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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오후가 되어 조용히 집에 돌아온 아멜리아는 옷장을 열고 토요일에 입을 드레스를 고르고 있었다. 사교 모임에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최근 유행이 무엇인지도 알 길이 없었지만, 에스코트하기로 한 알렉스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는 신경을 쓰고 싶었다.
다행이라면 샌더즈가에는 전담 드레스 숍이 있어 철마다 그때의 유행에 어울리는 신작들을 몇 점씩 보내온다는 거였다.
비취색 서머 드레스와 크림색 레이스 드레스를 꺼내 놓고 눈을 가늘게 뜨고 고민하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멜리아, 들어가도 되니?”
“빈센트 오빠.”
소녀가 활짝 웃으며 자신의 둘째 오빠를 맞았다. 빈센트 샌더즈는 현재 대학생으로, 방학 때가 되어 집으로 내려와 가족 사업을 배우는 중이었다. 그는 아멜리아의 두 오빠 중 막내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이렇게 귀여운 드레스를 입고 어디 가려고?”
옷을 꺼내 놓은 걸 보고 빈센트가 감탄했다. 네게는 비취색 드레스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고 깨알같이 제 취향을 어필하고는 저걸 입고 오빠랑 데이트를 해 주면 안 되느냐고 물어 왔다.
“그냥……, 요즘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
“그래? 그럼 오빠랑 데이트를 핑계로 기차를 타고 좀 멀리 다녀올까? 레이븐보다 좀 큰 도시로 가서 젊은 아가씨들의 유행을 알아 오는 거야.”
“아냐,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던 건 아니었어. 오빠 요즘 바쁘잖아.”
빈센트의 제안에 깜짝 놀라 손을 내저으니 그가 활짝 웃으며 “내 마음을 치유할 시간이 필요해.”라고 말했다. 회사 일이 상대적으로 서툰 자신에게 아버지랑 형이 매일같이 잔소리를 해서 도저히 못 해 먹겠다고 그가 투덜거렸다.
“다음 주 중에 하루 정도는 이 오빠에게 시간을 내 줘. 공주님을 모시고 갈 맛있는 티 하우스도 알아 두었으니까.”
“어, 응. 진짜 괜찮겠어, 오빠? 나중에 아버지에게 더 야단맞는 건 아니고?”
“우리 공주랑 함께한다면 면죄부는 확실할 거야.”
“설마 처음부터 그게 목적인 건…….”
“그럴 리가! 아멜리아, 이 오빠를 의심하는 거야?”
빈센트는 보란 듯이 과장되게 슬퍼했다. 점잖은 큰오빠와 달리 장난이 심한 작은오빠는 어릴 때부터 소녀를 골탕 먹이는 일을 많이 한 터라 어쩌면 이번 외출 제안도 아멜리아를 핑계로 자신이 놀고 싶은 걸 수도 있었다.
그래도 평소 가 보지 못한 곳에 데려다준다는 말에 혹한 소녀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렇지, 착하다. 예쁘게 입고 맛있는 거 먹고 기분 전환 하고 오자.”
여동생의 머리를 힘차게 쓰다듬은 빈센트는 그 말을 남기고 손을 흔들며 방을 나섰다.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배웅하던 아멜리아가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오빠. 나 찾아온 이유가 그거였어?”
“아! 맞다!”
그는 방문을 나서다 말고 다시 몸을 돌려 아멜리아에게로 다가왔다.
“다른 얘기만 실컷 하고 갈 뻔했네! 내 정신 좀 봐. 쥴스에게 이야기 들었거든.”
“아. 아침에…….”
“그 녀석 혼자 나타났다며. 제정신이 아닌가 본 데, 감히 어딜 찾아와! 너도 혹시 지나가다 마주치면 얼른 집으로 도망 오라고, 그 말 하려고.”
“오빠. 누가 들으면 알렉스가 나 괴롭히려는 줄 알겠어.”
“아니야? 그 난리를 치고 떠나 놓고 왜 인제 와서 기웃거리는데?”
“알렉스 그런 사람 아니……, 아닐 거야.”
“……너 어릴 때 친한 친구였다고 혹시라도 방심하면 안 된다. 이 오빠가 그 녀석 근성을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 안 돼. 개강하면 만나게 될 테니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빈센트 오빠랑 같은 대학에 가는 거야?”
“그래. 그게 오더라고? 후배로 들어오니 많이 귀여워해 줘야지.”
“오빠……, 악당처럼 그러지 마. 잘해 줘.”
아멜리아가 한숨을 쉬며 빈센트를 나무라자,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가 주장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넌 이 오빠에게 악당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섭섭하게. 내 여동생 눈에서 눈물 뽑은 자식을 왜 예쁘게 봐줘? 너 그때 일주일간 울었어.”
“빈센트 오빠 성격에 엄청나게 괴롭힐 거 안 봐도 뻔하거든요? 개강하고 알렉스 괴롭혔다는 소리 들리면 나 오빠 부끄러워서 안 볼 거니까, 알아서 해.”
“아멜리아, 이 오빠는 너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라면 부디 참아 줘…….”
“크흑……, 여동생이 내 진심을 몰라줘. 너무 서럽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오빠의 마음을 몰라준다며 비극의 주인공처럼 슬퍼하던 빈센트는 아멜리아의 거듭되는 재촉에 못내 아쉬운 듯 망설이다 “안 괴롭힐게.”라고 대답하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방문을 나섰다.
그 말에 안도한 것도 잠시, 그는 복도로 나가며 “……많이는.”이라고 덧붙여 소녀가 “오빠아!”라고 소리를 꽥 지르게 했다.
“하여튼 고집은 정말 세……. 그렇게 싫을까. 이래서야 토요일에 만나기로 했다는 말을 꺼내기라도 하면 무슨 일을 벌일지 상상이 안 가네.”
외향적인 빈센트는 차분하고 과묵한 큰오빠 해리와는 어릴 적부터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나이 차가 많은 큰오빠는 딱딱해서 조금 어려웠고, 장난 심한 둘째 오빠는 주변 사람들 골탕 먹이기를 좋아해서 쉴 새 없이 말썽을 일으켰다.
아멜리아의 부모님조차 “둘을 섞어서 반으로 나누면 정말 좋을 텐데.”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로 극과 극의 오라버니들이었지만, 둘의 공통점은 모두 막내 여동생을 지극히 귀애한다는 거였다.
특히 멜포드가에서 있었던 사건 이후로 어린 여동생이 다른 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는 걸 깨닫게 된 후에는 그 증세가 더욱 심해졌다.
“그러고 보니, 알렉스는 해리 오빠랑 좀 닮은 부분이 있는 것 같네.”
차가운 수재형이라 그런가. 어른스러운 것도 그렇고 어딘가 닮았다 생각하던 소녀가 “아!” 하고 외쳤다.
“……‘그들’에게 예민한 것도 닮았어.”
가족 중 유일하게 아멜리아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해리였다는 걸 떠올리니 새삼스러웠다.
“몰래 이 이야기를 해 주면 해리 오빠 정도는 알렉스를 이해해 줄지도 몰라…….”
언제 이 이야기를 꺼낼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소녀는 아주 조그만 가능성에 부질없는 희망을 품어 보기로 했다.
♠ ♠ ♠
토요일 오전, 아멜리아가 알렉스를 기다리기 위해 조용히 정문 앞으로 나가니 길 건너에 검은색 마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멜리아, 여기야.”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가 손을 흔들었다. 진한 감색 정장을 단정하게 입은 모습이 빈틈없이 완벽해 보여서 소녀보다 훨씬 연상의 어른 같아 보였다.
아멜리아의 시선에 놀라움이 담기자, 그 의미를 잘못 이해했는지 살짝 당황한 표정이 된 그가 말했다.
“어떤 걸 입어야 할지 몰라서 이걸 골랐는데, 어색해 보이나?”
“아냐. 저기, 알렉스 멋있어.”
“그래? 다행이다……. 아멜리아가 보기에 별로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거든. 부끄럽지만 나는 아가씨들의 취향을 잘 몰라.”
이렇게 멋지게 입는 사람이 부끄럽다고 하면 부담이 가중되어 몸 둘 바 모르게 되는 건 아멜리아 쪽이었다. 세련된 알렉스에게조차 그런 고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다행이었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아가씨라고 모두 유행에 민감한 것은 아니었다.
‘하긴, 알렉스는 이곳보다 큰 도시에서 사니까…….’
도시의 아가씨들은 자신보다 훨씬 세련되고 유행에 민감할 터였다. 소녀는 열여섯이 되도록 아직도 맨발로 잔디를 밟거나 평원에서 낮잠을 자는 걸 좋아하지만 또래의 다른 아가씨들은 그보다는 더 꾸미기를 좋아하고 실내 생활을 선호한다는 말을 둘째 오빠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나처럼 보는 눈이 없는 사람이 멋지다는 말을 해도 되었던 걸까? 하고 고민하는―하지만 아무리 봐도 멋진데―동안, 그의 “너도 예쁘다.”라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응?”
“우리 서로 맞춘 것처럼 색상이 잘 맞아서 신기하네.”
“……이상해 보이지는 않아?”
“아니. 아주 귀여워. 푸른색이 네 눈동자 색과 정말 잘 어울려.”
와아……. 그 말에 아멜리아가 작게 입을 벌렸다. 이게 어른의 경험치라는 거구나.
평소 접하기 힘든 고급 사교 기술의 등장에 소녀는 넋을 잃었다. 저런 진지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찬사를 연발해 주면 진짜라고 믿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아멜리아는 알렉스에게 존경의 시선을 보냈다. 저 익숙한 태도라니. 그의 매너에 감탄하며 이미 빨갛게 달아오른 제 얼굴을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고마워, 그런데 좀 부끄럽다.”
양손으로 볼을 감싸 안고 배시시 웃자, 그제야 알렉스의 얼굴도 조금 붉어졌다. 그녀의 동요가 뒤늦게 전해졌는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래도 제가 서투르다 보니 상대방까지 어색함을 의식하게 해 버린 듯싶어 후회스러웠다. 깊게 심호흡을 한 소녀는 칭찬 한마디에 너무 당황하지 말자며 자신을 잘 다독였다.
알렉스가 마차의 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레이스 장갑을 낀 아멜리아의 손을 이끌어 좌석에 앉게 하고는 곧이어 반대편으로 가 자신이 탑승했다. 문이 닫히는 걸 신호로 마차는 출발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알렉스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소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소매가 둥근 비취색 서머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앤티크 인형처럼 귀여웠다.
곱슬한 옅은 갈색 머리를 느슨하게 뒤로 땋아서 리본을 달았는데 그 지나치지 않은 치장이 고급스러운 푸른색 드레스와 묘하게 어울려 전체적으로 보드랍고 따뜻한 인상을 주었다.
샌더즈가의 남자들이 아멜리아를 무척이나 귀여워한다는 소식은 그도 소문을 통해 알고 있었다. 제게도 여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외동으로 자란 그는 샌더즈가의 두 아들이 부러웠다.
하긴 이렇게 예쁜 여동생이라면 자신도 남부럽지 않게 애지중지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틀에 박힌 고루한 칭찬에도 수줍은 듯 웃어 주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알렉스는 자신에게 특별한 말재주가 없는 것을 새삼 안타깝게 생각했다. 평소에 연습이라도 좀 해 봤으면 이럴 때 쓸모 있었을 거라는 뒤늦은 후회가 일 정도였다.
소녀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평소 파티에서 만나던 또래의 아가씨들을 상대할 때와 다르다는 것을 그도 눈치챘지만, 정확하게 뭐가 어떻게 다른 건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소녀가 경계심을 풀고 제게 편히 대해 주었으면 싶었다. 그녀와 연락이 끊기는 일 없이 계속 소꿉친구로 자랐다면 좋았을 걸이라는 아쉬운 생각도 잠시 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앞에서 어색하게 침묵하는 소녀의 모습을 무작정 지켜봐야 하는 것이었다. 알렉스를 대하는 것이 낯설어 뻣뻣하게 긴장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두 사람 사이에 공백이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저렇게까지 어려워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서운함에 가벼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겁먹고 쩔쩔매는 모습을 보려고 초대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소녀는 그를 지나치게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양가의 집안 문제도 있고, 오랜만에 보는 자신은 소꿉친구라기보다는 낯선 이방인으로 인식될 확률이 더 커 보였다. 어린 시절의 제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 것이 새삼 아쉬움으로 돌아왔다.
오후가 되어 조용히 집에 돌아온 아멜리아는 옷장을 열고 토요일에 입을 드레스를 고르고 있었다. 사교 모임에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최근 유행이 무엇인지도 알 길이 없었지만, 에스코트하기로 한 알렉스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는 신경을 쓰고 싶었다.
다행이라면 샌더즈가에는 전담 드레스 숍이 있어 철마다 그때의 유행에 어울리는 신작들을 몇 점씩 보내온다는 거였다.
비취색 서머 드레스와 크림색 레이스 드레스를 꺼내 놓고 눈을 가늘게 뜨고 고민하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멜리아, 들어가도 되니?”
“빈센트 오빠.”
소녀가 활짝 웃으며 자신의 둘째 오빠를 맞았다. 빈센트 샌더즈는 현재 대학생으로, 방학 때가 되어 집으로 내려와 가족 사업을 배우는 중이었다. 그는 아멜리아의 두 오빠 중 막내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이렇게 귀여운 드레스를 입고 어디 가려고?”
옷을 꺼내 놓은 걸 보고 빈센트가 감탄했다. 네게는 비취색 드레스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고 깨알같이 제 취향을 어필하고는 저걸 입고 오빠랑 데이트를 해 주면 안 되느냐고 물어 왔다.
“그냥……, 요즘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
“그래? 그럼 오빠랑 데이트를 핑계로 기차를 타고 좀 멀리 다녀올까? 레이븐보다 좀 큰 도시로 가서 젊은 아가씨들의 유행을 알아 오는 거야.”
“아냐,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던 건 아니었어. 오빠 요즘 바쁘잖아.”
빈센트의 제안에 깜짝 놀라 손을 내저으니 그가 활짝 웃으며 “내 마음을 치유할 시간이 필요해.”라고 말했다. 회사 일이 상대적으로 서툰 자신에게 아버지랑 형이 매일같이 잔소리를 해서 도저히 못 해 먹겠다고 그가 투덜거렸다.
“다음 주 중에 하루 정도는 이 오빠에게 시간을 내 줘. 공주님을 모시고 갈 맛있는 티 하우스도 알아 두었으니까.”
“어, 응. 진짜 괜찮겠어, 오빠? 나중에 아버지에게 더 야단맞는 건 아니고?”
“우리 공주랑 함께한다면 면죄부는 확실할 거야.”
“설마 처음부터 그게 목적인 건…….”
“그럴 리가! 아멜리아, 이 오빠를 의심하는 거야?”
빈센트는 보란 듯이 과장되게 슬퍼했다. 점잖은 큰오빠와 달리 장난이 심한 작은오빠는 어릴 때부터 소녀를 골탕 먹이는 일을 많이 한 터라 어쩌면 이번 외출 제안도 아멜리아를 핑계로 자신이 놀고 싶은 걸 수도 있었다.
그래도 평소 가 보지 못한 곳에 데려다준다는 말에 혹한 소녀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렇지, 착하다. 예쁘게 입고 맛있는 거 먹고 기분 전환 하고 오자.”
여동생의 머리를 힘차게 쓰다듬은 빈센트는 그 말을 남기고 손을 흔들며 방을 나섰다.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배웅하던 아멜리아가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오빠. 나 찾아온 이유가 그거였어?”
“아! 맞다!”
그는 방문을 나서다 말고 다시 몸을 돌려 아멜리아에게로 다가왔다.
“다른 얘기만 실컷 하고 갈 뻔했네! 내 정신 좀 봐. 쥴스에게 이야기 들었거든.”
“아. 아침에…….”
“그 녀석 혼자 나타났다며. 제정신이 아닌가 본 데, 감히 어딜 찾아와! 너도 혹시 지나가다 마주치면 얼른 집으로 도망 오라고, 그 말 하려고.”
“오빠. 누가 들으면 알렉스가 나 괴롭히려는 줄 알겠어.”
“아니야? 그 난리를 치고 떠나 놓고 왜 인제 와서 기웃거리는데?”
“알렉스 그런 사람 아니……, 아닐 거야.”
“……너 어릴 때 친한 친구였다고 혹시라도 방심하면 안 된다. 이 오빠가 그 녀석 근성을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 안 돼. 개강하면 만나게 될 테니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빈센트 오빠랑 같은 대학에 가는 거야?”
“그래. 그게 오더라고? 후배로 들어오니 많이 귀여워해 줘야지.”
“오빠……, 악당처럼 그러지 마. 잘해 줘.”
아멜리아가 한숨을 쉬며 빈센트를 나무라자,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가 주장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넌 이 오빠에게 악당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섭섭하게. 내 여동생 눈에서 눈물 뽑은 자식을 왜 예쁘게 봐줘? 너 그때 일주일간 울었어.”
“빈센트 오빠 성격에 엄청나게 괴롭힐 거 안 봐도 뻔하거든요? 개강하고 알렉스 괴롭혔다는 소리 들리면 나 오빠 부끄러워서 안 볼 거니까, 알아서 해.”
“아멜리아, 이 오빠는 너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라면 부디 참아 줘…….”
“크흑……, 여동생이 내 진심을 몰라줘. 너무 서럽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오빠의 마음을 몰라준다며 비극의 주인공처럼 슬퍼하던 빈센트는 아멜리아의 거듭되는 재촉에 못내 아쉬운 듯 망설이다 “안 괴롭힐게.”라고 대답하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방문을 나섰다.
그 말에 안도한 것도 잠시, 그는 복도로 나가며 “……많이는.”이라고 덧붙여 소녀가 “오빠아!”라고 소리를 꽥 지르게 했다.
“하여튼 고집은 정말 세……. 그렇게 싫을까. 이래서야 토요일에 만나기로 했다는 말을 꺼내기라도 하면 무슨 일을 벌일지 상상이 안 가네.”
외향적인 빈센트는 차분하고 과묵한 큰오빠 해리와는 어릴 적부터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나이 차가 많은 큰오빠는 딱딱해서 조금 어려웠고, 장난 심한 둘째 오빠는 주변 사람들 골탕 먹이기를 좋아해서 쉴 새 없이 말썽을 일으켰다.
아멜리아의 부모님조차 “둘을 섞어서 반으로 나누면 정말 좋을 텐데.”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로 극과 극의 오라버니들이었지만, 둘의 공통점은 모두 막내 여동생을 지극히 귀애한다는 거였다.
특히 멜포드가에서 있었던 사건 이후로 어린 여동생이 다른 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는 걸 깨닫게 된 후에는 그 증세가 더욱 심해졌다.
“그러고 보니, 알렉스는 해리 오빠랑 좀 닮은 부분이 있는 것 같네.”
차가운 수재형이라 그런가. 어른스러운 것도 그렇고 어딘가 닮았다 생각하던 소녀가 “아!” 하고 외쳤다.
“……‘그들’에게 예민한 것도 닮았어.”
가족 중 유일하게 아멜리아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해리였다는 걸 떠올리니 새삼스러웠다.
“몰래 이 이야기를 해 주면 해리 오빠 정도는 알렉스를 이해해 줄지도 몰라…….”
언제 이 이야기를 꺼낼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소녀는 아주 조그만 가능성에 부질없는 희망을 품어 보기로 했다.
토요일 오전, 아멜리아가 알렉스를 기다리기 위해 조용히 정문 앞으로 나가니 길 건너에 검은색 마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멜리아, 여기야.”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가 손을 흔들었다. 진한 감색 정장을 단정하게 입은 모습이 빈틈없이 완벽해 보여서 소녀보다 훨씬 연상의 어른 같아 보였다.
아멜리아의 시선에 놀라움이 담기자, 그 의미를 잘못 이해했는지 살짝 당황한 표정이 된 그가 말했다.
“어떤 걸 입어야 할지 몰라서 이걸 골랐는데, 어색해 보이나?”
“아냐. 저기, 알렉스 멋있어.”
“그래? 다행이다……. 아멜리아가 보기에 별로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거든. 부끄럽지만 나는 아가씨들의 취향을 잘 몰라.”
이렇게 멋지게 입는 사람이 부끄럽다고 하면 부담이 가중되어 몸 둘 바 모르게 되는 건 아멜리아 쪽이었다. 세련된 알렉스에게조차 그런 고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다행이었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아가씨라고 모두 유행에 민감한 것은 아니었다.
‘하긴, 알렉스는 이곳보다 큰 도시에서 사니까…….’
도시의 아가씨들은 자신보다 훨씬 세련되고 유행에 민감할 터였다. 소녀는 열여섯이 되도록 아직도 맨발로 잔디를 밟거나 평원에서 낮잠을 자는 걸 좋아하지만 또래의 다른 아가씨들은 그보다는 더 꾸미기를 좋아하고 실내 생활을 선호한다는 말을 둘째 오빠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나처럼 보는 눈이 없는 사람이 멋지다는 말을 해도 되었던 걸까? 하고 고민하는―하지만 아무리 봐도 멋진데―동안, 그의 “너도 예쁘다.”라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응?”
“우리 서로 맞춘 것처럼 색상이 잘 맞아서 신기하네.”
“……이상해 보이지는 않아?”
“아니. 아주 귀여워. 푸른색이 네 눈동자 색과 정말 잘 어울려.”
와아……. 그 말에 아멜리아가 작게 입을 벌렸다. 이게 어른의 경험치라는 거구나.
평소 접하기 힘든 고급 사교 기술의 등장에 소녀는 넋을 잃었다. 저런 진지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찬사를 연발해 주면 진짜라고 믿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아멜리아는 알렉스에게 존경의 시선을 보냈다. 저 익숙한 태도라니. 그의 매너에 감탄하며 이미 빨갛게 달아오른 제 얼굴을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고마워, 그런데 좀 부끄럽다.”
양손으로 볼을 감싸 안고 배시시 웃자, 그제야 알렉스의 얼굴도 조금 붉어졌다. 그녀의 동요가 뒤늦게 전해졌는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래도 제가 서투르다 보니 상대방까지 어색함을 의식하게 해 버린 듯싶어 후회스러웠다. 깊게 심호흡을 한 소녀는 칭찬 한마디에 너무 당황하지 말자며 자신을 잘 다독였다.
알렉스가 마차의 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레이스 장갑을 낀 아멜리아의 손을 이끌어 좌석에 앉게 하고는 곧이어 반대편으로 가 자신이 탑승했다. 문이 닫히는 걸 신호로 마차는 출발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알렉스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소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소매가 둥근 비취색 서머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앤티크 인형처럼 귀여웠다.
곱슬한 옅은 갈색 머리를 느슨하게 뒤로 땋아서 리본을 달았는데 그 지나치지 않은 치장이 고급스러운 푸른색 드레스와 묘하게 어울려 전체적으로 보드랍고 따뜻한 인상을 주었다.
샌더즈가의 남자들이 아멜리아를 무척이나 귀여워한다는 소식은 그도 소문을 통해 알고 있었다. 제게도 여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외동으로 자란 그는 샌더즈가의 두 아들이 부러웠다.
하긴 이렇게 예쁜 여동생이라면 자신도 남부럽지 않게 애지중지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틀에 박힌 고루한 칭찬에도 수줍은 듯 웃어 주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알렉스는 자신에게 특별한 말재주가 없는 것을 새삼 안타깝게 생각했다. 평소에 연습이라도 좀 해 봤으면 이럴 때 쓸모 있었을 거라는 뒤늦은 후회가 일 정도였다.
소녀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평소 파티에서 만나던 또래의 아가씨들을 상대할 때와 다르다는 것을 그도 눈치챘지만, 정확하게 뭐가 어떻게 다른 건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소녀가 경계심을 풀고 제게 편히 대해 주었으면 싶었다. 그녀와 연락이 끊기는 일 없이 계속 소꿉친구로 자랐다면 좋았을 걸이라는 아쉬운 생각도 잠시 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앞에서 어색하게 침묵하는 소녀의 모습을 무작정 지켜봐야 하는 것이었다. 알렉스를 대하는 것이 낯설어 뻣뻣하게 긴장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두 사람 사이에 공백이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저렇게까지 어려워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서운함에 가벼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겁먹고 쩔쩔매는 모습을 보려고 초대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소녀는 그를 지나치게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양가의 집안 문제도 있고, 오랜만에 보는 자신은 소꿉친구라기보다는 낯선 이방인으로 인식될 확률이 더 커 보였다. 어린 시절의 제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 것이 새삼 아쉬움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