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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샌더즈가의 아침은 이른 시간에 시작된다. 그녀의 어머니는 하녀를 시켜 가족들의 아침 식사 시간을 훌쩍 넘겨서도 일어나지 못하는 아멜리아를 몇 번이고 깨워 보았다.
그러나 일으켜 세워 놓아도 곧 힘없이 늘어지는 녹인 마시멜로 같은 소녀를 아무도 깨우지 못하자 결국 그대로 자게 내버려 두어야 했다.
소녀가 눈을 뜬 건 아버지와 오빠들이 출근하고도 한참 후인 열한 시경이었다.
“후아아아―.”
삼일 치 수면치고는 부족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피로는 풀린 듯싶었다. 쭉쭉 몸을 늘리는 스트레칭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는 세수하며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제가 봐도 하얗고 아기 같은 얼굴이었다. 동그란 눈에 이목구비가 그리 크지 않아 어딘가 인상이 흐린 것 같기도 하고, 나이트캡을 사용해도 자고 일어나면 곱슬머리가 다 엉켜 있어서 아침에 특히 볼만했다.
열여섯이나 되었는데도 오빠들은 귀엽다는 소리만 했는데, 성숙하다든가 여성스럽다는 단어와는 항상 거리가 먼 평가였다.
아니 무엇보다도, 오빠들의 ‘귀엽다’의 기준이 너무 콩깍지 수준이라 그들의 의견은 신뢰도가 바닥을 쳤다. 그들은 아멜리아가 진흙에서 구르고 돌아와도 눈치 못 채고 귀여워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으니까.
늦은 단장을 마치고 거실로 내려가니 차를 마시던 어머니가 소녀를 노려봤다.
“아멜리아, 대체 밤늦게까지 뭘 했기에 아버지 출근하시는 시간까지도 못 일어나!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할 아가씨가 늦잠이 무슨 말이니.”
“죄송해요, 엄마. 어제 일찍 잤는데…… 흐아암.”
“그렇게 매너 조심하라고 말했는데, 안 되겠다. 일단 식사를 하고 오려무나! 이야기는 식사 끝내고 하자. 너 때문에 치우지도 못하고 기다리는 하인들에게도 사과하고.”
“네에―.”
야단맞을 건 알고 있었지만, 계단 바로 밑에서 어머니가 벼르고 계실 줄은 몰랐던 아멜리아는 풀이 죽은 채 식당으로 갔다.
“늦으셨습니다.”
집사는 이미 다른 일과를 처리하러 갔는지 소녀의 아침 시중을 드는 것은 샌더즈 하우스의 풋맨인 쥴스였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앉으시죠.”
소녀가 앉을 수 있게 의자를 당겨 준 쥴스는 준비해 두었던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소녀가 식사하는 타이밍을 재며 눈치 있게 차를 따르던 그는 문득 생각난 듯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왜?”
“……멜포드가의 도련님이 돌아오신 건 알고 계십니까?”
“멜포드?”
잘 익힌 토마토를 우물거리던 소녀가 움직임을 딱 멈췄다.
“거기 도련님이라면 알렉스잖아. 알렉스가 왔다고?”
“네. 어제 오셨다고 합니다. 덕분에 마을이 좀 시끄러웠습니다. 다들 호기심이 많아 가지고.”
“그렇구나. 정말 오랜만에 오는 거네.”
소녀는 그리 관심이 없는지 그 말만 한 뒤 토스트에 잼과 버터를 가득 바르기 시작했다.
“지금이 몇 시인지 아십니까?”
“저기, 쥴스. 늦게 나와서 정말 미안해요……. 반성하고 있어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열두 시입니다, 아가씨.”
“네……, 다들 바쁘게 점심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에요.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열한 시경 알렉스 도련님이 방문하셨습니다.”
“쿨럭.”
갑자기 놀란 탓에 사레가 들린 아멜리아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던 쥴스는 기침을 하는 자신의 아가씨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응, 고마, 앗 뜨거!”
“……죄송합니다. 물을 드시죠.”
고의적임이 분명한 쥴스의 선택에 아멜리아는 ‘앞으로 쥴스를 화나게 할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라고 마음에 다시 새겼다.
“알렉스? 멜포드가의 그 알렉스가 우리 집에? 왜?”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아침 일찍 서신도 없이 방문하셔서, 아가씨를 뵙고 싶다는 상당히 무례한 청을 하셨거든요.”
“나를?”
점점 더 커지는 눈으로 쥴스를 바라보지만 그렇게 봐도 나 역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라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갈색 머리 하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오히려 저희가 아가씨께 연유를 묻고 싶을 정도입니다만.”
“그래서 쥴스가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어째 이상하다 했어, 사라가 시중을 들 줄 알았는데…….”
“저런, 아가씨께서 차가 부족하신가 봅니다.”
“아니에요. 쥴스가 나를 기다려줘서…… 와아……, 너무 좋아…….”
쥴스의 냉랭한 기운에 죄인은 그저 작아질 뿐이었다. 다음부터는 잠을 못 자도 아침밥은 먹어야겠다고 아멜리아는 결심했다. 그나저나, 알렉스라니.
“난 알렉스, 그때 이후로 못 봤는데……. 왜 찾아온 걸까?”
“저도 그분 생각을 모르겠습니다. 아침 산책 나오신 김에 들르신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만 운 나쁘게도 마님께 딱 걸려서.”
“어머니한테?”
“예. 아멜리아 아가씨를 뵙고 싶다고 하시자 마님이 진노하셔서 그냥 돌아가셨습니다.”
“저런…….”
하필이면 어머니에게, 하필이면 알렉스가 딱 걸렸으니 소란이 생겼을 것은 안 봐도 뻔했다. 경중의 차이가 있다 해도 샌더즈가 사람들은 대체로 멜포드가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아멜리아의 어머니 다이안 샌더즈 여사는 십 년이 넘게 멜포드가 저택이 있는 쪽을 향해서는 웃지도 않는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알렉스네 가족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하필 어머니에게……. 그랬다면 용건이고 뭐고 입을 열 시간도 없었을 텐데.”
“그렇죠. 바로 쫓겨나셨습니다. 황당해하시더군요.”
“……황당해했다고? 그건 조금…….”
“젊은 신사분이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답답하게도, 라고 쥴스가 비아냥거린다. 이 사달이 난 건 전부 멜포드가 도련님 탓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샌더즈가의 하인다운 발상이었다.
“아니, 쥴스. 그렇게 말할 필요는…….”
“다짜고짜 찾아와서 만나고 싶다고 하면 냉큼 뜻대로 하십시오, 할 줄 알았나 봅니다.”
“…….”
아멜리아는 자신의 식사 시중을 들고 있는 쥴스를 힐긋 바라보았다. 평온한 표정이지만 눈썹이 살짝 구겨진 것이, 아무래도 있는 대로 짜증이 난 듯싶었다.
그는 딱 부러지는 인상의 호청년으로 지적인 분위기가 있어 다른 귀족들도 샌더즈가의 풋맨을 탐낸다는 소문이 날 정도지만, 저 쿨한 외모 아래에 불같은 성격이 있다는 건 아무도 몰랐다. 덤벼 오는 싸움은 피하기는커녕 늘 정면으로 도발했고, 불의의 상황을 보면 형형한 분노를 표출했다. 바로 지금처럼.
“무슨 일로 왔을까…….”
힐긋, 쥴스를 훔쳐보며 소녀가 중얼거리자 “연락하실 생각일랑 마십시오.”라며 노려봤다.
아니 그래도, 이쪽에서 다가가지 않으면 왜 왔었는지 영원히 알 수 없잖아? 소녀는 버섯을 우물거리며 알렉스의 방문 목적을 곱씹었다.
알렉스 멜포드는 어릴 적 아멜리아의 약혼자였다. 다섯 살 소녀의 약혼자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정식으로 혼담이 오간 것은 아니었고, 부모님들의 가벼운 놀이 기분으로 이루어진 구두 혼약이었다.
두 아이는 알렉스의 이모 멜라니의 결혼식에서 신부의 트레일을 따라 걸으며 꽃을 뿌리는 아기 들러리를 서며 처음 만났다.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행사의 마스코트가 된 귀여운 커플에 열광했고, 흐뭇해진 양가 부모들은 그 기세를 몰아 “크면 둘이 결혼시켜도 좋겠네요.”라는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 시작이었다.
초반에는 정말로 인형 놀이를 하는 기분이 전부였는데, 어른들이 뭐라 하든 관계없이 알렉스와 아멜리아는 꽤 사이가 좋아 자주 함께 놀았다.
서로의 집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도 소꿉친구의 조건에 딱 들어맞아서 두 아이는 거의 매일같이 서로를 찾았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지.’
두 아이가 벌인 소동으로 양가의 어른들 사이까지 벌어져서, 결국 십 년이 넘게 왕래가 없었다. 상당히 가까이 살면서도 양쪽 다 상대방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살았던 터라 알렉스의 방문 소식은 아멜리아에게도 상당히 의외였다.
식사를 마친 아멜리아는 가벼운 외출복 차림으로 갈아입고 산책하러 나갈 준비를 했다. 긴 곱슬머리는 새틴 리본으로 하나로 묶어 정리한 뒤, 레이스 장갑을 끼고 가벼운 양산을 챙겨 들었다.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스케치북도 꺼내 들고 외출을 했다.
사실상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잔소리를 피해 도망 나왔다고 하는 것이 더 옳았다. 알렉스의 방문에 어머니가 화를 낸 것이 맞는다면 늦게 일어난 것과 합해져 심상치 않은 강도의 훈계가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조용히 현관문을 빠져나오던 아멜리아에게 정원사가 큰 소리로 인사를 하는 바람에 소녀는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이 놀라 재빠르게 줄행랑을 쳐야 했다.
“헉, ……허억.”
누군가가 봤다면 숙녀가 그렇게 달리면 안 된다고 한바탕 잔소리를 들었겠지만, 다행히 숲 속에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다.
어깨로 숨을 내쉬는 양 크게 들썩이던 소녀가 앞을 내다보았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숲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탁 트인 평야와 연결되어 있어 그녀가 어릴 적부터 자주 놀던 곳이었다.
아멜리아는 찾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가, 커다란 오동나무가 있는 위치까지 가서 두리번거렸다. 빽빽하게 자란 나무 사이에 자연적인 공터가 조성된 곳인데 유독 이곳만 빛도 잘 들어 꽃이 많이 피는 공간이었다. 오동나무를 중심으로 넓게 풀들이 자라 있어 아이들이 놀기에도 안성맞춤인 공터였다.
이곳은 예전에 알렉스와 자주 놀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가 집까지 찾아왔다가 쫓겨났다는 소리를 듣고 아멜리아는 바로 이곳을 떠올렸다. 만에 하나 알렉스가 정말로 소녀를 만날 생각이 있다면 어쩌면 이곳으로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 아닌가?”
공터에 알렉스의 모습은 없었다. 아무래도 과거의 추억에 젖어 있던 건 아멜리아뿐인지도 몰랐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실망한 표정으로 나무 밑동에 걸터앉은 소녀는 아무도 없다는 해방감에 다리를 쭉 뻗었다. 나무에 몸을 기대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소리, 작은 새들의 지저귐을 빼면 사방은 고요했다.
그리 따갑지 않은 햇볕이 공터 근처를 중심으로 둥글게 퍼졌다. 쭉 뻗은 발등이며 펼쳐진 스커트 자락이 따끈해지니 부드럽게 몸의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자고도 아직 부족했었는지, 등을 댄 부분부터 오동나무의 호흡이 스며드는 것같이 느껴져 기분이 좋아진 소녀는 살며시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오수에 빠졌다.
샌더즈가의 아침은 이른 시간에 시작된다. 그녀의 어머니는 하녀를 시켜 가족들의 아침 식사 시간을 훌쩍 넘겨서도 일어나지 못하는 아멜리아를 몇 번이고 깨워 보았다.
그러나 일으켜 세워 놓아도 곧 힘없이 늘어지는 녹인 마시멜로 같은 소녀를 아무도 깨우지 못하자 결국 그대로 자게 내버려 두어야 했다.
소녀가 눈을 뜬 건 아버지와 오빠들이 출근하고도 한참 후인 열한 시경이었다.
“후아아아―.”
삼일 치 수면치고는 부족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피로는 풀린 듯싶었다. 쭉쭉 몸을 늘리는 스트레칭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는 세수하며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제가 봐도 하얗고 아기 같은 얼굴이었다. 동그란 눈에 이목구비가 그리 크지 않아 어딘가 인상이 흐린 것 같기도 하고, 나이트캡을 사용해도 자고 일어나면 곱슬머리가 다 엉켜 있어서 아침에 특히 볼만했다.
열여섯이나 되었는데도 오빠들은 귀엽다는 소리만 했는데, 성숙하다든가 여성스럽다는 단어와는 항상 거리가 먼 평가였다.
아니 무엇보다도, 오빠들의 ‘귀엽다’의 기준이 너무 콩깍지 수준이라 그들의 의견은 신뢰도가 바닥을 쳤다. 그들은 아멜리아가 진흙에서 구르고 돌아와도 눈치 못 채고 귀여워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으니까.
늦은 단장을 마치고 거실로 내려가니 차를 마시던 어머니가 소녀를 노려봤다.
“아멜리아, 대체 밤늦게까지 뭘 했기에 아버지 출근하시는 시간까지도 못 일어나!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할 아가씨가 늦잠이 무슨 말이니.”
“죄송해요, 엄마. 어제 일찍 잤는데…… 흐아암.”
“그렇게 매너 조심하라고 말했는데, 안 되겠다. 일단 식사를 하고 오려무나! 이야기는 식사 끝내고 하자. 너 때문에 치우지도 못하고 기다리는 하인들에게도 사과하고.”
“네에―.”
야단맞을 건 알고 있었지만, 계단 바로 밑에서 어머니가 벼르고 계실 줄은 몰랐던 아멜리아는 풀이 죽은 채 식당으로 갔다.
“늦으셨습니다.”
집사는 이미 다른 일과를 처리하러 갔는지 소녀의 아침 시중을 드는 것은 샌더즈 하우스의 풋맨인 쥴스였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앉으시죠.”
소녀가 앉을 수 있게 의자를 당겨 준 쥴스는 준비해 두었던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소녀가 식사하는 타이밍을 재며 눈치 있게 차를 따르던 그는 문득 생각난 듯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왜?”
“……멜포드가의 도련님이 돌아오신 건 알고 계십니까?”
“멜포드?”
잘 익힌 토마토를 우물거리던 소녀가 움직임을 딱 멈췄다.
“거기 도련님이라면 알렉스잖아. 알렉스가 왔다고?”
“네. 어제 오셨다고 합니다. 덕분에 마을이 좀 시끄러웠습니다. 다들 호기심이 많아 가지고.”
“그렇구나. 정말 오랜만에 오는 거네.”
소녀는 그리 관심이 없는지 그 말만 한 뒤 토스트에 잼과 버터를 가득 바르기 시작했다.
“지금이 몇 시인지 아십니까?”
“저기, 쥴스. 늦게 나와서 정말 미안해요……. 반성하고 있어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열두 시입니다, 아가씨.”
“네……, 다들 바쁘게 점심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에요.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열한 시경 알렉스 도련님이 방문하셨습니다.”
“쿨럭.”
갑자기 놀란 탓에 사레가 들린 아멜리아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던 쥴스는 기침을 하는 자신의 아가씨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응, 고마, 앗 뜨거!”
“……죄송합니다. 물을 드시죠.”
고의적임이 분명한 쥴스의 선택에 아멜리아는 ‘앞으로 쥴스를 화나게 할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라고 마음에 다시 새겼다.
“알렉스? 멜포드가의 그 알렉스가 우리 집에? 왜?”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아침 일찍 서신도 없이 방문하셔서, 아가씨를 뵙고 싶다는 상당히 무례한 청을 하셨거든요.”
“나를?”
점점 더 커지는 눈으로 쥴스를 바라보지만 그렇게 봐도 나 역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라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갈색 머리 하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오히려 저희가 아가씨께 연유를 묻고 싶을 정도입니다만.”
“그래서 쥴스가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어째 이상하다 했어, 사라가 시중을 들 줄 알았는데…….”
“저런, 아가씨께서 차가 부족하신가 봅니다.”
“아니에요. 쥴스가 나를 기다려줘서…… 와아……, 너무 좋아…….”
쥴스의 냉랭한 기운에 죄인은 그저 작아질 뿐이었다. 다음부터는 잠을 못 자도 아침밥은 먹어야겠다고 아멜리아는 결심했다. 그나저나, 알렉스라니.
“난 알렉스, 그때 이후로 못 봤는데……. 왜 찾아온 걸까?”
“저도 그분 생각을 모르겠습니다. 아침 산책 나오신 김에 들르신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만 운 나쁘게도 마님께 딱 걸려서.”
“어머니한테?”
“예. 아멜리아 아가씨를 뵙고 싶다고 하시자 마님이 진노하셔서 그냥 돌아가셨습니다.”
“저런…….”
하필이면 어머니에게, 하필이면 알렉스가 딱 걸렸으니 소란이 생겼을 것은 안 봐도 뻔했다. 경중의 차이가 있다 해도 샌더즈가 사람들은 대체로 멜포드가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아멜리아의 어머니 다이안 샌더즈 여사는 십 년이 넘게 멜포드가 저택이 있는 쪽을 향해서는 웃지도 않는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알렉스네 가족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하필 어머니에게……. 그랬다면 용건이고 뭐고 입을 열 시간도 없었을 텐데.”
“그렇죠. 바로 쫓겨나셨습니다. 황당해하시더군요.”
“……황당해했다고? 그건 조금…….”
“젊은 신사분이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답답하게도, 라고 쥴스가 비아냥거린다. 이 사달이 난 건 전부 멜포드가 도련님 탓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샌더즈가의 하인다운 발상이었다.
“아니, 쥴스. 그렇게 말할 필요는…….”
“다짜고짜 찾아와서 만나고 싶다고 하면 냉큼 뜻대로 하십시오, 할 줄 알았나 봅니다.”
“…….”
아멜리아는 자신의 식사 시중을 들고 있는 쥴스를 힐긋 바라보았다. 평온한 표정이지만 눈썹이 살짝 구겨진 것이, 아무래도 있는 대로 짜증이 난 듯싶었다.
그는 딱 부러지는 인상의 호청년으로 지적인 분위기가 있어 다른 귀족들도 샌더즈가의 풋맨을 탐낸다는 소문이 날 정도지만, 저 쿨한 외모 아래에 불같은 성격이 있다는 건 아무도 몰랐다. 덤벼 오는 싸움은 피하기는커녕 늘 정면으로 도발했고, 불의의 상황을 보면 형형한 분노를 표출했다. 바로 지금처럼.
“무슨 일로 왔을까…….”
힐긋, 쥴스를 훔쳐보며 소녀가 중얼거리자 “연락하실 생각일랑 마십시오.”라며 노려봤다.
아니 그래도, 이쪽에서 다가가지 않으면 왜 왔었는지 영원히 알 수 없잖아? 소녀는 버섯을 우물거리며 알렉스의 방문 목적을 곱씹었다.
알렉스 멜포드는 어릴 적 아멜리아의 약혼자였다. 다섯 살 소녀의 약혼자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정식으로 혼담이 오간 것은 아니었고, 부모님들의 가벼운 놀이 기분으로 이루어진 구두 혼약이었다.
두 아이는 알렉스의 이모 멜라니의 결혼식에서 신부의 트레일을 따라 걸으며 꽃을 뿌리는 아기 들러리를 서며 처음 만났다.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행사의 마스코트가 된 귀여운 커플에 열광했고, 흐뭇해진 양가 부모들은 그 기세를 몰아 “크면 둘이 결혼시켜도 좋겠네요.”라는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 시작이었다.
초반에는 정말로 인형 놀이를 하는 기분이 전부였는데, 어른들이 뭐라 하든 관계없이 알렉스와 아멜리아는 꽤 사이가 좋아 자주 함께 놀았다.
서로의 집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도 소꿉친구의 조건에 딱 들어맞아서 두 아이는 거의 매일같이 서로를 찾았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지.’
두 아이가 벌인 소동으로 양가의 어른들 사이까지 벌어져서, 결국 십 년이 넘게 왕래가 없었다. 상당히 가까이 살면서도 양쪽 다 상대방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살았던 터라 알렉스의 방문 소식은 아멜리아에게도 상당히 의외였다.
식사를 마친 아멜리아는 가벼운 외출복 차림으로 갈아입고 산책하러 나갈 준비를 했다. 긴 곱슬머리는 새틴 리본으로 하나로 묶어 정리한 뒤, 레이스 장갑을 끼고 가벼운 양산을 챙겨 들었다.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스케치북도 꺼내 들고 외출을 했다.
사실상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잔소리를 피해 도망 나왔다고 하는 것이 더 옳았다. 알렉스의 방문에 어머니가 화를 낸 것이 맞는다면 늦게 일어난 것과 합해져 심상치 않은 강도의 훈계가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조용히 현관문을 빠져나오던 아멜리아에게 정원사가 큰 소리로 인사를 하는 바람에 소녀는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이 놀라 재빠르게 줄행랑을 쳐야 했다.
“헉, ……허억.”
누군가가 봤다면 숙녀가 그렇게 달리면 안 된다고 한바탕 잔소리를 들었겠지만, 다행히 숲 속에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다.
어깨로 숨을 내쉬는 양 크게 들썩이던 소녀가 앞을 내다보았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숲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탁 트인 평야와 연결되어 있어 그녀가 어릴 적부터 자주 놀던 곳이었다.
아멜리아는 찾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가, 커다란 오동나무가 있는 위치까지 가서 두리번거렸다. 빽빽하게 자란 나무 사이에 자연적인 공터가 조성된 곳인데 유독 이곳만 빛도 잘 들어 꽃이 많이 피는 공간이었다. 오동나무를 중심으로 넓게 풀들이 자라 있어 아이들이 놀기에도 안성맞춤인 공터였다.
이곳은 예전에 알렉스와 자주 놀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가 집까지 찾아왔다가 쫓겨났다는 소리를 듣고 아멜리아는 바로 이곳을 떠올렸다. 만에 하나 알렉스가 정말로 소녀를 만날 생각이 있다면 어쩌면 이곳으로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 아닌가?”
공터에 알렉스의 모습은 없었다. 아무래도 과거의 추억에 젖어 있던 건 아멜리아뿐인지도 몰랐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실망한 표정으로 나무 밑동에 걸터앉은 소녀는 아무도 없다는 해방감에 다리를 쭉 뻗었다. 나무에 몸을 기대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소리, 작은 새들의 지저귐을 빼면 사방은 고요했다.
그리 따갑지 않은 햇볕이 공터 근처를 중심으로 둥글게 퍼졌다. 쭉 뻗은 발등이며 펼쳐진 스커트 자락이 따끈해지니 부드럽게 몸의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자고도 아직 부족했었는지, 등을 댄 부분부터 오동나무의 호흡이 스며드는 것같이 느껴져 기분이 좋아진 소녀는 살며시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오수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