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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구인구직 사이트를 열어 놓은 걸 깜빡하고 그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부터 태연함을 가장하느라 마우스를 연타하는 통에 광고창을 위시로 익스플로러가 수십 개는 열려 있었다. 팝업 허용 여부 알림창에 팝업 오류 알림창까지……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아니. 지금 막 끄…….”
“마우스 안 먹을 텐데?”
그가 상체를 숙여 내 손 위로 마우스를 잡으려고 하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잡았다. 신랑이 왼손을 자연스럽게 키보드에 얹었다.
키가 큰 탓에 팔이 길어서인지 내가 그의 품에 꼭 맞게 안겨 있는 건 아니지만, 약간은 비슷한 자세가 됐다.
이어 신랑은 오른손의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접어 내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고 엄지와 중지로는 마우스를 붙들고 검지로는 마우스 좌우 버튼을 눌러 가며 ‘응답 없음’으로 표시된 익스플로러를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갑작스러운 스킨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오늘은 게임 안 하네?”
가까이서 들려오는 그의 음성에 알코올 향이 묻어 있다.
아까 침실을 나설 때만 해도 그에게서 별다른 향을 느끼지 못했는데. 상체를 숙여 귓불에 그의 호흡이 스치는 지금은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진한 향이다.
“술 마셨어?”
처음이다. 술 마신 신랑과 함께 있는 건 그를 만난 후 처음이다.
“조금.”
그의 손가락은 여전히 마우스를 두드리며 모니터를 청소하고 있다. 왜 기분이 나쁘지? 아니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뭔가 갑자기 뒤죽박죽이 됐는데 이유를 모르겠다.
“됐다.”
어느새 모니터가 깨끗해졌으니 그를 붙잡아 둘 이유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어정쩡한 자세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
내가 살며시 손을 빼내며 어깨를 움츠리자 신랑이 어색한 듯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 잠깐의 순간, 술이 아닌 향수를 마신 듯 그에게서 배어나는 아찔한 향기에 마음이 어지럽다.
“안 잘 거야?”
“머…… 먼저 들어가.”
바보. 먼저 들어가래 놓고 시스템 종료는 왜 눌렀을까.
중요한 일이 있는 것처럼 5분에서 10분 정도는 버텨야 하는 상황인데 안 잘 거냐고 묻는 그의 말에 놀라 반사적으로 종료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피―잉 하고 본체가 꺼지자 캄캄한 거실에는 모니터의 전원 버튼만 위태롭게 깜빡인다. 일단 컴퓨터를 끄기는 했는데, 이 어두운 가운데 방으로 들어갈 일이 막막하다.
고층이라 가로등에 의지할 수도 없고 야경에 의지하기도 힘들 정도로 깊은 새벽이다.
무거운 눈꺼풀만 열었다 닫았다를 두어 번 했을까? 그가 허리를 숙여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신랑이 뒤에서 나를 감싸 안았고, 난 엉거주춤 내 어깨를 두른 그의 팔에 손을 올리고 있지만, 둘 다 팔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손을 어떻게 놓아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
침 삼키는 소리가 온 세상을 삼킬 정도로 크게 느껴지고, 그의 조용한 숨소리가 아찔하게 귓불에 닿아 머릿속이 새하얗다. 그리고 점점 커지는 심장 소리.
그 소리에 몸이 흔들리고 귀가 울릴 지경이다. 그런데 날 안고 있는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설마 이 사람한테는 심장이 없나?
“드…… 들어……가서…….”
‘들어가자’고 했어야 하는데 ‘들어가서’라니. 들어가서 뭘 어쩌자고?
어이없는 말실수에 혀를 물고 싶을 즈음 그의 팔이 스르륵 풀렸다. 신랑은 분명 내 심장이 볼품없이 쿵쾅거리고 있음을 알아챘을 거다.
잠깐 사이에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감사하며 신랑보다 앞서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웠다. 그제야 침실에 가득한 알코올 향이 느껴진다. 조금이라고는 했지만 향의 농도로 봐서는 꽤 마신 것 같다.
자는 동안 후각이 둔해져 아까는 미처 향을 감지하지 못했나 보다. 마주 누울 자신은 없고 등을 돌리고 싶지는 않아 위를 보고 누웠다. 그리고 곧이어 신랑도 방으로 들어와 내 옆에 누울 줄 알았다.
“글, 안 써?”
하지만 문가에 기댄 그의 한마디에, 마음 어딘가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고무줄이 툭 끊어졌다.
“무슨 글?”
“너랑 나 처음 만난 거, 표지디자인 때문이었잖아.”
그래, 표지디자인 때문에 널 처음 만났다. 내가 글을 쓰고 있지 않았더라면 널 만날 일도 없었겠지.
“컴퓨터, 게임할 때만 쓰는 거 같던데.”
날이 밝으면 집 안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를 찾아봐야겠다.
“글은, 이제 안 쓰는 거야?”
팽팽 노느니 글이라도 써 보라고 사다 준 컴퓨터였나? 결국 그 얘기를 꺼내려고 살가운 척했던 거야?
“왜? 방해돼?”
난 바보같이…… 네 손길 한 번에 이렇게 가슴이 뛰는데.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게 신경 쓰여?”
넌 그냥 우는 애한테 사탕 주듯 아무 때고 너 편할 때 불쑥 이래도 되는 거니? 그것도 술까지 마시고?
“내가 할 일 없이 너 밤샘 작업 하는 데 신경 곤두세우는 게 거슬려?”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돼?”
내가 절필하겠다고 했던 거 잊어버렸니? 내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잊어버린 거야? 아니면 내가 받은 상처 따위는 너랑 아무 상관도 없다는 거야?
“니가 제일 좋아하는 게.”
난 대체 누구랑 결혼을 한 거지? 이 사람이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
“내가 잘 자거나 먼저 자는 거니까…….”
그만. 제발 그만하자. 더 이상 얘기해 봐야 나만 아플 뿐이다.
“그래, 그건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하지만 상처받은 마음이 혀뿌리를 다그치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머리를 따르기엔 상처가 너무 벌어져 버렸다.
“대신 앞으로는 내가 뭘 하든 신경 꺼 줬으면 좋겠어.”
내가 한 말에, 내가 더 상처받았다. 한마디 반박조차 하지 않는 그에게 미안하고, 그 이상으로 그의 무심함이 야속하고 원망스럽기만 하다.
“피곤해. 문 좀 닫아 줘.”
문이 닫히고, 눈물에 알코올 향이 녹아 침대 시트가 젖기 시작했다.
그가 날 이렇게까지 상처 줄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그에게 이미 많은 부분을 내주었기 때문임을 끝까지 인정하기 싫었고, 하여 애써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접어야 할 것 같다.
* * *
드르륵― 드르르르―
침대 맡 협탁에서 진동하는 휴대폰 소리에 잠에서 깼다. 하지만 퉁퉁 부은 눈이 제대로 떠지지를 않아 발신인을 확인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한 손으로 눈두덩을 누르자 저릿하게 눈물이 묻어나며 푹 꺼지는 느낌이 들고, 그제야 실눈이나마 뜰 수 있었다.
드르르르―
엄마다. 우리 친엄마. 나는 그 사람에게 이분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결혼식 날 친모 자리에 앉지도 못한, 그래서 더 가시처럼 가슴에 박힌 우리 엄마. 결혼을 생각한 사람이 있다고 말씀드리자 어머니께서는 제일 먼저 엄마 얘기를 꺼내셨다.
결혼할 사람이 집안 내력을 알고 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으셨지만, 설마 벌써 얘기한 건 아니겠지 하는 눈치셨다. 어머니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신랑에게 엄마 얘기를 꺼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할 시간이 없었고 충분히 가까워지지 않았던 것뿐인데, 양모께서는 ‘그래, 잘했다. 그런 건 차차 말해도 되지. 공연히 흠 잡힐 거 없다.’며 나를 다독이셨다.
상견례 이전에 그 사람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아뵙던 날, 어머니께서는 엄마가 만들어 놓은 내 어릴 적 앨범을 꺼내셨다.
‘우리 애가 어렸을 때부터’로 시작된 양모의 말씀을 들으면서, 난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낳아 준 은혜도 은혜지만 키워 준 은혜가 더 크더라고. 그렇게 되지도 않는 사죄를 하고 또 했다.
그 사람에게 집안 얘기를 하기 싫었던 건 유별나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릴 적부터 애들의 놀림을 받고 자라서 엄마의 국적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진작부터 하고 있었기에, 양모의 말씀에 따르는 척 엄마의 자리를 빼앗았다.
엄마가 마다했어도 내 손으로 직접 그 자리에 앉혀 드렸어야 했는데, 보수적인 신랑의 집안에서 혹시라도 엄마 때문에 나를 반대하시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다 때를 놓쳐 버렸다.
“여보세요.”
― 자고 있었어?
“아뇨. 일어났어요.”
―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안 좋니?
“아니. 괜찮아요. 이제 막 일어나서 그래.”
엄마한테 전화 한 번 못 드렸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께도 그렇고 시어머니께도 그렇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찾아뵌 후로는 한 번도 전화를 드린 적이 없다.
― 신혼도 꽤 지났는데…….
지났는데, 언제고 한 번은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하는데.
“그 사람이 좀 바빠.”
―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 되어 버렸다.
― 좋은 소식은 아직이야?
난 항상 벗어나고 싶었다. 일본인 엄마에게서, 나를 미워하는 식구들에게서, 무엇보다 나 자신을 떳떳하게 생각하지 않는 나 스스로에게서.
“서로 바쁘니까. 아니, 그 사람이 바빠서.”
― 무슨 문제라도 있니?
“없어, 그런 거. 요즘 누가 결혼하자마자 애부터 만들어요.”
― 그래도 거의 백 일인데, 시부모님들이 기다리시지 않겠어?
“몰라요. 신혼여행 끝나는 길에 한 번 뵙고 아직 찾아뵙지도 못했어.”
그러니까 서운해하지 마요. 엄마한테만 안 가는 거 아니니까 속상해하지 마.
― 그럼 쓰나. 전화라도 드려야지.
“차차 할게요. 지금은 정신이 없어서.”
― 가구랑 전자 제품은 다 마음에 들고?
“응. 마음에 들어.”
엄마, 어떡하지? 나…… 행복하지가 않네.
“엄마…….”
― 그래.
“언제 한번 갈게.”
― 아니다, 천천히 와. 괜찮아.
“나 혼자라도 갈게요.”
― 그래, 편할 대로 해.
엄마는 아마 수화기 너머로 힘없이 웃고 있을 거다.
“오빠는? 가끔 봐요?”
― 요즘은 자주 와.
“응.”
다행이다.
― 별일…… 없지?
“응. 잘 지내요.”
― 그래. 잘 지내고, 혼자 있을 때 가끔 전화도 하고. 응?
“응, 엄마.”
― 그래, 궁금해서 한번 해 봤어. 들어가렴.
잠시 눈을 감았다.
“엄마―”
보고 싶다. 우리 엄마.
“나…… 신랑이랑…… 안 좋아.”
새벽 내 그렇게 울고도 아직 흘릴 눈물이 남았는지, 눈물이 귓바퀴를 타고 흘러 베갯잇을 다 적시도록 울음을 멈출 수가 없다.
엄마한테 친구를 이르는 어린애처럼 한참 동안 눈물범벅으로 끔찍한 신혼 생활의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물론 들어가라는 말을 끝으로 엄마는 이미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위안을 얻어야만 했다. 그래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침대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햇빛이 쏟아지는 페어그라스 앞에 섰다.
엄마와 통화를 하고 나니 간밤부터 울렁거리던 속이 차분히 가라앉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발코니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난 사람을 보면 항상 그 사람의 얘기가 궁금하다. 누구의 가족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말이다.
오랜만의 사람 구경으로 호기심을 불태워서인지 문득 허기가 느껴졌다. 벽시계의 시침이 어느새 꼭대기를 지나 한시름 놓은 듯 2시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뭐라도 먹자는 생각으로 주방에 들어서자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은 오븐렌지가 쓸쓸하게 나를 반겼다.
밥솥에 밥이 있을 테지. 엊그제 해 놓고 혼자 떠먹은 그대로.
일단 무슨 반찬이든 꺼내기 위해 냉장실을 열자 음료수 칸 한 귀퉁이를 차지한 정체불명의 술병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와인이다.
차가운 술병이 주는 청량함이 왠지 낯설다. 이 집에 들어와서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생명력이다.
살아 있는 건 난데 순식간에 술병만도 못한 존재가 돼 버린 것 같다. 서로에게 이런 청량함과 설렘이 돼야 할 연애 3개월의 햇병아리 신혼부부가…….
물끄러미 술병을 바라보다 도로 냉장실에 넣고 돌아섰다.
내가 사다 놓은 게 아니라면 그 사람이 사다 놓은 걸 텐데, 저걸 마셨다가 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흥― 더럽고 치사해서 안 마신다 이거지.
“어디 보자.”
싱크대 수납장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언젠가 현관에 붙은 ‘콩나물 500원어치도 친절 배달’이라는 전단지를 여기 어디다 넣어 뒀는데…… 분명 여기 어디에…….
“오!”
마치 쓰레기 더미에서 예쁜 유리구슬을 발견한 어린애처럼 환호하는 내 모습이 어색하다.
고작 광고 전단지를 찾았을 뿐인데, 감정적인 자극에 목말라 있다 보니 아주 작은 일에도 감각이 뻥튀기되는 모양이다.
* * *
숨을 쉴 때마다 훈김에 어린 알코올 냄새가 역하게 코를 찌른다.
사실, 마신 술보다 식탁에 부은 술이 더 많다. 이래서 술은 두 사람이 마시는 건데 말이지. 서로 부어 주면 긴장해서 안 흘리니까.
불을 켜야 하는데 창가에 내린 어둠이 외로워 보여서 잠시 참기로 했다.
아니, 실은 불을 켰을 때 발코니 창 전면에 비칠 내 모습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실내가 밝아지면 유리창이 거울처럼 날 비출 텐데…….
“어두미…… 에로운 게 아니아 니가 에로운 거겠지…….”
무거운 짐을 감당하기 힘들어 경련을 일으킨 근육처럼 혀뿌리가 제멋대로 움직인다. 아마도 혼자서 붓고 마신 술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었나 보다.
그러니 잠깐, 아주 잠깐 술과 어둠을 벗 삼아 휴식을 취해야겠다. 그러려면 조금 엎어져 있어도 되겠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 보니 뚝배기에 가득한 젤리를 정신없이 퍼먹고 있었다. 신랑이 마신 술에서는 알코올 향이 났는데, 내가 마신 술에서는 냄새만 진동한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젤리의 밀도가 너무 높은 거 아닌가? 그리고 이 넓은 식당에 손님이 왜 나 혼자뿐이지?
꿈이라는 걸 자각하기도 전에 내가 먹고 있던 젤리에 눈이 멎었다. 젤리가 아니라 응혈된 피다. 입가에 끈적이는 비린내를 묻혀 가며 핏덩어리를 먹고 있었던 거다.
구인구직 사이트를 열어 놓은 걸 깜빡하고 그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부터 태연함을 가장하느라 마우스를 연타하는 통에 광고창을 위시로 익스플로러가 수십 개는 열려 있었다. 팝업 허용 여부 알림창에 팝업 오류 알림창까지……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아니. 지금 막 끄…….”
“마우스 안 먹을 텐데?”
그가 상체를 숙여 내 손 위로 마우스를 잡으려고 하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잡았다. 신랑이 왼손을 자연스럽게 키보드에 얹었다.
키가 큰 탓에 팔이 길어서인지 내가 그의 품에 꼭 맞게 안겨 있는 건 아니지만, 약간은 비슷한 자세가 됐다.
이어 신랑은 오른손의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접어 내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고 엄지와 중지로는 마우스를 붙들고 검지로는 마우스 좌우 버튼을 눌러 가며 ‘응답 없음’으로 표시된 익스플로러를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갑작스러운 스킨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오늘은 게임 안 하네?”
가까이서 들려오는 그의 음성에 알코올 향이 묻어 있다.
아까 침실을 나설 때만 해도 그에게서 별다른 향을 느끼지 못했는데. 상체를 숙여 귓불에 그의 호흡이 스치는 지금은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진한 향이다.
“술 마셨어?”
처음이다. 술 마신 신랑과 함께 있는 건 그를 만난 후 처음이다.
“조금.”
그의 손가락은 여전히 마우스를 두드리며 모니터를 청소하고 있다. 왜 기분이 나쁘지? 아니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뭔가 갑자기 뒤죽박죽이 됐는데 이유를 모르겠다.
“됐다.”
어느새 모니터가 깨끗해졌으니 그를 붙잡아 둘 이유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어정쩡한 자세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
내가 살며시 손을 빼내며 어깨를 움츠리자 신랑이 어색한 듯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 잠깐의 순간, 술이 아닌 향수를 마신 듯 그에게서 배어나는 아찔한 향기에 마음이 어지럽다.
“안 잘 거야?”
“머…… 먼저 들어가.”
바보. 먼저 들어가래 놓고 시스템 종료는 왜 눌렀을까.
중요한 일이 있는 것처럼 5분에서 10분 정도는 버텨야 하는 상황인데 안 잘 거냐고 묻는 그의 말에 놀라 반사적으로 종료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피―잉 하고 본체가 꺼지자 캄캄한 거실에는 모니터의 전원 버튼만 위태롭게 깜빡인다. 일단 컴퓨터를 끄기는 했는데, 이 어두운 가운데 방으로 들어갈 일이 막막하다.
고층이라 가로등에 의지할 수도 없고 야경에 의지하기도 힘들 정도로 깊은 새벽이다.
무거운 눈꺼풀만 열었다 닫았다를 두어 번 했을까? 그가 허리를 숙여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신랑이 뒤에서 나를 감싸 안았고, 난 엉거주춤 내 어깨를 두른 그의 팔에 손을 올리고 있지만, 둘 다 팔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손을 어떻게 놓아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
침 삼키는 소리가 온 세상을 삼킬 정도로 크게 느껴지고, 그의 조용한 숨소리가 아찔하게 귓불에 닿아 머릿속이 새하얗다. 그리고 점점 커지는 심장 소리.
그 소리에 몸이 흔들리고 귀가 울릴 지경이다. 그런데 날 안고 있는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설마 이 사람한테는 심장이 없나?
“드…… 들어……가서…….”
‘들어가자’고 했어야 하는데 ‘들어가서’라니. 들어가서 뭘 어쩌자고?
어이없는 말실수에 혀를 물고 싶을 즈음 그의 팔이 스르륵 풀렸다. 신랑은 분명 내 심장이 볼품없이 쿵쾅거리고 있음을 알아챘을 거다.
잠깐 사이에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감사하며 신랑보다 앞서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웠다. 그제야 침실에 가득한 알코올 향이 느껴진다. 조금이라고는 했지만 향의 농도로 봐서는 꽤 마신 것 같다.
자는 동안 후각이 둔해져 아까는 미처 향을 감지하지 못했나 보다. 마주 누울 자신은 없고 등을 돌리고 싶지는 않아 위를 보고 누웠다. 그리고 곧이어 신랑도 방으로 들어와 내 옆에 누울 줄 알았다.
“글, 안 써?”
하지만 문가에 기댄 그의 한마디에, 마음 어딘가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고무줄이 툭 끊어졌다.
“무슨 글?”
“너랑 나 처음 만난 거, 표지디자인 때문이었잖아.”
그래, 표지디자인 때문에 널 처음 만났다. 내가 글을 쓰고 있지 않았더라면 널 만날 일도 없었겠지.
“컴퓨터, 게임할 때만 쓰는 거 같던데.”
날이 밝으면 집 안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를 찾아봐야겠다.
“글은, 이제 안 쓰는 거야?”
팽팽 노느니 글이라도 써 보라고 사다 준 컴퓨터였나? 결국 그 얘기를 꺼내려고 살가운 척했던 거야?
“왜? 방해돼?”
난 바보같이…… 네 손길 한 번에 이렇게 가슴이 뛰는데.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게 신경 쓰여?”
넌 그냥 우는 애한테 사탕 주듯 아무 때고 너 편할 때 불쑥 이래도 되는 거니? 그것도 술까지 마시고?
“내가 할 일 없이 너 밤샘 작업 하는 데 신경 곤두세우는 게 거슬려?”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돼?”
내가 절필하겠다고 했던 거 잊어버렸니? 내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잊어버린 거야? 아니면 내가 받은 상처 따위는 너랑 아무 상관도 없다는 거야?
“니가 제일 좋아하는 게.”
난 대체 누구랑 결혼을 한 거지? 이 사람이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
“내가 잘 자거나 먼저 자는 거니까…….”
그만. 제발 그만하자. 더 이상 얘기해 봐야 나만 아플 뿐이다.
“그래, 그건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하지만 상처받은 마음이 혀뿌리를 다그치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머리를 따르기엔 상처가 너무 벌어져 버렸다.
“대신 앞으로는 내가 뭘 하든 신경 꺼 줬으면 좋겠어.”
내가 한 말에, 내가 더 상처받았다. 한마디 반박조차 하지 않는 그에게 미안하고, 그 이상으로 그의 무심함이 야속하고 원망스럽기만 하다.
“피곤해. 문 좀 닫아 줘.”
문이 닫히고, 눈물에 알코올 향이 녹아 침대 시트가 젖기 시작했다.
그가 날 이렇게까지 상처 줄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그에게 이미 많은 부분을 내주었기 때문임을 끝까지 인정하기 싫었고, 하여 애써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접어야 할 것 같다.
드르륵― 드르르르―
침대 맡 협탁에서 진동하는 휴대폰 소리에 잠에서 깼다. 하지만 퉁퉁 부은 눈이 제대로 떠지지를 않아 발신인을 확인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한 손으로 눈두덩을 누르자 저릿하게 눈물이 묻어나며 푹 꺼지는 느낌이 들고, 그제야 실눈이나마 뜰 수 있었다.
드르르르―
엄마다. 우리 친엄마. 나는 그 사람에게 이분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결혼식 날 친모 자리에 앉지도 못한, 그래서 더 가시처럼 가슴에 박힌 우리 엄마. 결혼을 생각한 사람이 있다고 말씀드리자 어머니께서는 제일 먼저 엄마 얘기를 꺼내셨다.
결혼할 사람이 집안 내력을 알고 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으셨지만, 설마 벌써 얘기한 건 아니겠지 하는 눈치셨다. 어머니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신랑에게 엄마 얘기를 꺼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할 시간이 없었고 충분히 가까워지지 않았던 것뿐인데, 양모께서는 ‘그래, 잘했다. 그런 건 차차 말해도 되지. 공연히 흠 잡힐 거 없다.’며 나를 다독이셨다.
상견례 이전에 그 사람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아뵙던 날, 어머니께서는 엄마가 만들어 놓은 내 어릴 적 앨범을 꺼내셨다.
‘우리 애가 어렸을 때부터’로 시작된 양모의 말씀을 들으면서, 난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낳아 준 은혜도 은혜지만 키워 준 은혜가 더 크더라고. 그렇게 되지도 않는 사죄를 하고 또 했다.
그 사람에게 집안 얘기를 하기 싫었던 건 유별나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릴 적부터 애들의 놀림을 받고 자라서 엄마의 국적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진작부터 하고 있었기에, 양모의 말씀에 따르는 척 엄마의 자리를 빼앗았다.
엄마가 마다했어도 내 손으로 직접 그 자리에 앉혀 드렸어야 했는데, 보수적인 신랑의 집안에서 혹시라도 엄마 때문에 나를 반대하시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다 때를 놓쳐 버렸다.
“여보세요.”
― 자고 있었어?
“아뇨. 일어났어요.”
―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안 좋니?
“아니. 괜찮아요. 이제 막 일어나서 그래.”
엄마한테 전화 한 번 못 드렸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께도 그렇고 시어머니께도 그렇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찾아뵌 후로는 한 번도 전화를 드린 적이 없다.
― 신혼도 꽤 지났는데…….
지났는데, 언제고 한 번은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하는데.
“그 사람이 좀 바빠.”
―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 되어 버렸다.
― 좋은 소식은 아직이야?
난 항상 벗어나고 싶었다. 일본인 엄마에게서, 나를 미워하는 식구들에게서, 무엇보다 나 자신을 떳떳하게 생각하지 않는 나 스스로에게서.
“서로 바쁘니까. 아니, 그 사람이 바빠서.”
― 무슨 문제라도 있니?
“없어, 그런 거. 요즘 누가 결혼하자마자 애부터 만들어요.”
― 그래도 거의 백 일인데, 시부모님들이 기다리시지 않겠어?
“몰라요. 신혼여행 끝나는 길에 한 번 뵙고 아직 찾아뵙지도 못했어.”
그러니까 서운해하지 마요. 엄마한테만 안 가는 거 아니니까 속상해하지 마.
― 그럼 쓰나. 전화라도 드려야지.
“차차 할게요. 지금은 정신이 없어서.”
― 가구랑 전자 제품은 다 마음에 들고?
“응. 마음에 들어.”
엄마, 어떡하지? 나…… 행복하지가 않네.
“엄마…….”
― 그래.
“언제 한번 갈게.”
― 아니다, 천천히 와. 괜찮아.
“나 혼자라도 갈게요.”
― 그래, 편할 대로 해.
엄마는 아마 수화기 너머로 힘없이 웃고 있을 거다.
“오빠는? 가끔 봐요?”
― 요즘은 자주 와.
“응.”
다행이다.
― 별일…… 없지?
“응. 잘 지내요.”
― 그래. 잘 지내고, 혼자 있을 때 가끔 전화도 하고. 응?
“응, 엄마.”
― 그래, 궁금해서 한번 해 봤어. 들어가렴.
잠시 눈을 감았다.
“엄마―”
보고 싶다. 우리 엄마.
“나…… 신랑이랑…… 안 좋아.”
새벽 내 그렇게 울고도 아직 흘릴 눈물이 남았는지, 눈물이 귓바퀴를 타고 흘러 베갯잇을 다 적시도록 울음을 멈출 수가 없다.
엄마한테 친구를 이르는 어린애처럼 한참 동안 눈물범벅으로 끔찍한 신혼 생활의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물론 들어가라는 말을 끝으로 엄마는 이미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위안을 얻어야만 했다. 그래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침대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햇빛이 쏟아지는 페어그라스 앞에 섰다.
엄마와 통화를 하고 나니 간밤부터 울렁거리던 속이 차분히 가라앉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발코니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난 사람을 보면 항상 그 사람의 얘기가 궁금하다. 누구의 가족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말이다.
오랜만의 사람 구경으로 호기심을 불태워서인지 문득 허기가 느껴졌다. 벽시계의 시침이 어느새 꼭대기를 지나 한시름 놓은 듯 2시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뭐라도 먹자는 생각으로 주방에 들어서자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은 오븐렌지가 쓸쓸하게 나를 반겼다.
밥솥에 밥이 있을 테지. 엊그제 해 놓고 혼자 떠먹은 그대로.
일단 무슨 반찬이든 꺼내기 위해 냉장실을 열자 음료수 칸 한 귀퉁이를 차지한 정체불명의 술병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와인이다.
차가운 술병이 주는 청량함이 왠지 낯설다. 이 집에 들어와서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생명력이다.
살아 있는 건 난데 순식간에 술병만도 못한 존재가 돼 버린 것 같다. 서로에게 이런 청량함과 설렘이 돼야 할 연애 3개월의 햇병아리 신혼부부가…….
물끄러미 술병을 바라보다 도로 냉장실에 넣고 돌아섰다.
내가 사다 놓은 게 아니라면 그 사람이 사다 놓은 걸 텐데, 저걸 마셨다가 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흥― 더럽고 치사해서 안 마신다 이거지.
“어디 보자.”
싱크대 수납장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언젠가 현관에 붙은 ‘콩나물 500원어치도 친절 배달’이라는 전단지를 여기 어디다 넣어 뒀는데…… 분명 여기 어디에…….
“오!”
마치 쓰레기 더미에서 예쁜 유리구슬을 발견한 어린애처럼 환호하는 내 모습이 어색하다.
고작 광고 전단지를 찾았을 뿐인데, 감정적인 자극에 목말라 있다 보니 아주 작은 일에도 감각이 뻥튀기되는 모양이다.
숨을 쉴 때마다 훈김에 어린 알코올 냄새가 역하게 코를 찌른다.
사실, 마신 술보다 식탁에 부은 술이 더 많다. 이래서 술은 두 사람이 마시는 건데 말이지. 서로 부어 주면 긴장해서 안 흘리니까.
불을 켜야 하는데 창가에 내린 어둠이 외로워 보여서 잠시 참기로 했다.
아니, 실은 불을 켰을 때 발코니 창 전면에 비칠 내 모습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실내가 밝아지면 유리창이 거울처럼 날 비출 텐데…….
“어두미…… 에로운 게 아니아 니가 에로운 거겠지…….”
무거운 짐을 감당하기 힘들어 경련을 일으킨 근육처럼 혀뿌리가 제멋대로 움직인다. 아마도 혼자서 붓고 마신 술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었나 보다.
그러니 잠깐, 아주 잠깐 술과 어둠을 벗 삼아 휴식을 취해야겠다. 그러려면 조금 엎어져 있어도 되겠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 보니 뚝배기에 가득한 젤리를 정신없이 퍼먹고 있었다. 신랑이 마신 술에서는 알코올 향이 났는데, 내가 마신 술에서는 냄새만 진동한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젤리의 밀도가 너무 높은 거 아닌가? 그리고 이 넓은 식당에 손님이 왜 나 혼자뿐이지?
꿈이라는 걸 자각하기도 전에 내가 먹고 있던 젤리에 눈이 멎었다. 젤리가 아니라 응혈된 피다. 입가에 끈적이는 비린내를 묻혀 가며 핏덩어리를 먹고 있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