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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뭘 먹을까?”
회의가 끝나고 강민과 해진, 그리고 정우가 나란히 로비에 섰다. 사무실로 돌아가기도 애매한 조금 일찍 끝난 회의 덕에 점심시간이 좀 더 여유가 생겼다.
“생선초밥 어때?”
강민의 말에 정우와 해진이 웃었다.
“이 박사님, 그게 다이어트식 같아도 폭식하기 딱 좋아요.”
해진의 말에 강민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박 비서님.”
회사와 한 블록 떨어진 일식집이었다. 점심 메뉴도 괜찮았고, 또 회사와 떨어져 있어서 부담이 없기도 했다. 정우를 사이에 두고 해진과 강민이 나란히 앉았다.
“새 사장은 괜찮나?”
강민의 질문에 해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몰라. 내가 모시는 것도 아니고, 실장님 말로는 분위기가 좀 신경이 쓰이긴 하는데 생각보다는 무난한 사람 같다고 하시더라.”
정우는 말없이 젓가락을 든 채 세트로 나온 초밥과 생선탕을 보고만 있었다.
“별로 무난해 뵈진 않던데. 임원들 표정, 특히 고 전무 얼굴 봤지? 처음엔 번들번들 여유롭게 의자에 기대어 있다가 질문 시작하자마자 바짝 긴장하던 거.”
고춘근 전무는 유명하다. 능력이 아닌 전적으로 인맥으로 들어와 버티고 있는 그를 비서들은 자주 자리를 비워 가장 좋아하지만, 회사에선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것이다. 능력 위주의 회사를 만들려던 전 사장도 어쩔 수 없었던 그였다.
강민이 대답에 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 입장에서 그 정도면 무난한 거야. 내연녀 선물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되니까.”
잠시 고 전무의 비서로 근무했던 해진이 예전 일이 떠오르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난한’. 그 단어가 그 사람을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는 그와 다른 사람이 보는 그는 다를 테니. 아마 그가 바라보는 자신과 강민이 보는 자신 역시 다를 것이다.
“나정우, 배고팠냐? 왜 이렇게 조용해?”
분명 질문이기는 하나 해진의 시선은 무엇을 먹을지 회전초밥에 가 있었다.
“배고파.”
그렇게 말은 했지만 정우의 젓가락은 움직일 줄 몰랐다.
“박해진. 세트 시켰으면 그걸로 끝내. 그리고 너 똥색 접시 그만 먹어. 왜 내가 산다고만 하면 식탐을 부리냐? 넌.”
“이씨. 더럽게. 황금색이거든.”
강민의 말을 무시한 해진이 보란 듯이 황금색 접시 두 개를 집으며 정우를 바라보았다.
“넌 왜 배가 고파? 중간에 간식 먹을 시간도 없어? 지난번에 사 놓은 초코바랑 사탕도 있잖아. ET 없어서 좀 한가한 거 아니었어?”
“ET가 그럴 분이시냐? 할 수 있는 일 정확히 나눠 주고 가셨어.”
강민의 대답에 해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깔깔거렸다.
“역시 난 그래서 ET가 좋아. 어딜 가든 완벽한 남자잖아.”
“완벽하긴. 꽉꽉 막힌 남자지.”
입을 내민 그의 말에 해진이 눈을 흘겼다. 언제나 해진과 강민이 만나면 투닥거리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정우는 무심하게 그들의 대화를 한 귀로 흘려들었다.
“됐어. 그만하자. 너랑 대화하면 밥 먹자마자 배고프니까. 정우야, 우리 가면서 커피라도 여유 있게 마시려면 일어날까.”
해진의 말에 정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남은 초밥을 먹기 위해 젓가락을 들었다.
“나 대리님, 그건 내가 먹어야죠.”
접시에 남은 생선초밥을 든 정우를 바라보던 강민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는 그녀의 젓가락을 자신의 입 쪽으로 가져갔다.
‘그래. 먹고 떨어져라.’
그런 눈빛으로 피식 웃어 버린 정우가 그가 하는 대로 놔둘 때였다.
“여기서 몰래 좋은 분위기 내고 있었어?”
초밥을 먹으려 입을 벌린 강민, 강민에게 손이 잡힌 정우, 그 모습을 낄낄거리며 휴대폰 카메라에 담던 해진의 시선이 모두 한곳을 향했다.
양 이사였다. 그리고 그 뒤는 고 전무를 비롯한 임원진들이 보였다. 해진을 바라보자 해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점심 예약 역시 비서들의 몫이니, 모를 리가 없었다.
정우가 잡힌 손을 빼고 일어섰다. 강민만이 아무렇지 않은 듯 넉살좋게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었다.
“에이, 다 아시면서, 아는 척하지 말아 주시죠.”
못내 안타까워하는 강민을 본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람들 역시 강민의 농담은 그러려니 한다. 정우도 담담히 웃었다. 이런 때에 정색을 하며 아니라고 하는 것이 더 우스워진다는 걸 아는 어른이니까.
미소를 짓던 정우가 멈칫했다. 최태완, 그가 전혀 웃지 않는 얼굴로 그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호한 시선에 잠시 당황스러웠다.
“천천히들 먹어.”
양 이사가 사람 좋게 웃었다.
“네, 감사합니다.”
넉살 좋은 강민의 대답을 끝으로 사람들은 안쪽에 있는 룸으로 들어갔다.
누군가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지만, 정우는 개의치 않았다.
“예약 장소는 분명 이쪽이 아니었는데.”
정희가 리수호텔로 예약했다고 했는데. 고 전무가 그 호텔을 좋아하잖아. 그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정희라면 사장비서실에 근무하는 해진의 후배이자 친구였다.
그를 무난하다고 평가하던 해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심하던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의 시선이 유난히 따가웠다.
“일어나자. 여기 있다가 괜히 일거리 생길지도 몰라.”
“그래.”
세 사람은 같은 생각이었는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

-어떠냐?
전화 속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뭐가?”
-요즘 너 어떠냐고?
그녀의 오빠, 대우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똑같아. 출근하고, 퇴근하고, 자고, 또 출근하고.”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다. 회사에서 워낙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니, 집에 오면 손 하나 까딱하기가 싫어졌다. 전화를 받으면서 정우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짐이 별로 없으니 치울 것은 없었지만, 아마 TV며 바닥엔 먼지가 쌓여 있을 것이다.
-정은이, 너 할머니께서 반찬 떨어졌을 거라고 가져가라고 하시더라. 할머니께서 가지고 가신다는 거 어머니가 말렸어.
정은은 그녀가 집에서 불리는 이름이다.
정우의 부친, 석현은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혼자 힘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엄마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했다고 했다. 혈혈단신이었던 오 박사나 석현에게 손이 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오 박사는 그녀의 이름을 남자로 지어야지 남동생을 볼 거라며 이름을 정우로 지으셨다. 석현 역시 열 명쯤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고 했다. 대우, 정우, 막내 이름은 희우로. 그 뒤에도 차례로 지어 놓은 이름은 많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셋째는 없었고, 엄마는 귀한 딸에게 정우란 이름을 지어 주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호적상 나정우, 집에서는 엄마의 고집으로 나정은으로 불리고 있었다. 처음엔 집에서의 정은과, 밖에서의 정우가 꼭 다른 사람인 것 같아서, 다른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처럼 느껴져 싫었지만, 지금은 어느 것으로 불려도 괜찮을 만큼 익숙하다. 그녀는 그녀일 뿐이니까.
-나정은!
“응.”
생각에 잠겼던 정우의 시선이 달력에 머물렀다.
역시 할머니의 기억력은 여전하시다. 그렇지 않아도 주말쯤 갈 생각이었는데.
“오늘은 좀 피곤하고 다음 주말에 갈 거야. 엄마한테 맛있는 거 많이 해 달라고 말해 줘.”
대우의 어이없어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알았다.
그녀가 장식장 위에 놓인 가족사진에 시선을 두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대우 부부, 그리고 정우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가평의 집에서 이사기념으로 찍었던 사진이다.
그리고 그 집에서 나와 독립을 한 지는 한 삼 년쯤 된 것 같다. 그사이 많은 일이 일어났다.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지신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함께 살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건강하셨기에 부모님의 건강에 대해선 조금 안심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아버지의 입원은 가족들에겐 큰 충격이었다. 그즈음 아버지가 경영하던 회사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이 먼저인지는 몰랐지만, 회사가 흔들리고,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고, 그래서 그녀의 가족에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오 박사 소유의 건물이며 땅을 정리해야 했고, 여유로웠던 생활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어느 순간 사치가 되어 버렸다.
결국 가족들은 오랫동안 살아온 빌라를 떠나 평생 꿈이기도 했던 작은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물론 지금은 고치고 다듬고, 또 꾸며 가며 만들어진 전원주택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때는 빈집을 조금 개조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면서도 가족들이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좁더라고, 조금 불편하더라도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 그리고 오빠와 그녀, 모두 함께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사를 한 그날 기념이라며 사진을 찍었다. 모든 것에 긍정적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덕분인지 걱정을 하기보다는 아버지의 건강이 나아진 것만으로도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사 후 정우는 너무 멀어진 직장 때문에 독립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가족 모두 그녀의 독립을 반대했지만, 운전도 서툴렀고, 밤길도 위험하다는 할머니의 결정이 큰 영향을 끼쳤다.
그때 태완과의 선 이후로, 외조부 오해문 박사와 외조모이신 모주란 여사의 권력관계엔 큰 변화가 있었다. 절대 권력이었던 오 박사의 힘이 약해지고, 대신 모 여사의 힘이 강해지고 말았다.
특히 귀한 막내 정우에 관해서는 오 박사와 석현 대신 모 여사와 정우의 모친, 연실의 허락이 가장 중요해졌다.
“청소라도 좀 할까?”
-나한테 묻는 거냐?
“아니. 혼잣말이야.”
대우가 피식 웃는다.
-혼잣말이 꼭 도와 달라는 이야기 같아서.
“오빠 한가하면 도와주고. 참, 언니는 괜찮아? 며칠 전 통화할 때 입덧이 심하다고 하던데.”
정우의 새언니 혜나가 임신을 했다. 결혼 오 년 만의 임신이라 모두들 기쁨이 컸지만, 심한 입덧에 가족들의 걱정도 많았다.
-괜찮아. 이제 과일도 먹고, 죽도 먹으니까.
대우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정우도 웃었다. 아버지를 꼭 닮은 무뚝뚝한 오빠도 아이에 대해선 별수 없나 보다.
-아무튼 조심해라.
“오빠나 조심해. 언니한테 잘하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대우에게 정우는 그저 코웃음을 웃었다.
-너도?
“뭘?”
-그냥 여러 가지.
의미를 알 수 없는 그의 웃음이 거슬리긴 했다. 대우의 전화를 끊은 정우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일어섰다. 생각난 김에 청소도 하고, 마트에서 장도 보고, 오랜만에 밥도 해 먹어야겠다. 혼자 있기 심심한데 해진이랑 강민도 부를까. 이제는 학교 친구보다도 절친이 되어 버린 사회 친구들이 편하기도 했기에 정우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정우: 함께 저녁 먹자. 우리 집에서.
해진: 좋아.
강민: 콜.

카카오톡을 보내자 곧바로 둘에게 오겠다는 대답이 왔다. 시간을 확인하며 정우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세탁기를 돌리고, 욕실청소까지 끝낸 정우가 냉장고를 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없는 게 많았다. 눈으로 대충 필요한 것을 확인한 정우는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 목욕탕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목욕탕에 들렀다가 마트로 갈 생각이었다.
겨울바람이 차다. 가을인가 싶었는데, 출근 몇 번 하고 나니까 벌써 겨울이 되어 버렸다. 자신은 그대로인데 시간은 흐르고 나이가 들고 모든 것이 변했다. 그리고 그가 나타났다. 갑자기 떠오른 그를 지우며 정우가 걸음을 빨리했다.
네 시.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마트에 장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강민과 해진이 여섯 시쯤 온다고 했으니, 장을 봐 준비를 해 놓으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다.
저녁 메뉴를 무엇으로 할지 고민하며 카트를 미는데 정육코너가 보였다. 세일 중이라는 삼겹살을 보던 정우가 발길을 돌려 해진이 좋아하는 찹스테이크와 샐러드 재료를 사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몇 시간에 걸쳐 열심히 청소까지 했는데 삼겹살을 굽는 건 집 안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나 닭볶음탕 먹고 싶다. 술은 내가 사 간다.
강민의 문자에 정우가 인상을 쓰면서도 결국 닭볶음탕 재료 쪽으로 향했다. 원래 요리는 잼병이었는데, 혼자 살게 되고, 밖에서 사 먹는 밥에 질린 그녀는 요리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웬만한 음식은 다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정우는 자신을 위한 와인도 샀다. 원래 와인은 별로였는데, 유일하게 그녀의 입맛에 맞는 와인을 마트에서 발견했다. 물론 해진이 말해 줘서였지만.
“아, 우유.”
정우가 생각난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우유도 떨어졌다. 아침이면 밥 대신 우유를, 또 물 대신 우유를 마시기도 하는 그녀에게 우유 쇼핑은 필수다.
우유코너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우유를 찾았다. 역시 마트에 사람이 많으니 자신이 찾는 우유도 남은 건 하나였다. 얼른 손을 뻗는데, 누군가 같은 우유를 집었다.
“흠.”
우유 하나로 싸울 건 아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손의 주인을 향했다.
“어?”
정우가 잠시 미간을 모았다. 그녀가 아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태완이었다.
그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무슨 표정이래.’
정우는 얼른 우유에서 손을 떼고, 다른 브랜드의 우유를 세 병 골랐다. 일주일 동안 세 병이 필요하니까. 평일에 장을 보는 건 꽤나 귀찮고 피곤한 일이다.
피식.
카트에 나란히 우유를 넣는데 그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안 봐도 안다. 우유를 사는 그녈 보며 그가 어떤 생각을 할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정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 동네 살아?”
태완이 하나 남은 우유 대신 그녀가 고른 우유를 집으며 물었다.
“네.”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별 감흥 없는 표정이기는 그녀도, 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무덤덤한 시선을 마주했다.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두근거리던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그의 시선에도 담담하고, 그의 사소한 질문에도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의미를 부여하진 않는다.
물론 그리 간단한 감정은 아니었다.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이제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고 할 수도 없다. 다만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자랐다. 사람의 감정이란 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할 줄 알게 되었다.
더 할 말이 남아 있냐는 표정의 정우를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그러나 이곳은 그럴 장소가 아니라는 것은 그도 알 것이다. 그가 이 동네의 마트에 오는 것 자체가 의외이긴 했지만,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곳에서 무슨 이야길 하겠는가.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녀는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뒤통수가 따갑다.

무겁다. 차가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 우유코너로 돌아가 우유를 두 개만 남기고 내려놓고, 두 병이던 소주도 한 명만 사고, 꼭 필요한 것 이외엔 다 내려놓았는데도 꽤 무겁다.
그녀가 한숨을 쉬며 짐들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할 수 없다. 다시 마트에 오는 건 더 싫으니까, 한 번 힘든 게 낫다. 경험상 여러 번 아프고 힘든 건 싫다. 잠시 내려놓았던 짐을 든 그녀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미 주위는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물건들이 든 큰 가방을 양손에 들고 걷고 있는데 도로를 지나던 검은색 차가 그녀 옆에 멈춰 섰다. 일찍 도착하는 강민이었으면 좋겠지만, 강민에게는 차가 없다. 정말 이해할 수 없지만 차보다 비싸고 애인보다 아낀다는 오토바이만 있었다. 그리고 해진의 차는 그녀가 좋아하는 하늘색이다.
당연히 자신과는 상관없는 차라고 생각한 정우가 계속 가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짧은 클랙슨과 함께 까만 유리창이 내려졌다. 길을 묻는 것인가. 무심하게 시선을 돌리던 정우의 미간이 버릇처럼 구겨졌다.
“타. 태워다 줄게.”
또 태완이다. 이제는 좀 귀찮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양손에 들린 가방으로 향했다.
“괜찮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태완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렇게 한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마주할 때마다 조금씩 떠오르는 기억들이 너무 한심했다. 즐겨 쓰던 향수도 따라 써 보고, 그가 좋아한다는 브랜드의 옷도 혼자만의 커플티셔츠로 입기도 했었던 것 같다. 아니 그랬었다.
그가 읽었던 책을 사서 똑같이 읽기도 했고, 대학도 그와 같은 대학에 가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리고 그 기억들 때문에 밤마다 베개에 화풀이를 하며 잠을 못 들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못 들었나. 괜찮다는 그녀의 말에도 그는 가만히 기다릴 뿐이었다.
“…….”
“괜찮습니다. 바로 옆이에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사장님.”
말을 덧붙인 정우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바로 옆이라고 하기엔 오르막길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차를 탈 생각은 전혀 없었다.
탁. 그가 차에서 내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
정우는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야! 나 대리!”
그때 멀리서 강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그의 목소리가 반가웠던 적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 같다. 정우의 입가에 안도의 웃음이 스민다.
“나정은! 왜 그래? 지금 무겁다고 인상 쓰는 거야?”
눈썰미 좋은 이강민 박사도 정우만 바라볼 뿐 그녀의 옆에 선 태완을 몰라보는 눈치였다. 아니, 아예 주위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자신이 들어야 할 가방만 바라보고 있었다.
“가방이 두 개나 돼? 일주일 장을 다 봤냐?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늦게 오는 건데. 오늘따라 발길이 가볍더니 이런 짐이 날 기다리고 있었구나. 내가 두 개 다 들어 주는 대신 너 오늘 맛있는 거……. 어?”
불평을 하면서도 강민이 얼른 그녀의 무거운 가방을 받아 들고는 그제야 옆을 바라보았다.
“사장님?”
그가 얕은 어둠에서 태완을 확인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외국 사람처럼 강민의 말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강민은 자신의 것까지 세 개의 가방을 들고 태완에게 인사를 했다. 얼추 비슷한 키에 두 남자가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