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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포르테
2화


사라는 1층까지 내려가서 아메리카노 여덟 잔을 사 캐리어 두 개에 나눠 들었다.
사라가 캐리어를 든 손으로 낑낑거리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1층으로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는데 그녀의 손목을 누군가가 덥석 잡았다.
“여기서 뭐 해요? 심부름?”
아까 선일이 사라 대신 정우를 보냈던 테이블의 손님이었다. 빌딩 로비에서 담배를 피우던 그가 취했는지 실실 웃으며 사라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커피를 이렇게 많이 샀어?”
취객은 상대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한 사라가 대답 대신 눈웃음 짓고 무시하려는데 취객이 그녀의 왼팔을 붙잡았다.
“에이. 손님이 말하는데 그렇게 가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제가 근무 중이어서요.”
그녀는 웃으며 대응하려 했지만 팔을 쥔 취객의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언제 끝나요? 내가 술 한잔 사 줄까?”
“시간이 너무 늦어서요. 괜찮아요.”
“술도 같이 먹고, 용돈도 좀 받고. 응?”
“아, 아파요. 이거 놓으세요.”
정말로 당황한 사라의 목소리가 커졌다. 만취한 이 남자는 사라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그녀를 억지로 건물 밖으로 끌고 있었다. 사라가 끌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라가 제발 사람이 타고 있기를 바라며 그곳을 보았다.
그 안에 현재가 있었다. 사라가 멈칫하며 그를 보았다. 도와줬으면. 속으론 간절히 바랐지만 그가 다리를 절던 모습이 떠올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곳에 끼어들었다가 더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사라가 안간힘을 내서 팔을 당겼다.
“정말 이거 놔요. 소리 지를 거예요.”
“어차피 이 시간에 술집에서 일하면 다 2차 생각하는 거 아냐?”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취객이 오히려 큰소리다. 사라는 이 상황이 너무 무서워 결국 신고라도 해 달라고 부탁해 볼까 생각하며 현재를 보았다. 그런데 그는 이미 성큼성큼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는 중이었고, 곧바로 사라의 팔을 쥔 취객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현재의 강한 악력에 취객이 사라의 팔을 놓고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악!”
현재가 무표정으로 취객의 손목을 부러뜨릴 듯이 힘을 줬다. 비명을 지르던 취객이 주저앉았다. 그제야 그를 놓은 현재가 취객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쓰레기 새끼가.”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사라의 눈이 커졌다. 여간해선 흥분할 것 같지 않던 남자가 욕을 내뱉으며 으르렁거렸다. 지금까지도 무섭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무슨 폭력배 같았다.
“쳐, 쳐 봐! 쳐 보라고, 고소할 거니까!”
취객이 허세를 부렸다. 그러자 현재가 그의 가슴팍을 밀치고 소매 단추를 풀며 말했다.
“해 봐. 고소. 당신이 억지로 끌고 가려던 건 저 CCTV에 찍혔을 거고, 나는 끝장을 볼 만큼 돈도 있거든.”
“으윽…….”
현재의 위협에 취객은 술이 확 깬 모양이었다. 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가 정신없이 도망쳤다. 취객이 사라지자 현재가 멍하니 있는 사라의 손에서 캐리어 하나를 받아 들었다. 저항하던 중 크게 흔들렸는지 캐리어 손잡이까지 커피에 젖어 있었다.
현재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후 사라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아, 물론 안 괜찮…….”
사라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가 괜찮냐고 묻는 순간, 상황이 해결되었다는 사실에 긴장이 풀리니 울음이 터졌다. 묘하게도, 무서운 가운데 동생이 다정하다고 말하던 선일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이었다. 그는 생각보다 다정했다. 사라가 겨우 입을 열었다.
“무서웠어요…….”
사라가 비틀거려 현재가 서둘러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얼굴이 새하얘져서 눈에 보일 정도로 바들바들 떠는 게 걱정스러워 현재가 다시 한번 그녀를 살폈다.
“다친 곳은? 손목 봐도 됩니까?”
사라가 가슴팍이 달싹거리도록 숨을 몰아쉬며 취객이 붙잡았던 팔을 내밀었다. 현재가 팔을 살피는데 손자국이 남은 손목도 문제지만 커피에 뎄는지 손가락 마디 끝이 새빨갰다.
현재는 캐리어를 내려놓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후 말없이 제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사라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아직 4월 초라 날씨가 들쑥날쑥했다. 로비는 재킷도 부족할 정도로 추웠다. 사라가 놀라며 말했다.
“괜찮아요.”
“몸이 떨려서 그래요.”
추워서인지, 무서워서인지 달달 떨던 사라가 재킷을 통해 전해진 온기에 조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캐리어 두 개를 혼자 다 든 현재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라가 무서워서 달달 떠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루바토로 되돌아가자 선일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현재의 재킷을 걸친 사라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울었던 게 분명한 얼굴에 뭔가 있었구나, 짐작한 모양이다. 여전히 떨고 있는 사라 대신 현재가 대답했다.
“취객한테 끌려갈 뻔했어.”
“뭐, 뭐어?”
“약 사 올게. 이분 좀 쉬게 해 줘, 형. 1층 CCTV 확인해 주고.”
그가 말하더니 사라를 위해 가까운 곳에 의자를 빼 주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늘 능글거리던 선일도 지금은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 선일은 관리실에 CCTV를 부탁하고, 곧바로 사라에게 물었다.
“괜찮아? 많이 다쳤어?”
“아, 아뇨. 그냥 살짝 덴 거예요. 커피가 흔들려서.”
“손목도 빨개졌네. 하, 그 새끼지?”
“네에…….”
“어쩐지 눈빛이 이상하더라. 바로 퇴근 준비 해. 집에 가. 오늘은.”
“저 괜찮아요!”
“됐으니까 빨리 가.”
선일이 단호하게 말하자 사라가 별수 없이, 제 대신 일을 하게 될 동갑내기 아르바이트생 정우에게 사과했다. 그 역시 기겁을 해서 빨리 집에 가라고 등을 떠밀어 결국 탈의실로 향했다.
탈의실에서 옷 위에 입고 있던 검은색 앞치마를 풀었다. 유니폼을 벗고 입고 온 니트로 갈아입던 사라의 시선이 선반에 둔 남자의 정장 재킷으로 향했다. 잘 재단된 깨끗한 옷을 보니 자신이 입은 조금 낡은 니트가 신경 쓰였다. 늘 잘만 이러고 다녔는데.
그녀가 가방을 챙기고 현재의 재킷을 들고나오니 장미가 제일 먼저 뛰어왔다. 장미의 예쁜 눈이 놀라서 동그래졌다.
“너 손 괜찮아? 손가락 다쳤어?”
그녀도 바이올리니스트다 보니 사라의 손가락부터 살폈다. 장미가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괜히 쓸데없는 걸 시켜서…….”
“정말로 괜찮아요. 안 아파요.”
사라가 손가락을 만지면서 대답했다. 다행히도 그렇게 걱정할 정도로 덴 건 아니었다. 그제야 안심한 장미의 시선이 그녀가 들고 있는 현재의 재킷으로 향했다.
“그거 돌려주고 가야겠네. 현재 오빠 거지?”
“네.”
“내가 가져다줄게.”
장미가 손을 내밀었다. 사라가 재킷을 내미는데 때마침 약 봉투를 든 현재가 다가왔다. 그러자 그녀가 내민 재킷을 다시 안으로 당기며 말했다.
“아,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장미가 살짝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 사라가 현재에게 걸어가 재킷을 내밀었다.
“여기요. 오늘 정말 감사해요.”
“걸치고 있어요. 집에 데려다줄게요.”
“네?”
“여기서 가깝다던데. 내가 집까지 가는 게 싫으면 좀 떨어진 곳에서 돌아가라고 해요.”
사라는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머리로는 그런데 마음이 그렇지 못했다. 그 취객이 되돌아올까 봐 걱정도 되어 혼자 집에 가는 것이 무서웠다. 오늘따라 쌀쌀한 날씨마저 혼자서는 견디기 힘들 것만 같았다. 결국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나가려는데 갑자기 장미가 멈춰 세웠다.
“현재 오빠.”
그녀가 손으로 이마를 감싸고 현재에게 다가왔다.
“오빠, 진통제 있어?”
“있긴 한데 다른 사람이 먹기엔 너무 독할 거야. 왜? 어디 아파?”
“나도 머리가 아파서……. 그럼 여기 열려 있는 약국이 있었어?”
“가까운 곳에 심야약국 하나 있어서 샀는데. 머리 아파?”
현재가 몸을 숙이고 물었다. 형의 여자 친구에게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약간 떨어져 서 있긴 하는데, 그의 눈빛이며 행동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느껴졌다.
사라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실 저 손님이 유난히 마음에 안 드는 이유 중 하나는 아무래도 우리 사장님 여자 친구를 넘보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선일의 동생이란 걸 몰랐을 때는 그래도 좀 나았는데, 지금에 와서는 더더욱 그 사실이 신경 쓰였다.
도대체 왜, 형의 여자 친구를 저런 눈으로 보는 걸까. 늘 딱딱하던 남자가 장미에게만큼은 말랑말랑하게 녹았다.
“오늘따라 추워서 그런가. 감기가 오나 봐.”
날씬하고 비율 좋은 몸매. 하얗지만 탄탄한 피부에 패션 감각도 좋은 장미는 사라가 보기에도 놀라울 만큼 매력적인 여자였다. 게다가 저렇게 사르르 녹는 애교스러운 목소리에 처연한 눈빛을 보이면 어느 남자가 안 넘어갈까 싶었다. 장미가 말했다.
“사러 가야겠다. 약.”
“이 시간에 어떻게 돌아다녀. 형한테 사 달라고 해.”
“오빠 바쁘잖아. 어떻게 방해해.”
“그럼 내가…… 아.”
그녀의 말에 현재가 난감해한다. 그러자 사라가 빠르게 말했다.
“저 혼자 가도 돼요.”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매일매일 혼자 돌아가던 길인데 갑자기. 그게 너무 무섭고, 서운하고, 외롭게 느껴졌다.
하나도 괜찮지 않아서. 장미의 말에 고민하는 저 남자가. 위험할 때 구해 주고, 약까지 사다 준 남자가 애꿎게도 미워진다. 집까지 5분이면 가는 길이, 머릿속으로 아주 느리게 지나갔다.
현재가 사라 쪽을 보며 말했다.
“가깝다면서요? 집.”
“네? 네.”
“데려다주고, 약 사 오면 돼.”
그의 말에 장미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오빠 다리…….”
“괜찮아. 다녀올게.”
그가 앞장섰다. 사라가 당황하다가 장미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현재를 따라나섰다.
다리도 아픈 사람이 자신 때문에 몇 번을 들락날락하니 사라는 미안한 마음이 더욱 커졌다. 건물을 나서며, 다리는 괜찮냐고 물을까 말까, 몇 번을 고민했다. 아무도 안 볼 때보다 그의 걸음걸이가 똑바르다. 무척 신경 써서 걷는 모양이었다.
건물 바로 뒤 널찍한 골목으로 조금 걷다 보면 집이 나왔다. 사라의 집은 5분 거리였지만 현재의 걸음이 느려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렸다. 사라가 말했다.
“아, 맞다! 저 집에 진통제 있어요. 꺼내다 드릴게요!”
장미가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가뜩이나 빠른 걸음을 더 빠르게 옮기자 현재가 입을 열었다.
“천천히 걸어요.”
“네?”
몇 걸음 앞서 있던 사라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현재가 그녀를 따라잡으며 무뚝뚝한 투로 말했다.
“무슨 걸음이 그렇게 빨라요?”
그의 다리가 어느 정도로 불편한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대답 없는 그녀 대신 현재가 말을 이었다.
“성격 급하네. 그러니까 매일 그렇게 뛰어다니시나.”
“제, 제가 언제요?”
“볼 때마다 달려들어 오던데. 지각해서.”
현재가 멈춰 선 사라를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일찍 좀 다닙시다. 이것도 사회생활인데.”
데려다주고도 좋은 소리 못 듣게 저렇게 시비를 걸 건 뭐란 말인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라가 대답 없이 집이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느리게 걷는 게 나쁘지 않았다. 새벽 두 시. 계절로 치자면 마치 한겨울 같은 시간이었다. 생명은 잠들고, 바람이 운다. 혼자 이 새벽길을 걸을 때마다 사라는 자그마한 소음에도 흠칫 놀랐다. 그런데 오늘은 무섭지 않다. 밤하늘도 한 번 보고, 바닥도 한 번 보니 집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사라가 집으로 들어가 진통제를 꺼내 그의 재킷과 함께 돌려주자 현재가 받으며 물었다.
“다른 알바는 없어요?”
그러자 사라가 투덜거렸다.
“낮에는 오케스트라에 있잖아요. 공연이 저녁에 있을 때가 많으니까 레슨 아니면 새벽 알바밖에 못 한단 말이에요.”
“직업 있는데 왜 알바까지 해요?”
“동생이 몸이 안 좋아서 부모님이 간호하시느라 일을 그만두셨거든요. 생활비도 보태고, 제 미래를 위해서 모으기도 하려고요.”
그녀의 말에 현재가 바로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원래는 농사를 지으세요.”
사라가 올려다보며 웃자 현재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잠이 부족한 그녀의 두 눈은 예쁘지만 빛이 탁했다. 발랄한 성격과 어울리지 않게 늘 피곤해 보였다. 현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얼마나 놀랐는지 압니까?”
“아까요? 아. 그런 거 처음이에요. 취객이 다 그렇진 않아요. 그 자식이 나쁜 거지.”
취객에게 끌려갈 뻔한 이야기를 하는 줄 알고 변명하자 현재가 말했다.
“그것도 그거지만. 아까 주문받으러 오다가 멈췄잖아요. 눈 감고.”
“아…… 바이올린 때문에.”
“갑자기 멈춰서 눈을 감으니까 그대로 쓰러지기라도 하는 줄 알았잖아요.”
“전 또 사장님한테 저 자르라고 말하러 간 줄 알았어요.”
사라가 농담조로 말했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뭐, 기대도 안 했다. 무뚝뚝한 아저씨.
그녀가 인사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오늘은 집 오는 게 안 무서웠어요.”
“그 자식은 다시 바에 얼씬도 못 하게 해 줄게요.”
그가 아까 일이 떠오르는지 인상을 썼다. 저 얼굴, 원래는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가 돌아서며 말했다.
“잘 들어가요.”
요즘 사라는 ‘7일 24시간’이라는 드라마를 필사적으로 본방사수하고 있었다. 대학 병원 의사들의 사랑 이야기였다. 남자 주인공인 강준하는 천재 외과의사로 1년 차 레지던트인 여자 주인공에게 모든 순정을 바치고 있었다.
사라는 그 강준하에게 푹 빠져 있었다. 연습 아니면 돈 버느라 바빠서 연애 비슷한 것도 해 본 적 없는 스물넷. 그녀에게 드라마는 각박한 인생에서 대리만족을 하게 해 주는 산소호흡기였다. 아무리 바빠도 그것만큼은 꼭 챙겨 봤다.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사라는 매일 밤 강준하를 생각하며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모처럼 심장이 두근두근해 살 수가 없어서.
그런데 그 두근거리는 기분이 지금, 이 현실 남자를 앞에 두고 느껴지는 것이다. 아무래도 현실 남자를 너무 안 만났나 보다, 저런 노안에 말도 무뚝뚝하게 하는 아저씨한테도 두근거리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