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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월드 1권(22화)
10. 상인 쥬안(3)


“그런데 그 모습은?”
그들이 약초꾼 마을에 살고 이곳에 산적이 들끓는다는 것은 알겠지만, 기껏해야 무기를 쥔 약초꾼에 불과해야 할 이들이 아주 낮은 수준이긴 하지만 직업 스킬을 사용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그들의 장비는 도시와 동떨어진 이런 궁벽한 산골에서 구하기 어려운 양질의 것이었다.
“아, 최근에 어떻게 된 일인지 갑자기 산적들의 식량 보급이 좋아지고 그만큼 산을 더 휘젓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저희도 가만히 있을 수만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마을 청년회를 중심으로 마을을 지키기 위해 전투와 관련된 기술들을 익히고 있지요. ‘그분’이 계신 한 마을로 직접 쳐들어오지는 못할 테지만 식량을 얻거나 약초를 캐러 가기 위해선 마을 밖으로 나가야 하니까요.”
“흐음, 그렇군요.”
그의 설명을 듣고서도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일단은 수긍했다. 자세한 사항이야 차근히 알아보면 될 테니까.
“그렇다면 저희를 마을로 좀 데려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민망한 얘기지만 정신없이 산적들과 싸우다 보니 길을 잃어버렸지 뭡니까. 하……하…….”
“물론입니다. 저희를 돕기 위해 오셨는데 당연히 도와야지요.”
사실은 도망치다 길을 잃은 것이지만 어쨌든 싸웠던 건 사실이니까 따지고 보면 거짓말도 아니었다.
다행히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청년들은 앞 다투어 길잡이 역할을 자청했다. 그렇게 10분여. 작은 마을답지 않은 삼엄한 경계의 약초꾼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 수상해.”
“응? 뭐가?”
그들의 비장함까지는 느꼈어도 그들의 장비가 가지는 이질감을 알아차리지 못한 레이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잘 봐. 저 사람들 장비에 뭐 이상한 점 없어?”
“이상한 점? 글쎄…… 기껏해야 1단계 스킬을 쓰는 사람들치고는 장비가 좋다는 것 정도? 아! 굉장히 깨끗하네? 마치 새것 같아!”
“바로 그거야. 갑작스런 산적들의 변화. 그리고 약초꾼 마을 사람들의 무기 구입과 스킬 보유. 뭔가 있다는 느낌이 팍팍 들지 않아?”
“으음, 그런가? 그냥 힘의 균형이라든가 게임 밸런스를 위해 패치된 걸지도…….”
“아냐. 분명히 뭔가 있어.”
나의 지적에도 레이첼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뭔가 있다라는 내 직관은 여전히 확고했다.
“이분이 저희 마을 촌장님이십니다. 촌장님, 도시에서 의뢰를 받고 산적을 소탕하러 온 분들입니다. 저분은 무려 4서클의 마법사이시죠.”
그러는 동안 우리를 촌장의 집까지 이끌고 간 청년들이 침을 튀겨 가며 우리를 소개했다.
진짜 4서클은 아니지만 뭐, 상관없겠지.
“오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이 궁벽한 곳의 사정이 드디어 도시에도 알려진 게로구먼. 그가 약속을 제대로 지켰어.”
“그라니요?”
거의 울 듯한 촌장의 얘기 속에서 나는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우리에게 산적들의 변화를 미리 귀띔해 주고 방비할 수 있게 도와준 고마운 이라네. 비록 거래의 형식을 취했지만 모두들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지.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쯤 마을 밖으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꼼짝없이 고립되고 말았을 게야. 물론 마을 안에만 있다면 안전하겠지만.”
“변화를…… 미리 귀띔해 줬다고요? 혹시 마을 청년들의 전투 기술들도?”
“그렇다네. 모두 그가 구해다 준 스킬 북으로 배운 것들이지. 스킬 북이란 것은 아무리 수준이 낮은 것이라도 구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고 들었는데 그는 우리 사정을 듣고 많은 수의 스킬 북을 구해다 주었다네. 굉장히 고생스러운 일이었을 텐데 말이야.”
“맞습니다. 대단한 분이지요.”
촌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이미 그에게 푹 빠져 있는 상태였다.
“그럼 한 가지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네.”
“마을 안에만 있으면 안전하다고 하셨는데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산적들이 강해졌으니 혹시 쳐들어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벤트이긴 하지만 대도시도 몬스터의 침공을 막지 못하면 빼앗기거나 지도에서 사라질 수 있었다. 하물며 이런 작은 약초꾼 마을쯤이야 아까 보았던 산적 두목이 나서기만 한다면 접수하지 못할 것도 없어 보였다. 100레벨을 넘겨 정식 기사급의 힘을 지닌 그에게 약초꾼들이 편법으로 익힌 1단계 스킬 따위야 애들 장난 수준일 테니까.
하지만 촌장의 반응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라는 식이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걸세. 제 놈들도 목숨 아까운 줄 안다면.”
그것은 ‘그’라는 자를 이야기할 때와 또 다른 종류의 믿음이었다. 절대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확신에 찬 자긍심 같은 것이 촌장의 말과 행동 속에 녹아 있었다.
새로 구입한 장비와 조잡한 스킬들 따위를 믿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멜리아 아주머니가 있는 한 감히 마을로 직접 쳐들어오지는 못할 겁니다. 저번에 그렇게나 혼쭐이 났으니까요.”
“아멜리아……라고요?”
또다시 흥분해 버린 청년들에게 되묻자 그들은 또 신이 나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북쪽 언덕에 사시는 아주머니인데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검술을 익힌 엄청난 검사입니다. 예전에 놈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쳐들어왔다가 아주머니한테 혼쭐이 나서 달아났죠. 저희도 아주머니의 검술 실력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만…… 어쨌든 정말 대단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니까요?”
“그럼 그분이 앞장서서 산적들을 소탕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마을 전체가 무장하지 않아도 두목만 해치우면 오합지졸인 산적들 따위야 뿔뿔이 흩어질 텐데.”
“그게…….”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청년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우물거렸다.
“휴우, 감추어 봐야 소용없겠지. 실은 그녀가 큰 병을 앓고 있다네. 그래서 마을 밖으로 멀리 벗어나지 못하지. 북쪽 언덕은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라 마을에 일이 터지면 금방 달려와 줄 테지만 산적 소탕까지는 무리라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그녀를 대신해서 놈들을 소탕해 줄 수 있겠나? 놈들의 대장인 럴크 놈이 한때 정식 기사의 서임까지 받았던 놈이라니 우리 쪽에서도 자네 정도의 실력자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겠지.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지원해 주겠네.”

[산적 두목 럴크 격파]
라임산의 산적 두목 럴크를 죽여라.
럴크는 비록 지금 산적 두목 노릇을 하고 있지만 한때 촉망받는 기사였다고 한다. 타락하긴 했어도 실력은 수준급. 라임산의 평화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럴크를 죽여야 한다.
대신 의뢰를 완료할 때까지 일부 약초를 무한정 제공받을 수 있다. 이렇게 획득한 약초는 거래가 불가하고 퀘스트 완료나 포기 시 사용할 수 없다.
퀘스트를 중도 포기할 시 라임산 전체의 약초꾼 마을과 우호도 하락.
보상 : 라임산 전체의 약초꾼 마을과의 우호도 Max. 상점 이용 시 10% 할인. 3골드.

새롭게 생성된 퀘스트 창을 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럴크란 녀석에게 한 방 먹여 주고픈 생각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아무래도 죽이는 것까진 어려운 것이다. 1대1로 만난다면 모를까 아까처럼 부하들을 잔뜩 거느리고 나타난다면 정말 대책이 없다. 때문에 일단 보류로 돌려놓고 촌장의 집을 빠져나왔다.
“자네를 억지로 떠밀 수는 없는 거겠지. 잘 생각해 보고 답해 주길 바라네.”
끼이익.
쿠웅!
섭섭함이 묻어 나오는 촌장의 배웅을 뒤로하고 우리는 숙소로 정해진 마을 주민의 집으로 향했다.
“큭큭큭. 자, 그럼 천천히 사냥이나 하면서 기다려 보실까?”
“기다려? 누굴?”
“산적들에겐 식량을 공급하고 그 위기감을 이용해 마을 사람들에게는 무기와 방어구, 스킬북 등을 판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내가 아는 한 딱 한 명뿐이지.”
“뭐? 그럼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거란 말이야? 도대체 누가 그런…….”
처음 산적들을 대할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쯤 되니 알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위기라는 것을. 그리고 반가웠다. 오랜만에 아는 얼굴을 만나게 될 것 같았으니까. 그는 아마도…….
“상인 쥬안, 그가 확실하겠지.”
“쥬안! 악마상 쥬안!”
자지러질 듯 소리치는 레이첼의 목소리에서 두려움 섞인 떨림마저 느껴졌다.



11. 체이서(1)


상인 쥬안. 리셋 전 유저들에게 악마상으로 불리던 그가 마을에 다시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5일이 지난 뒤였다. 그동안 우리는 산적들을 사냥했고 퀘스트를 수락한 덕에 회복용 약초를 무한정으로 제공받을 수 있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결과, 마을 사람들이 수호신처럼 굳게 믿고 있는 아멜리아의 추정 레벨은 대략 300 중반대. NPC가 이 정도면 어떤 나라를 가도 기사단장 자리쯤 가볍게 꿰찰 수 있을 만한 실력이었다.
당연히 일개 기사에 불과한 럴크 따위야 발가락으로 검을 쥐어도 상대할 수 있을 테고. 그러니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서의 사냥은 절대적으로 안전했다.
“여어, 오랜만이야.”
“어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요. 오랜만입니다, 아레스 님.”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분명 그에게도 의외였을 것임에도 쥬안은 웃는 낯을 유지할 뿐 별다른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포커페이스.
상인에게 기본과도 같은 그 원칙을 대상인을 목표로 한 쥬안이 잊을 리 없었다.
“우리, 얘기가 좀 필요할 것 같지?”
“일단 이것부터 내려놓고 찾아뵙지요.”
“기다리지.”
의뢰서를 꺼내 들자 쥬안이 흥미롭다는 눈빛을 보이며 함께 온 NPC들을 정렬시켰다.
등짐 가득히 무언가를 짊어진 NPC들을 통솔해 사라지는 쥬안을 뒤로하고 나 역시 모종의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나의 단독 행동에 레이첼의 볼이 불룩해지긴 했지만 악마상이란 무시무시한 별칭 때문인지 토를 달지는 않았다.
쥬안이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은 모든 일 처리가 끝난 30분 뒤였다.
“하하. 오랜만이네요, 아레스 님.”
주위를 의식해 대화는 쪽지를 통해 이루어졌다.
“정말 그렇군. 여기서 널 만나게 될 줄이야. 이번에도 역시, 상인인가?”
“당연히, 입니다. 아레스 님도 마찬가지겠죠?”
나와 쥬안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씨익.
그러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대마법사를 꿈꾸듯 그의 목표 역시 대상인인 것이다.
“꽤나 재미있는 일을 벌였더군. 너답다고나 할까.”
“하하. 그거 칭찬 맞죠? 대강의 사정은 전해 들었습니다. 산적 소탕 퀘스트를 받고 오셨다죠? 흐음, 조금 곤란하게 됐군요. 보시다시피 여긴 제가 작업 중인 지역이라.”
쥬안은 정말로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기가 먼저 손을 뻗은 곳이니 웬만하면 양보해 달라는 무언의 제스처이기도 했다.
“확실히 꽤 공을 들인 것 같더군. 어째서지? 별로 돈 될 것도 없어 보이는데.”
“사업상의 비, 밀, 입니다……라고 해야겠지만 어쩔 수 없군요.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로 보아 아레스 님도 발을 빼기 어려우신 모양이니.”
과거 나와 몇 차례 거래를 해 봐서인지 쥬안이 재빠르게 상황을 분석해 냈다.
내가 그냥 손 털고 말 생각이었으면 그저 손만 내밀었을 것이다. 퀘스트 포기에 대한 보상과 비밀 유지에 대한 대가를 받기 위해.
그래서인지 쥬안은 순순히 속내를 털어놓았다.
“약초 때문입니다.”
“약초? 확실히 이곳의 약초가 효율이 높긴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쥬안이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라임산은 영산(靈山)입니다. 라벤더라는 약초는 알고 계시겠지요?”
“라벤더라면 레드 라벤더, 블루 라벤더 하는 그것들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