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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결국 그 호텔에서 있는 가족모임에 가장 늦게 참석한 것은 정우였다.
오늘은 태완의 조부, 최공만 회장의 생신이었다. 그런데 진짜 생신은 아니라고. 회사의 창립기념일이 당신의 생일이고, 당신이 가장 축하하고 축하받을 날이라며 최 회장은 언제나 그즈음에 축하파티를 열었다.
여름 언저리에 있다는 진짜 생신엔 미역국조차 끓이지 못하게 하신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언뜻 들었었다. 가족 모두를 남기고 혼자 살겠다고 온 자신에게 생일이란 없다는 것이 최 회장의 뜻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꿈을 이루도록 만들어 준 회사라고.
그것을 비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녀는 최 회장의 책임감이 존경스러웠다. 그 책임감 때문에 회사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으니까.
어쨌든 그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최대한 담담하게 문을 연 그녀를 향해 가족들의 시선이 모였다. 정확히는 그의 가족과, 그녀의 가족.

태완은 이미 담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 정우 왔구나.”
묘하게 이북사투리가 섞인 최 회장의 반김에 정우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셨어요?”
“그래. 이제 처녀가 다 되었구나. 허허허.”
매섭기만 하던 최 회장의 눈빛이 온화하게 변했다. 정우가 미소를 지었다.
“엄마를 꼭 닮아 더 예뻐졌네. 그렇지? 태완아.”
태완의 모친 황 여사가 태완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난감한 듯 황 여사가 커다란 반지를 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어색하게 웃으며 태완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막냇동생인 효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것도 좀 먹어 봐. 너 전복죽 좋아하잖아.”
“네 엄마.”
그녀는 다정스럽게 효준을 챙기기 시작했다.
“왔니?”
“응.”
정우의 모친, 연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표정을 보고, 그리고 나중에 들어서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어서 먹어.”
엄마 옆에 앉자마자 그녀에게 접시를 내밀었다. 안타까워하는 할머니의 시선도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씩씩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좋아하는 초밥과 생선구이도 오늘따라 내키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괜찮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은 자존심도 있었고, 또 자신 때문에 즐거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의 감정이 몇 십 년간 이어 온 우정에 방해가 되면 안 되니까. 그래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참석하긴 했지만 금세 후회가 되었다.
차라리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나았는지도 모르겠다. 걱정스러운 시선과 애써 내색치 않으려는 분위기가 그녀에겐 더 숨이 막힌다.
“그래. 태완이, 너 이번에 미국으로 간다면서? 우리 정우도 미국으로 유학 준비 중이란다. 곧 떠날 거야.”
오 박사의 부드러운 말투 뒤 다음 말은 네가 잘 좀 챙겨 주라는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의 눈빛엔 태완에 대한 믿음도 담겨 있었다. 유난히 태완을 좋아하던 오 박사였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아닙니다. 영국으로 갈 생각입니다.”
가족들의 놀란 시선, 오 박사의 의아한 시선, 연실의 못마땅한 시선까지 합쳐져 그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고개를 들었다. 그가 그의 형, 태주 대신에 미국의 지사로 가는 것은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고 했다.
최 사장에겐 태주, 태완, 효준 삼형제가 있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외국 유학을 떠났다는 태주를 정우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랬기에 한동안 태주를 볼 수 없었다. 영국에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누군가는 결혼을 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소문일 뿐 그의 가족들은 태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태완의 형, 태주의 사정이 무엇인지를 잘 몰랐지만 그의 가족들의 태도로 보아 그리 좋지 않은 것이라고만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영국이라니.
잠시 태완과 정우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잠시일 뿐 금세 그들의 시선은 어긋났다.
세 번째…… 거절.
너 때문에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정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1. 만남의 주기


정우가 컴퓨터 모니터를 뚫어질 듯 노려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일진이 좋지 않았다. 보통 한 시간 정도 일찍 출근을 한다. 집에서 멀지 않기도 했고, 조용한 사무실, 아침의 여유가 그녀만의 몫인 것도 좋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늦잠을 자 버렸고, 계획했던 일들이 다 틀어져 버렸다. 게다가 으슬으슬 감기 기운도 있었다. 그리고 가장 최악의 순간은 지금이었다.
여전히 시선은 모니터에 머물렀다. 분명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최태완?
“……설마.”
공문에 쓰인 익숙한 이름을 확인하며 중얼거리던 그녀가 한쪽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마우스를 신경질적으로 움직여 다른 붙임문서가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누락이나 착오 같은 실수가 있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왜 그래요? 나 대리님.”
누군가 말을 걸지 않았다면 저도 모르게 불쑥 젠장이란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의자를 밀며 그녀에게 다가온 강민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두 개의 모니터 중 하나를 향했다.
“역시 27인치가 좋긴 한데.”
이번에 바꾼 모니터를 감상하듯 평가한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내용을 살폈다.
“아, 어거.”
강민은 뭘 이런 걸 가지고 놀라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조금 거만한 포즈로 다리를 꼬고 앉았다. 이건 무언가 사람들이 모르는 혼자만의 정보가 있을 때 보이는 그의 태도이다.
“우리 회사 인사발령이 원래 쇼킹하긴 하잖아. 능력 위주라며 윤 부장 대신 박 팀장이 온라인개발실로 간 거 보면 몰라? 능력은 물론 박 팀장이지만 순서상 우린 다 윤 부장이 갈 줄 알았잖아. 그리고 이번 발령 완전 낙하산은 아니더라. 보니까 우리보다 이쪽에서는 더 오래 근무했어. 영국 버크에도 오래 있었다지. 나 대리, 너도 좀 알지 않냐? 너 버크 좋아하잖아?”
그의 말에 정우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버크를 좋아한 건 수제가구로서 그 방식을 바꾸지 않는 고집스러움과 자부심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버크에 누가 근무하는지는 당연히 모른다.
“나 대리야, 정신 차려.”
강민은 그녀와 동갑이긴 하다. 그러나 입사로는 후배였고, 그녀는 대리다. 그런데 오늘은 ‘너’라는 호칭에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가 그녀의 심각한 표정에 다시 한 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인사발령이 좀 빠르긴 하지.”
알 수 없는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꼭 이럴 때만 뭔가 있는 것처럼, 사내 메일을 사용한다. 물론 인사는 공문을 통해 이런 식으로 공지하는 게 맞다. 그러나 아무런 언질도 없이…….
정우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오래 있을 건 아닌가 보더라. 사장님 육아휴직 끝내는 몇 년이라고들 하는데……. 흠.”
그건 확실하지 않은지 강민도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버릇처럼 서랍에서 파우치를 들고 일어섰다.
“또?”
강민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그러다 시집도 가기 전에 틀니 한다. 원래 여자는 애 낳으면 이가 약해져. 너 조심하지 않으면…….”
그의 계속되는 잔소리를 뒤로한 채 그녀가 사무실을 나왔다.
그녀가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 중 하나가 양치질이었다. 강민이나 해진과의 군것질을 동반한 수다도 좋았지만 오늘은 영 이야기를 할 기분이 나지 않는다. 아니,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정우가 어깨를 늘어뜨린 채 화장실로 향했다.
오랜 양치를 끝낸 정우가 해가 잘 드는 복도 끝에 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었다. 변했을까.
최태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차분했다.
표현할 수 없다고 해서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뜻은 아니니까.
그녀가 잠시 창틀에 기대 휴대폰을 꺼냈다. 아직 십 분 정도의 여유가 있을 것 같다.

주기: 같은 현상이나 특징이 한 번 나타나고부터 다음번 되풀이되기까지의 기간.

다음에서 검색을 하니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정우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사람 사이에 주기란 게 있다면, 만남과 헤어짐만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관계 변화에 대한 주기라는 게 있다면, 아마 태완과 그녀 사이의 주기는 아무래도 5년, 5년이 그 주기인가 보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게 있긴 한 건가.
설레설레 고개를 젓던 정우가 휴대폰 일정표에 시선을 고정했다.
긴 거 같기도 하고, 짧은 것 같기도 한 애매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니까 정우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을 본 이후, 유학을 포기하고 취업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유학의 의미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를 따라가는 것 반, 공부를 위한 것 반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90%는 그를 따라가기 위한 목적이었나 보다.
그리고 또 미국으로 간다던 그가 돌연 다른 곳으로 결정했다는 것도 자신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싶어 자존심이 상했다. 물론 자존심이 상한다는 건 한참이 지난 후의 감정이었고, 그때는 길을 잃은 듯 모든 것이 막막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그때 그녀가 유학만이 해결책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그녀는 철없는 어린애였던 것 같다. 여자가 아니라. 그게 그의 눈에는 빤히 보였겠지.
최태완. 태완 오빠. 지금은 호칭도 서먹할 정도의 시간이 흐르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모호한 감정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완벽하게 깨끗하지 못한 감정이 스스로 거슬리는 것도.
사람을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을까. 어릴 때부터 봐 왔지만, 자주 볼 수 있었던 그의 다른 가족들에 비해 일 년에 한 번쯤 겨우 볼 수 있어서 호기심이 생겼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처음의 감정은 한낱 어린 여자애의 호기심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열일곱이 되고, 열여덟, 스물이 된 후엔 진짜 가슴이 두근거리게 좋았다. 차가운 말투가 좋았고, 긴 손가락이 좋았고, 자신을 바라보는 무심한 눈빛에도 심장이 뛰었다. 사랑이란 단어를 쓰고 싶었다. 좋아한다는 어린애 같은 고백 말고,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면 달라졌을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한심한 일이었다. 그때 그 열정으로 공부를 좀 더 했다면 지금은 강민처럼 박사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그 시기를 지나 그녀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우습게도 한심하기만 한 유학을 준비하느라 늘지도 않던 영어공부를 죽으라 한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공부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다시 그 유명한 취업 준비생이 되었다. 그리고 정정당당하게 면접을 보고, 가구회사 ‘리안퍼니쳐’에 입사를 했다. 다행히도 리안은 특기와 면접을 중시하기 때문에 영어와 아나운서처럼 준비했던 면접이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흐르는 동안, 특별한 능력도, 뛰어난 호기심도 없었던 그녀는 자신이 조금이나마 잘하는 게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무난하기만 한 국어 실력에 비해 숫자에 밝았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은 다 손해 본다는 주식투자에서도 조금 재미를 보았고, 나름 그와 관련한 공부도 하고 있었다. 이런 건 고마워해야 할까.
정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잠깐의 휴식을 끝내고 자리에 앉은 정우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휴가 간 팀장이 오기 전 올려 놓아야 할 결재서류가 한두 건이 아니다.
“너 그러다 금방 할머니 된다.”
“뭐?”
또 시작이다.
“그렇게 이빨이 삭도록 양치질하면 이빨 상하는 거 금방이야. 그럼 뭐 얼굴도 그만큼 늙었겠다 할머니 되는 거지.”
정우가 심란한 심사를 표시하듯 강민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강민은 못 본 척 귀를 후비며 딴 이야기를 꺼냈다.
“참, 나 대리님 회의 참석해야겠더라.”
“응?”
이 회사에 입사한 지도 횟수로 5년, 그녀는 대리가 되었다.
그래도 그녀가 회의에 참석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근무하고 있는 기획개발실 회의도 아니고 전체 회의는 더더욱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회의엔 이틀 휴가를 낸 이 팀장 대신 참석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했다. 아무래도 이건 누군가의 계략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버릇처럼 미간을 모았다. 저 주름 봐. 강민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미간을 가리키며 놀라다 그녀의 표정에 손가락을 내렸다.
“ET가 일부러 월차 낸 건 아닐까? 회의 참석하기 싫어서.”
“…….”
전혀 믿음이 가는 이야긴 아니지만 강민의 말에 정우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 박사! 결재 완료 떴다. 처리해라.”
“예썰.”
모니터를 보며 결재가 완료되기만 기다리고 있던 박 부장의 말에 강민이 싹싹하게 대답했다.
강민이 박사라 불리는 건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리안퍼니쳐는 학력과 경력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입사지원서에 가족란, 학력란, 경력란 등 편견을 가질 수 있는 정보란을 없앴다. 그것으로 인한 특혜나 대우를 바라지 말고, 무조건 능력에 따른 창의적 회사로 발돋움하고자 하던 지금은 출산휴가 중인 전 사장의 원칙이었다.
대신 자신이 잘하는 것과 잘할 수 있는 것, 지원한 부서와 업무에 대한 열정, 이를 위해 준비한 내용이나 개인적인 비전에 대해 쓰는 란을 만들었고, 그것만으로도 취준생 사이에서 더 유명해진 ‘리안’이었다. 그래서인지 고졸 취업생도 있었고, 대학중퇴생도 있었다. 물론 차별은 없었다.
아무튼 그런 사이에서 강민은 박사학위를 가지고 입사를 했다. 그리고 신입사원에 불과하면서 회사 소식도 제일 먼저 알고, 소문뿐 아니라 직원들에 대한 뒷이야기도 가장 빨리, 그리고 많이, 그것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또한 특유의 능글맞은 친화력으로 그가 여러 면에서 박사라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이다.
이 박사가 자신의 일을 마친 듯 의자를 굴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정우는 탁상 달력에 시선을 던졌다.
회의 참석이라. 정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ET 또는 ETT로 불리는 일 중독자 이택 팀장은 어제 갑작스럽게 휴가를 냈다. 별 효과도 없이 자리 채우기에 불과한 전체 회의를 싫어하는 그인지라 사람들은 농담처럼 모두 그쪽으로 의견을 모으는 중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 박사가 틀렸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정우는 안다.
정우 역시 회의를 싫어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팀에서 한 명은 참석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은 일정들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딱히 핑계를 댈 만한 스케줄도, 급작스레 휴가를 낼 방법도 없었다.
만만한 게 이 년차 대리 나정우니까.
정우가 다시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

단정한 블라우스와 스커트 차림인 자신의 모습을 꼼꼼히 살핀 정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달라진 모습을 보였어야 하나.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그런 생각은 길지 않았다. 인사를 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은 회의실 앞이었다. 들어가자마자 회의 준비를 마친 비서실 해진과 눈인사를 하고, 한숨으로 서로의 처지를 불평한 정우가 자리에 앉았다.
‘점심 같이 먹자.’
입사동기 해진의 입 모양을 읽은 정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맨 끝자리, 당연한 자리였다.
새로운 인사발령으로 회의실은 조용한 가운데 술렁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모두 좋은, 혹은 강한 첫인상을 위해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러나 정우는 들어오지도 않는 서류를 응시하며 담담히 회의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시간을 확인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가 복잡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5년 만에 만나는 그에게 캐리어우먼의 멋진 모습이나 혹은 회의를 주도하는 당당한 모습도 보여 줄 수 없다. 팀장 대신 회의에 온 일개 사원으로서 테이블 맨 끝에 앉아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씁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나 보다.
톡톡.
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옆에서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는 표정의 친절한 온라인개발실 박 팀장이다. 다른 회사보다 뒤늦게 뛰어든 온라인 사업이었기에 아직 일이 많지만 누구보다 열심히인 그녀였다. 정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여자이지만 남자보다 일을 잘하고, 남자보다 더 믿음직한, 그래서 지난번 인사에서 핫이슈가 되었던, 그래서 그녀에겐 너무나 멋져 보이는 박하연 팀장이었다.
“예뻐졌다, 나 대리.”
“박 팀장님도요.”
“너 나 놀리는 거지?”
짐짓 팔짱을 끼며 부른 배를 내민 박 팀장을 보며 정우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웅성이던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누군가 당당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정우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새로운 사장, 최태완.
그다. 그가 서 있었다. 잠시 모든 것이 멈춘 느낌이 들었지만, 정우는 생각을 지웠다.
그녀의 입장에선 꽤나 오버스러운 소개가 끝나 가자, 태완도 그 시간이 불편했는지 잠시 난감한 표정이 스쳤다. 이런 것은 굉장히 싫어할 텐데. 잠시 생각에 머물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자신이 그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정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담담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물론 담담하다는 자신의 감정과 지금의 상황은 별개였다.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저 남자를 마주할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또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인사를 나누며 날카롭게 회의실을 둘러보는 그를 피해 정우는 자신도 모르게 최대한 박 팀장 뒤로 몸을 숨겼다. 둘째를 임신해 배가 부른 그녀였기에 아마 자연스럽고 천천히 움직여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건 진짜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젠장.
죄 지은 것도 아닌데 이건 아니다 싶어 멈칫하면서도 몸을 바로 세우는 건 꽤나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몸을 앞으로 세우며 그녀가 고개를 들자마자 멀리 서 있는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찌릿.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그녀는 차분하게 고개를 숙였고, 그 역시 별로 당황하지 않는 듯했다.
잠시 멍했던 기분도 금방 괜찮아졌다.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러나 그 순간 심장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에 대한 감정과 별개로 그를 마주친 심장은 덜컥거렸다.
그런데 이건 예전, 이택 팀장에 대한 강민의 불만 섞인 뒷담화를 들어 주다가 지나가던 이택 팀장과 눈이 딱 마주쳤을 때와 비슷한 느낌 같기도 하다. 이게 그런 감정인가. 정우가 픽 웃어 버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전의 자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의자에 앉았다.
“안녕하십니까, 최태완입니다.”
박수가 이어졌다.
“리안퍼니쳐가 지난 30년에 걸쳐 자리매김을 해 가면서 쌓아 왔던 신뢰와 발전을 통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그가 짧게 포부를 밝히고, 곧 회사 전반에 관한 회의가 진행되었다. 첫 회의였기에 서로를 파악하는 형식적인 회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간간이 태완의 날카로운 질문이 이어지자 젊은 사장에 대한 못 미더운 시선을 보냈던 몇몇 임원진의 표정엔 난감함이 스쳤다.
흠. 버크에 근무했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앞쪽의 임원진들에 해당된다. 정우는 그에 대한 곤두선 신경이 조금씩 누그러지며, 허리는 굽어지고, 딴생각이 빠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자신이 맡고 있는 업무 회의였다면 집중이라도 될 텐데 이건 좀 지루하다. 하품을 참고, 끝날 시간을 가늠하며 무심코 고개를 들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다.
무음으로 해 놓은 휴대폰이 반짝였다.
테이블이 아닌, 뒤쪽 벽에 나란히 놓인 의자에 앉아 있던 강민은 사람들 몰래 그녀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쟨 어떻게 들어온 거야. 정우가 신기한 듯 메시지를 확인했다.
-정은, 왜 그래? 그날이야? 맨 끝자리에 앉은 너의 직급을 파악하지 못하고 유난히 불량스럽다. 지금 네 자세로는 네 입에서 욕이 나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겠어.
쟨 이런 걸 물을 때만 정은이라 부른다. 정은은 집에서만 불리는 자신의 이름인데 그건 또 언제 안 건지.
정우가 앞을 보는 척하며 슬쩍 몸을 돌려 눈을 흘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회의 시간에 업무 내용을 태블릿PC나 휴대폰에 저장을 하기도 했기에 옆 사람만 조심한다면 메시지를 보내고, 그걸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물론 전체 회의에 참석하는 것도,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도 그녀에겐 처음이지만.
-정은, 왜 그래? 그날이야?
정우가 슬쩍 몸을 돌려 눈을 흘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날을 확신하는 강민과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남자일 때의 강민은 매력적일지 몰라도 친구로서 그는 참 단순하다.
표정 관리를 하느라 잠시 고개를 숙였다 들던 순간, 맨 앞에 앉은 태완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웃음기가 남아 있는 얼굴로 무덤덤하게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간간이 눈이 마주쳤고, 무심히 고개를 돌리다 그렇게 끝날 것 같지 않던 회의는 끝이 났다.
정우가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