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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둘째 날에는 낮부터 상자를 지켜봤지만, 흐느끼던 여인은 낮 동안에는 쉬기라도 하는지 아무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시드가 아멜리아에게 상자를 맡긴 건 탁월한 선택이지 싶었다. 오르골이 울지 않는 이유는 기계적 결함이 아닌, 다른 곳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명확해졌기 때문이었다.
상자는 낮 동안 조용하다가 해가 지고 아멜리아가 잠이 들려고 할 즈음이 되어서야 다시 울었다. 이날 밤 역시 소녀는 이리저리 달래 보며 여인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마치 들을 귀가 없는 것처럼 울기만 했다.
“그러니까, 계속 울지만 말고 이유를 설명해 주면 좋겠는데…….”
마냥 기다리는 건 생각보다 더 지루하고 짜증 나는 일이었다.
침묵하는 오르골을 앞에 두고 기다리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면 여인은 슬그머니 다시 울었고, 그래서 아예 졸린 것을 꾹 참고 이리저리 달래는 동안에는 또 들은 척도 하지 않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이 밤도 글렀다 싶은 기분을 강하게 주었다.
감기는 눈을 주체하지 못한 아멜리아는 전날보다 이른 자정 무렵 베개를 들고 다른 방으로 퇴근했다.
손님용 침대에서 단잠에 빠진 지 조금 지났을 즈음, 귓가에 다시 ‘흑……, 흑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나 가까이서 들리는지 차가운 숨소리마저 느껴질 것 같은 기분에 흠칫 놀란 아멜리아가 눈을 번쩍 뜨고 처음 본 것은 어둠 속에서 검은 드레스를 입고 서 있는 중년 여인의 얼굴이었다.
‘흑흑…….’
“꺄아악!”
비명을 지르며 일어난 아멜리아는 놀란 가슴을 누르며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다른 방까지 쫓아왔어, 세상에!”
말하라고 멍석 깔고 기다릴 때는 못 들은 척 무시해 놓고 또 혼자 버리고 나오는 것은 싫었던지, 유령은 상자가 없는 방에 나타나 아멜리아를 노려보며 울고 있었다. 원한 맺힌 눈으로 쏘아보면서, 한 손으로는 하얀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 모습까지는…… 하아아, 보여 주네. 고맙다고 해야 할지…….”
이런 일이 계속되다가는 심장마비로 쓰러질 날이 머지않았다고 절망한 그녀는 검은 옷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그날도 소녀를 바라보며 울기만 할 뿐이었다. 잠을 재울 생각이 없는 건지, 어디를 가도 쫓아오며 얼굴을 들이대는 통에 아멜리아는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다.
“안 되겠어. 우리 얘기 좀 하자고요. 대체! 나한테 왜 그래요!”
사흘째 되는 날 저녁, 역시 눈앞을 알짱대면서 보란 듯이 우는 여자에게 소녀는 소리를 질렀다. 눈을 감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자려고 눈을 감으면 감긴 눈꺼풀 안으로 영상이 스며들 듯 아멜리아의 각막에 제 모습을 투영시키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말 안 할 거면 어디로 좀 가든가! 자꾸 이러면 나도 의뢰고 뭐고 못 참아요……!”
빈말이 아니라는 듯 침대에서 일어난 소녀는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는 여자 앞에 오르골을 내밀며 “……부숴 버릴 거야.”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삼 일을 못 잔 소녀의 원한은 유령도 압도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 여자는 동요한 표정으로 아멜리아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기 시작했다.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얼른 하세요. 나 마음 변하기 전에.”
‘흑흑…….’
“던질 거야, 아니 고치지도 못하게 아예 태워서 재를 만들 거야.”
‘상스럽게…….’
“기가 막혀서!”
그제야 말문이 트인 유령은 ‘너 따위를 어떻게 믿느냐.’라는 눈길을 주기는 해도 담보로 잡힌 오르골이 신경 쓰이는지 그 이상 심술은 부리지 않았다. 대신, 있는 대로 싫은 표정을 지어 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재혼한 남편이 그 오르골을 새 부인에게 준 것이 싫었다더군요.”
“그랬군.”
“아들에게 물려주기를 원하나 봐요. 아예 아들네 집으로 가져갔으면 한다고.”
“응, 응.”
여전히 싱글대는 얼굴로 아멜리아의 이야기를 듣던 시드는 문제의 상아 오르골을 준비된 상자에 담으며 “또 한 건 해결했네.” 하고 웃었다.
“전달할 말은 전했으니, 전 이제 정말 자러 갈게요. 잠을 못 자서 너무 피곤해요.”
“기다려, 마차로 데려다줄게.”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양하기 너무 힘든 유혹이네요. 정말 졸리거든요.”
“저번처럼 비틀거리면서 가다 말고 볕 좋은 어딘가에 쓰러져 누우면 일을 맡기는 나도 곤란해.”
“아이, 그게 언제 적 이야긴데. 이젠 정말 안 그럴 거란 말이어요.”
시드가 떠올린 옛날이야기에 당황한 아멜리아가 손가락을 꼼질거리다 스커트 자락을 꼭 쥐었다. 부끄러운지 아직 아기처럼 보송보송한 볼이 분홍색 장미꽃처럼 피어났다.
“이렇게 귀여운데 마을 남자들은 대체 눈이 어디 달렸는지.”
“네?”
“아무것도 아냐. 가게 앞에서 기다려. 말 준비해서 올 테니까.”
아멜리아는 그가 말한 대로 ‘붉은 서재’ 정문 앞에서 시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햇볕이 뜨거워 올라오는 지열에 몸이 노곤해지니 졸음이 더 심해졌다. 모자를 쓴 터라 아무도 모르겠지 싶어 잠시 눈을 감고 있으려는데 바로 코앞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야, 못난이. 사람이 부르면 대답을 해라.”
“어?”
퍼뜩 놀라 눈을 떠 보니 그녀 앞에 누군가의 발이 놓여 있었다.
“시드?”
소녀는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코앞에 서 있던 건 승마 바지에 멜빵을 맨, 소녀보다 조금 어린 나이대의 소년이었다.
기다리던 사람이 아닌지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뜻밖의 이름으로 불린 소년은 기분이 상했는지 “이 거리에서 어떻게 그런 노친네랑 헛갈릴 수가 있냐? 너 안경 써야 하는 거 아니냐? 못생겼는데 안경까지 쓰면 정말 평생 결혼도 못 하겠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가브리엘?”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본 아멜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곧 방긋 웃었다. 가브리엘은 열여섯인 그녀보다 네 살 어린 열두 살의 소년으로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이 답답아! 남이 화를 낼 때는 웃으면 안 된다는 말 못 들었어?”
“가브리엘 왜 화났는데?”
“더운데 널 보니까 울화통이 터져서 그래! 답답하니까 거기서 멍하게 서 있지 말고 꺼지라고!”
“하지만…….”
당황한 표정으로 소년을 보며 말을 고르던 아멜리아는 그 기세에 눌려 결국 입을 다물었다. 금발의 파란 눈, 천사 같은 외모의 소년은 어째서인지 아멜리아를 볼 때마다 시비를 걸어왔는데, 소녀는 그래도 그를 좋아해서 만날 때마다 반겼다.
“조그만 게 빽빽 아주 시끄러워 죽겠네. 남의 가게 앞에서 소리 지르지 마라. 영업 방해로 경찰 부르기 전에.”
“시드!”
“나왔구나, 악의 우두머리! 귀신들의 두령! 마녀와 한패!”
마차를 끌고 온 시드를 향해 가브리엘이 힘차게 소리 질렀다.
“꺼지라고. 너야말로 가서 레이디를 대하는 예절이나 더 배우고 와라.”
시드는 마차 위에 앉은 채 팔을 뻗어 쥐고 있던 말채찍의 손잡이 부분으로 소년의 이마를 쿡 밀었다.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소년이 그에게 덤벼들려 했지만, 팔 길이가 짧아 그 파닥거리는 공격 범위가 시드가 앉아 있는 곳까지 닿지 않았다.
애잔한 표정으로 그걸 내려다보던 시드가 일어나 아멜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녀를 마차에 태운 뒤 “그리고.”라고 운을 띄웠다.
“아멜리아가 결혼하는 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데려갈 사람 있으니 굳이 걱정해 주지 않아도 돼. 행여 너한테 기회가 갈 일은 절대 없으니까, 일찌감치 포기하시지.”
“뭐라고?”
가브리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하하하!” 하고 악당처럼 과장되게 웃은 시드가 투레질하는 말을 몰았다. 움직이기 시작한 마차의 흙먼지가 가브리엘이 있는 곳까지 부옇게 떠올랐다.
“안녕, 가브리엘. 또 봐.”
거리에서 큰 소리로 다투는 두 사람 탓에 민망해진 아멜리아가 작게 손을 흔들며 소년에게 인사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얼빠진 표정으로 잠시 닭 쫓던 개가 된 기분을 느끼던 가브리엘이 흠칫 정신을 차리고 그들의 뒤통수에다 소리를 빽 질렀다.
“야! 누가 그런 못난이를! 시력도 나쁘고! 멍청하고!”
난 멍한 여자는 절대 취향이 아니야……! 작은 주먹이 하얗게 되도록 꽉 쥔 가브리엘이 화를 냈다.
저런 건 줘도 사양이었다. 무슨 일을 칠지 몰라 조바심 나고 손이 많이 가는, 연하인 저보다도 더 철없고 위태로워 보이는 아멜리아보다는 어른스럽고 지적인 여성이 훨씬 더 제 취향이기 때문이었다.

♠ ♠ ♠


“시드, 너무한 거 아니에요?”
“응? 뭘?”
시원한 초여름의 바람을 맞으며 마차를 모는 시드는 팔을 걷은 셔츠에 바지, 그리고 둥근 헌팅캡을 쓰고 있어 마치 아가씨를 모시는 젊은 마부나 시골 청년 같아 보였다. 아니, 시드가 이 소리를 들으면 “레이븐은 시골이니 나도 시골 청년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말했을 테지만 말이다.
“가브리엘 말이어요. 아직 어린데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버르장머리 없는 꽃나무들은 원래 싹수……, 아니 작을 때부터 가지치기를 잘해 놔야 예쁘게 커.”
싱긋 웃으며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시드에게 “정말……, 어떻게 열두 살 아이랑 똑같이 싸울 생각이 드는 거예요?”라고 아멜리아가 중얼거렸다.
“그 꼬맹이는 밀리를 볼 때마다 시비를 거는 것 같던데, 뭔가 잘못한 거 있어?”
“……음, ……으으음. 저도 그걸 고민해 봤는데, 솔직히 모르겠어요. 지난번에 가브리엘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했는데…….”
“꼬마가 뭐래?”
“설명은 안 해 주고 화만 더 냈어요.”
“하하하하.”
멋쩍은 듯 눈만 깜박거리던 아멜리아의 대답에 시드가 호쾌하게 웃었다. 그 꼬맹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는데도 효과가 하나도 없다니, 거참 쌤통이라고 생각하던 그는 문득 떠오른 궁금증을 소녀에게 물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꼬마 놈을 왜 그렇게 귀여워하는 거야? 받아 주니까 기어오르는 거잖아.”
“아, 그, 그건. 제가 동생도 없고……, 이 동네에서 저에게 말 걸어 주는 건 그래도 가브리엘밖에 없다 보니까…….”
“…….”
쯧, 괜한 걸 물었다고 생각한 시드가 혀를 찼다.
아멜리아 샌더즈는 인근에서도 알아주는 명망 높은 가문의 막내딸로, 집안이나 권력, 자산으로도 어디 한군데 뒤지지 않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덕망 있는 샌더즈가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막내로 태어난 그녀는 온 가족의 넘치는 사랑을 받았으나 그것은 집안 내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시드가 처음 마을에 이사를 왔을 때, 레이븐의 주민들은 시골 사람들 특유의 강한 경계심을 보이며 외지에서 온 그와 거리를 두었다. 물론 긴장감 쌈 싸 먹는 시드의 특별한 친화력으로 그들의 두꺼운 벽을 깨고 친해지는 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지만, 초반 한동안은 그조차도 투명인간 취급을 받으며 살아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미술 도구를 사러 마을에 나왔던 아멜리아를 보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녀와 스쳐 지나갔던 것이 전부였지만 곧이어 마을 청년들이 누군가에게 몹쓸 소리를 하는 것이 귀에 들어왔다.
“네가 마을엔 왜 온 거야, 해가 지고서야 돌아다니는 줄 알았는데 대낮에도 멀쩡하네?”
“여기엔 빗자루 타고 왔나? 마녀들은 빗자루를 어디에 두지? 너희에겐 말이랑 같은 거니까 마구간에 모셔 두든가?”
“심령현상, 너 재수 없으니 빨리 집에 가라.”
하하하하, 듣기 거북한 모욕에 화가 난 시드가 뒤를 돌아보니 폭언을 듣는 상대는 조금 전 자신을 스쳐 지나간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