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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아멜리아의 경우, 오빠들 외의 젊은 신사와 파티에 참석한 것도, 에스코트를 받아 보는 것도 전부 이번이 처음이었다.
혹 실수가 있을까 싶어 어디 흐트러진 곳이 없나 빠르게 검사도 해 보고, 침묵이 버거울 때면 제 쪽에서 무슨 말이라도 건네야 했던 걸까 조바심도 났다. 거기다 조금 전부터 지나치게 크게 들리는 심장 소리가 신경 쓰여 유난히 조심스러워진 아멜리아였다.
알렉스의 말대로, 그의 감색 정장과 그녀의 드레스는 푸른빛을 기조로 서로 튀지 않고 잘 어울렸다. 저 자신도 이 옷을 고른 걸 다행이라고 안도하는데 불쑥, 그가 장식이 달린 작은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나한테 주는 거야?”
말없이 내밀어진 상자를 받아 든 소녀가 조심스레 뚜껑을 열어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자 안에는 귀여운 리본에 촘촘하게 엮인 물망초 꽃다발이 들어 있었다.
“리슬릿 플라워야. 네가 어떤 색의 드레스를 입을지 몰라서 내 정장 색상을 베이스로 멋대로 골랐어.”
정장의 색이고 뭐고, 사실은 작고 오밀조밀한 꽃들이 그녀를 떠올려서 무턱대고 고른 거라고는 차마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 만나자마자 파트너 제안을 한 것이 마음에 걸려 마을의 꽃집에서 한참을 헤매다 고른 선물이었다.
“우와……. 너무 예쁘다.”
“그렇게 봐 주면 다행이고.”
알렉스는 큰 짐을 덜어 낸 듯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고, 아멜리아는 자신의 두 오빠에게도 받아 본 적 없는 섬세한 배려에 크게 감탄했다.
연한 푸른색의 물망초 꽃줄기를 엮은 작은 꽃다발은 미색 리본으로 손목에 묶어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작고 깜찍한 크기의 꽃들이 손목을 따라 둘린 후 손등을 타고 살짝 내려오는, 매우 섬세한 디자인이었다.
아직 우아한 것보다는 귀여운 것을 더 좋아하는 아멜리아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랑스러운 꽃 선물을 준비한 알렉스 덕분에 소녀의 오해는 한층 더 커졌다.
‘……이런 일에 정말 익숙한가 봐.’
빈센트 오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지나치게 매너가 좋은 남자는 놀아 본 경험이 풍부한 바람둥이이니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신사는 숙녀에게 거의 다 매너가 좋은데 그걸 어떻게 구분하느냐는 말에 “만나 보면 알게 된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그는 또 “너 같은 숙맥이 가장 위험해. 달콤한 사탕을 주는 친절한 사람이면 아무나 따라가는 꼬마랑 다를 바 없으니까.”라며 아멜리아를 어린아이 취급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이런 의미였지 않았나 싶었다.
뒤늦게나마 오빠의 말을 이해하게 된 소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안 봤는데, 내 소꿉친구는 도시에서 엄청난 바람둥이로 자랐구나. 안타까운 마음이 반, 아쉬운 마음이 반이었다.
왜 아쉽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리슬릿 플라워는 손목에 리본 형태로 묶어야 장식이 완성된다. 아멜리아가 한 손으로 묶기는 불가능한 터라 알렉스가 리본을 매어 주어야 했는데, 소녀의 요청대로 코르사주를 손에 들게 된 알렉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알렉스?”
손목을 내민 채로 기다리던 아멜리아에게 청년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백했다.
“……실은 나 리본을 어떻게 묶는지 몰라.”
“아하하.”
그제야 긴장이 풀어진 듯 웃음이 터진 소녀가 밝은 표정으로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될 거라며 그를 안심시켰다.
“장갑 낀 채로 묶을 거야?”
“으, 응. 이대로 올려 줘.”
리슬릿 플라워를 장갑 위에 착용시켜 달라는 말에 알렉스가 놀라 물었다.
이대로라면 파티 내내, 장갑을 낀 채 불편하게 지내야 하는데도 소녀는 “레이스 원단 위로 꽃이 올라가는 게 훨씬 더 귀여워.”라면서 한사코 벗으려 들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고집대로 장갑 위로 리본을 돌려 묶기로 했다. 오른쪽 왼쪽, 고리를 만들어서 꺾고, 밑으로 넣어서 루프를 펼치고. 그러나 소녀의 조곤조곤한 지도에도 알렉스의 리본은 좀처럼 예쁘게 완성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마차에 탄 두 사람은 파티장에 가는 내내 리본을 묶어야 했다. 마차는 알렉스가 혼자 힘으로 리본 묶기에 성공했을 때쯤 목적지에 도착했다.
“리본이 너덜너덜해졌네……. 미안.”
“괜찮아. 손목 안쪽이라 걱정할 만큼 티는 안 나.”
여러 번 묶었다 푸르기를 반복하느라 깨끗하게 다려져 있던 리본이 잔뜩 구겨졌지만 아멜리아는 상관없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묶은 매듭이 가장 예쁘게 매어졌다며 흡족한 표정으로 들여다보는 소녀의 모습에 알렉스는 쓰게 웃었다.
예쁘게 묶이기는커녕, 도착하기 직전에 찌그러진 리본이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판이었다.
난이도도 모른 채 꽃집에서 추천하는 대로 골랐던 게 실수였다. 리본 묶기라는 난관이 도사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물망초 꽃 수술 반쪽만큼도 하지 않았던 그는 이 고비를 넘긴 것을 신께 감사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냥 코르사주 브로치같이 간편한 것을 준비했어야 했어.’
에스코트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준비에 미숙한 점이 많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신기한 듯 연신 제 손목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소녀를 허탈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새, 마차는 오늘의 파티 장소인 코번 가문의 저택 사유지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되는 첫 사교 모임이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실수 없이 잘 다녀와야 한다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알렉스는 마차에서 내려 아가씨의 손을 잡았다.
“알렉스! 이게 얼마 만이야.”
“하워드. 초대해 줘서 고마워.”
“무슨, 네가 돌아왔다는데 보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드로잉 룸에서 열리는 간단한 티파티니까 너무 격식 차리지 않아도 돼. 그나저나 내려오자마자 에스코트할 아가씨까지 찾은 거야? 이거 대단…….”
“안녕하세요.”
“……샌더즈 영애?”
의외의 사람을 보게 되었다는 표정으로 하워드가 소녀를 바라보았다. 시골 마을 사정은 좁은 만큼 빤했다. 이웃에 사는 귀족들끼리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닐 텐데 하워드의 반응은 낯선 이를 대하는 것처럼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아멜리아와 알렉스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다 당황한 듯 물었다.
“두 사람이 같이 온 거야?”
“아멜리아 샌더즈 양. 이미 알고 있지? 나랑 소꿉친구인.”
“아, 그럼. ……샌더즈 양은 물론 알고 있지. 오랜만에 뵙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하워드가 다시 소녀에게 정중한 환영 인사를 건넸고 아멜리아는 그런 그에게 아무 일 없다는 듯 답인사를 돌려주었다.
두 사람을 파티 장소로 안내한 그는 “초반에는 접객으로 조금 바빠. 후에 보자.”라며 알렉스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넓은 거실의 한쪽 구석에 디저트며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멜리아에게 줄 음료를 고르던 알렉스는 기묘한 시선을 느끼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는 하워드가 이곳저곳을 다니며 인사를 건네는 등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자신이 있는 곳을, 그것도 아멜리아 쪽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드로잉 룸은 손님맞이를 위해 실내로 통하는 모든 문을 열어 둔 상태였다.
날씨가 쾌청해서인지 정원으로 이어지도록 연결된 프렌치 도어 역시 전부 열려 있었고, 잘 가꿔진 꽃들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 약간의 다과가 밖에도 준비되어 있었다.
새로 도착한 사람들을 호기심의 시선으로 지켜보던 손님들 역시, 아멜리아를 발견하고는 다들 술렁였다.
“흐음…….”
대체 이 반응은 뭐란 말인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눈썹을 찡그린 알렉스가 조용히 아멜리아를 살폈지만, 소녀는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평온해 보였다.
서로의 간단한 인사가 끝난 후, 알렉스는 하워드의 손에 이끌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청년들의 무리와 마주해야 했다. 잠시 홀로 남겨진 아멜리아가 디저트가 마련된 테이블로 가서 작은 컵에 여름 과일이 가득 들어간 트라이플을 담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자신을 부르는 작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큰 키에 마른 체형을 한, 아멜리아 또래로 보이는 아가씨가 쑥스러운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조심스러운 성격인지 건네는 목소리가 아주 가늘었다.
“네. 안녕하세요.”
“저, 실례가 안 되면 같이 어울려도 괜찮을까요? 오라버니를 따라왔는데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럼요. 저도 그래요.”
“아까 같이 오신 검은 머리 신사분이 오빠세요?”
“친오빠는 아닌데, 비슷해요.”
“그렇구나. 멋진 분이라 좋겠어요. 저희 오라버니는 벌써 배가 나오지 뭐예요.”
부끄러운 듯 웃는 소녀에게 아멜리아는 방금 뜬 트라이플을 건네고 자신의 것을 다시 뜨기 시작했다.
“메이벨이라고 해요.”
“아멜리아예요.”
“반가워요, 아멜리아. 여름휴가로 가족 모두 이곳으로 놀러 왔는데 친구가 없어서 외로웠거든요. 만나게 돼서 기뻐요.”
“저도요.”
진갈색 머리를 하나로 땋아 뒤로 틀어 올린 소녀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듯 아멜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볼을 붉혔다. 두 소녀는 정원의 벤치에 앉아 사이좋게 트라이플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아멜리아를 혼자 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던 알렉스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소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안심하는데, 파티 주최자인 하워드가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못 보던 새에 키도 많이 크고, 아주 멋있어졌네.”
“그래? 너도 예전과는 비교하기 힘들게 변했는걸.”
“그건 그렇지. 둘 다 꼬맹이 시절에 본 게 전부니까. 그런데 어쩌다가 샌더즈가 영애랑 같이 오게 된 거야? 너희 집이랑 사이 나쁘지 않았어?”
“……너도 그걸 알아?”
“어이, 유명하잖아. 너희 집안 싸운 거. 두 사람이 한 장소에 있는 건 평생 못 볼 줄 알았는데. 거기다가, 영애도 워낙 유명하고.”
“아멜리아? 그래, 조금 전에 그건 뭐였지?”
소녀가 소개될 때의 껄끄럽던 공기를 떠올리며 알렉스가 인상을 쓰니, 하워드가 답답하다며 가슴을 쳤다.
“……아는 게 대체 뭐가 있냐.”
“시간 끌지 말고 그냥 설명해 봐.”
“넌 예전에 떠나서 기억 못 할지 몰라도, 저 영애는 이 근방에서는 평이 안 좋은 거로 유명하다고.”
“그럴 리가.”
저 순진하고 착한 아이에게 무슨 막말을 하느냐는 얼굴로 바라보자, 주변을 둘러보던 하워드가 그의 팔을 끌고 구석으로 가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영애 주변에서 안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났거든.”
“말도 안 되는 소리.”
“정말이야. 어릴 때부터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어. 샌더즈가가 어떤 집안인데. 누가 헛소문 떠들고 다니는 걸 가만히 뒀겠어? 처음에는 다들 무시했지만, 소문이 계속되니 그 집안에서도 대응을 멈추더라고.”
“하워드.”
질책의 어조를 담고 그의 이름을 부르자, 하워드가 한숨을 푹 쉬더니 덧붙였다.
“한참 후가 되어서야 나온 말이지만 네가 쓰러졌던 것도, 두 집안이 그렇게 된 것도 아멜리아 영애 탓일 가능성이 크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뭐라고?”
금시초문이었다. 자신이 앓아누웠던 일이 아멜리아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소문났다고?
물론 그때 두 아이가 쓰러졌던 건 사실이지만, 그걸 소녀의 탓으로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문득 자신의 집사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알렉스는 그것을 그저 팔이 안으로 굽은 의견이었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고야 양가가 그렇게 대판 싸울 일도 없었을 거 아니냐.”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당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알렉스는 달리 할 말을 찾을 수 없어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런 건 아닐 거야.”
“워낙 많은 일이 있어서 말이지, 그중 하나는 나도 본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