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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아니라면
1화
프롤로그
“오빠, 이거요.”
남자의 집 앞 가로등 불빛 아래였다. 하얀 운동화에 고등학교 교복을 예쁘게 입은 여자아이의 입에선 하얀 입김이 나왔지만 그쯤은 문제가 아니라는 듯 수줍어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남자에게 조그만 상자를 내밀었다. 손재주가 좋은 같은 반 친구에게 포장까지 부탁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남잔 무덤덤한 표정으로 여자아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직도 학생이냐?”
희미한 담배 냄새가 느껴진다.
몰랐는데 담배도 피우나 보다. 담배는 건강에 안 좋은데…….
“……네.”
의외의 질문에 당황한 아이가 늦은 대답을 하자, 남자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그것은 사라지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정우는 남자의 낮은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불빛 아래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리 나빠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그의 눈빛은 분명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그래서 한 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오빠, 저 오빠 좋아해요.”
긴장한 듯 입술을 적신 그녀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남잔 물끄러미 정우를 바라보았다. 잠시 그녈 향해 뻗었던 손은 그저 자신의 팔에 찬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려 했다는 듯 무심하게 내려졌다.
“공부 열심히 해라. 늦게 다니지 말고.”
9시.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었다. 그녀가 버릇처럼 미간을 모으고 입술에 힘을 주었다.
좋아한다는 그녀의 고백을 듣기는 한 걸까. 말 안 듣는 학생을 타이르는 선생님 같은 말투로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 말투에는 이제 가 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라.”
“……태완 오빠.”
자동차 경적이 울리자, 정우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태완 씨, 뭐 해?”
저쪽 주차된 차 안에서 유리창이 내려지고 한 여자가 그를 불렀다.
정우의 목소리, 그리고 그 여자의 목소리가 동시에 나온 것 같았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그녀의 반대편, 정확히는 여자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여자가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두꺼운 패딩점퍼를 입었지만 그 아래로 드러난 늘씬한 다리와 그에 어울리는 검은색 부츠, 그리고 진한 화장, 자신이 보기에도 TV에서 보던 연예인처럼 예뻤다.
게다가 그녀는 어른이었다. 그녀가 가장 신경 쓰는 그것, 그 여자는 완벽한 어른이었고, 그녀로선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성숙미를 풍겼다. 교복을 입은 자신과는 달랐다. 정우의 얼굴에서 설핏 부러움이 스쳤다.
며칠 전 태완의 집에 심부름을 갔을 때, 누군가 그랬던 것 같다. 이미 오래전 독립을 해서 혼자 살고 있는 그였기에 소식을 듣는 게 쉽지 않았는데, 태완의 생일 즈음이었기에 그의 모친 황 여사가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는 친구들끼리 여행을 간다고 했고 황 여사 역시 서운해하는 기색 없이 담담히 전화를 끊었었다.
얼핏 보니 뒷자리에 여자 한 명이 더 있었고, 그리고 운전석에 앉은 남자 역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그녀가 내미는 초콜릿 상자를, 떨리는 손길을, 아니 이 모습 전부를 처음부터 모두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오늘은 말하고 싶었다. 언제나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이는 그이기에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진짜로 좋아해요. 나.”
태완의 시선이 잠시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리고 그에게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심장이 일렁거렸다.
“우유 마시고 가서 자라.”
“……오.”
그는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녀의 손에 어제 밤새 만든 초콜릿 상자가 그대로 들려 있었다. 긴장으로 떨렸던 손길이 이제는 그 목적을 잃고 허공에서 멈추었다. 시린 바람이 불어왔다. 하늘에선 새하얀 꽃잎 같은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태완이 탄 커다란 SUV가 요란스레 떠난 후에도 그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참아도 깨끗하게 빨아 신고 나온 하얀 운동화가 흐릿해졌다. 그녀가 상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가 머물렀던 자리가 내린 눈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쇼윈도 앞에 우두커니 멈춰 서 있던 정우가 정신을 차린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쁘게 장식된 초콜릿들을 보자 예전 기억이 떠올랐나 보다. 오 년쯤 전이었나. 어린 날의 추억이라고 웃고 넘기기엔, 조금 아프고 쓰리던 그날이 떠오른 정우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담담하게 표정을 지우고, 밸런타인데이 이벤트를 한다며 화려하게 꾸며진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온 곳은 아니다. 항상 이곳에서 있던 가족 행사에 참석했고, 친구들과 대학 졸업 전, 공부와 취업 준비에 찌들었던 4학년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만은 미친 듯 화려하게 즐기자며 바에 와 어울리지도 않던 칵테일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혼자 온 것은 처음이었다.
띠링.
-당당하게 잘 하고 와. 괜히 고개 숙이지 말고.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보내 온 엄마의 문자에 정우가 입술에 힘을 꼭 주었다. 아직도 어린애인 줄만 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머물렀다.
종업원은 그사이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노크를 하려는 그를 저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혼자 들어갈게요.”
미소 짓는 그녀의 말에 잠시 멈칫한 그는 금세 예의 바른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섰다. 잠시 문 앞에 서서 자신의 옷차림을 살핀 정우가 손을 들었다.
똑똑.
“네.”
안쪽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그녀가 다시 한 번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그 안에는 누군가 있었다.
그였다.
태완 오빠.
작년 그의 할아버지 생신 때 봤으니 일 년 만인가.
서류를 보며 무언가에 열중해 있던 그가 문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했다. 이미 그가 있을 것을 예상했지만,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처럼 심장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정우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감정까지 내보이는 어린애는 아니니까.
그러나 정우와 달리 그녀와 마주친 태완의 눈빛은 잠시 흔들렸다. 더 정확히 말해 귀찮은 기색에 가까웠다.
“안녕하세요, 오빠.”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한 정우에 비해 그는 일어나지 않고 세웠던 몸을 의자 등받이에 더 깊이 묻고는 그녀가 하는 양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는 친절하지 않다. 정우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쇼핑백을 옆에 놓인 의자에 내려놓았다.
밸런타인데이 즈음 그의 생일이었다. 2월 15일. 굳이 어딘가에 표시해 두지 않아도 그때가 되면 어김없이 그가 떠올랐다. 그래서 결국 준비했다. 그가 즐겨 입는다는 브랜드의 실크넥타이였다. 그녀의 한 달 용돈이 넘는 금액의 그것을 사면서도 비싸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에게 어울릴 것 같아 마음에 쏙 들던 푸른빛의 넥타이였다.
너무 평범한 선물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와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에 단번에 고른 것이었다. 손재주가 없어 선물포장을 따로 부탁하면서도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그녀의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그녀를 안내했던 종업원이다. 한 번 봐서인가, 낯설지 않은 느낌에 정우가 미소를 지었다.
“커피 주세요.”
그녀의 주문에 종업원 역시 같은 느낌이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태완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에서 나오는 그의 표정이라는 걸 정우는 안다.
“난 이 상황 이해가 안 되는데.”
태완의 말에 그녀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간을 확인하듯 자신의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렸다.
“할아버지께 말씀 못 들으셨나 봐요.”
“그럼 너는?”
무심했지만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알고 있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태완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장에선 난감한 상황일 수도 있겠다. 할아버지의 고집으로 억지로 나온 오늘의 만남이 선이란 건 알았겠지만 그 상대가 자신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거절할 걸 그랬나 보다. 아니, 네가 거절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너에게도 귀찮은 일이잖아.”
그의 말투에선 정우가 귀찮은 일을 만들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
“차 마시고 일어나자.”
그녀가 차분히 커피를 마시자,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다시 조금 전의 표정으로 서류를 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것을 보며 심각한 부분인가 싶었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공부는 잘 하고 있고?”
서른두 살의 그의 눈에 정우는 어린아이일 뿐인가 보다.
“저 스물셋이에요. 그리고 며칠 후에 학교 졸업해요.”
“그래.”
태완은 별로 궁금하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 선 보겠다고 했어요.”
그녀가 결심한 듯 입술을 꼭 다물고 시선을 마주했다.
“어?”
차를 마시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저 오빠 좋아해요.”
피식.
오 년 전 어느 날의 그 표정으로 태완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긴장을 감추려 정우는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쓰다.’
쓴 커피에 미간을 모으자 자신의 표정을 읽은 것인지 태완의 눈썹이 흥미롭게 올라갔다.
“아직 커피보다 주스가 어울릴 것 같은데. 아니, 우유인가.”
이제 그는 굳이 자신의 표정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보여 주듯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삼십 분이 남았구나. 모임까지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의 가족과 정우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날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그녀의 할아버지의 생신엔 언제나 함께 식사를 했고, 이건 꽤나 오래된 약속이라고 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가족모임 전에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 같다.
“이거요.”
그녀가 커다란 테이블 위에 준비한 선물을 내밀었다.
역시 정성스러운 포장이 마음에 들었다. 손재주가 좋아 직접 했다면 더 의미가 있었겠지만, 이제 와 그것을 탓할 순 없으니까.
“생일 축하해요, 오빠.”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기대에 찬 눈빛이었고, 아마도 그는 그것을 읽었을 것이다. 그녀의 눈빛이 고스란히 그에게 보였을 테니까.
그의 시선이 잠시 테이블에 머물렀다 다시 그녀를 향했다. 침묵이 길어지는 만큼 그녀의 기대도 커졌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너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주어졌을지 궁금해.”
혼잣말처럼 의미를 알 수 없게 말을 잇던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냉정하게 시선을 돌렸다.
“나보다 네가 거절했다고 하는 편이 낫겠지.”
“……오빠.”
“마시고 일어나라. 조금 있다 보자.”
그의 말투는 차분했다.
“전 거절 안 할 거예요.”
울면 안 되는데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거절도 각오한 것이라고, 당연히 태완은 거절할 것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그래서 엄마와 할머니가 더 걱정을 하신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막상 눈앞에 그에게 직접 듣는 거절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의 말대로 우유가 어울리는 나이라서 그런가.
일어서던 태완이 잠시 흔들리는 눈빛의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잠시 복잡해졌다.
“난 귀찮은 일도 싫고, 어린애도 싫다. 그리고 아직 넌 선택할 시간이 많아.”
차분했지만 그 말을 내뱉는 그의 눈빛이 서늘하다.
그러나 정우는 예전처럼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고,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먼저 간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신경질적으로 닫히는 소리도 들렸다.
또다시 조용해졌다.
정우의 시선이 그가 사라진 문에 머물렀다.
태완을 만난 것은 그녀가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니, 더 어렸을 때였겠지만 그때부터의 태완을 기억한다. 그리고 기억하는 그 순간부터 마음에 담았던 것 같다.
그녀의 외조부, 오 박사와 태완의 조부, 최 회장은 이북에서 함께 내려와 고생 역시 함께한 친구 사이이자 한때는 동업자였다고 했다. 보통 친구끼리 잠시라도 동업을 하면 사이가 나빠지기 마련이라는데 두 분은 갈수록 더 돈독해져서, 나중에는 사돈을 맺자고 약속한 사이라고도 했다. 물론 지금은 오 박사는 사업에서 손을 떼고 하고 싶던 공부를 시작해 교단에 머물다 퇴직을 하셨고, 최 회장은 여전히 일선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셨다.
그러나 자식들 대에서 사돈을 맺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는지 이번엔 손자, 손녀를 꼭 결혼시키자고 또 약속을 하셨단다. 그리고 그 대상은 최 회장의 둘째 손자인 태완과 오 박사의 막내 손녀 정우였다.
누구에겐 그것이 가볍게 웃을 수 있는 농담이겠지만, 어릴 때부터 그 소리를 듣고 자라 온 정우에게는 좀 달랐다. 최 회장이 그녀를 볼 때마다 손자며느리감이라며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웃으셨던 것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태완의 부친, 최 사장이 그녀에게 아저씨 대신 아버님이라 부르라며 친근하게 농담을 해서인지도 모른다. 그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초등학생이었던, 중학생이었던 그녀에게 아홉 살 차이의 태완은 언제나 어른이었다. 한동안 한 동네에 살았기에 그에게 정우 역시 이웃집 꼬마일 뿐이었을 것이다. 유학을 다녀왔고, 이른 독립으로 인해 그를 볼 수 있는 건 일 년에 두어 번뿐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무슨 이름이 붙은 날마다 초콜릿과 사탕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태완의 반응은 거의 비슷했다.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는 그런 무덤덤한 표정, 아마도 조부의 죽마고우이자 동업자, 게다가 부친의 은사이기도 했던 오 박사와의 관계와 여러 가지 주위 상황으로 인해 싫은 내색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였겠지.
고등학교 때 그녀에겐 고백이었고, 그에겐 농담일 뿐이었을 그 상황에서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던 그 후에도, 그도 그녀도 아무렇지 않게 지냈었다.
가족들 사이에선 어떤 감정도 드러낼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가로등 아래서 꾹 참았던 눈물을 친구 앞에서 터트렸다. 그때 친구들은 그랬다. 학교 수학선생님을 좋아하던 것처럼 한때의 감정일 것이라고,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거라고 그녀를 위로했다. 대학에 가고 더 멋진 대학동기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고도 했다. 그녀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변하지 않았다. 정우가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일 년에 두 번, 가족모임에서만 그를 보았지만 그래도 두근거리는 마음에, 그를 향하는 시선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냥 좋았다. 무심한 것도,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도 다 아는데 그래도 좋았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하는 정우에게 그녀의 외조부, 오 박사는 태완과의 선을 제안했다. 막내 손녀를 달랑 혼자 미국으로 유학 보내기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을 것이고, 손녀사위로서 태완도 꽤나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오 박사는 유난히 태완을 좋아했다.
아직 어린 애한테 선이냐며 펄쩍 뛰는 엄마를 보며, 할아버지 때문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로는 많이 설레었다. 친구들은 아홉 살 차이 나는 사람과의 선은 미친 거라며 나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그녀는 고집스레 며칠 동안 그 선을 위해 피부 관리를 받고, 운동을 했다. 어른이 된 그녀를, 여자가 된 자신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의 텅 빈 시선이 자신을 향하기를 바랐다.
태완을 마음에 담고, 그를 보기 위해 할아버지의 심부름도 다니고, 모임에도 빠지지 않았으며, 얼마 후엔 태완이 간다는 미국으로 유학을 준비하던 손녀의 마음을 어쩌면 오 박사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스치듯 기억이 꼬리를 물고 그녀를 어둠 속으로 가라앉게 만들었다. 눈을 감은 채 정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눈을 뜨면 현실과 마주해야 하는 상황에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잠시 후 조용한 룸 안에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혹시나 싶어 그녀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종업원이었다. 그가 든 쟁반에는 김이 나는 머그컵이 올려져 있었다. 우유였다.
“다 드시고 일어나시랍니다.”
넌 어린애라는 이야길 하고 싶은 건가. 이걸로 두 번째 완벽한 거절을 한 거야?
물끄러미 그 머그컵을 바라보던 정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이런 식이 아니라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라고.
“저…….”
종업원 역시 조심스럽게 이야기는 하고 있지만 많이 난처한 표정이었다.
어젯밤 팩을 하고, 아침 일찍 엄마의 단골인 청담동 지니 샘이 꾸며 준 머리를 하고, 어른스럽게 보이기 위해 새언니가 권해 주는 선보는 의상의 정석이라는 아이보리색 원피스 대신 블랙 미니 원피스를 입고 힐까지 신은 그녀였다.
“네, 마시고 일어날게요.”
정우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종업원은 눈에 띄게 환해진 표정으로 룸을 나갔다.
그녀는 가방에서 노랑 고무줄을 꺼내 예쁘게 컬이 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거칠게 모아 묶어 버렸다.
오기로라도 다 마시고 일어난다. 머그잔을 드는데 눈물이 툭 떨어진다. 슬프진 않은데, 그냥 자존심이 상하고, 변하지 않는 이 상황이 원망스러울 뿐인데, 그 단순한 감정들 때문에 눈물이 흐른다.
결국 우유를 마시지 못한 정우가 천천히 일어섰다.
오늘은 우유 대신 술이 필요하겠다. 그녀는 어른이니까.
1화
프롤로그
“오빠, 이거요.”
남자의 집 앞 가로등 불빛 아래였다. 하얀 운동화에 고등학교 교복을 예쁘게 입은 여자아이의 입에선 하얀 입김이 나왔지만 그쯤은 문제가 아니라는 듯 수줍어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남자에게 조그만 상자를 내밀었다. 손재주가 좋은 같은 반 친구에게 포장까지 부탁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남잔 무덤덤한 표정으로 여자아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직도 학생이냐?”
희미한 담배 냄새가 느껴진다.
몰랐는데 담배도 피우나 보다. 담배는 건강에 안 좋은데…….
“……네.”
의외의 질문에 당황한 아이가 늦은 대답을 하자, 남자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그것은 사라지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정우는 남자의 낮은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불빛 아래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리 나빠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그의 눈빛은 분명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그래서 한 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오빠, 저 오빠 좋아해요.”
긴장한 듯 입술을 적신 그녀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남잔 물끄러미 정우를 바라보았다. 잠시 그녈 향해 뻗었던 손은 그저 자신의 팔에 찬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려 했다는 듯 무심하게 내려졌다.
“공부 열심히 해라. 늦게 다니지 말고.”
9시.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었다. 그녀가 버릇처럼 미간을 모으고 입술에 힘을 주었다.
좋아한다는 그녀의 고백을 듣기는 한 걸까. 말 안 듣는 학생을 타이르는 선생님 같은 말투로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 말투에는 이제 가 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라.”
“……태완 오빠.”
자동차 경적이 울리자, 정우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태완 씨, 뭐 해?”
저쪽 주차된 차 안에서 유리창이 내려지고 한 여자가 그를 불렀다.
정우의 목소리, 그리고 그 여자의 목소리가 동시에 나온 것 같았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그녀의 반대편, 정확히는 여자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여자가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두꺼운 패딩점퍼를 입었지만 그 아래로 드러난 늘씬한 다리와 그에 어울리는 검은색 부츠, 그리고 진한 화장, 자신이 보기에도 TV에서 보던 연예인처럼 예뻤다.
게다가 그녀는 어른이었다. 그녀가 가장 신경 쓰는 그것, 그 여자는 완벽한 어른이었고, 그녀로선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성숙미를 풍겼다. 교복을 입은 자신과는 달랐다. 정우의 얼굴에서 설핏 부러움이 스쳤다.
며칠 전 태완의 집에 심부름을 갔을 때, 누군가 그랬던 것 같다. 이미 오래전 독립을 해서 혼자 살고 있는 그였기에 소식을 듣는 게 쉽지 않았는데, 태완의 생일 즈음이었기에 그의 모친 황 여사가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는 친구들끼리 여행을 간다고 했고 황 여사 역시 서운해하는 기색 없이 담담히 전화를 끊었었다.
얼핏 보니 뒷자리에 여자 한 명이 더 있었고, 그리고 운전석에 앉은 남자 역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그녀가 내미는 초콜릿 상자를, 떨리는 손길을, 아니 이 모습 전부를 처음부터 모두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오늘은 말하고 싶었다. 언제나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이는 그이기에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진짜로 좋아해요. 나.”
태완의 시선이 잠시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리고 그에게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심장이 일렁거렸다.
“우유 마시고 가서 자라.”
“……오.”
그는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녀의 손에 어제 밤새 만든 초콜릿 상자가 그대로 들려 있었다. 긴장으로 떨렸던 손길이 이제는 그 목적을 잃고 허공에서 멈추었다. 시린 바람이 불어왔다. 하늘에선 새하얀 꽃잎 같은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태완이 탄 커다란 SUV가 요란스레 떠난 후에도 그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참아도 깨끗하게 빨아 신고 나온 하얀 운동화가 흐릿해졌다. 그녀가 상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가 머물렀던 자리가 내린 눈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쇼윈도 앞에 우두커니 멈춰 서 있던 정우가 정신을 차린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쁘게 장식된 초콜릿들을 보자 예전 기억이 떠올랐나 보다. 오 년쯤 전이었나. 어린 날의 추억이라고 웃고 넘기기엔, 조금 아프고 쓰리던 그날이 떠오른 정우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담담하게 표정을 지우고, 밸런타인데이 이벤트를 한다며 화려하게 꾸며진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온 곳은 아니다. 항상 이곳에서 있던 가족 행사에 참석했고, 친구들과 대학 졸업 전, 공부와 취업 준비에 찌들었던 4학년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만은 미친 듯 화려하게 즐기자며 바에 와 어울리지도 않던 칵테일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혼자 온 것은 처음이었다.
띠링.
-당당하게 잘 하고 와. 괜히 고개 숙이지 말고.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보내 온 엄마의 문자에 정우가 입술에 힘을 꼭 주었다. 아직도 어린애인 줄만 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머물렀다.
종업원은 그사이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노크를 하려는 그를 저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혼자 들어갈게요.”
미소 짓는 그녀의 말에 잠시 멈칫한 그는 금세 예의 바른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섰다. 잠시 문 앞에 서서 자신의 옷차림을 살핀 정우가 손을 들었다.
똑똑.
“네.”
안쪽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그녀가 다시 한 번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그 안에는 누군가 있었다.
그였다.
태완 오빠.
작년 그의 할아버지 생신 때 봤으니 일 년 만인가.
서류를 보며 무언가에 열중해 있던 그가 문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했다. 이미 그가 있을 것을 예상했지만,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처럼 심장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정우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감정까지 내보이는 어린애는 아니니까.
그러나 정우와 달리 그녀와 마주친 태완의 눈빛은 잠시 흔들렸다. 더 정확히 말해 귀찮은 기색에 가까웠다.
“안녕하세요, 오빠.”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한 정우에 비해 그는 일어나지 않고 세웠던 몸을 의자 등받이에 더 깊이 묻고는 그녀가 하는 양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는 친절하지 않다. 정우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쇼핑백을 옆에 놓인 의자에 내려놓았다.
밸런타인데이 즈음 그의 생일이었다. 2월 15일. 굳이 어딘가에 표시해 두지 않아도 그때가 되면 어김없이 그가 떠올랐다. 그래서 결국 준비했다. 그가 즐겨 입는다는 브랜드의 실크넥타이였다. 그녀의 한 달 용돈이 넘는 금액의 그것을 사면서도 비싸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에게 어울릴 것 같아 마음에 쏙 들던 푸른빛의 넥타이였다.
너무 평범한 선물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와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에 단번에 고른 것이었다. 손재주가 없어 선물포장을 따로 부탁하면서도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그녀의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그녀를 안내했던 종업원이다. 한 번 봐서인가, 낯설지 않은 느낌에 정우가 미소를 지었다.
“커피 주세요.”
그녀의 주문에 종업원 역시 같은 느낌이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태완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에서 나오는 그의 표정이라는 걸 정우는 안다.
“난 이 상황 이해가 안 되는데.”
태완의 말에 그녀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간을 확인하듯 자신의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렸다.
“할아버지께 말씀 못 들으셨나 봐요.”
“그럼 너는?”
무심했지만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알고 있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태완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장에선 난감한 상황일 수도 있겠다. 할아버지의 고집으로 억지로 나온 오늘의 만남이 선이란 건 알았겠지만 그 상대가 자신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거절할 걸 그랬나 보다. 아니, 네가 거절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너에게도 귀찮은 일이잖아.”
그의 말투에선 정우가 귀찮은 일을 만들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
“차 마시고 일어나자.”
그녀가 차분히 커피를 마시자,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다시 조금 전의 표정으로 서류를 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것을 보며 심각한 부분인가 싶었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공부는 잘 하고 있고?”
서른두 살의 그의 눈에 정우는 어린아이일 뿐인가 보다.
“저 스물셋이에요. 그리고 며칠 후에 학교 졸업해요.”
“그래.”
태완은 별로 궁금하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 선 보겠다고 했어요.”
그녀가 결심한 듯 입술을 꼭 다물고 시선을 마주했다.
“어?”
차를 마시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저 오빠 좋아해요.”
피식.
오 년 전 어느 날의 그 표정으로 태완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긴장을 감추려 정우는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쓰다.’
쓴 커피에 미간을 모으자 자신의 표정을 읽은 것인지 태완의 눈썹이 흥미롭게 올라갔다.
“아직 커피보다 주스가 어울릴 것 같은데. 아니, 우유인가.”
이제 그는 굳이 자신의 표정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보여 주듯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삼십 분이 남았구나. 모임까지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의 가족과 정우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날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그녀의 할아버지의 생신엔 언제나 함께 식사를 했고, 이건 꽤나 오래된 약속이라고 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가족모임 전에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 같다.
“이거요.”
그녀가 커다란 테이블 위에 준비한 선물을 내밀었다.
역시 정성스러운 포장이 마음에 들었다. 손재주가 좋아 직접 했다면 더 의미가 있었겠지만, 이제 와 그것을 탓할 순 없으니까.
“생일 축하해요, 오빠.”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기대에 찬 눈빛이었고, 아마도 그는 그것을 읽었을 것이다. 그녀의 눈빛이 고스란히 그에게 보였을 테니까.
그의 시선이 잠시 테이블에 머물렀다 다시 그녀를 향했다. 침묵이 길어지는 만큼 그녀의 기대도 커졌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너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주어졌을지 궁금해.”
혼잣말처럼 의미를 알 수 없게 말을 잇던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냉정하게 시선을 돌렸다.
“나보다 네가 거절했다고 하는 편이 낫겠지.”
“……오빠.”
“마시고 일어나라. 조금 있다 보자.”
그의 말투는 차분했다.
“전 거절 안 할 거예요.”
울면 안 되는데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거절도 각오한 것이라고, 당연히 태완은 거절할 것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그래서 엄마와 할머니가 더 걱정을 하신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막상 눈앞에 그에게 직접 듣는 거절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의 말대로 우유가 어울리는 나이라서 그런가.
일어서던 태완이 잠시 흔들리는 눈빛의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잠시 복잡해졌다.
“난 귀찮은 일도 싫고, 어린애도 싫다. 그리고 아직 넌 선택할 시간이 많아.”
차분했지만 그 말을 내뱉는 그의 눈빛이 서늘하다.
그러나 정우는 예전처럼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고,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먼저 간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신경질적으로 닫히는 소리도 들렸다.
또다시 조용해졌다.
정우의 시선이 그가 사라진 문에 머물렀다.
태완을 만난 것은 그녀가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니, 더 어렸을 때였겠지만 그때부터의 태완을 기억한다. 그리고 기억하는 그 순간부터 마음에 담았던 것 같다.
그녀의 외조부, 오 박사와 태완의 조부, 최 회장은 이북에서 함께 내려와 고생 역시 함께한 친구 사이이자 한때는 동업자였다고 했다. 보통 친구끼리 잠시라도 동업을 하면 사이가 나빠지기 마련이라는데 두 분은 갈수록 더 돈독해져서, 나중에는 사돈을 맺자고 약속한 사이라고도 했다. 물론 지금은 오 박사는 사업에서 손을 떼고 하고 싶던 공부를 시작해 교단에 머물다 퇴직을 하셨고, 최 회장은 여전히 일선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셨다.
그러나 자식들 대에서 사돈을 맺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는지 이번엔 손자, 손녀를 꼭 결혼시키자고 또 약속을 하셨단다. 그리고 그 대상은 최 회장의 둘째 손자인 태완과 오 박사의 막내 손녀 정우였다.
누구에겐 그것이 가볍게 웃을 수 있는 농담이겠지만, 어릴 때부터 그 소리를 듣고 자라 온 정우에게는 좀 달랐다. 최 회장이 그녀를 볼 때마다 손자며느리감이라며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웃으셨던 것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태완의 부친, 최 사장이 그녀에게 아저씨 대신 아버님이라 부르라며 친근하게 농담을 해서인지도 모른다. 그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초등학생이었던, 중학생이었던 그녀에게 아홉 살 차이의 태완은 언제나 어른이었다. 한동안 한 동네에 살았기에 그에게 정우 역시 이웃집 꼬마일 뿐이었을 것이다. 유학을 다녀왔고, 이른 독립으로 인해 그를 볼 수 있는 건 일 년에 두어 번뿐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무슨 이름이 붙은 날마다 초콜릿과 사탕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태완의 반응은 거의 비슷했다.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는 그런 무덤덤한 표정, 아마도 조부의 죽마고우이자 동업자, 게다가 부친의 은사이기도 했던 오 박사와의 관계와 여러 가지 주위 상황으로 인해 싫은 내색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였겠지.
고등학교 때 그녀에겐 고백이었고, 그에겐 농담일 뿐이었을 그 상황에서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던 그 후에도, 그도 그녀도 아무렇지 않게 지냈었다.
가족들 사이에선 어떤 감정도 드러낼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가로등 아래서 꾹 참았던 눈물을 친구 앞에서 터트렸다. 그때 친구들은 그랬다. 학교 수학선생님을 좋아하던 것처럼 한때의 감정일 것이라고,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거라고 그녀를 위로했다. 대학에 가고 더 멋진 대학동기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고도 했다. 그녀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변하지 않았다. 정우가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일 년에 두 번, 가족모임에서만 그를 보았지만 그래도 두근거리는 마음에, 그를 향하는 시선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냥 좋았다. 무심한 것도,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도 다 아는데 그래도 좋았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하는 정우에게 그녀의 외조부, 오 박사는 태완과의 선을 제안했다. 막내 손녀를 달랑 혼자 미국으로 유학 보내기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을 것이고, 손녀사위로서 태완도 꽤나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오 박사는 유난히 태완을 좋아했다.
아직 어린 애한테 선이냐며 펄쩍 뛰는 엄마를 보며, 할아버지 때문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로는 많이 설레었다. 친구들은 아홉 살 차이 나는 사람과의 선은 미친 거라며 나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그녀는 고집스레 며칠 동안 그 선을 위해 피부 관리를 받고, 운동을 했다. 어른이 된 그녀를, 여자가 된 자신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의 텅 빈 시선이 자신을 향하기를 바랐다.
태완을 마음에 담고, 그를 보기 위해 할아버지의 심부름도 다니고, 모임에도 빠지지 않았으며, 얼마 후엔 태완이 간다는 미국으로 유학을 준비하던 손녀의 마음을 어쩌면 오 박사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스치듯 기억이 꼬리를 물고 그녀를 어둠 속으로 가라앉게 만들었다. 눈을 감은 채 정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눈을 뜨면 현실과 마주해야 하는 상황에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잠시 후 조용한 룸 안에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혹시나 싶어 그녀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종업원이었다. 그가 든 쟁반에는 김이 나는 머그컵이 올려져 있었다. 우유였다.
“다 드시고 일어나시랍니다.”
넌 어린애라는 이야길 하고 싶은 건가. 이걸로 두 번째 완벽한 거절을 한 거야?
물끄러미 그 머그컵을 바라보던 정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이런 식이 아니라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라고.
“저…….”
종업원 역시 조심스럽게 이야기는 하고 있지만 많이 난처한 표정이었다.
어젯밤 팩을 하고, 아침 일찍 엄마의 단골인 청담동 지니 샘이 꾸며 준 머리를 하고, 어른스럽게 보이기 위해 새언니가 권해 주는 선보는 의상의 정석이라는 아이보리색 원피스 대신 블랙 미니 원피스를 입고 힐까지 신은 그녀였다.
“네, 마시고 일어날게요.”
정우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종업원은 눈에 띄게 환해진 표정으로 룸을 나갔다.
그녀는 가방에서 노랑 고무줄을 꺼내 예쁘게 컬이 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거칠게 모아 묶어 버렸다.
오기로라도 다 마시고 일어난다. 머그잔을 드는데 눈물이 툭 떨어진다. 슬프진 않은데, 그냥 자존심이 상하고, 변하지 않는 이 상황이 원망스러울 뿐인데, 그 단순한 감정들 때문에 눈물이 흐른다.
결국 우유를 마시지 못한 정우가 천천히 일어섰다.
오늘은 우유 대신 술이 필요하겠다. 그녀는 어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