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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월드 1권(24화)
11. 체이서(3)


둥! 둥! 둥! 둥! 둥!
“적이다! 산적들이 습격해 온다!”
아멜리아가 마을에서 차지하던 비중에도 불구하고 산적들의 눈을 의식해 조용하게 장례를 치르기로 했건만 어떻게 안 것인지 장례가 채 끝나기도 전에 산적들의 습격이 일어났다.
제길, 어쩔 수 없군.
“레이첼, 가자!”
“응.”
마을 청년들이 나서긴 했지만 ‘단번에 보급을 끊으면 의심할 테니 서서히 줄여 가도록 하겠다’라던 쥬안의 말 때문에 아직은 식량 사정이 좋은 산적들을 감당해 내긴 어려웠다.
결국 제대로 된 전력은 나와 레이첼이 전부라는 소리.
서둘러 입구 쪽으로 향하니 외곽을 지키던 자들은 모두 쓰러져 있고 뒤늦게 도착한 마을 청년들만 그들과 대치를 이루고 있었다.
“선빵 필승! 더블 파이어 스트라이크!”
쿠과과과광!
“크악!”
“사, 살려 줘!”
그 사이로 날아들자마자 나는 막대한 마나를 쏟아부어 열 명이 넘는 산적들을 날려 버리고 다시 뒤로 물러섰다. 무리하게 4서클 마법을, 그것도 더블 스펠로 사용한 탓에 마나 회복이 절실해진 탓이다.
“이놈들, 여기 숨어 있었구나! 모두 공격!”
마나 포션을 마시고 마나 풀을 파스처럼 덕지덕지 붙여 대고 있을 때 우릴 알아본 럴크가 광분하며 돌격 명령을 내렸다.
기습으로 단번에 많은 부하를 잃었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서른이 넘는 수의 부하들이 있었다.
“쳇, 타깃을 좀 더 멀리 잡을 걸 그랬나. 레이첼, 부탁해.”
“헷! 맡겨만 두라고.”
내가 회복에 전념하는 동안 시간을 버는 것은 레이첼의 몫이었다. 전에는 고전했지만 지난 보름간 나 못지않은 접속 시간을 보이며 레벨 업에 몰두한 레이첼에게 이제 산적 두엇은 식후 몸풀기 감도 되지 않는 것이다.
“일루전 스텝.”
선두에 달려오던 산적들과 마주쳐 가던 레이첼의 몸이 일순간 흐릿해졌다.
촤락.
그러곤 별다른 공격 스킬의 사용도 없이 주춤하던 산적 둘의 목을 갈랐다. 보름간의 특훈을 통해 컨트롤을 향상시킨 결과였다.
“흥.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와! 와아∼!”
“우리도 싸우자!”
“마을은 우리가 지킨다!”
“와아아아!”
레이첼의 놀라운 신위에 마을 청년들도 사기충천했다.
“거차∼앙!”
“찔러!”
후웅. 후웅.
“매직 미사일!”
파밧.
“가드! 가드!”
채앵! 챙!
개개인의 실력은 산적들에게 한참 못 미쳤지만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가진 바 재주를 모두 쏟아 보이자 그들도 결코 무시 못할 전력이 되었다.
“차하앗!”
더구나 적진 한복판에서 레이첼이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니 혼란은 더욱 가중됐다.
부아앙!
“흥. 누가 또 당할까 봐?”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느꼈는지 과거 사천왕, 지금은 삼인방이 된 부두목들 중 둘이 레이첼을 노리고 덤벼들었다.
타닷.
휙.
하지만 이번에는 레이첼도 달랐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백스텝으로 몸을 피하더니 곧장 일루전 스텝을 밟으며 한 녀석의 가슴을 쩍 하니 갈라 버린 것이다. 그러곤 얄밉게도 다른 녀석의 공격이 닿기도 전에 저만치 물러서 버렸다. 히트 앤 런. 스피드형 소드 임팩터라는 자신의 직업을 가장 잘 살린 공격법이었다.
“이 빌어먹을 계집이!”
혀까지 쏙 내미는 레이첼의 도발에 완전히 넘어간 녀석은 비틀거리는 동료도 내팽개치고 무작정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라이트닝 스피어.”
하지만 녀석의 상대는 레이첼만이 아니다. 상황을 주시하던 내가 재빨리 뛰어들며 3서클의 전격의 창을 내지른 것이다.
“크와아악!”
“이어서 차지 볼트!”
콰지지직.
심장을 관통당한 채 감전되어 부들거리는 놈에겐 시선조차 던지지 않고 재빨리 4서클의 강력한 전격의 구를 생성시켰다. 잘만 하면 레이첼에게 중상을 입은 녀석과 함께 나머지 한 녀석도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후압!”
치지지지직.
콰앙!
하지만 아쉽게도 무산되고 말았다. 생각지도 못한 졸때기 하나가 목숨을 걸고 몸으로 차지 볼트를 대신 받아 낸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럴크 주변에 있던 녀석 하나가 집어던져진 것이지만.
“이놈드을∼!”
아끼던 부두목 중 둘을 잃고 한 명은 중상을 입게 되자 분노했는지 럴크의 눈에 잔뜩 핏발이 섰다.
“그렇다면…….”
푸쉿.
그 모습에 가볍게 파이어 볼을 날리며 외쳤다.
“36계 줄행랑이다!”
“어딜 감히!”
쾅!
분노한 럴크는 중상을 입은 녀석에게 포션 한 병을 던져 준 뒤 다시 한 번 부하를 방패 삼으며 달아나는 나를 뒤쫓았다.
쳇, 상대해 주고 싶어도 마나가 부족하다고. 그렇다고 기다려 줄 것도 아니면서.
능력치의 차이가 워낙 확연했기에 거리는 금세 좁혀졌지만 붙을 만하면 간간이 날려 댄 마법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잡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라면, 그 마법들 때문에 포션을 마시면서 달려도 쉬이 마나가 차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쳇, 결국 여기까지 와 버렸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의 종착지는 결국 아멜리아의 장례식장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촌장을 비롯해 모두 전투력이 없는 자들. 내가 마나를 회복할 시간을 벌어 주기는커녕 마나를 소비해 가며 보호해 주어야 할 사람들뿐이었다.
“크크크, 날 여기로 안내하다니. 수고를 덜어 주는군.”
아멜리아의 것으로 추정되는 관을 보자 럴크는 오히려 침착함을 되찾았다. 어쩌면 최고조에 이른 분노를 다시금 압축시키는 건지도 몰랐다.
“모두 죽여 주마. 네놈도, 저 안에 누워 있는 년도 다시 한 번! 빠드드득!”
하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폭발하고 말았다.
“두 쪽을 내어 주마! 차지 어택!”
우두둑.
쐐애애액―
럴크의 우람한 근육이 잠시 뒤틀리더니 이내 폭발적으로 쏘아져 나갔다.
“이런!”
데굴데굴.
파이어 볼 따위로 견제해 봤자 힘으로 갈라 버리고 들이닥칠 것이라는 걸 깨닫고 재빨리 바닥을 굴렀다.
콰앙!
이어지는 굉음. 오동나무로 만든 목관이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처음부터 둘을 한꺼번에 벨 생각이었나? 이런 무식한 놈!”
“이, 이건……?”
하지만 나의 욕지거리도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시체가 들어 있어야 할 관에 잃어버린 자신의 머리카락 묶음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이다.
“두, 두목!”
그때 입구에서 그를 대신해 부하들을 지휘하고 있어야 할 부두목 중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어깨에는 긴 자상을 입고서.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 것이냐? 벌써 정리가 끝난 건가?”
“그게 아니라…… 달아나야 합니다. 함정입니다!”
“함정?”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럴크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불벼락을 내리칠 듯 일그러졌다.
“쥬안, 그놈이 우릴 속인 것 같습니다. 두목께서 주신 그 포션도 실은 회복약이 아니라 독이었습니다!”
“뭣이? 쥬안, 이놈이……!”
레이첼이 늦는 걸로 보아 아직 다른 산적들이 모두 정리된 것은 아닌 듯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이 둘뿐이라는 것 같았다.
자, 그럼 마무리를 지어 볼까?
“이제 주인공이 등장할 차례겠지? 나오세요, 아멜리아 아주머니.”
그 말과 함께 조문객으로 위장하고 있던 아멜리아 아주머니가 후드 달린 외투를 벗어던지며 검을 빼 들었다. 푸른 검신에 금빛 조각이 장식된 무척이나 늘씬하고 아름다운 검이었다.
“럴크 이놈. 그렇게 경고했건만 감히 마을을 습격해?”
“아, 아니. 그, 그, 그게 아니라…… 끄아악! 살려 줘!”
병들었어도 여전히 살아 있는 눈빛에 제압된 걸까 그녀와 눈을 마주친 럴크는 싸워 볼 생각도 못하고 곧장 줄행랑치기 시작했다. 자신의 생명과도 같다던 검마저 나 몰라라 내팽개친 채.
“와아아악!”
“이런, 레이첼! 위험해!”
때마침 잔챙이들을 해치우고 합류하던 레이첼이 그의 앞을 가로막게 되었다.
그러나 소리치는 순간, 어느새 아멜리아가 럴크를 넘어 레이첼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잘 보도록 해요. 이것이 진짜 소드 임팩터의 검입니다.”
번쩍.
눈부신 섬광과 함께 아멜리아의 검이 아홉 개로 쪼개어졌다.
“진(眞), 아델식 환영검. 오의(奧義) 데스 스타!”
고오오오오오.
“아닛?”
파밧.
퍼석.
검 끝에서 뭔가 번쩍이는가 싶더니 럴크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스르르륵.
그리고 흙 인형이었던 것처럼 가루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 돼…….”
“으읍. 쿨럭, 쿨럭!”
나의 경악성이 터져 나오기 무섭게 아멜리아 아주머니가 선혈을 한 움큼씩 토해 내기 시작했다.
“아, 아주머니를 어서 안으로!”
이미 전의를 상실한 부두목의 목을 가볍게 따 주고 승리의 환호도 지를 새 없이 아멜리아를 들쳐 업어야 했다.
난데없이 진식 스킬이라니,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쿨럭, 걱정 말아요. 제 몸은 제가 더 잘 아니까.”
포션과 온갖 약초를 들이붓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뒷정리를 위해 사라졌고 방 안에는 나와 레이첼, 그리고 쥬안과 그녀의 어린 아들인 하멜만이 남게 되었다.
“약간의 시간을 더 벌 수는 있겠지만 이런 약초와 포션으로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쿨럭.”
“으음.”
그동안 쥬안이 시도해 본 바가 적지 않았기에 그녀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질병의 왕이라는 프로그 킹으로부터 퍼진 병마도 잡아내는 라임산의 영초들이 그녀의 병만큼은 진행을 둔화시키는 정도밖에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내일 당장 어떻게 되진 않겠지만 저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산 저편에 있는 럴크의 산적 무리들이 걱정이었는데 오늘 그 걱정을 뿌리째 뽑아낼 수 있게 되었군요. 어떻게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쿵!
침상에 누워 있던 아멜리아는 편치 않은 몸을 움직여 우리에게 무릎까지 꿇었다.
“아앗. 아주머니 이러지 마세요.”
레이첼의 부축을 받아 금방 다시 일어나긴 했지만 그녀의 진심만은 여운을 남기며 다가왔다.
“이젠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겠군요.”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하멜이 멋진 사내로 성장하는 모습도 보셔야죠.”
“아아, 하멜, 사랑하는 내 아들…….”
희미해져 가던 아멜리아의 생의 불씨가 하멜이란 이름에 다시 일렁이기 시작했다.
“엄마, 저 여기 있어요.”
자신을 부르자 하멜이 달려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하멜, 잘 듣거라.”
“네, 엄마.”
순간, 자애롭던 아멜리아의 눈빛이 교육자의 그것처럼 엄하게 변했다.
“너는 지금부터 저분들을 따라 세상에 나가거라. 이것을 들고 마그리드에 있는 마탑을 찾아가면 네가 원하는 대로 마법을 배울 수 있을 게다. 부디 넓은 세상에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거라, 아들아.”
그 묘한 박력에 하멜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징표를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네 여행에 필요한 물품은 이미 네 방에 챙겨 두었다. 가서 갈아입고 오너라. 어미는 이분들과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
그러곤 바로 내쫓기고 말았다.
뭐야, 강제 퀘스트인가?
“여러분과 상의도 없이 이렇게 갑작스런 부탁을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저 아이를 마그리드까지 데려다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게 어렵다면 칼라일까지 돌아가시는 동안만 데리고 있어 주셔도 좋습니다.”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리며 아멜리아가 호위 퀘스트를 부여했다. 마그리드라, 어차피 갈 생각이긴 했다만…….
“마그리드에 아는 분이라도 있는 겁니까?”
마탑의 NPC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묻자 아멜리아는 전혀 다른 대답을 했다.
“있다면 있는 거겠지요. 메디우스 님이니까요.”
“아, 그렇구나……가 아니잖아! 메디우스라고요? 그 마탑의 창시자인 현자 메디우스?”
“그렇습니다. 후우, 먼저 저희 집안에 대한 얘기부터 해야겠군요. 혹시 마왕전쟁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