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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우윽― 으웩!”
예정된 따귀를 맞을 때처럼 입을 꾹 다물고 씁쓰름한 액체가 코로 역류하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싱크대로 직행했다. 화장실로 갔어야 하지만 도착하기 전에 거실 바닥에 토하는 것보다야 싱크대가 낫다.
허리를 숙이자 눈물인지 술인지 안주인지 모를 것들이 쏟아진다. 눈이 시고 코가 매울 정도다.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지? 속이 너무 아프다.
“하아…… 후…… 으웨엑―”
다시 한차례.
“욱―! 우웩…… 흐흑…….”
내 몸 어딘가에 얼음이 박혔나 보다. 알싸하게 들어갔던 술들이 죄다 얼음 파편이 되어 속을 후벼 내고 있다.
“하아, 하아…… 어윽! 흑…….”
침을 되삼키기 어려울 정도로 신물이 오르지만 일단 수도를 틀고 싱크대를 씻어 내렸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엄마, 나 어떡하지. 나도 남들처럼 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네. 욕심이 생겨. 그 사람한테 사랑받고 싶어요.
그런데 욕심이 생기니까, 마음이 아파. 왜 난 항상 이렇게 감정에 목마른 채 살아야 돼?
나도 세상 누군가한테 아주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내가 잘못해도 나한테 허물이 있어도 덮어 줄 사람을 가지고 싶은데, 그러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돼?
내가 얼마나 잘해야 그런 사람을 가질 수 있어? 이 사람이 그럴 가치는 있는 거야? 내가 또 괜한 욕심에 눈멀어서 내 인생에 칼질하는 거야?
싱크대를 의지하고 한참을 서 있다가 다리를 끌다시피 해서 안방에 들어왔다. 실컷 토하고도 아직 남은 것이 있는지 속이 쓰리다. 속만 쓰리면 참을 만하겠는데 머리도 너무 아프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더욱 힘들게 하는 건 지독한 한기다. 몸이 너무 차가워서 머리를 울려 대는 고통 외에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질 않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머리는 여전히 아프지만, 없는 정신에도 이불을 꼼꼼히 덮고 있었기 때문인지 살갗을 할퀴어 대던 한기는 훨씬 덜하다.
그런데 어디선가 비릿한 냄새가 훅 끼쳐 와 비위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구역질을 삼키며 쓰린 속을 달래고 있을 즈음 인기척이 느껴졌다.
“자?”
벌써 퇴근한 건가? 도대체 얼마나 이러고 누워 있었는지 모르겠다.
“식탁 위에 있는 술병, 뭐야?”
뭐긴, 빈 병이지.
“한요은.”
천천히 눈을 떠, 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틀에 기댄 그를 봤다.
이름을 부르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아서 눈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결혼 후 이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른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저 술을 혼자 다 마셨어?”
성큼성큼 침대로 걸어오더니, 들고 있던 서류 가방을 신경질적으로 팽개친다.
만약 노트북 가방이었다면 저러지 못했을 텐데, 부부싸움 중에 값싼 물건만 던지는 희극의 한 장면을 본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런데…… 머리가…… 너무 아프다. 피식 웃는 웃음에도 엄청난 압력이 느껴질 정도다. 머리가 아니라 뇌가 아픈 건가?
“머리 아파.”
술은 진작 깼지만, 취한 척하고 싶다.
“머리 아프다.”
내 꼴이 너무 우스워 정신이라도 없는 척해야 했다.
“너 옷, 갈아입어야겠다.”
턱받이라도 대고 토할 걸 그랬나. 쇄골 중앙이 축축이 젖은 게 느껴진다. 비위를 자극하던 냄새가 이거였구나.
그래도 없는 정신에 침실까지 와서 얼마나 다행인가. 주방에 엎어져 있었으면 더 추했을 거다.
내가 미동도 않고 누운 채 시선을 피하자 욕실과 연결된 드레스룸으로 들어간 신랑이 붙박이장을 열었다.
열기는 했는데 한동안 가만히 서서 한숨을 쉰다. 그리고 잠시 후, 옷걸이를 이리저리 밀어붙이는 소리에 귀가 따갑다.
“일어나서 앉아.”
얼마 안 되는 옷들 중에 하필이면 단추가 주렁주렁 달린 남방을 골랐다.
“못 앉겠어?”
설마 니가 직접 벗기고 입혀 주겠다는 건 아니지? 아니면 내가 벗고 입는 모습을 구경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나가.”
“일단 갈아입어. 보기 안 좋아.”
“그럼 안 보면 되잖아.”
토할 거 같다.
“됐으니까…… 좀 나가 줘.”
“그래. 미안해.”
갑자기 미안하다니. 무슨 소리냐. 또 그릇이라도 깼나?
“내가 너무 일에만 매달렸어.”
너도 진짜 타이밍 한번 죽여주게 맞추는구나. 하필이면 그런 얘기를 지금, 엉망진창인 내 앞에서 꼭 해야겠니?
“근데 나 이런 거, 너도 모르지 않았잖아.”
“그만 좀 해. 머리 아파.”
아마 지금쯤 입술을 깨물었을 거다.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데?”
“그런 거 없어.”
“워낙 짧게 만나고 결혼해서 서로에 대해 알 기회가 없…….”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머리 좀 맑아지면 얘기하자. 지금은 내 상태가 너무 안 좋잖아.
“난 원래 일할 때 방해받는 거 싫어해. 머릿속이 꽉 차서 누가 말 한마디만 걸어도 생각이 다 흩어져. 그래서 뭐든 일단 떠오른 건 무조건 가시화시켜야 돼. 작업할 때는 원래 그래.”
누가 들으면 대단한 예술가 한 분 납신 줄 알게 생겼네.
물론 신랑이 하는 일을 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얘기만 들어서는 혼을 불사르는 작곡가가 떠오르지 않는가.
보아하니 오늘 속에 있는 얘기 다 꺼내려고 작정하신 거 같은데 미안해서 어떡하지? 난 네가 편할 때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아니거든. 오늘은 내가 너랑 얘기하기 불편한 날이라고. 모르겠어?
“술은 내가 마셨는데 왜 이렇게 주절거려.”
“말 좀 가려서 해.”
“좀…… 나 좀 내버려 둬.”
“왜 이러는데. 뭐가 문젠데?”
“문제?”
그래, 너 말 잘했다.
“말을 해야 알지.”
“말 한마디 하지 말라며? 문제? 문제가 뭐냐고? 그게 문제야.”
“뭐?”
“니 그 태도가 문제야. 됐어? 됐니? 고칠 수나 있겠어?”
“내가 일하는 게 문제라고?”
귀가 먹었나. 니가 일하는 게 아니라 니 태도 말이야! 말 한마디 건넬 때마다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니 태도!
“하― 관두자.”
“그럼 이런 짓도 하지 마.”
“이런 짓? 무슨 짓? 내가 무슨 죽을죄라도 지었어?”
“혼자 술 마시고, 내가 널 방치해 둔 것처럼 굴지 말라고.”
“웃기네. 니가 날 방치해서 내가 혼자 술이나 퍼마시고 있었다는 거야?”
“그럼?”
“니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아?”
“너 아직 술 덜 깬 거 같은데, 나중에 얘…….”
“언제? 너 일 다 끝나고?”
정면으로 올려 본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뭐가 문제냐며. 어떻게 해 주길 바라냐며. 얘기해 보라면서!”
“목소리 낮춰.”
침대 매트가 성난 파도를 만난 조각배처럼 울렁거린다. 다시 눕고 싶은데, 분에 못 이겨 벌떡 일어난 처지라서 그러지도 못하겠다.
나 때문에 이기지도 못할 술을 마셨느냐 다그칠까 봐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괜찮은 척해야겠다.
“조용히 죽어지내면 괜찮고, 이렇게 술 마시는 건 안 된다?”
“말을 꼭 그런 식으로 해야 돼?”
“문제가 뭐냐고? 대체 왜 이러냐고? 왜 그걸 지금 물어?! 우리가…… 하― 아니지. 그동안은 내가 정상으로 보였니? 그동안은 내가 아무 문제도 없는 걸로 보였어?”
“그래서 지금 묻고 있잖아!”
그가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이 사람, 화도 낼 줄 아는구나.
“그러니까! 왜 지금까지는 가만있다가 하필이면 술 마신 날 따지고 드는 건데? 지금 너랑 내가 사는 꼴이 정상인 거 같니? 이게 정상적인 결혼 생활로 보이냐고!!”
“결혼식 올리고 신혼여행까지 다녀와서 같이 사는 게 결혼 생활이 아니면 뭔데?”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정말 모르겠어?”
막상 ‘너랑 난 한 번도 잠자리를 한 적이 없잖아!’ 하고 말하려니, 과연 그 문제가 날 이렇게까지 힘들게 할 이유로 충분한가 싶어 말문이 막힌다.
“그래. 모르겠어. 그러니까 말하라고.”
대답 대신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쇄골 근처를 신경질적으로 닦아 내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신랑의 시선이 순식간에 다른 곳을 향했다.
내가 낯선 사람도 아니고 홀딱 벗은 것도 아닌데, 속옷 한 장 걸친 와이프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네가 정상인 거 같니?
그런데 더욱 슬픈 건, 나 역시 이런 상황을 견디기 힘들다는 거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알몸을 드러낸 것처럼 낯이 뜨겁다.
신랑이 들고 있던 남방을 낚아채 대강 몸에 걸쳤는데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려서 단추를 채우기가 힘들다.
볼썽사납게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누가 보더라도 이기지 못할 술을 마신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손을 덜덜 떨어 가며 단추에 집착하기에는 속이 너무 메스껍고 머리가 너무 아파서 대강 옷섶을 여민 후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가.”
“뭐?”
“나가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 아니야.”
“아니, 난 들어야겠어.”
“자꾸 뭘 말하라는 거야? 듣고 싶은 얘기가 뭔데?”
“정말 이렇게밖에 못 하겠어?”
그래, 술 마시고 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든 건 내 잘못이다. 그리고 그가 내 잘못을 덮어 주길 바란 것도 내 잘못이다.
신랑은 말없는 사람이었을 뿐, 감정 없는 목석은 아니었던 거다.
“나한테 할 말 많은 거 같은데, 너야말로 지금 다 얘기하지그래?”
그의 눈이 날카롭게 나를 쏘아본다. 그를 바라보는 내 눈 역시 곱지만은 않겠지.
“솔직히 내 일 하면서 너한테 미안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누가 너더러 미안해하래?”
“그럼 왜 이러는데?”
“내가 뭘 어쨌는데?!”
그래, 너도 사람이면 아마 할 말이 없을 거다. 네가 나한테 한 짓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교에 지나지 않으니까.
“시위하는 거잖아, 너.”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하하하―”
“넌 무슨 생각으로 결혼한 건지 몰라도, 적어도 내가 생각하…….”
“그럼 넌? 넌 무슨 생각으로 결혼했니?”
머릿속의 굉음을 애써 참아 가며 신랑을 올려 봤다.
“니가 하자며.”
내가 하자고 해서 했다고?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닐까 되묻고 싶지만 상처에 소금 뿌리는 격이 될까 봐 이를 악물었다.
속이 쓰리다 싶은 순간, 위가 꿀렁대더니 금세 입에 쓴물이 고였다.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니 삼킨 눈물 대신 구역질이 밀려 나온 것이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욕실로 뛰어들어 변기를 찾을 여유도 없이 바닥에 연초록 쓸개즙을 토하고 나니 그제야 눈물이 쏟아진다. 우는 꼴을 보이기 싫어 문을 부술 듯 밀쳐 닫고 잠금장치를 돌렸다.
쿵― 쿵―!
“한요은.”
일부러 날 물 먹이려고 작정하지 않은 다음에야, 이 꼴로 이러고 있는데 왜 이렇게 사람을 귀찮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가라고! 가서 일이나 하라잖아!!”
눈물 흐르는 소리가 너무 커서 샤워꼭지를 틀었다.
뭘 잘했다고 울어. 니가 뭘 잘했다고.
어김없이 들려오는 환청에 몸을 비틀며 한동안 넋을 놓고 앉아 있다 나와 보니, 잘난 서방님은 보이질 않으신다.
일하러 갔나 보다. 결혼하재서 결혼했으니, 일하라면 일해야지 별수 있겠는가.
그래, 뼈가 빠지고 빠진 뼈가 부스러지고 그 부스러진 뼛가루를 반죽해서 부쳐 먹을 정도로 일해라.
정신없이 침대에 엎어져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술이 좋구나. 술이 이렇게 좋은 거였어.
알코올의 뜨거운 기운이 가슴에 쌓인 재를 씻어 내린 모양이다. 숨을 배 속 끝까지 들이마시지 못하고 항상 갑갑했었는데, 속이 확 트인 것 같다.
“추워.”
그러고 보니 어느새 겨울이다. 그를 만나 결혼을 하고, 이렇게 시간이 지나도록, 난 대체 뭘 하고 있었나 싶다.



Chapter 02. 내가 몰랐던 너


걱정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두드려 주던 선희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담배를 빼 물었다.
“너 진짜 누구 미치는 꼴 보고 싶어? 말을 안 할 거면 어디 혼자 조용히 처박혀서 울고 올 일이지, 왜 남의 집 거실을 차지하고 앉아서 이러냐고 왜―”
집을 나와 갈 곳 없이 배회하다가 어쩔 수 없이 선희에게 왔다.
그런데 현관문이 열리고 선희가 나오고 낯익은 풍경이 눈에 차오르는 순간부터 흐르기 시작한 눈물이 멈출 생각을 않는다.
억울해서도 아니고 가슴이 아파서도 아니다. 모든 긴장이 한 번에 풀어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에이 씨, 짜증 나게.”
불을 당기다 말고 담배를 뱉어 내더니…….
“내 집에서 담배까지 눈치 봐야 되냐고, 내가!”
하며 다시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켠다.
“후우―”
한숨 섞인 연기가 방 안 가득 독한 냄새를 풍겼다.
“울보.”
역시 김선희.
“그만 울어, 지지배야.”
슬퍼서 우는 거 아니래도.
“마감했으니 망정이지, 어제 와서 이랬으면 너는 바로 담배빵이거든?”
“푸흣…….”
“어쭈? 다 울었나 보네?”
그런가.
“담배 좀 끊어.”
“눈물이나 닦아라, 보기 흉하다.”
“닦을 거나 좀 주면서…… 흐윽…….”
“또또또!! 알았어, 알았어!!”
어디론가 후다닥 사라졌다 나타나더니 먼지가 풀풀 나는 수건 한 장을 얼굴에 던져 준다.
“그게 마지막 남은 수건이다. 이제 발수건으로 얼굴 닦아야 돼.”
내가 눈물을 닦는 동안, 선희는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나를 어르고 달랬다. 빨리 말하지 않으면 쫓아내 버리겠다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처음에는 절대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창피해서라도 말할 수가 없었다. 신랑과 잠자리를 하지 못한 것이 창피해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떠나지 못하는 내 모습이 창피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자 선희는 잠자코 앉아서 담배를 피워 대기 시작했다.
나는 매캐한 연기 속에 길을 잃은 사람처럼 앉아 남은 눈물을 모조리 짜냈다. 하지만 아무리 울어도 속이 풀리지를 않았다.
어머니께도 할 수 없고 엄마에게는 더더욱 할 수 없는 얘기들이 가슴을 눌러 숨을 쉴 때마다 심장이 아팠다. 그래서 두서없이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