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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바렌치아 수도에 위치한 궁 안의 화려한 연회장. 고위 대신들과 귀족들로 이루어진 수백 명의 하객들 앞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한 채 바렌치아 국법에 맞는 혼례를 치르고 백년가약을 맺었다.
오늘부로 에리 뮤 스칼롯이 아닌, 에리 덴 반도네르 황후가 된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될 사내를 흰색 베일 너머로 힐끔 올려다봤다.
그의 첫인상은 마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과 같았다. 신을 숭배하는 인간들이 심혈을 기울여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 낸 조각상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는 그만큼 수려하고 굳건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정신이 없을 만큼 강렬한 조명에 드러난 그의 외모는 차가움이 묻어났고, 날카로운 눈매는 냉혹하리만치 빈틈이 없었다. 짙은 눈썹 밑에 자리하여 끝이 치켜 올라간 날카로운 눈은 농도 짙은 검은 눈동자로 인해 그의 인상을 더욱 차가워 보이게 했다. 높고 날렵한 코는 거만하리만치 높게 뻗어 있었으며, 그 밑의 입술은 피를 머금은 것처럼 붉었다. 그의 눈빛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며 조용하고 치밀하게 다가오는 맹수와도 같았다.
그와 마주하게 되니 그동안 참고 억눌렀던 공포감이 거세게 에리의 몸을 휘감았다. 손끝과 발끝이 저려 오고 식은땀이 그녀의 손바닥을 축축하게 적셨다. 지금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곧은 시선으로 그를 마주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끝내 감출 수 없는 분함이 묻어났다.
찰나의 순간, 그의 차가운 눈동자와 에리의 시선이 얽혔다. 담담하리만치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감한 시선. 에리는 맞서듯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형식에 따라 그와 나누어 마신 술 한 모금도, 약지에 끼워진 화려한 반지도 전부 현실감이 없었다. 눈빛으로 그와 조용한 신경전을 치르는 사이, 혼례는 끝이 났다.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공주를 위해 화려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간결하게 치른 혼사였지만, 초조함에 떠는 에리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드넓은 욕실에서 낯선 시녀장의 목욕 시중을 받고 있는 에리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화려하고 붉은 꽃잎을 띄우고 꽃 내음이 섞인 향긋한 입욕제가 따뜻한 물에 녹아들었지만, 그것조차 적왕과의 첫날밤을 앞둔 그녀의 긴장을 풀어 주지는 못했다.
목욕을 마친 후 여러 명의 시녀들이 붙어 그녀의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히는 동안, 침대 옆 테이블 위에는 간소하지만 화려한 자기로 꾸며진 술상이 차려졌다.
모든 준비를 마친 시녀들이 침실을 나서자 휘황찬란한 문양의 거대한 문이 열리며 칼리온 황제가 침실로 들어섰다.
달칵―
짙은 감색 가운을 두른 채 위풍당당하게 다가오는 그는, 마치 지옥의 문을 지키는 악귀를 떠올리게 했다. 두 사람의 존재를 밝혀 주는 석양과도 같은 촛불이 잘게 흔들렸다.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에리는 잠옷 밑자락을 부여잡고 그를 바라봤다. 끝이 촉촉하게 젖은 짧은 머리칼이 그의 눈가를 살짝 가렸고, 그 사이로 짙은 빛의 눈동자가 한편에 어색하게 서 있는 그녀를 훑었다. 서먹한 공기가 에리의 숨통을 조여 왔다. 억울하게도, 그는 첫날밤에 대한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왜 아니겠는가. 전장에서 수많은 여인들을 취했다는데.
거침없이 다가온 그가 테이블 옆 의자에 앉으며 그녀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이리와 앉지.”
거부할 수 없는 낮은 목소리가 조용한 침실을 울렸다. 조심스럽게 앉은 그녀에게 잔을 건네주며 술을 따르는 그의 손가락은 의외로 곧고 길었다. 으레 사내들이 그렇듯, 마디가 굵어 투박하고 거칠 거라는 예상과는 달랐다. 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붉은 잔에는 황금빛 술이 가득 채워져 출렁였다.
자신의 잔마저 채운 칼리온은 한 손을 테이블에 올려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봤다.
“침실은 마음에 드는가?”
“……예.”
긴장한 에리의 목소리는 나약하게 떨렸다.
“이제 이곳은 그대의 궁이니 하루빨리 적응하는 것이 이로울 것이다. 긴 시간 배에서 보내느라 힘들었겠군.”
“괜찮습니다.”
마치 더 이상 대화의 여지를 주지 않는 것처럼 간결한 대답이 이어졌다.
그녀의 미약한 방어를 눈치챈 칼리온은, 마치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눈을 빛냈다. 작게 웃음을 흘리던 그가 잔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그 미소가 마치, 그녀를 가소롭게 보는 듯해 에리의 고운 미간이 살포시 찌푸려졌다. 그리고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눈을 질끈 감고 한 번에 들이켰다. 술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사소한 것 하나라도 그에게 트집 잡히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그의 취향일 법한 독하고 쌉싸래한 맛일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술은 매우 달큰했고 산뜻한 과일의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의외의 맛에 놀란 에리는 입술에 묻은 술을 작은 혀로 훑었고, 칼리온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술이 입에 맞나 보군.”
“생각보다…… 맛이 좋습니다.”
“여인들이 좋아하는 술이라기에 준비했지.”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준비했다는 의미였지만, 낯선 사내에 대한 적대감과 긴장감에 사로잡힌 에리에게는 마치, 그가 여인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그의 나이가 벌써 스물여덟이었다. 스치고 머물렀던 여인이 없지는 않았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에리는 쓸쓸한 기분이 되었다. 그가 색욕을 즐기는 수많은 여인 중 하나가 자신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대는…… 왜 짐이 그 먼 대해까지 건너 하필 그대에게 청혼서를 넣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마치 달콤한 말로 여인을 유혹하는 듯한 어투였다. 하지만 에리는 친절한 척 다가오는 그에게 현혹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차피 그가 잔혹한 적왕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으니까.
“궁금해야 합니까? 이제 와서 폐하의 의중을 궁금해한들 달라지는 건 없겠지요.”
불현듯 그에 대한 적대감이 더욱 커지며 그녀의 동그란 눈매 끝이 삐죽 솟았다.
그 과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본 칼리온은 큰 손으로 턱을 괴며 술에 젖어 반들거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혼례식 때도 그러더군.”
“…….”
영문을 모르는 에리의 눈이 그와 마주쳤다.
“그 눈빛 말이다. 마치 원수라도 보는 것 같아서 말이지.”
한껏 여유가 묻어나는 나른한 목소리였다. 마치 너 따위가 그렇게 본다한들 어쩔 테냐, 하는 것만 같았다. 에리의 자격지심에 불이 붙은 것은 그때였다.
“다행이군요.”
“무엇이 말인가.”
“……폐하께서 아무런 득도 안 될 저를 굳이 데려가신다기에 판단력을 잃으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시력은 좋으시니 그나마 다행이지 않습니까.”
공기마저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운 정적이 침실 안을 휩쓸었다.
당돌하다 못해 건방지기 짝이 없는 어조로 그를 모욕했다. 목에 칼이 날아와도 어쩔 수 없을 거라 여기며 에리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반항기 어린 눈망울은 여전히 또렷했다.
“큭…… 하하하하!”
하지만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침실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마치 잔혹한 악귀가 폭소를 터뜨린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하하……. 얼마 만에 이리 웃었는지 모르겠구나.”
한참을 웃던 그는 진심으로 재미난 유흥거리를 발견한 사내처럼 진하게 미소 지었다.
“순진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꽤 당돌한 말도 할 줄 아는군. 하긴, 그래야 바렌치아 제국의 황후 자격이 있지.”
“…….”
그때는 몰랐다. 차라리 그가 휘두른 칼에 죽임을 당하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대가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내 판단력도 아직은 꽤 쓸 만한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 확인해 볼까.”
“…….”
“벗어라.”
웃음기를 싹 지우고 툭 내던진 말이 커다란 돌덩이처럼 에리의 가슴에 들어앉았다. 쿵, 소리가 나며 심장이 나가떨어진 것만 같았다. 순결한 여인에게 먼저 옷을 벗으라니. 사내가 처음일 여인에게 일부러 수치심을 주기 위한 말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마치 그녀를 시험하듯, 과연 어디까지 버티는지 기어코 지켜보고 말겠다는 그의 따가운 눈빛이 피부로 느껴졌다.
분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가 먼저 그를 도발한 건 분명했다. 하지만 애초에 그녀를, 그녀의 나라를 무시한 적왕 때문에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던가.
에리는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오늘은 초야였다. 어차피 치를 수밖에 없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싫었다. 어차피 그에게 자신은, 그저 한 번 품고 버려도 그만인 가벼운 존재임이 틀림없을 테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드높은 위치에서 고고하게 제국을 다스릴 그가, 멀고 먼 작은 왕국의 공주인 그녀를 원할 리 없지 않은가. 어차피 그녀 말고도 그의 색욕을 채워 줄 다른 여인들이 차고 넘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애정 없이 안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그에게 이 초야는 별 의미 없을 것이 뻔할 테니 그녀를 안아도 그만, 안지 않아도 그만이지 않을까.
미동도 않는 그녀를 훑어본 칼리온은 여유롭게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설마 초야를 거부할 리는 없겠지.”
“굳이 제가 아니어도 되지 않습니까.”
“무슨 뜻이지?”
“차라리…… 다른 여인을 찾으시고 저와 초야를 치른 것으로 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에리는 고개를 숙이며 간곡하게 청했다. 무릎 위로 마주 잡은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순간, 칼리온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잔잔한 어조는 언뜻 부탁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결국엔 다른 여인으로 만족하되 자신에겐 손대지 말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당돌하기 그지없구나. 과연 무슨 뜻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더냐.’
칼리온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어리고 순진해 보이는 공주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 그의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잔혹한 심술이 스멀스멀 고개를 드밀기 시작했다.
“다른 여인을 품을지 말지는 오늘 밤 그대를 안아 보고 정하겠다. 그러니 우선 벗어 보아라.”
“…….”
“뭘 그리 망설이…….”
기껏해야 울며 용서를 구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가 소매 속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 들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루휀에서부터 몰래 가져온 것이었다. 비장한 표정이었지만 칼끝의 미세한 떨림은 숨길 수 없었다.
그것을 발견한 칼리온의 눈빛은 여러 감정을 담은 채 빛났다. 그리고 피식, 가벼운 냉소를 흘렸다.
“……고작 그것으로 짐을 찌를 작정인가.”
첫날밤, 신부가 칼을 들고 있는 모습에도 아무런 동요 없는 목소리가 그녀를 조롱했다. 신랑에게 칼까지 들이밀며 초야를 거부하는 신부라니, 이 얼마나 망측한가. 제국의 황제 앞에 칼을 들어 보이는 것은 당장 죽임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엄하다고 분개하는 대신 냉정하리만치 침착한 태도로 일관했다.
“뭣 하느냐. 어디 한번 찔러 보거라.”
칼을 든 그녀보다, 지켜보고 있는 그가 더 흥미로운 듯 보이는 우스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껏 여유롭던 그의 눈빛이 단번에 변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자신을 향할 것이라 생각했던 작은 칼날이 그녀를 향해 움직였기 때문이다. 놀란 칼리온은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의 가냘픈 손목을 후려쳤다.
짝―
“읏!”
날카로운 칼끝이 그녀의 가녀린 목에 닿기 직전이었다.
거세게 날아든 손이 그녀의 손목에 부딪친 순간, 작은 단도가 날아갔다. 에리는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에 신음을 흘리며 손목을 감쌌다. 거친 손아귀가 그녀의 왼팔을 움켜쥐었다.
“감히…… 내 앞에서 이따위 짓을 해?”
“아…….”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손목의 고통이 가시기도 전에, 팔뚝이 잡힌 채 몸이 들어 올려졌다. 손목과 팔이 너무 아파 눈물이 찔끔 흘렀고, 정신마저 없었다.
그때 칼리온의 거친 손이 그녀의 앞섶에 닿았다.
찌이익―
매서운 손이 순백의 얇은 잠옷을 찢어발겼다. 그녀의 희고 순결한 가슴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꺄아아악!”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가슴을 가린 에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큰 눈망울 속에는 경악과 수치심, 그리고 실망감이 엿보였다.
“어, 어떻게……. 비록 바렌치아에 비해 보잘것없다고는 하나, 일국의 공주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런…….”
“하! 지금 짐 앞에 있는 그대는 일국의 공주가 아닌 그저 여인일 뿐이다.”
그가 짓씹듯이 말을 내뱉었다. 이 순간만큼은 나라도 신분도 중요치 않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녀의 해석은 달랐다. 마치 자신을 아무렇게나 취해도 되는 여인쯤으로 취급하는 거라 여겼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금수만도 못한 사내와 초야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사내 앞에서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순결한 몸이었다. 그런데 먼저 옷을 벗으라는 명령에, 이제는 옷을 찢어 버리기까지…….
스스로 죽을 각오까지 했지만, 그와의 첫날밤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훤히 드러난 가슴을 가리며 그의 손에 잡힌 팔을 빼내려는 그녀의 반응에 칼리온의 무자비함은 극에 달했다. 그녀에게 거부당했다고 생각하자 자존심이 상한 칼리온은 앞뒤 가리지 않고 그녀를 침대로 끌었고, 내던지는 듯한 거친 힘에 그녀가 침대 위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에리가 기를 쓰고 벌어진 앞섶을 가렸지만 소용없었다. 이번에는 그의 거친 손아귀가 치마 끝자락을 잡고 힘주어 찢기 시작했다.
찌이이익―
“헉!”
얇은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선명했다. 비참하고 처참했다. 그의 기분을 거스르고, 그를 능멸한 대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담했다. 그녀의 제안을 그가 선뜻 수락할 거라 생각했던 어리석은 오판이 빚어낸 잔혹한 결과였다.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가슴 한구석이 옥죄어 왔다.
에리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 이 상황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발가벗겨진 피부 위로 그의 따가운 시선이 훑고 지나갔다. 그녀를 탐색하듯이 끈질기게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고, 에리의 몸이 두려움으로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그의 눈앞에 놓여 잡아먹히는 순간만을 기다리는 먹잇감이 된 기분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끔찍한 꿈이길 바랐다.
“이제야 얌전해졌군. 이런 걸 좋아하는 건가.”
“…….”
그의 비아냥거림에 에리는 울컥했다.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에 그녀의 희고 가냘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자 가느다란 쇄골이 도드라져 더욱 깊은 골짜기를 만들었고, 쇄골 밑의 탐스럽게 익은 과실처럼 자리 잡은 젖가슴까지 그의 시선이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교차된 가녀린 팔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골짜기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고, 그것을 바라본 칼리온의 목울대가 크게 들썩였다. 밋밋한 흰 배와 여성스러움이 돋보이는 부드러운 허리 곡선을 지나 검은 수풀까지 도달한 그의 눈빛이 점점 짙어졌다.
그녀의 모습은 눈부시도록 처연하고 잔인할 만큼 아름다웠다.
마치 정복자가 자신의 전리품을 바라보듯, 그녀를 세심히 살핀 그가 시선을 들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눈을 질끈 감은 그녀의 눈가가 붉었고, 두 뺨 역시 붉은빛을 띤 채 매끈히 빛나고 있었다. 술에 젖은 그녀의 촉촉한 입술은, 그를 흥분의 열기로 몰아넣었다.
에리는 그의 집요한 시선에 스스로 혀를 깨물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누워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하읏!”
생소한 감각에 그녀의 눈이 활짝 떠졌다.
바렌치아 수도에 위치한 궁 안의 화려한 연회장. 고위 대신들과 귀족들로 이루어진 수백 명의 하객들 앞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한 채 바렌치아 국법에 맞는 혼례를 치르고 백년가약을 맺었다.
오늘부로 에리 뮤 스칼롯이 아닌, 에리 덴 반도네르 황후가 된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될 사내를 흰색 베일 너머로 힐끔 올려다봤다.
그의 첫인상은 마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과 같았다. 신을 숭배하는 인간들이 심혈을 기울여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 낸 조각상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는 그만큼 수려하고 굳건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정신이 없을 만큼 강렬한 조명에 드러난 그의 외모는 차가움이 묻어났고, 날카로운 눈매는 냉혹하리만치 빈틈이 없었다. 짙은 눈썹 밑에 자리하여 끝이 치켜 올라간 날카로운 눈은 농도 짙은 검은 눈동자로 인해 그의 인상을 더욱 차가워 보이게 했다. 높고 날렵한 코는 거만하리만치 높게 뻗어 있었으며, 그 밑의 입술은 피를 머금은 것처럼 붉었다. 그의 눈빛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며 조용하고 치밀하게 다가오는 맹수와도 같았다.
그와 마주하게 되니 그동안 참고 억눌렀던 공포감이 거세게 에리의 몸을 휘감았다. 손끝과 발끝이 저려 오고 식은땀이 그녀의 손바닥을 축축하게 적셨다. 지금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곧은 시선으로 그를 마주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끝내 감출 수 없는 분함이 묻어났다.
찰나의 순간, 그의 차가운 눈동자와 에리의 시선이 얽혔다. 담담하리만치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감한 시선. 에리는 맞서듯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형식에 따라 그와 나누어 마신 술 한 모금도, 약지에 끼워진 화려한 반지도 전부 현실감이 없었다. 눈빛으로 그와 조용한 신경전을 치르는 사이, 혼례는 끝이 났다.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공주를 위해 화려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간결하게 치른 혼사였지만, 초조함에 떠는 에리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드넓은 욕실에서 낯선 시녀장의 목욕 시중을 받고 있는 에리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화려하고 붉은 꽃잎을 띄우고 꽃 내음이 섞인 향긋한 입욕제가 따뜻한 물에 녹아들었지만, 그것조차 적왕과의 첫날밤을 앞둔 그녀의 긴장을 풀어 주지는 못했다.
목욕을 마친 후 여러 명의 시녀들이 붙어 그녀의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히는 동안, 침대 옆 테이블 위에는 간소하지만 화려한 자기로 꾸며진 술상이 차려졌다.
모든 준비를 마친 시녀들이 침실을 나서자 휘황찬란한 문양의 거대한 문이 열리며 칼리온 황제가 침실로 들어섰다.
달칵―
짙은 감색 가운을 두른 채 위풍당당하게 다가오는 그는, 마치 지옥의 문을 지키는 악귀를 떠올리게 했다. 두 사람의 존재를 밝혀 주는 석양과도 같은 촛불이 잘게 흔들렸다.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에리는 잠옷 밑자락을 부여잡고 그를 바라봤다. 끝이 촉촉하게 젖은 짧은 머리칼이 그의 눈가를 살짝 가렸고, 그 사이로 짙은 빛의 눈동자가 한편에 어색하게 서 있는 그녀를 훑었다. 서먹한 공기가 에리의 숨통을 조여 왔다. 억울하게도, 그는 첫날밤에 대한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왜 아니겠는가. 전장에서 수많은 여인들을 취했다는데.
거침없이 다가온 그가 테이블 옆 의자에 앉으며 그녀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이리와 앉지.”
거부할 수 없는 낮은 목소리가 조용한 침실을 울렸다. 조심스럽게 앉은 그녀에게 잔을 건네주며 술을 따르는 그의 손가락은 의외로 곧고 길었다. 으레 사내들이 그렇듯, 마디가 굵어 투박하고 거칠 거라는 예상과는 달랐다. 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붉은 잔에는 황금빛 술이 가득 채워져 출렁였다.
자신의 잔마저 채운 칼리온은 한 손을 테이블에 올려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봤다.
“침실은 마음에 드는가?”
“……예.”
긴장한 에리의 목소리는 나약하게 떨렸다.
“이제 이곳은 그대의 궁이니 하루빨리 적응하는 것이 이로울 것이다. 긴 시간 배에서 보내느라 힘들었겠군.”
“괜찮습니다.”
마치 더 이상 대화의 여지를 주지 않는 것처럼 간결한 대답이 이어졌다.
그녀의 미약한 방어를 눈치챈 칼리온은, 마치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눈을 빛냈다. 작게 웃음을 흘리던 그가 잔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그 미소가 마치, 그녀를 가소롭게 보는 듯해 에리의 고운 미간이 살포시 찌푸려졌다. 그리고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눈을 질끈 감고 한 번에 들이켰다. 술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사소한 것 하나라도 그에게 트집 잡히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그의 취향일 법한 독하고 쌉싸래한 맛일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술은 매우 달큰했고 산뜻한 과일의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의외의 맛에 놀란 에리는 입술에 묻은 술을 작은 혀로 훑었고, 칼리온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술이 입에 맞나 보군.”
“생각보다…… 맛이 좋습니다.”
“여인들이 좋아하는 술이라기에 준비했지.”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준비했다는 의미였지만, 낯선 사내에 대한 적대감과 긴장감에 사로잡힌 에리에게는 마치, 그가 여인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그의 나이가 벌써 스물여덟이었다. 스치고 머물렀던 여인이 없지는 않았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에리는 쓸쓸한 기분이 되었다. 그가 색욕을 즐기는 수많은 여인 중 하나가 자신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대는…… 왜 짐이 그 먼 대해까지 건너 하필 그대에게 청혼서를 넣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마치 달콤한 말로 여인을 유혹하는 듯한 어투였다. 하지만 에리는 친절한 척 다가오는 그에게 현혹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차피 그가 잔혹한 적왕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으니까.
“궁금해야 합니까? 이제 와서 폐하의 의중을 궁금해한들 달라지는 건 없겠지요.”
불현듯 그에 대한 적대감이 더욱 커지며 그녀의 동그란 눈매 끝이 삐죽 솟았다.
그 과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본 칼리온은 큰 손으로 턱을 괴며 술에 젖어 반들거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혼례식 때도 그러더군.”
“…….”
영문을 모르는 에리의 눈이 그와 마주쳤다.
“그 눈빛 말이다. 마치 원수라도 보는 것 같아서 말이지.”
한껏 여유가 묻어나는 나른한 목소리였다. 마치 너 따위가 그렇게 본다한들 어쩔 테냐, 하는 것만 같았다. 에리의 자격지심에 불이 붙은 것은 그때였다.
“다행이군요.”
“무엇이 말인가.”
“……폐하께서 아무런 득도 안 될 저를 굳이 데려가신다기에 판단력을 잃으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시력은 좋으시니 그나마 다행이지 않습니까.”
공기마저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운 정적이 침실 안을 휩쓸었다.
당돌하다 못해 건방지기 짝이 없는 어조로 그를 모욕했다. 목에 칼이 날아와도 어쩔 수 없을 거라 여기며 에리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반항기 어린 눈망울은 여전히 또렷했다.
“큭…… 하하하하!”
하지만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침실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마치 잔혹한 악귀가 폭소를 터뜨린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하하……. 얼마 만에 이리 웃었는지 모르겠구나.”
한참을 웃던 그는 진심으로 재미난 유흥거리를 발견한 사내처럼 진하게 미소 지었다.
“순진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꽤 당돌한 말도 할 줄 아는군. 하긴, 그래야 바렌치아 제국의 황후 자격이 있지.”
“…….”
그때는 몰랐다. 차라리 그가 휘두른 칼에 죽임을 당하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대가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내 판단력도 아직은 꽤 쓸 만한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 확인해 볼까.”
“…….”
“벗어라.”
웃음기를 싹 지우고 툭 내던진 말이 커다란 돌덩이처럼 에리의 가슴에 들어앉았다. 쿵, 소리가 나며 심장이 나가떨어진 것만 같았다. 순결한 여인에게 먼저 옷을 벗으라니. 사내가 처음일 여인에게 일부러 수치심을 주기 위한 말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마치 그녀를 시험하듯, 과연 어디까지 버티는지 기어코 지켜보고 말겠다는 그의 따가운 눈빛이 피부로 느껴졌다.
분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가 먼저 그를 도발한 건 분명했다. 하지만 애초에 그녀를, 그녀의 나라를 무시한 적왕 때문에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던가.
에리는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오늘은 초야였다. 어차피 치를 수밖에 없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싫었다. 어차피 그에게 자신은, 그저 한 번 품고 버려도 그만인 가벼운 존재임이 틀림없을 테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드높은 위치에서 고고하게 제국을 다스릴 그가, 멀고 먼 작은 왕국의 공주인 그녀를 원할 리 없지 않은가. 어차피 그녀 말고도 그의 색욕을 채워 줄 다른 여인들이 차고 넘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애정 없이 안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그에게 이 초야는 별 의미 없을 것이 뻔할 테니 그녀를 안아도 그만, 안지 않아도 그만이지 않을까.
미동도 않는 그녀를 훑어본 칼리온은 여유롭게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설마 초야를 거부할 리는 없겠지.”
“굳이 제가 아니어도 되지 않습니까.”
“무슨 뜻이지?”
“차라리…… 다른 여인을 찾으시고 저와 초야를 치른 것으로 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에리는 고개를 숙이며 간곡하게 청했다. 무릎 위로 마주 잡은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순간, 칼리온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잔잔한 어조는 언뜻 부탁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결국엔 다른 여인으로 만족하되 자신에겐 손대지 말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당돌하기 그지없구나. 과연 무슨 뜻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더냐.’
칼리온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어리고 순진해 보이는 공주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 그의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잔혹한 심술이 스멀스멀 고개를 드밀기 시작했다.
“다른 여인을 품을지 말지는 오늘 밤 그대를 안아 보고 정하겠다. 그러니 우선 벗어 보아라.”
“…….”
“뭘 그리 망설이…….”
기껏해야 울며 용서를 구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가 소매 속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 들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루휀에서부터 몰래 가져온 것이었다. 비장한 표정이었지만 칼끝의 미세한 떨림은 숨길 수 없었다.
그것을 발견한 칼리온의 눈빛은 여러 감정을 담은 채 빛났다. 그리고 피식, 가벼운 냉소를 흘렸다.
“……고작 그것으로 짐을 찌를 작정인가.”
첫날밤, 신부가 칼을 들고 있는 모습에도 아무런 동요 없는 목소리가 그녀를 조롱했다. 신랑에게 칼까지 들이밀며 초야를 거부하는 신부라니, 이 얼마나 망측한가. 제국의 황제 앞에 칼을 들어 보이는 것은 당장 죽임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엄하다고 분개하는 대신 냉정하리만치 침착한 태도로 일관했다.
“뭣 하느냐. 어디 한번 찔러 보거라.”
칼을 든 그녀보다, 지켜보고 있는 그가 더 흥미로운 듯 보이는 우스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껏 여유롭던 그의 눈빛이 단번에 변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자신을 향할 것이라 생각했던 작은 칼날이 그녀를 향해 움직였기 때문이다. 놀란 칼리온은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의 가냘픈 손목을 후려쳤다.
짝―
“읏!”
날카로운 칼끝이 그녀의 가녀린 목에 닿기 직전이었다.
거세게 날아든 손이 그녀의 손목에 부딪친 순간, 작은 단도가 날아갔다. 에리는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에 신음을 흘리며 손목을 감쌌다. 거친 손아귀가 그녀의 왼팔을 움켜쥐었다.
“감히…… 내 앞에서 이따위 짓을 해?”
“아…….”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손목의 고통이 가시기도 전에, 팔뚝이 잡힌 채 몸이 들어 올려졌다. 손목과 팔이 너무 아파 눈물이 찔끔 흘렀고, 정신마저 없었다.
그때 칼리온의 거친 손이 그녀의 앞섶에 닿았다.
찌이익―
매서운 손이 순백의 얇은 잠옷을 찢어발겼다. 그녀의 희고 순결한 가슴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꺄아아악!”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가슴을 가린 에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큰 눈망울 속에는 경악과 수치심, 그리고 실망감이 엿보였다.
“어, 어떻게……. 비록 바렌치아에 비해 보잘것없다고는 하나, 일국의 공주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런…….”
“하! 지금 짐 앞에 있는 그대는 일국의 공주가 아닌 그저 여인일 뿐이다.”
그가 짓씹듯이 말을 내뱉었다. 이 순간만큼은 나라도 신분도 중요치 않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녀의 해석은 달랐다. 마치 자신을 아무렇게나 취해도 되는 여인쯤으로 취급하는 거라 여겼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금수만도 못한 사내와 초야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사내 앞에서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순결한 몸이었다. 그런데 먼저 옷을 벗으라는 명령에, 이제는 옷을 찢어 버리기까지…….
스스로 죽을 각오까지 했지만, 그와의 첫날밤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훤히 드러난 가슴을 가리며 그의 손에 잡힌 팔을 빼내려는 그녀의 반응에 칼리온의 무자비함은 극에 달했다. 그녀에게 거부당했다고 생각하자 자존심이 상한 칼리온은 앞뒤 가리지 않고 그녀를 침대로 끌었고, 내던지는 듯한 거친 힘에 그녀가 침대 위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에리가 기를 쓰고 벌어진 앞섶을 가렸지만 소용없었다. 이번에는 그의 거친 손아귀가 치마 끝자락을 잡고 힘주어 찢기 시작했다.
찌이이익―
“헉!”
얇은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선명했다. 비참하고 처참했다. 그의 기분을 거스르고, 그를 능멸한 대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담했다. 그녀의 제안을 그가 선뜻 수락할 거라 생각했던 어리석은 오판이 빚어낸 잔혹한 결과였다.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가슴 한구석이 옥죄어 왔다.
에리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 이 상황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발가벗겨진 피부 위로 그의 따가운 시선이 훑고 지나갔다. 그녀를 탐색하듯이 끈질기게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고, 에리의 몸이 두려움으로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그의 눈앞에 놓여 잡아먹히는 순간만을 기다리는 먹잇감이 된 기분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끔찍한 꿈이길 바랐다.
“이제야 얌전해졌군. 이런 걸 좋아하는 건가.”
“…….”
그의 비아냥거림에 에리는 울컥했다.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에 그녀의 희고 가냘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자 가느다란 쇄골이 도드라져 더욱 깊은 골짜기를 만들었고, 쇄골 밑의 탐스럽게 익은 과실처럼 자리 잡은 젖가슴까지 그의 시선이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교차된 가녀린 팔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골짜기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고, 그것을 바라본 칼리온의 목울대가 크게 들썩였다. 밋밋한 흰 배와 여성스러움이 돋보이는 부드러운 허리 곡선을 지나 검은 수풀까지 도달한 그의 눈빛이 점점 짙어졌다.
그녀의 모습은 눈부시도록 처연하고 잔인할 만큼 아름다웠다.
마치 정복자가 자신의 전리품을 바라보듯, 그녀를 세심히 살핀 그가 시선을 들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눈을 질끈 감은 그녀의 눈가가 붉었고, 두 뺨 역시 붉은빛을 띤 채 매끈히 빛나고 있었다. 술에 젖은 그녀의 촉촉한 입술은, 그를 흥분의 열기로 몰아넣었다.
에리는 그의 집요한 시선에 스스로 혀를 깨물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누워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하읏!”
생소한 감각에 그녀의 눈이 활짝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