요.”
“그런가? 그냥 아버지처럼 장식용일 수도 있지.”
“그리 보이진 않던데…….”
“네가 어찌 알아?”
“그냥 느낌이요.”
헛웃음을 쳤다.
“겉모습에 속은 게지. 겉은 번지르르해도 속 빈 강정 같을지 누가 알아.”
물론 남자의 책들은 장식용이 아니었다. 책 사이사이에는 펜으로 표시한 흔적이나 모서리를 접은 자국이 있었다. 사람의 손을 탄 것이 분명했지만, 덕연이 남자에 대해 좋게 받아들이는 것이 싫어서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아가씨는 책 읽는 게 좋으세요?”
“그냥 따분하니까 읽는 거지.”
“그래도 어릴 때부터 좋아하셨잖아요.”
“반항이었지, 뭘.”
“혹시 뭔가 배우고 싶으신 건 아니세요?”
덕연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인형 주제에 배움이라니. 욕심이 과하다.
“됐어. 난 그냥 너만 옆에 있으면 돼.”
*
덕연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할 때에는 남자의 방에서 책을 읽었다. 남자가 출근하고, 덕연이 집안일로 바쁜 오전은 책을 읽기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남자가 퇴근하기 전까지 책을 읽고, 다시 덕연과 남은 오후를 보내는 것이 내 하루 일과가 되었다.
책을 읽는 일은 좋았다. 비록 평생을 거대한 저택에 갇혀 살아야 하는 신세였지만, 책을 읽을 때에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알지 못했던 세계를 접하고,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고, 스스로 어떠한 생각을 이어 나가는 행위는 내가 인형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임을 실감하게 했다. 몸을 조이는 드레스가 아니라, 편한 옷을 입고 아무렇게나 앉아 책을 보는 일은 야행을 나가 술을 마시는 것보다 더 자유로운 기분을 선사해 주었다.
내가 남자의 방에서 책을 읽는 일이 잦아지자, 남자는 제 방에 있는 나를 보아도 더 이상 당황하지 않았다. 그와 나는 서로 인사도 건네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각자 할 일을 했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그랬고, 책을 다 읽고 방을 빠져나올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책장 앞에 쪼그려 앉아 한참 책을 읽고 있는데, 이따금씩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남자가 나를 신경 쓰고 있었다.
“왜요?”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리고 다음 날 책장 앞에 소파가 생겼다.
“이거 뭐예요?”
서류에 무언가 작성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내어놓았다.
“가죽으로 만든 긴 의자입니다.”
이 남자는 나를 소파의 용도도 모르는 멍청이라 생각하고 있는 걸까.
“이태리에서…….”
“이게 소파라는 건 나도 알고, 원산지는 궁금하지 않아요. 내가 궁금한 건 이게 왜 갑자기 여기 생겼냐는 거죠.”
남자는 고개 숙여 다시 서류를 읽었다. 그리고 아까 전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내어놓았다.
“그냥 예뻐서 샀습니다.”
나를 위해 샀다는 사실이 쑥스러운 건지, 아니면 서로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 암묵적인 규칙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의 대답은 좀 유별났다. 답답할 정도로 말이 없고 따분한 성격의 소유자 입에서 ‘예뻐서’라는 말이 나오니 더 유별나게 느껴졌다.
남자에게 더 말을 걸지 않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잠시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물론 그 시선은 금세 서류 위에 붙었고, 다시 내게로 오는 일은 없었다.
*
덕연이 장을 나간 날이었다. 덕연이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져 늦은 밤까지 남자의 방에서 책을 읽었다. 남자가 퇴근하는 시각에는 보통 내 방으로 돌아가곤 했지만, 오늘은 덕연이도 없고 책의 내용도 재미있어서 그냥 좀 더 보기로 했다.
일주일 새에 남자의 방에는 새로운 물건들이 더 생겼다. 작은 티 테이블, 빛이 은은한 조명, 내가 읽던 책의 다음 권 등이 생겼다. 모두 남자가 마련한 물건이었다.
이 물건들을 모두 들여오는 동안 남자는 내게 단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이 모든 배려는 나를 향한 미안함 때문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불쾌한 배려는 아니기에 그냥 받아들였다.
소파에 앉아 한창 책에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책이 허공으로 쑤욱 사라졌다. 책이 사라진 곳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책상 앞에 앉아 일을 하던 남자가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의 손에 내가 읽던 책이 들려 있었다.
“왜요?”
“그렇게 보시면 눈 상합니다.”
눈? 무슨 뜻인지 몰라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는 제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그 안경이 어디로 가나 했더니, 내 귀와 콧대에 살짝 걸쳐졌다. 금테 곡선 사이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남자는 내 무릎 위로 다시 책을 올리고, 가벼운 손짓으로 책을 툭툭 두드렸다. 책을 보라는 뜻인 것 같다. 안경을 쓴 상태에서 고개 숙여 책의 글자를 바라보았다.
“잘 보이십니까.”
“글쎄요.”
“달라진 게 있을 겁니다.”
“선명해진 것 같기도 하고, 흐려진 것 같기도 한데…….”
“양쪽 시력이 안 맞아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은 흐릿한데, 어느 부분은 선명하기도 했다.
“제 밑에서 일하는 아이에게 말해 둘 테니 같이 안경 맞추고 오세요.”
“안경을 어디서 맞춰요?”
“백화점으로 가시면 될 겁니다.”
“알았어요.”
남자는 내가 쓰고 있던 안경을 가져가더니 다시 제 얼굴에 썼다. 어색함 없이 잘 어울렸다.
“그 책은 자주 읽으시네요.”
남자의 시선이 소파 한쪽에 놓인 수림의 책을 향했다.
“좋아하는 문인이 쓴 책이에요.”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책으로 나온 건 처음 보는데, 어디서 구한 거예요?”
“우연히 구했습니다.”
길게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남자는 다시 책상 앞으로 가서 제 할 일을 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귓바퀴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더운 걸까. 더운 날씨는 아닌 것 같은데.
모르겠다. 신경 쓰지 않고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시간이 흐르고, 마지막 장을 다 읽은 뒤에 책장에 책을 꽂았다. 남자의 방을 나서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을 때,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제가 가겠습니다.”
“어디를요?”
“백화점이요.”
“같이요?”
“네.”
“그래요, 그럼.”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3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남자의 방을 나서려다 걸음을 멈추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버지의 서재에도 책은 있었지만, 온통 제국주의 사상에 물든 내용이라 읽을 만한 책이 없었다.
내게 이렇게 많은 책을 접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까지만 해도 책을 자주 접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는 내게 책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마 제 소유의 인형이 똑똑해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리라.
다양한 종류의 책으로 채워진 남자의 책장은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책장 앞으로 다가서서 책을 훑어보았다. 시집, 인문학서, 다른 나라에서 수입하여 번역된 소설 등 다양한 책이 즐비해 있었다.
한 권만 읽어 보겠다는 생각은 어느새 여러 권이 되어 정신없이 책을 읽었다.
여러 책을 살펴보는데, 그 사이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이제는 종간 된 대중 잡지 <개벽>의 모음집이 있었다.
<개벽>은 시사와 정치 문제를 다루면서, 식민지 정책에 대한 비평과 풍자를 서슴지 않은 기사로 대중들에게 큰 호응을 받은 잡지였다. 총독부의 탄압으로 폐간되어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인데, 꽤 많은 양이 모여 있었다.
현재로써는 조금 위험한 물건이었다. 총독부의 눈에 띄면 불온 종자로 몰아세우기 딱 좋은 증거물이 될 터였다. 남자는 이걸 왜 모아 둔 걸까.
심각한 얼굴로 책장을 뒤지던 나는 다시 한번 놀라움을 삼켜야 했다. 수림! 수림의 글이 있었다.
탁.
갑작스레 문이 열렸다. 깜짝 놀라서 몸이 굳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감정 없이 새까맣고 깊은 눈에 잠깐이지만 당황함이 스쳐 지나갔다. 남자는 내가 아직까지도 자신의 방에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 그는 문고리를 잡은 상태에서 미동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애써 당황함을 숨기고, 들고 있던 책을 책꽂이에 꽂아 넣었다.
“……따분하기 짝이 없는 방이네요.”
남자의 시선이 내가 쌓아 놓은 책 더미로 향했다.
“그런 것치고는 많이 읽으셨네요.”
“읽은 거 아니에요.”
“원하시면 제가 없는 동안 읽으셔도 됩니다.”
남자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금서(禁書)가 많아 이 안에서 읽으셔야 하겠지만요.”
“안 읽어요.”
퉁명스러운 내 대답에 남자는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바닥에 늘어져 있던 책을 책장에 아무렇게나 꽂아 넣고 방을 나섰다.
방으로 돌아와 침상 위로 풀썩 몸을 뉘었다.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이 가라앉지 않아 길게 호흡을 내쉬었다. 수림의 글을 여기서 보게 되다니.
수림은 10년도 더 전에 D일보 문예란에서 소설을 연재하던 문인이다. 소설 속에서 현실을 비판하고, 식민지 체제의 모순을 지적하는 신랄한 내용을 다루곤 했다. 내용은 거칠지만 문장은 무척 아름답고 서정적이었다.
수림의 글을 처음 접했을 때의 기분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내게 글의 아름다움을 알려 준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독부의 압박으로 D일보가 폐간되면서 수림도 종적을 감추어 이제는 그 사람의 글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소설을 읽으려면 신문에 실렸던 조각난 글을 띄엄띄엄 찾아서 보아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남자의 서재에 온전한 책의 형태로 남아 있는 걸까.
정적을 비집고 시곗바늘 소리만 째깍째깍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뭘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던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침대에서 곧장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고, 남자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남자는 나를 바라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그건 아니고…… 볼일이 있어서요.”
“제 방에서요.”
“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볼일 보세요.”
남자는 다시 고개 숙여 제 할 일을 했다. 알다가도 모를 성격이다. 도대체 속에 무슨 생각을 품고 사는지 묻고 싶었지만, 서로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저 사람과 내 관계의 전부 같아 그냥 입을 다물었다.
책장 앞에 앉아 수림의 책을 읽었다. 이미 몇 번이고 읽었던 글이지만, 조각난 글이 아니라 완전한 책을 읽는 느낌은 새로웠다.
유명 문인들은 변절하여 일제를 지지하고, 옳은 글을 쓰는 문인들은 불령선인 취급을 당하는 시기에 수림의 글을 읽는 것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일이었다.
남자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는 듯했으나, 곧 시선을 떼고 서류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훑었다. 그렇게 남자와 나는 서로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고 각자 할 일을 했다.
책을 다 읽은 뒤에 말없이 남자의 방을 나왔다. 문을 굳게 닫는 동안에도 그는 내게 시선조차 옮기지 않았다.
“아가씨― 아니, 마님. 과일 드셔요.”
내가 새벽에 말없이 나간 일 때문에 화가 나 있던 덕연은 이틀이 지나고 나서야 내게 말을 걸어 주었다. 이제라도 말을 섞게 된 것이 기뻐 나는 밝게 미소 지었다. 덕연은 그런 나를 보며 샐쭉 입을 내밀었다.
“웃음이 나오세요?”
눈을 접으며 웃었다. 덕연은 상처 난 내 뺨을 조심히 어루만졌다.
“예쁜 얼굴에 흉이라도 지면 어떡해요.”
손바닥에 장난스럽게 입을 맞추자 덕연은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흉 좀 지면 어떠니. 사람답고 좋잖아.”
“그런 말씀 마셔요.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미안해.”
“다음부터 그러지 마세요, 정말.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덕연은 내 얼굴을 얄미운 듯 바라보더니 제가 가져온 사과를 내밀었다.
“이것 좀 드세요. 맛이 좋대요.”
“너부터 먹어.”
“아가씨, 아니지. 마님이 안 드셨는데 제가 어떻게 먹어요.”
항상 그랬다. 덕연은 저보다도 내가 우선이었다. 주인과 하녀의 상하 관계 때문이었다. 그것이 싫었지만, 내가 먼저 먹지 않는다면 덕연은 입에도 대지 않을 터였다. 마지못해 나는 덕연이 내민 사과를 받아먹었다.
“맛있다. 너도 먹어 봐.”
그제야 내가 건넨 사과를 받아먹는다. 오물오물 사과를 씹어 삼키는 입술이 예뻤다.
“그런데 아까는 어디 계셨던 거예요?”
“그 남자 방에.”
“주인어른이요?”
“응.”
“어…… 뭐 하셨어요?”
어째선지 덕연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왜, 이상한 짓이라도 했을까 봐?”
짓궂은 말에 순진한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그런 덕연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책 읽었어. 그 남자 방에 책이 많더라구.”
“책이요? 무슨 책이요?”
“그냥 이것저것. 거기에 수림의 책도 있더라.”
“아가씨가 좋아한다던 그 문인이요?”
“응. 그 남자가 책을 모으는 취미가 있나 봐. 이것저것 많던걸. 금서도 많았어.”
“금서요?”
덕연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러다 큰일 나면 어떡해요!”
“괜찮아. 돈이 권력인 세상 아니니. 그 남자 앞에서는 왜놈들도 몸을 사린다더라.”
“그래도…….”
“걱정하지 마.”
덕연은 석연치 않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덕연의 입에 과일을 넣어 주었다. 덕연은 오물오물 과일을 씹어 삼키고는 말했다.
“주인어른께서는 책을 많이 읽으시나 봐요.”
“그런가? 그냥 아버지처럼 장식용일 수도 있지.”
“그리 보이진 않던데…….”
“네가 어찌 알아?”
“그냥 느낌이요.”
헛웃음을 쳤다.
“겉모습에 속은 게지. 겉은 번지르르해도 속 빈 강정 같을지 누가 알아.”
물론 남자의 책들은 장식용이 아니었다. 책 사이사이에는 펜으로 표시한 흔적이나 모서리를 접은 자국이 있었다. 사람의 손을 탄 것이 분명했지만, 덕연이 남자에 대해 좋게 받아들이는 것이 싫어서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아가씨는 책 읽는 게 좋으세요?”
“그냥 따분하니까 읽는 거지.”
“그래도 어릴 때부터 좋아하셨잖아요.”
“반항이었지, 뭘.”
“혹시 뭔가 배우고 싶으신 건 아니세요?”
덕연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인형 주제에 배움이라니. 욕심이 과하다.
“됐어. 난 그냥 너만 옆에 있으면 돼.”
덕연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할 때에는 남자의 방에서 책을 읽었다. 남자가 출근하고, 덕연이 집안일로 바쁜 오전은 책을 읽기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남자가 퇴근하기 전까지 책을 읽고, 다시 덕연과 남은 오후를 보내는 것이 내 하루 일과가 되었다.
책을 읽는 일은 좋았다. 비록 평생을 거대한 저택에 갇혀 살아야 하는 신세였지만, 책을 읽을 때에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알지 못했던 세계를 접하고,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고, 스스로 어떠한 생각을 이어 나가는 행위는 내가 인형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임을 실감하게 했다. 몸을 조이는 드레스가 아니라, 편한 옷을 입고 아무렇게나 앉아 책을 보는 일은 야행을 나가 술을 마시는 것보다 더 자유로운 기분을 선사해 주었다.
내가 남자의 방에서 책을 읽는 일이 잦아지자, 남자는 제 방에 있는 나를 보아도 더 이상 당황하지 않았다. 그와 나는 서로 인사도 건네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각자 할 일을 했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그랬고, 책을 다 읽고 방을 빠져나올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책장 앞에 쪼그려 앉아 한참 책을 읽고 있는데, 이따금씩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남자가 나를 신경 쓰고 있었다.
“왜요?”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리고 다음 날 책장 앞에 소파가 생겼다.
“이거 뭐예요?”
서류에 무언가 작성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내어놓았다.
“가죽으로 만든 긴 의자입니다.”
이 남자는 나를 소파의 용도도 모르는 멍청이라 생각하고 있는 걸까.
“이태리에서…….”
“이게 소파라는 건 나도 알고, 원산지는 궁금하지 않아요. 내가 궁금한 건 이게 왜 갑자기 여기 생겼냐는 거죠.”
남자는 고개 숙여 다시 서류를 읽었다. 그리고 아까 전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내어놓았다.
“그냥 예뻐서 샀습니다.”
나를 위해 샀다는 사실이 쑥스러운 건지, 아니면 서로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 암묵적인 규칙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의 대답은 좀 유별났다. 답답할 정도로 말이 없고 따분한 성격의 소유자 입에서 ‘예뻐서’라는 말이 나오니 더 유별나게 느껴졌다.
남자에게 더 말을 걸지 않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잠시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물론 그 시선은 금세 서류 위에 붙었고, 다시 내게로 오는 일은 없었다.
덕연이 장을 나간 날이었다. 덕연이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져 늦은 밤까지 남자의 방에서 책을 읽었다. 남자가 퇴근하는 시각에는 보통 내 방으로 돌아가곤 했지만, 오늘은 덕연이도 없고 책의 내용도 재미있어서 그냥 좀 더 보기로 했다.
일주일 새에 남자의 방에는 새로운 물건들이 더 생겼다. 작은 티 테이블, 빛이 은은한 조명, 내가 읽던 책의 다음 권 등이 생겼다. 모두 남자가 마련한 물건이었다.
이 물건들을 모두 들여오는 동안 남자는 내게 단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이 모든 배려는 나를 향한 미안함 때문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불쾌한 배려는 아니기에 그냥 받아들였다.
소파에 앉아 한창 책에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책이 허공으로 쑤욱 사라졌다. 책이 사라진 곳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책상 앞에 앉아 일을 하던 남자가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의 손에 내가 읽던 책이 들려 있었다.
“왜요?”
“그렇게 보시면 눈 상합니다.”
눈? 무슨 뜻인지 몰라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는 제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그 안경이 어디로 가나 했더니, 내 귀와 콧대에 살짝 걸쳐졌다. 금테 곡선 사이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남자는 내 무릎 위로 다시 책을 올리고, 가벼운 손짓으로 책을 툭툭 두드렸다. 책을 보라는 뜻인 것 같다. 안경을 쓴 상태에서 고개 숙여 책의 글자를 바라보았다.
“잘 보이십니까.”
“글쎄요.”
“달라진 게 있을 겁니다.”
“선명해진 것 같기도 하고, 흐려진 것 같기도 한데…….”
“양쪽 시력이 안 맞아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은 흐릿한데, 어느 부분은 선명하기도 했다.
“제 밑에서 일하는 아이에게 말해 둘 테니 같이 안경 맞추고 오세요.”
“안경을 어디서 맞춰요?”
“백화점으로 가시면 될 겁니다.”
“알았어요.”
남자는 내가 쓰고 있던 안경을 가져가더니 다시 제 얼굴에 썼다. 어색함 없이 잘 어울렸다.
“그 책은 자주 읽으시네요.”
남자의 시선이 소파 한쪽에 놓인 수림의 책을 향했다.
“좋아하는 문인이 쓴 책이에요.”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책으로 나온 건 처음 보는데, 어디서 구한 거예요?”
“우연히 구했습니다.”
길게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남자는 다시 책상 앞으로 가서 제 할 일을 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귓바퀴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더운 걸까. 더운 날씨는 아닌 것 같은데.
모르겠다. 신경 쓰지 않고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시간이 흐르고, 마지막 장을 다 읽은 뒤에 책장에 책을 꽂았다. 남자의 방을 나서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을 때,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제가 가겠습니다.”
“어디를요?”
“백화점이요.”
“같이요?”
“네.”
“그래요, 그럼.”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