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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하긴 이건 적선도 아니다. 거지한테 주는 동냥은 대가를 바란 게 아니니까, 관심의 반대급부로 의무를 다하라는 건 적선이 아니라 거래다. 그리고 난 그런 거래 따위에 동의한 적 없다.
“지 관심이 무슨. 하― 지가 진짜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또 뭐라 그랬지? 외박을 하려면 이유를 대라고?
이유만 있으면 아예 밖에서 산다 한들 말리지 않을 것 같다. 그 잘나신 일을 핑계로 한 달이 넘도록 나를 방치한 건 의무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다 이건가?
“부부관계 거부는 중대한 이혼 사유거든!”
그까짓 잠자리가 뭐 대수라고 이런 순간에마저……. 아무리 혼잣말이지만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괜히 얼굴이 벌게져서는 허둥지둥해 가며 싸던 짐을 마저 챙겼다.
그래, 너 혼자 그 잘난 의무를 철통같이 지켜 가며 잘 살아 봐라.
전화 한 통으로 오만 정 떨어지게 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니, 지금까지 능력자와 한집에서 살아왔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깔끔하게 떠나 주마.
당장은 내가 가진 돈으로 지내다가 적당한 기회를 봐서 이혼……. 이혼, 그게 가능할까?
사실 난 갈 데가 없다. 그보다 더욱 비참한 건, 말할 데가 없다는 거다. 고아냐고? 아니, 부모님도 계시고 언니에 오빠에 남동생까지 있다. 게다가 엄마는 둘이나 된다. 낳아 준 엄마와 길러 주신 어머니.
딩― 동―
뭐지. 입주민 안내 방송인가?
딩― 동―
밖에 누가 온 모양이다. 너무 오랜만의 벨소리라 입주민 방송과 헷갈렸다.
딩― 동―
인터폰 옆의 모니터에 호기심 가득한 눈빛의 낯선 얼굴이 보인다. 택배가 왔나?
나는 아무것도 시킨 적이 없으니 아마도 그 사람이 주문한 거겠지. 집에서 저거 받아 둘 사람이 없을까 봐 예의와 의무 운운해 가며 대체 어디냐고 다그쳤나?
“네?”
― 형수님~
형수님?
“누구세요?”
― 안녕하세요, 형수님. 저 문 좀.
“149동 1501호에 오신 거 맞아요?”
이어 남자의 뒤편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한차례 들려왔다. 그리고 언뜻 누군가의 모습이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모니터가 꺼져 버렸다.
“뭐야.”
안방에서 캐리어를 질질 끌고 나오는 동안 거실을 한 번 둘러봤다.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랭한 모습. 사람이 둘이나 살았음에도 온기를 느낄 수가 없다.
이런 곳에서 한 달이 훌쩍 넘도록 나도 참 고생이 많았다. 그러니 이제 그만두자.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인 친가 식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어뜯어도 할 수 없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엄마와 어머니다. 그분들께 더하게 될 상처와 죄의식이 무겁게 걸음을 붙든다.
그래, 이 길의 끝이 꼭 이혼이라는 법은 없다. 서로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생각하다 보면…… 그러다 보면…….
“아니. 나가면 끝이야.”
우습게도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는 몰라도, 이대로 여기서 나가면 더 이상의 협상 따위는 없으리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띠릭― 딕― 딕― 딕―
디지털 키를 누르는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여전히 거실 한복판에 서 있는 채다.
나조차도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게……. 음? 디지털 키 누르는 소리? 이 시간에 집에 올 사람이 있던가?
흠칫 놀라 한 걸음 물러서자 전실로 연결되는 문에 설치했던 방풍필름이 슥 밀려나는 소리가 들렸다. 급한 대로 캐리어 손잡이를 힘껏 움켜쥐었다. 휘두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여차하면 이거라도 휘둘러야지 싶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손님은 바로 신랑이었다.
“있었네.”
이 시간에 퇴근한 건 아닐 테고, 뭐지?
“그거 뭐야?”
그가 뭔가를 내려놓고는 내 쪽의 캐리어를 가리키며 묻는다.
“너 혹시?”
처음이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그의 미소를 봤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내가 마음을 뺏겼던 그 미소가 아니다. 빈정거림이 묻어나는 불쾌한 미소다.
고작 생각해 낸 게 이거냐는 듯 불쾌한 그의 미소 뒤로, 방금 전 모니터에서 봤던 사람이 겸연쩍게 웃으며 뭔가를 들고 나타났다.
“형수님 안녕하세요!”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신랑이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캐리어를 휙 낚아채서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있었네?’ 하고 물은 걸로 봐서는 내가 없을 줄 알았나 보다.
캐리어를 보자마자 내가 집을 나가려는 걸 짐작은 했지만 그에게는 고작 비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나 보다.
“저― 이거. 여기다 내려놔도 되죠? 좀 무겁네요. 흐으―”
“아…… 그, 그러세요. 거기다 두시면 돼요.”
“그때 식장에서 뵙고, 오늘 처음이네요. 집들이, 집들이 노래를 불러도 선배가 통 들은 척을 하셔야 말이죠. 매일 작업작업작업. 정신없이 바빠서 인사가 한참 늦었네요. 하하―”
정말 일이 바쁘긴 했나 보다.
“좀 앉으세요.”
“근데 선배님은 금방 어디 가신 거예요?”
“아…… 저 잠깐 바…… 안방에.”
“아, 네.”
무지 어색하다.
“잠깐 앉아 계세요.”
엉거주춤 거실 소파를 가리킨 후 침실로 와 보니, 신랑이 캐리어를 침대에 올려 둔 채 나를 정면으로 보고 있다.
“저 사람이 너 찾아.”
신랑의 눈빛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화난 것도 같고, 또 어찌 보면 당황해하는 것도 같고.
어쨌든 확실한 건, 그 역시 나처럼 갈피를 못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금 전 거실에서 봤던 냉소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보자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다.
“컴퓨터야.”
느닷없이 툭 던진 말을 알아들을 새도 없이 그가 먼저 침실을 나섰다. 컴퓨터가 뭐 어쨌다는 거지? 설마 서재에 있는 한 대로는 부족해서 컴퓨터를 또 사 왔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직접 확인하려고 거실로 나가려다가 우뚝 멈춰 섰다. 둘이 뭔가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죄다 영어라 순간 당황했다.
멀쩡히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두 사람이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다.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언뜻 듣기에도 대수롭지 않은 대화를 굳이 영어로 하는 이유가 뭐지? 후배라는 저 사람도 미국에서 20년 넘게 살다 왔나?
잠시 후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싶은 순간, 날카롭고 요란한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뭔가 깨진 것 같은데 거실에는 깨뜨릴 만한 물건이 없다. 깜짝 놀란 목소리로 괜찮으냐고 물은 쪽이 후배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나는 이미 거실로 나와 있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를 따라 곧장 주방으로 들어서자 싱크대 위에 박살 난 유리 파편이 보인다. 컵 하나 정도가 아니라 수납장에 차곡차곡 쌓아 뒀던 접시까지 전부 깨진 것 같다.
“괜찮아?”
나는 분명 신랑에게 물었는데, 후배라는 사람이 얼른 돌아보며 가까이 오지 말라는 듯 손짓을 하고 있다. 신랑은 천천히 돌아서서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한 게 다였다.
“오지 마세요, 형수님. 여기 파편 많아요.”
“이리 나오세요. 제가 치울게요.”
“아뇨, 아뇨. 그냥 계세요. 위험해요.”
그럼 어쩌자고. 너희들은 계속 거기 있고 나는 계속 여기 있으라고? 청소기를 가져올 테니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려는데 신랑이 재킷을 벗었다.
곧이어 바닥에 넓게 펼친 재킷 위로 큰 걸음을 뗀 그가 내 옆을 지나 주방을 나서기까지 나는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어쩜 인간이 말 한마디 없이 저럴 수가 있지?
“재킷 어떡해요? 다 망가졌겠다.”
후배라는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멍청하게 서 있을 뻔했다.
스승님의 그림자도 아닌 저 재킷을 밟고 나온들 뭐랄 사람은 없어 보이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눈치다.
“기다리세요. 청소기 가지고 올…….”
말을 마치기도 전에 웅― 하는 기계음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대단하신 낭군님께서 청소기를 가지고 나와 바닥을 훑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비켜. 다쳐.”
딱 두 마디를 끝으로 신랑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소를 마친 신랑은 후배를 구출한 후 거실에 앉아 가져온 박스를 뜯기 시작했다.
다시 여러 개의 작은 박스들이 나오고, 후배는 몇 번이고 제가 하겠다며 나섰지만 신랑은 매번 됐으니까 가 보라며 결국 그를 돌려보냈다.
빈손으로 와서 죄송하다며 겸연쩍게 인사를 마친 그의 후배를 배웅한 후 나는 곧장 안방으로 들어왔다.
이제 볼 사람도 없으니 트렁크를 끌고 나가면 그만인데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입술만 깨물고 있다. 그가 거실을 지키고 앉아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치니까 비키라던 그의 말이 자꾸만 생각나서다.
“그릇. 미안.”
아― 깜짝이야.
“커피 필터 찾다가 실수했어.”
커피 필터는 아래쪽 서랍에 있다. 그걸 떠나서, 커피 정도는 내가 챙겼어야 되나? 신랑이 얘기했던 ‘의무’에 손님에게 커피 대접도 들어가는지 어쩐지 모르겠다.
“아끼던 거야?”
“어?”
“아까 깨뜨린 거. 아끼던 거냐고.”
엄마와 함께 고른 살림이기는 했지만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딱히 아끼고 싶어서가 아니라 쓸 일이 없었다. 엄마가 마련해 준 것들이라 미련이 남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신경 쓸 거 없어.”
무뚝뚝한 신랑의 말투와 다를 바 없는 대답을 해 놓고, 괜찮다고 말할 걸 그랬나 후회했다.
“잠깐 나올래?”
당장 나가겠다며 짐을 싸 놓고도 그가 하라는 대로 졸졸 따라 나오다니 정말 한심하다. 곧장 들어가서 트렁크를 가지고 나올까 생각하던 중, 거실 한쪽에 깔끔하게 세팅된 컴퓨터가 눈에 들어왔다.
“취향을 몰라서 무난한 디자인으로 맞췄어.”
내 취향을 말하는 건가?
“너 쓰려고 산 거 아니야?”
“아니. 너 쓰라고 샀어.”
얼마 전 출근한 그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다. 급히 확인할 게 있어서 컴퓨터를 써야 하는데, 어이없게도 집 안에 딱 한 대뿐인 서재의 컴퓨터에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전화로 비밀번호를 물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내 컴퓨터에 손대는 거 싫은데, 근처에 PC방 없어?’ 하고 그가 되물었다.
그러니까 이건 결국, 서로의 영역을 정확히 하자는 유형무언의 거래인 셈이다.
“나 이런 거 필요 없어.”
“그냥. 너도 하나 있으면 덜 심심할 거 아냐.”
내가 심심해 보이나? 심심해서 매일 서재에 기웃거리고, 심심해서 얘기 좀 하자며 보채고, 심심해서 집을 나갔다고 생각하는 건가?
“계속 바빠서 미안해. 하필 이런 때 새 일을 맡아서.”
“계속 바쁜데 미안해. 하필 이런 때 결혼하자고 해서.”
말장난에 기분이 상했는지 신랑은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나는 이쯤에서 가장 최악의 가능성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어쩌면 내가 진정으로 저 사람을 사랑하여, 이 모든 냉대에도 불구하고 계속 저 사람 곁을 맴돌지도 모른다는 것. 자식들을 다 뺏기고도 아버지를 떠나지 못한 나의 친엄마처럼 말이다.
* * *
눈뜨기가 싫다.
신랑의 빈자리를 확인하고 한숨 쉬게 될 것이 싫고, 그가 없음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재를 들여다보게 될 것도 싫다.
하지만 무엇보다 싫은 건, 그래도 살아 보겠다고 꾸역꾸역 챙겨 먹을 아침밥이다.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원래 아침은 안 먹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나름 안심했다. 요리 솜씨가 좋은 편도 아닐뿐더러 새벽까지 글을 쓰고 아침에 자는 게 습관인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물론 결혼 전에 이미 절필한 상태였지만 습관이 되어 버린 아침잠을 천천히 고쳐도 되겠구나 싶어 마음이 놓였던 거다.
그런데 우습게도,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부터 아침잠이 거짓말처럼 달아났다. 더 이상 글을 쓰거나 선희의 작업을 도와주느라 밤을 새우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혼 전과는 달리, 숙면 후의 상쾌한 기상이 아니라 신경을 갉아먹는 불면에 시달려 더 이상 누워 있을 수 없기에 떠지는 눈이었다.
“후우…….”
대체 언제까지 이런 상태를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긴, 지금도 견디고 있으니 어쩌면 죽을 때까지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태라면 속 터져 죽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다리를 내리고 앉자 미간이 뻐근하게 저려 온다. 불면이 시작된 게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신혼여행 첫날부터였던 것 같다.
신랑이건 그 전에 만났던 사람이건 누구와 함께이건, 혼전에 관계를 가진 일이 없어서 유난히 긴장되는 밤이었다. 침대에 깔아 둔 상아색 바디타월 위에 누워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썼던 것이 새삼스레 우습기까지 하다.
“하…… 하하…….”
생각해 보니 이 지긋지긋한 침묵의 시작은 그날부터인 것 같아 헛헛한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신혼여행 첫날 숙소에 들어간 시간이 오후 7시였다. 저녁을 먹으면 배가 부를 것 같고, 배가 부르면 안 될 것 같았다.
매끈한 몸매를 과시할 작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그 사람 앞에 벗은 몸을 보이게 될 텐데 이것저것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저녁은 가볍게 먹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말에, 신랑은 원하는 대로 하자며 수긍했다.
대강 짐을 정리하고 샤워를 마친 후 저녁을 먹기 위해 침실을 나서는 길, 나는 머뭇머뭇 신랑과 팔짱을 끼려고 타이밍을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문을 열어 길을 내준 뒤 나를 따라 나온 그는 so cool하게도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 손으로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내가 잠시 멈칫하며 당황해하자 이 눈치 없는 인간은 두고 나온 거라도 있냐는 듯 나를 빤히 바라봤고, 바로 다음 순간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는지 잘 도착했다며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미 부모님들과는 통화를 끝낸 다음이었기에 누굴까 궁금하긴 했지만 누구냐고 물을 시간조차 없었다. 성큼성큼 앞서 걷기 시작한 그를 따라 걸음을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왜 여기 있는 건데?”
나는 왜 나가지도 못할까.
“왜.”
너는 왜 나와 결혼했을까.
“왜―!!!”
도대체 왜.
하긴 이건 적선도 아니다. 거지한테 주는 동냥은 대가를 바란 게 아니니까, 관심의 반대급부로 의무를 다하라는 건 적선이 아니라 거래다. 그리고 난 그런 거래 따위에 동의한 적 없다.
“지 관심이 무슨. 하― 지가 진짜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또 뭐라 그랬지? 외박을 하려면 이유를 대라고?
이유만 있으면 아예 밖에서 산다 한들 말리지 않을 것 같다. 그 잘나신 일을 핑계로 한 달이 넘도록 나를 방치한 건 의무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다 이건가?
“부부관계 거부는 중대한 이혼 사유거든!”
그까짓 잠자리가 뭐 대수라고 이런 순간에마저……. 아무리 혼잣말이지만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괜히 얼굴이 벌게져서는 허둥지둥해 가며 싸던 짐을 마저 챙겼다.
그래, 너 혼자 그 잘난 의무를 철통같이 지켜 가며 잘 살아 봐라.
전화 한 통으로 오만 정 떨어지게 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니, 지금까지 능력자와 한집에서 살아왔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깔끔하게 떠나 주마.
당장은 내가 가진 돈으로 지내다가 적당한 기회를 봐서 이혼……. 이혼, 그게 가능할까?
사실 난 갈 데가 없다. 그보다 더욱 비참한 건, 말할 데가 없다는 거다. 고아냐고? 아니, 부모님도 계시고 언니에 오빠에 남동생까지 있다. 게다가 엄마는 둘이나 된다. 낳아 준 엄마와 길러 주신 어머니.
딩― 동―
뭐지. 입주민 안내 방송인가?
딩― 동―
밖에 누가 온 모양이다. 너무 오랜만의 벨소리라 입주민 방송과 헷갈렸다.
딩― 동―
인터폰 옆의 모니터에 호기심 가득한 눈빛의 낯선 얼굴이 보인다. 택배가 왔나?
나는 아무것도 시킨 적이 없으니 아마도 그 사람이 주문한 거겠지. 집에서 저거 받아 둘 사람이 없을까 봐 예의와 의무 운운해 가며 대체 어디냐고 다그쳤나?
“네?”
― 형수님~
형수님?
“누구세요?”
― 안녕하세요, 형수님. 저 문 좀.
“149동 1501호에 오신 거 맞아요?”
이어 남자의 뒤편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한차례 들려왔다. 그리고 언뜻 누군가의 모습이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모니터가 꺼져 버렸다.
“뭐야.”
안방에서 캐리어를 질질 끌고 나오는 동안 거실을 한 번 둘러봤다.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랭한 모습. 사람이 둘이나 살았음에도 온기를 느낄 수가 없다.
이런 곳에서 한 달이 훌쩍 넘도록 나도 참 고생이 많았다. 그러니 이제 그만두자.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인 친가 식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어뜯어도 할 수 없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엄마와 어머니다. 그분들께 더하게 될 상처와 죄의식이 무겁게 걸음을 붙든다.
그래, 이 길의 끝이 꼭 이혼이라는 법은 없다. 서로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생각하다 보면…… 그러다 보면…….
“아니. 나가면 끝이야.”
우습게도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는 몰라도, 이대로 여기서 나가면 더 이상의 협상 따위는 없으리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띠릭― 딕― 딕― 딕―
디지털 키를 누르는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여전히 거실 한복판에 서 있는 채다.
나조차도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게……. 음? 디지털 키 누르는 소리? 이 시간에 집에 올 사람이 있던가?
흠칫 놀라 한 걸음 물러서자 전실로 연결되는 문에 설치했던 방풍필름이 슥 밀려나는 소리가 들렸다. 급한 대로 캐리어 손잡이를 힘껏 움켜쥐었다. 휘두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여차하면 이거라도 휘둘러야지 싶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손님은 바로 신랑이었다.
“있었네.”
이 시간에 퇴근한 건 아닐 테고, 뭐지?
“그거 뭐야?”
그가 뭔가를 내려놓고는 내 쪽의 캐리어를 가리키며 묻는다.
“너 혹시?”
처음이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그의 미소를 봤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내가 마음을 뺏겼던 그 미소가 아니다. 빈정거림이 묻어나는 불쾌한 미소다.
고작 생각해 낸 게 이거냐는 듯 불쾌한 그의 미소 뒤로, 방금 전 모니터에서 봤던 사람이 겸연쩍게 웃으며 뭔가를 들고 나타났다.
“형수님 안녕하세요!”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신랑이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캐리어를 휙 낚아채서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있었네?’ 하고 물은 걸로 봐서는 내가 없을 줄 알았나 보다.
캐리어를 보자마자 내가 집을 나가려는 걸 짐작은 했지만 그에게는 고작 비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나 보다.
“저― 이거. 여기다 내려놔도 되죠? 좀 무겁네요. 흐으―”
“아…… 그, 그러세요. 거기다 두시면 돼요.”
“그때 식장에서 뵙고, 오늘 처음이네요. 집들이, 집들이 노래를 불러도 선배가 통 들은 척을 하셔야 말이죠. 매일 작업작업작업. 정신없이 바빠서 인사가 한참 늦었네요. 하하―”
정말 일이 바쁘긴 했나 보다.
“좀 앉으세요.”
“근데 선배님은 금방 어디 가신 거예요?”
“아…… 저 잠깐 바…… 안방에.”
“아, 네.”
무지 어색하다.
“잠깐 앉아 계세요.”
엉거주춤 거실 소파를 가리킨 후 침실로 와 보니, 신랑이 캐리어를 침대에 올려 둔 채 나를 정면으로 보고 있다.
“저 사람이 너 찾아.”
신랑의 눈빛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화난 것도 같고, 또 어찌 보면 당황해하는 것도 같고.
어쨌든 확실한 건, 그 역시 나처럼 갈피를 못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금 전 거실에서 봤던 냉소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보자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다.
“컴퓨터야.”
느닷없이 툭 던진 말을 알아들을 새도 없이 그가 먼저 침실을 나섰다. 컴퓨터가 뭐 어쨌다는 거지? 설마 서재에 있는 한 대로는 부족해서 컴퓨터를 또 사 왔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직접 확인하려고 거실로 나가려다가 우뚝 멈춰 섰다. 둘이 뭔가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죄다 영어라 순간 당황했다.
멀쩡히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두 사람이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다.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언뜻 듣기에도 대수롭지 않은 대화를 굳이 영어로 하는 이유가 뭐지? 후배라는 저 사람도 미국에서 20년 넘게 살다 왔나?
잠시 후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싶은 순간, 날카롭고 요란한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뭔가 깨진 것 같은데 거실에는 깨뜨릴 만한 물건이 없다. 깜짝 놀란 목소리로 괜찮으냐고 물은 쪽이 후배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나는 이미 거실로 나와 있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를 따라 곧장 주방으로 들어서자 싱크대 위에 박살 난 유리 파편이 보인다. 컵 하나 정도가 아니라 수납장에 차곡차곡 쌓아 뒀던 접시까지 전부 깨진 것 같다.
“괜찮아?”
나는 분명 신랑에게 물었는데, 후배라는 사람이 얼른 돌아보며 가까이 오지 말라는 듯 손짓을 하고 있다. 신랑은 천천히 돌아서서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한 게 다였다.
“오지 마세요, 형수님. 여기 파편 많아요.”
“이리 나오세요. 제가 치울게요.”
“아뇨, 아뇨. 그냥 계세요. 위험해요.”
그럼 어쩌자고. 너희들은 계속 거기 있고 나는 계속 여기 있으라고? 청소기를 가져올 테니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려는데 신랑이 재킷을 벗었다.
곧이어 바닥에 넓게 펼친 재킷 위로 큰 걸음을 뗀 그가 내 옆을 지나 주방을 나서기까지 나는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어쩜 인간이 말 한마디 없이 저럴 수가 있지?
“재킷 어떡해요? 다 망가졌겠다.”
후배라는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멍청하게 서 있을 뻔했다.
스승님의 그림자도 아닌 저 재킷을 밟고 나온들 뭐랄 사람은 없어 보이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눈치다.
“기다리세요. 청소기 가지고 올…….”
말을 마치기도 전에 웅― 하는 기계음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대단하신 낭군님께서 청소기를 가지고 나와 바닥을 훑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비켜. 다쳐.”
딱 두 마디를 끝으로 신랑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소를 마친 신랑은 후배를 구출한 후 거실에 앉아 가져온 박스를 뜯기 시작했다.
다시 여러 개의 작은 박스들이 나오고, 후배는 몇 번이고 제가 하겠다며 나섰지만 신랑은 매번 됐으니까 가 보라며 결국 그를 돌려보냈다.
빈손으로 와서 죄송하다며 겸연쩍게 인사를 마친 그의 후배를 배웅한 후 나는 곧장 안방으로 들어왔다.
이제 볼 사람도 없으니 트렁크를 끌고 나가면 그만인데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입술만 깨물고 있다. 그가 거실을 지키고 앉아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치니까 비키라던 그의 말이 자꾸만 생각나서다.
“그릇. 미안.”
아― 깜짝이야.
“커피 필터 찾다가 실수했어.”
커피 필터는 아래쪽 서랍에 있다. 그걸 떠나서, 커피 정도는 내가 챙겼어야 되나? 신랑이 얘기했던 ‘의무’에 손님에게 커피 대접도 들어가는지 어쩐지 모르겠다.
“아끼던 거야?”
“어?”
“아까 깨뜨린 거. 아끼던 거냐고.”
엄마와 함께 고른 살림이기는 했지만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딱히 아끼고 싶어서가 아니라 쓸 일이 없었다. 엄마가 마련해 준 것들이라 미련이 남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신경 쓸 거 없어.”
무뚝뚝한 신랑의 말투와 다를 바 없는 대답을 해 놓고, 괜찮다고 말할 걸 그랬나 후회했다.
“잠깐 나올래?”
당장 나가겠다며 짐을 싸 놓고도 그가 하라는 대로 졸졸 따라 나오다니 정말 한심하다. 곧장 들어가서 트렁크를 가지고 나올까 생각하던 중, 거실 한쪽에 깔끔하게 세팅된 컴퓨터가 눈에 들어왔다.
“취향을 몰라서 무난한 디자인으로 맞췄어.”
내 취향을 말하는 건가?
“너 쓰려고 산 거 아니야?”
“아니. 너 쓰라고 샀어.”
얼마 전 출근한 그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다. 급히 확인할 게 있어서 컴퓨터를 써야 하는데, 어이없게도 집 안에 딱 한 대뿐인 서재의 컴퓨터에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전화로 비밀번호를 물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내 컴퓨터에 손대는 거 싫은데, 근처에 PC방 없어?’ 하고 그가 되물었다.
그러니까 이건 결국, 서로의 영역을 정확히 하자는 유형무언의 거래인 셈이다.
“나 이런 거 필요 없어.”
“그냥. 너도 하나 있으면 덜 심심할 거 아냐.”
내가 심심해 보이나? 심심해서 매일 서재에 기웃거리고, 심심해서 얘기 좀 하자며 보채고, 심심해서 집을 나갔다고 생각하는 건가?
“계속 바빠서 미안해. 하필 이런 때 새 일을 맡아서.”
“계속 바쁜데 미안해. 하필 이런 때 결혼하자고 해서.”
말장난에 기분이 상했는지 신랑은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나는 이쯤에서 가장 최악의 가능성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어쩌면 내가 진정으로 저 사람을 사랑하여, 이 모든 냉대에도 불구하고 계속 저 사람 곁을 맴돌지도 모른다는 것. 자식들을 다 뺏기고도 아버지를 떠나지 못한 나의 친엄마처럼 말이다.
눈뜨기가 싫다.
신랑의 빈자리를 확인하고 한숨 쉬게 될 것이 싫고, 그가 없음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재를 들여다보게 될 것도 싫다.
하지만 무엇보다 싫은 건, 그래도 살아 보겠다고 꾸역꾸역 챙겨 먹을 아침밥이다.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원래 아침은 안 먹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나름 안심했다. 요리 솜씨가 좋은 편도 아닐뿐더러 새벽까지 글을 쓰고 아침에 자는 게 습관인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물론 결혼 전에 이미 절필한 상태였지만 습관이 되어 버린 아침잠을 천천히 고쳐도 되겠구나 싶어 마음이 놓였던 거다.
그런데 우습게도,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부터 아침잠이 거짓말처럼 달아났다. 더 이상 글을 쓰거나 선희의 작업을 도와주느라 밤을 새우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혼 전과는 달리, 숙면 후의 상쾌한 기상이 아니라 신경을 갉아먹는 불면에 시달려 더 이상 누워 있을 수 없기에 떠지는 눈이었다.
“후우…….”
대체 언제까지 이런 상태를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긴, 지금도 견디고 있으니 어쩌면 죽을 때까지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태라면 속 터져 죽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다리를 내리고 앉자 미간이 뻐근하게 저려 온다. 불면이 시작된 게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신혼여행 첫날부터였던 것 같다.
신랑이건 그 전에 만났던 사람이건 누구와 함께이건, 혼전에 관계를 가진 일이 없어서 유난히 긴장되는 밤이었다. 침대에 깔아 둔 상아색 바디타월 위에 누워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썼던 것이 새삼스레 우습기까지 하다.
“하…… 하하…….”
생각해 보니 이 지긋지긋한 침묵의 시작은 그날부터인 것 같아 헛헛한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신혼여행 첫날 숙소에 들어간 시간이 오후 7시였다. 저녁을 먹으면 배가 부를 것 같고, 배가 부르면 안 될 것 같았다.
매끈한 몸매를 과시할 작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그 사람 앞에 벗은 몸을 보이게 될 텐데 이것저것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저녁은 가볍게 먹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말에, 신랑은 원하는 대로 하자며 수긍했다.
대강 짐을 정리하고 샤워를 마친 후 저녁을 먹기 위해 침실을 나서는 길, 나는 머뭇머뭇 신랑과 팔짱을 끼려고 타이밍을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문을 열어 길을 내준 뒤 나를 따라 나온 그는 so cool하게도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 손으로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내가 잠시 멈칫하며 당황해하자 이 눈치 없는 인간은 두고 나온 거라도 있냐는 듯 나를 빤히 바라봤고, 바로 다음 순간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는지 잘 도착했다며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미 부모님들과는 통화를 끝낸 다음이었기에 누굴까 궁금하긴 했지만 누구냐고 물을 시간조차 없었다. 성큼성큼 앞서 걷기 시작한 그를 따라 걸음을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왜 여기 있는 건데?”
나는 왜 나가지도 못할까.
“왜.”
너는 왜 나와 결혼했을까.
“왜―!!!”
도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