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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주변에도 부모님의 취미에 영향을 받아 일찌감치 골동품에 눈을 뜬 친우들이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극소수였고 알렉스에게는 별 관심 없는 분야이기도 했다. 골동품은 눈이 높아질수록 상상을 초월하게 돈이 들어가는 취미였다. 그러나 그는 굳이 그런 비싼 취미에 빠지지 않더라도 관심을 쏟을 흥밋거리가 넘치는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군지도 모르는 남이 쓰던 오래된 것을 모은다는 점을 그는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한번은 지인의 집에서 몇백 년 전 선조였던 귀부인이 사용했다는 섬세한 세공의 머리빗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귀한 거라며 유리 케이스 안에 넣어 보관하는 걸 꺼내 보여 주었는데, 솔 사이에 그 부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카락이 그대로 끼어 있는 걸 발견한 알렉스는 질겁하며 그 물건을 바닥에 떨어뜨렸었다.
다행히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큰 실례를 범한 민망함에 저녁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던, 그에게는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교 실수의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에게 골동품이란 알면 알수록 그다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꺼림칙한 물건들이라는 인식이 커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붉은 서재’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가게 내부가 좀 궁금하긴 했지만 그래도 저곳에 갈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알렉스는 앞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다시 등받이에 기댔다.
마차는 마을의 작은 번화가를 지나, 본격적으로 넓은 평야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멜포드 매너 하우스로 가는 길은 원래 자갈이 깔린 좁은 오솔길로 되어 있어 마차로 가기에는 불편한 부분이 있었다. 교통이 편치 않은 것도 알렉스가 집에 돌아오기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였는데, 하인의 말대로 최근 길을 새로 다듬었는지 오늘은 그의 기억보다 흔들림이 적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드나드는데 힘들지 않겠다고 내심 기뻐하며 풍경을 응시하니 평원 저 너머부터 숲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릴 적에는 저 숲도 상당히 깊고 울창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담하니 꽤 귀여운 크기였다. 심심할 때 산책하기 좋겠다고 생각할 무렵 그의 시야 끝자락에 이질적인 장면이 잡혔다.
‘누구지?’
마을 사람들의 묘로 생각되는 비석이 나무 사이로 몇 개씩 흩뿌려지듯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기묘한 공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여름이 되어 한껏 잎을 키운 나무 그늘로 어둡게 가라앉은 그 공터에, 옅은 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성의 실루엣이 흔들렸다.
알렉스는 흠칫 놀라 주변을 살폈다. 햇살이 부드러움을 넘어 따갑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6월 말. 빛처럼 강한 그림자가 지는 계절에 저 작은 나무숲 사이만 썰렁했다. 마치 다른 계절을 옮겨 온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뙤약볕 한 줄기도 새어 들지 못하는 무거운 숲의 분위기에 눈을 크게 뜨고 그 인영을 바라보자, 우연인지 마차가 다가오는 것에 맞춰 여인의 그림자가 그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싹한 기분이 든 건 눈이 마주치던 때였다. 먼 거리에서 형체만 간신히 보이는 여자가 빙긋 웃은 것 같았다. 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알렉스는 그 기묘한 인영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서로 마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여자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오며 그가 탄 마차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느리다고 생각해 본 적 없던 마차의 속도가 지금은 원망스러울 정도로 더디게 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가까워질수록 여자의 입에 걸린 미소가 확실하게 보였는데, 그것은 목덜미의 털이 쭈뼛 설 정도로 소름 끼치는 웃음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를 보며 웃는 하얀 이가 당장에라도 물어뜯을 기세로 덤벼들 것만 같은 긴장감에 알렉스가 신경을 곤두세우던 순간, 마차는 여자가 잠겨 있는 숲을 스치고 지나갔다.
숲을 벗어나자 주박이 풀리듯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전신의 신경도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대체, 이게 무슨.’
빼앗겼던 시선의 자유를 되찾은 그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을 눌렀다. 깜박이지도 않고 뚫어지도록 한곳만 바라본 탓인지 피로감이 몰려왔다. 등받이에 닿은 부분이 축축해 옷 위를 더듬어 보니, 실제로는 채 몇십 초도 되지 않았을 시간 동안 흘린 식은땀으로 그의 등은 흠뻑 젖어 있었다.
빛과 어둠의 조화 속에서 본 그림자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후손을 환영하려던 조상의 마중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는 그것을 나무 그림자를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얀 이를 보았다고 생각한 것은 빛에 반사된 조약돌일 수도 있었다.
알렉스는 직접 목격한 것을 차마 믿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다른 적당한 이유를 찾고자 했다. 그가 최선을 다해 머리를 쥐어짜는 동안 그를 태운 마차는 멜포드가의 장원에 다다라 일렬로 심어진 인공적인 나뭇길 사이로 접어들었다.
♠ ♠ ♠
딸랑딸랑.
골동품점 ‘붉은 서재’의 문에 달린 낡은 놋쇠 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유난히도 조용한 실내의 정적을 깨는 경망스러운 소리라 사실 그 종이 생각보다 작은 크기라는 걸 깨닫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알리는 종이 울렸지만, 손님을 맞으러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손님 역시, 주인이 나올 것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자신이 들고 있던 가방을 주섬주섬 탁자에 내려놓고 멋대로 손님용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러고는 장갑을 낀 손으로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것은 여성의 손에 올리기에는 조금 큰 크기의 상자형 오르골이었다. 상아로 만들어진 섬세한 세공이 들어간 상자지만 황변되어 노란색이 진해진 것이 시간이 흐른 태가 났다.
오르골을 손에 든 것은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는 소녀였다. 밝은 갈색 곱슬머리에 호기심 많은 동그란 눈매. 아기같이 말간 얼굴을 한 그녀는 지루한지 주변을 한참 둘러보다 오르골의 뚜껑을 열었다.
통, 통통, 통통통 하는 오르골의 태엽 튕기는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왈츠 음악이 흘러나왔다. 뚜껑 안쪽에는 거울도 달려 있어 오르골을 든 사람의 얼굴이 비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섬세한 예술 작품이었다.
상자 뒷면에는 누군가의 이름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살짝 만져 보는 소녀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음률에 맞춰 조용히 발을 까닥이는데 갑자기 뒤에서 “아, 이제 고쳐진 건가?”라고 묻는 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꺄악!”
“엇! 던지면 안 돼!”
깜짝 놀란 나머지 손이 미끄러져 하마터면 중요한 물건을 깰 뻔했던 아멜리아는 상대방을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의뢰품을 들고 있을 땐 놀라게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잖아요, 시드!”
“미안, 미안. 제대로 된 소리가 나기에 신기해서 그만.”
다시 놓칠세라 재빨리 시드에게 상자를 넘긴 아멜리아가 “떨어뜨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해요.”라며 입을 삐죽였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니까. 부서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함박웃음을 지은 시드가 저도 떨어뜨릴까 싶은지 물건을 재빨리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걸 사흘 만에 해결할 줄은 몰랐어. 기계적인 결함이 없는데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밀리를 떠올리기를 잘했지.”
“사흘씩이나 걸렸다고 해 주세요. 전 그동안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했거든요. 시간을 더 끌었다면 아마 제 손에 박살이 났을 거예요.”
“파손은 안 된다니까.”
큭큭, 목으로 웃는 소리를 내며 시드가 물품 보관 창고 뒤로 다시 사라졌다. 잠시 후 나타난 그의 손에는 두 개의 컵이 들려 있었다.
아멜리아 앞에 잔을 내려놓은 시드는 다시 부지런하게 가게 문 앞으로 가 ‘폐점’이라고 적힌 팻말을 출입구 잘 보이는 위치에 내걸었다.
“페퍼민트 차야. 머리가 좀 개운해질 거야.”
“이렇게 아무 때나 문 닫아도 괜찮아요?”
“이게 왜 아무 때나야. 밀리가 와 있는 동안은 특별해. 이야기를 듣는 동안 방해받으면 안 되니 말이야.”
“시드. 지금 일하기 싫은 거죠?”
“하하하. 날도 더워지니 꾀부리고 싶어져. 좀 봐줘!”
아멜리아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그가 윙크했다. 골동품점 ‘붉은 서재’의 주인인 시드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의 연령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애쉬 브라운 헤어에 진한 올리브색 눈동자. 훤칠한 키에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이지만 골동품 가게 주인이라는 걸 티 내듯 늘 한 세대 전의 의상을 고집하는 통에 마을에서는 괴짜로 소문이 자자했다.
몇 년 전 시골 마을인 레이븐에 갑자기 나타난 한 청년이 가게를 매입하고 싶다며 돌아다녔다. 곧 그는 주인이 병으로 경영을 포기하다시피 한 다 망해 가던 서점을 인수했고, 약간의 내부 수리를 마친 뒤 ‘붉은 서재’라는 이름의 골동품점을 열었다.
시골 마을에 쓸데없이 골동품점이 웬 말이냐던 마을 사람들은 호기심에 하나둘 가게를 방문했고, 놀랍게도 진열된 상품 중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물건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는 사람들의 경험담은 입소문이 나서 다시 새로운 방문객들을 홀렸다.
유별난 상술을 사용하는 말솜씨 좋은 상인이 아닌데도 시드는 언제나 고객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꿰뚫어 보았고, 그 후에는 그저 조용히 그 물건 앞으로 길을 안내하는 것이 다여서 그에 대한 신기한 소문은 입을 타고 이웃 마을까지 흘러갔다.
가게가 자리를 잡은 이제는 먼 곳에서도 그의 가게를 찾아오는 단골들이 생겼을 정도였다.
“그래서? 어떻게 이 미녀를 잠재운 거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을 생각에 눈을 가늘게 뜬 시드가 아멜리아를 재촉했다.
“말도 마세요…….”
소녀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시드에게 오르골이 전해진 것은 이 주 정도 전의 일이었다. 먼 곳에서 ‘붉은 서재’를 찾아왔다는 이방인은 상아로 만들어진 골동품 오르골을 꺼내며 사연을 들려주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처녀 시절부터 간직한 물건인데 모친상을 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가 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마다 오르골을 돌려 보고 싶어 하던 아들은 기계를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았고, 그때마다 ‘작동에는 문제가 없지만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했다.
그렇게 속절없는 시간만 보내던 중 이런 문제는 레이븐에서 골동품 가게를 하는 시드니라는 남자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새벽 기차를 타고 달려왔다며 금액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꼭 고쳐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이리저리 상자를 훑어보던 시드는 비밀리에 아멜리아를 불렀고, 오르골은 소녀가 가져간 지 사흘 만에 완벽히 제 기능을 다 하는 예전의 상태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멜리아가 시드에게서 오르골을 받아 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소녀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었는데, 아주 측근의 몇 사람만이 그 사실을 알았다.
오르골을 받아 온 첫날, 소녀는 그 상자를 바라보며 혼잣말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오르골에 대해서 알아보는 건 내일로 하고, 일단 자야겠어.”
밤이 늦을수록 좋은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아멜리아는 늘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 나이대 아가씨들이 좋아하는 늦은 저녁의 로맨틱한 파티나 무도회 같은 것과도 연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기처럼 일찍 자는 버릇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불을 끄자마자 시작되었다.
‘흑…… 흑흑…….’
여자가 흐느끼는 소리에 눈을 뜬 아멜리아는 잠결에 자신이 헛것을 들었나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오싹한 울음소리에 팔에 소름이 돋은 걸 확인하고는 깊은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짐작 가는 곳이 있어 오르골을 내려 둔 곳을 바라보니 소리는 바로 그 근처에서 들려왔다.
‘흑흑…….’
“왜 울어요?”
말을 걸어도 듣지 못하는 듯 모습이 보이지 않는 여자는 서럽게 울고만 있었다. 아멜리아가 몇 번이나 말을 걸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여자는 밤새 울고 또 울고, 멈추지 않고 울었다.
대화를 시도해 보던 소녀는 결국 새벽녘이 되어서야 다른 방으로 베개를 들고 도망가서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주변에도 부모님의 취미에 영향을 받아 일찌감치 골동품에 눈을 뜬 친우들이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극소수였고 알렉스에게는 별 관심 없는 분야이기도 했다. 골동품은 눈이 높아질수록 상상을 초월하게 돈이 들어가는 취미였다. 그러나 그는 굳이 그런 비싼 취미에 빠지지 않더라도 관심을 쏟을 흥밋거리가 넘치는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군지도 모르는 남이 쓰던 오래된 것을 모은다는 점을 그는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한번은 지인의 집에서 몇백 년 전 선조였던 귀부인이 사용했다는 섬세한 세공의 머리빗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귀한 거라며 유리 케이스 안에 넣어 보관하는 걸 꺼내 보여 주었는데, 솔 사이에 그 부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카락이 그대로 끼어 있는 걸 발견한 알렉스는 질겁하며 그 물건을 바닥에 떨어뜨렸었다.
다행히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큰 실례를 범한 민망함에 저녁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던, 그에게는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교 실수의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에게 골동품이란 알면 알수록 그다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꺼림칙한 물건들이라는 인식이 커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붉은 서재’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가게 내부가 좀 궁금하긴 했지만 그래도 저곳에 갈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알렉스는 앞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다시 등받이에 기댔다.
마차는 마을의 작은 번화가를 지나, 본격적으로 넓은 평야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멜포드 매너 하우스로 가는 길은 원래 자갈이 깔린 좁은 오솔길로 되어 있어 마차로 가기에는 불편한 부분이 있었다. 교통이 편치 않은 것도 알렉스가 집에 돌아오기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였는데, 하인의 말대로 최근 길을 새로 다듬었는지 오늘은 그의 기억보다 흔들림이 적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드나드는데 힘들지 않겠다고 내심 기뻐하며 풍경을 응시하니 평원 저 너머부터 숲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릴 적에는 저 숲도 상당히 깊고 울창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담하니 꽤 귀여운 크기였다. 심심할 때 산책하기 좋겠다고 생각할 무렵 그의 시야 끝자락에 이질적인 장면이 잡혔다.
‘누구지?’
마을 사람들의 묘로 생각되는 비석이 나무 사이로 몇 개씩 흩뿌려지듯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기묘한 공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여름이 되어 한껏 잎을 키운 나무 그늘로 어둡게 가라앉은 그 공터에, 옅은 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성의 실루엣이 흔들렸다.
알렉스는 흠칫 놀라 주변을 살폈다. 햇살이 부드러움을 넘어 따갑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6월 말. 빛처럼 강한 그림자가 지는 계절에 저 작은 나무숲 사이만 썰렁했다. 마치 다른 계절을 옮겨 온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뙤약볕 한 줄기도 새어 들지 못하는 무거운 숲의 분위기에 눈을 크게 뜨고 그 인영을 바라보자, 우연인지 마차가 다가오는 것에 맞춰 여인의 그림자가 그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싹한 기분이 든 건 눈이 마주치던 때였다. 먼 거리에서 형체만 간신히 보이는 여자가 빙긋 웃은 것 같았다. 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알렉스는 그 기묘한 인영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서로 마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여자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오며 그가 탄 마차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느리다고 생각해 본 적 없던 마차의 속도가 지금은 원망스러울 정도로 더디게 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가까워질수록 여자의 입에 걸린 미소가 확실하게 보였는데, 그것은 목덜미의 털이 쭈뼛 설 정도로 소름 끼치는 웃음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를 보며 웃는 하얀 이가 당장에라도 물어뜯을 기세로 덤벼들 것만 같은 긴장감에 알렉스가 신경을 곤두세우던 순간, 마차는 여자가 잠겨 있는 숲을 스치고 지나갔다.
숲을 벗어나자 주박이 풀리듯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전신의 신경도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대체, 이게 무슨.’
빼앗겼던 시선의 자유를 되찾은 그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을 눌렀다. 깜박이지도 않고 뚫어지도록 한곳만 바라본 탓인지 피로감이 몰려왔다. 등받이에 닿은 부분이 축축해 옷 위를 더듬어 보니, 실제로는 채 몇십 초도 되지 않았을 시간 동안 흘린 식은땀으로 그의 등은 흠뻑 젖어 있었다.
빛과 어둠의 조화 속에서 본 그림자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후손을 환영하려던 조상의 마중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는 그것을 나무 그림자를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얀 이를 보았다고 생각한 것은 빛에 반사된 조약돌일 수도 있었다.
알렉스는 직접 목격한 것을 차마 믿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다른 적당한 이유를 찾고자 했다. 그가 최선을 다해 머리를 쥐어짜는 동안 그를 태운 마차는 멜포드가의 장원에 다다라 일렬로 심어진 인공적인 나뭇길 사이로 접어들었다.
딸랑딸랑.
골동품점 ‘붉은 서재’의 문에 달린 낡은 놋쇠 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유난히도 조용한 실내의 정적을 깨는 경망스러운 소리라 사실 그 종이 생각보다 작은 크기라는 걸 깨닫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알리는 종이 울렸지만, 손님을 맞으러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손님 역시, 주인이 나올 것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자신이 들고 있던 가방을 주섬주섬 탁자에 내려놓고 멋대로 손님용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러고는 장갑을 낀 손으로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것은 여성의 손에 올리기에는 조금 큰 크기의 상자형 오르골이었다. 상아로 만들어진 섬세한 세공이 들어간 상자지만 황변되어 노란색이 진해진 것이 시간이 흐른 태가 났다.
오르골을 손에 든 것은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는 소녀였다. 밝은 갈색 곱슬머리에 호기심 많은 동그란 눈매. 아기같이 말간 얼굴을 한 그녀는 지루한지 주변을 한참 둘러보다 오르골의 뚜껑을 열었다.
통, 통통, 통통통 하는 오르골의 태엽 튕기는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왈츠 음악이 흘러나왔다. 뚜껑 안쪽에는 거울도 달려 있어 오르골을 든 사람의 얼굴이 비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섬세한 예술 작품이었다.
상자 뒷면에는 누군가의 이름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살짝 만져 보는 소녀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음률에 맞춰 조용히 발을 까닥이는데 갑자기 뒤에서 “아, 이제 고쳐진 건가?”라고 묻는 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꺄악!”
“엇! 던지면 안 돼!”
깜짝 놀란 나머지 손이 미끄러져 하마터면 중요한 물건을 깰 뻔했던 아멜리아는 상대방을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의뢰품을 들고 있을 땐 놀라게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잖아요, 시드!”
“미안, 미안. 제대로 된 소리가 나기에 신기해서 그만.”
다시 놓칠세라 재빨리 시드에게 상자를 넘긴 아멜리아가 “떨어뜨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해요.”라며 입을 삐죽였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니까. 부서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함박웃음을 지은 시드가 저도 떨어뜨릴까 싶은지 물건을 재빨리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걸 사흘 만에 해결할 줄은 몰랐어. 기계적인 결함이 없는데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밀리를 떠올리기를 잘했지.”
“사흘씩이나 걸렸다고 해 주세요. 전 그동안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했거든요. 시간을 더 끌었다면 아마 제 손에 박살이 났을 거예요.”
“파손은 안 된다니까.”
큭큭, 목으로 웃는 소리를 내며 시드가 물품 보관 창고 뒤로 다시 사라졌다. 잠시 후 나타난 그의 손에는 두 개의 컵이 들려 있었다.
아멜리아 앞에 잔을 내려놓은 시드는 다시 부지런하게 가게 문 앞으로 가 ‘폐점’이라고 적힌 팻말을 출입구 잘 보이는 위치에 내걸었다.
“페퍼민트 차야. 머리가 좀 개운해질 거야.”
“이렇게 아무 때나 문 닫아도 괜찮아요?”
“이게 왜 아무 때나야. 밀리가 와 있는 동안은 특별해. 이야기를 듣는 동안 방해받으면 안 되니 말이야.”
“시드. 지금 일하기 싫은 거죠?”
“하하하. 날도 더워지니 꾀부리고 싶어져. 좀 봐줘!”
아멜리아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그가 윙크했다. 골동품점 ‘붉은 서재’의 주인인 시드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의 연령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애쉬 브라운 헤어에 진한 올리브색 눈동자. 훤칠한 키에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이지만 골동품 가게 주인이라는 걸 티 내듯 늘 한 세대 전의 의상을 고집하는 통에 마을에서는 괴짜로 소문이 자자했다.
몇 년 전 시골 마을인 레이븐에 갑자기 나타난 한 청년이 가게를 매입하고 싶다며 돌아다녔다. 곧 그는 주인이 병으로 경영을 포기하다시피 한 다 망해 가던 서점을 인수했고, 약간의 내부 수리를 마친 뒤 ‘붉은 서재’라는 이름의 골동품점을 열었다.
시골 마을에 쓸데없이 골동품점이 웬 말이냐던 마을 사람들은 호기심에 하나둘 가게를 방문했고, 놀랍게도 진열된 상품 중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물건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는 사람들의 경험담은 입소문이 나서 다시 새로운 방문객들을 홀렸다.
유별난 상술을 사용하는 말솜씨 좋은 상인이 아닌데도 시드는 언제나 고객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꿰뚫어 보았고, 그 후에는 그저 조용히 그 물건 앞으로 길을 안내하는 것이 다여서 그에 대한 신기한 소문은 입을 타고 이웃 마을까지 흘러갔다.
가게가 자리를 잡은 이제는 먼 곳에서도 그의 가게를 찾아오는 단골들이 생겼을 정도였다.
“그래서? 어떻게 이 미녀를 잠재운 거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을 생각에 눈을 가늘게 뜬 시드가 아멜리아를 재촉했다.
“말도 마세요…….”
소녀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드에게 오르골이 전해진 것은 이 주 정도 전의 일이었다. 먼 곳에서 ‘붉은 서재’를 찾아왔다는 이방인은 상아로 만들어진 골동품 오르골을 꺼내며 사연을 들려주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처녀 시절부터 간직한 물건인데 모친상을 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가 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마다 오르골을 돌려 보고 싶어 하던 아들은 기계를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았고, 그때마다 ‘작동에는 문제가 없지만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했다.
그렇게 속절없는 시간만 보내던 중 이런 문제는 레이븐에서 골동품 가게를 하는 시드니라는 남자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새벽 기차를 타고 달려왔다며 금액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꼭 고쳐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이리저리 상자를 훑어보던 시드는 비밀리에 아멜리아를 불렀고, 오르골은 소녀가 가져간 지 사흘 만에 완벽히 제 기능을 다 하는 예전의 상태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멜리아가 시드에게서 오르골을 받아 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소녀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었는데, 아주 측근의 몇 사람만이 그 사실을 알았다.
오르골을 받아 온 첫날, 소녀는 그 상자를 바라보며 혼잣말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오르골에 대해서 알아보는 건 내일로 하고, 일단 자야겠어.”
밤이 늦을수록 좋은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아멜리아는 늘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 나이대 아가씨들이 좋아하는 늦은 저녁의 로맨틱한 파티나 무도회 같은 것과도 연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기처럼 일찍 자는 버릇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불을 끄자마자 시작되었다.
‘흑…… 흑흑…….’
여자가 흐느끼는 소리에 눈을 뜬 아멜리아는 잠결에 자신이 헛것을 들었나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오싹한 울음소리에 팔에 소름이 돋은 걸 확인하고는 깊은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짐작 가는 곳이 있어 오르골을 내려 둔 곳을 바라보니 소리는 바로 그 근처에서 들려왔다.
‘흑흑…….’
“왜 울어요?”
말을 걸어도 듣지 못하는 듯 모습이 보이지 않는 여자는 서럽게 울고만 있었다. 아멜리아가 몇 번이나 말을 걸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여자는 밤새 울고 또 울고, 멈추지 않고 울었다.
대화를 시도해 보던 소녀는 결국 새벽녘이 되어서야 다른 방으로 베개를 들고 도망가서 눈을 붙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