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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늘 그렇듯 명준은 딸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다. 채이는 입을 삐쭉거리다가 명준에게 달려들어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직 옷도 갈아입지 못한 아빠의 몸에서는 여러 가지 음식 냄새가 풍겼다. 채이가 좋아하는, 익숙한 아빠의 냄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 최 부장도, 부사장님도 다 좋은 사람들이니까.”
명준이 딸의 등을 토닥거리며 달래듯 말했다.
“아빠, 부사장님 알아?”
“알지. 아주 잘 알지.”
“좋은 분이에요?”
“그럼. 아주 좋은 분이야. 참…… 좋은 사람이지.”
명준이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며 채이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언제 이렇게 커서 아빠를 돕겠다고 일자리를 찾고, 그것 때문에 고민을 하고. 아픈 엄마와 그 뒷바라지로 바쁜 아빠 밑에서 자라 늘 명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하나뿐인 딸. 채이는 그에게 그런 존재였다.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채이는 조금은 안심이 된 듯 편안한 얼굴로 아빠 품에 푸근히 안겨 있었다.
* * *
“투자가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부사장이 제멋대로 저질러 놓고 잘못되면 회사가 책임을 져야 하나? 호텔이 객기 부리는 재벌 3세 장난감이야?”
60세가 넘은 나이에도 박 이사는 짱짱한 목소리로 두 시간이 넘는 회의 내내 수완을 향해 비난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 체력도 참 대단하지만 억지를 써 대는 박 이사를 두 시간 내내 웃는 얼굴로 상대하는 수완도 참 대단하다고 재민은 생각했다.
“제가 저지른 일을 왜 회사가 책임을 지겠습니까. 제가 책임집니다, 박 이사님.”
똑같은 대답이 벌써 몇 번째인가. 수완은 이번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오 부사장이 어떻게 책임을 질 건데? 자네 집이라도 팔아서 메울 건가? 집 팔아서 그게 가당키나 하고?”
흥분한 박 이사의 입에서 도를 넘은 단어가 튀어나왔다. 자네, 라니. 아무리 어리다지만 이사가 상사인 부사장에게 쓸 수 있는 호칭은 아니다. 수완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지만 이내 다시 웃는 얼굴로 되돌아왔다.
“필요하면 집만 팔겠습니까? 제가 가진 걸 모두 팔아서라도 회사에는 손해 갈 일이 없게 할 테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박 이사님, 늙으시나 봅니다. 하나하나 다 걱정이신 걸 보면.”
“늙어서 걱정이 많은 게 아니라 늙었으니까 이 정도밖에 못 하는 거지! 내가 젊었으면 회사를 들어 엎어서라도 못 하게 하지, 이렇게 두고만 봤을까!”
박 이사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수완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끈 섰다. 재민은 내심 수완이 자제력을 잃고 박 이사를 한 번 들이받았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지만 수완은 다시 평정심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오수완 부사장이 자리를 비운 아버지를 대신해 호텔 운영을 맡은 이래 호텔의 리모델링을 비롯해 여러 곳에 덩어리가 큰 투자를 많이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 자금들은 해오 호텔의 모기업이나 다름없는 오주 그룹에서 차입해 온 것들이다.
오주 그룹은 건설 회사를 기반으로 시작해서 자동차, 전자에 이르기까지 사업을 넓혀 근래 들어 대한민국 최대 기업 중 하나로 부상했다. 승승장구하던 오주 그룹 내 계열사 중 가장 뒤떨어져 있다는 오명을 가지고 있던 것이 오주 호텔이었다. 그런데 최근 창립 당시의 이름인 ‘오주 호텔’을 ‘호텔 해오’ 로 바꾼 후 호텔 해오는 그 오명을 떨고 국내 호텔 업계의 강자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호텔 해오의 경영자는 대외적으로는 오주 기업 창업주의 막내아들인 오정무 사장이었다. 하지만 오 사장이 지병 등을 이유로 몇 년 전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실질적인 경영자는 그의 외아들인 오수완 부사장이 되었다.
그는 파격적이었다. 오주 호텔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해오라는 새 이름을 붙인 것도 그의 머리에서 나온 의견이었다. 그룹 내 다른 계열사들이 한결같이 오주의 이름으로 묶여 있는 상황에서 그의 결정은 그룹 전체를 들썩거리게 할 만큼 파장이 컸다. 어린놈이 뭘 믿고 제멋대로 구는 거냐며 집안의 어른들과 임원들이 성토했지만 일단 오 회장에게서 허락이 떨어지자 곧 조용해졌다.
오수완 부사장이 경영권을 쥐고 난 후로 호텔 해오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그는 큰아버지이자 오주 그룹의 사주인 오정국 회장에게 직접 지원을 받아 호텔의 내외부에 투자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원받은 금액을 모두 상환할 정도로 성과를 거두었다. 어느새 오주 그룹 계열사 중 가장 천덕꾸러기였던 호텔 사업은 그룹 내 다크호스로 부상하고 있었다.
가시적인 성과로 보나 체감 평가로 보나 수완이 경영권을 잡은 이후로 해오 호텔이 눈에 띄게 성장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이사처럼 수완의 모든 행보에 어깃장을 놓는 세력들이 호텔 곳곳에 숨어 있었다.
그들은 수완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오주 물산 오정민 사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오정민 사장은 선대 오 회장의 네 아들 중 둘째로 수완의 아버지의 이복형이었다. 그들은 오정민 사장이 자신들의 배후라는 것을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엄연히 사주의 아들이자 부사장인 그를 좌지우지하려 들기까지 했다.
왜 수완이 그들과 전면으로 맞서지 않는지 재민은 알 듯하다가도 이해가 안 됐다. 수완은 사장이 아닌 부사장직에 있지만 수완의 아버지가 엄연히 사장직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게다가 수완은 호텔 경영에서 놀라운 실적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한바탕 분란이야 일겠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을 호텔에서 몰아내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텐데 수완은 그러지 않았다.
“남들이 한다고 부화뇌동해서 쫓아가다가는 뱁새 다리 찢어집니다. 오 부사장처럼 젊은 사람은 경험이 일천해서 물정을 몰라 그러는 거야. 시건방 떤다는 소리 듣지 말고 가지고 있는 것이나 잘 지킬 생각을 해야지.”
시건방은 도대체 누가 떠는 건지. 재민은 하마터면 말이 과하다고 박 이사에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무리 연장자에 업무적으로 훨씬 선배라고는 하지만 분명 상사인 수완에게 해도 될 말과 해선 안 될 말이 있다. 재민이 사고를 치기 직전에 수완이 던진 말이 그를 막았다.
“안타깝습니다. 어쨌든 호텔을 생각하는 마음은 박 이사님이나 저나 마찬가지일 텐데 이렇게 가치관이 다르니 말입니다.”
수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빙긋이 웃으며 박 이사를 내려다봤다.
“제 계획을 정 그렇게 수용하기 어려우시거나 의견 차이를 조율하기 힘드시다면 당분간 쉬시는 것도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저야 누구보다 우리 호텔을 사랑하시는 박 이사님과 마음 맞춰 일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습니다만, 박 이사님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잠시 쉬도록 해 드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냉랭했다. 2시간 넘는 회의 내내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던 불편한 속내를 수완은 끝내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표출했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박 이사가 말뜻을 알아듣고 부르르 떨었다.
“쉬다니! 내가 평생을 오주 호텔에 바쳤는데 누가 누굴 감히! 호텔 경영이 뭔지 알지도 못하는 풋내기가 시덥잖은 일 몇 개 해냈다고 기고만장해서는!”
탕!
수완이 책상 위에 놓은 서류철을 들었다가 세게 내려놓았다. 박 이사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수완은 말없이 물끄러미 박 이사를 내려다봤다. 박 이사는 웃음기가 가신 냉랭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수완이 낯설었다.
자신이 목소리만 높여도 네네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애송이는 어디로 가고 자신을 내려다보며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남자가 누구인가 싶다. 그의 아버지 오정무 사장에게서는 느껴 보지 못했던 매서움이 느껴진다.
“오늘은 거기까지. 더 할 말이 있으시면 다음에 하시지요. 배가 고파서 그런지 오늘은 제 인내심이 바닥이 났습니다.”
이렇다 할 마무리 인사도 없이 수완은 회의실을 나섰다. 재민이 그 뒤를 따라 나가고 회의실 문이 닫힌 다음에도 한동안 회의실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본사 건물을 나와 재민이 대기시켜 놓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수완은 등받이에 기대앉아 감은 눈 위를 손가락 끝으로 문질렀다. 재민은 힐끗 수완의 기색을 살피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집으로 갈까요?”
눈을 감고 있는 수완을 룸미러로 살피다가 재민이 조용히 물었다. 잠시 답이 없어 정말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이내 수완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아니. 호텔로 가자.”
수완의 얼굴이 해쓱했다. 어쨌거나 오늘 수완도 평정심을 잃은 것은 사실이었다. 박 이사의 막말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별것도 아닌 충동질에 결국 이때까지 잘 가려 왔던 본심을 내보이고 말았다.
“집으로 가서 쉬시지요. 사모님이 집을 너무 오래 비운다고 성화시던데.”
재민이 말하는 사모님은 수완의 어머니 현재희였다. 어머니를 운운하는 것을 수완은 질색했지만 또 그녀의 말만큼 그에게 효과적인 것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완은 안 그래도 피로한 눈을 잔뜩 찡그렸다.
“언제 전화 왔었어?”
“어제요.”
“어머니한테 내 일거수일투족 보고하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다.”
“보고 안 했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가 왜 나와?”
“집에 들러 보셨던 모양이지요. 저만 입 다문다고 사모님이 모르실 것 같습니까? 누구 어머니신데.”
제법 싸늘한 어투로 재민을 탓하던 수완이 피식 웃고 말았다.
“까분다.”
“그렇게 느껴지십니까? 아닌데요.”
결국 수완은 소리 내어 웃었다. 운전을 하느라 시선을 앞에 고정하고 있는 재민도 피식 미소 지었다. 수완을 웃게 한 것이 내심 기분 좋은 모양이다.
몇 달 전부터 재민은 운전기사를 대신해 수완이 타는 차의 핸들을 잡기 시작했다. 이전의 기사는 30대 초반의 똘똘하고 행동이 빠릿빠릿한 직원이었다. 딱히 기사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적은 없지만 어느 날 재민은 수완이 차 안에서 입을 떼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묻는 대신 어차피 늘 함께 다니는 자신이 운전을 맡으면 어떻겠느냐 물었을 때 1분여 뜸을 들이고 수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 월급만큼 월급을 올려 주겠다는 대답과 함께.
“집으로 갈까요?”
눈치를 보며 재민이 다시 물었다.
“호텔로.”
이 정도면 더 물어 봤자 짜증만 낼 것이 분명했다. 재민은 호텔을 향해 차를 몰았다.
그들이 말하는 집은 수완의 부모님이 살고 있는 집이 아니었다. 수완은 호텔에서 많이 떨어지지 않은 곳에 혼자 지내는 아파트 하나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집에서 자는 날보다 본인의 거주용으로 쓰는 호텔 방에서 지내는 날이 훨씬 많았다.
수완의 어머니 현 여사는 이따금 재민에게 전화를 걸어 수완이 호텔이 아닌 집에서 자도록 하라고 부탁 아닌 부탁을 하곤 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직접 전화하지 못하고 재민을 통해 말하는 어머니의 심정이 짐작이 가서 수완의 반응을 알면서도 재민 또한 이따금씩 수완에게 호텔이 아닌 집으로 갈 것을 권하곤 했다.
“임시 비서로 일할 사람을 구했습니다.”
수완의 기분을 풀어 볼 작정으로 재민은 화젯거리를 바꾸어 보았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수완이 재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아까요. 인맥 찬스 써서 아는 사람 추천으로 구했습니다.”
수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물두 살입니다.”
“뭐?”
그 말에는 놀랐는지 수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휴학 중에 있는 대학생입니다. 아주 예뻐요.”
수완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기가 막힌 모양이다. 웃으라고 한 말에 수완이 웃으니 재민은 싱글벙글했다.
“최 부장이 알아서 했겠지. 어차피 경험자가 온다고 해서 김 비서가 하던 일을 다 감당할 수 있을 것도 아니고.”
“네. 그래서 기왕이면 어리고 예쁜 아가씨로 뽑았습니다. 사무실 분위기라도 좋으라고.”
평소 안 하던 스타일의 농담을 하는 재민이 이상한지 수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거, 농담이라도 별론데.”
이크. 재민이 어깨를 움츠렸다. 수완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어서 농담을 한다는 게 과했다.
“실수했습니다.”
재민이 순순히 인정하자 수완은 더 말하지 않고 머리를 등받이에 기대며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배고프다. 나하고 저녁 먹고 들어가.”
수완이 불쑥 말했다.
“예. 어디로 갈까요?”
“뜨락에서 된장찌개나 먹지.”
“그러죠. 전화해 놓을까요?”
“운전이나 해.”
수완은 직접 뜨락으로 전화를 걸었다. 언제나처럼 상냥한 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뜨락입니다.
“지 매니저. 나예요, 오수완.”
― 네, 부사장님.
“우리 10분이면 도착하는데 명준 아저씨 안 바쁘시면 된장찌개 2인분만 부탁해도 됩니까?”
― 네, 괜찮을 거예요. 조리장님께 말씀드릴게요.
“계란말이도.”
― 파만 잔뜩 넣고요.
“역시 지 매니저. 기억력도 좋지.”
― 얼른 준비할게요. 조심해서 오세요.
전화를 끊고 나자 비로소 수완의 얼굴에 느긋함에 돌아왔다. 하루를 끝내는 방법으로 명준이 끓여 주는 뜨락의 된장찌개와 다진 파만 잔뜩 넣은 노란 계란말이는 가히 최고라 할 수 있겠다. 된장찌개 같은 단품 메뉴는 뜨락의 메뉴에는 없지만 수완의 부탁이라면 명준은 언제라도 기꺼이 준비해 준다.
늘 그렇듯 명준은 딸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다. 채이는 입을 삐쭉거리다가 명준에게 달려들어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직 옷도 갈아입지 못한 아빠의 몸에서는 여러 가지 음식 냄새가 풍겼다. 채이가 좋아하는, 익숙한 아빠의 냄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 최 부장도, 부사장님도 다 좋은 사람들이니까.”
명준이 딸의 등을 토닥거리며 달래듯 말했다.
“아빠, 부사장님 알아?”
“알지. 아주 잘 알지.”
“좋은 분이에요?”
“그럼. 아주 좋은 분이야. 참…… 좋은 사람이지.”
명준이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며 채이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언제 이렇게 커서 아빠를 돕겠다고 일자리를 찾고, 그것 때문에 고민을 하고. 아픈 엄마와 그 뒷바라지로 바쁜 아빠 밑에서 자라 늘 명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하나뿐인 딸. 채이는 그에게 그런 존재였다.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채이는 조금은 안심이 된 듯 편안한 얼굴로 아빠 품에 푸근히 안겨 있었다.
“투자가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부사장이 제멋대로 저질러 놓고 잘못되면 회사가 책임을 져야 하나? 호텔이 객기 부리는 재벌 3세 장난감이야?”
60세가 넘은 나이에도 박 이사는 짱짱한 목소리로 두 시간이 넘는 회의 내내 수완을 향해 비난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 체력도 참 대단하지만 억지를 써 대는 박 이사를 두 시간 내내 웃는 얼굴로 상대하는 수완도 참 대단하다고 재민은 생각했다.
“제가 저지른 일을 왜 회사가 책임을 지겠습니까. 제가 책임집니다, 박 이사님.”
똑같은 대답이 벌써 몇 번째인가. 수완은 이번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오 부사장이 어떻게 책임을 질 건데? 자네 집이라도 팔아서 메울 건가? 집 팔아서 그게 가당키나 하고?”
흥분한 박 이사의 입에서 도를 넘은 단어가 튀어나왔다. 자네, 라니. 아무리 어리다지만 이사가 상사인 부사장에게 쓸 수 있는 호칭은 아니다. 수완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지만 이내 다시 웃는 얼굴로 되돌아왔다.
“필요하면 집만 팔겠습니까? 제가 가진 걸 모두 팔아서라도 회사에는 손해 갈 일이 없게 할 테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박 이사님, 늙으시나 봅니다. 하나하나 다 걱정이신 걸 보면.”
“늙어서 걱정이 많은 게 아니라 늙었으니까 이 정도밖에 못 하는 거지! 내가 젊었으면 회사를 들어 엎어서라도 못 하게 하지, 이렇게 두고만 봤을까!”
박 이사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수완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끈 섰다. 재민은 내심 수완이 자제력을 잃고 박 이사를 한 번 들이받았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지만 수완은 다시 평정심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오수완 부사장이 자리를 비운 아버지를 대신해 호텔 운영을 맡은 이래 호텔의 리모델링을 비롯해 여러 곳에 덩어리가 큰 투자를 많이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 자금들은 해오 호텔의 모기업이나 다름없는 오주 그룹에서 차입해 온 것들이다.
오주 그룹은 건설 회사를 기반으로 시작해서 자동차, 전자에 이르기까지 사업을 넓혀 근래 들어 대한민국 최대 기업 중 하나로 부상했다. 승승장구하던 오주 그룹 내 계열사 중 가장 뒤떨어져 있다는 오명을 가지고 있던 것이 오주 호텔이었다. 그런데 최근 창립 당시의 이름인 ‘오주 호텔’을 ‘호텔 해오’ 로 바꾼 후 호텔 해오는 그 오명을 떨고 국내 호텔 업계의 강자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호텔 해오의 경영자는 대외적으로는 오주 기업 창업주의 막내아들인 오정무 사장이었다. 하지만 오 사장이 지병 등을 이유로 몇 년 전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실질적인 경영자는 그의 외아들인 오수완 부사장이 되었다.
그는 파격적이었다. 오주 호텔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해오라는 새 이름을 붙인 것도 그의 머리에서 나온 의견이었다. 그룹 내 다른 계열사들이 한결같이 오주의 이름으로 묶여 있는 상황에서 그의 결정은 그룹 전체를 들썩거리게 할 만큼 파장이 컸다. 어린놈이 뭘 믿고 제멋대로 구는 거냐며 집안의 어른들과 임원들이 성토했지만 일단 오 회장에게서 허락이 떨어지자 곧 조용해졌다.
오수완 부사장이 경영권을 쥐고 난 후로 호텔 해오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그는 큰아버지이자 오주 그룹의 사주인 오정국 회장에게 직접 지원을 받아 호텔의 내외부에 투자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원받은 금액을 모두 상환할 정도로 성과를 거두었다. 어느새 오주 그룹 계열사 중 가장 천덕꾸러기였던 호텔 사업은 그룹 내 다크호스로 부상하고 있었다.
가시적인 성과로 보나 체감 평가로 보나 수완이 경영권을 잡은 이후로 해오 호텔이 눈에 띄게 성장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이사처럼 수완의 모든 행보에 어깃장을 놓는 세력들이 호텔 곳곳에 숨어 있었다.
그들은 수완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오주 물산 오정민 사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오정민 사장은 선대 오 회장의 네 아들 중 둘째로 수완의 아버지의 이복형이었다. 그들은 오정민 사장이 자신들의 배후라는 것을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엄연히 사주의 아들이자 부사장인 그를 좌지우지하려 들기까지 했다.
왜 수완이 그들과 전면으로 맞서지 않는지 재민은 알 듯하다가도 이해가 안 됐다. 수완은 사장이 아닌 부사장직에 있지만 수완의 아버지가 엄연히 사장직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게다가 수완은 호텔 경영에서 놀라운 실적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한바탕 분란이야 일겠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을 호텔에서 몰아내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텐데 수완은 그러지 않았다.
“남들이 한다고 부화뇌동해서 쫓아가다가는 뱁새 다리 찢어집니다. 오 부사장처럼 젊은 사람은 경험이 일천해서 물정을 몰라 그러는 거야. 시건방 떤다는 소리 듣지 말고 가지고 있는 것이나 잘 지킬 생각을 해야지.”
시건방은 도대체 누가 떠는 건지. 재민은 하마터면 말이 과하다고 박 이사에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무리 연장자에 업무적으로 훨씬 선배라고는 하지만 분명 상사인 수완에게 해도 될 말과 해선 안 될 말이 있다. 재민이 사고를 치기 직전에 수완이 던진 말이 그를 막았다.
“안타깝습니다. 어쨌든 호텔을 생각하는 마음은 박 이사님이나 저나 마찬가지일 텐데 이렇게 가치관이 다르니 말입니다.”
수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빙긋이 웃으며 박 이사를 내려다봤다.
“제 계획을 정 그렇게 수용하기 어려우시거나 의견 차이를 조율하기 힘드시다면 당분간 쉬시는 것도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저야 누구보다 우리 호텔을 사랑하시는 박 이사님과 마음 맞춰 일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습니다만, 박 이사님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잠시 쉬도록 해 드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냉랭했다. 2시간 넘는 회의 내내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던 불편한 속내를 수완은 끝내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표출했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박 이사가 말뜻을 알아듣고 부르르 떨었다.
“쉬다니! 내가 평생을 오주 호텔에 바쳤는데 누가 누굴 감히! 호텔 경영이 뭔지 알지도 못하는 풋내기가 시덥잖은 일 몇 개 해냈다고 기고만장해서는!”
탕!
수완이 책상 위에 놓은 서류철을 들었다가 세게 내려놓았다. 박 이사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수완은 말없이 물끄러미 박 이사를 내려다봤다. 박 이사는 웃음기가 가신 냉랭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수완이 낯설었다.
자신이 목소리만 높여도 네네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애송이는 어디로 가고 자신을 내려다보며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남자가 누구인가 싶다. 그의 아버지 오정무 사장에게서는 느껴 보지 못했던 매서움이 느껴진다.
“오늘은 거기까지. 더 할 말이 있으시면 다음에 하시지요. 배가 고파서 그런지 오늘은 제 인내심이 바닥이 났습니다.”
이렇다 할 마무리 인사도 없이 수완은 회의실을 나섰다. 재민이 그 뒤를 따라 나가고 회의실 문이 닫힌 다음에도 한동안 회의실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본사 건물을 나와 재민이 대기시켜 놓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수완은 등받이에 기대앉아 감은 눈 위를 손가락 끝으로 문질렀다. 재민은 힐끗 수완의 기색을 살피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집으로 갈까요?”
눈을 감고 있는 수완을 룸미러로 살피다가 재민이 조용히 물었다. 잠시 답이 없어 정말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이내 수완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아니. 호텔로 가자.”
수완의 얼굴이 해쓱했다. 어쨌거나 오늘 수완도 평정심을 잃은 것은 사실이었다. 박 이사의 막말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별것도 아닌 충동질에 결국 이때까지 잘 가려 왔던 본심을 내보이고 말았다.
“집으로 가서 쉬시지요. 사모님이 집을 너무 오래 비운다고 성화시던데.”
재민이 말하는 사모님은 수완의 어머니 현재희였다. 어머니를 운운하는 것을 수완은 질색했지만 또 그녀의 말만큼 그에게 효과적인 것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완은 안 그래도 피로한 눈을 잔뜩 찡그렸다.
“언제 전화 왔었어?”
“어제요.”
“어머니한테 내 일거수일투족 보고하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다.”
“보고 안 했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가 왜 나와?”
“집에 들러 보셨던 모양이지요. 저만 입 다문다고 사모님이 모르실 것 같습니까? 누구 어머니신데.”
제법 싸늘한 어투로 재민을 탓하던 수완이 피식 웃고 말았다.
“까분다.”
“그렇게 느껴지십니까? 아닌데요.”
결국 수완은 소리 내어 웃었다. 운전을 하느라 시선을 앞에 고정하고 있는 재민도 피식 미소 지었다. 수완을 웃게 한 것이 내심 기분 좋은 모양이다.
몇 달 전부터 재민은 운전기사를 대신해 수완이 타는 차의 핸들을 잡기 시작했다. 이전의 기사는 30대 초반의 똘똘하고 행동이 빠릿빠릿한 직원이었다. 딱히 기사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적은 없지만 어느 날 재민은 수완이 차 안에서 입을 떼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묻는 대신 어차피 늘 함께 다니는 자신이 운전을 맡으면 어떻겠느냐 물었을 때 1분여 뜸을 들이고 수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 월급만큼 월급을 올려 주겠다는 대답과 함께.
“집으로 갈까요?”
눈치를 보며 재민이 다시 물었다.
“호텔로.”
이 정도면 더 물어 봤자 짜증만 낼 것이 분명했다. 재민은 호텔을 향해 차를 몰았다.
그들이 말하는 집은 수완의 부모님이 살고 있는 집이 아니었다. 수완은 호텔에서 많이 떨어지지 않은 곳에 혼자 지내는 아파트 하나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집에서 자는 날보다 본인의 거주용으로 쓰는 호텔 방에서 지내는 날이 훨씬 많았다.
수완의 어머니 현 여사는 이따금 재민에게 전화를 걸어 수완이 호텔이 아닌 집에서 자도록 하라고 부탁 아닌 부탁을 하곤 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직접 전화하지 못하고 재민을 통해 말하는 어머니의 심정이 짐작이 가서 수완의 반응을 알면서도 재민 또한 이따금씩 수완에게 호텔이 아닌 집으로 갈 것을 권하곤 했다.
“임시 비서로 일할 사람을 구했습니다.”
수완의 기분을 풀어 볼 작정으로 재민은 화젯거리를 바꾸어 보았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수완이 재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아까요. 인맥 찬스 써서 아는 사람 추천으로 구했습니다.”
수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물두 살입니다.”
“뭐?”
그 말에는 놀랐는지 수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휴학 중에 있는 대학생입니다. 아주 예뻐요.”
수완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기가 막힌 모양이다. 웃으라고 한 말에 수완이 웃으니 재민은 싱글벙글했다.
“최 부장이 알아서 했겠지. 어차피 경험자가 온다고 해서 김 비서가 하던 일을 다 감당할 수 있을 것도 아니고.”
“네. 그래서 기왕이면 어리고 예쁜 아가씨로 뽑았습니다. 사무실 분위기라도 좋으라고.”
평소 안 하던 스타일의 농담을 하는 재민이 이상한지 수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거, 농담이라도 별론데.”
이크. 재민이 어깨를 움츠렸다. 수완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어서 농담을 한다는 게 과했다.
“실수했습니다.”
재민이 순순히 인정하자 수완은 더 말하지 않고 머리를 등받이에 기대며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배고프다. 나하고 저녁 먹고 들어가.”
수완이 불쑥 말했다.
“예. 어디로 갈까요?”
“뜨락에서 된장찌개나 먹지.”
“그러죠. 전화해 놓을까요?”
“운전이나 해.”
수완은 직접 뜨락으로 전화를 걸었다. 언제나처럼 상냥한 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뜨락입니다.
“지 매니저. 나예요, 오수완.”
― 네, 부사장님.
“우리 10분이면 도착하는데 명준 아저씨 안 바쁘시면 된장찌개 2인분만 부탁해도 됩니까?”
― 네, 괜찮을 거예요. 조리장님께 말씀드릴게요.
“계란말이도.”
― 파만 잔뜩 넣고요.
“역시 지 매니저. 기억력도 좋지.”
― 얼른 준비할게요. 조심해서 오세요.
전화를 끊고 나자 비로소 수완의 얼굴에 느긋함에 돌아왔다. 하루를 끝내는 방법으로 명준이 끓여 주는 뜨락의 된장찌개와 다진 파만 잔뜩 넣은 노란 계란말이는 가히 최고라 할 수 있겠다. 된장찌개 같은 단품 메뉴는 뜨락의 메뉴에는 없지만 수완의 부탁이라면 명준은 언제라도 기꺼이 준비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