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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알렉스가 하워드와 구석진 곳에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동안, 파티에 초대된 한 무리의 다른 아가씨들 역시 긴 소파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실비아, 그 반지가 약혼자분께 받은 건가요?”
“어머,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이본. 바로 그렇답니다.”
실비아라 불린 아가씨는 누가 봐도 자랑하기 위해 반지를 꺼내 보였다. 클래식한 정사각형의 프린세스 컷으로 다듬어진 보석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반짝였다.
“다이아몬드인가요. 보석이 정말 크군요.”
“3캐럿 정도 될 거예요. 약혼자의 집안 대대로 며느리에게 물려주는 반지랍니다. 귀걸이랑 세트죠.”
“어쩜. 전통 있는 가문은 예물도 남다르군요.”
“전 잘 모르겠는데 다들 주인 만난 것처럼 잘 어울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럼요, 실비아에게 정말 잘 어울려요.”
부러운 듯 바라보던 아가씨 중 누군가가 자신이 한 번 끼워 봐도 좋겠냐고 물었고, 실비아는 기분 좋게 그것을 승낙했다.
“……그리 깊지 않은 강이었는데, 여름마다 사람들이 꼭 죽는 거야. 뱃놀이하다가 전복되어 익사하거나, 폭우 중에 다리를 건너다 빠지거나.”
“엘포트 강 말인가?”
“그래. 어릴 때는 다들 거기서 놀기도 하잖아. 그리 위험한 곳이 아닌데 해마다 여름이면 사고가 나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그러다 몇 년 전인가 한밤중에 마을에서 아이가 사라졌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다들 횃불을 들고 갈 만한 곳을 다 찾아다녔어.”
“그게 아멜리아와 무슨 상관인데.”
“마침 폭우도 오고, 딱 그 강에서 사람이 죽을 시기랑 맞물린 것을 떠올리고 다들 강가로 향했거든. 아이가 거기 있더라고.”
“찾은 건가?”
“그래. 강에 반쯤 빠진 아이를 아멜리아 영애가 잡고 있었어.”
“뭐……?”
“어린아이는 물을 잔뜩 먹어서 의식이 없고, 영애도 비를 맞은 건지 강에 들어간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젖어 있었고. 한밤중에 귀족 집 아가씨가 밖에 나와서, 그것도 실종 신고가 들어간 어린애랑 강물에 있었다는 것도 꺼림칙한 일인데 하필 발견했을 때 모양새가 강에 밀어 넣으려던 건지 꺼내려던 건지 모를 정도로 애매했거든.”
“…….”
“나도 청년 수색대로 참가해서 그 장면을 목격했어. 무엇보다 아이가 무사했으니 그거면 됐다 싶어 발견한 사람들끼리 입을 맞춰서 좋게 넘어가기로 했는데……. 지금도 가끔 생각하면 무서워. 어째서 아멜리아 영애가 한밤중에 자신의 저택에서도 한참 떨어진 강에서 아이를 데리고 있었는지 모르겠어.”
“본인은 뭐라고 해?”
“물어봤지. 영애가 왜 여기 있느냐, 아이는 어떻게 된 거냐……. 한마디도 하지 않더라고.”
하워드가 들려준 이야기들은 전부 허무맹랑할 정도로 어이없는 내용이었다.
구비동화에 나오는 공포 이야기도 아니고 이런 걸 믿으라고? 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자 하워드 역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다음 날 아이가 정신을 차리고 영애에게 잘못이 없다고 말해서 사건은 그대로 흐지부지 넘어갈 수 있었지. 한 가지 재미있는 건 그다음 해부터는 다행히 강에서 죽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는 거야.”
아멜리아의 소동을 끝으로 수년간 이어지던 사망 사건이 종결되었다. 사람들은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혹시 그동안의 사고도 모두 아멜리아와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어 소녀의 곁에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아 했다.
“뱃놀이하다 사고 난 게 어째서 아멜리아 탓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냐고 알렉스가 일침을 가하자, 하워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망자 중에는 남성들도 있었으니 분명 영애만큼 작은 체격의 아가씨가 어떻게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은 나도 안 해. 하지만 다들 내키지 않아 하는 건 어쩔 수 없지.”
알렉스는 그녀가 숲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랑 있으면 기분 나쁘대.’

그게 이런 의미였나. 어린 소녀에게 벌어지기에는 너무 가혹한 이야기였다.
이런 이야기가 행여 아멜리아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겠다 싶어 알렉스는 급히 눈으로 그녀의 위치를 찾았다. 컵 디저트를 해치운 두 소녀는 이제 실내에 들어와 피아노에 몸을 기대고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가 편한 모습으로 파티를 즐기는 모습을 확인하니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소문을 듣고 할 말을 잃었던 알렉스가 “대체―” 하고 운을 띄우려는 순간, 무리를 지어 있던 아가씨들 사이에서 비명이 들렸다.
“반지가 없어졌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높은 소프라노 톤의 비명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비명을 지른 사람은 얼마 전 약혼을 했다던 실비아였다. 주변을 황망한 얼굴로 돌아보던 그녀가 울음을 터트렸다.
“실비아, 무슨 일입니까?”
하워드가 서둘러 그녀의 곁으로 달려가 정황을 물었다. 실비아의 주변에 있던 아가씨들은 모두 곤란한 얼굴을 하고 서로를 바라볼 뿐, 아무도 나서서 설명하는 이가 없었다.
“반지가……, 제 약혼반지를 잃어버렸어요……!”
그녀가 반지 낀 손을 자랑하듯 내보이던 걸 기억하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보석도 보석이지만 대대로 물려 오는 유서 깊은 물건이라, 정확한 가격을 매기기 힘들다는 소문의 반지였다.
“이 안에 반지를 훔쳐 간 도둑이 있다고요!”
파티에 불러 놓고 도둑 취급을 하다니. 실성한 듯한 실비아의 외침에 손님들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반지를 잃어버린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걸 우리 탓이라고 하는 건 조금…….”
“……반지를 빼 두었다면 그건 본인의 실수 아닌가요?”
동정론도 있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그녀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자, 자. 여러분. 실비아 영애가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으니 양해를 좀 부탁합니다.”
파티 호스트인 하워드가 나서서 손님들을 달래 가며 ‘상황 정리를 위해’ 그들이 무얼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요청했고, 돌아가며 이야기를 들어 본 결과는 이랬다.
실비아는 아가씨들이 끼워 볼 수 있도록 반지를 빼서 건네주었고, 그 자리에 있던 아가씨들은 모두 차례대로 반지를 만져 봤다는 거였다.
마지막으로 반지를 가지고 있던 아가씨는 “제가 마지막이었지만 전 분명히 돌려주었어요. 실비아 양이 잘 볼 수 있도록 그녀 바로 앞 탁자에 올려 두었다고요.”라고 억울한 어조로 항변했다.
누군가 그 행동을 본 사람이 있다는 말이 나오자 사람들은 그 주변의 탁자와 소파를 들어내고 카펫까지 털어 가며 반지를 찾아보았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웃기지도 않은 촌극인지…….’
알렉스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누가 훔쳐 간 것이 맞는다면, 원만하게 해결된다 해도 작은 소동으로 넘기기엔 이미 도를 넘긴 사건이었다.
괜한 곳에 와서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문득 아멜리아를 찾아보니 소녀는 파티 내내 같이 있던 키가 큰 아가씨의 곁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모임에 그녀를 데려온 데다, 결과적으로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에까지 휘말리게 한 셈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굳이 겪지 않아도 될 불쾌한 일들과 마주하게 만든 상황의 책임을 느낀 그는 돌아가는 길에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사태 수습을 위해 진땀을 흘리던 하워드는 일단 손님들에게 모두 한자리에 모일 것을 요청했다. 최소한 반지를 찾을 때까지는 드로잉 룸 외의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을 것을 당부했는데, 경찰을 불러야 할지에 대해서는 모두의 의견이 엇갈렸다.
혹시 모르니 조금 더 찾아보고 경찰을 부르자는 사람도 있었고, 의심을 받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니 당장 불러서 해결을 보자는 사람도, 안 좋은 소문은 구설에 오르기 쉬우니 조용한 해결을 희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저런 의견이 나오는 가운데, 한 아가씨가 “그러고 보니.”라고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탁자에 반지를 올려 둔 다음, 누군가가 그 근처를 지나간 적이 있어요.”
“그게 누굽니까?”
짧은 긴장이 흐르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의 이목이 모두 그녀의 한마디에 집중되었다.
“저분이요. 탁자 앞으로 지나가는 걸 제가 분명히 봤어요.”
“저요?”
그녀에게 지목된 사람은 메이벨이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곧이어 전신의 핏기가 가신 사람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외쳤다.
“말도 안 돼요. 저는 그런 물건을 본 적도 없는 걸요!”
“하지만 분명히 그때 지나가는 걸 봤다고요.”
갑작스럽게 범인으로 몰린 메이벨은 충격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탁자 앞을 지나간 적은 있으나 그것은 과일 펀치를 가지러 가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맹세컨대 거기 있는지도 몰랐어요. 저는 줄곧 정원에 나가 있어서……, 반지가 화제가 되었는지조차…….”
심약해 보이는 그녀는 의심받은 충격으로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같이 비틀대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아멜리아가 부축했고 메이벨의 오빠 역시 당장 그들 곁으로 다가와 “내 동생이 그럴 리가 없다.”며 동생 편에 서서 언성을 높였다.
드로잉 룸에서는 다시 고성이 오갔다. 의심이 가는 상황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게 확인이 필요하다는 사람들과 초대한 손님을 도둑으로 몰아가는 거냐는 목소리까지.
하필 아멜리아와 함께 있던 아가씨가 궁지에 몰린 상황이어서 알렉스도 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저 아수라장에서 아멜리아만이라도 빼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려던 그는 북새통 속에서 소녀가 어딘가 한쪽 구석만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것을 발견했다.
‘뭘 보는 거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본 곳에는 정원으로 향하는 프렌치 도어만이 있을 뿐이었다. 조금 전까지 활짝 열려 있던 문이지만 사건이 터지고 잠시 닫아 두어서, 지금은 가벼운 산들바람조차 새어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문과 문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던 아멜리아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여성분들 중 한 분이 메이벨 양을 다른 방으로 모셔 가 소지품 검사를 해 보는 것이…….”
“잠깐만요.”
숙녀에게는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치욕적인 신체검사 이야기가 나오기 직전, 아멜리아가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멜리아 양?”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자신에게 닿은 걸 깨달았는지 뒤늦게 볼을 발갛게 붉힌 소녀가 “저기……, 커튼 밑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커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는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던 하워드가 곧 그 말을 확인하기 위해 프렌치 도어 쪽으로 가서 커튼을 걷기 시작했고, 잠시 후 감탄사를 터트렸다.
“반지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