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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오랜 투병으로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는 하지만 엄마와 아내가 떠난 빈자리는 컸다. 명준과 채이는 함께, 그리고 각각 힘겹게 그 시간을 견뎌 내고 있었다. 장례를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리장인 명준은 뜨락으로 복귀했고, 채이는 아버지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한 학기를 더 쉬겠다고 우겼다.
지난 1년간 수입이 없이 어머니의 마지막 투병 생활을 뒷바라지하느라 저축은 바닥이 났고 대출도 남아 있었다. 명준이 다시 일터로 복귀한 만큼 기울었던 가세를 일으키는 것은 시간문제겠지만 채이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다.
“얼른 앉아. 밥부터 먹자. 조리장님한테 너 왔다고 말씀드릴게.”
해원이 종종걸음으로 주방을 향해 가고 혼자 남은 채이는 식당 안을 둘러봤다. 예전의 뜨락도 지나가다 들러 된장찌개 한 그릇 점심으로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백반집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곳은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식당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지. 채이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어린 채이가 노(老)할머니라고 부르는 바람에 직원들에게도 노사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 노사장조차 건강상의 문제로 자리를 비운 이곳은 해원을 만났어도 채이에게 마냥 낯설기만 했다.
“조리장님, 채이 왔어요.”
주방으로 통하는 문을 살짝 열고 고개만 들이민 해원이 테이블에 나가기 전 음식을 마지막 점검하고 있는 명준의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
채이, 라는 이름에 명준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지만 이내 다시 음식이 담긴 접시로 고개를 돌렸다. 말은 안 해도 점심을 먹으러 온다던 딸이 저녁 시간이 다 되도록 오지 않아 휴식 시간에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전화기만 만지작거리던 명준을 봤기에 해원은 그의 뒷모습에서도 안심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애써 무심한 척하던 명준은 접시를 직원에게 건네주고 나서 서둘러 주방을 나섰다. 채이가 좋아하는 채소죽과 장아찌를 담은 쟁반을 들고 해원이 웃으며 그를 뒤따랐다. 주방 직원들에게는 저승사자처럼 무서운 존재지만 이럴 때 보면 천상 딸바보 아빠다.
“채이야.”
익숙한 목소리에 채이가 메뉴판 안으로 들어갈 듯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아빠.”
“점심때 온다더니 왜 이리 늦어. 밥도 못 먹고 뭘 하고 이 시간까지 돌아다녔어?”
딸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은 접어놓고 명준은 타박부터 했다. 채이는 아이처럼 헤헤 웃었다.
“두 명 뽑는 알바 면접에 스무 명도 넘게 왔더라고. 결국 남자애들만 뽑을 거면서 여자는 뭐하러 오라고 불렀나 몰라.”
채이는 살짝 투정을 섞어 늦은 이유를 설명했다. 명준이 한숨을 쉬었다.
“가지 말라니까 결국은 갔구나.”
“갈 거라고 했잖아.”
“그걸 해서 얼마나 번다고. 복학할 준비나 할 것이지. 누굴 닮아서 이렇게 쇠고집이야?”
“엄마는 아빠 닮았다고 하고, 아빠는 엄마 닮았다고 하고. 내가 보기엔 엄마나 아빠나 둘 다 고집은 만만치 않던데 내가 누굴 닮았겠어.”
옆에서 듣고 있던 해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명준은 머쓱한 듯 헛기침을 하며 채이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아빠, 나 배고파. 밥.”
명준의 마음을 가장 조급하게 만드는 말이 무엇인지 아는 채이가 응석을 부리듯 졸랐다. 명준이 급한 발걸음으로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채이가 해원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아빠 잔소리 듣기 싫을 땐 배고프다고 그러면 돼.”
해원이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마침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재민을 보고 반색을 했다.
“채이야, 잠깐만.”
피곤이 가득한 얼굴로 터벅터벅 식당 안으로 걸어 들어오던 재민이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해원을 보고 빙긋이 웃었다.
“선배,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밥 먹으러 왔지.”
“저녁이요? 벌써?”
“아니, 점심. 아직 점심을 못 먹었어. 배고파 죽겠다.”
재민이 해원의 어깨 위에 이마를 기대며 죽는 소리를 했다. 해원의 손이 재민의 등을 토닥거렸다.
“뭐 하느라 밥도 못 먹었어요?”
“본사 들어갔다가 갑자기 연락받고 병원에 가느라. 아, 너도 아직 모르지? 오늘 김 비서님이 출산을 했어.”
해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오늘이요? 아직 한참 남지 않았어요?”
해원이 당황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는 재민은 일부러 심상한 척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예정일이 2개월도 넘게 남았었지. 나도 그래서 놀랐는데 다행히 산모도, 아이도 다 건강해. 걱정하지 마.”
다정스러운 재민의 말에도 해원의 얼굴은 밝아지지 못했다. 재민이 한숨을 쉬고 해원의 어깨를 가볍게 안았다 놓았다.
“선배, 배고프겠어요. 얼른 앉아요.”
“응, 그래야지. 아직 한가하네?”
재민을 테이블로 안내하려던 해원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재민을 돌아봤다.
“선배, 괜찮으면 합석할래요?”
“합석?”
되묻는 재민에게 해원이 창가 쪽에 앉아 열심히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는 채이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앉은 여자애 보이죠?”
재민이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쟤가 채이예요. 윤채이.”
그제야 재민이 아, 하며 채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해원에게 정말 많이 들었던 이름이다.
“혼자야?”
“네. 혼자 밥 먹게 생겼었는데 잘됐네요. 선배가 같이 밥 좀 먹어 줘요.”
해원을 따라 채이의 테이블로 온 재민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메뉴판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든 채이가 낯선 재민을 보고 눈을 껌벅거렸다. 그 모양이 귀여워 재민이 웃는다.
“채이야, 이쪽은 재민 선배. 알지?”
재민에게 채이를 소개할 때처럼 해원은 아무 설명 없이 채이에게 재민을 소개했다. 채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나도 채이 양 얘기 아주 많이 들었어요. 진작부터 만나고 싶었는데 이제야 만났네요. 반가워요.”
재민이 손을 내밀자 채이는 그 손을 맞잡고 쑥스러운 듯 어깨를 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해원이 얘기만 듣고는 아주 어린 꼬마 아가씨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긴 해원이가 10년 전에 채이 양 처음 만났다고 나한테 말했을 때 중학생이었죠, 아마?”
재민이 자연스럽게 채이의 앞자리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때 언니가 제 얘기를 했어요?”
“그럼요. 둘이 처음 만났던 날부터 채이 양 얘기는 정말 많이 들었지.”
“저도 언니한테 재민 선배님 얘기 엄청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언니는 재민 선배님이 잘생기셨다는 말은 안 했는데.”
채이가 넉살 좋게 말하자 질세라 재민이 대꾸했다.
“나야말로 그 중학생이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됐다는 말은 못 들었어요.”
둘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을 듣고 서 있던 해원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둘이 뭐 하는 거야?”
재민이 채이를 올려다보고 마치 아직도 거기 있느냐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바쁘실 텐데 가서 볼일 보세요, 지 매니저님. 우리 둘이 사이좋게 밥 잘 먹을 테니까. 할 얘기도 많을 것 같고.”
피식 웃으며 자신은 바쁘니 둘이 사이좋게 식사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 해원이 다시 종종걸음으로 사라지자 다른 직원들이 테이블 위에 음식들을 차리기 시작했다. 배가 고픈 채이가 눈을 반짝거리며 젓가락으로 냉큼냉큼 접시 위의 음식들을 비워 냈다.
재민은 여동생을 보는 것처럼 다정스런 눈으로 그런 채이를 바라봤다. 해원이 이 어린 아가씨에게 얼마나 많은 마음의 위안을 받는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처음 만난 채이가 예쁘고 살갑게 보였다.
“채이 씨는 아직 학생이죠?”
“네. 지금은 휴학 중이에요.”
“휴학은 왜…….”
휴학을 왜 했느냐고 물으려다 재민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채이의 엄마이자, 윤명준 조리장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하필 오수완 부사장의 중국 출장을 수행 중이어서 장례식에 참석도 하지 못했다.
재민은 괜한 말을 꺼낼 뻔했던 자신을 탓하느라 잠시 말없이 식사만 했다. 갑자기 재민이 조용해진 이유를 알 수 없는 채이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 순간 아무래도 둘을 붙여 놓고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는지 해원이 다시 테이블로 다가왔다.
“어때? 음식 맛은 여전하지?”
채이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사장 할머니만 계시면 정말 뜨락 같을 텐데.”
친할머니처럼 따랐던 노사장이 자리를 비운 것을 채이가 아쉬워했다.
“그러게. 사장님 빈자리가 보통 큰 게 아니야. 빨리 돌아오셔야 할 텐데. 아, 선배. 그러고 보니 김 비서님 후임을 아직 못 구하지 않았어요?”
재민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음식을 집으려던 젓가락을 거뒀다.
“못 구했지. 김 비서님이 직접 사람 정해서 트레이닝까지 시켜 놓고 아기 낳으러 간다고 해서 마음 놓고 있었는데. 김 비서님이랑 아기가 건강하니까 하는 말이지만 지금 제일 큰일 난 건 나야.”
김 비서는 현재 병가로 자리를 비운 해오 호텔 사장의 비서로 시작해서 재민이 호텔에 입사하기 훨씬 전부터 호텔의 임원들을 보필한 베테랑 비서였다. 오수완 부사장과 재민은 그녀가 농담으로라도 출산 후에 일을 그만둔다고 하면 심장이 뚝 떨어진다며 질색을 했다.
3개월의 유급 출산 휴가를 주겠다는 오수완 부사장의 제안에 그녀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자리를 비운 3개월을 채워 줄 능력 있는 임시 비서를 제 손으로 찾아 주마 약속했다. 그런데 이렇게 조산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요즘은 부사장님 기사까지 하느라 사무실에 붙어 있을 시간이 없는데 당장 사람까지 구해야 하니 내가 아주 미치겠다.”
식욕이 뚝 떨어져 버렸는지 재민은 젓가락을 아예 내려놓고 다시 한번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채이는 무거운 분위기에 눈치를 살피면서도 향긋한 더덕 향의 유혹을 참지 못하고 슬그머니 젓가락을 뻗어 더덕구이 한 점을 집어 얼른 입에 넣었다.
아우, 맛있어. 적당히 잘 구워진 연한 더덕과 자극적이지 않은 양념이 잘 어우러져 입 안에서 춤을 춘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채이는 정말 세상의 온갖 고민과 걱정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딱 적임이라니까.”
“듣고 보니 그러네.”
“경험은 없어도 똑똑해서 아마 금방 일 배울 거예요.”
“바로 일할 수 있나?”
“그럼요. 채이야, 내일부터 바로 일할 수 있지?”
심각하게 대화를 하던 재민과 해원이 동시에 채이를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채이는 소라무침을 집어 든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네?”
“내일부터 일할 수 있냐고. 할 수 있지? 선배, 얘 할 수 있다니까요. 오늘도 알바 면접 갔다가 점심도 못 먹고 와서 지금 이렇게 정신없이 밥 먹고 있는 거예요.”
해원이 채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그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말했다.
“일? 무슨 일?”
“별로 어렵진 않을 거래. 석 달 정도 이 호텔 부사장님 임시 비서로 일하는 거야. 재민 선배가 옆에서 도와줄 거니까 넌 하라는 것만 열심히 하면 돼. 내일부터 출근해. 알았지?”
채이가 허둥지둥 집어 들고 있던 음식을 접시 위에 내려놓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재민과 해원이 나누는 이야기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먹는 데만 열중해 있었다.
“언니, 저기,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채이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해원에게 속삭였다.
“선배가 많이 도와준대. 걱정하지 마. 넌 그냥 열심히만 하면 돼.”
“그래요. 내가 많이 도와줄게요. 지금 당장 내일부터 사람이 필요한 형편이라 누구라도 일만 해 주면 고마운 상황이에요. 내일부터 출근해 주는 걸로 알고 나, 안심합니다?”
해원과 재민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서슬에 채이는 어리버리 제대로 말도 못 한 채 저녁 식사를 마쳤다. 헤어지면서 내일 9시까지 호텔 13층에 있는 부사장실에서 보자는 재민의 말에 얼결에 고개까지 끄덕이고 말이다.
“미쳤어. 미쳤나 봐.”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와 거실 소파에 주저앉고 나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채이는 머리를 감싸 안고 발을 동동 굴렀다. 아무리 아르바이트 자리가 필요했다지만 이건 능력 밖이다. 늦게 퇴근한 명준에게 땅이 꺼질 듯 무거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자 명준도 깜짝 놀랐다.
“이 녀석아. 못 하는 건 못 한다고 말을 해야지, 그렇게 덥석 하겠다고 말해 놓고 어쩌려고 그래?”
아빠까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야단을 치자 채이는 정말 울고 싶었다.
“그러니까. 어떡해, 아빠? 지금이라도 해원 언니한테 전화해서 못 한다고 말할까?”
명준은 복잡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급하기는 한가 보다. 일단 내일 한번 가 봐. 가서 못 하겠다 싶으면 솔직하게 말하고. 부사장님 비서가 너같이 아무 경험 없는 애가 막 할 만한 자리는 절대 아니겠지만, 최 부장이 오죽 급했으면 네 손까지 빌릴 생각을 했을까.”
오랜 투병으로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는 하지만 엄마와 아내가 떠난 빈자리는 컸다. 명준과 채이는 함께, 그리고 각각 힘겹게 그 시간을 견뎌 내고 있었다. 장례를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리장인 명준은 뜨락으로 복귀했고, 채이는 아버지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한 학기를 더 쉬겠다고 우겼다.
지난 1년간 수입이 없이 어머니의 마지막 투병 생활을 뒷바라지하느라 저축은 바닥이 났고 대출도 남아 있었다. 명준이 다시 일터로 복귀한 만큼 기울었던 가세를 일으키는 것은 시간문제겠지만 채이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다.
“얼른 앉아. 밥부터 먹자. 조리장님한테 너 왔다고 말씀드릴게.”
해원이 종종걸음으로 주방을 향해 가고 혼자 남은 채이는 식당 안을 둘러봤다. 예전의 뜨락도 지나가다 들러 된장찌개 한 그릇 점심으로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백반집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곳은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식당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지. 채이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어린 채이가 노(老)할머니라고 부르는 바람에 직원들에게도 노사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 노사장조차 건강상의 문제로 자리를 비운 이곳은 해원을 만났어도 채이에게 마냥 낯설기만 했다.
“조리장님, 채이 왔어요.”
주방으로 통하는 문을 살짝 열고 고개만 들이민 해원이 테이블에 나가기 전 음식을 마지막 점검하고 있는 명준의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
채이, 라는 이름에 명준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지만 이내 다시 음식이 담긴 접시로 고개를 돌렸다. 말은 안 해도 점심을 먹으러 온다던 딸이 저녁 시간이 다 되도록 오지 않아 휴식 시간에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전화기만 만지작거리던 명준을 봤기에 해원은 그의 뒷모습에서도 안심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애써 무심한 척하던 명준은 접시를 직원에게 건네주고 나서 서둘러 주방을 나섰다. 채이가 좋아하는 채소죽과 장아찌를 담은 쟁반을 들고 해원이 웃으며 그를 뒤따랐다. 주방 직원들에게는 저승사자처럼 무서운 존재지만 이럴 때 보면 천상 딸바보 아빠다.
“채이야.”
익숙한 목소리에 채이가 메뉴판 안으로 들어갈 듯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아빠.”
“점심때 온다더니 왜 이리 늦어. 밥도 못 먹고 뭘 하고 이 시간까지 돌아다녔어?”
딸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은 접어놓고 명준은 타박부터 했다. 채이는 아이처럼 헤헤 웃었다.
“두 명 뽑는 알바 면접에 스무 명도 넘게 왔더라고. 결국 남자애들만 뽑을 거면서 여자는 뭐하러 오라고 불렀나 몰라.”
채이는 살짝 투정을 섞어 늦은 이유를 설명했다. 명준이 한숨을 쉬었다.
“가지 말라니까 결국은 갔구나.”
“갈 거라고 했잖아.”
“그걸 해서 얼마나 번다고. 복학할 준비나 할 것이지. 누굴 닮아서 이렇게 쇠고집이야?”
“엄마는 아빠 닮았다고 하고, 아빠는 엄마 닮았다고 하고. 내가 보기엔 엄마나 아빠나 둘 다 고집은 만만치 않던데 내가 누굴 닮았겠어.”
옆에서 듣고 있던 해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명준은 머쓱한 듯 헛기침을 하며 채이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아빠, 나 배고파. 밥.”
명준의 마음을 가장 조급하게 만드는 말이 무엇인지 아는 채이가 응석을 부리듯 졸랐다. 명준이 급한 발걸음으로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채이가 해원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아빠 잔소리 듣기 싫을 땐 배고프다고 그러면 돼.”
해원이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마침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재민을 보고 반색을 했다.
“채이야, 잠깐만.”
피곤이 가득한 얼굴로 터벅터벅 식당 안으로 걸어 들어오던 재민이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해원을 보고 빙긋이 웃었다.
“선배,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밥 먹으러 왔지.”
“저녁이요? 벌써?”
“아니, 점심. 아직 점심을 못 먹었어. 배고파 죽겠다.”
재민이 해원의 어깨 위에 이마를 기대며 죽는 소리를 했다. 해원의 손이 재민의 등을 토닥거렸다.
“뭐 하느라 밥도 못 먹었어요?”
“본사 들어갔다가 갑자기 연락받고 병원에 가느라. 아, 너도 아직 모르지? 오늘 김 비서님이 출산을 했어.”
해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오늘이요? 아직 한참 남지 않았어요?”
해원이 당황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는 재민은 일부러 심상한 척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예정일이 2개월도 넘게 남았었지. 나도 그래서 놀랐는데 다행히 산모도, 아이도 다 건강해. 걱정하지 마.”
다정스러운 재민의 말에도 해원의 얼굴은 밝아지지 못했다. 재민이 한숨을 쉬고 해원의 어깨를 가볍게 안았다 놓았다.
“선배, 배고프겠어요. 얼른 앉아요.”
“응, 그래야지. 아직 한가하네?”
재민을 테이블로 안내하려던 해원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재민을 돌아봤다.
“선배, 괜찮으면 합석할래요?”
“합석?”
되묻는 재민에게 해원이 창가 쪽에 앉아 열심히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는 채이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앉은 여자애 보이죠?”
재민이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쟤가 채이예요. 윤채이.”
그제야 재민이 아, 하며 채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해원에게 정말 많이 들었던 이름이다.
“혼자야?”
“네. 혼자 밥 먹게 생겼었는데 잘됐네요. 선배가 같이 밥 좀 먹어 줘요.”
해원을 따라 채이의 테이블로 온 재민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메뉴판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든 채이가 낯선 재민을 보고 눈을 껌벅거렸다. 그 모양이 귀여워 재민이 웃는다.
“채이야, 이쪽은 재민 선배. 알지?”
재민에게 채이를 소개할 때처럼 해원은 아무 설명 없이 채이에게 재민을 소개했다. 채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나도 채이 양 얘기 아주 많이 들었어요. 진작부터 만나고 싶었는데 이제야 만났네요. 반가워요.”
재민이 손을 내밀자 채이는 그 손을 맞잡고 쑥스러운 듯 어깨를 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해원이 얘기만 듣고는 아주 어린 꼬마 아가씨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긴 해원이가 10년 전에 채이 양 처음 만났다고 나한테 말했을 때 중학생이었죠, 아마?”
재민이 자연스럽게 채이의 앞자리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때 언니가 제 얘기를 했어요?”
“그럼요. 둘이 처음 만났던 날부터 채이 양 얘기는 정말 많이 들었지.”
“저도 언니한테 재민 선배님 얘기 엄청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언니는 재민 선배님이 잘생기셨다는 말은 안 했는데.”
채이가 넉살 좋게 말하자 질세라 재민이 대꾸했다.
“나야말로 그 중학생이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됐다는 말은 못 들었어요.”
둘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을 듣고 서 있던 해원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둘이 뭐 하는 거야?”
재민이 채이를 올려다보고 마치 아직도 거기 있느냐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바쁘실 텐데 가서 볼일 보세요, 지 매니저님. 우리 둘이 사이좋게 밥 잘 먹을 테니까. 할 얘기도 많을 것 같고.”
피식 웃으며 자신은 바쁘니 둘이 사이좋게 식사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 해원이 다시 종종걸음으로 사라지자 다른 직원들이 테이블 위에 음식들을 차리기 시작했다. 배가 고픈 채이가 눈을 반짝거리며 젓가락으로 냉큼냉큼 접시 위의 음식들을 비워 냈다.
재민은 여동생을 보는 것처럼 다정스런 눈으로 그런 채이를 바라봤다. 해원이 이 어린 아가씨에게 얼마나 많은 마음의 위안을 받는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처음 만난 채이가 예쁘고 살갑게 보였다.
“채이 씨는 아직 학생이죠?”
“네. 지금은 휴학 중이에요.”
“휴학은 왜…….”
휴학을 왜 했느냐고 물으려다 재민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채이의 엄마이자, 윤명준 조리장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하필 오수완 부사장의 중국 출장을 수행 중이어서 장례식에 참석도 하지 못했다.
재민은 괜한 말을 꺼낼 뻔했던 자신을 탓하느라 잠시 말없이 식사만 했다. 갑자기 재민이 조용해진 이유를 알 수 없는 채이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 순간 아무래도 둘을 붙여 놓고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는지 해원이 다시 테이블로 다가왔다.
“어때? 음식 맛은 여전하지?”
채이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사장 할머니만 계시면 정말 뜨락 같을 텐데.”
친할머니처럼 따랐던 노사장이 자리를 비운 것을 채이가 아쉬워했다.
“그러게. 사장님 빈자리가 보통 큰 게 아니야. 빨리 돌아오셔야 할 텐데. 아, 선배. 그러고 보니 김 비서님 후임을 아직 못 구하지 않았어요?”
재민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음식을 집으려던 젓가락을 거뒀다.
“못 구했지. 김 비서님이 직접 사람 정해서 트레이닝까지 시켜 놓고 아기 낳으러 간다고 해서 마음 놓고 있었는데. 김 비서님이랑 아기가 건강하니까 하는 말이지만 지금 제일 큰일 난 건 나야.”
김 비서는 현재 병가로 자리를 비운 해오 호텔 사장의 비서로 시작해서 재민이 호텔에 입사하기 훨씬 전부터 호텔의 임원들을 보필한 베테랑 비서였다. 오수완 부사장과 재민은 그녀가 농담으로라도 출산 후에 일을 그만둔다고 하면 심장이 뚝 떨어진다며 질색을 했다.
3개월의 유급 출산 휴가를 주겠다는 오수완 부사장의 제안에 그녀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자리를 비운 3개월을 채워 줄 능력 있는 임시 비서를 제 손으로 찾아 주마 약속했다. 그런데 이렇게 조산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요즘은 부사장님 기사까지 하느라 사무실에 붙어 있을 시간이 없는데 당장 사람까지 구해야 하니 내가 아주 미치겠다.”
식욕이 뚝 떨어져 버렸는지 재민은 젓가락을 아예 내려놓고 다시 한번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채이는 무거운 분위기에 눈치를 살피면서도 향긋한 더덕 향의 유혹을 참지 못하고 슬그머니 젓가락을 뻗어 더덕구이 한 점을 집어 얼른 입에 넣었다.
아우, 맛있어. 적당히 잘 구워진 연한 더덕과 자극적이지 않은 양념이 잘 어우러져 입 안에서 춤을 춘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채이는 정말 세상의 온갖 고민과 걱정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딱 적임이라니까.”
“듣고 보니 그러네.”
“경험은 없어도 똑똑해서 아마 금방 일 배울 거예요.”
“바로 일할 수 있나?”
“그럼요. 채이야, 내일부터 바로 일할 수 있지?”
심각하게 대화를 하던 재민과 해원이 동시에 채이를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채이는 소라무침을 집어 든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네?”
“내일부터 일할 수 있냐고. 할 수 있지? 선배, 얘 할 수 있다니까요. 오늘도 알바 면접 갔다가 점심도 못 먹고 와서 지금 이렇게 정신없이 밥 먹고 있는 거예요.”
해원이 채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그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말했다.
“일? 무슨 일?”
“별로 어렵진 않을 거래. 석 달 정도 이 호텔 부사장님 임시 비서로 일하는 거야. 재민 선배가 옆에서 도와줄 거니까 넌 하라는 것만 열심히 하면 돼. 내일부터 출근해. 알았지?”
채이가 허둥지둥 집어 들고 있던 음식을 접시 위에 내려놓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재민과 해원이 나누는 이야기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먹는 데만 열중해 있었다.
“언니, 저기,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채이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해원에게 속삭였다.
“선배가 많이 도와준대. 걱정하지 마. 넌 그냥 열심히만 하면 돼.”
“그래요. 내가 많이 도와줄게요. 지금 당장 내일부터 사람이 필요한 형편이라 누구라도 일만 해 주면 고마운 상황이에요. 내일부터 출근해 주는 걸로 알고 나, 안심합니다?”
해원과 재민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서슬에 채이는 어리버리 제대로 말도 못 한 채 저녁 식사를 마쳤다. 헤어지면서 내일 9시까지 호텔 13층에 있는 부사장실에서 보자는 재민의 말에 얼결에 고개까지 끄덕이고 말이다.
“미쳤어. 미쳤나 봐.”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와 거실 소파에 주저앉고 나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채이는 머리를 감싸 안고 발을 동동 굴렀다. 아무리 아르바이트 자리가 필요했다지만 이건 능력 밖이다. 늦게 퇴근한 명준에게 땅이 꺼질 듯 무거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자 명준도 깜짝 놀랐다.
“이 녀석아. 못 하는 건 못 한다고 말을 해야지, 그렇게 덥석 하겠다고 말해 놓고 어쩌려고 그래?”
아빠까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야단을 치자 채이는 정말 울고 싶었다.
“그러니까. 어떡해, 아빠? 지금이라도 해원 언니한테 전화해서 못 한다고 말할까?”
명준은 복잡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급하기는 한가 보다. 일단 내일 한번 가 봐. 가서 못 하겠다 싶으면 솔직하게 말하고. 부사장님 비서가 너같이 아무 경험 없는 애가 막 할 만한 자리는 절대 아니겠지만, 최 부장이 오죽 급했으면 네 손까지 빌릴 생각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