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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하얀 셔츠에 진회색 조끼를 받쳐 입고 검은 연미복 재킷을 입은 원규가 보인다. 예식이 있던 날, 도우미 아주머니가 신랑이 긴장한 모양이라며 걱정을 많이 했었다.
웨딩숍에서 나온 도우미라 드레스를 나 혼자 고르러 갔던 걸 알고 있었기에, 본식 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보고도 감탄하지 않는 신랑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거다.
“어디서 났어요?”
신부가 입장하는 장면. 아버지의 손을 얌전히 잡고 어깨를 가린 베일이 뒤로 넘어갈까 잔뜩 긴장하고 있는 내가 보인다.
저 길을 들어설 때는 원규에 대한 믿음으로 행복했다. 주지도 않은 믿음을 혼자 가졌던 거다.
곧이어 카메라가 하객석의 왼편을 비추자 엄마가 빠진 자리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계신 어머니가 보인다. 난 저 자리에 앉아야 했던 엄마가 어디 있었는지 알지도 못하는 무심한 딸이다.
“어쩐 일이야, 이 시간에.”
엄마가 서둘러 정지 버튼을 눌렀다.
“계속 봐요. 나도 본 적 없어.”
“나중에 보면 되지.”
“계속 봐 엄마.”
“됐어. 그냥 장식장 정리하다가 집이 너무 조용해서 틀어 둔 거야.”
“내가 보고 싶다니까 그래.”
엄마 손에 있던 리모컨을 재촉해 재생 버튼을 누르자 이제 막 주례사가 시작됐다.
예식 중에 주례사가 있는 내내 앞으로 뒤로 오락가락하는 카메라맨이 상당히 신경 쓰였는데, 편집된 영상으로 보니 풀샷에 바스트샷에 백샷까지 상당히 매끄럽게 연결돼 있다. 카메라워킹으로만 보면 드라마 촬영감독이 찍은 줄 알게 생겼다.
카메라가 포디움에서 객석을 넓게 비추자 신부 하객석 앞쪽에 앉은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띈다. 포커스를 빨리 옮겨 줬으면 좋겠다.
엄마와 나란히 앉아 부모님석의 어머니 모습을 보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다. 그러게, 엄마가 그만 보겠다고 했을 때 말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잠깐 보고 있어. 과일 좀 가져올게.”
엄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
끄려던 걸 억지로 켰으니 이제 와서 그만 보잘 수도 없고, 그저 객석을 비춘 카메라 포커스가 얼른 바뀌기만을 바라고 있다는 걸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신 거다.
죄송하다고 말하면 더 마음 아파하실 걸 알기에 조용히 엄마를 따라 일어섰다.
앞서가는 엄마의 어깨가 오늘따라 유난히 왜소해 보인다. 진작 왔어야 했는데, 원규를 핑계로 집구석에 틀어박혀 있었던 시간이 아깝기만 하다.
“세훈이가 가져왔어.”
주방에 들어서 냉장실 문을 연 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응?”
“본가에도 하나 드리고 여기로도 하나 가져온 거 같던데, 몰랐어?”
엄마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룬 가정을 ‘본가’라고 표현하신다.
“나만 가지고 있는 줄 알았어.”
본식 촬영 옵션에서 편집본을 한 개로 정한 이유는 비용 때문이 아니었다. 어차피 본가에 드려도 따로 보실 것 같지는 않고, 자리를 뺏겨 버린 엄마한테는 차마 줄 수가 없었다.
웨딩플래너가 스케줄링 해 놓은 리스트에 본식 촬영이 포함되지 않았다면 따로 찍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다.
결혼을 앞두고 예식 준비에 정신이 없을 무렵, 오빠가 웨딩플래너의 연락처를 달라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런데 이게 과연 오빠한테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는 모르겠다. 엄마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걸까? 엄마 자리에 앉은 어머니를 봐도 괜찮은 걸까?
“사진도 그렇고, 다 예쁘게 잘 나왔어. 나중에 다은이도 거기서 하면 좋겠더라.”
엄마 배 아파 낳은 자식도 아닌데 언니 결혼까지 걱정하는 건가. 엄마를 봐도 인사조차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언니를?
“알아서 하겠죠.”
“다은이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다니?”
“몰라요. 연락 안 한 지 오래됐어.”
“전화 자주 드리고 가끔 찾아뵙기도 하고 그래야지.”
“출가외인이라잖아. 나 이제 그 집 식구 아니에요.”
식탁 앞에 앉아 단감을 깎고 있던 엄마가 손을 멈추고 나를 본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어머니가 너한테 어떻게 하셨는데.”
그래, 어머니는 나한테 정말 잘해 주셨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차라리 마음껏 미워할 수라도 있다면 좋았을 텐데,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친가와 외가 사이에서 어머니는 항상 내 편이 돼 주셨다.
하지만 철이 들면서부터 어머니의 자애로움에 감사할 수만은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됐다. 어머니께서 나에게 주신 것은 상처가 나지 않도록 하는 ‘사랑’이 아니라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하는 ‘배려’였다.
“나도 알아요.”
유림의 도시 충청남도 공주, 그곳을 뿌리 삼아 가문을 일궈 온 한씨 종가. 종가의 맏며느리가 되신 어머니는 일 년에도 서른 번이 넘도록 제사상을 준비하셔야 했다.
그 정도로 친가 식구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빈번한 정도가 아니라 매달 한 번은 꼭 집안 가솔들이 모여 식사를 했다.
종가의 장손인 아버지가 밖에서 데려온 오빠와 나는 당연히 문중(門中)의 수치였다. 할아버지께서 문중의 대표인 문장(門長)이 되신 후에는 더욱 그랬다. 문중 총회인 화수회(花樹會)가 열릴 때마다 문중원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나한테 정말…… 잘해 주셨어.”
지극히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집안의 분위기를 감당하기에는 난 너무 어렸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어른들이 왜 그렇게 나를 미워했는지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그저 무서웠다.
아무도 내게 손 내밀지 않는 그곳에서 유일한 위안은 바로 어머니였다. 내 눈물이나마 닦아 줄 유일한 분은 오직 어머니뿐이었다.
“은아.”
정신을 차려 보니, 엄마가 예쁘게 담은 과일 접시 위로 포크를 내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정신없이 해.”
“아니, 그냥.”
아― 또…….
“엄마 나 잠깐 화장실.”
“그래, 다녀와.”
어렸을 때나 결혼을 해서나 사랑받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에 잠시 울컥했을 뿐이다. 그냥 그뿐이다. 거울 앞 세면대에 서서 탭을 두드리자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손을 씻듯, 사람의 기억도 씻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미 지난 일이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매번 어렸을 적의 기억에 꼼짝없이 발을 묶이곤 한다.
한때는 결혼만 하면 어린 시절의 악몽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매 순간 행복이 가득해서 우울한 과거 따위는 생각도 안 날 줄 알았다. 시작과 끝은 항상 맞물려 있으니 결혼의 시작은 악몽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고 무엇도 끝나지 않았다. 나를 옭아맨 것들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결혼을 서둘렀음을 깨달은 지금, 한층 더 비참하기만 하다.
“요은아?”
“어―”
“아직 멀었니?”
엄마 앞에서 태연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엄마― 나 잠깐.”
문밖으로 여전히 엄마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금방 나갈게요.”
잠시의 간격을 두고 천천히 나오라는 엄마의 말에 하릴없이 숨이 내려앉았다. 엄마 앞에서 괜찮은 척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불가능한 일인가 보다.
한참 동안 욕실에서 마음을 추스르고 나와 보니 길고 긴 주례사가 끝나고 기념 촬영이 한창이다. 다행히도 가족 촬영이 끝난 다음이었다. ‘친구분들 나와 주세요!’라는 말에 식장 뒤편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난다.
도우미 아줌마는 어깨 뒤로 넘어가는 베일을 매만지느라 분주하고, 나는 뭐가 그리 좋은지 허파에 바람 든 사람처럼 연신 웃고 있다.
어?! 방금 혹시?
되감기 버튼을 누르자, 흔해 보이는 검은 정장을 입었지만 유독 눈에 띄는 그가 원규의 뒤편에 서서 다른 사람들과 자리를 맞춰 가며 옷매무새를 고치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거다. 아니, 내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 어둑어둑한 bar에서 나를 처음 본 게 아니다.
친구들 사진 촬영이 끝나고 송이가 부케를 받는 장면이다. 속사포처럼 터지는 플래시 속에 웃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인 것 같다. 바로 내 옆의 원규는 연신 장내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눈치다.
네가 찾는 사람은 바로 뒤에 있는데, 너도 나름대로 긴장해서 박원호가 어디 있는지 몰랐던 걸까? 아니면 또 다른 연인이라도 불렀나.
“사과 맛있다.”
원규에 대한 생각을 털어 내느라 무심코 뱉은 말이었다. 사실 단감을 먹을 때나 사과를 먹을 때나 질감이 다른 것만 느꼈을 뿐, 이틀 연속 빈속에 술을 마셔서 입이 소태처럼 쓰기만 하다.
“좀 시지 않아? 맛이 덜 든 거 같은데.”
“아니? 잘 모르겠는데.”
엄마가 날 물끄러미 보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왜요?”
“밥 먹고 왔다고 했지?”
“어. 먹었어요.”
먹긴 뭘 먹었다고. 하루 종일 굶었다. 하지만 이미 저녁상을 치운 엄마를 번거롭게 하기도 싫고, 때가 지나도록 굶고 다닌다는 걱정을 들어 가며 혼자 차려 먹기도 싫었다.
“잠깐만.”
“어.”
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신부 대기실로 화면이 넘어가고 2부 순서를 위해서 애프터 드레스로 갈아입는 모습이 실루엣으로 비치고 있다.
검은 그림자 두 개가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에 배경음악이 깔려서 그런지 약간 우스꽝스럽다. 다시 화면이 바뀌고, 하객들의 축하메시지가 나왔다.
몇몇을 제외하면 다 모르는 얼굴뿐이다. 하긴, 공주에서 자라는 내내 놀림감이었으니 친구라 봐야 대학 동창이 전부다.
“은아.”
“어?”
주방에서 나온 엄마가 뭔가를 내밀었다.
“매실차야.”
“매실?”
“응. 본가에서 보내 주신 건데, 맛이 아주 잘 들었더라.”
“별로 생각 없는데.”
빈속에 매실차를 마시면 엄청 부대낄 것 같다.
“조금만 마셔. 몸에 나쁠 거 없어.”
그래, 밥 먹었다고 공갈친 죄를 달게 받아야지.
“네.”
입 안 가득 매실차를 머금었다가 꿀꺽 삼켰다.
“흐음― 흠! 정말 맛이 잘 들었네.”
아― 속이…….
“시지 않아?”
“음?”
“매실엑기스 잔뜩 넣은 건데.”
“그래요? 잘 모르겠는데.”
엄마가 갑자기 옆으로 바짝 앉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제야 나는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듯 간절한 엄마의 손길과는 달리 문득 떠오른 어제의 일들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하아…… 아니야.”
“정말 아니야?”
“아니라니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테스트라도 해 보면 어때?”
“알겠어요. 나중에 해 볼게.”
절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전부 얘기하게 될 것 같아서 대강 얼버무렸다.
“근데 엄마.”
“어, 그래. 얘기해.”
“엄마는…… 어디 있어요?”
“응?”
맞잡은 엄마의 손이 움칫하는 게 느껴졌다.
“엄마 저 날 왔었잖아. 그쵸?”
한요은. 너 참 좋은 딸이구나.
“그냥 좀 뒤쪽에 있었어. 좀 늦어서.”
“뒤쪽에 어디?”
“곧 나올 거야. 잠깐이긴 한데. 조금만 있어 봐.”
집이 조용해서 그냥 틀어 놓은 거라더니 엄마가 어디에 얼마큼 나오는지도 다 아네.
“저 날, 애프터 드레스가 너무 많이 파였더라.”
난처해하며 화제를 돌린 엄마를 위해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응. 그래서 잠깐 대기실에 다녀왔잖아.”
케이크 커팅 후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나에게 조금 올려야겠다고 속삭이는 원규의 모습이 보인다. 화관을 말하는 줄 알고 불편한 듯 엉거주춤 손을 올리자 헛기침을 하더니 머뭇머뭇 드레스 앞섶에 손을 얹는 원규.
장갑을 낀 그의 손이 가슴골에 살짝 닿았을 뿐인데 짓궂은 그의 지인들이 환호성을 올렸고, 그럼에도 푹 파인 앞섶이 정리되지 않자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나를 돌려세웠다.
뒤쪽 여밈이 잘못됐다며 나를 앞세워 대기실로 향하는 도우미 아주머니의 뒤편으로 카메라가 자연스럽게 원규를 따르고 있다.
포디움에서 내려온 그가 큰 걸음으로 내 뒤를 쫓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객석 뒤쪽의 어느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테이블 사이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내 기억에는 없는 일을 영상으로 보고 있자니 왠지 기분이 묘하다. 그런데 누굴까. 누굴 찾고 있었기에 저렇게까지 서두르는 걸까.
나는 바보처럼 시선을 분주히 움직여 모니터 위를 기웃거렸다. 그래 봐야 카메라의 앵글이 허락하는 모습만 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원규의 시선 너머에 있는 사람이 너무 궁그…….
“엄마?”
그가 걸음을 멈춘 곳에 엄마가 있었다.
“응, 어떻게 거기 앉은 걸 알았는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깊이 숙인 원규의 모습은 양가 부모님께 큰절을 올렸던 것만큼이나 깍듯했다. 엄마가 당황해하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원규가 엄마의 손을 마주 잡는다.
“네가 얘기한 거 아니었어?”
엄마에게 인사를 드린 후 주변에는 간단히 묵례만 하고 대기실로 발을 옮기는 걸 보면, 원규는 엄마를 알고 있었다.
정작 딸이라는 인간은 엄마를 보면 메이크업이 다 지워지도록 눈물이 날 것 같아 예식이 진행되는 내내 일부러 하객석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원규는 줄곧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을 엄마를 찾고 있었나 보다.
애써 참았는데, 아직도 흐를 눈물이 남았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은아, 왜 그래?”
“미안. 미안해요 엄마.”
참 이상하다. 박원규를 놓으려 할 때마다 미련을 붙드는 일들이 생기니 말이다.
* * *
추위에 옷을 거듭 여미면서도 한사코 나를 먼저 보내려는 엄마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
“들어가요.”
“그래, 얼른 가.”
“엄마 먼저 들어가래두.”
“난 바로 앞이잖아.”
“빨리 들어가요. 엄마 이러면 나 집에 안 간다.”
“알았다, 알았어. 얘도 참.”
노년의 택시 기사는 그런 모녀의 정이 보기 좋은지 목적지를 묻지도 않은 채 룸미러를 통해 지그시 웃고 있다.
“다음엔 같이 올게요.”
예의 그렇듯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어릴 때부터 석 달에 한 번 엄마에게 다녀갈 때면 이렇게 손을 잡아 보곤 했었다.
하얀 셔츠에 진회색 조끼를 받쳐 입고 검은 연미복 재킷을 입은 원규가 보인다. 예식이 있던 날, 도우미 아주머니가 신랑이 긴장한 모양이라며 걱정을 많이 했었다.
웨딩숍에서 나온 도우미라 드레스를 나 혼자 고르러 갔던 걸 알고 있었기에, 본식 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보고도 감탄하지 않는 신랑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거다.
“어디서 났어요?”
신부가 입장하는 장면. 아버지의 손을 얌전히 잡고 어깨를 가린 베일이 뒤로 넘어갈까 잔뜩 긴장하고 있는 내가 보인다.
저 길을 들어설 때는 원규에 대한 믿음으로 행복했다. 주지도 않은 믿음을 혼자 가졌던 거다.
곧이어 카메라가 하객석의 왼편을 비추자 엄마가 빠진 자리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계신 어머니가 보인다. 난 저 자리에 앉아야 했던 엄마가 어디 있었는지 알지도 못하는 무심한 딸이다.
“어쩐 일이야, 이 시간에.”
엄마가 서둘러 정지 버튼을 눌렀다.
“계속 봐요. 나도 본 적 없어.”
“나중에 보면 되지.”
“계속 봐 엄마.”
“됐어. 그냥 장식장 정리하다가 집이 너무 조용해서 틀어 둔 거야.”
“내가 보고 싶다니까 그래.”
엄마 손에 있던 리모컨을 재촉해 재생 버튼을 누르자 이제 막 주례사가 시작됐다.
예식 중에 주례사가 있는 내내 앞으로 뒤로 오락가락하는 카메라맨이 상당히 신경 쓰였는데, 편집된 영상으로 보니 풀샷에 바스트샷에 백샷까지 상당히 매끄럽게 연결돼 있다. 카메라워킹으로만 보면 드라마 촬영감독이 찍은 줄 알게 생겼다.
카메라가 포디움에서 객석을 넓게 비추자 신부 하객석 앞쪽에 앉은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띈다. 포커스를 빨리 옮겨 줬으면 좋겠다.
엄마와 나란히 앉아 부모님석의 어머니 모습을 보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다. 그러게, 엄마가 그만 보겠다고 했을 때 말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잠깐 보고 있어. 과일 좀 가져올게.”
엄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
끄려던 걸 억지로 켰으니 이제 와서 그만 보잘 수도 없고, 그저 객석을 비춘 카메라 포커스가 얼른 바뀌기만을 바라고 있다는 걸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신 거다.
죄송하다고 말하면 더 마음 아파하실 걸 알기에 조용히 엄마를 따라 일어섰다.
앞서가는 엄마의 어깨가 오늘따라 유난히 왜소해 보인다. 진작 왔어야 했는데, 원규를 핑계로 집구석에 틀어박혀 있었던 시간이 아깝기만 하다.
“세훈이가 가져왔어.”
주방에 들어서 냉장실 문을 연 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응?”
“본가에도 하나 드리고 여기로도 하나 가져온 거 같던데, 몰랐어?”
엄마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룬 가정을 ‘본가’라고 표현하신다.
“나만 가지고 있는 줄 알았어.”
본식 촬영 옵션에서 편집본을 한 개로 정한 이유는 비용 때문이 아니었다. 어차피 본가에 드려도 따로 보실 것 같지는 않고, 자리를 뺏겨 버린 엄마한테는 차마 줄 수가 없었다.
웨딩플래너가 스케줄링 해 놓은 리스트에 본식 촬영이 포함되지 않았다면 따로 찍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다.
결혼을 앞두고 예식 준비에 정신이 없을 무렵, 오빠가 웨딩플래너의 연락처를 달라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런데 이게 과연 오빠한테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는 모르겠다. 엄마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걸까? 엄마 자리에 앉은 어머니를 봐도 괜찮은 걸까?
“사진도 그렇고, 다 예쁘게 잘 나왔어. 나중에 다은이도 거기서 하면 좋겠더라.”
엄마 배 아파 낳은 자식도 아닌데 언니 결혼까지 걱정하는 건가. 엄마를 봐도 인사조차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언니를?
“알아서 하겠죠.”
“다은이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다니?”
“몰라요. 연락 안 한 지 오래됐어.”
“전화 자주 드리고 가끔 찾아뵙기도 하고 그래야지.”
“출가외인이라잖아. 나 이제 그 집 식구 아니에요.”
식탁 앞에 앉아 단감을 깎고 있던 엄마가 손을 멈추고 나를 본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어머니가 너한테 어떻게 하셨는데.”
그래, 어머니는 나한테 정말 잘해 주셨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차라리 마음껏 미워할 수라도 있다면 좋았을 텐데,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친가와 외가 사이에서 어머니는 항상 내 편이 돼 주셨다.
하지만 철이 들면서부터 어머니의 자애로움에 감사할 수만은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됐다. 어머니께서 나에게 주신 것은 상처가 나지 않도록 하는 ‘사랑’이 아니라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하는 ‘배려’였다.
“나도 알아요.”
유림의 도시 충청남도 공주, 그곳을 뿌리 삼아 가문을 일궈 온 한씨 종가. 종가의 맏며느리가 되신 어머니는 일 년에도 서른 번이 넘도록 제사상을 준비하셔야 했다.
그 정도로 친가 식구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빈번한 정도가 아니라 매달 한 번은 꼭 집안 가솔들이 모여 식사를 했다.
종가의 장손인 아버지가 밖에서 데려온 오빠와 나는 당연히 문중(門中)의 수치였다. 할아버지께서 문중의 대표인 문장(門長)이 되신 후에는 더욱 그랬다. 문중 총회인 화수회(花樹會)가 열릴 때마다 문중원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나한테 정말…… 잘해 주셨어.”
지극히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집안의 분위기를 감당하기에는 난 너무 어렸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어른들이 왜 그렇게 나를 미워했는지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그저 무서웠다.
아무도 내게 손 내밀지 않는 그곳에서 유일한 위안은 바로 어머니였다. 내 눈물이나마 닦아 줄 유일한 분은 오직 어머니뿐이었다.
“은아.”
정신을 차려 보니, 엄마가 예쁘게 담은 과일 접시 위로 포크를 내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정신없이 해.”
“아니, 그냥.”
아― 또…….
“엄마 나 잠깐 화장실.”
“그래, 다녀와.”
어렸을 때나 결혼을 해서나 사랑받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에 잠시 울컥했을 뿐이다. 그냥 그뿐이다. 거울 앞 세면대에 서서 탭을 두드리자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손을 씻듯, 사람의 기억도 씻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미 지난 일이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매번 어렸을 적의 기억에 꼼짝없이 발을 묶이곤 한다.
한때는 결혼만 하면 어린 시절의 악몽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매 순간 행복이 가득해서 우울한 과거 따위는 생각도 안 날 줄 알았다. 시작과 끝은 항상 맞물려 있으니 결혼의 시작은 악몽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고 무엇도 끝나지 않았다. 나를 옭아맨 것들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결혼을 서둘렀음을 깨달은 지금, 한층 더 비참하기만 하다.
“요은아?”
“어―”
“아직 멀었니?”
엄마 앞에서 태연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엄마― 나 잠깐.”
문밖으로 여전히 엄마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금방 나갈게요.”
잠시의 간격을 두고 천천히 나오라는 엄마의 말에 하릴없이 숨이 내려앉았다. 엄마 앞에서 괜찮은 척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불가능한 일인가 보다.
한참 동안 욕실에서 마음을 추스르고 나와 보니 길고 긴 주례사가 끝나고 기념 촬영이 한창이다. 다행히도 가족 촬영이 끝난 다음이었다. ‘친구분들 나와 주세요!’라는 말에 식장 뒤편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난다.
도우미 아줌마는 어깨 뒤로 넘어가는 베일을 매만지느라 분주하고, 나는 뭐가 그리 좋은지 허파에 바람 든 사람처럼 연신 웃고 있다.
어?! 방금 혹시?
되감기 버튼을 누르자, 흔해 보이는 검은 정장을 입었지만 유독 눈에 띄는 그가 원규의 뒤편에 서서 다른 사람들과 자리를 맞춰 가며 옷매무새를 고치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거다. 아니, 내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 어둑어둑한 bar에서 나를 처음 본 게 아니다.
친구들 사진 촬영이 끝나고 송이가 부케를 받는 장면이다. 속사포처럼 터지는 플래시 속에 웃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인 것 같다. 바로 내 옆의 원규는 연신 장내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눈치다.
네가 찾는 사람은 바로 뒤에 있는데, 너도 나름대로 긴장해서 박원호가 어디 있는지 몰랐던 걸까? 아니면 또 다른 연인이라도 불렀나.
“사과 맛있다.”
원규에 대한 생각을 털어 내느라 무심코 뱉은 말이었다. 사실 단감을 먹을 때나 사과를 먹을 때나 질감이 다른 것만 느꼈을 뿐, 이틀 연속 빈속에 술을 마셔서 입이 소태처럼 쓰기만 하다.
“좀 시지 않아? 맛이 덜 든 거 같은데.”
“아니? 잘 모르겠는데.”
엄마가 날 물끄러미 보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왜요?”
“밥 먹고 왔다고 했지?”
“어. 먹었어요.”
먹긴 뭘 먹었다고. 하루 종일 굶었다. 하지만 이미 저녁상을 치운 엄마를 번거롭게 하기도 싫고, 때가 지나도록 굶고 다닌다는 걱정을 들어 가며 혼자 차려 먹기도 싫었다.
“잠깐만.”
“어.”
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신부 대기실로 화면이 넘어가고 2부 순서를 위해서 애프터 드레스로 갈아입는 모습이 실루엣으로 비치고 있다.
검은 그림자 두 개가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에 배경음악이 깔려서 그런지 약간 우스꽝스럽다. 다시 화면이 바뀌고, 하객들의 축하메시지가 나왔다.
몇몇을 제외하면 다 모르는 얼굴뿐이다. 하긴, 공주에서 자라는 내내 놀림감이었으니 친구라 봐야 대학 동창이 전부다.
“은아.”
“어?”
주방에서 나온 엄마가 뭔가를 내밀었다.
“매실차야.”
“매실?”
“응. 본가에서 보내 주신 건데, 맛이 아주 잘 들었더라.”
“별로 생각 없는데.”
빈속에 매실차를 마시면 엄청 부대낄 것 같다.
“조금만 마셔. 몸에 나쁠 거 없어.”
그래, 밥 먹었다고 공갈친 죄를 달게 받아야지.
“네.”
입 안 가득 매실차를 머금었다가 꿀꺽 삼켰다.
“흐음― 흠! 정말 맛이 잘 들었네.”
아― 속이…….
“시지 않아?”
“음?”
“매실엑기스 잔뜩 넣은 건데.”
“그래요? 잘 모르겠는데.”
엄마가 갑자기 옆으로 바짝 앉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제야 나는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듯 간절한 엄마의 손길과는 달리 문득 떠오른 어제의 일들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하아…… 아니야.”
“정말 아니야?”
“아니라니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테스트라도 해 보면 어때?”
“알겠어요. 나중에 해 볼게.”
절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전부 얘기하게 될 것 같아서 대강 얼버무렸다.
“근데 엄마.”
“어, 그래. 얘기해.”
“엄마는…… 어디 있어요?”
“응?”
맞잡은 엄마의 손이 움칫하는 게 느껴졌다.
“엄마 저 날 왔었잖아. 그쵸?”
한요은. 너 참 좋은 딸이구나.
“그냥 좀 뒤쪽에 있었어. 좀 늦어서.”
“뒤쪽에 어디?”
“곧 나올 거야. 잠깐이긴 한데. 조금만 있어 봐.”
집이 조용해서 그냥 틀어 놓은 거라더니 엄마가 어디에 얼마큼 나오는지도 다 아네.
“저 날, 애프터 드레스가 너무 많이 파였더라.”
난처해하며 화제를 돌린 엄마를 위해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응. 그래서 잠깐 대기실에 다녀왔잖아.”
케이크 커팅 후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나에게 조금 올려야겠다고 속삭이는 원규의 모습이 보인다. 화관을 말하는 줄 알고 불편한 듯 엉거주춤 손을 올리자 헛기침을 하더니 머뭇머뭇 드레스 앞섶에 손을 얹는 원규.
장갑을 낀 그의 손이 가슴골에 살짝 닿았을 뿐인데 짓궂은 그의 지인들이 환호성을 올렸고, 그럼에도 푹 파인 앞섶이 정리되지 않자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나를 돌려세웠다.
뒤쪽 여밈이 잘못됐다며 나를 앞세워 대기실로 향하는 도우미 아주머니의 뒤편으로 카메라가 자연스럽게 원규를 따르고 있다.
포디움에서 내려온 그가 큰 걸음으로 내 뒤를 쫓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객석 뒤쪽의 어느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테이블 사이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내 기억에는 없는 일을 영상으로 보고 있자니 왠지 기분이 묘하다. 그런데 누굴까. 누굴 찾고 있었기에 저렇게까지 서두르는 걸까.
나는 바보처럼 시선을 분주히 움직여 모니터 위를 기웃거렸다. 그래 봐야 카메라의 앵글이 허락하는 모습만 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원규의 시선 너머에 있는 사람이 너무 궁그…….
“엄마?”
그가 걸음을 멈춘 곳에 엄마가 있었다.
“응, 어떻게 거기 앉은 걸 알았는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깊이 숙인 원규의 모습은 양가 부모님께 큰절을 올렸던 것만큼이나 깍듯했다. 엄마가 당황해하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원규가 엄마의 손을 마주 잡는다.
“네가 얘기한 거 아니었어?”
엄마에게 인사를 드린 후 주변에는 간단히 묵례만 하고 대기실로 발을 옮기는 걸 보면, 원규는 엄마를 알고 있었다.
정작 딸이라는 인간은 엄마를 보면 메이크업이 다 지워지도록 눈물이 날 것 같아 예식이 진행되는 내내 일부러 하객석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원규는 줄곧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을 엄마를 찾고 있었나 보다.
애써 참았는데, 아직도 흐를 눈물이 남았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은아, 왜 그래?”
“미안. 미안해요 엄마.”
참 이상하다. 박원규를 놓으려 할 때마다 미련을 붙드는 일들이 생기니 말이다.
추위에 옷을 거듭 여미면서도 한사코 나를 먼저 보내려는 엄마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
“들어가요.”
“그래, 얼른 가.”
“엄마 먼저 들어가래두.”
“난 바로 앞이잖아.”
“빨리 들어가요. 엄마 이러면 나 집에 안 간다.”
“알았다, 알았어. 얘도 참.”
노년의 택시 기사는 그런 모녀의 정이 보기 좋은지 목적지를 묻지도 않은 채 룸미러를 통해 지그시 웃고 있다.
“다음엔 같이 올게요.”
예의 그렇듯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어릴 때부터 석 달에 한 번 엄마에게 다녀갈 때면 이렇게 손을 잡아 보곤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