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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아직 어린 티를 벗어나지 못한 소녀는 차분한 색상이지만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고, 크림색의 실크 리본이 달린 보닛을 쓴 모습이 인형처럼 귀여워서 눈여겨보았던 아가씨였다.
당황한 소녀가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그는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사과를 고르다 말고 그쪽으로 가려는 시드의 어깨를 청과물 가게의 주인이 잡았다.
“뭡니까?”
“……그냥 두게나.”
“비겁한 새끼들이 무리 지어 여자아이를 놀리는 걸 그냥 지켜보라고요?”
분노한 시드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아가씨를 괴롭히던 청년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졌다.
“이건 또 뭐야?”
“사리 분별 못 하는 놈이 누군가 했더니, 새로 이사 온 얼뜨길세.”
“모르면 잠자코 구석에 처박혀 있어.”
다수의 힘을 믿고 건들거리는 마을 청년들에게 시드가 경고했다.
“후회하는 일 생기기 전에 그 입들 닥쳐라.”
“뭐라고? 이게 무서운 줄도 모르고!”
“함부로 끼어들지 말란 말이야!”
패기 넘치게 덤벼든 청년들은 곧 빙글빙글 웃으며 두들겨 패는 시드에게 혼쭐이 나야 했다. 마른 체격이라 우습게 보이기 쉬운 시드는 시비가 걸리는 일이 많아 의외로 주먹을 꽤 써야 했던 적이 있었다. 그가 체력 단련을 하다 재미가 붙어 시합에도 나간 적이 있는 경험 풍부한 아마추어 복서이기도 하다는 걸 청년들은 몰랐다.
영 엉성한 그들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급소만 공격하는 시드는 다른 이들에 비해 움직임이 적어 별로 지치지 않은 상태로 청년들의 정신을 쏙 빼 놓았고, 그즈음 아멜리아를 마중 나온 샌더즈가의 젊은 하인 쥴스까지 합세한 덕에 기세는 시드 쪽으로 확실하게 기울고 말았다.
수습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 아가씨에게 찝쩍거리는 놈은 모두 바지를 벗겨서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두겠다.”라는 쥴스의 협박까지 던져지자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청년들은 비겁한 자들의 명대사인 “어디 두고 보자.”라는 말을 남기고 뿔뿔이 흩어졌다.
“무리 지어 있지 않으면 덤비지도 못하는 것들이 무서울 것 같아? 어디 언제 다시 보게 되는지 나야말로 두고 봐 주지!”
이마에 난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시드가 소리를 질렀다. 그 씩씩한 기세에 흠칫 놀란 젊은이들은 뒤도 보지 않고 꽁지가 빠져라 사라졌다. 앞머리에 맺힌 땀을 털기 위해 손을 올리려는 순간, 눈앞에 하얗고 고운 레이스 손수건이 내밀어졌다.
“이, 이걸로 닦으세요.”
긴장한 표정의 소녀가 조심스레 내민 손수건을 바라보며 시드는 어딘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손수건에서인지 소녀에게서 나는 건지 알 수 없는 맑은 꽃향기를 맡자니 조금 전까지 먼지 구덩이에서 뒹굴다시피 싸운 자신의 상태가 신경 쓰였다. 그는 조심스레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말했다.
“이렇게 예쁜 손수건에 먼지투성이인 제 땀을 닦기가 아깝네요.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부드럽게 거절하는 그의 한마디에 소녀가 손을 움직여 이마의 땀을 직접 닦아 주었다.
“아가씨!”
하인 청년이 나무라는 투로 말렸지만 소녀는 긴장되는지 필사적인 표정으로 꼴깍,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손수건이란 이럴 때 쓰기 위한 물건인 걸요.”라며 그의 손에 손수건을 살며시 쥐여 주었다.
“그래요, 이미 닦아 더러워졌으니 빌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아니에요.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누가 도와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는 듯 소녀는 뚫어져라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건지 몰랐던 시드는 의아한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다가 발치께에 스케치북이 떨어진 것을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이걸 떨어뜨리셨어요.”
“아.”
소녀에게 내민 스케치북에서 스르륵, 몇 장의 그림이 흘러내렸다.
“어라. 이런, 죄송합니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들을 주워 먼지를 털던 그의 시선은 의도치 않게 종이 위의 그림에서 멈췄다.
“…….”
목탄으로 그린 스케치들이었는데 하나같이 기묘한 그림들이었다. 그가 평소 보지 못했던 형상들을 마치 실존하는 것처럼 그려 둔 환상화들이었다.
땅에서 무릎 위만 나온 채 웃고 있는 신랑과 신부라든가 천장에 거꾸로 붙어 누군가의 은촛대를 훔치는 남자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시드의 시선을 끈 그림은 귀부인의 초상화에서 뻗어 나오는 두 개의 하얀 손이었다. 가느다란 손목에 보석 팔찌가 채워져 있어 이것이 그 귀부인의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가 있었다.
엄청난 그림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소녀가 자신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이 소녀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그녀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림을 돌려받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작은 손이 잘게 떨리고 있는 걸 보고 그는 깨달았다. 아무래도 이것이 이 귀여운 아가씨가 마을 사람들의 눈 밖에 난 이유일 거라는 걸.
“멋진 그림이네요. 저 이거 하나 살 수 있나요?”
예상외의 질문에 간격이 생겼다. 동그란 눈이 쉼 없이 깜박이다가 한참 후에야 “네?”라고 되묻는다.
“이게 가장 마음에 들어요. 꼭 가지고 싶은데, 얼마 정도면 팔아 주실 건가요?”
“……예?”
초상화에서 하얗고 가느다란 아스파라거스 같은 팔이 뻗어져 나오는 그림을 가리키며 가격을 묻자, 소녀는 이해하지 못한 듯 다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그림 좋아하거든요. 아, 너무 갑작스러운가? 여기, 제 명함입니다. 생각해 보시고 꼭 답변 주세요. 기다릴 테니.”
‘붉은 서재’라는 이름이 적힌 명함은 지난주에 그가 인쇄소가 있는 이웃의 큰 도시까지 나가 만들어 온 따끈따끈한 새것이었다. 첫 명함을 귀여운 소녀에게 주다니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시드니 크로프트. 시드라고 불러 주면 좋겠어요.”
“저, 저는 아멜리아 샌더즈예요. 펴, 편하게 불러 주세요.”
목과 어깨에 힘이 가득 들어간 채로 말까지 더듬으며 자신의 이름을 밝힌 소녀를 보고 시드는 활짝 웃었다.
“그럼 밀리라고 부를게요. 밀리, 시간 괜찮으시다면 목요일에 차 마시러 가게에 오겠어요?”
“아, 네, 네! 꼭 갈게요!”
흔들리던 소녀의 눈동자에 빛이 들었다. 활짝 피어나는 미소에 시드의 시원한 눈매도 같이 접혔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 ♠ ♠
소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천성이 게으른 자신이 누군가의 불의에 참견한 것은 그날의 변덕이었다.
평소 귀찮다고 무시하고 지나치던 그였지만 그날만큼은 어쩐지 머리끝을 잡아당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한 번 더 돌아보았고, 그 덕분에 작은 소녀와 만나게 되었다. 그것을 인연으로 친해지게 된 아멜리아는 지금 자신의 사업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시드? 갑자기 왜 조용해졌어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던 시드가 침묵하자 어리둥절해진 아멜리아가 그를 불렀다.
“아냐. 내가 밀리를 만나서 운이 참 좋다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한다며 소녀가 웃었다.
“밀리, 그때 나에게 준 그림 기억 나?”
“그림?”
“그래. 퍼트리샤 백작 부인의 초상화.”
“아……, 네! 처음 만났을 때 드렸던.”
“내가 한 말도 기억해?”
“시드가? 음― 뭐였더라. 아, 그건가요? 그 그림은 더 이상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던거?”
“그래. 그 약속 지키고 있지?”
“네. 그 그림을 소유한 윌리엄 씨의 허락으로 공공장소에서 전시되고 있다나 봐요. 지금은 교회 건물 안쪽 화랑에서 유료 전시 중이라고…….”
“뭐 그 정도면 특별한 일 아니면 갈 일은 없겠네.”
다행이라고 웃는 시드의 뒤에서 아멜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림이 마음에 들어 갖고 싶다고 했던 사람이면서도, 그녀가 그 그림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비슷한 말을 하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당황하며 얼버무렸던 기억이 나,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물어봐도 좋을까 망설이다가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시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왔다.”
“아!”
생각에 빠져 집에 도착하였는지도 몰랐던 아멜리아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마부석에서 훌쩍 뛰어내린 시드가 손을 내밀어 소녀를 에스코트했다.
“현관까지 데려다주고 싶지만 그러면 너희 집사며 쥴스가 쫓아 나와서 청소도 안 한 지저분한 마차에 소중한 아가씨를 태웠다고 엄청나게 잔소리할 테니까, 나는 여기서 도망갈게.”
“그럴 리가 있나요. 저 혼자 나온 걸 뭐라고 하면 몰라도.”
“그런가? 그러고 보니, 왜 혼자 왔지?”
“……신경 쓰이는 게 좀 있어서, 숲에도 들러 보고 겸사겸사 걸었어요. 졸음도 쫓을 겸.”
“그러다가 아무 데서나 잠이 들까 걱정이야. 조심해야지.”
“시드~ 그거 정말 그때 한 번뿐이었다니까요! 무, 물론 졸려서 좀 비틀대긴 했어도 전혀 문제없었다고요.”
누가 들으면 자주 있는 일인 줄 알겠다며 아멜리아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 토라진 표정에 “그래, 그래.” 하고 장난스럽게 소녀의 모자를 푹 더 깊이 씌우고 토닥거리던 시드가 마차에 올랐다.
“새로 일 생기면 연락할 테니까, 그 전이라도 심심하면 놀러 와.”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팔랑팔랑, 손을 흔든 아멜리아는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을 못 잤다더니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느리게 걷는 모습이 영 위태로웠다.
불안한 마음에 차마 떠나지 못하고 소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뒤에야 시드는 마차를 움직였다.
본인은 극구 부정했지만 저 상태를 봐서는 아마도 현관문을 통과하는 대로 쓰러져 잠이 들 터였다. 소녀를 발견한 샌더즈가의 고용인들이 놀라 한바탕 소란을 일으킬 것을 생각하니 재빨리 튀기를 잘했다 싶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웅장한 저택의 노집사는 평소에는 온화해도 한번 잔소리가 시작되면 끝을 모른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자신도 몇 번 당해 본 다음부터는 진저리를 치고 그를 피해 다녔는데, 시드가 아무리 아멜리아를 귀여워해도 제 발로 호랑이 입까지 걸어 들어가는 건 되도록이면 사양하고 싶었다.
도리에는 맞지 않지만, 아가씨를 현관 입구에서 좀 먼 곳에서 내려 주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그는 기지개를 켰다.
“……누구지?”
샌더즈가의 사유지를 막 벗어난 지점에서 시드는 언덕 위에 서 있는 낯선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 근방에서 보기 힘든 세련된 복장을 한, 검은 머리의 젊은 남자였다. 말을 타고 산책이라도 나왔는지 고삐를 쥐고 주변을 훑어보고 있었다.
느긋한 표정과 행동거지가 길을 잃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가 낯설고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고 있어서 잠시 놀러 온 이방인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이 근처에서 보기 힘든 타입이네.’
단정하게 빗어 넘긴 검은 머리에 셔츠의 단추도 끝까지 다 채운 깔끔함이 빈틈없는 인상을 주는 젊은 도련님이었다. 이 정도 거리면 아까 자신과 아멜리아도 보았을 테니 자신은 둘째 치고 아멜리아를 아는 사람이라면 분명 말을 걸었을 터였다.
몰려다니기 좋아하는 멍청한 동네 청년들이 가끔 소녀를 괴롭히기는 하지만 저 정도 차려입은 귀족 청년이 숙녀에게 그런 몰상식한 짓을 할 리도 없으니, 그가 조용히 있던 건 그저 서로 모르는 사이였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시드는 생각했다.
어느 집에 손님이 온 건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마차를 몰았다.
아직 어린 티를 벗어나지 못한 소녀는 차분한 색상이지만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고, 크림색의 실크 리본이 달린 보닛을 쓴 모습이 인형처럼 귀여워서 눈여겨보았던 아가씨였다.
당황한 소녀가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그는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사과를 고르다 말고 그쪽으로 가려는 시드의 어깨를 청과물 가게의 주인이 잡았다.
“뭡니까?”
“……그냥 두게나.”
“비겁한 새끼들이 무리 지어 여자아이를 놀리는 걸 그냥 지켜보라고요?”
분노한 시드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아가씨를 괴롭히던 청년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졌다.
“이건 또 뭐야?”
“사리 분별 못 하는 놈이 누군가 했더니, 새로 이사 온 얼뜨길세.”
“모르면 잠자코 구석에 처박혀 있어.”
다수의 힘을 믿고 건들거리는 마을 청년들에게 시드가 경고했다.
“후회하는 일 생기기 전에 그 입들 닥쳐라.”
“뭐라고? 이게 무서운 줄도 모르고!”
“함부로 끼어들지 말란 말이야!”
패기 넘치게 덤벼든 청년들은 곧 빙글빙글 웃으며 두들겨 패는 시드에게 혼쭐이 나야 했다. 마른 체격이라 우습게 보이기 쉬운 시드는 시비가 걸리는 일이 많아 의외로 주먹을 꽤 써야 했던 적이 있었다. 그가 체력 단련을 하다 재미가 붙어 시합에도 나간 적이 있는 경험 풍부한 아마추어 복서이기도 하다는 걸 청년들은 몰랐다.
영 엉성한 그들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급소만 공격하는 시드는 다른 이들에 비해 움직임이 적어 별로 지치지 않은 상태로 청년들의 정신을 쏙 빼 놓았고, 그즈음 아멜리아를 마중 나온 샌더즈가의 젊은 하인 쥴스까지 합세한 덕에 기세는 시드 쪽으로 확실하게 기울고 말았다.
수습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 아가씨에게 찝쩍거리는 놈은 모두 바지를 벗겨서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두겠다.”라는 쥴스의 협박까지 던져지자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청년들은 비겁한 자들의 명대사인 “어디 두고 보자.”라는 말을 남기고 뿔뿔이 흩어졌다.
“무리 지어 있지 않으면 덤비지도 못하는 것들이 무서울 것 같아? 어디 언제 다시 보게 되는지 나야말로 두고 봐 주지!”
이마에 난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시드가 소리를 질렀다. 그 씩씩한 기세에 흠칫 놀란 젊은이들은 뒤도 보지 않고 꽁지가 빠져라 사라졌다. 앞머리에 맺힌 땀을 털기 위해 손을 올리려는 순간, 눈앞에 하얗고 고운 레이스 손수건이 내밀어졌다.
“이, 이걸로 닦으세요.”
긴장한 표정의 소녀가 조심스레 내민 손수건을 바라보며 시드는 어딘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손수건에서인지 소녀에게서 나는 건지 알 수 없는 맑은 꽃향기를 맡자니 조금 전까지 먼지 구덩이에서 뒹굴다시피 싸운 자신의 상태가 신경 쓰였다. 그는 조심스레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말했다.
“이렇게 예쁜 손수건에 먼지투성이인 제 땀을 닦기가 아깝네요.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부드럽게 거절하는 그의 한마디에 소녀가 손을 움직여 이마의 땀을 직접 닦아 주었다.
“아가씨!”
하인 청년이 나무라는 투로 말렸지만 소녀는 긴장되는지 필사적인 표정으로 꼴깍,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손수건이란 이럴 때 쓰기 위한 물건인 걸요.”라며 그의 손에 손수건을 살며시 쥐여 주었다.
“그래요, 이미 닦아 더러워졌으니 빌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아니에요.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누가 도와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는 듯 소녀는 뚫어져라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건지 몰랐던 시드는 의아한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다가 발치께에 스케치북이 떨어진 것을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이걸 떨어뜨리셨어요.”
“아.”
소녀에게 내민 스케치북에서 스르륵, 몇 장의 그림이 흘러내렸다.
“어라. 이런, 죄송합니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들을 주워 먼지를 털던 그의 시선은 의도치 않게 종이 위의 그림에서 멈췄다.
“…….”
목탄으로 그린 스케치들이었는데 하나같이 기묘한 그림들이었다. 그가 평소 보지 못했던 형상들을 마치 실존하는 것처럼 그려 둔 환상화들이었다.
땅에서 무릎 위만 나온 채 웃고 있는 신랑과 신부라든가 천장에 거꾸로 붙어 누군가의 은촛대를 훔치는 남자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시드의 시선을 끈 그림은 귀부인의 초상화에서 뻗어 나오는 두 개의 하얀 손이었다. 가느다란 손목에 보석 팔찌가 채워져 있어 이것이 그 귀부인의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가 있었다.
엄청난 그림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소녀가 자신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이 소녀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그녀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림을 돌려받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작은 손이 잘게 떨리고 있는 걸 보고 그는 깨달았다. 아무래도 이것이 이 귀여운 아가씨가 마을 사람들의 눈 밖에 난 이유일 거라는 걸.
“멋진 그림이네요. 저 이거 하나 살 수 있나요?”
예상외의 질문에 간격이 생겼다. 동그란 눈이 쉼 없이 깜박이다가 한참 후에야 “네?”라고 되묻는다.
“이게 가장 마음에 들어요. 꼭 가지고 싶은데, 얼마 정도면 팔아 주실 건가요?”
“……예?”
초상화에서 하얗고 가느다란 아스파라거스 같은 팔이 뻗어져 나오는 그림을 가리키며 가격을 묻자, 소녀는 이해하지 못한 듯 다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그림 좋아하거든요. 아, 너무 갑작스러운가? 여기, 제 명함입니다. 생각해 보시고 꼭 답변 주세요. 기다릴 테니.”
‘붉은 서재’라는 이름이 적힌 명함은 지난주에 그가 인쇄소가 있는 이웃의 큰 도시까지 나가 만들어 온 따끈따끈한 새것이었다. 첫 명함을 귀여운 소녀에게 주다니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시드니 크로프트. 시드라고 불러 주면 좋겠어요.”
“저, 저는 아멜리아 샌더즈예요. 펴, 편하게 불러 주세요.”
목과 어깨에 힘이 가득 들어간 채로 말까지 더듬으며 자신의 이름을 밝힌 소녀를 보고 시드는 활짝 웃었다.
“그럼 밀리라고 부를게요. 밀리, 시간 괜찮으시다면 목요일에 차 마시러 가게에 오겠어요?”
“아, 네, 네! 꼭 갈게요!”
흔들리던 소녀의 눈동자에 빛이 들었다. 활짝 피어나는 미소에 시드의 시원한 눈매도 같이 접혔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소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천성이 게으른 자신이 누군가의 불의에 참견한 것은 그날의 변덕이었다.
평소 귀찮다고 무시하고 지나치던 그였지만 그날만큼은 어쩐지 머리끝을 잡아당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한 번 더 돌아보았고, 그 덕분에 작은 소녀와 만나게 되었다. 그것을 인연으로 친해지게 된 아멜리아는 지금 자신의 사업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시드? 갑자기 왜 조용해졌어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던 시드가 침묵하자 어리둥절해진 아멜리아가 그를 불렀다.
“아냐. 내가 밀리를 만나서 운이 참 좋다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한다며 소녀가 웃었다.
“밀리, 그때 나에게 준 그림 기억 나?”
“그림?”
“그래. 퍼트리샤 백작 부인의 초상화.”
“아……, 네! 처음 만났을 때 드렸던.”
“내가 한 말도 기억해?”
“시드가? 음― 뭐였더라. 아, 그건가요? 그 그림은 더 이상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던거?”
“그래. 그 약속 지키고 있지?”
“네. 그 그림을 소유한 윌리엄 씨의 허락으로 공공장소에서 전시되고 있다나 봐요. 지금은 교회 건물 안쪽 화랑에서 유료 전시 중이라고…….”
“뭐 그 정도면 특별한 일 아니면 갈 일은 없겠네.”
다행이라고 웃는 시드의 뒤에서 아멜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림이 마음에 들어 갖고 싶다고 했던 사람이면서도, 그녀가 그 그림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비슷한 말을 하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당황하며 얼버무렸던 기억이 나,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물어봐도 좋을까 망설이다가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시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왔다.”
“아!”
생각에 빠져 집에 도착하였는지도 몰랐던 아멜리아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마부석에서 훌쩍 뛰어내린 시드가 손을 내밀어 소녀를 에스코트했다.
“현관까지 데려다주고 싶지만 그러면 너희 집사며 쥴스가 쫓아 나와서 청소도 안 한 지저분한 마차에 소중한 아가씨를 태웠다고 엄청나게 잔소리할 테니까, 나는 여기서 도망갈게.”
“그럴 리가 있나요. 저 혼자 나온 걸 뭐라고 하면 몰라도.”
“그런가? 그러고 보니, 왜 혼자 왔지?”
“……신경 쓰이는 게 좀 있어서, 숲에도 들러 보고 겸사겸사 걸었어요. 졸음도 쫓을 겸.”
“그러다가 아무 데서나 잠이 들까 걱정이야. 조심해야지.”
“시드~ 그거 정말 그때 한 번뿐이었다니까요! 무, 물론 졸려서 좀 비틀대긴 했어도 전혀 문제없었다고요.”
누가 들으면 자주 있는 일인 줄 알겠다며 아멜리아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 토라진 표정에 “그래, 그래.” 하고 장난스럽게 소녀의 모자를 푹 더 깊이 씌우고 토닥거리던 시드가 마차에 올랐다.
“새로 일 생기면 연락할 테니까, 그 전이라도 심심하면 놀러 와.”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팔랑팔랑, 손을 흔든 아멜리아는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을 못 잤다더니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느리게 걷는 모습이 영 위태로웠다.
불안한 마음에 차마 떠나지 못하고 소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뒤에야 시드는 마차를 움직였다.
본인은 극구 부정했지만 저 상태를 봐서는 아마도 현관문을 통과하는 대로 쓰러져 잠이 들 터였다. 소녀를 발견한 샌더즈가의 고용인들이 놀라 한바탕 소란을 일으킬 것을 생각하니 재빨리 튀기를 잘했다 싶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웅장한 저택의 노집사는 평소에는 온화해도 한번 잔소리가 시작되면 끝을 모른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자신도 몇 번 당해 본 다음부터는 진저리를 치고 그를 피해 다녔는데, 시드가 아무리 아멜리아를 귀여워해도 제 발로 호랑이 입까지 걸어 들어가는 건 되도록이면 사양하고 싶었다.
도리에는 맞지 않지만, 아가씨를 현관 입구에서 좀 먼 곳에서 내려 주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그는 기지개를 켰다.
“……누구지?”
샌더즈가의 사유지를 막 벗어난 지점에서 시드는 언덕 위에 서 있는 낯선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 근방에서 보기 힘든 세련된 복장을 한, 검은 머리의 젊은 남자였다. 말을 타고 산책이라도 나왔는지 고삐를 쥐고 주변을 훑어보고 있었다.
느긋한 표정과 행동거지가 길을 잃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가 낯설고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고 있어서 잠시 놀러 온 이방인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이 근처에서 보기 힘든 타입이네.’
단정하게 빗어 넘긴 검은 머리에 셔츠의 단추도 끝까지 다 채운 깔끔함이 빈틈없는 인상을 주는 젊은 도련님이었다. 이 정도 거리면 아까 자신과 아멜리아도 보았을 테니 자신은 둘째 치고 아멜리아를 아는 사람이라면 분명 말을 걸었을 터였다.
몰려다니기 좋아하는 멍청한 동네 청년들이 가끔 소녀를 괴롭히기는 하지만 저 정도 차려입은 귀족 청년이 숙녀에게 그런 몰상식한 짓을 할 리도 없으니, 그가 조용히 있던 건 그저 서로 모르는 사이였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시드는 생각했다.
어느 집에 손님이 온 건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마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