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1회


원룸 안이 휑했다. 피아노가 없어졌다.
박살이 난 창문과 유리 조각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장판 위 시커먼 발자국은 누군가의 침입의 흔적이었다. 마치 보란 듯이 남겨 둔, 의도가 다분한 흔적이었다.
진솔은 이를 악물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런 짓을 벌일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주먹을 쥐고 골목을 달렸다.
마침 골목 입구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그리고 건장한 사내가 차에서 내렸다.
위압적인 거구의 남성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두 팔을 벌렸다.
“어이, 동생. 어디 가?”
이복오빠 혁준을 한껏 노려보던 진솔은 주먹을 쥐었다.
“내놔.”
“뭘?”
“피아노!”
“아, 그 고물덩어리? 팔았지.”
혁준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태연한 얼굴로 진솔의 행동을 탐색했다.
진솔은 자신이 화를 내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약을 올리는 혁준을 노려보다가 소리쳤다.
“미친놈!”
“뭐?”
“미친 새끼야! 어디다 팔았어! 가. 당장 가서 다시 가져와! 가져오라고!”
진솔은 있는 힘껏 혁준을 골목 밑으로 밀었다.
끌려가는 척하던 혁준은 돌연 진솔의 팔을 꺾어 그녀를 바닥으로 패대기쳐 버렸다. 한파에 꽁꽁 얼어붙은 시멘트 바닥으로 엎어진 진솔은 혁준을 매섭게 노려봤다. 혁준은 사나운 얼굴로 바닥에 침을 뱉었다.
“퉷! 씨발. 미친년아. 그 고물덩어리 때문에 누울 자리도 없는 좁아터진 원룸을 청소해 줬음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이 미련한 기집애야.”
누울 공간이 없어 피아노 의자 밑에서 자는 미련한 이복동생이 이해가 되지 않는 혁준이었다. 태연한 혁준과 달리 진솔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같이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게 어떤 피아노인 줄 몰라? 아님, 아니까 이래?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나 좀 그냥 내버려 두라고!”
“돈 갚아. 네 엄마가 떼먹은 울 아버지 돈.”
“…….”
또 그놈의 돈이다. 진솔은 이를 악물었다.
“6억 5천. 갚으라고.”
“내가 왜?”
“몰라서 물어? 네 엄마만 아니었음 울 아버지 그렇게 죽지도 않았어.”
두 사람은 누구의 상처가 더 큰지 내기라도 하듯 서로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다.
아버지 이름으로 빚만 잔뜩 만들어 놓고 엄마는 연하의 애인과 야반도주를 했다. 불행하게도 그 빚의 일부는 진솔의 학비였다. 엄마의 야반도주 사실을 모른 채 그녀는 유학생활을 했고, 엄마를 찾아 돌아다니던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뒤늦게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 살 터울의 혁준은 아버지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막노동을 하다 한쪽 다리가 망가졌다.
그 몸을 이끌고 일을 했지만, 임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러다 임금이 밀린 것에 대한 분풀이로 공사판에서 소장에게 주먹질을 했고, 합의금이 없어 감방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사이 진솔은 피아노 과외를 하며 어렵게 치료비를 마련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스스로 삶을 포기했다.
“너, 영어 좀 하냐?”
혁준이 대뜸 물었다.
“맞다. 네가 다니던 학교가 미국 어디랬더라? 버클… 리 맞지?”
혁준은 억지로 혀를 굴리며 아는 척 거들먹거렸다.
또 무슨 꿍꿍이인지 진솔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피아노 찾고 싶으면 오늘 밤 12시까지 그랜드 호텔 2024호로 가.”
호텔로 가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다. 한 달 전에도 혁준은 그녀를 술집에 팔아넘기려고 했다.
술집에서 겨우 도망친 진솔은 혁준이 술집에서 선불로 받은 돈을 갚기 위해 평일 저녁에는 나이트클럽에서 키보드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야 했다. 혁준은 진솔을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간 계모와 동일시하고 있었다. 그런 혁준의 태도에 진솔은 넌덜머리가 났다.
갑자기 실성한 듯 웃는 진솔을 언짢게 보던 혁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지막이야. 이번 일로 너랑 내 관계 깨끗이 청산하자. 나도 네 얼굴 보는 거 지겨우니까.”
“…….”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이번엔 진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자리가 아니야.”
“저번에도 넌 그렇게 말했어. 몸 파는 술집이 아니라고.”
“그때 일은 미안하다고 했잖아! 나라고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팔고 싶었겠어? 아무튼 이번엔 진짜 아니야. 가서 노래만 부르다 오면 돼.”
노래라니. 뜬금없이 웬 노래? 진솔은 되물으려다 혁준과 더 이상 말을 섞기 싫어 입을 앙다물었다.
한번 아닌 건 곧 죽어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진솔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혁준이었다.혁준의 입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이번 일이 무산될까 봐 애가 탄 혁준은 열심히 부연설명을 했다.
“그쪽에서 네 노래가 마음에 들면 1억을 준대.”
진솔은 코웃음을 쳤다. 어떤 미친놈이 하룻밤 노래 감상에 1억이나 쓸까. 그걸 믿는 혁준이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현실적이고 계산이 빠른 놈이었다.
“이미 계약금으로 3천이나 받았어. 현금으로 바로 주던데?”
“그래? 잘됐네. 그럼 네가 가! 돈은 네가 받았으니까. 가서 누군지도 모를 그 돈 많은 새끼 앞에서 돈 받은 만큼 열심히 노래나 부르다 오라고!!”
“이게 처맞으려고!”
때릴 기세로 주먹을 들어 올린 혁준은 진솔의 턱을 잡고 흔들었다.
“영등포 애들 알지? 3천만 원은 걔들한테 이자 갚았어. 그 새끼들 다시는 너 과외하는 데 가서 깽판 치는 일 없을 거야. 이런 식으로 몇 번만 더 하면 빚 금방 갚아. 그럼 너랑 나 둘 다 자유라고. 다 널 위해서 이러는 거야.”
진솔은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정말 오늘 일만 잘 해결하면,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내 다리를 걸고 약속한다.”
“…….”
“그랜드 호텔 2024호. 12시. 잊지 마.”
진솔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던 혁준은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택시 타고 가라.”
그는 다리를 절뚝이며 골목을 내려갔다. 혁준이 탄 차가 사라지고, 진솔은 감았던 눈을 떴다. 손에 쥔 만 원짜리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치솟았다. 바람이 아프도록 시렸다.
비가 올 모양인지 공기가 축축하고 무거웠다. 그녀의 마음도 그랬다.

***

그랜드 호텔 2024호는 ‘펜트하우스’라며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고 호텔 직원이 그랬다.
호텔 직원이 투숙객에게 진솔의 신분을 확인하는 동안 진솔은 프런트 소파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강아지상의 외국인 남성이 달려왔다.
영어를 잘하냐고 묻던 혁준의 말뜻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고작 하룻밤 노래 감상에 1억을 쓰겠다는 얼빠진 상대는 외국인이었다.
정말 노래만 부르다 오면 되는 거겠지? 아니면 어떡하지?
진솔은 두려운 마음을 숨기고 애써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탐색하듯 빤히 바라보았다. 남자는 하루에 1억을 쓸 만큼 부티가 나는 얼굴은 아니었다.
토니는 자신을 경계하는 진솔을 향해 싱긋 웃었다.
[당신이 진솔?]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또 웃었다.
진솔은 더 날카롭게 그를 노려보았다.
[내 이름은 토니. 근데 왜 이렇게 빨리 왔어?]
토니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10시 50분이 지나고 있었다. 진솔이 약속한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빨리 온 것이다. 아직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진솔을 향해 물었다.
[영어 못 해? 잘한다고 들었는데.]
[12시에 다시 올게요.]
[말 잘하네.]
진솔은 꾸벅 인사를 하고 차가운 얼굴로 뒤로 돌았다. 그 앞을 토니가 가로막았다.
[그냥 지금 올라가 볼래?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토니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겼다. 진솔은 거칠게 뿌리쳤다.
토니는 그녀가 뿌리친 자신의 팔을 어루만지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정도 히스테리는 레이에 비해 애교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여자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을 했다. 토니는 두 손으로 공손히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가시죠.]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진솔의 뒤를 토니가 따랐다. 거울을 통해 여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살펴보던 토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히 레이의 취향은 아니었다. 볼륨감 없는 마른 몸매에 핏기 없는 흰 얼굴. 공허한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레이를 닮은 것 같다.
아마 레이가 그녀를 마주한다면 분명 낯이 익다는 생각을 하며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될 것이라고 토니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