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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그리고 끝없이 얽히고설킨 미로처럼 남자들로 혼잡한 그곳을 나오면서 이곳이 처음부터 평범해 보이지 않았던 이유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본 것과 내가 들은 소리들을 되새기는 것조차 불결하다.
한밤중의 은밀한 모임을 감추기 위한 시끄러운 음악. 그리고 그 음악보다 더 과장된 사람들의 헤픈 몸짓과 경박한 웃음소리.
홀을 지나 입구를 나서자 차가운 바람이 뺨을 때리고, 어느새 나를 앞지른 선희가 흘러내리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내 앞을 막아섰다.
“요은아.”
“비켜.”
“한요은.”
“비키라고.”
다 듣기 싫다. 나 때문에 불렀다고 변명한 것은 기실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본인이 원해서 온 거고, 박원규 역시 여기 있는 다른 남자들과 같은 부류겠지.
“나 왜 데려왔어?”
“요은아.”
“넌 알고 있었지? 왜 모른 척했어? 왜 놀라는 척했니?”
“그런 거 아니야.”
“우스웠겠다.”
“다 말할게. 그러니까 일단…….”
“얼마나 우스웠겠어. 되지도 않는 사람이랑 결혼해서 되지도 않을 일 때문에 전전긍긍했으니.”
“그런 게 아니라니까!”
왜 네가 울어. 지금 울고 싶은 사람이 누군데.
아니, 난 이제 눈물도 안 나온다. 이 어이없는 상황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신이 된 거다.
“아니야 요은아. 원규 씨는 그런 사람 아닐 거야.”
“그런 사람? 너 지금, 그런 사람이라고 했니?”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어디든 들어가자. 가서 얘…….”
“손 놔.”
오물을 털어 내듯 선희를 뿌리치고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서 걸음을 가누기 힘들어 난간이라도 붙들고 싶었지만, 이 더러운 공간에 있는 무엇에도 손대고 싶지 않았다.

* * *


거스름돈을 받는 것도 잊은 채 택시에서 내리니 어둠보다 깊은 침묵이 아파트 단지를 감싸고 있었다.
신랑이 이태원에 있거나 아예 집에 들어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의 쿠페가 이미 공동 현관 근처에 주차돼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그의 실루엣이 어렴풋한 가로등에 비치고 있다.
어떻게 엘리베이터를 탔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 보니 15층이었고 그가 나보다 한참 뒤에 들어오기를 바라며 현관에 기대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내려갑니다.’라는 친절한 안내 음성이 들려왔다.
“하아―”
이제 곧 그가 올라올 거라 생각하니 감당할 수 없는 한기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무슨 말을 듣게 되든 지금보다 더 끔찍한 상황이 될 것 같다.
몸뚱이를 지탱하는 것조차 힘겨운 두 다리를 질질 끌어가며 안방에 들어서서 문을 잠갔다. 변명하는 모습도, 감당할 수 없는 사실을 인정하는 모습도……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고,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다.
“왜 하필이면…….”
힘없이 무너진 두 다리 위로 창가의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슴푸레한 조명에 비친 침실의 모습이 괴물의 배 속처럼 끔찍하다.
문밖에 느껴지는 인기척에 몸을 웅크리며, 제발 이쪽으로는 오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그가 어디 내 마음대로 한 번이나 움직였던 사람인가.
한 번. 또 한 번. 그렇게 여러 차례 손잡이를 돌리는 것이 느껴진다.
철컥― 철컥― 소리가 날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다. 제발…… 그냥 서재로 들어가 주면 안 될까?
“문 열어.”
명령하듯 말하지 마.
“한요은, 문 좀 열어 봐.”
그리고 그 입에 내 이름 담지도 마.
“한요은.”
한 번도 이름을 불러 준 적이 없던 사람인데,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벌써 몇 번째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평생 부를 이름을 한 번에 다 부르고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말할 작정인가?
“혼자 있고 싶어.”
“문 열고 얘기해.”
“니 방으로 가라고.”
지금 널 마주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르니까 나중에 얘기하자.
“니가 안 열면 억지로 여는 수밖에 없어.”
“혼자 있겠다잖아! 제발!”
발소리가 잦아드나 싶더니 이내 건너편이 잠잠해지고 또 다른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린 후 완벽한 정적이 흘렀다. 그래, 제발 부탁이라는데 한 번은 들어줘야지.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또 다른 소리에, 내 바람은 하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문고리를 흔드는 금속성에 몸서리치며 앉은 채로 문을 막으려고 안간힘 쓰는 내 모습이…… 너무 비참하다.
“비켜.”
“뭐 하는 거야!!”
“그대로 있으면 다치니까 비키라고.”
“가만히 좀 내버려 두라고 제발!!”
문이 안으로 열리자 묵직한 느낌과 함께 몸뚱이가 밀려나고 말았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붙든 것이 미안했는지 나를 부축하려는 그의 손길을 차갑게 뿌리치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얘기 좀 해. 잠깐이면 돼.”
“난 할 얘기 없는데, 넌 갑자기 할 얘기가 많이 생겼나 보네?”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되겠어?”
“분명히 얘기했을 텐데. 할 얘기 없다고.”
“그럼 듣기만 해.”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들을 주워 담듯 주섬주섬 몸을 챙겨 침대에 앉기까지,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하고 싶으면 실컷 해. 대신…… 내가 듣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
코트를 입은 채 침대로 기어들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없어.”
넌 참…… 쿨해서 좋겠다.
“걱정 마. 아무 생각도 안 하니까.”
“근데 형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면, 그건 실례야.”
박원호를 오해하지 마라? 결국 하고 싶은 말이 그거였어? 왜 너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 건데? 난 너한테 그럴 가치조차 없는 인간이니?
“좋은 사람이야.”
“그래, 알겠어. 알겠으니까 그만해.”
“너 똑똑하고 생각 많은 애니까 괜한 오해,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오해?”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앉아서 원규를 노려봤다.
“방금 오해라고 했어?”
“나 외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말이야.”
“그럼 너에 대해서는 오해해도 상관없고?”
주체할 수 없던 한기가 한꺼번에 밀려 나가고 가슴 언저리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이 혀뿌리를 녹여 버릴 듯 무섭게 속을 쳐 댄다.
“오해라고? 내가 널 오해하고 있다는 소리야? 근데 그건 어떻든 상관없다는 소리야?”
“그래.”
“야…… 박원규.”
이 말만은 하기 싫었다. 말을 하고 나면, 그도 나도 상처받을까 봐 두려웠다. 아니, 내 상처를 내가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할까 봐 두렵고 또 두려웠다.
“너 그런 거 아니야?”
“돌려서 말하면 못 알아들어.”
그래, 상처에 소금을 뿌려 달라면 기꺼이 그렇게 해 줘야지.
“박원규 너…….”
그러면서도 원규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 주기만을 바랐다. 혀뿌리를 요란하게 치대는 뜨거운 기운이 내 혓바닥을 흔적도 없이 녹여 버렸으면 좋겠다.
“호모잖아.”
나를 보는 그의 시선에 경멸이 가득했다. 어쩌면 그를 보는 나의 시선이 그의 눈에 비춰진 건지도 모른다.
“이게 오해니? 넌 정상인데 내가 널 오해하고 있는 거야?”
“말, 가려서 해.”
“왜? 호모라는 말이 듣기 싫어? 그럼 뭐라고 해 줄까? 게이? 아니면, 동성애자?”
“한요은!”
“내가 그렇게 우스웠어? 내가 그저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한심한 인간으로 보이디?”
“그런 식으로 말하…….”
“시끄러! 지금 이 상황에 니 기분까지 맞춰 줄까?”
“나한테 맞춰 준 적이 있기는 하고?”
그래, 끝까지 한번 가 보자.
“거지 동냥 주듯 나랑 결혼했니? 그런데 도저히 안 되겠어? 그래서 매일 밤마다 이태원에 들락거렸어? 그런 거 아니야? 이게 오해야? 그래?! 이게 너에 대해서 내가 하고 있는! 너랑은 아무 상관 없는 오해냐고!”
왜 그런 슬픈 표정을 짓는 건데. 왜 더한 말로 상처 주지 않고 그냥 돌아서는 건데.
“용서 못 해.”
“너한테 용서 빌 만큼 잘못한 거 없어.”
그럼 아니라고 해 줘. 넌 아니라고. 내가 잘못 안 거라고. 왜 너에 대해서는 한마디 변명도 없는 건데? 왜 부정하지 않는데, 왜!
덧없이 닫혀 버린 문 너머로 원규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제 저 문을 열고 나가서 아무리 용서를 빌어도 소용없겠지. 하지만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뭘 잘못했는지, 정말 모르겠다.

* * *


몸을 죄는 갑갑함에 눈을 떠 보니 코트를 입은 채였다. 차라리 어젯밤 일이 끔찍한 악몽이기를 바랐기에 코트를 그대로 입고 있는 내 모습에 억장이 무너지고 만다.
기억에 뚜렷한 독기 어린 말들. 그리고 말없이 돌아서던 원규의 모습까지, 모든 것들이 너무 생생하다.
누운 자리를 보니 아마도 원규는 어제 나간 후로 방에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나란히 누울 수 있을까.
그런 말을 해 놓고 어떻게 나란히 눕기를 바랄까. 서재에 있으려나? 아니, 어제 방을 나선 후 곧장 집을 나갔을지도 모른다.
집을 나가 어디로 갔을까?
몸을 일으켜 한동안 방문을 바라보다 다시 자리에 누웠다. 침대 밖이 천 길 낭떠러지처럼 느껴져 도저히 발을 디딜 용기가 나질 않는다.
갈수록 의식이 또렷해지고 기억하기 싫은 장면들이 각막을 스크린 삼아 눈앞에 아른거린다. 쉴 틈 없이 울리는 휴대폰을 꺼 버릴까도 싶지만 그마저도 귀찮다.
뜬눈으로 침대 시트의 격자무늬를 따라 미로를 그리기 시작했다. 바느질이 엉성한 곳을 통로 삼아 벌써 몇 바퀴째 돌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도 휴대폰은 끊이질 않고 울려 댄다. 단념을 모르는 연화 언니에게 한 번은 져 줘야 할 것 같다.
“여보세요.”
― 요은아.
“네.”
― 연락 안 돼서 걱정했어.
“죄송해요. 어젠 전화받을 상황이 아니었어요.”
지금도 전화받을 상황은 아니다.
― 집에 있니?
“네.”
― 오늘 시간 어때?
“오늘이요?”
― 무리할 건 없고.
“오늘은 힘들 거 같아요.”
― 원규는? 출근했어?
레온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언니가 신랑을 한국 이름으로 부르니 적응이 안 된다.
“모르겠어요.”
― 어제 혹시 다퉜니?
“아뇨. 그 사람 아무 말도 않던데요.”
어색한 침묵이 싫다.
“사장님에 대해서 괜한 오해…… 하지 말래요. 그게 전부였어요.”
― 원규 너무 다그치지 마.
왜들 이러지. 정작 본인은 자신에 대해 아무 해명도 않는데, 선희나 박원호라는 사람이나 연화 언니는 원규를 변호하지 못해서 안달이다.
― 오늘 힘들면 내일이라도 내가 갈게.
“언니.”
― 응, 그래.
“제가 나중에 전화드릴게요.”
― 요은아.
그래, 나다. 한요은. 내가 한요은이다. 안 까먹었으니 그만 좀 불렀으면 좋겠다.
― 미안해.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차라리 난처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는 편이 낫다.
― 원규한테서 들었어야 되는데.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어야 한다는 소린가. 아니면, 그런 성향을 가졌다는 걸 직접 들었어야 한다는 소린가.
― 조금 더 생각해 보라고 했잖아.
언니는 이 결혼을 극구 반대했던 사람이다. 너무 이르다, 신중하지 못하다며 말리던 언니는 결국 내 결혼을 현실도피로 치부해 버렸다.
그게 너무 불쾌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고, 그러다 아예 소식마저 끊겨 버렸다. 하지만 굳이 이런 상황에 저런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정말 나를 걱정했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다 말했어야 옳다. 지금 와서 아무리 미안하다, 모두 말하겠다고 한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 모레는 시간 어때?
“아뇨.”
복에 겨운 박원규는 대변인들 많아서 참 좋겠다.
“제가 전화드릴게요. 당분간은 전화하지 마세요.”
널 위해 나한테 전화해 줄 사람은 됐으니 날 위해 너한테 전화해 줄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죄송해요.”
이런 상황에서도 원규를 온전히 단념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우습다.
“먼저 끊을게요.”
더 이상 누구의 연락도 받고 싶지 않다.
“목석이랑 살면서 백 일 가까이 생가슴만 태운 거네.”
기뻐해야 옳은가? 문제는 나한테 있는 게 아니었다고. 정상적인 남자였다면 차고 넘치게 나를 사랑해 줬을 거라고. 그렇게라도 위안을 해야 하나?

* * *


473926*
엄마의 비밀번호는 언제나 똑같다. 아버지 생신 4월 7일, 오빠 생일 3월 9일, 그리고 나 2월 6일.
띠리―릭―
엄마의 향기로 포근한 현관에 서자 갑자기 서러움이 복받쳐 이를 악물었다.
엄마 앞에서는 절대 울면 안 되는데, 벌써부터 눈시울이 따가우면 어쩌자고. 급한 대로 눈을 크게 뜨고 입김을 위로 불어 눈자위를 식히며, 날씨가 제법 쌀쌀하니 바람을 핑계 대도 되겠지 생각하는 중이다.
“은아?”
“엄마.”
억지로 웃은 웃음을 들키지는 않았겠지.
“문 여는 소리가 나서 누군가 했네. 이 시간에 어떻게 왔어?”
엄마가 내 어깨 너머로 이미 닫혀 있는 현관문을 바라본다. 아마도 원규가 같이 왔나 싶은 모양이다.
“혼자 왔어요.”
“그래. 추운데 얼른 들어와.”
엄마가 웃는다. 한참 사춘기 때, 난 엄마가 웃는 걸 참 싫어했다. 온전히 웃는 모습이 아닌 슬픔이 묻어나는 엄마의 웃음이 싫었다. 엄마의 웃음은 여전히 슬프다.
그런데 문득, 엄마의 웃음이 슬픈 게 아니라 엄마를 보는 내가 슬펐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난 여전히 슬픈가 보다.
“뭐 하고 있었어요?”
“그냥…….”
대강 신발을 벗어 던지고 거실로 들어서자, 늦은 시간까지 잠자는 것도 잊은 채 엄마가 보고 있던 비디오가 시선을 붙들었다.
“엄마…… 저거.”
화면 가득 사람들이 보이고 이제 막 신랑이 입장하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