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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즈 와이 미 1권




· 일러두기

1. 글의 배경은 2006년에서 2007년까지입니다.
2. 본문 중에 한국어 대화는 “ ”로 영어 대화는 「 」로 표기했습니다.
3. 외국 인명, 지명 및 기타 독음은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되 관용적인 표현과 동떨어진 경우 절충하여 실용적 표기에 따랐습니다.
4. 본 소설에서 언급되는 회사나 단체, 인물 등은 허구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회사나 단체, 인물 등과 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

1화
Chapter 01. 우린 왜 만났을까



벌써 몇 번째 시계를 확인했다. 혹시 약속 시간을 잘못 들은 건 아닌지.
그러니까 한 번쯤은 확인 전화를 해도 되는 상황은 아닌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심란해하는 중에도 어김없이 시간은 흐르고 있다.
굳이 식사를 같이 할 필요는 없다며 8시로 약속을 정한 건 그쪽이었다.
나 역시 낯선 사람과 밥을 먹는 건 불편해서 그러자고는 했지만, 벌써 40분째 혼자 앉아 있으려니 차라리 같이 밥을 먹다 체하는 편이 나았지 싶다.
그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신경질은 있는 대로 났지만 최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신호음이 울리기도 전에 음성메시지로 연결되고 말았다. 이건 뭐, 불난 집에 부채질도 모자라 기름까지 끼얹는 상황인가?
성실하고 세심한 사람이라고?혹시, 실성의 앞뒤를 헷갈려 성실이 된 건 아닌가 싶다. 실성을 하지 않고서야 약속 시간 45분이 경과한 지금 전화기가 꺼져 있어?
분노의 한숨을 억지로 삼키며 연화 언니의 번호를 찾았다. 이번 일을 주선한 당사자로서 언니에게도 책임이 있으니까 말이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잠에 취한 듯 푹 잠긴 언니의 음성이 들려왔다. 만일 언니마저 전화를 안 받았다면 당장 일어나 카페를 나섰을지도 모른다.
“주무셨어요?”
― 어, 잠깐.
“죄송해요.”
― 괜찮아.
엄청 피곤한 목소리라 외려 미안해졌다.
― 근데 왜?
“아― 그게, 제가 오늘 그분을 만나기로 했거든요.”
― 음? 그분?
“그 왜…… 저기. 그 표지디자인 하시는 분.”
― 아, 레온이?
이건 진짜 미안한 말이지만, 들을 때마다 어색한 이름이다. 50분 가까운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선뜻 전화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저 실례지만, 레온 씨 되시나요?’ 하고 물으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다.
분기탱천한 이 감정적 격류 상태를 유지해서 약속에 늦은 상대에게 무언의 압력을 넣으려면, 뭔가 쓰다 만 것처럼 불완전하고 성별 역시 불분명한 그의 이름 때문에 만나기도 전에 웃어서는 안 되니까.
“네.”
― 근데 왜?
“아직 안 오셔서요.”
― 아직 안 왔다고?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되묻는다.
“전화도 안 받고, 벌써 50분째 기다리고 있어요.”
― 정말?
진정 깜짝 놀란 목소리다. 그래서 내가 더 놀랐을 정도로 말이다.
― 진짜 50분째 기다리고 있어?
그럼 내가 농담이나 따먹자고 전화를 했겠습니까. 그러니 성실하고 세심하다던 표지디자이너 레온이를 당장 대령해 주세요.
― 그럴 애가 아닌데.
“혹시 다른 연락처 모르세요? 전화기도 꺼져 있어서 연락이 안 돼요.”
― 어머! 혹시 무슨 일 있나?
지금 레온이 걱정을 하는 건가? 벌써 50분째 이유도 모른 채 기다리고 있는 난 안중에도 없고?
― 다른 연락처는 사무실 정도? 일단 내가 전화해 볼게.
“에? 언니가요?”
― 너한테 다른 번호는 안 준 거잖아.
“네. 굳이 다른 번호는.”
― 그럼 내가 해 보는 게 좋을 거 같아.
일껏 사람을 소개해 놓고 연락은 직접 하겠다니, 내가 받은 번호 외에는 함부로 알려고 들지 말라는 듯, 살짝 묘한 느낌이 든다.
“네. 그럼 부탁…….”
말을 끝내기도 전에 느낌이 왔다. 지금 막 카페에 들어선 남자가 바로 그 사람이지 싶은 느낌.
― 여보세요?
“언니 저 잠깐.”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곧장 내가 앉은 창가로 직진해 왔다. 시선을 피하는 건 50분을 기다린 나의 몫이 아니라 50분을 늦은 그의 몫이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어이없는 표정을 유지하며 그를 직시해 곤란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오래 기다리셨죠?”
미안한 것도 그렇다고 뻔뻔한 것도 아닌 그의 표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내 앞의 이 남자가 내가 기다리던 그 남자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지?
“전화드리려고 했는데 배터리가 다 돼서요.”
생긴 건 멀쩡한데 나사 하나쯤은 빠진 것 같은, 나이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인 느낌이다.
“통화하던 중 아니었어요?”
맞은편 의자를 뒤로 뺀 그가 자리에 앉기까지 나는 말문이 막힌 채 그를 바라봤다. 물론 내가 앉아라 마라 할 상황은 아니지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는 나와야 정상 아닌가?
“누구세요?”
최대한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이상하게도 아주 짧은 시간을 마주했음에도 이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애먼 사람한테 신경질 내는 걸 수도 있다는 염려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허여…… 아니, 연화 누나 소개로 나오신 거 맞죠?”
“네, 맞아요.”
“일단 통화부터 끝내시죠.”
그의 시선이 휴대폰을 들고 있는 내 손으로 향했다. 그제야 여보세요를 연발하고 있는 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죄송해요 언니.”
― 온 거야?
“네, 지금 막 왔네요.”
지금 막 오.셨.네.요.가 아니라 왔.네.요. 이 정도면 내가 얼마나 짜증 난 상태인지 짐작하려나?
― 무슨 일이래?
“모르겠어요. 일단 나중에 전화드릴게요.”
― 어, 그래그래.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분히 공격적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빨리 미안하다고 해라, 아니면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든가!
“오래 기다리셨어요?”
오래 기다렸냐고? 너무 기가 막혀서 손목시계를 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차가 막혀서 중간에 지하철을 탔는데 반대편으로 잘못 탔어요.”
지하철에 불이 나 새까맣게 탄 거라면 몰라도, 고작 생각해 낸 핑계가 지하철을 반대로 탔다?
설마 내선순환을 타고 아예 반대로 쭉 돌아왔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설마 그 말 한마디로 이 어이없는 상황을 퉁치려는 건 아니겠지?
“도착해서도 여기 찾느라고 조금 헤맸어요.”
웃어? 지금 웃음이 나오니? 웃는 얼굴로 죄송하다니 기분이 더 나빠지고 말았다.
“전화라도 하셨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배터리가 없어서요.”
약속을 정해 놓고 배터리 확인도 안 했다고? 성실하고 세심하다더니 어디가 성실이고 어디가 세심이지?
“시간 없는데, 바로 시작해도 될까요?”
“네?”
“표지디자인이요.”
여기서 디자인을 시작하겠다고? 설마 앉은 자리에서 나를 쓱쓱 그려서 표지에 내 초상화를 넣으려는 건가?
“지금 여기서요?”
“그럼 언제 어디서 할까요?”
“뭘 어떻게 시작하실 건데요?”
처음으로 그가 난감한 표정을 보였다.
“화가 많이 나셨네요.”
“상대방 기분을 생각은 하세요?”
“어떻게 해야 기분이 풀리시겠어요?”
대놓고 물으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애초부터 늦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 외에는 할 말도 없는데.
“일단 따뜻한 차라도 한잔하시죠?”
“많이 마셨는데요.”
“혹시 개떡 좋아하세요?”
순간,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눈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불룩한 가죽가방에서 그가 꺼내 든 건 진짜 개떡이었다.
“여기요―”
다분히 토속적인 쑥개떡을 테이블에 꺼내 놓고 오른손 검지를 살짝 올려 가며 서버를 부르는 모습이라니, 뭔가 상당히 언밸런스한 그의 포즈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네, 주문하시겠습니까.”
“따뜻한 우유 두 잔이랑 포크 좀 부탁해요.”
설마 지금, 마주 보고 앉아 개떡을 뜯어 먹자는 건 아니겠지?
“우유에 설탕. 괜찮죠?”
“네에?”
“설탕 타면 더 맛있어요.”
달걀노른자도 달라지 그러세요.
“화 푸세요. 늦어서 죄송해요.”
일관성 있는 사과를 받고 싶은 건 욕심인가?
우유에 설탕으로 간 맞추듯 찔끔찔끔 죄송하다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 진심으로 난감하다. 더구나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바로 저 웃음이다. 미안하다면서 왜 저렇게 웃고 있는 거지?
“죄송한 거 맞아요?”
“예?”
“왜 자꾸 웃으세요?”
“아― 미안해요. 난처할 때 나오는 버릇인데, 기분 나쁘셨어요?”
사실 트집을 잡을 정도로 심한 건 아니었다.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 표정이었을 뿐 대놓고 웃은 건 아니니까.
하지만 왠지…… 그런 그의 표정을 보고 있는 게 불편했다. 그 미소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아서 어이가 없기도 했다.

그와의 첫 만남은 이랬다. 그리고 그런 그와 결혼하기까지 채 3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사랑을 확인한 적은 없었다. 결혼을 제안한 건 내가 먼저였고, 그 제안을 승낙했으니 그도 당연히 나와 같은 마음이리라 생각했다.

* * *


나는 기혼이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의 신혼이다.
그런데 신혼이라는 단어의 설렘은 신랑이 아닌 나 혼자만 느끼는 것 같다. 아니, 더 이상은 나도 그렇지 않으니 느꼈던 것 같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신랑은 퇴근해서 들어오면 곧장 서재로 들어간다.
저녁 식탁에 같이 앉은 게 몇 번인지 손으로 꼽을 수도 없을 정도다.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아예 없어서라고 말한다면 많이 비참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오늘도 신랑은 저녁을 먹었다는 한마디를 뒤로하고 서재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않는다.
문이나 살짝 열어 두면 좋으련만 거실에서 난리굿을 하는 것도 아닌데 어찌나 꼼꼼하게 문을 닫아 두시는지, 누가 보면 서재에서 혼자 맛있는 거라도 까먹는 줄 알게 생겼다.
오늘은 바쁜가 보다, 내일은 다르겠지 생각하는 것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벌써 한 달째가 아닌가. 벌써 한 달째 나는 혼자 잠들어야 했다. 새벽에 눈을 뜨면 옆자리는 항상 비어 있었다. 서재에 가 보면 신랑은 엎드려 자고 있거나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고 있다.
처음 몇 번은 침대로 가서 편히 자라고 나름 설득이란 것도 해 보고, 따뜻한 차를 준비해서 말이라도 붙여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바람에 마음만 휑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나는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물론 그를 개조해서 내가 바라 마지않던 결혼 생활을 영위하려는 거창한 바람은 진작 포기했지만 적어도 이렇게 없는 사람 취급 당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오냐, 그래. 뭐가 그렇게 바쁜지 얘기나 한번 들어 보자 생각하며 성큼성큼 서재로 다가섰다.
물론 문을 두드리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일단 노크를 하고 나니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서서히 깨어나 용기가 생기는 것 같다.
서너 차례의 노크에도 불구하고 반응이 없어 손잡이를 내리자 문이 살짝 열리며 서재에 가득 배어 있던 신랑의 향기가 아찔하게 밀려 나왔다.
오른손에 머리를 괸 채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신랑은 내가 문을 연 줄도 모르는 눈치다. 다시 문을 닫고 쾅쾅 두드리기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큰 소리로 헛기침을 했지만, 역시 묵묵부답이다.
“많이 바빠?”
드디어 신랑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내 건조한 시선으로 모니터를 향해 돌아앉는다.
“먼저 자. 늦을 거야.”
안 바쁘다는 말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거두절미하고 늦으니까 먼저 자라는 말을 기대한 건 더더욱 아니다. 인간이 어쩜 저렇게 매정할까.
“나 할 얘기 있는데.”
일찌감치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낭군님의 한숨을 따라 어깨가 오르내리는 걸 보고 있자니 괜한 짓을 했나 싶어 속이 갑갑하다.
하지만 오늘은 나도 물러날 생각이 없다. 할 얘기가 있으니 오늘은 제발 좀 나오지 않으련?
“나중에 하면 안 돼?”
뒤도 안 보고 툭 던진 한마디에 가슴에 금이 가고 만다.
할 얘기가 있다는데, 매일도 아니고 오늘 처음으로 꺼낸 말인데, 내가 이 말을 하려고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속을 앓았는데, 얼굴도 안 쳐다보고 나중에 하라는 말이 나오니?
“지금 했으면 좋겠어.”
이상형을 말해 달라는 농담 섞인 질문에 ‘일하는 데 방해 안 되는 여자’라고 말했던 사람.
처음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간 곳에서, 신랑은 가져온 노트북이 먹통이라며 마치 신혼 첫날밤에 와이프가 아픈 것처럼 열성적으로 노트북을 만지작거렸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노트북을 창밖으로 내던지고 나도 따라 뛰어내려 노트북이고 뭐고 박살을 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 후에도 줄곧 나는 참았다. 참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너무 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신랑의 이런저런 행동들이 옳은 건지 그른 건지 알 길이 없었기에 멍한 상태로 한 달을 허비했다.
처음에는 신혼부부 간에 흔히 있는 기싸움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신랑은 나를 이기려는 게 아니라, 아예 없는 사람으로 대하고 있었다.
“지금 했으면 좋겠다고. 얘기.”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도록 앉은 자세 그대로 조금의 움직임도 없다. 손에 든 게 있었다면 힘껏 던졌을지도 모른다.
“내일 얘기해.”
어쩜 저렇게 빈틈이 없으실까. 문짝이라도 떼서 던지고 싶을 만큼 심정이 사나워진다.
“내일 얘기하자고.”
의자를 돌려 앉으며 왜 아직도 거기 서 있냐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신랑 앞에서 모든 의욕이 사라져 버렸다. 왜 이러는지 따지고 싶은 생각도 달아났다.
다만 한 가지, 아무리 무안하고 서러워도 저 인간 앞에서 눈물 따위는 보이지 말자는 자존심만 남았다.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자 쾅― 소리가 요란하게 거실을 울린다. 그래 봐야 갈 곳이라고는 서재 건너편의 안방밖에 없다. 언제나 혼자 잠드는 침대가 휑뎅그렁하게 놓여 있는 곳.
오늘도 침대에 혼자 누워 우리의 연애를 곱씹어 본다. 우리라는 단어조차 어색한 지경이 되어 버린 지금, 새삼스럽게 돌아볼 것도 없어 보인다.
만남에서 결혼까지 3개월 남짓이었다.
첫 만남에 호감을 느꼈고 결혼을 제안한 것도 나였다. 너무 서두르고 있는 건 아닐까도 생각했지만 그 정도로 욕심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확신도 있었다. 이 사람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 분명히 그랬는데, 대체 뭐가 어떻게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