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화
#프롤로그


[으흣. 하아.]
여자의 신음 소리에 레이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할리우드 악동’이라 불리는 천재 뮤지션 레이 라이언은 ‘미소포니아(Misophonia)’라는 정신과적 질병을 앓고 있다.
미소포니아는 특정한 소리에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질병으로 ‘청각과민증’이라고도 불린다. 아직까지 특별한 치료법은 없다.
레이가 특별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리는 여성의 신음 소리였다. 하지만 그 어떤 고통이 따를지라도 섹스가 주는 쾌락과 맞바꿀 순 없었다.
오늘도 레이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아무런 전희 없이 분신을 잡아 여자의 가운데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기계적으로 허리를 움직였다.
[흐흥. 헉. 헉.]
사정을 하기 위한 피스톤질이 거세졌다. 레이의 움직임이 격렬해질수록 덩달아 여자의 신음 소리도 커졌다.
레이는 골이 흔들렸다. 머릿속 세포 하나하나가 미쳐 날뛰는 것 같았다. 이대로 그냥 자신의 목을 졸라 죽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바람에 손으로 간신히 발기시켰던 남성이 힘을 잃어 가는 듯했다. 그는 여자의 엉덩이를 들어 올려 더 깊숙이 박았다.
타닥, 타닥, 타닥.
살과 살이 맞붙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레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섹스를 하는 목적은 성욕 분출 말고 또 있었다. 그건 바로 음악적 영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레이는 독특한 음색의 보컬과 천재적인 작곡 능력으로 뛰어난 음악 세계를 보여주며 평론가와 대중 모두에게 찬사를 받는 싱어송 라이터였다. 하지만 인성이 개차반이었다.
열아홉 살에 데뷔한 그는 현재 스물일곱 살이다. 8년 동안 꾸준히 폭행, 섹스, 마약, 각종 스캔들과 사건 사고를 일으켰다.
최근에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랭크되기도 했던 前국무장관과의 염문설로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차기 대선 후보로도 손꼽히는 청렴한 정치인의 대명사 ‘사라 윌슨’이 스물다섯이나 어린 레이 라이언과 섹스 스캔들이라니. 모두가 입을 모아 얘기했다.
‘그 상종도 못할 개망나니 레이 라이언이 여당의 지시를 받아 사라를 음해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것이 분명해.’
사라의 지지자 중 극우 세력들은 레이의 콘서트에서 난동을 부리거나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 기도를 하기도 했고, 이는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레이가 명실상부 최고의 남자 솔로 가수로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음악 때문이었다.
사라와 염문설 이후에 낸 음반엔 보란 듯이 사라를 향한 사랑의 메시지를 담았고, 게이설 이후엔 금기된 사랑을 갈망하는 노래를 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듯 늘 음악으로 자신의 마음을 얘기했다. 그것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판단하는 것은 오롯이 대중의 몫이었다.
평론가들은 레이 라이언은 음악으로 자신을 포장할 줄 아는 매우 영리한 뮤지션이라고 말했다.
그의 음악은 추락해 가는 여성 정치인을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가치 있게 만들었고, 금기된 사랑을 하는 전 세계 성소수자들의 마음까지도 보듬어 주었다.
그래서 매번 그가 발매하는 음반은 빌보드 상위권에 랭크되며 그래미와 같은 우수한 시상식에서 상을 휩쓸기도 한다.
역시, 현재로선 레이의 음악적 재능과 상품성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너무 좋아. 더. 더 세게. 하아. 하아… 좀 더….]
경마장의 질주하는 말처럼 사정없이 허리를 움직이던 레이는 여자의 신음 소리가 거슬려 도저히 안 되겠는지 낮게 욕을 읊조리며 피스톤질을 멈추었다. 그리고 싸늘한 얼굴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하아. 으흣.]
혼자 안달이 난 여자는 허리를 비틀며 자위하고 있었다. 레이가 윽박질렀다.
[그 입 좀 다물어.]
여자가 놀라 게슴츠레 눈을 떴다. 레이가 여자를 한심한 표정으로 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아무 소리도 내지 마.]
그가 소리에 극도로 예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여자는 조용히 입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복종만이 살길이다.
신인 여배우 루시는 레이가 이 넓은 소파에 자신을 혼자 버려두고 가 버릴까 겁이 났다. 오늘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가.
아이스 블론드에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눈. 요정 같은 미모를 갖춘 레이 라이언과의 하룻밤을 위해 루시는 엄청난 공을 들였다.
피부와 몸매 관리는 물론 이 자리를 주선한 대표에게 성상납까지 했다. 레이와 섹스를 한 신인은 남녀를 불문하고 스타가 된다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오늘 밤이 가기 전에 그를 매료시켜야만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이곳에 온 목적을 잊은 지 오래였다. 달콤한 말과 애무는 없었지만 아름다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흠뻑 젖고 말았다. 매료당한 건 루시 쪽이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계속해 주세요.]
루시가 애원했다. 레이는 소리를 내지 않겠다는 여자를 못 믿겠는지 핸드폰 블루투스로 라디오를 켰다. 소파 머리맡에 놓인 스피커를 통해 곧 남자 앵커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교성보단 남자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훨씬 듣기 좋았다.
하지만 이미 흥이 깨진 레이의 분신은 쉽게 달아오르지가 않았다.
‘역시 오늘은 안 되겠군.’
포기하려는 찰나, 라디오에서 피아노 선율이 들려왔다. 그리고 곧 태어나 처음 들어 보는 여자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습관적으로 미간을 구기던 레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스피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상하게 평온해진 머릿속이 낯설었다.
여성의 신음 소리 다음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여성의 노랫소리였다. 사고 이후, 특히 어머니의 기일 전후로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을 경우엔 여성의 노랫소리만 들어도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병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 들려오는 이 여성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언저리 어딘가 뜨겁게 달아올라 심장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고 있었다.
담담하지만 서글픈 목소리와 상반된 경쾌한 피아노 선율이 마음속을 간질였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레이는 입을 열었다.
[뒤돌아.]
루시가 냉큼 몸을 뒤집었다. 레이는 루시의 엉덩이 가운데에 그의 남성을 갖다 댔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맞춰 허리를 움직였다.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노래는 어느새 후렴구를 반복하고 있었다. 반복적인 후렴구 속 여자의 가성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매력적인 음색을 지닌 주인공의 얼굴을 멋대로 상상했다. 흥분감에 아래가 뜨거워졌다. 그 덕분에 몇 번의 움직임만으로 몸의 절정은 쉽게 찾아왔다.
레이는 루시의 엉덩이 위에 사정을 하고 소파에서 내려왔다.
[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나가.]
근육질 몸 위에 샤워 가운을 걸친 레이는 욕실로 향했다.
관계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린다는 호사가들의 말이 맞았다. 욕실 문이 닫히자 루시는 핸드백 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몰래 뚫어 놓은 핸드백 구멍 사이로 레이와의 정사 장면을 녹화한 것이다. 핸드폰을 꺼내 들고 정지 버튼을 누른다는 것이 손가락이 미끄러져 재생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으흥. 하아. 하아.]

핸드폰 스피커를 비집고 자신의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에 화들짝 놀란 루시는 옆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에 고개를 들었다. 바로 옆에 레이가 서 있었다.
[저기, 그러니까 오해… 예요! 다른 뜻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간직하고 싶어서….]
구겨진 미간을 신경질적으로 매만지던 레이가 핸드폰을 뺏어 들었다. 영상의 포커스는 자신의 얼굴에 맞춰져 있었다.
전에도 섹스 동영상 유출 사건이 있었다. 덕분에 침대 위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많이 봐 온 레이는 이번에도 전과 다를 것 없는 영상이겠지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라디오 음악 소리에 맞춰 마치 춤을 추듯 그루브를 타는 자신의 모습이 평소와는 많이 달라 낯설었다. 섹스를 하며, 음악에 취해 얼굴엔 미소마저 띠고 있었다.
내가 이런 얼굴로 섹스를 했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루시는 멋진 레이의 미소에 가슴이 떨렸다. 그런데 그때.
쾅!
레이가 핸드폰을 대리석 바닥 위로 세게 집어던졌다. 핸드폰이 산산조각 나고 부속품들이 이리저리 튕겨 테이블 밑을 나뒹굴었다.
루시는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레이가 루시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현관으로 향했다.
[살…려 주세요.]
[닥쳐!]
팬티 한 장 걸치지 않은 루시는 알몸으로 끌려갔다. 탱탱한 젖가슴이 흔들렸다.
설마 이대로 바깥으로 쫓아내진 않겠지?
하지만 그는 레이 라이언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했던가.
그는 무자비한 얼굴로 문을 열어 복도 바닥으로 루시를 패대기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