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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만 가 볼게요.”
지난밤 생각에 얼굴이 화악 달아오른 혜지에게 남자가 말했다.
“아니, 저기…….”
“왜요?”
“그냥 가요?”
처음 하는 원나잇이라 그냥 이대로 헤어지는 게 맞는 건지 궁금해서 물은 거였다. 잡지에서도 그냥 쿨 하게 헤어지는 게 맞다고 했지만 정말 이대로 끝인 건지.
남자는 다시 침대로 와 앉아서 미소를 띠고 한참 혜지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설마 나 지금 동정심 유발하고 있는 건가? 혜지는 약간 자존심이 상해 말했다.
“아니,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아요?”
남자가 혜지의 손을 붙잡고 그윽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름이 뭔데요?”
“도혜지요.”
남자는 혜지의 손을 조물거리다가 손등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혜지 씨.”
낮고 다정한 목소리에 혜지는 갑자기 슬퍼졌다. 내 인생에 다시는 안 나타날, 말도 안 되게 멋진 남자인데 이대로 헤어져야 하다니. 촌스럽고 구질구질해도 한 번 더 만나자고 매달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휴대폰 벨소리가 분위기를 깼다.
“아, 작가님. 네, 아니에요. 곧 갈게요.”
남자는 아쉬운 표정으로 혜지의 손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이대로 등을 보이면 끝이었다. 혜지는 구질구질해지기로 했다.
“다시 만나면 안 돼요?”
남자는 놀란 표정으로 전화를 끊고 쳐다봤다.
“연락하고 싶어요.”
진지한 혜지의 말에 남자는 미소 지었다. 어딘지 쓸쓸한 미소였다.
“안 만나고 싶을 걸요.”
혜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남자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사실 나 농사짓고 있어요.”
난데없는 대답이었다. 혜지가 되물었다.
“아, 주말 농장도 해요?”
“아뇨. 직업으로 농사짓는다고요.”
도대체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혜지는 잠깐 머릿속에서 번역기를 돌렸다. 하지만 당최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감도 안 잡혔다. 그녀의 표정이 너무도 당황스러워 보여서 남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어렵죠? 잘 가요, 혜지 씨.”
남자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소리가 쾅, 하고 나는데도 혜지는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럼 저 남자의 직업이…….
“농부……?”

* * *


오전 내내 혜지는 영혼이 가출한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멍 때리는 부장의 눈치를 보느라 사무실 분위기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사표를 냈다는 소문이 퍼져서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면서 온갖 추측을 해 댔다. 하지만 혜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남자의 말만 귓가에 맴돌았다.

“역시 어렵죠?”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농부라니. 그 기럭지에, 그 외모에, 그 디제잉에, 그 키스 실력에?
“농부라고?”
“뭐라고 하셨어요, 부장님?”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는지 옆자리 직원이 흠칫해서 물었다. 혜지는 그제야 현실로 돌아와서 고개를 젓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도 부장님, 홍 이사님이 찾으시는데요.”
“무슨 일로요?”
“모르겠어요. 그냥 방으로 오라고만…….”
“됐어요. 안 가도 돼요.”
혜지는 손을 휘젓고 무시하려 했지만 바로 앞에 홍 이사가 서 있었다.
“가야 되겠는데?”
옆에 대행사 최 실장도 함께였다. 혜지는 눈이 커져서 벌떡 일어섰다.
“최 실장님은 왜요?”
“수수료 건 때문에 불렀어요. 프로모션은 해야 하니까.”
홍 이사는 회의실 의자에 뒤로 기댄 채 한껏 거만한 태도로 기획서를 가리켰다.
“수수료는 문제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기껏 사표를 내고 프로모션은 정상적으로 진행하게 해 달라고 했더니 이건 또 무슨 소린지. 혜지는 석표를 노려보면서 한마디 더 했다.
“프로모션은 문제없어요. 신제품 런칭이 코앞인데, 처음부터 다시 기획할 수도 없다고요.”
“그러니까 내용 검토하고 계속 진행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석표는 이죽거리며 말했다. 생각대로 놈은 처음부터 그녀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거였다.
“제가 마음에 안 드시면 사표 수리하시라고요. 대행사는 건드리지 마시고요!”
최 실장 앞에서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이 결국 튀어나왔다. 말을 뱉어 놓고 최 실장을 보니,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게 보였다. 혜지는 미안함에 가슴이 아팠다.
석표가 외부 대행사와 잘못된 관계로 일을 진행한 바람에 그가 퇴사한 이후로 내부 감사가 깐깐해졌었다. 오랫동안 같이 일해 오던 최 실장의 회사도 동일한 비용에 업무는 늘어나는 결과가 되었다. 해마다 물가 인상률만큼 늘어나야 마땅한 수수료도 동결 내지는 깎이기 일쑤였다.
팀장도 없이 혜지가 팀장 대행으로 일하는 데 최 실장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사정을 모를 만한 석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갑질을 하고 있는 건 혜지를 길들이기 위해서일 게 뻔했다.
“최 실장님, 제가 제시한 만큼 수수료 절감할 수 있죠?”
혜지가 계급장 떼고 주먹이라도 날릴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지만 석표는 무시하고 최 실장에게 물었다.
“아, 네. 어차피 저희도 생각하고 제출한 거였습니다. 당연히 조정이 되어야죠.”
“최 실장님!”
혜지가 놀라서 그를 불렀지만 최 실장은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거 봐, 도혜지 씨. 그동안 얼마나 커뮤니케이션이 엉망이었던 건지 알겠지? 내가 다 정리했으니까 이대로 진행해요. 최 실장님은 가 보셔도 됩니다.”
최 실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90도로 인사를 했다. 석표가 거만하게 앉은 채로 목만 까딱하는 모습을 본 혜지는 최 실장을 따라서 나갔다.
“왜 그러셨어요? 준비 비용에 얼마 들어갔는지 제가 다 아는데.”
최 실장이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괜찮아요. 그 정도 깎아 줘도 우리 안 망해요.”
혜지는 그 미소에 억울함이 복받쳐서 눈물이 차올랐다.
“걱정되시면 사표 내지 말고 계속 일하세요. 우리 일도 좀 더 주시고.”
위로 받아야 할 최 실장이 오히려 혜지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격려했다. 그녀는 화가 나서 다시 회의실로 뛰어들어 갔다.
“홍 이사님!”
석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면서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왜 그렇게 물러? 대행사는 한 번씩 이렇게 들었다 놨다 해 줘야 하는 거 몰라? 혜지 씨가 직접 못 하니까 내가 대신 악역 맡아 준 거잖아.”
입사 때는 어리바리해서 마케팅 용어 하나하나 혜지한테 물어보던 석표였다. 그랬던 자식이 언제부터 이사였다고 잘난 척인가 싶어 혜지는 더 열불이 났다.
“잘 됐어. 이번에 비용 절감한 거, 혜지 씨 공으로 돌릴 테니까. 연말 성과급 좀 노려보자고.”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남을 쥐어짜서 자기 성과만 올리겠다는 저 비열한 인간.
“홍석표, 이 개자식아!”
회의실 바깥까지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석표가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지, 지금 뭐라고 했어?”
“개자식이라고 했다, 어쩔래!”
“이 여자가…….”
“허? 또 성차별 발언이냐? ‘ASAP’가 인사말인 줄 알고 전체 메일 돌린 주제에!”
석표의 얼굴이 벌게졌다. 입사 때 자기소개를 하는 메일을 지사가 아니라 글로벌 전체 메일로 돌린 것도 모자라 ‘여러분 반가워요, ASAP(여러분 반가워요, 최대한 빨리)’ 라고 써서 글로벌 조롱을 받았던 석표였다. 그 일은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농담이었다.
“조용히 못 해! 당신 지금 상사한테…….”
“됐고, 네가 언제부터 갑이었다고 갑질이야? 거짓말쟁이 가짜 총각이!”
“뭐?”
“인신공격당하니까 쪽팔리냐? 넌 허구한 날 인신공격했잖아. 나랑 최 실장이 무슨 관계냐고! 넌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거 없어. 변함없이 개자식이야!”
회의실 밖 사무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블라인드 밖으로 사람들 그림자가 보일 정도로 모여든 모양이었다. 석표는 한마디라도 대꾸했다간 다 들릴 거라는 생각에 진땀을 흘리면서도 아무 말도 못 했다. 혜지는 아랑곳 않고 외쳤다.
“잠깐이라도 널 좋아한 내가 병신이지. 내 사표 당장 수리해!”
석표는 붉으락푸르락하면서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혜지가 씩씩대며 문 쪽으로 걸어가자 달려와서 문을 막아서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이렇게 나가면 진짜 매장이야.”
“고양이 쥐 생각해 주네. 나 오라는 데 많아.”
석표는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이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너만 그런 줄 알아? 나도 너하고 얽힌 다음부터 인생이 꼬였다고.”
“인생 더 꼬이기 전에 비켜.”
“너 같은 여자 누가 좋아할 것 같아? 이렇게 독하고 안하무인인 여자를?”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 코웃음을 쳐야 마땅한데 혜지는 뜬금없이 지난밤 그 남자가 생각났다.

“잘 가요, 혜지 씨.”

그 말과 겹치듯이 석표가 문에서 비켜나면서 말했다.
“잘 가라. 네 사표는 당장 오늘 수리해 줄 테니까.”
혜지의 불타오르던 전의가 그 남자를 생각하는 순간에 싹 식어 버렸다. 나 같은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어? 제일 오래 연애했던 남자는 이 모양으로 돌아왔고, 인생 최고로 마음에 들었던 남자는 이제 더 이상 볼 수도 없는데.
그녀가 회의실에서 나오자 직원들은 우르르 제자리로 돌아갔다. 일하는 척, 전화를 받는 척하면서도 혜지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그래, 가자.”
혜지는 캐비닛 속에서 오래전부터 준비해 놓았던 상자를 꺼내서 펼쳤다. 이젠 아무 의미가 없을 잡동사니들을 담기 시작했다. 기획서, 제안서, 사진첩, 연락처, 명함. 오라는 데가 많다고 호기롭게 말했지만, 서른셋에 퇴사하고 나서 과연 갈 데가 있을까.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부장님…….”
“가시는 거예요? 지금?”
직원들이 놀라서 물었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부장씩이나 되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변명하기 싫었다. 혜지는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쓱 닦고 묵묵히 상자를 채웠다. 마지막으로 사원증과 보안 키를 내려놓은 채 그대로 회사를 나왔다.

—도 부장, 홍 이사는 내가 잘 타일렀어요. 사표 수리 잠시 미룰 테니까 못 쓴 휴가 쓴다 생각하고 2주 정도 쉬어요.
지사장과의 통화 녹음을 몇 번씩이나 듣고 있었지만 혜지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제일 좋아하는 마론 인형 출시였는데. 공주가 아니라 커리어 우먼, 당당한 여성의 이미지를 담은 신세대 인형이었는데. 평소 공주 콘셉트는 오글거려 했지만 이번 런칭 쇼는 그야말로 혜지의 취향에도 잘 맞는 멋진 기획이었다. 다시 눈물이 터지려고 하자 혜지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 화끈하게 미친년이다, 너는.”
“아, 욕 좀 그만 해라.”
“30년 동안 들어 놓고.”
“그러니까 그만 좀 하라고. 네 애한테도 그럴 거냐?”
혼자서 좀 더 궁상맞아지고 싶었지만 미숙이한테 집 비밀번호를 가르쳐 준 게 실수였다. 따로 연락도 안 했는데 점심부터 미리 집을 차지하고는 청소한다, 부침개를 한다면서 부산을 떨었다.
“아직 결혼도 안 했거든?”
“결혼하기 전에 벌써 애부터 만들었거든?”
혜지가 배를 가리키며 놀리자 부침개를 부치던 미숙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게. 배가 부르기 전에 식 올릴 수 있을까.”
그러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쪼그려 앉았다. 혜지가 당황하면서 얼굴을 들여다봤다.
“왁!”
“으앗, 뭐야!”
미숙의 장난에 맥 빠진 혜지가 주저앉았다. 미숙이 키득거리면서 일어나 다시 뒤집개를 잡았다.
“식장 예약이 어려워서 그러지, 다른 건 다 됐어. 아니, 결혼들 안 한다고 난리던데 왜 식장은 예약이 꽉꽉 차 있는 거야? 미스터리다, 진짜.”
“이 동네는 혼기 찬 여성이 엄청 많은가 보지, 뭐.”
“많으면 뭘 하냐. 건강하고 능력 되는 남자가 많아야……. 참, 너 어젯밤에 어떻게 됐어?”
혜지는 엉금엉금 기어서 한껏 게으른 자세로 침대 위에 누웠다. 지난밤과 오늘 낮을 비교하니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기분이었다. 그 남자를 다시 볼 수 없으니 그것도 역시 지옥인 건가. 혜지는 다시 우울해졌다.

* * *


“영 어색하네요. 사진 찍히는 갈 싫어해서…….”
“일단 외모가 되시잖아요. 게다가 우리 사진 기자가 대포 여신 출신이거든요.”
천장이 높고 햇살이 잘 드는 카페에서 사진을 한참 찍고 나서야 태규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긴장한 탓인지 좀 더워져서 셔츠 단추를 하나 더 풀고 오렌지 주스를 쭉 들이켰다.
“그런데 대포 여신이 뭐죠?”
“아, 그 있잖아요. 아이돌 사진 찍으러 다니는 팬들. 대포 같은 망원 렌즈 가지고 다니면서 전문적으로 사진 찍는 사람들이요.”
“아, 군인 출신이신 줄 알고.”
태규는 약간 쑥스러운 표정으로 괜히 시선을 돌렸다. 인터뷰하는 에디터 눈엔 유행에 뒤떨어진 아재 느낌마저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사진 기자에게 그의 옆모습을 찍으라고 손짓했다.
“소미한테 얘기 들으니까 동생분도 농업 전공하셨다고요?”
“네, 농생물학과 전공했고 생명 공학 박사 과정….… 그런데 이게 기삿거리가 되나요?”
“돼요. 기획 자체가 생소한 직업의 남성들이라서. 비주얼도 충분하시고.”
계속 이어지는 외모 칭찬에 태규는 살짝 언짢았지만 내색은 못 하고 물만 마셔 댔다. 농장 홍보를 위해서 나선 인터뷰였지만 매번 이상하게 포장되기 일쑤였다. 이번에도 여성 잡지니 또 잘생긴 외모와 대규모 농장 같은 속물적인 내용만 나갈 듯싶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추가 취재 필요할지도 모르는데, 휴대폰 번호 알려 주시겠어요?”
제사보다 젯밥에만 관심 있는 여자 에디터도 매번 있었다. 태규는 최대한 친절한 상업성 미소를 띠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농사꾼이라 휴대폰 쓸 일이 없어서요. 홍보 담당 민소미 씨에게 연락 주세요. 농장 취재 필요하시면 초청은 가능합니다.”
“농장 초청이요?”
이미 제공받은 부경 농장의 아름다운 사진을 떠올리며 에디터는 벌써 기분이 좋아진 듯 웃었다. 그렇게 웃어 놓고 정말로 취재를 온 사람은 없었지만.
기자들을 보내고 태규는 파란 스포츠카에 올라탔다. 인터뷰만 벌써 세 개째. 본격적인 모내기 철이 되기 전에 해치우자는 그의 고집 때문에 상경 일정이 빡빡해진 탓이었지만, 그래도 너무 하루에 몰린 느낌이었다. 게다가 간밤에는…….
삐리리리리.
“왜. 뭔데.”
소미의 전화가 걸려오자 태규의 피곤과 짜증이 폭발했다. 소미가 약간 기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인터뷰 끝났어요?
“야, 넌 도대체 인터뷰를 하루에 몇 개를 몰아넣은 거야? 내가 아이돌이냐?”
—네 개요. 홈쇼핑 하나 남았는데…….
소미의 우물쭈물하는 말투에 태규는 좀 심했나 싶어 심호흡을 크게 하고,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다.
“그래, 홈쇼핑. 알아, 아는데 인간적으로 3박 4일이면 하루에 두 개씩 쪼개자. 응?”
—알았어요. 근데 15분 후까지 가셔야 되는데.
“알았다면 됐고. 15분 후…… 뭐?”
—15분 후요. 도착 못 하면 메이크업이랑 의상 못 하…….
“민소미!”
태규는 전화를 끊고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소꿉친구만 아니었으면, 사내자식이었으면 한 번 뜨는 건데.
내비게이션이 쉴 새 없이 경로를 재탐색할 정도로 빠르게 달렸다. 그러는 사이 소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왜, 또.”
—신호 위반하는 거 아니지?
“안 해.”
—태규야, 화났어?
태규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이내 온화한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화 안 났어. 잘하고 갈 테니까 저녁 먹고 기다려.”
소심한 소미의 기분이 가라앉으면 감당이 안 됐다. 어떻게든 달래 놓아야지. 태규는 빠른 힙합 음악을 틀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굼벵이는 헛개나무보다 가격이 세 배는 더 나가지만, 효능 면에서는 월등합니다. 비주얼은 별로여도 여러분들이 걔들이랑 눈 마주칠 일은 없을 거고요.”
“하하, 맞죠. 전혀 알 수가 없네요. 굼벵이 안 들어 있는 건 아니죠?”
헐레벌떡 달려온 탓에 등줄기엔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지만 얼굴은 분장 덕에 뽀송뽀송했다. 하지만 쏟아지는 조명과 카메라들 때문에 피부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태규는 농담까지 던져가며 준비한 멘트를 충실히 해냈다.
“근데 몸이 완전 좋으세요. 이 팔뚝 보이시나요, 여러분? 이게 다 굼벵이 덕분입니다.”
태규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팔뚝을 들어 보였다. 갑자기 주문량이 쑥쑥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의 이미지가 먹힌다 싶었는지 쇼 호스트가 물었다.
“아직 미혼이시라면서요?”
“네. 농사일하다 보니까요.”
“부경 농장이 굼벵이 상품으로 유명하지만, 총 규모가 80만평이나 되는 농장이거든요.”
다른 쇼 호스트도 맞장구를 쳤다.
“최신식 농장에다가 배우 뺨치는 외모를 가지셨는데, 결혼 못 하신 게 굼벵이 때문인가요?”
“하하하.”
“말씀드리는 순간 매진 임박, 매진 임박입니다! 지 대표님, 매진되기 전에, 공개 구혼이라도 한 번 하세요.”
“그러세요. 어떤 여자 분이 좋으세요? 굼벵이 좋아하는 여자?”
매진 임박이 뜨자 태규도 기분이 업 되어 무슨 멘트라도 보태고 싶었다. 졸지에 공개 구혼 방송이 되어 버렸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