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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종교, 사건 등은 모두 실제 사건과 관련 없는 허구임을 알려 드립니다.





1. 아무하고나 원나잇!





“야, 그만 마셔!”
“내버려 둬. 그냥 마시고 죽을라니까!”
“죽으려면 폭탄주 마셔, 이년아! 맥주 10,000cc 마시고 장 꼬였던 거 생각 안 나? 아, 그만 좀 마시라니까? 어디 가? 물통 여기 있잖아!”
혜지는 뜯어 말리는 미숙을 뿌리치더니, 물컵을 들고 벌떡 일어섰다. 징검다리 연휴에다 불금인 날이라 술집 안팎이 온통 사람들로 가득했다. 정수기까지 가는 길 역시 꽉 막혀 있었다. 좁아터진 술집 통로에 짜증을 내면서도 혜지는 꿋꿋이 물컵을 쭉 내밀며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하지만 점점 발은 꼬였고, 사람들이 자길 쳐다보고 빙글빙글 웃는 것 같았다. 결국은 정수기까지 한 걸음 남겨 두고 바닥이 치받듯이 올라왔다.
꽈당!
“혜지야! 어휴, 이 바보가!”
그래, 맞다. 난 바보다. 혜지는 메아리처럼 들리는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눈물이 흘렀다. 내가 어쩌자고 사표를 낸 거지?

* * *

“자, 오늘부터 영업 마케팅팀 담당하게 됐습니다. 잘생겼죠? 근데 아쉽게도 유부남이라.”
“유부남이어도 미녀들과 일하는 건 좋아합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홍석표입니다.”
어쩌다 보니 여자가 태반인 영업 마케팅팀이라 남자 팀장의 등장에 모두들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혜지는 그럴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입사 동기가, 그것도 구 남친이 내 상사라고?
거의 3년 만인데도 짜증날 정도로 멀끔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가끔 튀어나오는 아슬아슬한 성희롱 발언만 빼면 매너도 괜찮고, 일하는 것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게 다 저 얼굴 때문이었다.
잘생긴 건 아니지만 반달눈을 하고 웃을 때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로 생글거리며 말할 때는 남자고 여자고 죄다 호감을 가지게 되니까. 초면인 팀원들에게도 금세 호감을 느끼게 만드는 분위기에 혜지도 아주 잠깐 옛 생각에 빠졌다.
“오랜만이야, 도혜지.”
“네, 이사님. 여기 결재 서류에 사인 좀.”
“에이, 3년 만에 만났는데 사무적으로만 대할 거야? 어떻게 지냈어? 나 없을 때 괴롭히는 놈 없었고?”
너보다 날 괴롭힌 놈이 있겠니? 혜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심호흡을 하면서 두 손을 모으고 상냥하게 대답했다.
“없었습니다. 잘 지냈고요. 사무적이라 죄송한데, 새 인형 런칭 프로모션 건이라 급해서요.”
홍 이사는 귀엽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천천히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혜지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정수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때 귀엽다고 생각했던 쌍가마가 보였다. 그게 바람둥이의 특징이라는 걸 그땐 왜 몰랐지.
홍석표와는 동기로 입사했지만 업무 평가는 혜지가 훨씬 좋았다. 그런데도 상사들은 그의 친화력과 폼만 화려한 프레젠테이션을 좋아했다. 늘 칭찬 일색인데도 겸손하고, 매너가 넘치는 석표에게 혜지는 질투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은 동경도 느꼈다. 그렇게 해외 출장지에서 그가 내민 손을 피하지 못하고 잡아 버렸다.
한동안은 그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즐겁고 행복했다. 프로젝트에 석표의 이름이 대표로 들어가는 걸 보면서도 그가 자신을 인정해 주는 것에서 만족을 느꼈다. 남녀가 다르지 않다고, 똑같이 일하고 대우받아야 한다고 석표는 말했다. 이 남자라면 살림살이에 찌든 주부가 되지 않고, 동등한 부부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혜지는 심각하게 그와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게 거짓이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혜지의 인생이 꼬였다. 혜지 못지않게 석표를 좋아했던 한 여직원에 의해 그가 유부남이었다는 게 밝혀졌고, 그동안 발표했던 프레젠테이션도 외주 업체를 통해 만들었다는 게 밝혀졌다. 혼인 신고는 안 했지만 3년 차 유부남이란 소문은 아시아 지부와 본사까지 퍼졌고, 경쟁자였던 대만 마케팅팀에서 그의 가짜 실력에 대한 탄원 메일까지 썼다. 결국 석표는 사표를 썼지만, 남아 있는 혜지에 대한 시선들도 곱지 않았다.
한통속이다, 불륜이다. 말도 안 되는 루머에 시달리면서 내가 3년을 어떻게 버텼는데. 경력직 입사 7년 차에 겨우 부장 달고 마케팅 팀장이 눈앞에 있었는데. 저런 쌍가마 바람둥이 거짓말쟁이 유부남한테 내가 밀리다니!
혜지는 결재 사인을 기다리면서 예전 일을 생각하자 당장이라도 그 정수리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그러나 선수를 친 건 석표였다.
“이거 결재 못 하겠는데요. 처음부터 다시 검토합시다.”
“네? 뭐라고요?”
“회의 열 테니까 다시 얘기하자고요. 이번 제품 중요한데 이런 식으로는 런칭 못 합니다.”
“석표 씨, 아니 홍 이사님. 저희 팀이 4개월 동안 준비한 런칭 프로모션입니다. 전 이사님이 다 검토하신 거고 대행사 결재만 하면 바로 실행인데…….”
“대행사 수수료도 너무 많고, 무엇보다 내용이 별로네요.”
“역대 프로모션 분석도 했고, FGI도 다 했고, 팬 커뮤니티에서 온라인 폴도 다 한 거예요.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수수료는 대행사에서 여론 조사를 진행하는 비용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그렇지, 실제 수수료는 얼마 안 된다고요.”
억울한 마음에 혜지가 래퍼처럼 다다다 늘어놓자 웃는 상이던 석표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혜지 씨, 대행사랑 무슨 관계있어요? 왜 그렇게 발끈해요?”
혜지는 잠시 후회했다. 고개 숙이고 있을 때 그냥 정수리에 주먹을 꽂아 버릴걸.

“미숙아, 가자! 클럽 가자, 클럽!”
“어휴, 미친년. 입 다물고 얼른 일어나기나 해!”
심장까지 쿵쿵 울리는 클럽. 입구에서부터 젊은 남자애들만 눈에 보였다.
“아유, 뽀송뽀송하다. 우리 들어갈 수 있을까?”
“우리가 뭐 어때서? 삼땡! 제일 좋은 나이 아니냐?”
미숙이 술기운에 용감하게 나이를 떠벌리는 혜지의 입을 막고 말했다.
“시끄러, 이년아. 조용히 하고 줄이나 잘 서. 잘못하면 짤려.”
간신히 들어간 클럽 안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리저리 떠밀리다 보니 혜지는 어느새 미숙과 떨어져서 혼자 무대 앞까지 밀려갔다. 그러다 한 남자의 등에 쿵 하고 머리를 박았다.
“죄송합니다.”
“어, 안녕! 혼자 왔어요?”
어두운 클럽에서도 얼굴이 다 보일 정도로 뽀얀 젊은 남자였다. 파마한 곱슬머리가 꽤 귀여워서 혜지는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야, 여기서 뭐해?”
그때 미숙이 혜지를 끌고 갔다. 혜지가 팔을 뿌리치면서 짜증스레 외쳤다.
“분위기 좋았는데!”
“딱 봐도 고딩인데, 미쳤나 봐.”
혜지가 실망할 틈도 없이 또 한 남자가 몸으로 부딪혀 오더니 물었다.
“헤이, 걸스. 같이 놀래요? 진짜 예쁘다. You’re gorgeous!”
이번엔 딱 봐도 외국 물 먹은 듯한 근육질의 느끼한 미남이었다.
“아뇨. 쏘리, 쏘리. 죄송해요!”
미숙이 또 철벽을 치면서 혜지의 어깨를 붙잡고 돌려세우자 그녀가 짜증스레 또 다른 방향의 남자들을 쳐다봤다. 세상에! 온통 잘생긴 남자들뿐이었다. 귀여운 스타일, 섹시한 몸매, 후덜덜한 기럭지, 그루브 넘치는 몸짓. 예쁘거나 선 굵은 미남들이 손만 뻗으면 잡힐 거리에 가득했다.
홍석표, 그 무쌍 단춧구멍 눈에다 비쩍 마른 몸뚱이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런 인간이 잘 생겼다고 생각한 건지 자신도 이해가 안 갔다.
“미숙아, 나 결심했어!”
“뭘?”
“나 결심했다고! 오늘 여기서 아무나하고 원나잇 할 거야!”
“뭐라고? 안 들려!”
“원나잇 할 거라고! 완전 멋진 남자랑!”
혜지가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가 출사표라도 던지듯이 비장하게 힘껏 외쳤지만, 곧 들려온 사이렌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클럽 안의 모든 시선이 무대 쪽을 향했다. DJ 부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까지 살 사람!”
여기저기서 우, 하는 야유가 들려오자 남자는 코웃음을 치고 나서 소리쳤다.
“오늘만 사는 사람! Make some noise!”
차분하던 클럽 안이 환호 소리로 가득 찼다. 맥주병이든 LED 봉이든, 머리 위로 쳐들고 늑대처럼 천장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핀 조명이 비추자 DJ의 얼굴이 나타났다. 낮은 천장에 머리가 닿을 듯 늘씬하고, 잔근육으로 뒤덮인 팔에, 흰 셔츠만 입어도 드러나는 근육질의 몸매가 멋진 남자였다. 구릿빛의 피부에 약간 긴 검은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붙어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였지만 무쌍인데도 큰 눈에, 베일 듯한 콧날이 멀리에서 봐도 감출 수 없는 미남.
혜지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쳐다보았다. 남자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입이 벌어지자 하얗고 고른 이가 시원하게 드러났다. 살짝 띤 미소가 마치 혜지를 위해 웃어 보이는 듯했다.
그의 긴 손가락 끝에서 비트가 시작되자 클럽 안이 쿵쿵 울렸다. 사람들이 발을 구르며 환호하자 혜지의 심장도 조금씩 빨라졌다. 하지만 곧 엇박자가 나기 시작했다. 그의 비트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숨죽이고 있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저기요! 잠깐만요, 이봐요! 아, 좀 비켜 봐요!”
어디서 그런 괴력이 나오는 건지 혜지는 사람들을 우악스럽게 헤치고 전진했다. 그토록 눈에 밟혔던 미남들이 지금은 거추장스러웠다. 저 남자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간신히 그 남자의 옷자락이 손에 들어왔다 싶었는데…….
“잡았다, 잡……!”
꽈당!
오늘만 벌써 두 번째 꽈당. 이번엔 붙잡아 일으켜 줄 미숙이도 없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지만 그보다 그 남자 앞에서 넘어졌다는 게 창피해서 술이 확 깼다.
어떻게 일어나지? 어떻게 하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일어나지? 연약한 척할까? 아픈 척할까? 동정심이라도 유발할까?
혜지의 두뇌가 풀가동하는 동안 무슨 일이 났는지 갑자기 사람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혜지를 발견하고 발을 피했다. 하지만 인파에 밀린 발들이 그녀의 얼굴을 밟을 듯이 다가왔다.
“꺄악!”
혜지는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때 죄송합니다,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뜨고 올려다보니 누군가의 커다란 손이 그 발을 붙잡고 있었다. 발의 주인은 고개를 꾸벅하고는 다시 인파에 떠밀려 갔다.
“괜찮아요? 일어나 봐요.”
눈앞에 그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금방 변한 싸이키 조명 때문에 혜지의 손을 잡고 일으키는 그 남자의 얼굴이 슬라이드 사진처럼 토막토막 끊겨 보였다. 지금 이 순간을 파노라마로 간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커피 한잔할래요?”
“뭐라고요?”
잘 들리지 않는지 그가 혜지의 입술 가까이 귀를 기울여 왔다. 달콤하고 향긋한 냄새와 후끈한 체열이 느껴졌다. 술기운 때문일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면서 혜지가 그의 귓가에 다시 말했다.
“같이 나가요. 내가 쏠게요.”
남자는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혜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거절하면 어쩌지? 이렇게 대시 하는 여자가 한둘이 아닐 텐데. 방금 철푸덕 엎어져 놓고 이런 얘기하는데 당연히 거절하겠지? 그럼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가지? 그래도 혹시……?
몇 초가 몇 년 같은 혜지의 표정이 잔뜩 긴장한 채 얼어 있었다.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래요.”
“뭐라고요?”
남자는 눈을 슬쩍 내리깔면서 끄덕거렸다. 혜지는 믿을 수가 없어서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금방이라도 환호성이 나올 것만 같았다.

새벽의 거리는 클럽 안과는 딴판으로 조용했다. 나란히 어색하게 걸으면서 혜지는 밝은 곳에서도 여전히 멋진 그의 얼굴을 훔쳐봤다.
“왜 자꾸 봐요?”
“네……?”
“커피는 카페가 다 닫아서 안 될 것 같은데.”
“아…….”
새벽 공기를 쐬고 나니 술기운도 날아간 혜지는 어째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서른셋이 다 되도록 데이트한 남자는 고작 세 명이었다. 가장 최근은 3년 전에 그 망할 홍석표와 한 거였다. 석표 생각을 하자 혜지는 갑자기 전투력이 올라왔다. 그래, 오늘의 목표는 그거였잖아?
“커피는 핑계고요.”
혜지는 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한 뒤에 비장하게 말했다.
“나랑 자요, 오늘.”
남자는 멈춰 서서 물끄러미 혜지를 쳐다보았다. 코웃음을 치겠지 싶었다. 아까 당했어야 하는 거절, 지금 당하는 것뿐이잖아. 혜지는 핸드백을 꽉 움켜쥐고, 올 테면 와 봐라 하는 심정으로 남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하지만 남자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멍한 표정 같기도 했고, 뭐 이런 바보가 있지 하는 황당한 표정 같기도 했다. 초조해진 혜지가 더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니까 나랑 자자고…… 읍!”
남자가 커다란 손으로 혜지의 입을 막았다. 그녀가 비틀거리자 어깨까지 끌어안으면서. 졸지에 남자의 품에 안긴 혜지의 눈이 커졌다. 남자는 그 눈을 다정하게 바라보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책 없는 여자네.”
남자가 혜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녹색불이 깜박거리기 시작한 횡단보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축축한 새벽 공기가 얼굴을 스치고, 횡단보도에 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눈부시게 둘을 비췄다. 신호등의 빨간 불이 켜지자 남자는 혜지의 등을 감싸고 더 빠르게 달렸다. 서른 셋 인생에 처음으로 낯선 남자와 손을 잡고 새벽길을 달리고 있었다. 원나잇을 하러!
혜지는 또 한 번 환호가 나오려는 입을 손으로 막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도혜지, 아직 안 죽었어!

* * *

삐리리리리리리!
신경을 긁는 벨소리가 잠을 깨웠다. 아침잠이 많아 출근을 제대로 못 하는 자신을 위해 스스로 설정했지만 늘 아침마다 짜증스러웠다. 습관적으로 알람을 끄려고 휴대폰을 들자마자 전화가 걸려왔다.
—도혜지, 이 계집애야! 너 어디야?
미숙이었다. 얘는 왜 아침부터 버럭질이야. 혜지가 돌아누우면서 뻑뻑한 눈을 굴렸다. 그런데 방 안 풍경이 뭔가 좀 달랐다. 그리고 침대 옆자리에 넓은 등짝이 보였다.
“엄마! 아부지!”
놀란 나머지 몸부림을 쳤는데 그 바람에 휴대폰이 날아가서 낯선 사람의 등을 때렸다.
“아! 너무하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누웠다. 지난밤 그 남자였다. 남자는 혜지를 보자 얼굴을 풀고 자연스럽게 볼에 입을 맞췄다.
“잘 잤어요?”
혜지는 어리둥절해서 뭔가 말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씩 웃더니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은 다 입은 채였다.
“급한 약속이 있어서요. 인사 못 하고 가나 했는데.”
남자는 휴대폰이며 지갑을 챙겨 들면서 바쁘게 말했다. 머리는 띵했고, 기억은 안 났지만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역시 술기운 때문에 아무것도 못한 모양이었다. 그럼 그렇지, 원나잇은 무슨.
혜지는 맥이 빠져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이불이 흘러내리고 알몸이 드러나자 급하게 이불을 낚아챘다.
“아, 옷은 저기.”
옷과 가방은 벽걸이에 얌전하게 걸려 있었다.
순간 모든 기억이 순식간에 돌아왔다. 그 남자와 횡단보도를 함께 달렸다. 더 이상 손을 잡을 필요가 없는데도 그가 도망가기라도 할까 봐 꼭 잡은 채로 호텔 체크인을 마쳤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엄청난 선수인 양 남자를 벽에 밀어붙였다.

“뭐하려고요?”
“뭐하긴요.”


혜지는 자못 과격하게 남자의 얼굴을 향해 입술을 쭉 들이밀었다. 하지만 남자는 피식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끌어안았다.

“되게 급하셨네.”

당황스런 전개에 혜지는 가만히 안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 때문에 다시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어지럽고 머리가 띵해져 왔다. 취하면 순식간에 잠드는 게 술버릇이니 더 취하기 전에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혜지가 손을 들어 남자를 밀치려고 했지만, 그는 허락하지 않고 더 꼭 끌어안았다.

“잠깐만 기다려요.”
“뭘요?”
“나도 마음의 준비 좀 하고요.”


남자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목소리만큼 혜지가 안겨 있는 그의 몸도 떨리고 있었다. 쿵쿵대는 심장 소리와 숨 쉴 때마다 들썩이는 그의 가슴이 온전히 느껴졌다.

“처음이에요?”
“설마요. 나이가 몇인데.”
“몇인데요?”
“그쪽보다는 더 먹었죠.”
“근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어요?”


남자가 혜지를 안은 손을 풀고 얼굴을 바라보았다. 노란 불빛 아래에서도 확연히 보일 만큼 남자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게요. 내가 왜 이럴까요?”

소년처럼 수줍게 웃는 남자의 미소를 본 순간 혜지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갑자기 심장이 주책맞게 뛰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진짜다. 오 마이 갓. 내가 진짜 남자를 찾았어.
그 순간 현관의 센서등 불빛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올 듯한 두 심장 소리가 박자 맞춰 뛰고 있었다. 혜지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에게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몸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남자가 움직였다. 다시 불빛이 비추고, 남자의 떨리는 두 손이 혜지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의 뜨거운 입술을 느끼고 나자 도망가려던 생각이 저 멀리 달아났다. 혜지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둘이 한 몸이 된 채로 방 안을 헤매고 침대까지 오는 동안 생각했다. 정말 위험한 남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