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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담
2화
“김권수가 죽었다더군.”
“김권수가?”
마작을 하던 중, 다른 테이블에서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김권수라면 P상회의 사장을 말하는 것인가. 아버지의 사업과도 엮여 있는 사람이라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다. 그저 동명이인일 수도 있지만, 경성에서 김권수라는 유명인은 그자 하나였다.
“천년만년 불사할 것 같던 늙은이가 어쩌다?”
“별장에서 총에 맞았다더군.”
“하긴. 원한을 가진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겠지.”
“개인적인 원한은 아닌 모양일세.”
“그걸 어찌 아나?”
“별장에서 총이 발견됐는데, 그게 그 총이라더군.”
“무슨?”
“브라우닝 FN M1900.”
어색한 영어 발음으로 사내는 말했다. 또 다른 사내가 물었다.
“그게 무슨 총인데?”
나는 마작 패를 밀어 놓고 뒤를 돌아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사내들의 시선이 내게 닿았고, 나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안중근 의사의 총이죠.”

*


퍽! 크고 투박한 손이 뺨을 갈겼다. 고개가 뒤로 꺾일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땅에 무릎을 부딪치며 맥없이 고꾸라졌다. 내가 야행을 나갔다는 사실이 기어코 아버지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경성 바닥에서 아버지를 모르는 이는 드물기에 예상하던 바였다.
이어서 뺨을 세 대나 더 맞았지만,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아버지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한 귀로 흘려듣는데, 하인들 틈에 서 있는 덕연이 보였다. 내가 걱정되는지 초조하고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마 새벽 내내 나를 찾아다녔으리라.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하는 저 아이가 가여웠다.
“임신 준비는 하고 있는 게냐?”
아버지가 물었다.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니 또 흘려들었다.
대답이 없다며 뺨을 한 대 더 맞았을 때, 덕연이는 어딘가로 사라졌고, 다시 나타났을 때는 의외의 인물과 함께였다. 남편과 그의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빨리 나타난 걸 보면 저들도 나를 찾아다녔던 모양이다.
이 새벽에 집안을 뒤집어 놓은 장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철없이 남편이라는 작자의 반응이 궁금했다. 감정이 메말라 보이는 사람이 어떤 식으로 화를 낼지 기대가 되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부드러운 손길이 어깨를 부축했다. 남자를 따라 하인들도 나를 부축하여 차에 태워 주었다. 나는 반쯤 열린 차창으로 남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저대로 굳어 버렸다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귀한 딸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남자는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고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귀한 딸일세.”
아버지가 대답했다. 긴 침묵이 흐른다. 남자는 이 시간에 홀로 멈춰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장인께서는 보통 귀한 사람을 대할 때 주먹질을 하십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시를 읊는 것처럼 잠잠하고 감미로웠기에,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귀하기 때문에 그런 걸세. 옳지 않은 행동을 하여 훈계를 한 것이고.”
처음으로 남자의 얼굴에서 변화를 보았다. 남자는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다.
“훈계요.”
아버지의 말을 되짚는 남자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았다.
“훈계가 폭력이라는 뜻을 내포하는 단어였습니까.”
“…….”
“미처 몰랐습니다.”
비꼬는 말처럼 느껴졌으나, 한없이 차분한 어조로 인해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아버지의 얼굴이 구겨진 것을 보니 조소가 맞는 듯했다.
“자네 지금 뭐 하자는 건가?”
“그러는 장인께서는 무슨 의도이신지 묻고 싶습니다.”
“의도라니?”
“제 아내입니다.”
남자의 단호한 말에 놀란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나였다.
“저를 욕보이시는 것과 다름없지 않습니까.”
남보다도 못한 사이에 아내라니. 놀랍기도 했지만 동시에 우습기도 했다. 맞은 사람은 나인데 본인이 욕보였다 생각하는 이유가 뭘까.
하지만 그 말에 기분이 나쁜 것과는 별개로, 앞으로 아버지가 내게 손찌검하는 일이 어려워지리라 예상했다. 옹서 관계가 되었다고는 하나, 남자는 여전히 아버지의 우위에 있는 사람이니까.
“다시는 이런 일 없기를 바랍니다. 폭력이든, 훈계든.”
남자는 아버지의 답을 듣지 않고 내가 타 있는 차에 올랐다. 무례하게 사라진 사위를 바라보는 장인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 꼴사납게 일그러졌다.
차는 연약한 가로등 불빛에 의지하여 밤길을 달렸다. 새벽이 지나지 않은 밤은 지나치게 어두웠다. 달빛과 별빛마저 흡수했는지 온통 칠흑이었다. 나는 멍하니 창에 기대어 까만 밤하늘 밑으로 드문드문 나타나는 가로등 불빛을 세었다.
옆자리에 앉은 남편은 늘 그랬듯이 말이 없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남자의 사람 역시 말이 없으니 홀로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기분이었다. 어둠 속을 달리는 이 차가 끊임없이 어둠을 헤매다 어디론가 멀리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러길 바랐다.
임신이라 했다. 아버지는 그리 말했다. 임신 준비를 하고 있느냐고. 인형처럼 살게 한 것도 모자라 창녀처럼 팔아 버리더니, 이제는 아이를 낳으라 한다. 앞으로는 기계로 살게 할 모양이다. 아마 아들을 낳기 전까지는 기계가 되어야겠지.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이용 가치를 잃은 소모품은 어떤 식으로 버려지게 될까.
“부인께서 원하시는 결혼이 아니었던 걸 압니다.”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건 남자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 창밖의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차창 위에 낮게 눈을 내리깐 남자의 모습이 비춰졌다. 차창 밖으로 나타나는 가로등 빛이 깜빡깜빡 점멸하며 남자의 눈도 같이 천천히 깜빡였다.
“미안하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소리 내어 조소하며 다시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정말 미안했다면 이 결혼을 성사시키지 말았어야 했다.
크게 부풀어 오른 뺨이 홧홧하고 아팠다. 덕연이 보고 싶었다. 이 깊은 어둠 속에서 나를 끄집어낼 수 있는 사람은 덕연뿐이었다. 이전에도 그랬듯, 아픈 내 뺨을 어루만지며 상냥한 미소를 지어 나마저도 미소 짓게 만들 것이다, 그 아이는.
눈을 감았다. 깜빡이던 가로등 불빛이 눈꺼풀 아래로 흩어지며 폭죽처럼 발산한다. 빛의 지리멸렬이 마치 내 삶을 보는 듯하였다.



제 2장 호박색 불빛


어둠 속을 달리던 차는 마침내 저택 앞에서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덕연이 나를 부축했다. 팔을 잡은 덕연의 손은 사시나무 떨리듯 파르르 떨렸고, 동그란 눈망울에는 애처롭게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덕연의 반응을 보아하니 내 얼굴의 상태가 많이 심각한 모양이다.
덕연은 내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쳤다.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심술이 과했다고. 미안하다고. 착해 빠진 하녀는 미운 소리 하나 못 하고 그 사과를 받아 줄 것이다.
덕연의 부축을 받으며 저택 복도를 반쯤 걸었을 때, 뒤에서 낮은 음성이 들렸다.
“그 방 말고.”
“예?”
남자의 말에 덕연이 당황한 듯 되물었다.
“내 방으로 모시거라.”
짧게 대답한 남자는 제 방으로 들어섰다. 덕연은 망설였으나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남편의 방에 들어섰다. 그의 방은 다른 방처럼 단조롭고 심심한 분위기였다. 커다란 침대 하나, 어두운 색의 가구들, 창문을 등진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조금 특이한 점은, 벽면을 채울 정도로 커다란 책장이 있다는 것이다. 책장에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책이 채워져 있었다.
방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원이 왔다. 그저 맞은 상처일 뿐인데도 면밀히 진찰을 받았다. 약을 다섯 가지나 바르고, 상처에 천을 감싼 뒤 냉찜질까지 받고 나서야 의원이 돌아갔다.
치료 과정을 지켜보던 남자는 의원이 돌아가자 하인들을 물렸다. 덕연은 망설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으니 나가 봐.”
내 말에 덕연은 그제야 고개를 푹 숙인 뒤 방을 나섰다.
방 안에 둘만 남게 되었다. 침대에 앉아 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속을 알 수 없는 남자가 어떤 행동을 할지 의문이었다. 어쩌면 아까 못 다한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는 내게서 등을 돌렸고, 책상 앞으로 가더니 서랍 안에서 무언가 꺼냈다. 성냥이었다.
‘치익―’ 소리를 내며 성냥은 뿌연 연기와 함께 불그스름한 불꽃을 내뿜었다. 곧 성냥은 책상 위에 있던 초에 불씨를 빼앗겼다.
남자가 방에 켜진 전등을 모두 끄자, 홀로 광원이 된 촛불은 방 안을 연한 호박색 빛으로 물들였다. 남자는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었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주무세요.”
말뜻을 해석하는 와중에 남자가 서랍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그는 고개 숙여 책을 보았고, 펜을 들어 책 위로 무언가 적었다. 촛불의 빛을 받은 금테 안경 위로 오묘한 붉은 빛이 일렁였다.
안경에 비치는 빛에 시선을 뺏겨 멍하니 앉아 있을 때, 남자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주무세요.”
정말 말 그대로 나더러 자라는 얘기를 하는 것 같다. 나는 그제야 자리에 몸을 뉘었다. 몸에 감기는 가벼운 솜이불이 포근했다.
옆으로 몸을 뉘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촛불의 연약한 빛에 의지하여 글자를 읽고 있었는데, 이따금씩 무언가 적어 내리기도 했다. 왜 촛불 옆에 있는 가스등을 켜지 않는지 의아했다. 무언가를 읽고 쓰기에는 촛불보다 가스등이 나을 텐데.
“왜 화를 내지 않아요?”
남자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짧게 나를 응시하더니 다시 고개를 숙여 무언가를 적는다.
“제가 왜 화를 내야 합니까.”
“마음대로 밖에 나갔잖아요.”
“마음대로 밖에 나가셔도 됩니다.”
침묵이 이어졌다. 방 안에는 시계의 초침 소리와 남자가 종이를 넘기는 소리, 사각사각 글씨를 쓰는 소리가 전부였다.
“그럼, 왜 오늘은 여기서 자야 해요?”
“불편하십니까.”
“불편하기도 하고 의문이기도 하네요.”
침묵 뒤에 그는 짧게 대답했다.
“염려되어서요.”
“뭐가요?”
“매일 약을 드신다고 들었습니다.”
“덕연이가 그러던가요?”
이 집에서 그걸 아는 사람은 덕연뿐이니 덕연이 맞겠지만,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덕연이 남자더러 좋은 사람이라 한 이유가 이거였나. 어느 사이에 두 사람은 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나 보다. 덕연에게 사과하려 했던 사실도 잊고 속이 뒤틀렸다.
“하긴. 내가 자살이라도 하면 곤란하겠죠.”
조소하듯 말했으나, 남자는 대꾸 없이 계속해서 책을 읽었다.
“그러면 왜 나를 건드리지 않아요?”
남자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언뜻 의아함이 비쳤다.
“개인 창녀가 생겼잖아요. 인형같이 예쁘고 고운, 아이를 낳아 줄 창녀.”
“…….”
“그게 아니라면 사내를 선호하나?”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인데도 실없이 웃었다. 내 빈정거림에도 남자는 여전히 미동 없이 같은 표정이었다. 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저렇게 표정이 없고 재미없는 사람이었을까.
“둘 다 아닙니다.”
“뭐가 둘 다 아니에요?”
“사내를 선호하는 것도 아니고, 부인께서도 창녀가 아닙니다.”
안경 위로 촛불의 빛이 엷게 일렁였고, 새까만 두 눈 속에서 호박색 빛이 부드럽게 빛났다.
“이상한 사람이네요.”
“평범한 사람입니다.”
“정말 사업 때문에 나랑 결혼한 거예요?”
“네.”
“…….”
“미안합니다.”
남자의 눈은 반듯했고, 목소리는 정중했다. 그래서 그의 사과는 진정성 있게 느껴졌다.
“미안함 때문에 나한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건가요?”
“미안함이 아니더라도 부인께 무언가 요구할 권리는 제게 없습니다.”
남자는 고개 숙여 다시 무언가 적었다.
“저는 상관하지 않을 테니 부인께서는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뭘 하든 상관 안 할 거예요?”
“네. 뭘 하든.”
“다른 사람과 자고 와도?”
“상관 안 합니다. 그게 부인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롭니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장인어른의 뜻에 반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
“제 미안함은 부인과 장인어른의 관계를 차단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그러니 원하는 일을 하시면 됩니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참견이었다면 미안합니다.”
그리고 다시 고개 숙여 책을 읽었다.
이상한 사내다. 아버지가 나를 팔았고, 이 남자가 나를 샀다. 그렇다면 나와의 결혼으로 남자가 얻을 것이 있어야 했다. 아버지와 사업으로 얽힌다고 해서 남자에게 크게 득이 되지는 않을 터였다. 평생을 인형처럼 살았지만 바보는 아니기에 그 정도는 안다.
사업이 아니라면 다른 목적이 있다고 보아야 자연스럽지만, 남자는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대체 나를 통해서 무엇을 얻으려는 걸까.
“팔은 왜 다친 거예요?
무언가 적어 내리던 손이 멈추었다.
“다치지 않았습니다.”
“내 방에 잘못 들어왔을 때, 손목에 피가 묻어 있었던 것 같은데요.”
남자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참견인가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촛불이 일렁이자 남자의 그림자도 일렁였고, 촛불이 담긴 그의 검은 눈동자 속 빛도 일렁였다.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인다. 본인의 피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의 피라는 말인가.
“그만 주무세요.”
남자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가기를 원치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쪽은 안 잘 거예요?”
“금방 다시 나가 봐야 합니다.”
나 때문에 이 새벽에 집을 나왔던 걸까. 본인이 나오지 않고 하인들을 시키면 되었을 텐데.
“미안하게 됐어요.”
“괜찮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 촛불의 따스하고 은은한 빛이 나를 에워싼다. 잠들기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빛이었다.
가스등 대신 초를 킨 이유는 어쩌면 나를 향한 배려인지도 모른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지만.
졸음이 밀려들었다. 촛불의 빛이 서서히 아득해지며, 아주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