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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원호예요. 박원호.”
“네에.”
“아까는 음악 소리가 너무 컸죠?”
“네, 약간.”
또 말문이 막혔다.
“내가 너무 편하게 대해서 난감하죠?”
돌아서는 그의 손에 투명한 유리잔이 들려 있다. 가서 받아 들어야 하나 어쩌나 고민하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뇨, 앉아 있어요. 술기운 돌아서 어지러울 텐데.”
“괜찮아요.”
일어선 채로 그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봤다. 차갑게 생긴 외모에서 저렇게 따뜻한 미소가 나올 수 있다니.
차가운 곳에 있다가 뜨거운 벽난로 앞에 선 것처럼 몸을 감싸는 온기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가만 보니 따뜻한 게 아니라 아찔한 웃음이다.
찻잎이 깊게 우러난 찻잔을 앞에 두고 말없이 시계 소리만 듣고 있다. 선희는 도대체 누구한테서 걸려 온 무슨 전화를 받느라고 이렇게 늦는 걸까.
“걱정 말아요. 여기 선희 씨 아지트나 마찬가지니까.”
내가 힐끔힐끔 문 쪽을 살피고 있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선희 씨보다 내가 더 궁금하지 않아요?”
이건 또 무슨 말씀인가.
사실 조금, 아니 많이 궁금하긴 하지만 본인 입으로 저렇게 말하는 걸 들으니 어이가 없다기보다는 실망스럽다. 그에게서 느꼈던 겸손함과 따스함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느낌이랄까.
“선희 씨가 여기 처음 왔던 게 한 4~5년 정도 됐나? 여전히 사장님, 사장님 하기는 해도 남매처럼 지내는 사이예요.”
하지만 곧 그의 목소리와 방 안 가득한 향에 취해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모든 경계심을 풀었다.
“선희 씨가 처음에 왔을 때는 공식적으로는 여자 손님을 안 받을 때였는데.”
여자 손님을 안 받았다는 건, 역시 내가 생각했던 그런 업소라는 얘긴가?
“직원한테 얘기를 듣고 내려갔더니 연화 소개로 왔다면서 한 잔만 마시고 조용히 가게 해 달라는 거예요.”
얼마 전에 연화 선배가 소개시켜 준 곳이라고, 선희가 분명히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4~5년 전을 얼마 전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건가?
“데킬라를 혼자서 10잔도 넘게 마시더라고요. 그 후에도 가끔 왔고요. 그때만 해도 내가 bar에 있을 때거든요. 평일에는 손님이 없으니까 가끔 같이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그랬어요. 원래 선희 씨가 글 쓰는 줄도 몰랐는데, 책 한 권을 가지고 와서는 직접 사인한 거니까 잘 간직하래서 알았죠.”
그가 잠깐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그때 처음 요은 씨를 알았어요.”
음? 날 어떻게?
“요은 씨가 쓴 축전이 있었거든요.”
“아― 그 책…….”
기억난다. 인터넷으로만 글을 연재하던 선희가 기말고사를 앞둔 어느 날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나를 불러내 학교를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말했었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는 성실한 선희였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시험 공부가 힘들어서 잠깐 투정하는 것이려니 했다.
그런데 종강 후에 선희는 정말 학교를 그만뒀다. 그 후로 일 년 정도 연락 두절 상태에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선희가 법학관 앞에서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우렁차게 웃던 모습이 아직도 또렷하다.
너무 반가워서 한참을 두들겨 팼다. 고등학교 때부터 4년 넘게 붙어 다니다가 갑자기 학교를 때려치우고 1년 동안 연락 한 번 없던 야속한 친구가 뜬금없이 나타나 애타게 나를 불러 댔으니 얼마나 기가 차고 괘씸했는지 모른다.
‘나 책 낸다. 근데 니가 축전을 하나만 써 줬으면 좋겠어.’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싶은 일을 찾은 선희가 부럽기도 했고, 주변의 기대를 저버릴 선희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부러움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렇게 한동안 밀고 당기다가 결국엔 축전을 썼다. 선희가 없는 자리에 혼자 남아서 했던 생각들, 나 자신을 투영시켰지만 결코 나처럼 못나지는 않은 사람의 얘기를 썼다.
하지만 내가 선희에게 준 축전은 그 글 하나뿐인데, 벌써 한참 전의 그 글을 이 사람이 읽었단 말인가?
“글 읽고 요은 씨를 꼭 한 번 보고 싶었어요.”
“감사해요.”
감사하다고 말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를 꼭 보고 싶었다니, 내 글이 엉망은 아니었다는 얘기 아닐까?
“글쎄. 감사받을 일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엉망은 아니었던 게 아니었다는 건가? 갑자기 생각이 얽힌 와중에 핸드백 속의 휴대폰이 진동하며 정신을 깨웠다.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정신없이 핸드백을 뒤져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신랑한테 걸려 온 전화이길 바랐다.
싸우고 나왔으니 날 걱정해 주기를 바랐다거나, 먼저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해 주길 바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신랑에게 미안했다. 생각해 보니 한 번도 그 사람을 편하게 해 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지금 내 앞의 저 사람이 처음 보는 나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서 느꼈다.
낯선 사람의 친절에도 이렇듯 편해지는데, 나는 왜 결혼까지 한 그 사람에게 친절한 적이 없는지.
신혼 첫날밤 잘못 끼운 단추 때문에 항상 감정을 독촉하듯 했던 건 아닌지. 그런 생각 때문에 진심으로 신랑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발신인은 신랑이 아니라 연화 언니였다.
신랑이라면 양해를 구하기도 전에 통화 버튼을 눌렀겠지만, 신랑이 아니라면 경우가 달랐다. 어쨌든 대화 중이었으니 상대방에게 예의를 차려야 하지 않겠는가.
“급한 전화예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먼저 말했다.
“아뇨. 아니에요.”
급한 전화일 수가 없었다. 결혼 후, 아니 결혼 전부터 연화 언니와는 연락이 뜸했다. 정확히는 내가 그 사람과 결혼을 결심한 다음부터였다.
연화 언니는 내 결심에 이상하리만치 회의적이었고, 만남이 짧을수록 신중해야 한다며 그 사람과 나의 결혼을 만류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고, 결혼식 당일에도 언니는 신부 하객석이 아니라 신랑 하객석에 앉았다.
“말씀 중에 죄송해요.”
발신이 끊긴 것을 확인하고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순간 다시 진동이 시작됐다. 이번에도 역시 발신인은 연화 언니였다.
“급한 일인 거 같은데 받으세요.”
“괜찮아요.”
괜찮다는 나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끈질기게 진동하는 휴대폰.
“일단 받으세요. 내가 더 신경 쓰여서 그래요.”
“그럼 잠깐 실례할게요.”
무슨 일로 전화한 걸까.
“여보세요.”
― 요은아, 나야.
다급한 목소리다.
“네. 안녕하세요.”
― 너 선희랑 이태원에 있다면서?
“네?”
― 빨리 거기서 나와. 나와서 다른 데로 가 있어.
“예?”
― 거기 있지 말라고. 대체 거길 왜 갔어?
당황스럽다.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느닷없이 빨리 여길 떠나라는 것도 그렇고.
― 요은아?
“네, 언니.”
― 얼른 나와.
“저 죄송한데, 지금은 통화하기 힘들어요. 나중에 제가 전화드리…….”
― 너 거기 사장님이랑 같이 있지?
“네?”
― 원호 씨랑 같이 있냐고.
“네, 그런데요.”
― 어쨌든 일단 나와. 내가 데리러 갈게.
“근데 지금 시간이…….”
― 늦었지. 늦었으니까 데리러 간다잖아. 나와서 전철역 앞에 있는 버거킹 같은 데라도 들어가 있어. 알았지? 나 지금 출발한다?
“아뇨, 잠깐…….”
― 도착해서 전화할게. 20분 정도면 될 거야.
뭐라 대답할 겨를도 없이 전화가 끊어졌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선희가 들어왔다.
“제가 너무 늦었죠?”
처음 들어설 때의 향기가 일순간에 무너진 느낌이다. 선희가 낯설고 내 앞에 마주 앉은 원호라는 이 사람은 더욱 그렇다.
“사장님이랑 얘기 좀 했어?”
“요은 씨 곧 가 봐야 할 거 같은데, 그래도 잠깐 앉아요.”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너 갈 거야?”
“응. 연화 언니가 방금 전화하셨는데…….”
“그래, 아주 난리더라. 너 여기 데려왔다고 나더러 미쳤대.”
그리고 선희의 뒤편으로 또다시 문이 열렸다. 일순간 정적이 흐르고, 문 앞에 선 사람을 본 순간 나보다 더 놀란 것은 선희와 원호라는 그 사람이었다.
“니가 어떻게…….”
고매하신 낭군님께서, 바로 그 문 앞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원규야.”
원규는 신랑의 한국 이름이다.
그러니까 박원호 씨가 내 신랑 박원규의 이름을 부른 거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은 원호라는 사람과 나. 문 앞에 서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박원규.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선희까지.
지금 이 공간의 누구도 이 상황이 편하지 않음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모습이다.
“은아, 집에 가자. 내가 오시라 그랬어, 우리 둘 다 너무 취해서…… 아까 내가 전화받으러 나간 길에 전화해서…… 원규 씨가 걱정할 것도 같고 그래서……. 마침 그…… 근처에 있었나 보네. 이렇게 빨리…….”
선희가 억지로 나를 일으켜 세우며 불이라도 피하려는 사람처럼 서두르고 있다.
“김선희.”
“응? 어, 그래. 얼른 가자. 원규 씨, 은이 코트 좀 부탁해요. 우리는 먼저 나가 있…….”
“놓고 얘기해.”
불쾌한 느낌에 팔을 뿌리치자 이번에는 소매를 잡는다.
“요은아. 술도 많이 마셨고. 술을 내가 너무 많이 마셔서, 운전하기 힘들어서 술 때문에…… 내가…….”
그래 선희야. 횡설수설하는 너처럼 나도 술을 많이 마셔서 헷갈리긴 하네.
그러니까 더더욱 이렇게 나갈 수는 없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차곡차곡 정리해 봐야지.
“원규 씨, 찾느라고 고생했겠어요. 내가 요 앞에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나…… 날씨가 너무 추워서.”
허겁지겁 정신없이 둘러대는 선희의 말을 믿기에는 너무 언밸런스한 상황이다.
신랑에게 직접 전화해서 여기로 불러냈다는 선희가 필요 이상으로 당황하는 것도 그렇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저 인간이 나를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옴짝달싹 못 하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저 사장이라는 사람이 원규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모두 하나같이 입술이 달라붙은 것처럼 어버버거리는데, 나까지 그래서야 쓰나.
“선희한테 전화받고 온 거야?”
아닌 걸 알고 있다.
신랑의 사무실이 있는 도곡동에서 이태원까지는 최소 30분 거리고, 선희의 말대로 초행길이라면 대로에서 한참 떨어져 뒷골목 후미진 곳에 숨어 있는 여기까지 한걸음에 찾아오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니가 왜 여기 있어?”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센스는 여전하구나.
“왜? 내가 못 올 데라도 왔어?”
“일단 나와.”
술이 과해서 환영이 보이는 건가?
신접살림을 차린 아파트보다 여기 있는 신랑의 모습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 건 착각일까?
서재 한쪽의 붙박이장에서 내 코트를 집어 든 모습이 어젯밤 안방 옷장에서 단추 달린 남방을 겨우 찾아 줬던 때와는 판이한 느낌이다. 마치 자기 옷장에서 옷을 꺼내는 사람처럼 자연스럽다.
“원규야 잠깐 앉…….”
“됐어요.”
닥치라는 말이 나을 정도로 차가운 한마디에 원호라는 사람이 시선을 떨어뜨린 채 입을 닫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눈빛에 깃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보고 말았다.
차라리 눈을 감고 있었더라면 좋았을걸. 왜 저렇게 슬픈 목소리로 원규를 부르는 걸까. 왜 저렇게 슬픈 눈빛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는 거지?
당신은 원규한테 뭐고, 또 원규는 당신한테 뭐야?
“빨리 나와.”
자정을 알리는 왕궁의 괘종시계처럼, 이제 모든 마법이 끝났으니 예전으로 돌아가라는 듯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연화 언니다. 언니는 이 상황을 예상했던 걸까?
“어떻게 아는 사이야?”
원규에게 묻고.
“저 사람을 어떻게 아세요?”
원호라는 사람에게 묻고.
“김선희. 어떻게 된 거야?”
선희에게 물어도, 메아리는커녕 숨소리조차 되돌아오지 않는다.
“은아, 일단 나가서 얘기하자. 원규 씨랑 먼저 나가. 응?”
“입고 빨리 나와.”
원규가 손에 들었던 코트를 신경질적으로 소파에 팽개치고는 문을 나서 버렸다. 어딜 가는데? 네가 이렇게 가 버리면 난 누구한테 설명을 들으라고.
“선희 씨, 어떻게 된 거야.”
뭐? 어떻게 된 거냐고? 지금 이 자리에 나보다 더 어리둥절한 사람이 있는 건가?
“저도 모르겠어요. 원규 씨가 어떻게…….”
선희야, 아무리 당황스러워도 줄은 맞춰 가면서 얘기해야지.
“김선희. 너 지금 장난하니? 니가 불렀다며. 니가 전화해서 오라고 했다며?”
“미…… 미안해 요은아, 일단 나가자. 나가서 얘기하…….”
“두 시간 내내 니네 남편, 니네 신랑이라더니…… 저 사람 이름 알고 있었네? 니가 직접 전화해서 불러냈다는 사람이 여기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고?”
아니겠지. 아닐 거다. 아니어야 한다. 원규가 여기 모인 사람들과 같은 부류여서는 안 된다.
“요은 씨 오해하지 말아요. 선희 씨가 당황해서 그런 거예요. 나랑 원규는 아무…….”
“사장님!!”
비명에 가까운 선희의 목소리가 거슬리는 메아리를 만들며 귀청을 찍어 댔다.
“나가자 요은아. 일단 나가서…….”
“손 놔.”
“미안해, 미안해 요은아.”
“손, 놓으라고 했지?”
선희의 손을 뿌리치며, 복잡한 이 상황도 함께 뿌리치고 싶었다.
“차 잘 마셨어요.”
그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다.
“가 보겠습니다.”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있는 힘껏 코트를 움켜쥐고 사무실을 나서려는 찰나,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선희의 손길보다 강한 힘으로 나를 붙들었다.
“언제든지 와도 좋아요.”
언제든지 와도 좋다는 건, 언제든 해명할 수 있다는 건가? 그러니까 고쳐 말하면, 해명할 뭔가가 있다는 건가?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이 정도면 답으로 충분한가?
추위에 떨고 있는 게 아님을 알면서도 코트를 더 깊이 여몄다. 가파른 계단을 지나 문을 빠져나오자 홀에 가득 배인 짙은 담배 연기와 알코올 향이 코를 찌른다.
“원호예요. 박원호.”
“네에.”
“아까는 음악 소리가 너무 컸죠?”
“네, 약간.”
또 말문이 막혔다.
“내가 너무 편하게 대해서 난감하죠?”
돌아서는 그의 손에 투명한 유리잔이 들려 있다. 가서 받아 들어야 하나 어쩌나 고민하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뇨, 앉아 있어요. 술기운 돌아서 어지러울 텐데.”
“괜찮아요.”
일어선 채로 그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봤다. 차갑게 생긴 외모에서 저렇게 따뜻한 미소가 나올 수 있다니.
차가운 곳에 있다가 뜨거운 벽난로 앞에 선 것처럼 몸을 감싸는 온기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가만 보니 따뜻한 게 아니라 아찔한 웃음이다.
찻잎이 깊게 우러난 찻잔을 앞에 두고 말없이 시계 소리만 듣고 있다. 선희는 도대체 누구한테서 걸려 온 무슨 전화를 받느라고 이렇게 늦는 걸까.
“걱정 말아요. 여기 선희 씨 아지트나 마찬가지니까.”
내가 힐끔힐끔 문 쪽을 살피고 있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선희 씨보다 내가 더 궁금하지 않아요?”
이건 또 무슨 말씀인가.
사실 조금, 아니 많이 궁금하긴 하지만 본인 입으로 저렇게 말하는 걸 들으니 어이가 없다기보다는 실망스럽다. 그에게서 느꼈던 겸손함과 따스함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느낌이랄까.
“선희 씨가 여기 처음 왔던 게 한 4~5년 정도 됐나? 여전히 사장님, 사장님 하기는 해도 남매처럼 지내는 사이예요.”
하지만 곧 그의 목소리와 방 안 가득한 향에 취해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모든 경계심을 풀었다.
“선희 씨가 처음에 왔을 때는 공식적으로는 여자 손님을 안 받을 때였는데.”
여자 손님을 안 받았다는 건, 역시 내가 생각했던 그런 업소라는 얘긴가?
“직원한테 얘기를 듣고 내려갔더니 연화 소개로 왔다면서 한 잔만 마시고 조용히 가게 해 달라는 거예요.”
얼마 전에 연화 선배가 소개시켜 준 곳이라고, 선희가 분명히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4~5년 전을 얼마 전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건가?
“데킬라를 혼자서 10잔도 넘게 마시더라고요. 그 후에도 가끔 왔고요. 그때만 해도 내가 bar에 있을 때거든요. 평일에는 손님이 없으니까 가끔 같이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그랬어요. 원래 선희 씨가 글 쓰는 줄도 몰랐는데, 책 한 권을 가지고 와서는 직접 사인한 거니까 잘 간직하래서 알았죠.”
그가 잠깐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그때 처음 요은 씨를 알았어요.”
음? 날 어떻게?
“요은 씨가 쓴 축전이 있었거든요.”
“아― 그 책…….”
기억난다. 인터넷으로만 글을 연재하던 선희가 기말고사를 앞둔 어느 날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나를 불러내 학교를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말했었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는 성실한 선희였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시험 공부가 힘들어서 잠깐 투정하는 것이려니 했다.
그런데 종강 후에 선희는 정말 학교를 그만뒀다. 그 후로 일 년 정도 연락 두절 상태에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선희가 법학관 앞에서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우렁차게 웃던 모습이 아직도 또렷하다.
너무 반가워서 한참을 두들겨 팼다. 고등학교 때부터 4년 넘게 붙어 다니다가 갑자기 학교를 때려치우고 1년 동안 연락 한 번 없던 야속한 친구가 뜬금없이 나타나 애타게 나를 불러 댔으니 얼마나 기가 차고 괘씸했는지 모른다.
‘나 책 낸다. 근데 니가 축전을 하나만 써 줬으면 좋겠어.’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싶은 일을 찾은 선희가 부럽기도 했고, 주변의 기대를 저버릴 선희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부러움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렇게 한동안 밀고 당기다가 결국엔 축전을 썼다. 선희가 없는 자리에 혼자 남아서 했던 생각들, 나 자신을 투영시켰지만 결코 나처럼 못나지는 않은 사람의 얘기를 썼다.
하지만 내가 선희에게 준 축전은 그 글 하나뿐인데, 벌써 한참 전의 그 글을 이 사람이 읽었단 말인가?
“글 읽고 요은 씨를 꼭 한 번 보고 싶었어요.”
“감사해요.”
감사하다고 말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를 꼭 보고 싶었다니, 내 글이 엉망은 아니었다는 얘기 아닐까?
“글쎄. 감사받을 일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엉망은 아니었던 게 아니었다는 건가? 갑자기 생각이 얽힌 와중에 핸드백 속의 휴대폰이 진동하며 정신을 깨웠다.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정신없이 핸드백을 뒤져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신랑한테 걸려 온 전화이길 바랐다.
싸우고 나왔으니 날 걱정해 주기를 바랐다거나, 먼저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해 주길 바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신랑에게 미안했다. 생각해 보니 한 번도 그 사람을 편하게 해 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지금 내 앞의 저 사람이 처음 보는 나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서 느꼈다.
낯선 사람의 친절에도 이렇듯 편해지는데, 나는 왜 결혼까지 한 그 사람에게 친절한 적이 없는지.
신혼 첫날밤 잘못 끼운 단추 때문에 항상 감정을 독촉하듯 했던 건 아닌지. 그런 생각 때문에 진심으로 신랑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발신인은 신랑이 아니라 연화 언니였다.
신랑이라면 양해를 구하기도 전에 통화 버튼을 눌렀겠지만, 신랑이 아니라면 경우가 달랐다. 어쨌든 대화 중이었으니 상대방에게 예의를 차려야 하지 않겠는가.
“급한 전화예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먼저 말했다.
“아뇨. 아니에요.”
급한 전화일 수가 없었다. 결혼 후, 아니 결혼 전부터 연화 언니와는 연락이 뜸했다. 정확히는 내가 그 사람과 결혼을 결심한 다음부터였다.
연화 언니는 내 결심에 이상하리만치 회의적이었고, 만남이 짧을수록 신중해야 한다며 그 사람과 나의 결혼을 만류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고, 결혼식 당일에도 언니는 신부 하객석이 아니라 신랑 하객석에 앉았다.
“말씀 중에 죄송해요.”
발신이 끊긴 것을 확인하고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순간 다시 진동이 시작됐다. 이번에도 역시 발신인은 연화 언니였다.
“급한 일인 거 같은데 받으세요.”
“괜찮아요.”
괜찮다는 나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끈질기게 진동하는 휴대폰.
“일단 받으세요. 내가 더 신경 쓰여서 그래요.”
“그럼 잠깐 실례할게요.”
무슨 일로 전화한 걸까.
“여보세요.”
― 요은아, 나야.
다급한 목소리다.
“네. 안녕하세요.”
― 너 선희랑 이태원에 있다면서?
“네?”
― 빨리 거기서 나와. 나와서 다른 데로 가 있어.
“예?”
― 거기 있지 말라고. 대체 거길 왜 갔어?
당황스럽다.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느닷없이 빨리 여길 떠나라는 것도 그렇고.
― 요은아?
“네, 언니.”
― 얼른 나와.
“저 죄송한데, 지금은 통화하기 힘들어요. 나중에 제가 전화드리…….”
― 너 거기 사장님이랑 같이 있지?
“네?”
― 원호 씨랑 같이 있냐고.
“네, 그런데요.”
― 어쨌든 일단 나와. 내가 데리러 갈게.
“근데 지금 시간이…….”
― 늦었지. 늦었으니까 데리러 간다잖아. 나와서 전철역 앞에 있는 버거킹 같은 데라도 들어가 있어. 알았지? 나 지금 출발한다?
“아뇨, 잠깐…….”
― 도착해서 전화할게. 20분 정도면 될 거야.
뭐라 대답할 겨를도 없이 전화가 끊어졌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선희가 들어왔다.
“제가 너무 늦었죠?”
처음 들어설 때의 향기가 일순간에 무너진 느낌이다. 선희가 낯설고 내 앞에 마주 앉은 원호라는 이 사람은 더욱 그렇다.
“사장님이랑 얘기 좀 했어?”
“요은 씨 곧 가 봐야 할 거 같은데, 그래도 잠깐 앉아요.”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너 갈 거야?”
“응. 연화 언니가 방금 전화하셨는데…….”
“그래, 아주 난리더라. 너 여기 데려왔다고 나더러 미쳤대.”
그리고 선희의 뒤편으로 또다시 문이 열렸다. 일순간 정적이 흐르고, 문 앞에 선 사람을 본 순간 나보다 더 놀란 것은 선희와 원호라는 그 사람이었다.
“니가 어떻게…….”
고매하신 낭군님께서, 바로 그 문 앞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원규야.”
원규는 신랑의 한국 이름이다.
그러니까 박원호 씨가 내 신랑 박원규의 이름을 부른 거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은 원호라는 사람과 나. 문 앞에 서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박원규.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선희까지.
지금 이 공간의 누구도 이 상황이 편하지 않음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모습이다.
“은아, 집에 가자. 내가 오시라 그랬어, 우리 둘 다 너무 취해서…… 아까 내가 전화받으러 나간 길에 전화해서…… 원규 씨가 걱정할 것도 같고 그래서……. 마침 그…… 근처에 있었나 보네. 이렇게 빨리…….”
선희가 억지로 나를 일으켜 세우며 불이라도 피하려는 사람처럼 서두르고 있다.
“김선희.”
“응? 어, 그래. 얼른 가자. 원규 씨, 은이 코트 좀 부탁해요. 우리는 먼저 나가 있…….”
“놓고 얘기해.”
불쾌한 느낌에 팔을 뿌리치자 이번에는 소매를 잡는다.
“요은아. 술도 많이 마셨고. 술을 내가 너무 많이 마셔서, 운전하기 힘들어서 술 때문에…… 내가…….”
그래 선희야. 횡설수설하는 너처럼 나도 술을 많이 마셔서 헷갈리긴 하네.
그러니까 더더욱 이렇게 나갈 수는 없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차곡차곡 정리해 봐야지.
“원규 씨, 찾느라고 고생했겠어요. 내가 요 앞에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나…… 날씨가 너무 추워서.”
허겁지겁 정신없이 둘러대는 선희의 말을 믿기에는 너무 언밸런스한 상황이다.
신랑에게 직접 전화해서 여기로 불러냈다는 선희가 필요 이상으로 당황하는 것도 그렇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저 인간이 나를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옴짝달싹 못 하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저 사장이라는 사람이 원규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모두 하나같이 입술이 달라붙은 것처럼 어버버거리는데, 나까지 그래서야 쓰나.
“선희한테 전화받고 온 거야?”
아닌 걸 알고 있다.
신랑의 사무실이 있는 도곡동에서 이태원까지는 최소 30분 거리고, 선희의 말대로 초행길이라면 대로에서 한참 떨어져 뒷골목 후미진 곳에 숨어 있는 여기까지 한걸음에 찾아오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니가 왜 여기 있어?”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센스는 여전하구나.
“왜? 내가 못 올 데라도 왔어?”
“일단 나와.”
술이 과해서 환영이 보이는 건가?
신접살림을 차린 아파트보다 여기 있는 신랑의 모습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 건 착각일까?
서재 한쪽의 붙박이장에서 내 코트를 집어 든 모습이 어젯밤 안방 옷장에서 단추 달린 남방을 겨우 찾아 줬던 때와는 판이한 느낌이다. 마치 자기 옷장에서 옷을 꺼내는 사람처럼 자연스럽다.
“원규야 잠깐 앉…….”
“됐어요.”
닥치라는 말이 나을 정도로 차가운 한마디에 원호라는 사람이 시선을 떨어뜨린 채 입을 닫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눈빛에 깃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보고 말았다.
차라리 눈을 감고 있었더라면 좋았을걸. 왜 저렇게 슬픈 목소리로 원규를 부르는 걸까. 왜 저렇게 슬픈 눈빛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는 거지?
당신은 원규한테 뭐고, 또 원규는 당신한테 뭐야?
“빨리 나와.”
자정을 알리는 왕궁의 괘종시계처럼, 이제 모든 마법이 끝났으니 예전으로 돌아가라는 듯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연화 언니다. 언니는 이 상황을 예상했던 걸까?
“어떻게 아는 사이야?”
원규에게 묻고.
“저 사람을 어떻게 아세요?”
원호라는 사람에게 묻고.
“김선희. 어떻게 된 거야?”
선희에게 물어도, 메아리는커녕 숨소리조차 되돌아오지 않는다.
“은아, 일단 나가서 얘기하자. 원규 씨랑 먼저 나가. 응?”
“입고 빨리 나와.”
원규가 손에 들었던 코트를 신경질적으로 소파에 팽개치고는 문을 나서 버렸다. 어딜 가는데? 네가 이렇게 가 버리면 난 누구한테 설명을 들으라고.
“선희 씨, 어떻게 된 거야.”
뭐? 어떻게 된 거냐고? 지금 이 자리에 나보다 더 어리둥절한 사람이 있는 건가?
“저도 모르겠어요. 원규 씨가 어떻게…….”
선희야, 아무리 당황스러워도 줄은 맞춰 가면서 얘기해야지.
“김선희. 너 지금 장난하니? 니가 불렀다며. 니가 전화해서 오라고 했다며?”
“미…… 미안해 요은아, 일단 나가자. 나가서 얘기하…….”
“두 시간 내내 니네 남편, 니네 신랑이라더니…… 저 사람 이름 알고 있었네? 니가 직접 전화해서 불러냈다는 사람이 여기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고?”
아니겠지. 아닐 거다. 아니어야 한다. 원규가 여기 모인 사람들과 같은 부류여서는 안 된다.
“요은 씨 오해하지 말아요. 선희 씨가 당황해서 그런 거예요. 나랑 원규는 아무…….”
“사장님!!”
비명에 가까운 선희의 목소리가 거슬리는 메아리를 만들며 귀청을 찍어 댔다.
“나가자 요은아. 일단 나가서…….”
“손 놔.”
“미안해, 미안해 요은아.”
“손, 놓으라고 했지?”
선희의 손을 뿌리치며, 복잡한 이 상황도 함께 뿌리치고 싶었다.
“차 잘 마셨어요.”
그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다.
“가 보겠습니다.”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있는 힘껏 코트를 움켜쥐고 사무실을 나서려는 찰나,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선희의 손길보다 강한 힘으로 나를 붙들었다.
“언제든지 와도 좋아요.”
언제든지 와도 좋다는 건, 언제든 해명할 수 있다는 건가? 그러니까 고쳐 말하면, 해명할 뭔가가 있다는 건가?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이 정도면 답으로 충분한가?
추위에 떨고 있는 게 아님을 알면서도 코트를 더 깊이 여몄다. 가파른 계단을 지나 문을 빠져나오자 홀에 가득 배인 짙은 담배 연기와 알코올 향이 코를 찌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