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너는 내 별 1권
1화
프롤로그


‘뜨락’은 원래 종각 뒷골목에서 알음알음 단골들만을 상대로 3대째 운영되던 한식당이었다. 방송을 탄 적도 없고, 연예인이나 유명인의 입에 오르내린 것도 아니었지만 미식가들 사이에서는 소박하면서도 기품 있는 한식으로 입소문이 자자했다.
식당을 번창시켜 주겠다던 수많은 유혹에도 끄덕 않던 꼬장꼬장한 칠순의 노(老)사장이 어느 날 해오 호텔과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새로 리모델링을 마친 해오 호텔 잠실점의 17층에 뜨락 분점이 문을 열었다.
노사장의 성격을 아는 사람들은 도대체 그녀가 어떻게 설득을 당해 그곳에 입점을 했는지 모두 궁금해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짐작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그것이 해오 호텔의 오수완 부사장의 노력 덕분이라는 것이었다.
해오 호텔의 모기업인 오주 그룹 오정국 회장의 조카이자 해오 호텔 오정무 사장의 아들인 그가 한 달이 넘도록 매일같이 뜨락에서 저녁을 먹으며 노사장에게 애를 쓰는 걸 본 사람들은 많았다.
칠순의 나이에 깔끔하게 한복을 차려입고 주방을 진두지휘하며 손님 앞에는 잘 나서지도 않던 노사장이었다. 그런 그녀가 해오 호텔의 젊은 부사장 앞에서 간간이 경계심 없이 웃음을 보일 때부터 어쩌면 해오 호텔에 뜨락의 분점이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결국 그 일은 성사되었다.

* * *


엘리베이터를 타고 해오 호텔 17층에서 내리면 폭신한 카펫이 깔린 여타 층과는 달리 맨들맨들하게 윤이 나는 나무로 된 복도가 방문객을 맞는다.
또각또각 경쾌한 발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면 날아갈 듯 아름다운 손 글씨로 ‘뜨락’이라 쓰여진 간판 아래 한옥의 대문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은 입구가 있다. 다만 이 문은 한옥의 대문처럼 손으로 밀어 여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면 소리도 없이 양옆으로 벌어지는 자동문이었다.
채이는 문에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선 채 입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호텔 내로 옮기고 처음 와 보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너무 크고, 웅장하기까지 한 뜨락의 입구는 낯설었다.
채이에게 뜨락은 마치 시골 외갓집처럼 푸근하고 따뜻한 곳이었다. 낡았지만 관리가 잘된 고풍스러운 한옥 건물, 밟으면 달그락 소리가 나던 자갈이 깔린 마당이며, 철마다 다르게 풍겨 오는 마당 한쪽 꽃밭의 꽃 냄새. 현관 입구가 가까워 오면 느껴지는 부산한 사람들의 움직임과 함께 배가 고프지 않아도 입맛을 다시게 만드는 맛있는 냄새까지.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식당은 이름만 같을 뿐 채이의 추억 속 그곳이 아니다.
“음식 맛은 똑같겠지.”
시무룩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채이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천천히 문 앞으로 걸어갔다.
“어?”
자동문이라는 설명이 친절하게 붙어 있는 문이 채이가 바로 앞까지 가도 열리지 않는다. 톡톡 두드려도 보고, 양쪽으로 밀어도 봤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이래? 고장인가?”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던 채이의 눈에 한쪽 벽에 붙어 있는 영업시간 안내문이 보였다.

[평일 3:30―5:30는 준비 시간입니다.]

“맞다.”
채이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내가 오랜만에 오긴 했구나. 종로에 있을 때부터 늘 같은 시간에 문을 닫았었는데 그걸 잊고 있었다. 닫힌 문 안에서는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터였다. 안에서 한창 바쁠 해원에게 전화를 걸어 볼까 하다가 그냥 돌아섰다.

“에이, 에이, 에잇!”
꼬마가 한창 만지작거리던 종이들을 사방으로 던지며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호텔 로비의 소파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휴대폰을 보며 시간을 때우던 채이가 힐끗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꼬마를 돌아봤다.
“왜 안 되는 거야. 왜 안 되냐고.”
꼬마는 제가 집어 던진 종이들을 다시 집어다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울먹거리는 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꼬마가 다시 그 작은 손으로 종이들이 조물거렸다.
예닐곱 살이나 되었을까. 깜찍하게도 버튼을 목까지 채운 셔츠에 조끼를 얌전하게 갖춰 입은 아이는 혼자 호텔 로비에 앉아서 아까부터 종이로 뭔가를 만들려고 시도 중이었다.
아이에게 말을 걸기 전에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봤지만 아이의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채이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옆으로 다가갔다.
“안녕?”
아이가 고개를 들고 채이를 보더니 흠칫 놀라며 옆으로 물러앉았다. 경계심이 강해 보이는 행동이 귀여워서 채이는 웃음이 났다.
“뭐 만들어? 누나가 도와줄까?”
최대한 다정스러운 말투로 물으며 옆에 슬쩍 앉았다. 아이는 시선을 내리깐 채 대꾸가 없었다.
“누나가 이런 거 잘 만들어서 도와주려고 그래. 싫으면 말고.”
아이는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귀여워라. 채이는 저도 모르게 아이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을 뻔했지만 얼른 손을 거둬들였다. 영특하게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꼭 다문 입술이 뭐 하나 흠잡을 곳 없이 반듯하게 잘생긴 아이였다.
“뭘 만들고 싶은 거야?”
“딱지요.”
아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딱지?”
“네. 이렇게 네모나게 생긴 딱지요. 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셨는데, 제가 물에 빠뜨려서 젖어서 망가졌어요.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요?”
아이가 간절한 눈으로 채이를 보며 물었다. 채이는 가방에서 펜을 꺼내 들고 종이 위에 자신이 알고 있는 딱지 모양을 그렸다.
“이렇게 생긴 거?”
아이가 반색을 하며 깡총 제자리에서 뛰었다.
“네! 이거요. 이거 만들 줄 알아요?”
“만들어 본 적은 없는데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같이 한번 해 보자.”
아이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머릿속으로 대강 구조를 떠올리고 종이를 접으며 채이는 다시 한번 아이의 보호자를 찾으려 주변을 둘러봤다.
“이름이 뭐야?”
채이의 손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아이가 대답했다.
“현우요. 오현우.”
“현우는 몇 살이야? 학교는 다니니?”
“네. 1학년이에요.”
“아, 1학년이구나. 딱지는 친구들이랑 같이 놀았어?”
“아니요. 아빠랑요. 우리 아빤 진짜 잘해요.”
“그럼 아빠한테 접어 달라고 하지 그랬어.”
“아빠가 딱지치기는 진짜 잘하는데 딱지는 못 만든대요.”
현우가 한숨을 폭 쉬며 우울한 듯 말하는 바람에 채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자. 누나가 만들 수 있는 최선은 이거야. 어때?”
종이의 접은 면을 꾹꾹 누르고 사방 모서리도 꼭꼭 끼워서 자리를 잡은 딱지를 내밀자 현우가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누나가 우리 할아버지보다 훨씬 잘 만들어요.”
아이가 어찌나 황홀한 눈으로 딱지를 쳐다보는지, 채이는 저도 모르게 어깨가 위로 올라갔다.
“거기에 좋아하는 그림 그려 줄까? 뭐 좋아해? 공룡? 자동차?”
“아무거나 다 그릴 수 있어요?”
“뭐, 대충은.”
현우는 엄지손톱을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으며 꽤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한참의 생각 끝에 아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토토로도 그려 줄 수 있어요?”
아이의 입에서 나온 토토로, 라는 이름에 채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토토로? 너 토토로 좋아해?”
“네. 그리기 어려워요?”
“아니야. 그거 눈 감고도 그려 줄 수 있어. 내가 토토로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마 백만 번도 넘게 그렸을걸?”
디자인 전공의 대학생인 채이는 어릴 적부터 끄적끄적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캐릭터인 토토로는 그녀의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와 노트 구석구석마다 여러 가지 표정을 지으며 자리 잡고 있다.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다는 채이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채이는 딱지 뒷면에 거침없이 펜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동글동글한 테두리로 대강의 틀을 잡고 그 위에 작은 귀와 작은 발, 그리고 창문처럼 커다란 이빨을 그리자 정말 토토로가 나타났다. 채이의 손과 펜 끝을 따라 열심히 움직이던 아이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자. 어때?”
현우는 딱지 속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대답도 못 하고 입만 헤 벌리고 있었다. 채이는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오현우!”
그때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아이를 불렀다. 아이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봤다.
“이 녀석. 꼼짝 말고 그 자리에 있으라니까 언제 여기까지 나왔어.”
양복 차림의 키가 큰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조르르 자신에게 달려온 아이의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하며 나무랐다.
어머나. 채이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감탄했다. 누가 봐도 부자지간이라는 걸 절대 의심할 수가 없을 정도로 남자와 아이는 얼굴이 꼭 닮아 있었다. 현우를 참 잘생긴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빠를 판박이처럼 빼다 박은 외모였던 것이다.
딱지를 못 만든다던 아이의 말만 듣고 상상했던 아빠의 모습은 전혀 아니다. 훤칠하게 큰 키에 몸에 살짝 붙는 진회색의 슈트. 어수선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눈길을 사로잡는 존재감을 가진 남자였다. 채이는 어정쩡한 자세로 머뭇거리면서도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거 좀 보세요. 이 누나가 만들어 줬어요.”
현우가 딱지를 남자에게 보여 주며 자랑하고는 채이를 가리켰다. 남자가 채이 쪽을 힐끗 돌아보고 아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딱지 망가뜨렸다고 속상해하더니 잘됐네. 고맙다고 인사는 했어?”
“아, 아니요. 잊어버렸어요.”
현우가 당황한 듯 채이에게로 뛰어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누나, 고맙습니다.”
“아니야. 이까짓 걸 뭐. 시간만 있으면 더 만들어 줄 텐데.”
“토토로도 고맙습니다. 이 딱지는 게임 안 하고 제가 가지고 있을 거예요.”
정말 마음에 드는지 아이는 딱지를 품에 꼭 안았다.
“시간이 있었으면 더 만들어서 다른 캐릭터도 그려 줬을 텐데. 아쉽네.”
채이의 말에 현우가 너무나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자, 오현우. 늦겠다.”
“네.”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현우에게 손을 내밀며 남자가 채이 쪽으로 가볍게 묵례를 했다. 예상치 못하게 시선이 마주치자 채이는 깜짝 놀라며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인사를 했다. 남자가 보일 듯 말 듯 살짝 미소 지었다.
돌아서 가는 남자와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다시 자리에 앉은 채이는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 그 짧은 순간의 눈 맞춤에 가슴이 콩닥콩닥 거세게 뛰어 대고 있었다.
“미쳤나 봐. 애아빠를 보고 왜 가슴이 뛰고 난리야.”
채이는 소파에 몸을 푹 묻고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애써 남자가 남긴 잔상을 지우려 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가 남자와 아이가 사라진 쪽을 향해 돌았다. 잠시 멍하니 텅 빈 로비를 바라보고 있던 채이는 시간을 깨닫고 부산하게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굳게 닫혀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묵직한 문은 신기할 정도로 소리도 없이 스르륵 양쪽으로 벌어져 채이를 맞았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디디자마자 “어서 오십시오.” 하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돌아본 곳에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데스크 앞에 단정한 감색 유니폼 차림으로 서 있던 해원이 온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양팔을 벌리고 채이에게 다가왔다.
“우리 채이, 여기서 보니까 더 반갑네.”
해원이 채이를 꼭 끌어안고 반가움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저보다 키가 좀 작은 해원을 채이도 꼭 힘주어 마주 안았다.
“점심때 온다더니 왜 이제야 왔어? 조리장님이 기다리시던데.”
“어디 좀 들렀는데 생각보다 늦어져서. 언니, 나 배고파. 점심도 못 먹었어.”
채이가 해원의 어깨에 얼굴을 부비며 어리광을 부리자 해원이 저보다 키가 큰 채이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어디 갔다 왔는데?”
“알바 뽑는대서 면접 보러 갔었는데 너무 오래 걸려서.”
채이가 해죽 웃었다.
“알바? 무슨 알바? 너 복학 안 해?”
“어차피 가을 학기는 돼야 하잖아. 그때까지 몇 달 동안 그냥 놀 순 없고. 아빠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하시는데 공부는 복학해서 하면 되지, 뭐. 아빠 혼자 애쓰는 거 보고만 있기는 싫어.”
“조리장님 말처럼 좀 쉬면서 복학 준비나 하지 그래. 너도…… 많이 힘들었잖아.”
채이의 엄마는 오랜 투병 끝에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마지막 1년 동안 채이와 아버지 명준은 일과 학업을 쉬며 아내이자 어머니의 곁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