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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산책할 겸 특별한 목적지도 없이 말을 타고 나온 알렉스는 곧 동네 지형이 그리 바뀌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다.
어릴 적 다니던 길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가며 추억에 젖어 있는데, 문득 자신이 애용하던 길이 생각나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몰아 보니 커다란 저택이 보이는 언덕에 도착했다.
“저기는……, 샌더즈 하우스였나?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정중앙의 입구에는 철재로 만들어진 커다란 아치형 문이 자리했고 그 맨 윗부분에는 가문의 문장이 크게 달려 있어 그곳이 샌더즈가의 것임을 알렸다.
게이트 주변으로는 화려한 문양의 철재로 된 담이 둘리어 있고 그 사이를 통해 보이는 정원에는 짧게 다듬어진 잔디가 깔려 시야가 탁 트이는 정원으로 가꾸어져 있었다.
“여기 정원사는 편하겠네. 우리 집은 어머니가 화려하게 꾸미는 걸 좋아하셔서 철마다 고생이라고 하던데.”
언덕 위에서 샌더즈 저택을 내려다보던 알렉스는 정원과 연결되는 입구에 낡은 마차 한 대가 멈추는 것을 보았다. 훔쳐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 일이라는 건 알았지만, 혹시 아는 얼굴이라도 발견할까 싶어 마차에서 내리는 젊은 남녀의 모습을 응시하던 그는 그제야 소녀가 자신이 어릴 적 함께 놀던 아멜리아라는 걸 깨달았다.
반가운 마음에 언덕을 내려가려던 그는 곧 그녀와 함께 있는 청년이 밝게 웃으며 그녀의 모자를 만지다가 머리를 쓰다듬는 걸 보았다.
‘이런.’
연인들의 밀회를 훔쳐본 것 같은 죄책감에 그는 내려가려던 것을 멈추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지 현관까지 아주 천천히 걸어가는 아멜리아를 바라보며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하긴, 그가 열아홉 살이니 그보다 세 살 어렸던 그녀는 벌써 열여섯 처녀가 되었을 거고, 그 나이 또래면 이미 사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옛날 기억만 떠올리며 무례하게 다가갔다가 큰 실수를 할 뻔했다며 반가움을 추스른 그는 천천히 말 머리를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아멜리아와 놀던 어린 시절 추억에 빠져 마차를 몰던 청년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산책하기 알맞은 날씨군요.”
“응. 이 주변은 변한 게 별로 없네. 덕분에 길을 잃지는 않았어.”
“변하지 않고 한결같아 좋은 것도 있답니다.”
집사의 뼈 있는 말에 알렉스는 쓰게 웃었다. 알렉스가 너무 변한 것을 돌려 꼬집었다는 걸 눈치챘지만 모른 척하며 말고삐를 그에게 넘겼다.
“과수원 넘어 언덕 쪽으로 갔었어. 거기, 샌더즈 하우스가 있는 곳. 그곳도 변한 것이 없더군.”
“그러셨군요. 다녀오시는 것은 좋지만 마님이 그리 반기지 않으실 테니 그 댁 이야기는 빼시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무슨 일 있었나?”
샌더즈 가문과는 꽤 교류가 활발했다고 생각했는데, 라고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집사가 허를 찔린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저런 반응이지? 싶어 멀뚱히 그를 바라보자 곧 표정을 가다듬은 집사가 “도련님과 아가씨 문제로, 두 마님 사이가 조금 소원해지셨습니다.”라고 일렀다.
“나? 내가 뭘?”
“……정말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이 대답에는 집사 역시 조금 놀랐는지, 당황을 제대로 감추지 못했다.
“도련님께서 샌더즈가 사람들은 보고 싶지도 않다고 우셔서 요양차 온 가족이 두 달 베니스에 다녀오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베니스라면, 언제 적이지? 일곱……, 여덟 살?”
“그렇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오셔서 곧 기숙학교에 진학하셨고요. 이 마을에 있는 것조차 싫다고 하셨습니다.”
“그랬나? 베니스 여행에서 돌아와 곧바로 학교에 입학한 건 기억이 나는데, 그런 일이 있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네.”
“아마 고열로 며칠 시달리신 것이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미안하지만 설명을 좀 듣고 싶은데.”
“저희도 잘은 모릅니다만…….”
집사는 대충 그날 있었던 일 중 자신들이 목격한 것을 중심으로 설명했다. 큰 소리가 나서 달려가 본 곳에는 두 아이가 쓰러져 있었고, 하나는 고열, 하나는 손등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집안싸움이 났었다는 정도였다.
“그것이 아마도 아멜리아 님 때문이었을 거라는 걸 저희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만, 그래도 마님은 모르시는 편이 나을 듯싶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멜리아? 아멜리아가 왜?”
“……지나간 일이니 굳이 아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괜찮으시다면 시간을 내셔서 아멜리아 님을 한 번 만나 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옛이야기를 나누시면 분명 즐거울 겁니다.”
“흐음, 그럴까…….”
아멜리아와 자신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좀 아쉬웠지만, 멀리서 본 그녀는 기억 속의 작은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차를 마시며 지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을 듯싶어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건, 조금 전에 도착한 초대장입니다.”
“초대장이라고?”
알렉스가 레이븐에 도착한 것이 오늘 새벽이었다. 대체 어떻게 알고 그 앞으로 초대장이 오게 되었는지 신기해 “발신인은?” 하고 물어보니, 역시 어린 시절 함께 어울리던 친우 하워드에게서 온 것이었다.
“하워드는 지금 무얼 하지?”
“근방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가업을 이어받으셨습니다.”
“……내가 온 걸 용케 알았네.”
“아침에 도련님이 탄 마차를 본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이미 아실 분들은 아실 겁니다.”
“좁아서 그런가, 소문이 빠르군.”
“반가운 사람이 왔으니 빨리 맞이하고 싶으신 게지요.”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해 보니 주말에 있을 티파티의 초대였다. 다른 참석자의 이야기가 없는 걸 봐서 자신이 아는 이는 하워드 외엔 없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 내키지는 않았지만 달리 할 일도 없는데 초대를 거절했다는 소문이 나는 것도 좋지 않을 듯해서, 그는 “가겠다고 답변해.”라고 말한 뒤 초대장을 들고 홀 중앙 계단을 올랐다.
이 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알렉스는 한참 더 초대장을 들여다보고, 조금 전 집사에게 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되씹어 보았다.
“이 마을에 있는 것조차 싫어했다……?”
생각해 보면, 방학이 되어도 서머스쿨이니 클럽 활동이니 핑계를 대며 집에 내려올 생각을 잘 안 하기는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는 건 기억이 났지만, 그것이 이곳이 싫어서였다는 건 의외였다.
사소한 이유로 토라진 뒤 너무 시간이 오래 흘러서 기억나지 않는 건 아닐까? 아이의 변덕일 수도 있었지만 앓아누운 뒤 베니스라니.
“그 베니스에서의 두 달이 단순한 휴가가 아니라 요양 여행이었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정보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의자에 걸터앉아 한동안 기억을 뒤져 보았지만, 그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남아 있지 않았다. 스스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같은 경험을 한 상대에게 물어보는 건 어떨까?
그는 초대장을 다시 봉투 안에 넣으며, 내일 할 일을 결정했다.
♠ ♠ ♠
“아아, 오늘은 좀 잘 수 있겠다.”
삼 일간 잠을 설친 아멜리아는 평소보다도 더 이른 시간에 잠옷을 갈아입고 잘 준비를 마쳤다. 나이트캡을 쓰고 크게 기지개를 켠 소녀는 침대에 들기 전 탁자에 놓아둔 스케치북을 펼쳐 보았다.
그곳에는 간단하게 형태만 잡힌 상아 오르골이 그려져 있었다. 소녀는 손이 더럽혀지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옆에 두었던 필통에서 가느다란 목탄을 꺼내 쓱쓱, 그림을 더해 나갔다.
울지 않는 오르골과 쉬지 않고 우는 여인.
어떻게 그리면 좋을지 잠시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면서 소녀는 손을 움직였다. 그림을 그리기를 십여 분, 어느 정도 만족할 만큼의 그림이 나왔는지 천천히 목탄을 내려놓았다.
“…….”
아들에게 전해지면 오르골에 실려 있던 어머니는 우는 것을 멈출 수 있을까.
의뢰받은 물건들 대부분은 해결한 뒤의 일에 대해서 들을 수 없어서 아멜리아는 가끔 자신이 제대로 맞는 일을 한 것인지 걱정되고는 했다. 하지만 그걸 답해 줄 사람도 확인해 줄 사람도 없는 터라, 이런 일에는 언제나 어딘가 불편한 앙금이 남는다.
울음을 멈출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저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아무리 오르골을 고쳐 놓아도 그것이 아들의 손에 무사히 닿기 전까지 어머니의 울음은 계속될 거라는 거였다.
스케치북을 팔락팔락 뒤로 넘겨 보니, 빈 페이지가 얼마 안 남았다. 새로 사야 하는구나, 라고 순수하게 놀라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벌써 새것을 사야 할 만큼 많은 것을 본 거였다.
어떻게 보면 예전보다 요즘 페이지가 넘어가는 횟수가 더 빨라진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시드의 의뢰 일을 맡고부터 부쩍 는 것 같아.’
시드를 만나고 이 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첫 만남에서부터 아멜리아의 능력을 알아본 시드는 그녀에게 일을 의뢰하기 시작했다.
주로 골동품에 관련된 감정이었는데, 오래된 물건의 원주인에게서 정확한 제작 시기를 추정하고 그것이 진품인지 위조품인지를 판단하거나 가끔은 상아 오르골처럼 사연 있는 물건의 저주를 푸는 걸 돕기도 했다.
작은 시골 마을에 살면 생각보다 그리 새로운 것들을 경험할 일이 적은 편인데, 요즘은……. 일 년에 한 권 다 쓸까 말까 하던 스케치북을 분기별로 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드의 골동품점이 사연 있는 물건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한다는 소문에 요즘은 먼 곳에서부터도 의뢰인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시드가 주는 일은 대부분 아멜리아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한 건 해결할 때마다 아쉽지 않은 보수를 줘서 근 2년간 일한 금액이 그녀의 개인 계좌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이 돈에 손을 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대 볼 필요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그녀에게 필요한 물건은 전부 샌더즈가에서 아낌없이 지원해 주는 터라 매달 그녀 앞으로 따로 나오는 용돈까지 가지고 있다 보면 시드가 넣어 주는 월급은 정말 쓸 곳이 없었다.
돈이 아쉬워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그의 제안에 순수한 호기심이 생겨 시작한 일이다 보니 안타까운 사연들이 연이어 들려와 발을 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을 접한 지 2년이 되는 최근 아멜리아는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은 정말 이 일에서 손을 놓고 싶은가? 언젠가 이것으로 충분하다며 깨끗하게 물러날 수 있을까? 그 점이, 소녀에게 진정한 문제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손을 닦고 돌아온 아멜리아는 조용히 스케치북을 서랍 속으로 치웠다.
♠ ♠ ♠
오랜만에 돌아온 집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잠자리가 바뀐 탓이어서인지 알렉스는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일부러 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들 즈음이면 퍼뜩 정신이 돌아오고 다시 정신이 좀 노곤하게 녹을 즈음이면 흠칫 몸이 경련해서 그를 깨웠다.
“아, 이런―.”
그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고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자신이 꽤 예민한 타입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간혹 신경질적일 정도로 주변 환경이 바뀐 것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어, 이번에도 역시 그것의 연장선일 거라고 생각했다.
자리를 옮기면 그곳에 익숙해지기까지 보통 이틀 정도 걸리던 걸 생각하고 그는 램프를 켜고 침대 사이드 테이블에 두었던 책을 집어 들었다.
의미 없이 몇 장을 뒤적거리던 알렉스는 문득, 낮에 집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그와 아멜리아가 저지른 사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정신적 충격이 컸는지 며칠간 고열에 시달리고 두 달이나 휴양지에 다녀와야 할 정도로 후유증이 있었다는데 왜 기억하지 못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떠오르지 않는 미스터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문득 알렉스는 한기가 드는 기분이 들었다. 6월 말, 아무리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크게 벌어지는 시기라지만 이렇게까지 추울 수 있는 걸까, 하고 고개를 들다 문득 등줄기에 차가운 소름이 돋는 기분에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렸다.
“헉……!”
기분 나쁜 감각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느꼈던 몸의 반응만큼은 고스란히 돌아온 것 같은 느낌.
그는 떨어진 책을 주울 생각도 못 하고 냉큼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몸을 웅크린 채 절대 뜨지 않겠다는 듯 눈을 꼭 감았다. 망했다고 그는 탄식했다.
언제나 지적이며 우아하다는 평을 받는 천하의 알렉스 멜포드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 그것은 바로 괴담이었다.
산책할 겸 특별한 목적지도 없이 말을 타고 나온 알렉스는 곧 동네 지형이 그리 바뀌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다.
어릴 적 다니던 길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가며 추억에 젖어 있는데, 문득 자신이 애용하던 길이 생각나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몰아 보니 커다란 저택이 보이는 언덕에 도착했다.
“저기는……, 샌더즈 하우스였나?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정중앙의 입구에는 철재로 만들어진 커다란 아치형 문이 자리했고 그 맨 윗부분에는 가문의 문장이 크게 달려 있어 그곳이 샌더즈가의 것임을 알렸다.
게이트 주변으로는 화려한 문양의 철재로 된 담이 둘리어 있고 그 사이를 통해 보이는 정원에는 짧게 다듬어진 잔디가 깔려 시야가 탁 트이는 정원으로 가꾸어져 있었다.
“여기 정원사는 편하겠네. 우리 집은 어머니가 화려하게 꾸미는 걸 좋아하셔서 철마다 고생이라고 하던데.”
언덕 위에서 샌더즈 저택을 내려다보던 알렉스는 정원과 연결되는 입구에 낡은 마차 한 대가 멈추는 것을 보았다. 훔쳐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 일이라는 건 알았지만, 혹시 아는 얼굴이라도 발견할까 싶어 마차에서 내리는 젊은 남녀의 모습을 응시하던 그는 그제야 소녀가 자신이 어릴 적 함께 놀던 아멜리아라는 걸 깨달았다.
반가운 마음에 언덕을 내려가려던 그는 곧 그녀와 함께 있는 청년이 밝게 웃으며 그녀의 모자를 만지다가 머리를 쓰다듬는 걸 보았다.
‘이런.’
연인들의 밀회를 훔쳐본 것 같은 죄책감에 그는 내려가려던 것을 멈추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지 현관까지 아주 천천히 걸어가는 아멜리아를 바라보며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하긴, 그가 열아홉 살이니 그보다 세 살 어렸던 그녀는 벌써 열여섯 처녀가 되었을 거고, 그 나이 또래면 이미 사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옛날 기억만 떠올리며 무례하게 다가갔다가 큰 실수를 할 뻔했다며 반가움을 추스른 그는 천천히 말 머리를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아멜리아와 놀던 어린 시절 추억에 빠져 마차를 몰던 청년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산책하기 알맞은 날씨군요.”
“응. 이 주변은 변한 게 별로 없네. 덕분에 길을 잃지는 않았어.”
“변하지 않고 한결같아 좋은 것도 있답니다.”
집사의 뼈 있는 말에 알렉스는 쓰게 웃었다. 알렉스가 너무 변한 것을 돌려 꼬집었다는 걸 눈치챘지만 모른 척하며 말고삐를 그에게 넘겼다.
“과수원 넘어 언덕 쪽으로 갔었어. 거기, 샌더즈 하우스가 있는 곳. 그곳도 변한 것이 없더군.”
“그러셨군요. 다녀오시는 것은 좋지만 마님이 그리 반기지 않으실 테니 그 댁 이야기는 빼시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무슨 일 있었나?”
샌더즈 가문과는 꽤 교류가 활발했다고 생각했는데, 라고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집사가 허를 찔린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저런 반응이지? 싶어 멀뚱히 그를 바라보자 곧 표정을 가다듬은 집사가 “도련님과 아가씨 문제로, 두 마님 사이가 조금 소원해지셨습니다.”라고 일렀다.
“나? 내가 뭘?”
“……정말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이 대답에는 집사 역시 조금 놀랐는지, 당황을 제대로 감추지 못했다.
“도련님께서 샌더즈가 사람들은 보고 싶지도 않다고 우셔서 요양차 온 가족이 두 달 베니스에 다녀오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베니스라면, 언제 적이지? 일곱……, 여덟 살?”
“그렇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오셔서 곧 기숙학교에 진학하셨고요. 이 마을에 있는 것조차 싫다고 하셨습니다.”
“그랬나? 베니스 여행에서 돌아와 곧바로 학교에 입학한 건 기억이 나는데, 그런 일이 있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네.”
“아마 고열로 며칠 시달리신 것이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미안하지만 설명을 좀 듣고 싶은데.”
“저희도 잘은 모릅니다만…….”
집사는 대충 그날 있었던 일 중 자신들이 목격한 것을 중심으로 설명했다. 큰 소리가 나서 달려가 본 곳에는 두 아이가 쓰러져 있었고, 하나는 고열, 하나는 손등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집안싸움이 났었다는 정도였다.
“그것이 아마도 아멜리아 님 때문이었을 거라는 걸 저희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만, 그래도 마님은 모르시는 편이 나을 듯싶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멜리아? 아멜리아가 왜?”
“……지나간 일이니 굳이 아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괜찮으시다면 시간을 내셔서 아멜리아 님을 한 번 만나 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옛이야기를 나누시면 분명 즐거울 겁니다.”
“흐음, 그럴까…….”
아멜리아와 자신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좀 아쉬웠지만, 멀리서 본 그녀는 기억 속의 작은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차를 마시며 지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을 듯싶어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건, 조금 전에 도착한 초대장입니다.”
“초대장이라고?”
알렉스가 레이븐에 도착한 것이 오늘 새벽이었다. 대체 어떻게 알고 그 앞으로 초대장이 오게 되었는지 신기해 “발신인은?” 하고 물어보니, 역시 어린 시절 함께 어울리던 친우 하워드에게서 온 것이었다.
“하워드는 지금 무얼 하지?”
“근방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가업을 이어받으셨습니다.”
“……내가 온 걸 용케 알았네.”
“아침에 도련님이 탄 마차를 본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이미 아실 분들은 아실 겁니다.”
“좁아서 그런가, 소문이 빠르군.”
“반가운 사람이 왔으니 빨리 맞이하고 싶으신 게지요.”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해 보니 주말에 있을 티파티의 초대였다. 다른 참석자의 이야기가 없는 걸 봐서 자신이 아는 이는 하워드 외엔 없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 내키지는 않았지만 달리 할 일도 없는데 초대를 거절했다는 소문이 나는 것도 좋지 않을 듯해서, 그는 “가겠다고 답변해.”라고 말한 뒤 초대장을 들고 홀 중앙 계단을 올랐다.
이 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알렉스는 한참 더 초대장을 들여다보고, 조금 전 집사에게 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되씹어 보았다.
“이 마을에 있는 것조차 싫어했다……?”
생각해 보면, 방학이 되어도 서머스쿨이니 클럽 활동이니 핑계를 대며 집에 내려올 생각을 잘 안 하기는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는 건 기억이 났지만, 그것이 이곳이 싫어서였다는 건 의외였다.
사소한 이유로 토라진 뒤 너무 시간이 오래 흘러서 기억나지 않는 건 아닐까? 아이의 변덕일 수도 있었지만 앓아누운 뒤 베니스라니.
“그 베니스에서의 두 달이 단순한 휴가가 아니라 요양 여행이었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정보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의자에 걸터앉아 한동안 기억을 뒤져 보았지만, 그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남아 있지 않았다. 스스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같은 경험을 한 상대에게 물어보는 건 어떨까?
그는 초대장을 다시 봉투 안에 넣으며, 내일 할 일을 결정했다.
“아아, 오늘은 좀 잘 수 있겠다.”
삼 일간 잠을 설친 아멜리아는 평소보다도 더 이른 시간에 잠옷을 갈아입고 잘 준비를 마쳤다. 나이트캡을 쓰고 크게 기지개를 켠 소녀는 침대에 들기 전 탁자에 놓아둔 스케치북을 펼쳐 보았다.
그곳에는 간단하게 형태만 잡힌 상아 오르골이 그려져 있었다. 소녀는 손이 더럽혀지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옆에 두었던 필통에서 가느다란 목탄을 꺼내 쓱쓱, 그림을 더해 나갔다.
울지 않는 오르골과 쉬지 않고 우는 여인.
어떻게 그리면 좋을지 잠시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면서 소녀는 손을 움직였다. 그림을 그리기를 십여 분, 어느 정도 만족할 만큼의 그림이 나왔는지 천천히 목탄을 내려놓았다.
“…….”
아들에게 전해지면 오르골에 실려 있던 어머니는 우는 것을 멈출 수 있을까.
의뢰받은 물건들 대부분은 해결한 뒤의 일에 대해서 들을 수 없어서 아멜리아는 가끔 자신이 제대로 맞는 일을 한 것인지 걱정되고는 했다. 하지만 그걸 답해 줄 사람도 확인해 줄 사람도 없는 터라, 이런 일에는 언제나 어딘가 불편한 앙금이 남는다.
울음을 멈출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저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아무리 오르골을 고쳐 놓아도 그것이 아들의 손에 무사히 닿기 전까지 어머니의 울음은 계속될 거라는 거였다.
스케치북을 팔락팔락 뒤로 넘겨 보니, 빈 페이지가 얼마 안 남았다. 새로 사야 하는구나, 라고 순수하게 놀라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벌써 새것을 사야 할 만큼 많은 것을 본 거였다.
어떻게 보면 예전보다 요즘 페이지가 넘어가는 횟수가 더 빨라진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시드의 의뢰 일을 맡고부터 부쩍 는 것 같아.’
시드를 만나고 이 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첫 만남에서부터 아멜리아의 능력을 알아본 시드는 그녀에게 일을 의뢰하기 시작했다.
주로 골동품에 관련된 감정이었는데, 오래된 물건의 원주인에게서 정확한 제작 시기를 추정하고 그것이 진품인지 위조품인지를 판단하거나 가끔은 상아 오르골처럼 사연 있는 물건의 저주를 푸는 걸 돕기도 했다.
작은 시골 마을에 살면 생각보다 그리 새로운 것들을 경험할 일이 적은 편인데, 요즘은……. 일 년에 한 권 다 쓸까 말까 하던 스케치북을 분기별로 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드의 골동품점이 사연 있는 물건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한다는 소문에 요즘은 먼 곳에서부터도 의뢰인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시드가 주는 일은 대부분 아멜리아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한 건 해결할 때마다 아쉽지 않은 보수를 줘서 근 2년간 일한 금액이 그녀의 개인 계좌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이 돈에 손을 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대 볼 필요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그녀에게 필요한 물건은 전부 샌더즈가에서 아낌없이 지원해 주는 터라 매달 그녀 앞으로 따로 나오는 용돈까지 가지고 있다 보면 시드가 넣어 주는 월급은 정말 쓸 곳이 없었다.
돈이 아쉬워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그의 제안에 순수한 호기심이 생겨 시작한 일이다 보니 안타까운 사연들이 연이어 들려와 발을 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을 접한 지 2년이 되는 최근 아멜리아는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은 정말 이 일에서 손을 놓고 싶은가? 언젠가 이것으로 충분하다며 깨끗하게 물러날 수 있을까? 그 점이, 소녀에게 진정한 문제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손을 닦고 돌아온 아멜리아는 조용히 스케치북을 서랍 속으로 치웠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잠자리가 바뀐 탓이어서인지 알렉스는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일부러 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들 즈음이면 퍼뜩 정신이 돌아오고 다시 정신이 좀 노곤하게 녹을 즈음이면 흠칫 몸이 경련해서 그를 깨웠다.
“아, 이런―.”
그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고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자신이 꽤 예민한 타입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간혹 신경질적일 정도로 주변 환경이 바뀐 것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어, 이번에도 역시 그것의 연장선일 거라고 생각했다.
자리를 옮기면 그곳에 익숙해지기까지 보통 이틀 정도 걸리던 걸 생각하고 그는 램프를 켜고 침대 사이드 테이블에 두었던 책을 집어 들었다.
의미 없이 몇 장을 뒤적거리던 알렉스는 문득, 낮에 집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그와 아멜리아가 저지른 사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정신적 충격이 컸는지 며칠간 고열에 시달리고 두 달이나 휴양지에 다녀와야 할 정도로 후유증이 있었다는데 왜 기억하지 못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떠오르지 않는 미스터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문득 알렉스는 한기가 드는 기분이 들었다. 6월 말, 아무리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크게 벌어지는 시기라지만 이렇게까지 추울 수 있는 걸까, 하고 고개를 들다 문득 등줄기에 차가운 소름이 돋는 기분에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렸다.
“헉……!”
기분 나쁜 감각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느꼈던 몸의 반응만큼은 고스란히 돌아온 것 같은 느낌.
그는 떨어진 책을 주울 생각도 못 하고 냉큼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몸을 웅크린 채 절대 뜨지 않겠다는 듯 눈을 꼭 감았다. 망했다고 그는 탄식했다.
언제나 지적이며 우아하다는 평을 받는 천하의 알렉스 멜포드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 그것은 바로 괴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