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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오늘도 그 사람은 늦을 거란다.
물론 내가 전화를 했고 그는 ‘먼저 자’라는 한마디뿐이었다.
늦으면 문자라도 남기라던 내 말을 귓등으로라도 들어 준다면 참 고마울 텐데. 앞으로는 나도 쿨하게 전화 따위 하지 말아야겠다.
멍하니 거실에 앉아 인터넷을 뒤적인 지 벌써 오래. 세 시간 정도 소득 없는 짓을 하다가, 문득 다시 글을 써 볼까 생각하고 한글을 켰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나 자신을 비웃는 소리만 가득하다.
‘넌 신랑을 사랑했어? 글이 마음대로 안 되고, 선희가 너보다 먼저 주목받는 걸 보면서 불안했던 거 아니야? 넌 도망쳤어. 그 사람을 사랑한 게 아니라…… 이용한 거야. 그러면서 사랑받기를 원해? 아니겠지. 그 썩어 빠진 자존심을 들킬까 봐 불안한 거겠지.’
나 지금, 환청을 들은 건가?
와우! 잘하면 만물과 의사소통하는 신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생겼다. 잘난 우리 신랑께서 날 억지로 묵언수행에 들게 하사 열반으로 인도하시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하아…….”
습관처럼 고스톱게임을 켰다. 다른 생산적인 활동을 할 생각은 없느냐 묻는다면, 컴퓨터로 생산적인 일을 하는 건 신랑 하나로 충분하다고 답하련다.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묻는다면, 이런 상황은 말이 되는 거냐고 되묻고 싶다.
딩동―
매일을 하루같이 거실 한구석에 앉아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을 즈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벨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가 실험실의 동물이 된 것 같아 불쾌하다. 벨을 울리면 쪼르르 달려가 문을 열어 주는 실험쥐.
딩동―
날밤을 새우고도 일을 다 못 끝냈는지 떴던 해가 지고 달이 뜨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들어온 낭군님.
소중한 내 님 피곤하실 테니 얼른 버선발로 달려 나가 문을 열어 드려야 하는데, 어떡하지? 버선을 안 신고 있어서 나갈 수가 없네.
딩동―
참 나, 지는 뭐 열쇠가 없나. 그러고 보니 항상 똑같은 패턴이다.
어차피 문을 열면 ‘안 잤어?’ 하고는 서재로 들어갈 거면서, 대체 벨은 왜 누르는 걸까? 내가 문지기도 아닌데 말이다.
딩동―
이 시간까지 잠 안 자고 널 기다릴 거라고 생각했다면 착각이지.
내가 잠을 안 잔 건 고스톱 때문이지 너 때문이 아니거든?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컴퓨터를 강제 종료 하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방문 쪽으로 등을 향한 채 침대에 모로 누워서 귀를 기울이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전실문이 열렸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닫혀 버렸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생각하느라 미간이 묵직하게 저려 오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뭘 잘했다고 울어?!’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은 말이다. 울컥하는 순간이면 매번 듣게 되는 환청이니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거슬린다.
저 사람이야 어차피 서재로 들어갈 텐데 컴퓨터 앞에 앉아 고스톱이나 마저 치고 있을 걸 그랬나 싶은 순간, 살짝 열린 문틈으로 거실의 조명이 비집고 들어온다.
“나 왔어.”
조금, 아니 많이 놀랐다. 혹시 나한테 한 말인가?
신랑한테 자폐증상이 있거나 사물과 대화하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면, 저 말을 들을 사람은 나뿐이다. 그럼 이제 어떡하지? 자고 있던 척하며 일어나서 졸린 목소리로 인사라도 해야 하나?
“먼저 자.”
밥은 먹었느냐고 묻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먼저 자라는 신랑의 말에 기운이 쑥 빠져 버렸다.
마치 나를 못 재워서 안달이라도 난 사람처럼 신랑이 하는 말의 대부분은 ‘잘 자’ 혹은 ‘먼저 자’다. 방문이 닫히자, 희미하게 비집고 들어오던 거실의 빛줄기마저 사라져 버린다.
혀뿌리가 눌려 가슴이 뻐근하게 저려 온다.
내가 견디기 힘든 건 바로 이 답답함이다. 결혼 후 항상 이런 답답함을 느낀다.
단순히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기 때문이 아니라, 뭔가에 붙들려 있는 것 같은 답답함.
갈비뼈 부근이 뻐근하다 못해 어깨 근육마저 굳어 버리는 그런…… 감당하지 못할 답답함.
베갯잇을 움켜쥔 채 이를 악물었다. 그가 먼저 건넨 짧은 한마디에 가슴 설렌 내 자신이 서럽고,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일을 해야 하는 저 사람이 서럽다.
* * *
우리 엄마는 일본인이다.
아버지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셔서 엄마를 만나셨다. 그리고 엄마와의 결혼을 허락받으러 들어오셨던 아버지는 한국의 어머니와 혼인을 하셨다.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였던 우리 아버지께서 완고하신 할아버지의 고집을 꺾지 못하신 거다.
엄마는 혼자 오빠를 낳아 기르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한국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언니를 얻으셨다. 그러는 동안 친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한국 어머니께서는 자연유산으로 세 번이나 아이를 놓치셨다.
손자를 바라셨던 할아버지께서는 결국 아버지를 설득하셨다. 일본인은 안 되지만, 오빠에게 섞인 피의 반은 한국인의 것이니까 받아들이셨던 걸까?
아버지는 오빠를 데리러 오셨고, 그때까지도 두 분이 사랑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버지께서 일본으로 돌아온 그 잠깐 동안 생긴 것이 바로 나다.
엄마는 아버지께서 엄마와 오빠를 모두 데리고 가실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언젠가 내가, 왜 나까지 태어나게 만들었냐고 물었을 때 하신 말씀이다.
내가 생겼다는 걸 알고 엄마는 많이 힘들었을 거다.
어릴 적에 부모님을 잃어 이모와 외롭게 자란 엄마는 악착같이 오빠를 키웠지만 나까지 들어서자 덜컥 겁이 나고 외로워졌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오빠에게 얹혀서 한국으로 들어왔다. 엄마도 함께 들어왔지만 우리와 함께 살지는 않으셨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나에게는 어머니가 둘이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모든 사람에게 어머니가 둘인 줄 알았다.
내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한국 어머니께서 남동생을 낳으셨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남동생의 존재가 달갑지 않았다.
어머니의 산후조리 때문에 오빠와 내가 엄마에게 보내졌을 때, 오빠와 나를 부둥켜안고 세상이 끝난 사람처럼 울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남동생이 태어나자, 할아버지는 우리를 미워하지는 않으셨지만 꺼려 하셨다.
그런데도 나는 눈치 없이 할아버지에게 애교를 떨었으니 그분의 마음이 오죽하셨을까. 설상가상으로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남동생을 미워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어른들의 눈에는 내가 눈치 빠르고 영악한 계집애로밖에 안 보였을 거다. 효자로 소문난 아버지를 꾀어낸 제 어미를 꼭 닮은 여우 같은 딸년.
모든 것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정확히 기억할 수 있는 시점부터 어른들의 눈치를 보고 살았다. 고모들이 방문할 때마다 나는 동생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야 했다.
언젠가 집안의 큰 제사 때문에 식구들이 모였을 때, 내 나름대로는 귀여움을 받고 싶어서 쓸데없이 집 안 여기저기를 서성거렸다.
어머니께서 분유병을 들고 오셨다가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시는 걸 보고, 미운 동생이지만 배고파서 울게 놔두면 안 되겠다 싶어 젖병을 물려 주었다.
나도 어리고 동생도 어렸으니 당연히 편안한 자세가 나오기 힘들었고, 고민 끝에 아기를 다시 누인 후 분유병을 거꾸로 집어 든 순간, 어찌 된 일인지 우유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먹기 좋을 정도로 식혀 두기는 했지만, 목을 가누는 것도 힘든 아기의 얼굴로 분유가 쏟아졌으니 그 후의 일은 알 만하지 않겠는가.
귀를 찌르는 울음소리와 함께 호들갑스러운 고모들께서는 모두 하나같이 뭐 하는 짓이냐며 나를 밀쳐 냈다.
마치 내가 아기에게 칼이라도 들이대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난처한 표정으로 동생을 안고 저만치 물러앉으시던 어머니의 표정.
나는 아직도 그 기억을 떠올리면 어떻게든 사랑받으려 발을 동동 구르던 어렸을 적의 초조함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학교에 입학했고, 난 열심히 공부했다.
공부마저 못하면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하기는 했지만,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직업을 가질 수는 없었다.
내 목표는, 열심히 공부해서 사랑받는 것이었다.
인정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받고 싶었다. 그러니 장차 의사나 판검사가 된다는 미래지향적인 건설은 할 수 없었고, 성적이 잘 나와 부모님의 입에서 ‘똑똑한 우리 딸’이라는 말씀만 나와도 그저 좋았다.
문과를 선택해 법학을 전공하게 됐다. 이과는 의대, 문과는 법대. 당시의 나한테는 당연한 공식이었다. 대학에서도 성적은 좋았지만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단순히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내 삶에는, 내가 없었다.
방황했다.
내가 보낸 시간, 내가 보낸 15년의 시간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남들이 꿈을 키우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을 때, 나는 고작 부모님의 칭찬이나 받고자 아득바득 공부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 나는 사랑받고 싶었다.
워낙 어릴 적부터 눈치만 보고 자라서 그저 따뜻한 관심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내가 이루었던 모든 것에 정이 떨어지고 말았다.
마음이 떠나자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정말 더 이상은 아무리 전공서적을 읽고 쓰고 외워도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없었다. 내 삶의 목표가, 나를 보기 좋게 배신한 것이다.
처음에는 한국 어머니를 원망했다. 그다음에는 아버지를 원망했고, 그다음에는 우리 엄마를 원망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나 자신을 원망했다. 결국 준비하던 사법시험을 그만뒀다.
아버지께서는 크게 반대를 하셨다. 조금만 참고 견디면 할 수 있다는 말로 설득도 하셨고, 공부를 그만두려거든 다시는 아버지를 볼 생각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기도 하셨다.
하지만 나는 일분일초도 공부를 더 할 수가 없었다. 단지 시험 준비가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나 자신을 옭아맨 틀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무작정 책을 읽었다.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공부하는 동안 가장 하고 싶었던 일들을 찾아서 그 일에만 매달렸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고 눈물을 흘렸고, 친오빠는 나에게 어리석다고 했다. 한국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걸었던 기대를 버리셨다. 그리고 나는 그분들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머리가 아프다. 생각을 많이 하면 언제나 머리가 아프다. 무엇 때문에 저런 우울한 과거를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아닌가. 정신을 차려 보니 볼이 따가울 정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실없이 피식 웃으며 눈물을 닦고, 크게 한숨을 쉬어 본다.
‘그래, 지나간 일이지.’
앞으로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 나 자신을 버리는 일은 하지 말자. 누군가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어리석은 짓은…… 이제 그만둬야겠다.
* * *
악몽을 꿨는지 갑자기 몸이 휘청거렸다.
높은 곳에서 떨어졌거나 넘어진 모양이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그가 옆에 누워 있다.
이렇게 유별난 뒤척임에도 불구하고 눈꺼풀이 닫혀 있는 걸 보면 내 심장이 갑자기 멎어 버린다 해도 까맣게 모른 채 출근할 인간이다.
반듯한 눈썹 사이로, 오뚝한 콧날이 돋보인다. 안경을 벗은 그의 모습은 나체만큼이나 매력적이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는 숨소리가 새벽 공기를 어지럽힌다.
솔직히 말하면…… 어지러운 게 새벽 공기인지 내 정신인지 모르겠다.
살금살금 일어나 거실로 나와 발코니의 이중 유리에 한쪽 어깨를 기대자 한기가 온몸을 휩쓸었다. 추위에 몸서리치면서도 새벽 한가운데의 야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이렇게 창밖을 바라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늘하늘한 프릴치마와 허리선 바로 위에서 밑단을 묶은 새하얀 티셔츠 차림으로 창밖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다가온 그가 내 허리를 조용히 안아 주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물론 신혼 초에 말이다. 이 아파트에 처음 들어왔을 땐, 이곳저곳에 그런 즐겁고 발칙한 상상들이 묻어 있었는데, 이제는 거미줄뿐이다.
끔찍하게 생긴 거미한테 모든 상상을 잡아먹힌 기분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거미는, 나까지 잡아먹을 듯 잠든 나를 흔들어 깨운다.
악몽을 털어 내듯 고개를 휘저으며 어둠을 더듬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우선은 일자리부터 알아보자는 생각에서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잡념이 많아질 테고, 나도 그 사람처럼 일에 치어 바쁘게 지내다 보면 조금은…… 아주 조금은 그를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이해…….”
나도 참 바보다. 이런 순간에마저 신랑을 이해하고 싶어 하다니.
“안 자?”
갑작스러운 신랑의 말에 너무 놀라 성대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뭐지? 왜 나왔지? 나 때문에 잠이 깼나?
모니터를 조명 삼아 나에게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 소리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마우스를 따각따각 누르고는 있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하얗다.
“뭐 해?”
길고 곧은 그의 손가락이 나의 어깨 위로 살짝 무게를 더했다.
맨살을 꼬집어 꿈인지 생신지를 알아볼 수는 없으니 급한 대로 혀를 깨물어 봤다. 무지 아프다. 엄청난 고통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을 정도로.
“아, 미안.”
신랑이 이내 손을 거뒀다. 어깨를 움츠린 이유가 그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오해한 것 같다.
“아니, 난 그냥…….”
그냥 뭐? 그냥 너의 터치를 믿을 수가 없어서 혀를 깨물어 봤을 뿐이야.
그러니 오해 말고 다시 한 번 내 어깨에 손을 올려 주지 않으련? 하고 말하기에는 지금 상황이 너무 어색하고 갑작스럽다.
“좀 봐 줄까?”
“어?”
정신 차리자. 그냥 뒤에 서 있을 뿐이잖아. 근데 뭘 봐 주겠다는 거지? 목적어 좀 생략하지 말아 줄래?
“조금만 옆으로 앉아 봐.”
맙소사. 그제야 신랑이 뭘 얘기하고 있는지 알았다.
오늘도 그 사람은 늦을 거란다.
물론 내가 전화를 했고 그는 ‘먼저 자’라는 한마디뿐이었다.
늦으면 문자라도 남기라던 내 말을 귓등으로라도 들어 준다면 참 고마울 텐데. 앞으로는 나도 쿨하게 전화 따위 하지 말아야겠다.
멍하니 거실에 앉아 인터넷을 뒤적인 지 벌써 오래. 세 시간 정도 소득 없는 짓을 하다가, 문득 다시 글을 써 볼까 생각하고 한글을 켰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나 자신을 비웃는 소리만 가득하다.
‘넌 신랑을 사랑했어? 글이 마음대로 안 되고, 선희가 너보다 먼저 주목받는 걸 보면서 불안했던 거 아니야? 넌 도망쳤어. 그 사람을 사랑한 게 아니라…… 이용한 거야. 그러면서 사랑받기를 원해? 아니겠지. 그 썩어 빠진 자존심을 들킬까 봐 불안한 거겠지.’
나 지금, 환청을 들은 건가?
와우! 잘하면 만물과 의사소통하는 신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생겼다. 잘난 우리 신랑께서 날 억지로 묵언수행에 들게 하사 열반으로 인도하시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하아…….”
습관처럼 고스톱게임을 켰다. 다른 생산적인 활동을 할 생각은 없느냐 묻는다면, 컴퓨터로 생산적인 일을 하는 건 신랑 하나로 충분하다고 답하련다.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묻는다면, 이런 상황은 말이 되는 거냐고 되묻고 싶다.
딩동―
매일을 하루같이 거실 한구석에 앉아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을 즈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벨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가 실험실의 동물이 된 것 같아 불쾌하다. 벨을 울리면 쪼르르 달려가 문을 열어 주는 실험쥐.
딩동―
날밤을 새우고도 일을 다 못 끝냈는지 떴던 해가 지고 달이 뜨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들어온 낭군님.
소중한 내 님 피곤하실 테니 얼른 버선발로 달려 나가 문을 열어 드려야 하는데, 어떡하지? 버선을 안 신고 있어서 나갈 수가 없네.
딩동―
참 나, 지는 뭐 열쇠가 없나. 그러고 보니 항상 똑같은 패턴이다.
어차피 문을 열면 ‘안 잤어?’ 하고는 서재로 들어갈 거면서, 대체 벨은 왜 누르는 걸까? 내가 문지기도 아닌데 말이다.
딩동―
이 시간까지 잠 안 자고 널 기다릴 거라고 생각했다면 착각이지.
내가 잠을 안 잔 건 고스톱 때문이지 너 때문이 아니거든?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컴퓨터를 강제 종료 하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방문 쪽으로 등을 향한 채 침대에 모로 누워서 귀를 기울이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전실문이 열렸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닫혀 버렸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생각하느라 미간이 묵직하게 저려 오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뭘 잘했다고 울어?!’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은 말이다. 울컥하는 순간이면 매번 듣게 되는 환청이니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거슬린다.
저 사람이야 어차피 서재로 들어갈 텐데 컴퓨터 앞에 앉아 고스톱이나 마저 치고 있을 걸 그랬나 싶은 순간, 살짝 열린 문틈으로 거실의 조명이 비집고 들어온다.
“나 왔어.”
조금, 아니 많이 놀랐다. 혹시 나한테 한 말인가?
신랑한테 자폐증상이 있거나 사물과 대화하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면, 저 말을 들을 사람은 나뿐이다. 그럼 이제 어떡하지? 자고 있던 척하며 일어나서 졸린 목소리로 인사라도 해야 하나?
“먼저 자.”
밥은 먹었느냐고 묻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먼저 자라는 신랑의 말에 기운이 쑥 빠져 버렸다.
마치 나를 못 재워서 안달이라도 난 사람처럼 신랑이 하는 말의 대부분은 ‘잘 자’ 혹은 ‘먼저 자’다. 방문이 닫히자, 희미하게 비집고 들어오던 거실의 빛줄기마저 사라져 버린다.
혀뿌리가 눌려 가슴이 뻐근하게 저려 온다.
내가 견디기 힘든 건 바로 이 답답함이다. 결혼 후 항상 이런 답답함을 느낀다.
단순히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기 때문이 아니라, 뭔가에 붙들려 있는 것 같은 답답함.
갈비뼈 부근이 뻐근하다 못해 어깨 근육마저 굳어 버리는 그런…… 감당하지 못할 답답함.
베갯잇을 움켜쥔 채 이를 악물었다. 그가 먼저 건넨 짧은 한마디에 가슴 설렌 내 자신이 서럽고,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일을 해야 하는 저 사람이 서럽다.
우리 엄마는 일본인이다.
아버지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셔서 엄마를 만나셨다. 그리고 엄마와의 결혼을 허락받으러 들어오셨던 아버지는 한국의 어머니와 혼인을 하셨다.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였던 우리 아버지께서 완고하신 할아버지의 고집을 꺾지 못하신 거다.
엄마는 혼자 오빠를 낳아 기르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한국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언니를 얻으셨다. 그러는 동안 친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한국 어머니께서는 자연유산으로 세 번이나 아이를 놓치셨다.
손자를 바라셨던 할아버지께서는 결국 아버지를 설득하셨다. 일본인은 안 되지만, 오빠에게 섞인 피의 반은 한국인의 것이니까 받아들이셨던 걸까?
아버지는 오빠를 데리러 오셨고, 그때까지도 두 분이 사랑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버지께서 일본으로 돌아온 그 잠깐 동안 생긴 것이 바로 나다.
엄마는 아버지께서 엄마와 오빠를 모두 데리고 가실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언젠가 내가, 왜 나까지 태어나게 만들었냐고 물었을 때 하신 말씀이다.
내가 생겼다는 걸 알고 엄마는 많이 힘들었을 거다.
어릴 적에 부모님을 잃어 이모와 외롭게 자란 엄마는 악착같이 오빠를 키웠지만 나까지 들어서자 덜컥 겁이 나고 외로워졌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오빠에게 얹혀서 한국으로 들어왔다. 엄마도 함께 들어왔지만 우리와 함께 살지는 않으셨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나에게는 어머니가 둘이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모든 사람에게 어머니가 둘인 줄 알았다.
내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한국 어머니께서 남동생을 낳으셨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남동생의 존재가 달갑지 않았다.
어머니의 산후조리 때문에 오빠와 내가 엄마에게 보내졌을 때, 오빠와 나를 부둥켜안고 세상이 끝난 사람처럼 울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남동생이 태어나자, 할아버지는 우리를 미워하지는 않으셨지만 꺼려 하셨다.
그런데도 나는 눈치 없이 할아버지에게 애교를 떨었으니 그분의 마음이 오죽하셨을까. 설상가상으로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남동생을 미워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어른들의 눈에는 내가 눈치 빠르고 영악한 계집애로밖에 안 보였을 거다. 효자로 소문난 아버지를 꾀어낸 제 어미를 꼭 닮은 여우 같은 딸년.
모든 것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정확히 기억할 수 있는 시점부터 어른들의 눈치를 보고 살았다. 고모들이 방문할 때마다 나는 동생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야 했다.
언젠가 집안의 큰 제사 때문에 식구들이 모였을 때, 내 나름대로는 귀여움을 받고 싶어서 쓸데없이 집 안 여기저기를 서성거렸다.
어머니께서 분유병을 들고 오셨다가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시는 걸 보고, 미운 동생이지만 배고파서 울게 놔두면 안 되겠다 싶어 젖병을 물려 주었다.
나도 어리고 동생도 어렸으니 당연히 편안한 자세가 나오기 힘들었고, 고민 끝에 아기를 다시 누인 후 분유병을 거꾸로 집어 든 순간, 어찌 된 일인지 우유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먹기 좋을 정도로 식혀 두기는 했지만, 목을 가누는 것도 힘든 아기의 얼굴로 분유가 쏟아졌으니 그 후의 일은 알 만하지 않겠는가.
귀를 찌르는 울음소리와 함께 호들갑스러운 고모들께서는 모두 하나같이 뭐 하는 짓이냐며 나를 밀쳐 냈다.
마치 내가 아기에게 칼이라도 들이대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난처한 표정으로 동생을 안고 저만치 물러앉으시던 어머니의 표정.
나는 아직도 그 기억을 떠올리면 어떻게든 사랑받으려 발을 동동 구르던 어렸을 적의 초조함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학교에 입학했고, 난 열심히 공부했다.
공부마저 못하면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하기는 했지만,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직업을 가질 수는 없었다.
내 목표는, 열심히 공부해서 사랑받는 것이었다.
인정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받고 싶었다. 그러니 장차 의사나 판검사가 된다는 미래지향적인 건설은 할 수 없었고, 성적이 잘 나와 부모님의 입에서 ‘똑똑한 우리 딸’이라는 말씀만 나와도 그저 좋았다.
문과를 선택해 법학을 전공하게 됐다. 이과는 의대, 문과는 법대. 당시의 나한테는 당연한 공식이었다. 대학에서도 성적은 좋았지만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단순히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내 삶에는, 내가 없었다.
방황했다.
내가 보낸 시간, 내가 보낸 15년의 시간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남들이 꿈을 키우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을 때, 나는 고작 부모님의 칭찬이나 받고자 아득바득 공부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 나는 사랑받고 싶었다.
워낙 어릴 적부터 눈치만 보고 자라서 그저 따뜻한 관심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내가 이루었던 모든 것에 정이 떨어지고 말았다.
마음이 떠나자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정말 더 이상은 아무리 전공서적을 읽고 쓰고 외워도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없었다. 내 삶의 목표가, 나를 보기 좋게 배신한 것이다.
처음에는 한국 어머니를 원망했다. 그다음에는 아버지를 원망했고, 그다음에는 우리 엄마를 원망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나 자신을 원망했다. 결국 준비하던 사법시험을 그만뒀다.
아버지께서는 크게 반대를 하셨다. 조금만 참고 견디면 할 수 있다는 말로 설득도 하셨고, 공부를 그만두려거든 다시는 아버지를 볼 생각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기도 하셨다.
하지만 나는 일분일초도 공부를 더 할 수가 없었다. 단지 시험 준비가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나 자신을 옭아맨 틀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무작정 책을 읽었다.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공부하는 동안 가장 하고 싶었던 일들을 찾아서 그 일에만 매달렸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고 눈물을 흘렸고, 친오빠는 나에게 어리석다고 했다. 한국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걸었던 기대를 버리셨다. 그리고 나는 그분들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머리가 아프다. 생각을 많이 하면 언제나 머리가 아프다. 무엇 때문에 저런 우울한 과거를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아닌가. 정신을 차려 보니 볼이 따가울 정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실없이 피식 웃으며 눈물을 닦고, 크게 한숨을 쉬어 본다.
‘그래, 지나간 일이지.’
앞으로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 나 자신을 버리는 일은 하지 말자. 누군가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어리석은 짓은…… 이제 그만둬야겠다.
악몽을 꿨는지 갑자기 몸이 휘청거렸다.
높은 곳에서 떨어졌거나 넘어진 모양이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그가 옆에 누워 있다.
이렇게 유별난 뒤척임에도 불구하고 눈꺼풀이 닫혀 있는 걸 보면 내 심장이 갑자기 멎어 버린다 해도 까맣게 모른 채 출근할 인간이다.
반듯한 눈썹 사이로, 오뚝한 콧날이 돋보인다. 안경을 벗은 그의 모습은 나체만큼이나 매력적이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는 숨소리가 새벽 공기를 어지럽힌다.
솔직히 말하면…… 어지러운 게 새벽 공기인지 내 정신인지 모르겠다.
살금살금 일어나 거실로 나와 발코니의 이중 유리에 한쪽 어깨를 기대자 한기가 온몸을 휩쓸었다. 추위에 몸서리치면서도 새벽 한가운데의 야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이렇게 창밖을 바라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늘하늘한 프릴치마와 허리선 바로 위에서 밑단을 묶은 새하얀 티셔츠 차림으로 창밖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다가온 그가 내 허리를 조용히 안아 주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물론 신혼 초에 말이다. 이 아파트에 처음 들어왔을 땐, 이곳저곳에 그런 즐겁고 발칙한 상상들이 묻어 있었는데, 이제는 거미줄뿐이다.
끔찍하게 생긴 거미한테 모든 상상을 잡아먹힌 기분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거미는, 나까지 잡아먹을 듯 잠든 나를 흔들어 깨운다.
악몽을 털어 내듯 고개를 휘저으며 어둠을 더듬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우선은 일자리부터 알아보자는 생각에서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잡념이 많아질 테고, 나도 그 사람처럼 일에 치어 바쁘게 지내다 보면 조금은…… 아주 조금은 그를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이해…….”
나도 참 바보다. 이런 순간에마저 신랑을 이해하고 싶어 하다니.
“안 자?”
갑작스러운 신랑의 말에 너무 놀라 성대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뭐지? 왜 나왔지? 나 때문에 잠이 깼나?
모니터를 조명 삼아 나에게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 소리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마우스를 따각따각 누르고는 있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하얗다.
“뭐 해?”
길고 곧은 그의 손가락이 나의 어깨 위로 살짝 무게를 더했다.
맨살을 꼬집어 꿈인지 생신지를 알아볼 수는 없으니 급한 대로 혀를 깨물어 봤다. 무지 아프다. 엄청난 고통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을 정도로.
“아, 미안.”
신랑이 이내 손을 거뒀다. 어깨를 움츠린 이유가 그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오해한 것 같다.
“아니, 난 그냥…….”
그냥 뭐? 그냥 너의 터치를 믿을 수가 없어서 혀를 깨물어 봤을 뿐이야.
그러니 오해 말고 다시 한 번 내 어깨에 손을 올려 주지 않으련? 하고 말하기에는 지금 상황이 너무 어색하고 갑작스럽다.
“좀 봐 줄까?”
“어?”
정신 차리자. 그냥 뒤에 서 있을 뿐이잖아. 근데 뭘 봐 주겠다는 거지? 목적어 좀 생략하지 말아 줄래?
“조금만 옆으로 앉아 봐.”
맙소사. 그제야 신랑이 뭘 얘기하고 있는지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