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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포르테
1화
1. 계약 연애


종종. 다리의 통증은 그를 이른 새벽에 깨우곤 했다.
눈을 떴을 때 시계가 새벽 세 시나 네 시를 가리킬 때가 있다. 심하면 잠들고 고작 삼사십 분이 지났을 때였다.
오늘은 오히려 이득을 본 기분이었다. 요즘 주말도 없이 일하던 현재는 모처럼 정시에 퇴근을 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깜빡 잠이 들었다가, 통증이 알람 역할을 해 한 시간도 다 못 채우고 눈을 떴다. 4월 초, 벌써 해가 길어지는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
일어난 김에 휴대폰을 보니 친구인 정한으로부터 연락이 와 있었다. 밤에 모처럼 시간이 날 것 같으니 술을 한잔하자는 연락이었다. 현재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술이 필요했으니 먼저 가서 한잔 마시며 느긋하게 정한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가 방문을 열자마자 골든 레트리버 한 마리가 달려왔다. 주인이 잠들어 같이 자고 있다가, 발소리를 듣고 깬 것이다. 태어난 후 여섯 해가 지난 녀석의 두 눈에 ‘놀아 줘라!’, ‘나는 심심하다!’라고 쓰여 있었다. 현재가 허리를 숙여 골든 레트리버의 뒷목을 쓱쓱 긁어 주었다.
“나갔다 올게, 포르테.”
현재가 목줄 대신 차 키를 챙기자 레트리버, 포르테가 실망해서 축 늘어졌다. 나쁜 주인이 된 것 같아 미안하긴 하지만 별수 없었다. 자주 가는 바를 친형이 운영해서, 작년에 몇 번 데리고 갔더니 바에 있던 손님들에게 인기 폭발이었다. 그러나 취객들이 괜히 툭툭 치고 지나가는 통에 포르테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아, 다시는 데리고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정작 포르테는 그 바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자다 깨서 바로는 걸음이 불편해 지팡이를 꺼내 왔다. 이제 겨우 서른이라, 여간해선 들고 다니지 않지만 지금은 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이럴 땐 나이보다 대여섯 살은 많아 보이는 외모가 고맙게 느껴진다.
불편한 걸음으로 차에 타니 포르테가 미련을 못 버리고 정원을 맴돌았다. 현재가 창문을 내리고 손을 흔들었다.
“다녀올게.”
인사를 듣고 나니 이제 진짜 안 데려가는구나, 싶어 포르테가 포기하고 현재가 자주 앉는 벤치에 올라가 웅크려 앉았다.
다음에 한번 데리고 가야겠네.
현재가 생각하며 형, 선일이 운영하는 바 ‘루바토’로 차를 몰았다.

* * *


“여기요.”
“네!”
손님이 손을 들고 부르자 사라가 대답하고 앞치마에 손을 쓱쓱 닦았다. 그리고 주문을 받으러 가려는데 선일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가 옆에 서 있던 정우에게 턱짓했다.
“정우야, 네가 가.”
“예? 예.”
정우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그 테이블로 향했다. 사라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선일에게 물었다.
“왜요, 사장님?”
“저 사람들 좀 질이 안 좋아 보여서.”
“그래요?”
“어. 좀.”
선일이 대강 얼버무렸다. 입 밖으로 내진 못하지만 그 테이블 남자들의 시선이 계속 사라를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그녀가 돌아서면 자기들끼리 시선을 보내며 히죽거린다.
사라는 꽤나 예쁘장했다. 눈썹이 반듯했고 캐러멜색 머리칼에 유난히 피부가 하얗다. 눈도 평균보다 연한 갈색이라 눈에 띄었다. 그렇다고 해도 저 사람들의 시선은 악질적이었다.
사라가 다른 손님에게로 주문을 받으러 가다가 멈춰 서서 선일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반듯한 눈썹을 밉지 않게 찡그리며 말했다.
“저 손님을 정우한테 받으라고 하시지. 제가 저 손님 싫어하는 거 아시면서.”
사라가 향하던 방향에는 종종 이곳을 찾는 손님이 있었다. 창가에 앉아 있는 무표정한 남자.
처음 그 남자를 만났던 건 지난달, 사라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일주일 뒤였다. 혹시나 지각을 할까 봐 정신없이 뛰어 들어오다 문 앞에 서 있던 그와 부딪쳤다. 죄송하다고 사과했는데도 대꾸 없이 얼마나 인상을 쓰던지. 가뜩이나 무섭게 생겨서는, 때리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났다.
“왜. 잘생겼잖아.”
선일이 바에 팔꿈치를 댄 손으로 턱을 괴고 싱글싱글 웃는다. 그의 말에 사라가 팔짱을 끼고 대꾸했다.
“별로요? 하나도 안 잘생겼는데.”
“내가 본 것만 몇 번인데. 여자 손님들이 쟤 번호 따는 거.”
솔직히, 사라도 그 장면을 몇 번 보긴 했다. 저 손님이 늘 거절하긴 했지만. 사라가 괜히 핀잔했다.
“그래도 손님한테 ‘쟤’가 뭐예요?”
“뭐 어때. 저기까지 안 들려.”
선일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라는 그 문제의 손님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바를 채우고 있던 강한 드럼 소리가 멈추고 바이올린으로 연주한 팝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라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음악을 들었다. 잔잔하게 바이올린으로 시작한 음악에 점점 하나씩 악기가 추가되고, 나중에는 강한 드럼 소리가 뒤섞인다. 새벽 시간. 피곤하게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에도 음악 하나로 시간과 공간이 변하는 기분이었다.
걸음을 멈춘 그녀가 잠깐 눈을 감고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다가 반짝 눈을 떴다. 음악에 취해 주문을 안 받았다는 걸 알고 놀라서 달리려는데, 어느새 그 문제의 손님이 일어나 사라의 앞에 와 있었다. 눈썹이 짙고 성격이 거칠 것 같은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죄송해요! 주문…….”
“하고 왔습니다.”
그가 딱딱하게 느껴지는 말투로 대답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처음으로 그를 자세히 보고 난 사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가 왼쪽 다리를 조금 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라가 선일에게로 돌아가 민망해하며 물었다.
“저 손님이 와서 제 욕 하고 갔죠?”
“어. 해고하라던데.”
“죄송해요…….”
사라가 거듭 사과하자 선일이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그냥 주문만 하고 갔어.”
“……정말요?”
“응. 가져다줘.”
선일이 트레이에 라임을 넣은 위스키 하이볼을 올려 사라에게 안겼다. 평소엔 활발한 그녀였지만 가뜩이나 무서워하던 손님에게 실수까지 하니 영 쭈뼛거렸다. 사라는 미적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트레이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러자 남자가 그리 크지 않지만 정확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고마워요.”
사라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주문받으러 안 와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기다렸어야 하는데.”
처음으로 사적인 대화를 한 그는 의외로 사려 깊었다. 남자가 밤 시간에 덩달아 새카매진 유리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쓰러지는 줄 알고.”
그랬구나.
하기야 걸어오다 말고 눈을 감았으니.
인간의 몸이 의외로 단순한 건지, 그 남자에 대한 두려움이 녹자 긴장해서 얼었던 심장이 뛰었다. 그런 몸의 반응이 어쩐지 호감처럼 느껴졌다.
사라는 그때가 되어서야 이 남자가, 하나도 ‘안 잘생기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조각한 것처럼 코가 반듯하고 높다. 얌전해 보이면서도 은근히 멋을 낸 머리칼과 무심해 보이는 눈매, 웬만한 소리는 다 무시해 버릴 것같이 다물린 입술 모두 매력이 넘쳤다. 골격 하나하나에 남성미가 물씬 풍겼다.
언뜻 보면 무섭고 자세히 봐도 무서웠지만 끝내주게 잘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사라는 그와 잠깐, 한 마디라도 더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창밖으로 고개까지 돌린 손님을 귀찮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돌아오자 선일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뭐래?”
“제가 쓰러지는 줄 알았대요.”
“하긴, 쟤가 좀 건강에 예민한 타입이지.”
“왜 자꾸 손님한테 ‘쟤’라고 해요?”
“뭐 어때. 가족인데.”
“네? 가족이요?”
그의 말에 화들짝 놀란 사라가 사장과 손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표정이며 스타일이 전혀 달라서 그렇지. 자세히 보니까 둘이 조금, 진짜 조금 닮았다.
“서, 설마 저 손님이 사장님 형이에요?”
눈이 동그래진 그녀의 질문에 선일이 박장대소했다.
“아니, 반대야. 반대. 쟤가 동생. 양현재가 좀 노안이지.”
“사장님이 서른두 살이잖아요? 그럼 저 손님이 사장님보다 어리단 말이에요?”
“올해 서른이야.”
딱 봐도 30대 중반은 되어 보였는데…….
사라는 그가 자신과 고작 여섯 살 차이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이름이 양현재구나. 선일이 워낙 사교적인 데다가 단골 위주로 운영되는 바라서, 그가 저 손님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단골이 아니라 동생이었다니…… 사라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진작 말해 주시지. 맨날 사장님한테 저 손님 욕했잖아요.”
“그래서 더 욕하기 전에 말해 주잖아, 지금. 사실 네가 내 동생 무섭다고 하는 게 웃겨서 좀 즐기긴 했어.”
“혹시 알고 보면 외모와 다르게 엄청 순둥이예요?”
“아아니, 전혀. 생긴 거 그대로의 성격인데?”
그 말에 사라가 움찔하자 선일이 유쾌하게 웃었다. 선일은 상당히 마른 편에 세련된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모델 같은 체형에 고생 모르고 자란 도련님답게 피부가 희고 잘생긴 얼굴까지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현재는, 잘생겼다는 것을 제외하면 선일과 전혀 딴판이었다. 마르지 않은 체격에 말수는 적고 웃는 것을 본 적도 없었다.
캐주얼한 차림새의 형과 정반대로, 어디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고급 슈트 차림의 동생. 사라가 선일이 동생이라고 추측한 것도 이상할 것 없었다.
그녀가 설거지를 마친 잔을 마른 수건으로 닦으며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다리가 아프신가 봐요.”
“아, 그거. 예전에 사고가 나서 다쳤어.”
“네? 그럼 계속 아프셨던 거예요?”
“응.”
늘 물어보지 않은 것까지도 수다스럽게 떠들어 대던 선일이었지만 동생의 사고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사라도 굳이 말하기 싫어하는 선일에게 캐물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저 손님을 처음 만난 날 자신이 달려오다 부딪쳤을 때, 그가 인상을 썼던 것이 다리가 아파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무척 미안해졌다.
그녀의 표정이 우울해지자 선일이 사라의 기분을 풀어 주려 괜히 장난을 쳤다.
“그나저나 질투 나네. 왜 이렇게 양현재한테 관심을 보여? 소개해 줘?”
“저 손님 싫다니까요?”
사라가 발끈해서 말하다가 선일의 동생이란 걸 다시 떠올리고 얼른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나 선일이 오히려 즐거운 표정이라, 그녀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고 말을 이었다.
“전 강준하 같은 남자가 좋다니까요. 다정다감하고, 박력 있고, 말도 잘하고.”
“이거 아주 드라마에 푹 빠져 가지고. 그리고 양현재도 박력은 있어.”
“박력이 아니라 무서운 거 아니에요?”
“어, 그건 좀 그런데. 보기보다 다정한 편이야.”
“하나도 안 다정해 보이는데.”
“진짜라니까. 여자들도 다 내가 웃겨서 나한테 관심 보이다가 점점 저 녀석한테 반해 버린다니까. 결국 난 웃겨만 주고 버려지는 역이지.”
선일이 우는 시늉을 하자 사라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 잘생긴 얼굴로 말하니 누구 놀리나 싶어서였다.

* * *


현재가 느리게 한 잔을 비웠을 때 친구인 정한이 도착했다. 병원에서 외과 레지던트로 근무하는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몸보다 시간이 더 아깝다는 듯이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있잖아, 다음번에 내가 걔한테 먼저 밥을 사 준다고 말…….”
정한이 말끝을 흐리며 현재가 보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재와 눈이 마주친 여자, 선일의 여자 친구인 장미가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현재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자 정한이 그를 불렀다.
“양현재. 누가 보면 네가 형수님 좋아하는 줄 알겠다.”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형수님이야. 그리고 우리 형 여자 친구가 왜 네놈 형수님이냐?”
“야, 학교 다닐 때 선일 형 모르는 사람이 있었냐? 선일 형은 모두의 우리 형이었어. 돈 많고, 잘생기고, 말 잘하고, 인기 많고.”
정한은 일부러 딴소리로 말을 돌렸지만 의심은 여전했다. 현재는 부정했지만 그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본다면 누구라도 그가 장미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할 만했다. 늘 부정적인 느낌을 주던 표정 대신 순진한 궁금증이 대신한다.
현재가 더 말이 없는데 남자 친구인 선일을 찾던 장미가 천천히 두 사람에게로 걸어왔다. 그녀가 허리를 숙여 현재에게 물었다.
“선일 오빠 어디 있어?”
그러자 현재가 시선을 피하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바에 있으면 오겠지.”
장미 스스로도 그랬다.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현재가 아마 자신에게 마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장미는 현재가 좀 따분하다고 생각했었다. 늘 주변 사람을 유쾌하게 해 주는 선일과 대비되어 더 그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지나친 자유분방함이 점점 장미를 외롭고,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현재는 제 나름의 방식으로 장미를 위로해 주곤 했다. 침착하고, 다정했다. 그녀의 직업에 항상 관심을 가져 주었다. 장미는 그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자리를 피해 바 의자에 앉았다. 머리가 아프니까 커피가 필요했다.
때마침 오케스트라 후배인 사라가 뛰어가는 모습이 보이자 장미가 그녀를 불렀다.
“사라야.”
“네?”
사라가 멈춰 서서 묻자 장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말했다.
“미안한데 나 커피 좀 사다 줄래?”
“지금요?”
“응. 피곤하니까 카페인이 필요해.”
그녀가 카드를 꺼내 내밀자 사라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일하는 중이라 사장님한테 말하고 갈게요.”
“괜찮아. 내가 말할게. 다른 사람들 것까지 여덟 잔 사다 줘. 네 것 포함해서.”
사라가 일단 두 손으로 카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머뭇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가 나가는 걸 본 선일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장미에게 물었다.
“쟤 어디 가?”
“내가 커피 좀 쏘려고 한다, 왜.”
장미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선일이 팔짱을 끼고 투덜거렸다.
“그래도 나한테 말하고 가야 할 거 아냐.”
“별걸로 트집이네.”
장미가 투정했다. 선일의 눈에 제멋대로인 건 장미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