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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아멜리아가 낮잠에 빠져든 공터에 바삭거리는 풀 밟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좀 흐른 뒤였다. 예전 기억을 더듬어 공터를 찾아온 알렉스는 그곳에서 잠들어 있는 소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아멜리아?”
묶어 둔 리본이 풀어졌는지 긴 곱슬머리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려 헝클어진 채 소녀는 나무에 기대 잠이 들어 있었다.
고개가 불편한 자세로 기울어져 쓰러질 것만 같은 위태로운 상태였지만 알렉스는 그녀를 깨워야 할지 바로 앉혀 줘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어쩔 줄 몰라 했다.
스스럼없이 다른 집 아가씨의 몸에 손을 댈 수도 없는 터라 우왕좌왕 바라보고 있을 때, 소녀가 눈을 떴다.
“어…….”
“꺄악―!”
“으아악!”
놀란 나머지 그도 같이 소리를 지르자, 그 비명에 다시 놀란 소녀가 번개같이 몸을 일으키더니 어디론가 도망가려고 허둥댔다. 당황한 알렉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소리쳤다.
“아멜리아! 나야, 나.”
손목까지 잡혀 더 하얗게 질려 있던 소녀가 자신의 이름을 듣고 멈칫, 움직임을 멈췄다. 입을 벌린 채 눈을 크게 뜨고 한참 동안 청년을 바라보더니 “알렉스?”라고 물었다.
“응, 나야. 깨워서 미안.”
“아……, 난 또. 놀랐잖아…….”
멋쩍은 듯 웃는 청년을 올려다보던 아멜리아는 진심으로 안도했다는 듯 스르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엇―.”
소녀가 힘을 잃고 쓰러지자 그 손목을 잡고 있던 알렉스의 무게 중심도 흔들렸다. 잡았던 손을 놓으며 풀썩 뒤로 주저앉자 제 실수를 깨달은 소녀가 당황하며 “미안해!”라고 사과했다.
“아냐, 아― 그래도 다행이다.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 고민하느라 나도 정신이 없었거든.”
“…….”
소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무리 소꿉친구라지만 십 년이 지나 만나는 사이인데 재회의 장면이 낮잠을 자다가 놀라 소리를 지르는 거라니. 그렇지. 낮잠……, 잠깐만.
더듬더듬 제 머리 상태를 만져 본 아멜리아는 그제야 자신의 뒤통수가 나무에 쓸려 엉망으로 엉켜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순식간에 얼굴에 피가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차마 비명도 못 지르고 머리통을 움켜쥔 채 후다닥 등을 돌린 소녀를 보며 알렉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예전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어떤 아이였는지 거의 떠오르질 않았는데, 이런 성격이었나.’
허술하다는 것이 첫인상이었다. 누가 올지 모르는 숲에서 무방비하게 잠이 든 것만 봐도 아찔하고, 아무리 잔디가 있다지만 맨땅에 손수건도 깔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 그가 평소 알던 아가씨들과 너무 달라 이래도 괜찮은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비뚤어진 머리 리본은 세로로 돌아가 있고 그 와중에 산발이 된 머리를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허둥대는 작은 등을 보고 있으려니…….
“하하하핫!”
청년의 시원한 웃음소리에 흠칫 놀란 아멜리아가 울상이 되어 그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이 먹이를 빼앗긴 다람쥐 같아 보여 그는 배를 잡았다.
“웃지 마, 진짜―!”
머리 감추랴, 작은 주먹을 쥐고 분노를 표출하랴 바쁜 아멜리아와 바닥에 주저앉은 김에 아예 옆으로 쓰러져 잔디 위를 굴러 버린 알렉스는 결국 서로의 꼴을 보며 부들부들 떨다가 웃음이 터졌다.
“아하하. 난 몰라.”
“푸하핫.”
십 년. 다시 만날 땐 꼭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 줘야지 하고 생각하던 상대와의 재회는 예상을 크게 어긋났다. 멋진 모습은커녕 볼썽사나운 비밀을 공유하게 된 두 사람은 허탈하게 웃었다.
웃음이 잦아든 후에는 조금 떨어져 앉은 채로 나무 기둥에 등을 대고 “망했어.”, “그러게.”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아침에 우리 집에 왔었다며. 몰랐어.”
“꽤 큰소리가 났었을 텐데 못 들었어? 네 어머니 엄청 화내셨거든.”
“……그게, 그때 정신없이 자느라…….”
“큭큭큭…….”
더는 되돌릴 곳 없는 망신 일직선이었다. 하필 늦잠을 잔 날 찾아올 건 또 뭐람.
졸지에 화려한 잠꾸러기 인증식을 마친 아멜리아는 양손으로 빨갛게 된 볼을 감싸며 울 것 같은 표정을 다스려야 했다. 숙녀다운 모습은커녕, 이래서는 집에 가서 이상한 애로 자랐다고 흉이나 보지 않기를 빌어야만 했다.
‘멜포드가에서는 더 떨어질 평판도 없을 테지만…….’
한숨을 쉬며 알렉스를 힐긋 바라보았다. 그는 단정하고 차가운 인상의 청년이었다. 시원한 콧날에 총명해 보이는 눈매가 수재라는 느낌을 주었고, 안경을 써도 어울릴 것 같았다.
명문 대학에 진학했다는 말을 들었으니 아마 겉으로 보이는 모습뿐만이 아니라 정말로 머리도 좋을 터였다. 조금 전 잔디 위를 굴러서인지 빗어 넘긴 앞머리가 살짝 헝클어졌지만 지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세련된 신사라는 인상은 여전했다.
“오늘 너희 집에 너무 충동적으로 찾아가긴 했는데,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놀라실 줄은 몰랐어. 내가 이름을 대자 얼마나 놀라시던지 곧 쓰러질 것 같더라고.”
“그거야, 알렉스가 왔으니까…….”
우물대며 소녀가 대답했다. 알렉스 멜포드가 11년 만에 갑자기 나타나 통성명을 하고 아멜리아를 찾았다면 어머니가 아니라 오빠들 반응도 비슷했을 것이었다. 하인들까지 저렇게 맹렬하게 비난할 줄은 몰랐지만.
“역시 그런 건가?”
“응?”
“나, 십 년 전에 너에게 무슨 나쁜 짓 했어?”
“뭐라고?”
너무 놀란 나머지 알렉스 쪽으로 몸을 길게 뺐다. 엉망인 머리 상태를 보이지 않으려고 부러 떨어져 앉아 있었다는 것도 잊은 채 놀란 표정으로 청년을 응시하니 그도 당황했는지 “아니야?”라고 되물었다.
“알렉스, 기억 못 해?”
“어……, 그게. 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둘이 함께 놀던 건 기억나지만 헤어지게 된 사건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그가 설명하자 아멜리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여, 여튼 그 일 이후로 두 집안은 견원지간이 되어서…… 찾아오는 건 아마 힘들 거야.”
양측에서는 이제 하인들마저 교류가 없다는 말을 듣고 기가 막혀 하던 알렉스가 “정말 그게 문제가 될 거로 생각해?”라고 물었다.
“뭐가?”
“내가 너에게 나쁜 짓 한 것도 아니고, 너도 일부러 나에게 뭔가 하지 않았다면, 굳이 우리 둘이 얼굴도 못 볼 사이로 지낼 필요는 없잖아?”
“아니 그니까 지금 문제가 전부 알렉스랑 내가 시작해서…….”
“무책임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지, 기억 안 나. 모르겠어. 기억난다 치더라도 11년 전 이야기야. 여덟 살 꼬맹이 시절 이야기고. 이쯤 되면 털고 지나갈 수도 있을 때인 것 같은데.”
“난 그 반대라고 생각해. 무려 11년간이나 사이가 나빴는데……, 쉽지 않을 거야.”
“그런가. 내가 떨어져 살다 돌아와서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겠군. 매일 곁에서 살던 사람들과는 또 기분이 다를 테니.”
어딘가 지친 듯한 표정으로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묵은 감정을 칼로 자르듯 단숨에 뒤집을 수 없다는 건 그도 알았지만, 집에 돌아오고서야 여덟 살 자신 때문에 양 집안이 척을 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철없는 아이였다는 변명만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알게 된 이상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래서 화해하려고 아멜리아를 찾았던 거였는데…….
거기까지 생각난 알렉스는 그제야, 자신이 샌더즈가를 방문했던 정확한 이유를 깨달았다.
“아멜리아, 이거.”
“응?”
“주말에 티파티 초대를 받았는데, 같이 안 갈래?”
“나랑?”
“그게 방문 목적이었는데 어머니 뵙고 놀라서 말도 못 꺼냈어.”
“…….”
한층 더 모호한 표정이 된 아멜리아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소녀가 왜 저런 표정을 하는지 몰라 당황한 청년이 “혹시 같이 어울리는 거 어른들이 싫어하신다면―”까지 말을 꺼내자, 소녀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 알렉스는 레이븐을 떠나 있어서 모르는 게 있어. 양 집안 문제만이 아니라…….”
“무슨 문제가 또 있어?”
“집안 문제를 떠나서라도 나랑 엮이면 그리 좋은 소리 못 들을 거야.”
“좋은 소리를 못 듣는다니?”
이제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소녀가 “나……, 친구가 없어. 파티에 데려가면 아마 알렉스를 곤경에 처하게 할 거야.”라고 작은 소리로 고백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대체.
알렉스는 방금 들은 말을 되풀이해서 분석하며 그 의미를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왜 친구가 없는데?”
“……나랑 있으면 기분 나쁘대.”
“누가 그래?”
“다들.”
“……뭐라고?”
이건 또 뭐라는 걸까. 알렉스는 제게서 도망가듯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겨 앉은 소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열여섯이라지만 숙녀라기보다는 소녀 같고, 그보다도 아직 어딘가 아기 같은 느낌이 남아 있는 하얗고 말간 얼굴에 동그란 눈. 웅크린 모습이 작은 설치류 같은 인상이었다.
아직 하는 행동도 말도 어리기만 해서 알렉스는 귀여운 여동생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이런 무해에 가까운 인상의 소녀에게 기분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대체 왜 그런 말을 해? ……아, 정말 모르겠네. 너무 오래 떨어져 살았나. 지금 이해가 안 가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잘 빗어 놓은 머리를 손으로 헝클며 그가 말했다.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 다른 사람의 평가는 잘 안 믿는 편이야. 어떤 연유에서 그런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간단하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난 파티 초대를 한 거고 넌 거기 답변을 해 주면 돼.”
“…….”
“그리고 나야말로 지금 레이븐에는 친구가 전혀 없어서 에스코트할 숙녀도 없이 가게 생겼다는 것만 추가로 밝혀 둘게.”
소녀가 망설이는 표정을 보이자 알렉스가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리고 대답을 요구했다. 그 말에 무언가 말을 하려던 아멜리아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조금 뒤, 끄덕끄덕, 작은 머리가 끄덕여졌다.
“고마워, 토요일 열한 시경에 갈게.”
“으, 응. 저기, 혹시 현관 말고 정문에서 기다려도 돼?”
“네가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그럼 토요일에 보자.”
청년이 작별 인사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 다 맨바닥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는 머뭇거리다 자신의 셔츠에 손을 닦고 다시 내밀었다. 사교계에서 만난 어색한 사이가 아닌, 소꿉친구이니 할 수 있는 악수였다.
우정의 표시.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멜리아가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악수했다. 마주 잡아 오는 손에 레이스 장갑이 끼워져 있는 걸 보고 그는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작은 손을 단단히 잡았다. 그의 손은 소녀의 손보다 한참 더 크고, 조금 더 따뜻했다.
“……안녕.”
먼지를 털면서 멀어지는 알렉스의 뒷모습을 보며 소녀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이 함께하면 분명 엄청난 시선을 받을 텐데. 두 집안의 아이들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양가는 물론이요 온 마을이 뒤집힐 일인 데다가 자신이 파티에 참석하면 어떤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지 몰랐다.
지금은 괜찮다고 해도 파티에서 타인들의 안 좋은 시선을 경험하고 나면 두 집안을 화해하게 하고 싶다는 그의 생각은 낙엽처럼 멀리 날아갈 수도 있었다.
백번 양보해서 그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랑 같이 있으면 ‘그걸’ 또 보게 될 텐데.”
소녀는 무릎을 껴안으며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는 알렉스와 달리 아멜리아는 그때의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알았다. 그가 ‘그들’을 끔찍이도 두려워한다는 걸. 그리고 그가 기억을 잃은 이유는 아마도, 그것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였을 거라는 것도.
“괜히 간다고 했나…….”
자신이 괜한 욕심을 부린 건 아닌가, 벌써 걱정이 되는 아멜리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