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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내일 얘기하자던 신랑은, 약속했던 내일이 오늘이 되고 벌써 11시가 넘도록 집에 들어올 생각을 않는다.
얘기라는 걸 할 생각이 있기는 했던 건지, 11시 50분에 들어와 ‘12시 정각까지 딱 10분만 얘기하자!’고 할 생각인 건지, 대체 이 인간의 머릿속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다.
TV를 틀어 놓기는 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아 줄곧 시계만 바라보다가 결국 먼저 전화를 걸었다. 혹시라도 중간에 불의의 사고를 당해 귀가가 늦어지는 걸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절대 사고를 바란 게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됐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마디 말도 없이 이렇게 늦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 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멀쩡한 목소리.
“어디야.”
분명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 무슨 일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내일 얘기하자던 어제의 약속을 잊은 거라면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는 내가 너무 비참하기 때문이다.
― 오늘 사무실에서 자려고.
심장이 뿜어낸 피가 식도를 타고 넘어오는 것 같아 소리라도 지르고 싶지만 전화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봐야 내 입만 아플 게 빤하다.
어제 했던 말을 잊었거나, 잊지 않았다면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겠지.
만일 그렇다면 그런 하찮은 말 따위에 약속이라는 이름을 붙여 가며 꼬투리 잡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의 기다림보다 그쪽이 훨씬 더 비참한 일 아닌가.
“알았어.”
신랑은 짧고 간단하게 ‘응’이라고 대답한 뒤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닌가. 외박을 하려면 최소한 연락 한 줄이라도 미리 해 줘야지.
어제의 약속이고 나발이고를 떠나서, 집에 있는 사람이 걱정할 거라는 생각은 아예 못 하는 건가?
도대체가 상식이라는 게 없는 인간이다. 끓어오르는 분을 혼자 삭이자니 약이 바짝바짝 올라 다시 전화를 걸었다.
― 왜.
“너 지금 아무 생각도 안 들어?”
― 바쁘다니까. 나중에 얘기하면 안 돼?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완벽한 센스를 보여 주다니. 역시 너답다. 처음부터 대화의 가능성을 차단해 버리는 놀라운 재주를 가진 인간이다.
“야!”
분에 못 이겨 버럭 소리치고 나니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 지금 막 떠오른 디자인이 있어서, 이거 대충 잡아 놓고 전화하면 안…….
먼저 전화를 끊어 놓고 혹시나 전화해 주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나 자신이 우습다. 난 정말 자존심도 없는 걸까.
저런 인간의 어디가 좋다고 이렇게 마음 졸이며 손톱까지 물어뜯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모를 수가 없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결혼할 생각 따위는 없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내가 애걸복걸하는 게 귀찮아서, 마침 집안에서도 외동인 그를 장가보내려고 혈안이니까, 그래서 나를 받아 준 거다.

* * *


오늘은 들어오려나, 온다면 몇 시에 오려나.
혼자 거실에 앉아 우두커니 신랑을 기다리기 싫어서 무작정 옷을 입고 나왔다. 집을 나서기는 했지만 달리 갈 데가 있는 건 아니었다.
찬바람을 맞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걸음이 멈춘 곳이 여기였다.
벨을 누르기 무섭게 문이 열린 걸로 봐서는 아마도 쉬고 있었나 보다. 이제 여기서마저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심란해하는 내 모습이 처량하지만 달리 갈 데가 없었다.
“옴마? 무슨 일이래?”
밤을 새운 모양인지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선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무슨 일이긴. 보고 싶어서 왔지. 왜? 싫어?”
“기집애 말하는 것 좀 봐. 딴 남자랑 눈 맞아서 도망칠 때는 언제고. 흥~”
“그러게 말이다.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 인간은 애초에 눈알이 있지도 않았나 봐.”
선희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뭐야~ 벌써 파경이야? 요즘 신혼부부 셋에 하나는 이혼이라더니. 쯧쯧―”
“고사를 지내라.”
“야― 시끄러워. 마감 사흘밖에 안 남아서 바쁘거든!”
“너도 바쁘구나. 사방 천지에 바빠서 죽을 것들만 있네. 내가 다 죽여 줄까?”
“미친. 쨌든 놀고 싶으면 사흘 후에 와. 아님 조용히 있다 가라.”
삐딱해진 안경을 바로잡으며 피곤한 듯 기지개를 켜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난다.
몇 달 전에는 나도 이곳에서 함께 꿈을 쓰고 그리던,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라서다.
“글은 잘 써져?”
“뭐 그냥 그렇지. 심부름꾼이 없어지니까 아쉬워서 집중이 안 되더라.”
“말 참 예쁘게 하네.”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라고. 지금 마구마구 감정이입 하는 중이었거든?”
선희는 곧 거실에 널린 컵라면의 잔해와 안개처럼 자욱한 담배 연기 사이로 총총히 사라졌다. 담배 끊는다더니, 이 연기며 재떨이에 수북한 꽁초들은 다 뭔지 모르겠다.
나랑 살 때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마치 이런 부분에서나마 나란 인간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본능을 들킨 것 같아 씁쓸해졌다.
어느새 작업실 의자에 앉은 선희가 방언하듯 중얼중얼 꿍얼꿍얼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치 그 소리가 내 가슴에 응어리졌던 실타래처럼 느껴진다.
응어리가 술술 풀려나가 어느새 가슴 한쪽을 꽉 틀어막았던 뭔가가 천천히 사라지는 느낌.
선희가 나는 안중에도 없이 작업에 집중하는 모습을 봐도 아무렇지 않은 걸 보면, 내가 정말 그 인간을 특별히 여기고 있기는 한가 보다.
신랑을 너무 사랑해서 그 사람의 무관심에 감정이 상하는 건지도 모른다.
선희가 글을 쓰는 동안 조용히 창가에 앉아서 바깥 구경을 했다. 몇 번인가 선희가 말을 걸기는 했지만 번번이 때를 놓쳐 핀잔을 들어 가며 하루 종일 앉아만 있었다.
밥 먹는 것도 귀찮고 생각하는 것도 귀찮고 숨 쉬는 것조차 귀찮아질 즈음,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선희가 옆으로 풀썩 주저앉더니 휴대폰을 불쑥 내밀었다.
“누군데?”
“뭐가 누구야.”
“전화.”
“시간 보라고 시간. 지금 새벽 2시야.”
순간이지만 신랑한테 전화라도 온 건 아닐까 했던 것이 무안하다.
“너 진짜 안 가?”
선희가 제법 심란한 표정으로 물었다.
“조용히 있을게. 나 그런 거 잘해. 나도 몰랐는데, 나 조용히 있는 거 무지 잘하더라고. 그러니까 오늘 하루만 여기 있게 해 주라.”
어차피 들어가도 반겨 줄 사람도 없고 거기가 내 집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시끄럽다는 게 아니잖아. 진짜 신랑이랑 싸웠어?”
“싸우긴. 한 번도 싸운 적 없어.”
서로 말 한마디 안 하는데 싸움이 될 리가 있나.
“그럼 왜 이러는데?”
“그냥 너 보고 싶어서 왔다니까? 그러니까 하루만 재워 줘.”
그저 바람이나 쐬고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한번 나오니 다시 들어가기가 싫다.
담배 연기가 가득하고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어도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이곳이 신혼집보다 훨씬 더 포근하다.
“아니 왜 꼭 오늘같이 바쁠 때 와서 행패냐고. 사람 심란하게.”
“심란한 사람이 그렇게 잘 자냐.”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받아치는데도 선희의 표정은 심각 그 자체다.
“너 정말 아무 일 없어?”
“없다니까.”
“뻥치시네.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아무 일 없다 그러면 믿을까 봐?”
“진짜 아무 일도 없어.”
아무 일이 있을 수가 없는 인간과 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라겠는가.
선희는 나와 작업실을 번갈아 쳐다보며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마감을 코앞에 두고 들이닥친 내가 어지간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둔하기로 소문난 선희가 이럴 정도면 내 얼굴이 오죽할까 싶다.
“얼른 가서 마무리해.”
“너 정말 아무 일 없는 거지?”
또 같은 것을 묻는다. 한 번만 더 물으면 꾹 참고 있던 것이 터져 버릴 것 같아서 불안하다.
“알았어. 갈게.”
“뭔 소리야. 별일 없냐는데 가긴 어딜 가겠대.”
“그러니까 그만 물어봐. 보고 싶어서 왔다는데 자꾸 왜 그래.”
“아, 몰라! 마음대로 해. 저 고집을 누가 꺾어. 어흐~”
선희가 툴툴대며 작업실로 들어간 후 휴대폰을 확인했다. 이 시간쯤이면 집에 들어갔을 텐데 내가 없는 걸 알면 전화라도 하지 않을까.
그렇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조마조마하던 가슴은 아무런 기록도 없는 휴대폰 액정을 확인한 순간 덧없이 무너졌다.

* * *


벌써 나흘째 집을 비웠다.
하루는 선희네 집에서, 또 하루는 찜질방에서, 그리고 오늘도 찜질방이다.
달리 갈 데가 없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며 조금 더 알아보고 천천히 결정하라던 집안 어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 결혼이다.
그러니 겨우 한 달 살아 놓고 못 해 먹겠다며 되돌아갈 순 없는 노릇 아닌가.
“하아―”
쓸모없는 휴대폰을 알뜰살뜰 충천해서 신줏단지 모시듯 들고 다니는 내 모습이 우스워 죽겠다. 연락이 오길 기다리다가는 평생 집에 못 들어갈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인간은 나의 부재조차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 혼자 애타고, 나 혼자 기다리고…….
그래, 완벽하게 무시하자. 그가 나한테 하는 것처럼 나도 똑같이 해 주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결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모르는 사람으로 산다면 모를까, 결혼까지 한 마당에 서로를 완벽하게 무시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로서는 어떤지 몰라도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그를 알아 버렸고, 이미 그에게 마음을 줬으니까…….
그래서? 내 마음을 줬으니 그 사람 마음을 받고 싶다?
넋 나간 웃음이 어깨를 흔들었다. 바랄 걸 바라야지. 그렇게 겪고도 아직 희망이라는 걸 놓지 못하는 내가 끔찍하다.
차라리 폭언을 일삼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편이 낫다. 그럼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한 달이 넘도록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 이유가…… 대체…….
“내가.”
그래,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코끝이 아린가 싶더니 이내 눈물이 흘렀다. 새벽 2시가 넘은 주택가의 찜질방은 다행히도 아주 조용하다. 그러니 내 눈물을 눈치챌 사람도 없…….
“저기 아가씨?”
난 정말 운이 없다.
“전화 온 거 같은데?”
낯선 아주머니의 시선 끝에 머문 휴대폰 액정에 그의 번호가 떠 있다.
“아가씨?”
바닥을 울리는 진동음이 거슬리는지 아주머니가 한 번 더 채근하신다.
“아, 네. 죄송해요.”
“얼른 받아 봐요.”
고개 숙여 죄송하다는 제스처를 보이고는 사람이 아예 없는 대각선 반대편의 구석으로 자리를 잡았다.
호흡을 안정시키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아마도 음성메시지로 넘어간 모양인지 부재중 기록이 액정에 남겨졌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전화가 다시 울린다.
“여보세요.”
최대한 침착하게.
― 어디야?
“잠깐 밖에 나왔어.”
― 그러니까 거기가 어디냐고.
쿨하게 잠깐 나왔다고 해 놓고, 찜질방이라고 이실직고할 수는 없다.
“알 거 없잖아.”
― 뭐 하는 건데?
“뭐가?”
― 말도 없이 집을 비우면 어떡해?
“내가 뭘 하든 관심이나 있어?”
― 관심을 가져 줘야 의무를 다하겠다는 거야?
“뭐?”
― 집을 비우려면 이유를 말해야 되는 거 아닌가?
“무슨 의무? 집 지키는 의무?”
― 적어도 난 말없이 외박하지는 않았어.
“그래, 그랬지. 내가 전화해서 어디냐고 물으면 마지못해서 얘기하긴 했지. 사무실에서 잔다고.”
― 그러니까 너도 얘기해.
“뭘?”
― 어디서 잘 건지.
그것만 얘기하면 어떻든 상관없다는 건가?
“그게 왜 궁금한데?”
― 적어도 와이프가 어디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정상이니까.
와우 브라보!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말없이 전화를 끊고 전원도 꺼 버렸다.
그래, 밤새도록 네가 말한 의무에 대해 생각해 봐라. 애초부터 의무를 다하지 못한 사람이 누군지 말이다.

* * *


찜질방을 나와 점심을 먹고 집으로 들어왔다.
새벽에 전화를 끊자마자 달려와서 한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기다렸다는 듯 뽀르르 달려왔다고 착각할 것 같아서 오후가 될 때까지 억지로 참았다.
발코니 수납장에 있던 트렁크를 끌어내자 먼지가 하얗게 일어나 코끝이 맵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처음 만져 보는 트렁크에는 아직도 공항에서 붙였던 스티커가 그대로 있었다.
스티커를 뜯어 버리고 먼지를 대강 털어 낸 트렁크를 안방으로 끌고 와서 옷가지를 챙기는 중에도 문득문득 통화 내용이 떠올라 화가 난다.
걱정된다는 말 따위를 기대한 건 아니다.
하지만 ‘의무’라니, 정말 미친 거 아닐까? 아니면 내가 미친 건가? 결혼 전에 이미 합의된 ‘의무’ 조항을 나 혼자 잊어버렸나? 관심을 가져 줘야 의무를 다하겠냐고?
거지한테 적선하는 것도 아니고 관심을 줄 테니 의무를 다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