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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월드 1권(25화)
11. 체이서(4)


알다마다. 마왕전쟁이라면 더 월드의 근간을 이루는 커다란 줄기, 메인 시나리오 중 하나였으니까. 오래전 RPG에서 자주 나오던 것처럼 인간계에 나타난 마왕을 용사와 그 일당들이 무찌르고 세계에 평화를 되찾았다라는 간단하고도 유명한 이 이야기는 마왕을 물리친 파티의 구성이 바움 왕국의 왕자와 공주인 소드 임팩터 둘과 소드 마스터 라디우스, 현자 메디우스, 성자 라헬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함께 알려 각 직업의 인기 구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럼 얘기가 쉽겠군요.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아멜리아 번 바움. 마왕전쟁의 용사인 소드 임팩터 아델 번 바움 님의 후손입니다.”
“에에에엑?”
확실히 문헌상으로 마왕전쟁이 끝나고 왕자인 아담 번 바움은 왕국으로 돌아갔지만 공주인 아델 번 바움은 실종 처리가 되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궁벽한 산골에 처박혀 있다니…… 이거 믿을 수가 없군.
“정말 놀라운 이야기로군요.”
어지간해서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쥬안도 이번만큼은 놀란 얼굴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지요. 마왕전쟁 도중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은 아델 님을 구한 것이 이 마을에 사는 사냥꾼 청년이었다더군요. 몸을 추스르는 동안 청년의 순수함에 반한 아델 님은 마왕전쟁 직후 이곳으로 돌아와 그 청년과 함께 사셨고요.”
“그래서 실종 처리했던 거로군. 둘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그 무수한 추측들 속에서도 바움 왕국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것이었고.”
설명을 들으니 아주아주 고리타분한 스토리 하나가 머릿속으로 흘러 지나갔다.
“그럼 왜 하멜을 바움 왕국으로 보내지 않는 거죠? 오래 떨어져 살았다곤 해도 왕가의 후손이니까 꽤 호강하며 살 텐데.”
그때 곰곰이 생각하던 레이첼이 끼어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내지 않으려는 걸 거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피가 희석되긴 했어도 왕가의 후손이기 때문에. 더구나 남자아이이기 때문에. 바움 왕국에 가서 어떻게든 왕가의 자식임이 드러난다면 말석이나마 왕위 계승권을 가지게 될 테니까. 힘없고 빽 없는 미운 오리 새끼쯤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게 보통인 동네라고, 거기는.”
“아…….”
“반면 마왕전쟁 때의 동료인 메디우스 님이 세운 마탑이라면 바움 왕국에서 압력이 오더라도 막아 줄 힘도 있을뿐더러 하멜에게 딱 적당할 만큼의 편의를 봐줄 테죠. 듣자하니 하멜 본인도 마법을 배우고 싶어 한다는 것 같고.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이에요. 더구나 그 아이는 ‘현자’가 될 가능성을 갖추고 있어요. 아마 마탑에서도 거절하진 않을 겁니다.”
쿠웅!
그녀의 말에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뭐라고요? 지금 현자라고 했습니까?”
아직 나도 이루지 못한 것을 저 꼬마가? 말도 안 돼!
“현자가 될 가능성이라고요? 그런 걸 알아볼 수도 있는 겁니까?”
“예.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럼 저는, 저는 어떻습니까?”
현자가 될 가능성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지만 상대가 영웅의 후손이니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왕전쟁의 영웅이라면 현자 메디우스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조금은 조급해 하는 나를 찬찬히 훑어보던 아멜리아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레스 님은 현자와 조금 맞지 않으시는 것 같군요.”
“거짓말! 내가 현자가 되지 못할 거라고? 이 아레스 님이?”
담담한 그녀의 말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웃기지 마. 내가 그따위 말을 믿을 것 같아?
“정말, 현자가 되고 싶으신 겁니까, 아레스 님은?”
현자라면 모든 마법사들이 꿈꾸는 경지, 당연한 거 아닌가? 당연한 말을 신중하게 묻는 그녀의 태도에 도리어 화를 내려는 순간, 아멜리아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아레스 님은 현자의 재능이 없습니다. 하지만 대마법사의 재능은 충분해 보이는군요. 꼭 현자가 되고 싶으신 겁니까?”
당연히 대마법사가, 아니 현자가…… 끄응.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대마법사와 현자, 같은 말 아니었어?
“현자와…… 대마법사? 그 두 개가 다른 거라고?”
그제야 빙긋 아멜리아가 웃어 보였다.
이 아줌마 사람 놀리는 거야 뭐야?
“역시 모르셨던 것 같군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렇다더군요. 설마 마왕전쟁에서 몇 만, 몇 십만이나 되는 몬스터 군단을 달랑 다섯이서 뚫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아니, 그거야 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부분이라 대강 얼버무리자 아멜리아가 웃으며 이야기를 받았다.
“마왕성 근처까지는 중간계 연합으로 불리는 인간과 이종족 연합군이, 마왕성 입구까지는 다른 동료들이 몬스터들을 막았다더군요. 단지 마왕과의 전투에 참여한 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다섯 용사일 뿐. 어쩌면 마왕과의 싸움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막아 준 다른 동료들의 전투가 훨씬 힘들었을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설에선 묻힌 이름들 중 한 분이 대마법사 카이스만 님이었다더군요. 대마법사와 현자,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저도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후에 메디우스 님이 남기신 말에서 조심스레 추측해 볼 따름입니다. ‘우리 중 유일하게 마왕과 대적할 수 있던 건 대마법사 카이스만뿐이었다. 다만 내가 마왕의 전율스런 공격을 막을 수 있고, 수만의 몬스터들이 마왕성을 향하고 있었기에 내가 그 자리에 섰던 것뿐이다’라고 하셨죠.”
그 말에 갑자기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대마법사와 현자, 그리고 마왕전쟁이라고?
내가 잠시 공황 상태에 빠지자 이번엔 쥬안이 질문을 이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지요. 진 아델식 환영검……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녀가 외친 스킬 명은 월드 전역에 퍼진 소드 임팩터들을 모두 부정하는 의미이기도 했으므로 쥬안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래요. 세상에 알려진 기술들도 충분히 위력적이긴 하지만 진짜는 아니죠. 소드 임팩터의 진정한 기술은 아직까진 왕가의 혈통을 따라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그럼 아델식 환영검은 이대로 사장시킬 생각이신 겁니까?”
묻고 싶던 게 이거였군. 혈통을 타고 이어지는 기술이라면 현재 아멜리아가 마지막 전수자란 소리인데 이대로 죽어 버리면, 혹시 하멜에게 이어졌더라도 하멜이 마법사의 길을 택했다면 아델의 맥은 여기서 끊긴다는 이야기가 된다. 몇 백 년 전 기술이라고는 하나 마왕을 물리친 영웅의 것이라면 아까 보아 알 수 있듯이 그 위력이 굉장할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그런 기술을 사장시킨다는 건 더 월드 전체로 봐도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의 법도를 생각하면 마땅히 그래야겠지요.”
“아…….”
“하지만 더 이상 그런 사치를 부릴 수 없을 것 같군요. 지금 이 순간에도 약속의 때는 다가오고 있으니까요.”
“약속의 때라고요?”
레이첼이 갸웃거리며 묻자 나와 쥬안이 마주보며 한숨을 쉬었다.
에휴, 세계관 공부도 안 하는 건가?
“마왕의 부활을 뜻하는 겁니다. 마왕전쟁 시나리오 맨 끝자락에 적힌 예언에 나오는 말이지요. 들리는 소문으로는 통합 시나리오 퀘스트 중 마왕 소환 퀘스트가 존재한다더군요. 월드 곳곳에 숨겨진 ‘검은 탑’의 흑마법사를 찾아 없애는 것이라던가요. 다만, 누구든 일단 시작해 버리면 다음 단계를 성공하든 실패하든 시간의 경과에 따라 계속해서 진행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종 단계를 막지 못하면…….”
“마왕 현신……이라는 건가?”
뜨끔.
마왕 소환 퀘스트에 대해서는 나 역시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듣다 보니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에…… 혹시 몇 단계로 나뉘어 있는 건지도 알아? 아니면 난이도라든가.”
마왕 소환쯤 되면 난이도도 보통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암, 그럴 리 없지.
“리셋 전에도 시작 퀘스트가 꽤 나중에서야 발견돼서 8단계까지밖에 진행되지 못했다더군요. 8단계에서 등장한 몬스터가 네임드 최상급 리치였다던가요.”
“컥!”
아무리 ‘마왕 소환’ 퀘스트라지만 최상급 리치라면 그 자체로 마도사급(300∼399레벨)이다. 거기다 네임드라면? 레벨에 따라 다르기야 하겠지만 최악의 경우, 400레벨 대의 전투력을 지녔을지도 몰랐다. 가히 최종 병기라 부를 만한 수준이지만…… 쥬안이 말하는 걸로 봐선 8단계도 끝이 아니었다.
그럼 대체 최종 보스는 어느 정도의 수준이라는 거야?
“반면 1단계에서는 견습급에 약간 못 미치는 네크로맨서가 나왔죠. 출몰 장소가 워낙 낮은 레벨 대의 사냥터라 버그 신고가 들어올 정도이긴 했지만요.”
“그, 그래? 그렇단 말이지?”
끄응, 아무래도 된통 잘못 걸린 것 같군.
“휴우. 8단계까지 걸린 시간은 현실 시간으로 총 1년입니다. 쪽수에서야 밀리겠지만 어차피 퀘스트를 주도하는 건 몇몇의 고수 유저들일 테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군요.”
내 반응에 짐작한 것인지 쥬안이 ‘정말 곤란한 녀석이군’이라는 듯한 눈빛으로 추가 정보를 제공했다.
1년이라, 그 정도면 충분하지.
“크흠.”
“아, 잠깐 이야기가 샜군요. 말씀하시죠.”
우리끼리의 이야기가 계속되자 아멜리아가 인기척을 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가늠하건대, 제 목숨은 앞으로 1년을 넘기기 힘들 것입니다. 반면 천 년 전 마왕을 추종하는 자들의 기운이 최근 포착되었지요.”
찌릿.
이 부분에 와서는 쥬안의 눈빛에 질타하는 의미가 듬뿍 담겼다.
“그래서…… 레이첼 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에? 저, 저요? 아레스가 아니라?”
자신을 지목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듯 레이첼이 얼떨떨해 하는 사이 아멜리아가 자루 부분이 앞으로 가도록 검을 내밀었다.
“제가 여러분을 위해, 그리고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인 것 같군요. 그대에겐 너무 가혹한 짐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무슨……?”
“검을 쥐세요. 그럼 알게 될 겁니다, 당신의 사명을.”
꾸욱.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아멜리아의 박력에 레이첼이 저도 모르게 검을 쥐자 검의 중심에 박혀 있던 푸른 보석이 환하게 빛을 내며 생명을 얻었다.

[파티원 레이첼 님이 소디언 ‘아트와이트’를 얻으셨습니다.]
[파티원 레이첼 님이 ‘레전드 체이서’로 전직하셨습니다.]
[파티원 레이첼 님이 칭호 ‘전설을 이어 가는 자’를 얻으셨습니다.]

아직 파티를 풀지 않은 탓에 레이첼의 변화가 알림음을 통해 곧바로 전해졌다.
전설을 이어 가는 자, 레전드 체이서.
리셋 전에도 등장하지 않았던 천 년 전 직업의 재현에 놀랄 새도 없이 검으로 부터 맑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가 새로운 계승자인가?

“맙소사, 에고 소드?”
나와 쥬안의 입에서 일제히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