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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선희는 나의 말을 한 번도 끊지 않았다. 대신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나를 억지로 데리고 나왔다. 마감을 무사히 치른 기념으로 한잔하자는 것이었다.
그냥 집에서 맥주랑 오징어포나 사다 먹자는 나에게 그럴 거면 너 혼자 집에 있으라기에, 안 그래도 혼자가 지긋지긋한 나로서는 따라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선희는 사람 많고 시끌벅적한 곳이 좋겠다며 이태원으로 차를 몰았다. 호텔 주차장에 차를 세우기에 호텔 나이트라도 가려나 했는데, 주차장을 빠져나와 벌써 한참을 걷고 있다.
“어디 가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에 닫는 발뒤꿈치가 정수리를 콕콕 찔러 대는 추운 날씨다.
“가 보면 안다니까. 나만 믿어.”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오르막보다 더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한참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음악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까맣고 두꺼운 문이 나타났고 문을 열자 소리는 더 커져 귀를 울리고 마침내는 몸을 흔들어 댄다.
“뭐야? 다 온 거야?”
미간이 찌푸려졌다.
“들어와 일단!!”
커다란 음악 소리에 마모된 듯 낡은 벽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커다란 홀이 보인다. 그런데…….
“이쪽으로!!”
그곳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남자였다. Bar에 앉은 사람도, 홀에서 춤을 추는 사람도…… 모두 남자다. 난 무의식중에 앞서가던 선희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멈춰 섰다.
“어머, 언니?!”
그 시끄러운 와중에, 귀를 파고드는 하이톤의 목소리. 깡마른 남자가 몸에 착 달라붙는 셔츠를 입고 서 있었다. 근데 방금 이 남자가 선희를 언니라고 부르지 않았나?
“준호도 있었네?”
익숙하게 인사를 건네는 선희의 모습이 많이 낯설다.
“오랜만이다아― 글 다 마쳤어요?”
“그러니까 왔지!”
소리를 지르지 않고는 도저히 대화가 되지 않을 정도다.
“어머? 근데 누구야?”
남자가 반색을 하며 나를 건너본다.
“친구!!”
“어머~ 웬일이니! 글 쓴다더니 연애한 거 아냐?”
방금…… 뭐라고? 연예인이냐고?
“아냐. 친구야, 친구! 좀 비켜 봐, 들어가게!!”
내 손목을 잡아끄는 선희를 보며 남자가 뭐라고 더 떠들어 댔지만 이미 음악에 묻힌 다음이었고, 홀을 지나 안으로 더 들어서자 bar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기로 앉자…….”
분명 같은 공간인데도 홀을 등지고 서자 음악이 잦아들어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선희의 목소리가 잘 들렸다.
“근데 선희야. 여기…….”
“일단 앉아.”
나를 끌어 앉힌 선희가 바텐더들을 주―욱 둘러보자, 그중 한 명이 반가운 기색으로 bar를 가로질러 우리가 앉은 쪽으로 다가왔다.
“선희 씨?”
“안녕하세요―”
“간만에 왔네?”
웃는 모습이 익숙하다. 낯익은 모습이 아니라, 익숙하게 잘 웃는다는 느낌.
“사장님 안 계세요?”
“일이 있어서 잠깐 자리 비우셨어.”
“일단 두 잔만 부탁해요. 항상 마셨던 걸로…….”
“Shot―”
귀를 뚫고 입술에는 연하게 립스틱을 바른 것 같다. 엉거주춤 앉아 멍청히 그 사람을 바라보는 나를 의식했는지, 선희가 옆구리를 찔렀다.
“실례다 너.”
“어? 아…… 응.”
여기가 어디니, 선희야. 저 사람, 아니 저 남자들은 다 뭐야.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소개해 줄 사람?
“친구분 참 매력 있게 생겼네?”
자욱한 담배 연기 사이로 술잔을 내밀며 남자가 말했다.
“그럼 뭐해요. 안 되는 사람인데.”
“왜 안 돼?”
“결혼했어요, 얘.”
“하하, 선희 씨 안 되겠다.”
“아뇨, 저 말고. 오빠 말이에요. 오빠한테는 안 되는 사람인데 매력 있으면 뭐하냐고요.”
“어우― 엉터리. 매력 있다는 게 꼭 그런 뜻은 아니잖아?”
남자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눈을 찡긋 감는 통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고민하다가 어색하게 웃어 줬다.
“연화 언니가 소개시켜 줬어. 여기가 술 마시기 딱 좋다고.”
연화 언니라면 그 사람을 소개시켜 준 선배다. 그 사람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과 혼돈되니 신랑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지금 이 안에는 그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말이다.
“솔직히 내가 먹고 마시는 거 좋아하는데, 딱히 사람들이랑 몰려다니는 건 별로잖아.”
그래, 그건 잘 알지.
“근데 또 혼자 다니면 되지도 않는 핏덩이들이나 아저씨들이 찝쩍거리고 말이지.”
“어…….”
“연화 언니가 여자 혼자 술 마시러 가기는 딱이라고 여길 가르쳐 주더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희가 B-52를 한 번에 들이켰다.
“안 마셔?”
솔직히 어제 너무 많이 마신 데다 전부 게워 내기까지 해서 술이라면 냄새도 맡기 싫지만, 코를 자극하는 알싸한 향에 끌려 단숨에 한 잔을 다 들이켰다. 묵직하게 혀를 휘감아 입 안 가득 향을 남기는 독특한 맛이다.
“으으…….”
손으로 입을 훔쳐 내자, 선희가 재미있다는 듯 나를 보고 있다.
“너 어제도 마셨지?”
“그러니까 전화도 없는 괘씸한 김선희를 찾아갔지.”
“웃기시네. 전화해도 안 받을 때는 언제고?”
피식 웃고 말았다.
“한 대 피워도 되지?”
“좋을 대로. 연기만 내 얼굴에 뱉지 마.”
선희가 불을 그은 후 고개를 돌려 연기를 뱉어 낸다.
“그럼 이제 얘기 좀 해 봐.”
“무슨 얘기.”
“오빠, 여기요!!”
오빠라는 단어가 어색한 건지 아니면 여자의 목소리가 어색한 건지, bar에 앉은 남자들의 시선이 모두 선희에게 쏠렸다.
가까이 와 보지도 않고 익숙하게 셰이커를 손에 들어 보이는 바텐더. 아마도 같은 걸로 두 잔 더 가져오겠지.
“그러니까 지금, 한 번도 관계를 안 가졌다는 거잖아? 결혼 3개월이 다 됐는데.”
“조용히 좀 해.”
“진짜야?”
뭔가 복잡한 표정이다.
“혹시 각방 써?”
“아니.”
“그럼 잠은 같은 방에서 자는 거야?”
“응. 내가 먼저 잠들면 그 사람도 와서 자기는 해. 일어나 보면 없지만.”
선희가 오른손을 치켜들자, 바텐더가 선희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처럼 술잔을 또 들고 온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사모님들.”
“전 아직 아가씨거든요?”
남자가 멀어지자, 선희는 술잔을 손에 들고 만지작거린다.
“너 연애는 얼마나 했지?”
“백 일도 안 했지.”
“그렇게 빨리 결혼을 했으면 뭔가 feel이 팍 꽂힌 거 아냐?”
“난 그랬지.”
“아니 근데 혼전에 아무…… 뭐 그런 것도 없었어?”
“그런 거 뭐?”
“흠…… 그것 참…….”
또 한 잔.
“내가 미혼이라 부부 생활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딱히 할 말이 없네.”
“니가 뭐라고 해 주기 바란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근데 좀 이상하다?”
“뭐가……?”
선희는 잠시 망설이는 눈치를 보이더니 내 술잔까지 입에 털어 넣고는 말을 이었다.
“너 혼전에 딴 남자랑 연애한 적 있나?”
“아니.”
“남자 사귄 적 한 번도 없잖아?”
“응, 없어.”
“그럼 너 남자랑 자 본 적도 없잖아.”
“시끄럽거든.”
“아니, 이상하게 듣지 말고. 근데 뭐 그렇게 안달이야? 그 사람 그렇게 사랑하고, 사랑해서 같이 자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하면 되잖아. 그게 뭐 자존심 내세우고 그럴 일인가? 결혼까지 한 사이에, 무슨 연애놀음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리고 또 신랑이 아직 너한테 매력을 못 느껴서 그런 거면 느끼도록 노력하면 되지. 남자들이랑 맨날 그러고 다녀서 몸 닳은 여자들이야 수개월 동안 못 하면 욕구불만으로 울 수도 있겠지만.”
“넌…… 가끔 보면 참 멍청해.”
“뭐래…….”
“결혼은 합법적인 섹스 외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넌 어떤지 몰라도 난 그 이상을 원해. 결혼을 했으면 최소한…….”
“최소한, 그래 뭐?”
니가 하재서 결혼했다는 인간을 두고 최소한은 개뿔.
“후우― 여기요!”
엉거주춤 선희 흉내를 내며 손을 올리자, 바텐더가 익숙하게 웃으며 OK 사인을 보낸다.
“어?! 사장님?”
선희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긴 곳엔 중간 정도 되는 키에 말쑥한 차림의 한 남자가 있었다. 말쑥한지 머쓱한지 술기운이 돌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꽤 멋져 보인다.
“언제 왔어요?”
“사장님! 이제야 오시네~”
선희가 좀 취한 모양이다. 자기 말로는 나보다 주량이 높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영 아니올시다. 벌써 눈이 풀리고 코맹맹이 소리가 작렬이다.
“선희 씨 기분 좋은 일 있나 봐?”
매너 있는 웃음. 아니 따뜻한 웃음인가?
“사장님!! 여기― 이 친구가 누군지 아세요?”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수선을 떠는 선희가 부담스럽다.
물론 선희와는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사람 같지만, 나와는 처음 아닌가. 주책 떨지 말라고 잡아끌 수도 없고 나도 같이 주책을 떨며 ‘내가 누구게~?’ 할 수도 없고.
“얘가 바로!! 사장님이 항상 궁금해하시…….”
혀 꼬인 목소리가 뚝 그치더니 선희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잠깐 잠깐! 잠깐요.”
손아귀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이 안쓰러울 정도로 네 정신인지 내 정신인지 분간이 안 되는 선희.
비틀거리는 선희를 부축하려고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장님이라는 남자가 나를 말리고 나섰다. 팔을 뿌리칠 이유는 딱히 없지만, 그렇다고 붙들린 채 선희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곧 엎어질 기세다.
“선희가 많이 취한 거 같아요.”
의식적으로 팔을 빼기보다는 선희를 따라가면 자연히 정리가 되겠지 싶다.
“한요은 씨?”
순간 당황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지?
“한요은 씨 맞죠?”
“네. 그런데 저를 어떻게 아세요?”
그가 나를 붙들었던 손을 황급히 거두고 정식으로 악수를 청해 왔다.
“반가워요.”
엉겁결에 손을 마주 잡고 묵례를 했다.
“박원호예요.”
코트를 벗어 등받이에 걸친 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이 사람이 나를 보는 시선이 뜨거운 건지, 내 얼굴이 뜨거운 건지 모르겠다.
“여기 너무 시끄럽죠?”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이며 귓가에 속삭이듯 말하는 그의 행동에 당황해서 엉덩이를 뒤로 빼며 물러앉으려다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나마 멍청하게 내지른 비명이 요란한 음악 소리에 묻혀 버려 다행이다.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제가 술을 좀 많이 마셔서.”
“괜찮아요. 요은 씨보다 더한 사람들 술친구도 많이 해 봤어요. 여기 시끄러운데, 내 방으로 가죠. 선희 씨도 그리로 올 거예요.”
내 방? 내 방으로? 내가 난감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자 안심하라는 듯 웃는다.
도대체 이 사장 아저씨가 뭐 하는 사람인지를 똑바로 알아야 방으로 가든가 말든가 할 텐데. 김선희는 어디 가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방이라고 해서 좀 곤란해요? 사무실이에요. 그냥 혼자 편하게 쓰니까 방이라고 하는 거고. 부담스러워할 거 없어요. 여기서 서로 목소리 들으려고 안간힘 쓰는 게 더 부담될걸요?”
내가 그러자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미 내 손목을 잡고 있다. 그를 따라 조금 걷자 bar 안측의 왼편에 조그만 문이 보이고, 그 문을 열자 좁고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
“선희 씨 오면 사무실로 오라고 전해 줘.”
“네.”
바텐더의 대답을 뒤로하고 그를 따라 통로를 가득 채운 계단을 올라갔다.
“발 조심해요. 계단이 좁아서 잘못하면 뒤로 넘어지거든요.”
계단을 오를 때마다 하나씩 밝혀지는 조명에 의지해 내가 밟고 있는 곳이 얼마나 가파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내, 앞서가던 그의 손에서 금속성의 샤르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계단 꼭대기의 문이 열리자 또 다른 공간이 나타난다.
“들어오세요.”
안쪽에서 문을 열고 허리를 약간 숙인 그의 모습이 조금은 낯설다. 물론 처음 보는 사람이니 낯설게 느껴지는 게 당연하지만, 내가 느낀 낯설음은 그의 태도 자체다.
최근 누군가, 특히 나와 동거 중인 인간에게 이런 존중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사람이 이렇게 바르고 따뜻할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다.
“들어와요. 거기 서 있다가 또 넘어지면 안 되잖아요.”
주춤주춤 들어선 그의 방에는 기분 좋은 향기가 가득하다.
정면에 보이는 창문 아래로 진한 커피색 마호가니 책상이 결 좋은 모습으로 놓여 있고 방의 양옆으로 들어선 책장에는 책들이 빼곡하다.
아래쪽의 쿵쾅거리는 홀과는 너무 대조되는 분위기.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술장사하는 사람한테는 안 어울리는 사무실이죠?”
그의 얼굴에 언뜻 스친 웃음이 슬퍼 보인 건 착각이겠지. 그가 코트를 책상 위에 걸쳐 두고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상의 이리 주세요.”
대답할 틈도 없이 내 뒤로 서서 외투를 받으려는 그의 몸짓이 전혀 거슬리지 않아 당황스럽다.
“좋은 향수 쓰네요.”
아찔하다. 향수를 병째로 코에 들어 엎은 기분.
“네? 아…… 어제 술을 너무 마셔서 향수를 좀 많이 써서…… 그래서 그래요.”
향기가 좋다고 한 거지 진하다고 한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다.
“저쪽으로 앉아요. 소파라서 뒤로 빼 주지는 못하겠네요.”
웃음을 달고 사는 사람인가 보다. 신랑에게서도 저런 웃음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뭐 어떻다는 거지. 이런 순간에도 신랑을 생각하다니, 나도 참 구제불능이다.
“커피 괜찮아요?”
“네.”
“빈속에 술 마셨으면 커피 말고 주스나 차도 있는데, 어때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가죽으로 된 소파에서조차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배어 나와 코끝이 아릿하다. 『헨젤과 그레텔』에 나온 과자로 만든 집처럼 향기로 만든 방에 앉아 있는 것 같다.
“내 이름, 기억나요?”
등을 돌린 채 서재 한쪽의 미니 바에서 뭔가를 열심히 만들던 그가 불쑥 물었다.
선희는 나의 말을 한 번도 끊지 않았다. 대신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나를 억지로 데리고 나왔다. 마감을 무사히 치른 기념으로 한잔하자는 것이었다.
그냥 집에서 맥주랑 오징어포나 사다 먹자는 나에게 그럴 거면 너 혼자 집에 있으라기에, 안 그래도 혼자가 지긋지긋한 나로서는 따라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선희는 사람 많고 시끌벅적한 곳이 좋겠다며 이태원으로 차를 몰았다. 호텔 주차장에 차를 세우기에 호텔 나이트라도 가려나 했는데, 주차장을 빠져나와 벌써 한참을 걷고 있다.
“어디 가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에 닫는 발뒤꿈치가 정수리를 콕콕 찔러 대는 추운 날씨다.
“가 보면 안다니까. 나만 믿어.”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오르막보다 더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한참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음악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까맣고 두꺼운 문이 나타났고 문을 열자 소리는 더 커져 귀를 울리고 마침내는 몸을 흔들어 댄다.
“뭐야? 다 온 거야?”
미간이 찌푸려졌다.
“들어와 일단!!”
커다란 음악 소리에 마모된 듯 낡은 벽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커다란 홀이 보인다. 그런데…….
“이쪽으로!!”
그곳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남자였다. Bar에 앉은 사람도, 홀에서 춤을 추는 사람도…… 모두 남자다. 난 무의식중에 앞서가던 선희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멈춰 섰다.
“어머, 언니?!”
그 시끄러운 와중에, 귀를 파고드는 하이톤의 목소리. 깡마른 남자가 몸에 착 달라붙는 셔츠를 입고 서 있었다. 근데 방금 이 남자가 선희를 언니라고 부르지 않았나?
“준호도 있었네?”
익숙하게 인사를 건네는 선희의 모습이 많이 낯설다.
“오랜만이다아― 글 다 마쳤어요?”
“그러니까 왔지!”
소리를 지르지 않고는 도저히 대화가 되지 않을 정도다.
“어머? 근데 누구야?”
남자가 반색을 하며 나를 건너본다.
“친구!!”
“어머~ 웬일이니! 글 쓴다더니 연애한 거 아냐?”
방금…… 뭐라고? 연예인이냐고?
“아냐. 친구야, 친구! 좀 비켜 봐, 들어가게!!”
내 손목을 잡아끄는 선희를 보며 남자가 뭐라고 더 떠들어 댔지만 이미 음악에 묻힌 다음이었고, 홀을 지나 안으로 더 들어서자 bar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기로 앉자…….”
분명 같은 공간인데도 홀을 등지고 서자 음악이 잦아들어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선희의 목소리가 잘 들렸다.
“근데 선희야. 여기…….”
“일단 앉아.”
나를 끌어 앉힌 선희가 바텐더들을 주―욱 둘러보자, 그중 한 명이 반가운 기색으로 bar를 가로질러 우리가 앉은 쪽으로 다가왔다.
“선희 씨?”
“안녕하세요―”
“간만에 왔네?”
웃는 모습이 익숙하다. 낯익은 모습이 아니라, 익숙하게 잘 웃는다는 느낌.
“사장님 안 계세요?”
“일이 있어서 잠깐 자리 비우셨어.”
“일단 두 잔만 부탁해요. 항상 마셨던 걸로…….”
“Shot―”
귀를 뚫고 입술에는 연하게 립스틱을 바른 것 같다. 엉거주춤 앉아 멍청히 그 사람을 바라보는 나를 의식했는지, 선희가 옆구리를 찔렀다.
“실례다 너.”
“어? 아…… 응.”
여기가 어디니, 선희야. 저 사람, 아니 저 남자들은 다 뭐야.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소개해 줄 사람?
“친구분 참 매력 있게 생겼네?”
자욱한 담배 연기 사이로 술잔을 내밀며 남자가 말했다.
“그럼 뭐해요. 안 되는 사람인데.”
“왜 안 돼?”
“결혼했어요, 얘.”
“하하, 선희 씨 안 되겠다.”
“아뇨, 저 말고. 오빠 말이에요. 오빠한테는 안 되는 사람인데 매력 있으면 뭐하냐고요.”
“어우― 엉터리. 매력 있다는 게 꼭 그런 뜻은 아니잖아?”
남자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눈을 찡긋 감는 통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고민하다가 어색하게 웃어 줬다.
“연화 언니가 소개시켜 줬어. 여기가 술 마시기 딱 좋다고.”
연화 언니라면 그 사람을 소개시켜 준 선배다. 그 사람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과 혼돈되니 신랑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지금 이 안에는 그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말이다.
“솔직히 내가 먹고 마시는 거 좋아하는데, 딱히 사람들이랑 몰려다니는 건 별로잖아.”
그래, 그건 잘 알지.
“근데 또 혼자 다니면 되지도 않는 핏덩이들이나 아저씨들이 찝쩍거리고 말이지.”
“어…….”
“연화 언니가 여자 혼자 술 마시러 가기는 딱이라고 여길 가르쳐 주더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희가 B-52를 한 번에 들이켰다.
“안 마셔?”
솔직히 어제 너무 많이 마신 데다 전부 게워 내기까지 해서 술이라면 냄새도 맡기 싫지만, 코를 자극하는 알싸한 향에 끌려 단숨에 한 잔을 다 들이켰다. 묵직하게 혀를 휘감아 입 안 가득 향을 남기는 독특한 맛이다.
“으으…….”
손으로 입을 훔쳐 내자, 선희가 재미있다는 듯 나를 보고 있다.
“너 어제도 마셨지?”
“그러니까 전화도 없는 괘씸한 김선희를 찾아갔지.”
“웃기시네. 전화해도 안 받을 때는 언제고?”
피식 웃고 말았다.
“한 대 피워도 되지?”
“좋을 대로. 연기만 내 얼굴에 뱉지 마.”
선희가 불을 그은 후 고개를 돌려 연기를 뱉어 낸다.
“그럼 이제 얘기 좀 해 봐.”
“무슨 얘기.”
“오빠, 여기요!!”
오빠라는 단어가 어색한 건지 아니면 여자의 목소리가 어색한 건지, bar에 앉은 남자들의 시선이 모두 선희에게 쏠렸다.
가까이 와 보지도 않고 익숙하게 셰이커를 손에 들어 보이는 바텐더. 아마도 같은 걸로 두 잔 더 가져오겠지.
“그러니까 지금, 한 번도 관계를 안 가졌다는 거잖아? 결혼 3개월이 다 됐는데.”
“조용히 좀 해.”
“진짜야?”
뭔가 복잡한 표정이다.
“혹시 각방 써?”
“아니.”
“그럼 잠은 같은 방에서 자는 거야?”
“응. 내가 먼저 잠들면 그 사람도 와서 자기는 해. 일어나 보면 없지만.”
선희가 오른손을 치켜들자, 바텐더가 선희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처럼 술잔을 또 들고 온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사모님들.”
“전 아직 아가씨거든요?”
남자가 멀어지자, 선희는 술잔을 손에 들고 만지작거린다.
“너 연애는 얼마나 했지?”
“백 일도 안 했지.”
“그렇게 빨리 결혼을 했으면 뭔가 feel이 팍 꽂힌 거 아냐?”
“난 그랬지.”
“아니 근데 혼전에 아무…… 뭐 그런 것도 없었어?”
“그런 거 뭐?”
“흠…… 그것 참…….”
또 한 잔.
“내가 미혼이라 부부 생활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딱히 할 말이 없네.”
“니가 뭐라고 해 주기 바란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근데 좀 이상하다?”
“뭐가……?”
선희는 잠시 망설이는 눈치를 보이더니 내 술잔까지 입에 털어 넣고는 말을 이었다.
“너 혼전에 딴 남자랑 연애한 적 있나?”
“아니.”
“남자 사귄 적 한 번도 없잖아?”
“응, 없어.”
“그럼 너 남자랑 자 본 적도 없잖아.”
“시끄럽거든.”
“아니, 이상하게 듣지 말고. 근데 뭐 그렇게 안달이야? 그 사람 그렇게 사랑하고, 사랑해서 같이 자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하면 되잖아. 그게 뭐 자존심 내세우고 그럴 일인가? 결혼까지 한 사이에, 무슨 연애놀음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리고 또 신랑이 아직 너한테 매력을 못 느껴서 그런 거면 느끼도록 노력하면 되지. 남자들이랑 맨날 그러고 다녀서 몸 닳은 여자들이야 수개월 동안 못 하면 욕구불만으로 울 수도 있겠지만.”
“넌…… 가끔 보면 참 멍청해.”
“뭐래…….”
“결혼은 합법적인 섹스 외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넌 어떤지 몰라도 난 그 이상을 원해. 결혼을 했으면 최소한…….”
“최소한, 그래 뭐?”
니가 하재서 결혼했다는 인간을 두고 최소한은 개뿔.
“후우― 여기요!”
엉거주춤 선희 흉내를 내며 손을 올리자, 바텐더가 익숙하게 웃으며 OK 사인을 보낸다.
“어?! 사장님?”
선희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긴 곳엔 중간 정도 되는 키에 말쑥한 차림의 한 남자가 있었다. 말쑥한지 머쓱한지 술기운이 돌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꽤 멋져 보인다.
“언제 왔어요?”
“사장님! 이제야 오시네~”
선희가 좀 취한 모양이다. 자기 말로는 나보다 주량이 높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영 아니올시다. 벌써 눈이 풀리고 코맹맹이 소리가 작렬이다.
“선희 씨 기분 좋은 일 있나 봐?”
매너 있는 웃음. 아니 따뜻한 웃음인가?
“사장님!! 여기― 이 친구가 누군지 아세요?”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수선을 떠는 선희가 부담스럽다.
물론 선희와는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사람 같지만, 나와는 처음 아닌가. 주책 떨지 말라고 잡아끌 수도 없고 나도 같이 주책을 떨며 ‘내가 누구게~?’ 할 수도 없고.
“얘가 바로!! 사장님이 항상 궁금해하시…….”
혀 꼬인 목소리가 뚝 그치더니 선희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잠깐 잠깐! 잠깐요.”
손아귀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이 안쓰러울 정도로 네 정신인지 내 정신인지 분간이 안 되는 선희.
비틀거리는 선희를 부축하려고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장님이라는 남자가 나를 말리고 나섰다. 팔을 뿌리칠 이유는 딱히 없지만, 그렇다고 붙들린 채 선희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곧 엎어질 기세다.
“선희가 많이 취한 거 같아요.”
의식적으로 팔을 빼기보다는 선희를 따라가면 자연히 정리가 되겠지 싶다.
“한요은 씨?”
순간 당황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지?
“한요은 씨 맞죠?”
“네. 그런데 저를 어떻게 아세요?”
그가 나를 붙들었던 손을 황급히 거두고 정식으로 악수를 청해 왔다.
“반가워요.”
엉겁결에 손을 마주 잡고 묵례를 했다.
“박원호예요.”
코트를 벗어 등받이에 걸친 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이 사람이 나를 보는 시선이 뜨거운 건지, 내 얼굴이 뜨거운 건지 모르겠다.
“여기 너무 시끄럽죠?”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이며 귓가에 속삭이듯 말하는 그의 행동에 당황해서 엉덩이를 뒤로 빼며 물러앉으려다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나마 멍청하게 내지른 비명이 요란한 음악 소리에 묻혀 버려 다행이다.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제가 술을 좀 많이 마셔서.”
“괜찮아요. 요은 씨보다 더한 사람들 술친구도 많이 해 봤어요. 여기 시끄러운데, 내 방으로 가죠. 선희 씨도 그리로 올 거예요.”
내 방? 내 방으로? 내가 난감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자 안심하라는 듯 웃는다.
도대체 이 사장 아저씨가 뭐 하는 사람인지를 똑바로 알아야 방으로 가든가 말든가 할 텐데. 김선희는 어디 가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방이라고 해서 좀 곤란해요? 사무실이에요. 그냥 혼자 편하게 쓰니까 방이라고 하는 거고. 부담스러워할 거 없어요. 여기서 서로 목소리 들으려고 안간힘 쓰는 게 더 부담될걸요?”
내가 그러자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미 내 손목을 잡고 있다. 그를 따라 조금 걷자 bar 안측의 왼편에 조그만 문이 보이고, 그 문을 열자 좁고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
“선희 씨 오면 사무실로 오라고 전해 줘.”
“네.”
바텐더의 대답을 뒤로하고 그를 따라 통로를 가득 채운 계단을 올라갔다.
“발 조심해요. 계단이 좁아서 잘못하면 뒤로 넘어지거든요.”
계단을 오를 때마다 하나씩 밝혀지는 조명에 의지해 내가 밟고 있는 곳이 얼마나 가파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내, 앞서가던 그의 손에서 금속성의 샤르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계단 꼭대기의 문이 열리자 또 다른 공간이 나타난다.
“들어오세요.”
안쪽에서 문을 열고 허리를 약간 숙인 그의 모습이 조금은 낯설다. 물론 처음 보는 사람이니 낯설게 느껴지는 게 당연하지만, 내가 느낀 낯설음은 그의 태도 자체다.
최근 누군가, 특히 나와 동거 중인 인간에게 이런 존중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사람이 이렇게 바르고 따뜻할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다.
“들어와요. 거기 서 있다가 또 넘어지면 안 되잖아요.”
주춤주춤 들어선 그의 방에는 기분 좋은 향기가 가득하다.
정면에 보이는 창문 아래로 진한 커피색 마호가니 책상이 결 좋은 모습으로 놓여 있고 방의 양옆으로 들어선 책장에는 책들이 빼곡하다.
아래쪽의 쿵쾅거리는 홀과는 너무 대조되는 분위기.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술장사하는 사람한테는 안 어울리는 사무실이죠?”
그의 얼굴에 언뜻 스친 웃음이 슬퍼 보인 건 착각이겠지. 그가 코트를 책상 위에 걸쳐 두고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상의 이리 주세요.”
대답할 틈도 없이 내 뒤로 서서 외투를 받으려는 그의 몸짓이 전혀 거슬리지 않아 당황스럽다.
“좋은 향수 쓰네요.”
아찔하다. 향수를 병째로 코에 들어 엎은 기분.
“네? 아…… 어제 술을 너무 마셔서 향수를 좀 많이 써서…… 그래서 그래요.”
향기가 좋다고 한 거지 진하다고 한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다.
“저쪽으로 앉아요. 소파라서 뒤로 빼 주지는 못하겠네요.”
웃음을 달고 사는 사람인가 보다. 신랑에게서도 저런 웃음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뭐 어떻다는 거지. 이런 순간에도 신랑을 생각하다니, 나도 참 구제불능이다.
“커피 괜찮아요?”
“네.”
“빈속에 술 마셨으면 커피 말고 주스나 차도 있는데, 어때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가죽으로 된 소파에서조차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배어 나와 코끝이 아릿하다. 『헨젤과 그레텔』에 나온 과자로 만든 집처럼 향기로 만든 방에 앉아 있는 것 같다.
“내 이름, 기억나요?”
등을 돌린 채 서재 한쪽의 미니 바에서 뭔가를 열심히 만들던 그가 불쑥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