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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새들의 노래
1화

Prologue
끼이익.
주방 뒷문이 조용히 열리고, 촛대를 든 작은 손이 까닥거리며 밖에서 기다리는 이를 초대했다. 조금 후 누군가가 숨을 죽이고 건물 안으로 침입했다. 불빛을 따라 건물로 들어온 침입자의 정체는 갈색 곱슬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조그마한 소녀였다.
“어서 들어와.”
“초대에 감사드려요, 알렉스 멜포드 님.”
소녀는 자신을 불러들인 검은 머리의 소년에게 치마폭을 펼치며 몸을 굽혔다. 어설프게 숙녀들의 인사를 흉내 낸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마사가 정말 쿠키 단지를 숨겨 놓은 거야?”
“오후에 오트밀과 꿀을 넣어서 만드는 걸 봤어.”
“와오.”
소년의 유모가 숨겨 둔 쿠키를 찾기 위해 두 아이는 분주히 주방을 뒤지며 보물찾기를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서는 쿠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남은 곳은 찬장인데, 저긴 의자를 가져와야 손이 닿을 것 같아.”
“가져올게.”
알렉스가 자신의 키만 한 의자를 끌고 와 소녀 앞에 두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소녀가 의자 위로 올라가자 떨어지지 말라며 그가 의자를 잡아 주었다.
찬장 문을 열고 까치발을 한 아이는 꼼꼼히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살펴보았다. 의자의 도움을 받아도 키가 모자라 전체를 둘러보는 데 시간이 걸리자 소년이 급한 마음에 재촉했다.
“아멜리아, 거기 없어?”
“잠깐만……. 아, 저기 있다!”
자주 놀러 오는 아멜리아에게도 익숙한 도자기 단지는 찬장 맨 왼쪽, 메이플 시럽 뒤에 숨겨져 있었다. 시럽 병을 옆으로 밀고 단지를 꺼내는 소녀의 움직임이 위태로워 그것을 지켜보던 소년의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뒤에 있는 단지를 꺼내려면 손을 더 깊숙하게 넣어서 앞으로 당겨야 한다는 걸 깨달은 소녀가 조금 더 발돋움해 있는 힘껏 팔을 뻗은 순간, 벽에서 나온 회색의 손이 단지를 조금 앞으로 밀어 주었다.
“어…….”
“왜, 무슨 일이야. 손이 안 닿으면 내가 할까?”
소년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하고 두 눈을 크게 뜨고 찬장을 바라보던 소녀는 눈을 몇 번 깜박인 후에야 정신이 드는지 “조금만 더 밀어 줘요.”라고 말했다.
“아멜리아? 뭐라고 했어?”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돼. 잠시만. 꺼냈어.”
양손으로 소중하게 단지를 꺼내 든 소녀가 활짝 웃으며 그것을 알렉스에게 넘겼다. 소년은 성급하게 뚜껑을 열어 큼직한 쿠키를 두 개 꺼내 그중 하나를 아멜리아에게 건넸다.
“우와아!”
쿠키를 받아 든 아멜리아가 달콤한 과자 향에 침을 꼴깍 삼켰다. 서둘러 한입 베어 무니 사르르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드러운 버터 향과 과자의 바삭한 식감, 거기에 오트밀이 씹히는 재미까지.
마사의 허니 오트밀 쿠키는 정말 맛있었다. 이가 썩는다며 자주 구워 주지 않은 탓에 그들은 특별한 날에나 한두 개씩 데운 우유와 함께 먹어 보고는 했는데, 놀랍게도 이 커다란 단지는 쿠키로 가득 차 있었다.
“평생 먹을 수 있겠다…….”
그들은 의기양양하게 전리품을 주고받으며 기쁨의 춤을 추었다. 손을 하늘로 올리고 팔짝팔짝 뛰던 둘은 의자가 우당탕 소리를 내자 그제야 서로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쉬―, 쉬―” 하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제 내려와.”
단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은 알렉스는 이제 소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기대감에 충만해 올라갈 때는 몰랐지만 내려올 때가 되자 높이에 겁이 나는지 우물거리던 소녀가 위와 아래를 번갈아 보더니 “……손 좀 잡아 줄래요?”라고 허공을 향해 물었다.
“손?” 하고 되묻는 소리에 소녀의 대답이 없자, 알렉스는 아멜리아가 내려놓은 쪽 손을 부축할 생각으로 덥석 잡았다.
“아!”
알렉스가 손을 잡자 소녀가 놀란 표정을 하며 내려다보았다. 촛불 하나에 의지하던 그들은 침침한 주방에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손을 잡혀 당황한 듯 보이는 아멜리아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소년은 봐서는 안 될 것을, 될 수 있으면 평생 피하고 싶던 것을 보고야 말았다.
회색의 무언가가 찬장에서 몸을 내밀고 소녀의 손을 잡아 주다가 그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데구르르, 흰자가 유난히 크게 강조된 눈이 부릅떠졌다. 크게 열린 동공이 소년을 빤히 훑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중, 알렉스는 깨달았다. 그 짙은 어둠의 덩어리가 피를 뒤집어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공포에 질린 소년이 헉, 하고 숨을 들이쉬자 그 여인의 얼굴 바로 옆에 서 있던 아멜리아가 “알렉스?”라고 물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툭, 툭. 소녀의 어깨에 여인의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소년은 잡고 있던 손을 집어 던졌다. 그의 몸이 크게 뒤로 넘어가며 탁자 위의 도자기 단지를 밀었다. 그 반동으로 몸이 흔들린 소녀 역시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서 떨어졌고, 돌바닥에 내리박힌 단지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박살 났다.
예상치 못한 큰 소리는 사람들의 잠을 깨웠다. 잠옷 바람에 양초를 든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그 진원지를 찾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야!”
“부엌에 도둑이 들었어!”
한밤중에 들려온 비명과 굉음에 놀라 달려온 멜포드 매너 하우스(Manor House)의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진 두 아이를 발견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여자아이 손에 상처가 웬 말입니까!”
“저희 아들은 깨어나질 못하고 있다고요!”
소녀는 깨진 도자기 파편 때문에 손등에 큰 상처를 입었고, 놀라 쓰러진 소년은 열이 올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교육을 어떻게 하면 여자아이가 한밤중에 남의 집에 들어갈 생각을 한답니까?”
“그 말, 똑같이 돌려 드리고 싶네요. 숙녀를 집으로 끌어들이는 도련님이라니 매너 교육을 다시 하셔야겠어요.”
“어머!”
“어머!”
두 어머니의 싸움은 몇 시간이고 계속되었다. 소중한 독자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리는 것과 애지중지 키워 오던 막내딸 손등에 난 커다란 상처, 이 타협점 없는 책임 전가는 결국 두 집안의 결별로 막을 내렸다.
“파혼하는 것이 좋겠군요. 이렇게 뻔뻔한 집안에 제 딸아이를 보낼 수는 없습니다.”
“이제야 뜻이 일치하네요. 저도 원하는 바예요.”
어머니들과 달리 아버지들은 중간에서 어쩔 줄 모르며 서로의 부인을 달래도 보고 말려도 보았지만, 뜻을 굽히지 않는 안주인들의 고집스러운 의기투합에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소꿉친구이자 약혼자 사이였던 두 아이의 관계는 결국 이렇게 막을 내렸다.


<붉은 서재>

도시에서 레이븐까지 오는 기차는 하루에 단 두 번 있었다. 아침과 저녁, 시간을 놓치면 다음 날까지 기다려야 하는 교통이 불편한 곳이지만 조용하고 아름다운 자연 덕분에 휴양지로 인기가 높은 곳이기도 했다.
새벽 기차가 레이븐역에 도착하자 플랫폼이 하얀 연기로 뒤덮였다.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들과 다른 마을에 볼일을 보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이 엇갈린 자리에 깔끔한 검은색 트렁크를 든 알렉스가 서 있었다.
“도련님! 여기입니다!”
인파가 빠지자 그를 알아본 하인이 손을 흔들었다. 젊은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달음에 달려온 하인이 기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군.”
“이야― 아주 멋진 신사로 자라셔서 쇤네 도련님을 못 알아뵐 뻔했습니다.”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가방을 넘겨받은 하인은 그를 마차로 안내했다.
“굳이 마중 나올 필요 없이 직접 가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러기 위해 저희가 있는 거지요.”
“그런가, 고맙네.”
준비된 것은 오픈 캐리지였다. 그늘을 만들어 줄 선루프는 있지만, 탑승용 문과 양쪽에 벽이 없어 바람을 맞으며 주변을 둘러보기 좋은 간편형 마차였다.
“오늘은 날씨도 좋으니 오랜만에 마을 구경도 좀 하면서 가시죠. 최근 저택으로 들어가는 길이 닦여져서 흔들림도 많이 줄었습니다.”
“그렇군. 초여름이라 경치도 좋겠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 올라탄 알렉스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앉아 흔들리며 지나가는 풍경을 무심하게 응시했다.
봄에 대학에 입학한 알렉스는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본가로 불려 왔다. 공부를 핑계로 몇 년간이나 집에 돌아오지 않았는데, 대학에 붙고 나니 더는 댈 핑계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외동아들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들다며 토라진 어머니를 달래기 위해서 내려온 건 좋았으나 삼 개월이나 되는 긴 여름 방학을 시골에서 할 일 없이 보낼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질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수업 준비를 핑계로 얼른 올라가야겠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지만 이상하리만치 이곳에서 지내던 날들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지루하고, 고루한 평원이 있는 조용한 마을이었다는 것 외엔 별다른 특징도 즐거움도 없었다.
여덟 살에 기숙학교에 들어가 친구들을 사귄 알렉스는 학교생활에 완벽히 적응했다. 소와 양이 풀을 뜯는 평야보다 또래들과의 스포츠 활동에 둘러싸인 시간이 혈기왕성한 소년에게는 훨씬 더 자극적이고 즐거웠다.
간혹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같은 기념일에는 집에 돌아왔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이마저도 점점 발걸음이 뜸해지게 되었다.
그에게는 도시 생활이 적성에 맞았다. 한적한 시골에서 낚시 같은 걸 하는 삶은 노년에나 고려해 볼까 말까 할 정도의 가능성 희박한 선택지였고,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그라면 아마 노인이 되어서도 도시 생활을 고집할 거라며 웃었다.
몇 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건물도 사람들의 얼굴도 조금씩 바뀐 듯하지만, 상점이나 교회 등 대표적인 랜드마크는 이전 그대로라 떠나 있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상점가를 지나던 중 알렉스는 자신의 기억에 없는 작은 가게를 발견했다.
“저 가게는 뭐지?”
알렉스의 질문에 달리던 말의 속도를 늦춘 하인이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라고 되물었다.
“저기, 저 빨간색으로 칠해진 문이 있는 가게. 못 보던 것 같은데. 뭐 하는 곳인가?”
“아아, ‘붉은 서재’ 말씀이시군요.”
“‘붉은 서재’? 서점인가? 그런 것치고는 어두운걸.”
서점이라고 보기에는 내부가 지나치게 어두워 보이는 가게였다. 붉은색 문을 가진 곳이라 저런 이름인가 하고 생각하는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골동품점입니다. 빛이 많이 들면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고, 한여름에도 두꺼운 벨벳 커튼을 쳐 두는 괴짜 주인이 운영하는 곳이죠.”
“골동품점?”
“예에. 생긴 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이 근방에서는 이미 유명한 가게가 되었습죠. 나중에 한번 방문해 보세요. 분명 도련님 마음에도 쏙 드는 물건이 있을 겁니다.”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