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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안녕하십니까?”
태완 역시 무뚝뚝하지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저는 기획개발실 이강민입니다. 인사하셨죠? 여긴 나정우 대리님이고요.”
그는 친절하게 새로운 사장에게 자신과 정우의 소개를 했다.
“네.”
그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마 강민도 이 동네가 그의 차, 그리고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정우와 만나기 위해 왔다는 생각보다는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넌 무슨 일 있어? 눈으로 묻는 강민에게 정우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친구 집에 밥 먹으러 왔습니다.”
강민이 사람 좋게 웃었다.
“근처에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 네.”
태완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정우와 강민이 눈빛을 교환했다. 말꼬리를 늘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 강민과 달리 정우는 슬쩍 태완을 보다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가 왜 이 근처에 왔는지는 신경 쓸 이유가 없다.
그런데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다. 그녀가 알고 있던 오만한 눈빛과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표현 방법이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보고 싶은 사람? 나이가 들어 뻔뻔해졌나. 저런 이야길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하긴 바뀐 것은 그것만이 아니겠지. 그는 서른 중반을 넘긴 남자였다.
그사이 강민은 정우에게 넘겨받은 짐 가방을 들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오호. 내가 좋아하는 거 많이 샀네. 소주는 한 병만 샀냐? 집에 더 있어? 없으면 갈 때 사 가자. 집에 있다가 다시 나오기 귀찮으니까.”
그는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사장님은 소주 좋아하세요?”
정말 붙임성 좋은 애다. 난 태완이 아니라도, 사장님 류의 사람들을 만나면 긴장되던데.
“사장님께서도 함께하시면 좋은데. 그럼 짐이 무거워서 저희는 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하라는 듯 강민이 툭 그녀를 쳤다.
“안녕히 계세요.”
정우를 바라보는 태완의 시선이 느껴졌다. 조금 멍해 있던 정우가 강민을 따라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섰다.
무덤덤한 표정의 정우가 강민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짐이 없어져 팔은 가벼웠지만 대신 머리가 복잡하게 엉켜 더 무거워졌다.
“표정 좀 무섭던데? 집에 도둑 들었나?”
“응?”
뜬금없이 도둑은.
“뭔가 뺏기고 심술 난 표정 같더라고. 내가 그 표정 잘 알거든. 우리 형이 좋아하던 여자애가 나 좋다고 했을 때 짓던 그 표정.”
강민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결국 자신이 형보다 인기가 많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허풍이 섞이긴 했지만 그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그녀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가자. 해진이 곧 도착하겠다.”
“오케이.”
정우가 잠시 뒤를 돌아보았지만,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
“맛있다.”
해진과 강민이 부른 배를 안고 소파에 기대앉았다.
“설거지는 이 박사가 할 거니까 너도 이쪽에 앉아.”
해진이 강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니야. 식기세척기에 넣기만 하면 되는데. 오늘은 쉬어.”
정우가 그릇정리를 하는 사이, 해진과 강민은 이차 준비를 시작했다. 닭볶음탕, 찹스테이크에 소주와 맥주를 마시더니, 과일과 해진이 사 온 케이크로는 와인이 딱이라며 거실 테이블에 안줏거리를 옮기고 있었다.
오 일간의 회사 스트레스를 주말폭식과 예능프로그램으로 해결하려는 듯 그들의 눈빛은 꽤나 전투적이었다.
“좀 천천히 하자. 난 더 이상 못 먹어.”
그러나 누구도 정우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결국 정우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욕실로 향했다.
“참, 좀 전에 사장님 만났다?”
강민의 말에 TV에 집중하던 해진이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아까 오는 길에 정우 만났는데, 사장이 지나가더라고.”
강민은 일인용 소파에 다리를 펴고 앉아 있고, 해진은 바닥에, 그리고 주방을 정리하고 양치질을 하고 나온 정우는 소파에 양반다리로 앉았다.
“여기.”
해진이 그녀 몫의 와인, 그리고 케이크와 과일 접시를 내밀었다.
“좀 쉬었다가 먹을게.”
정우가 접시를 받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왜 사장님은 안 어울리게 이 나이 든 동네에 왔을까? 여긴 맛집도 없고, 세련된 카페도 없는데. 한영 수퍼에 온 것도 아닐 테고.”
한영 수퍼는 정우와 해진의 단골 맥주집이었다.
“그러게. 여긴 나정우처럼 심심한 애들이나 있을 동네인데.”
“…….”
TV를 보며 못 들은 척하는 정우에게 두 사람의 시선이 모였다 떨어졌다. 묘한 눈빛을 교환하던 해진과 강민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괜히 포크로 케이크를 뒤적이며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이 따갑게, 끈질기게 고스란히 느껴지자 결국 그녀의 입에서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
해진이 다시 물었다.
“그게 다야.”
정우의 담담한 대답에 해진과 강민도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첫사랑과의 기막힌 재회네.”
해진이 중얼거렸다. 정우는 태완과의 인연에 대해 전부를 말한 것은 아니지만 대략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자세하게 설명하고 싶어도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물론 자신의 첫사랑의 거절을 위로받고자 하는 것도, 자신의 감정을 이해받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가끔씩 마주하게 될 불편한 상황들에서 강민과 해진이 이상하게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예상대로 그들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좀 더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럴 땐 참 죽이 잘 맞는다.
“관리를 잘한 건가. 서른일곱 살 같지 않던데.”
해진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하자 강민이 고개를 저었다.
“원래 외모로는 모르는 거지. 남자는 속을 알아야 해, 속을.”
강민이 불끈 주먹을 쥐자 해진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서른이 넘은 남자에게 스물이 갓 넘은 여자, 남자는 무조건 좋아해야 하는 거 아냐? 그때의 정우라면 만 스물둘에 답답하고 순진했을 거잖아.”
해진의 질문에 강민이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무덤덤하게 케이크를 먹던 정우도 조금 궁금하긴 했다. 그때 그 남자의 마음이란 게.
내 감정에 집중하느라, 자신을 받아 주지 않는 그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때는 그 남자의 마음이라는 거, 그 남자의 의중이라는 거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심장이 부풀어 오르던 때였다. 그를 떠올리면 심장만큼이나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던 때였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었다. 그건 나를 좋아한다는 사람을 만나고, 눈길이 가는 사람을 만나고, 그런 시간이 흐른 후에야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아마도 서른이 넘으면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서른둘이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난 땡큐지.”
해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픽 웃었다.
“하지만.”
이 박사가 단서를 붙였다.
“사람 좋아하는 덴 각자의 취향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태어날 때부터 기저귀 찬 모습을 보고, 걔가 코 흘리면서 유치원 가고, 울면서 초등학교 가고, 뒤뚱뒤뚱 자라는 걸 다 봤다면, 여자로 안 느껴졌을 수도 있지. 성에 눈뜰 열아홉 살에 정운 겨우 열 살 코흘리개였잖아. 그건 범죄야.”
“초등학생을 좋아하란 이야기가 아니잖아. 그저 스무 살 여자일 뿐이야. 자기보다 아홉 살 어린.”
해진의 말에 강민이 고개를 저었다.
“어린애인 건 똑같아. 네 동생이 자랐다고 해서 어리지 않은 건 아니잖아. 아무리 자랐다 해도 너한테 여전히 어린애처럼 보이잖아.”
그럴까? 하긴.
정우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정우도 다른 사람의 말이 귀에 들어온다. 귀를 막은 것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던 때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무리 여자로 안 느껴진다 해도 애한테 너무 차가웠던 거 아냐? 그렇게 연속으로 확인사살을 할 필요까진 없었다고 본다, 난.”
해진의 불만스러운 말투에 정우에게도 씁쓸함이 머물렀다.
“그렇다고 친절하게 웃으며 너 싫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기분 나쁘지 않았겠냐? 게다가 나정우가 아니라 나정은이었잖아.”
“?”
“유도리, 아니 융통성 없었던, 귀한 막내딸 나정은.”
픽. 정우가 웃었다.
흠.
정우가 그때를 떠올렸다. 아마 자신을 받아 주지 않으면서, 웃었어도 놀리는 것 같아 싫었을 것이다. 결국 뭘 해도 그에겐 안 되고, 그가 어떻게 해도 그녀는 상처받았을 것이다.
“어쨌든 지난 일이야.”
정우가 단호하게 말하며 달콤한 케이크를 먹었다. 달콤함에 찝찝했던 마음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차이지만 않았으면, 안 그랬음 네가 사장 사모님이 되어 있었던 거야? 애도 한 둘쯤 딸린 아줌마가 되었을지도 몰라. 나정우는 아이 좋아하니까 셋은 되려나.”
해진이 신기한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정우는 안 신기한데, 나정은은 참 알면 알수록 신기해. 부잣집에서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귀한 막내딸이라는 것도 그렇고, 신부수업과 외국어공부만 하다가 사장 사모님이 될 뻔했다는 것도 그렇고.”
강민의 말에 정우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대우와 결혼한 새언니 혜나가 결혼 전 요리클래스에 다닐 때, 혼자 다니기 심심하다며 그녀를 데리고 다녔다.
아마 그즈음 그녀는 ‘나 남자한테 차이고 힘드니까 건드리지 말아요.’ 하는 얼굴로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쓰러지시기 전이었고, 그녀는 여전히 귀한 막내딸이었다. 그랬기에 그런 그녀가 가족들은 답답했을 것이다. 아마 대우가 혜나에게 부탁했겠지.
그런데 그 클래스의 요리선생님이 요즘 케이블 TV에 나오는 것을 보고, 신기한 마음에 이야길 했는데, 강민은 그것을 신부수업이라 불렀다.
사실 요리보다 수업이 끝난 후 혜나와의 시간이 좋았다. 수업이 끝나면 꼭 그 옆에 있던 전통찻집에 가서 조근조근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연잎차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있잖아. 나는 대우 씨랑 열 번쯤 헤어졌던 것 같아. 우린 같은 일을 하잖아. 더 많이 부딪히고, 더 많이 싸우고. 디자이너랍시고 자기 작품에 대해선 자존심도 강했어. 절대 타협은 없었어. 그땐 상대방 의견에 수긍하면 그럼 지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혜나가 웃었다.
“그런데 헤어지고 나서, 일을 하다가도 대우 씨가 이걸 보면 뭐라 할까, 이건 좋아하겠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전혀 집중할 수 없더라. 그 사람과 일은 별개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랑 일을 해야 내가 집중할 수 있더라고. 그리고 내가 연락해서 다시 만났어.”
그때가 떠오른 것인지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헤어졌던 시간이 나쁜 건 아니었어. 현실을 알게 해 주었거든.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헤어진 건 아니지만 너한테도 이 시간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거야. 나중에 이 시간을 떠올리면 분명히.”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어진 시간 동안 혜나는 사랑을 깨달았고, 그렇게 거절당한 정우는 현실을 깨달았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떨어져 있는 시간이 나쁜 건 아니라는 건 맞는 말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런 시간들이 좋았었다. 언니가 없던 그녀에게 혜나는 언니처럼, 그리고 친구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렇게 보듬어 준 혜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씩 스스로를 찾을 수 있었다.
그때를 떠올린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몄다.
“나정우는 오래된 아파트에 독거노인처럼 혼자 살면서 일은 잘하지만 그래 봐야 대리인 평범한 직장인일 뿐인데, 과거는 나름 화려하다니까.”
해진이 옆에서 킬킬거렸다.
“그러게, 원래 부잣집 딸들은 이런 아파트에 안 사는 거 아니냐?”
“부잣집 아니니까 그렇지.”
집 안을 둘러보는 강민을 따라 정우도 새삼스럽게 자신의 집을 둘러보았다.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대학 시절 몰던 외제차도 힘들 때 쓰라며 아빠가 몰래 줬던 신용카드도.
그러다 이 아파트에 살게 된 것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다. 회사와 가깝고, 자신이 주식투자로 번 돈과 적금, 은행 대출을 끼고 살 수 있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정이 나아진 이후엔 이곳에 익숙해져 다른 곳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래된 아파트에 독거노인, 흠.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정우는 가만히 웃었다.
“참, 우리가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잖아. 네 감정은 어떤데?”
차분한 질문에 정우 역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의 나는 아니야.”
그때의 나정우는 아니다. 팔걸이에 한쪽 팔을 기댄 정우가 무심하고도 담담히 대답했다. 자신이 감정이 정확히 뭔지, 그걸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가 그녀의 회사에 온 이후 줄곧 생각했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며칠은 밤잠을 설치고, 며칠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일도 몰아서 했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생각지도 않은 ET의 칭찬을 듣기도 했다.
ET의 칭찬이면 각목 나정우도 춤출 수 있지만 그래도 명확해지지 않는 감정의 잔재들 때문에 마음 놓고 기뻐할 수도 없었다. 그걸 뭐라 꼬집을 순 없지만 다만 확실한 것은 그것이 예전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해진의 대답에 정우가 미소를 지었다.
환기를 위해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시원하다.”
“그러게. 술 마셔서 그런지 시원하네.”
세 사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베란다 창가로 향했다. 무언가 굳이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아도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여긴 조용해서 좋아.”
해진의 말에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 놓은 창을 통해 크리스마스 캐롤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곧 크리스마스네.”
“그러게.”
그녀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엔 좀 색다르게 보내고 싶다.”
“그래 봐야 영화 보고 술 마시거나, 술 마시고 영화 보는 거겠지.”
강민이 부른 배를 두드리며 피식 웃었다.
“더 이상은 못 먹겠다.”
“그럼 산책 나가자.”
잡생각이 많아질 때는 걷는 게 최고지. 정우가 해진과 강민을 바라보았다.
“나도 이 동네로 이사 올까. 여기가 갈수록 좋아져.”
해진이 산책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대답 대신 바닥에 누우며 눈을 감았다.
정우 역시도 그랬다. 이 집에 살게 된 것은 3년이지만 꼭 이십 년은 살았던 것처럼 익숙하고 편안했다. 산자락을 끼고 있어, 발전이 더디었던 동네라 여전히 오래된 것이 많았다. 이 아파트도 족히 삼십 년은 되었다는데 그녀에겐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오르막길을 걷는 것도 좋았고, 저녁이 되면 고즈넉해지는 분위기도 좋았다. 게다가 요즘은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찻집도 많이 생기고, 길거리 공연도 하고 볼거리가 꽤 늘었다. 갈수록 세련된 분위기가 되어 가니 해진도 여기가 꽤나 괜찮게 느껴지나 보다.
“넌 게을러서 안 돼. 다 먹으니까 산책 나가자고 해도 눕기부터 하잖아.”
강민의 말에 해진이 번쩍 눈을 떴다.
“아니거든.”
둘의 말싸움이 시작되려고 한다. 정우가 벌떡 일어섰다.
“얼른, 나가서 커피 마시자. 좋은 커피숍 생겼어.”
바람이 불어온다.
2. 평범하게 흐르는 시간
처음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긴장하던 시기가 지나고 정우에게도 나름 안정이 찾아왔다. 생각해 보면 직원과 사장이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층이 다르니 태완을 마주칠 일도 별로 없었고, 그날 이후 회의에 참석하는 일도 당연히 없었다.
또 회식이 있다 해도 밀린 업무를 핑계로, 혹은 한약을 먹고 있어서, 점심으로 먹은 짬뽕 때문에 두드러기가 나서, 물론 이러한 핑계는 강민의 아이디어였지만 그런대로 잘 넘어가고 있었다.
계속 빠지는 게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부서의 특성상 일이 많고 그걸 핑계로 회식 역시 많았기에, 참석 여부에는 좀 너그러운 편이었다. 특히 이 팀장은 일을 제외하면 성격만큼이나 자유로운 스타일이었고, 다른 직원들은 강민이 구워삶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부서 회식에 사장이 한 번씩 참석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새로운 젊은 사장으로서 직원들과의 소통이라는 명목하에 이런저런 일들을 해 나가는 모양인데, 정우로선 참 귀찮은 일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회식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시간이 갈수록 그를 만날 확률이 줄어들기도 했고, 스스로 조심하기도 했기에 정우는 이제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태완이 사장 업무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전 사장이 육아휴직을 하는 동안 한시적이고, 그가 하는 일이 따로 있어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강민에게 들은 것 같다. 그와의 관계를 안 이후로 강민은 어떻게 알아 온 것인지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넘쳐났다. 절대 정우를 위해 말을 거르지 않는 강민으로 인해 이러다 과거 만났던 여자들까지 일일이 다 알 지경이었다.
“나정우! 이제 부서회식 참석하는 건 거의 끝나 가는 것 같더라.”
강민이 그녀의 책상으로 다가왔다. 그렇지 않아도 회식 때문에 예민해져 스케줄러를 정리하던 정우가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 며칠 들은 그에 대한 소식은 지난 오 년간 소식을 들은 것보다 더 많았던 것 같다.
그 선 이후 지금까지 그의 소식에 대해선 전혀 듣지 못했었다. 그녀도 묻지 못했고, 가족들 누구도 꺼내지 않았다. 아니 아빠의 병원을 오가며, 회사에 신경을 써야 했던 가족들이었기에 정신이 없었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게다가 오 박사가 아니었다면 따로 연락을 한다거나 할 정도로 친하지 않았고, 연관성이 전혀 없는 그였다. 영국에 갔는지, 아니면 유학을 포기했다는 그녀의 소식을 듣고 다시 미국으로 갔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비밀결혼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별생각을 다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울컥 짜증이 인다.
“나정우, 정신 차려. 너 요즘 정신 나간 애 같아.”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강민 씨! 일개 직원 이강민 씨! 나 대리거든.”
“또 심사가 사나우시고만. 잘난 대리 가지고 트집 잡는 거 보니까. 나는 박사거든.”
정우가 눈을 치켜뜨자 강민이 양손을 들어 항복한다는 표시를 하며 요상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약 올릴 때 보이는 표정이다.
“그런데 그런 표정은 나이 든 남자들이 질색해. 와이프가 잔소리할 때의 표정이거든. 좀 상큼하게 안 돼?”
“이 씨.”
그녀의 표정에 금세 그가 꼬리를 내리며 굽신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나 대리님, 그럼 회의 전에 일개 평사원에게 커피 한 잔 사시죠.”
“됐어!”
“지금 아니면 계속 회의라 시간 없을 텐데.”
그 말에 정우는 벌떡 일어섰다. 그녀 역시 다디단 커피가 필요했기에.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옥상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동전을 넣고 자판기 커피 버튼을 누른 정우가 강민에게 먼저 한 잔을 내밀고, 또 버튼을 눌렀다.
“여자가 찾아왔대.”
“응?”
호호 불어 뜨거운 커피를 마시던 정우가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크게 떴다.
“사장실로 농염한 여자가 찾아왔다고. 박해진 대리님이 그러시더라고. 연예인처럼 예쁘다던데. 진하지 않은 화장에 반짝이는 피부. 그리고 날씬한 몸매. 자기 관리가 뛰어난 부잣집 딸내미겠지. 물론 해진이 말로는 온몸에 돈 쳐 바른 여자라고 하더라.”
강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 그래.’ 하는 표정으로 정우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뿌연 안개만 없다면 저 멀리까지 보일 텐데. 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신경 쓰고 드라이까지 하고 온 머리를 팔목에 차고 있던 고무줄로 묶어 버렸다.
“뭐, 꽃바구니 들고 온 게 일적인 관계는 아닌 것 같다고 하던데. 그쪽 비서한테 해진이도 들은 거라더라. 비서가 한정희잖아.”
진짜 사람이 변한 건가.
차갑게 내치던 그는 어디 가고, 이제는 여자 관리도 제대로 못 하나. 취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무실로 여자가 찾아오다니. 그건 그의 이미지 관리 차원의 문제였다.
“예쁘더래. 내 스타일일까?”
정우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여기 있을 줄 알았다.”
해진의 목소리에 정우가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었다. 정우의 손에서 동전을 가져간 강민이 자판기로 다가갔다.
“난 율무차. 참, 들었지? 여자.”
해진이 정우의 표정을 살피며 강민이 내민 율무차를 받아 들었다.
“응.”
“네가 까인 이율 알았어.”
해진이 그녈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내가 급하게 가서 엘리베이터에서 타는 모습만 얼핏 봤거든. 그래도 알겠더라. 사장의 여자 취향은 너와 정반대야. 완벽하게 이해가 되었어.”
“?”
해진이 웃으며 율무차 한 모금을 마셨다.
“역시 본인만 모르는군. 정반대라. 어떤 취향인지 딱 알겠네.”
강민 역시 해진이 했던 것처럼 정우를 바라보며 이해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씨, 무슨 뜻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