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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월드 1권(23화)
11. 체이서(2)
알다마다였다. 레드 라벤더는 HP 최대치를, 블루 라벤더는 MP최대치를, 옐로우 라벤더는 기라고도 불리는 SP 최대치를, 화이트 라벤더는 신성력, 즉 DP의 최대치를, 그린 라벤더는 정신력을 1%나 영구히 상승시켜 주고 리셋 전에도 딱 5개만 풀렸다는 오색 라벤더는 모든 능력치를 영구적으로 1%나 상승시켜 주는 놀라운 약초인 것이다.
1%가 뭐 대수냐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고수들에게 1%라는 건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수치이다.
그런 만큼 가격도 어마어마했지만 리셋 전이라면 나도 블루 라벤더로 딱 두 개 먹어 본 적 있었다. 1% 상승하는 것은 복용하는 순간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중복 복용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물론 사재기를 하거나 무식하게 먹어 대고 싶어도 없어서 못 구할 테지만.
“맞습니다. 그럼 그것들이 어디에서 나는지도 알고 계십니까?”
“아니. 그걸 알면 내가……. 헉?”
그때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내가 구했던 두 개의 블루 라벤더 모두 쥬안에게서 나왔다. 아니, 아마도 대륙에 뿌려진 라벤더류 중 80%는 쥬안에게서 나온 것일 게다. 그렇다면?
“설마 이곳이?”
“후후. 반은 맞으셨습니다. 나중의 일이지만 이곳의 사람들이 라벤더를 발견해 내지요. 어째서인지 아직은 한 번도 발견하지 못한 듯하지만.”
“독점을 노리는 건가? 과연…… 대단하군.”
이제야 그의 계획을 알 것 같았다.
산적을 이용해 마을 사람들에게 위기의식을 심어 주고 그 불안감을 이용해 자신이 구세주처럼 나타난다. 그로 인한 마을 사람들과의 호감도 상승. 이후의 라벤더 독점.
미래를 알고 있기에 생각해 낼 수 있는 치밀한 계획이었다.
내가 감탄 어린 얼굴로 바라보자 쥬안은 그저 빙긋 웃어 보였다.
“하지만 너무 손해 보는 것 아닌가? 초반이라면 돈이 많이 필요할 텐데, 라벤더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약초만 거래해서는 이익이 거의 남지 않을 텐데?”
아직 유저와의 거래가 활성화되지 않은 마을이니 비축된 양도 많을 테고 꽤 고급의 약초도 있겠지만, 연금술사의 손을 거치지 않은 약초는 제대로 값을 받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전 상인입니다. 투자라고는 하나 당장에 파산할 일은 하지 않지요. 약초의 값이 대체로 싼 것은 사실이지만 꼭 필요로 하는 곳에 공급하면 적당히 이익을 남길 수 있습니다.”
아차, 상대가 쥬안이라는 것을 깜박했군. 라바 골렘에게 아이스크림을 팔아먹을 놈이었지 저 녀석은.
어디 보자, 이 근방에서 약초를 비싸게 팔 수 있을 만한 곳이라면?
“글룸 마을인가? 그 마을과 연결된 하수도에 왕 개구리가 살았던 것 같은데. 이름이 ‘질병의 왕 프로그 킹’이라던가?”
“이거 이거, 아레스 님과 이야기하다 보면 밑천이 다 드러나겠군요. 하하.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대상인을 목표로 둔 자답게 쥬안은 이만큼이나 대단한 말을 해 놓고도 비밀이니 약속이니 하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나를 믿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충분히 놀랄 만한 배포인 것이다. 마치 ‘방해할 테면 해 봐라. 나는 이게 아니더라도 가진 패가 얼마든지 있다. 다만, 각오는 하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듯한 박력이었다.
피식.
“협조라, 어느 쪽으로 말이지?”
하지만 나는 그 말에서 다른 것을 읽었다.
“이대로 퀘스트를 포기하고 돌아가 주시면 정말 감사할 겁니다. 산적들의 변화에 대한 보고가 올라가고 조사가 시작되면 제가 굉장히 난처해질 테니까요. 물론 그에 따른 보상은 후하게 해 드리죠.”
산적들을 배후에서 지원하고 조종한 사실이 드러나면 쥬안은 신용이 생명인 상인으로서의 입지가 상당히 위태로워질 것이 자명했다. 그렇게까지 되기 전에 미리 손 털고 잠적해 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만.
그렇게 말한 쥬안은 다시 한 번 빙긋 웃어 보이고 입을 열었다.
“아니면 아레스 님이 생각하신 그 방향으로 도움을 주셔도 좋겠지요. 저도 슬슬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차였으니까요.”
“역시 그렇지? 확실히 과열 양상이야.”
“그럼 결론은 난 것 같군요. 듣자 하니 벌써 4서클에 오르셨다죠? 믿어 보겠습니다. 공략의 귀재의 솜씨를.”
씨익.
씨이익.
가볍게 악수를 나누며 우리는 마주 웃었다.
쥬안과의 협상이 완전히 끝나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번 일뿐 아니라 그와 나 사이에 은밀한 모종의 거래까지 이루어진 것이다.
일단 이번 건에 대해서는 쥬안이 산적들에게 실시하던 식량 지원을 끊기로 했고 나와 레이첼은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다시 약화된 산적들을 해치우기로 했다. 산적들과 마을 사람들 간의 대치가 너무 과열되면서 자칫 산적들이 쥬안의 통제를 벗어나 마을로 쳐들어올지 모르는 탓이다.
아멜리아라는 막강한 수호신이 버티고 있다지만 큰 병에 걸린 그녀가 언제 세상을 뜰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적어도, 리셋 전 쥬안이 이 마을을 찾았을 때는 아멜리아가 살아 있지 않았다. 더구나 마을 사람들이 죽어 버리면 기껏 올려놓은 친밀도가 모두 0이 될 터였다. 내가 아직 완전한 4서클이 아니라는 것이 불안 요소였지만 마을과 쥬안의 지원을 받아 최대한 빠르게 레벨을 올리는 것에 동의하고 쥬안과의 1차 협상을 마쳤다.
그다음은 그와 나 사이의 개인적인 거래였다. 아니, 그것은 일종의 투자 상담이었다. 이번 일에 전력을 쏟아붓느라 다른 일에 손을 뻗칠 만큼 충분한 골드를 확보하지 못한 쥬안에게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골드와 매직 아이템을 주겠노라 하고 제안을 했다. 물론 현재 최강급일 아미르의 시미터도 포함해서였다.
대신 내가 받기로 한 것은 아이템과 정보.
후에 구하기 어려운 아이템의 중개 비용을 없애고 지금 그가 가지고 있고 앞으로 얻게 되는 모든 정보를 나와 공유하는 것이다. 퀘스트에 대한 정보도 포함해서였다. 이번 사태만 생각해 보아도 그가 가진 정보가 얼마나 대단한 것들인지 알 수 있으리라.
비록 ‘나에게 필요한’ 것에 한하는 사항이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게다가 그와의 거래에서 몇 가지 혜택을 받게 되리란 약속도 있었다.
아무래도 생각은 하고 있지만 자본 부족으로 실행시키지 못하고 있던 커다란 프로젝트가 있는 듯했다.
“아레스, 큰일 났어!”
덜컹.
쥬안과의 협상이 있은 지 보름. 파견 신관 신분이던 몽크, 라딘이 사라지고 회복초만으로 회복하느라 마을에 들어와 잠시 쉬고 있는 사이, 잠시 나갔던 레이첼이 문이 부서져라 열어젖히며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아멜리아 아주머니가, 아주머니가…… 돌아가셨어.”
“……뭐?”
웅성웅성.
레이첼의 말대로 아멜리아가 살고 있는 북쪽 언덕엔 어떻게 알았는지 벌써 소문을 접한 마을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비켜요! 비켜!”
“으아앙∼.”
불안한 얼굴로 문 앞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자 정말로 그녀의 어린 아들인 하멜이 엄마의 시체를 부여잡고 엉엉 울어 대고 있었다.
“정말 죽었어.”
“으아아앙!”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 보았지만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레이첼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으으음.”
비통에 잠겨 있는 것도 잠시, 뭔가 허전함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쥬안은?”
“응? 좀 전까지 여기 있었는데. 어디 갔지?”
레이첼과 함께 아멜리아에게 약을 전해 주러 왔던 쥬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집안에서도, 마을 어디에서도. 그리고 평소 아멜리아의 곁을 지키던 한 자루의 검 역시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여긴 어쩐 일이지? 식량을 보급 받는 날도 아닌데 말이야.”
산속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화려한 전각 안. 그 안에서 두 사내가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오늘은 럴크 님께 이것을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빙긋 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레 한 자루의 검을 꺼내 든 자는 다름 아닌 쥬안이었다.
“아니, 이것은?”
대수롭지 않게 검을 받아 들던 럴크는 검을 뽑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일전에 자신의 자랑이던 긴 머리카락을 잡초 베듯 뎅강 잘라 버린 잊을 수 없는 검인 것이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목 언저리를 만져 볼 정도였다.
“그 계집의 검을 네가 어떻게?”
럴크가 조금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묻자 쥬안이 더욱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여전히 묘한 미소를 유지한 채였다.
“제가 그들의 마을과 교류하고 있다는 것은 럴크 님도 아실 것입니다.”
“으음, 그렇지.”
별로 탐탁지 않은 일이었지만 쥬안이 상인임을 감안하여 그 사실을 눈감아 주었던 게 바로 자신이었으므로 모를 리가 없었다. 대신 역공작으로 정보를 빼 오라 지시를 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녀, 아니 그 마녀의 검을 훔쳐 오라는 지시를 한 적은 결단코 없었다. 그래서 럴크는 혹시나 이 일 때문에 그녀가 본채로 난입하면 어떻게 하나 안절부절못했다. 검은 기사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니까.
“그녀가 죽었습니다.”
쥬안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뭣이?”
그러자 럴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반응을 보였다.
“지금 제 눈으로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 검을 가져올 수 있었겠습니까?”
쥬안이 조금은 간사한 듯한 웃음을 짓자 럴크는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완전히 믿지 못하고 곁에 있던 종을 울렸다. 쥬안을 못 믿어서라기보단 죽여도 죽을 것 같지 않던 그녀가 이렇게 갑자기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것이다.
데엥!
후다닥.
육중한 종이 온몸으로 비명을 지르자 밖에 있던 부하들이 뛰어 들어왔다.
“너희는 당장 그년이 있는 마을로 가서 정탐을 하고 오너라!”
후다다닥.
묘한 흥분과 불안이 뒤섞인 럴크의 호령에 부하들은 들어올 때보다 빠르게 산채를 벗어났다.
그리고 1시간가량이 지난 후, 드디어 그들이 돌아왔다.
“정탐 결과 마을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침 경계가 허술해져 몰래 숨어들어 가 봤더니 조용히 장례가 치러지고 있었고 사람들이 소리 죽여 울고 있었습니다. 모든 정황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들은 결과 아무래도 두목이 싫어하시는 그년이 죽은 것 같습니다.”
“크크크크, 정말 그렇단 말이지? 알았다. 나가 봐라!”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후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쥬안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흐흐, 내가 언제 네 말을 믿지 않은 적이 있던가? 조금 더 확실하게 하고 싶었을 뿐이다.”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일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지요. 그럼 이제 어쩌시렵니까?”
“당연한 걸 묻는군. 지금 당장 놈들을 쓸어버린다. 그년의 시체가 땅에 묻히기 전에 끌어내서 난도질해 주지. 그래야 직성이 풀리겠어. 으득.”
럴크는 옛일이 생각나는지 뒷목을 쓰다듬으며 이를 갈아 댔다.
“약속하신 대로 마을 주민들은 되도록 죽이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꼭 써먹을 데가 있으니까요.”
“그깟 놈들에겐 관심 없다. 부하들에게 말해 놓도록 하지. 약속대로 사로잡아서 너에게 노예로 주마.”
“감사합니다. 후후후.”
데엥! 뎅! 뎅! 뎅!
“전원 전투 준비! 놈들의 장송곡이 끝나기 전에 목책을 넘는다!”
“와아아아!”
부산하게 움직이는 산적들.
그 모습을 뒷짐 지고 바라보는 쥬안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후,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러곤 산적들 틈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