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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정반대의 여잔 뭐야. 도대체.’
생각에 잠겼던 정우가 하품을 참는 강민의 모습이 보이자 피식 웃으며 회의에 집중했다.
오늘따라 회의도 길고 지루하다. 맨 앞에 앉아 있는 이택 팀장도 이번에 좀 지루한 눈치이다. 12시 점심시간은 이미 지나 버렸고, 점심시간을 더 주지도 않을 거면서 박 부장의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박 부장이 주도하는 기획회의란 게 그렇다. 어느 정도 박 부장의 머릿속에 그림이 잡혀 있고, 그게 만족스럽게 진행될 때까지, 자신의 뜻을 이해시키기 전까지 박 부장은 회의를 끝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전혀 반영되지 않고 결론적으론 자신의 생각에 들어맞아야 회의는 끝이 난다.
꼭 박 부장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박 부장의 그간의 경험과 연륜, 그리고 지금까지의 판단을 존경하기는 한다. 다만 어차피 그럴 것이라면 이런 회의 대신 지시를 내리는 게 빠르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의견 존중 차원의 회의라는 명목하에 빤히 보이는 것은 형식적인 이야기들뿐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알겠습니다. 우선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대리, 잘 들었지?”
말을 이으려던 박 부장이 이택 팀장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 다른 직원들의 다행스러운 시선도 그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택 팀장의 한마디에 드디어 회의가 끝났다.
박 부장이 기다린 것도 아마 이택의 명확한 대답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사장이 오고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키고 싶었던 박 부장은 지금 여러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프리미엄 라인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자신이 믿고 있는 이택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택의 대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박 부장 역시도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짧은 점심시간이 시작되었다. 정리를 끝내자 정우와 강민은 12시 50분에야 식당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내가 이 회사에 들어온 이유는 이 사내식당 음식이 맛있다는 소문이 나서야.”
강민의 장난스러운 말에 정우가 피식 웃었다.
“웃기네. 넌 모든 음식이 다 맛있잖아.”
“아니거든. 리안퍼니쳐의 가장 좋은 복지는 휴게실과 사내식당이라는 건 취준생에게 이미 소문날 대로 소문난 사실이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했다. 전 사장이 가장 신경 썼던 부분 중에 하나가 직원 복지였으니까. 창의력 향상을 위해서는 그는 그에 맞는 환경의 변화가 중요하다고 여겼고, 복지도 그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 탕수육을 남기겠다고?”
“아니, 안 남길 건데.”
정우가 고개를 저었다.
“남기면 아깝잖아.”
얜 사람 말을 듣는 거야.
정우가 눈을 흘겼다. 이건 자기 걸 다 먹고 무언가 먹고 싶을 때 쓰는 이강민의 수법이다.
평소라면 식당 아주머니에게 웃으며 애교를 부렸겠지만, 지금은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 좋아하는 반찬은 별로 남지 않았고, 또 시간도 별로 없었기에 목표를 정우의 식판으로 삼은 모양이다.
“안 남긴다고. 다 먹을 거야.”
또 이렇게 넘어가면 안 된다. 먹고 떨어져라 하기에는 아침도 먹지 않는 정우 역시 늦은 점심에 배가 고팠다. 정우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탕수육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아마 식판에 남아 있는 것들은 강민이 가져갈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반쯤 물은 탕수육을 그가 가져가더니 자기 입에 쏙 넣어 버렸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티슈를 들어 그녀의 입술에 묻은 소스를 친절하게 닦아 주고 그 티슈로 자신의 입도 닦았다.
늦은 시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행이긴 했지만 진짜 이강민의 친한 척하는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갑자기 그가 저렇게 다정한 표정으로 자신을 주시하며 눈빛을 반짝이는 걸 보는 건 아무래도 불안하다.
정우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다 걸어오는 누군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이거였어? 정우가 다시 강민을 바라보자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흠. 저 인간이…….
정우가 강민을 향해 눈을 흘기다 고개를 숙였다.
사장님과 눈이 마주치고 모른 척하는 직원의 앞날은 어떨까 싶었지만, 정우는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딴청을 피웠다.
“점심이 늦네.”
양 이사다. 사람 좋은 양 이사가 자연스럽게 정우 옆에 앉자 태완 역시 강민의 옆에 앉았다. 고개를 숙였던 정우가 살짝 미간을 구기며 자연스럽게 눈을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빈자리도 많은데 굳이 이쪽에 앉는 이유가 뭘까.
“네, 회의가 늦어져서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한 정우가 제발 조용히 있으라는 표정으로 강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미 강민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반짝이고 있었다.
“역시 인재가 많은 기개실이 가장 바빠. 연애도 그렇고. 나 대리하고 이 박사 둘이 진짜 사귀는 거 아냐? 둘이 잘 어울리는데.”
그리고 강민이 입을 열기도 전에 양 이사가 선수를 쳤다. 이사로 승진 전 그녀와 함께 근무하기도 했던 양 이사였기에 그의 입장에서 정우, 강민과 친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다른 상사들과 달리 양 이사와 친한 것도 사실이었다.
“좀 그렇죠?”
강민이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그러면서 젓가락은 자연스럽게 정우의 식판으로 향했다. 묵묵히 밥을 먹던 정우가 무심코 고개를 들다 태완과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른 것 같기도 하다.
“그럼 나정우 대리는 아직 남자친구 없습니까?”
갑작스러운 태완의 질문에 고개를 돌리려던 정우가 눈을 들었다. 그의 의도를 읽어 보려 했지만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네, 지금은 없습니다.”
정우가 무덤덤하게, 그러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 대리님, 절 앞에 두고 그런 말씀 하시는 거 찔리지 않으세요? 주말 내내 저랑 노셨잖아요. 제가 심심풀이 땅콩도 아니고. 게다가 지난달에 선본 잘생겼다는 그분은 또…….”
이씨!
정우가 테이블 아래로 그의 다리를 툭 쳤다. 무언가 못마땅한 듯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간 태완과 눈이 마주쳤다.
“나 대리 선도 봐? 그러면서 나한테는 스스로 인연을 만나겠다고 한 거였어? 어차피 선봐서 결혼할 거면 나도 주위에 좋은 사람 좀 찾아봐야겠네. 이상하게 괜찮은 남자들이 드물어. 괜찮은 여자는 많은데.”
양 이사가 진지하게 주위 사람들을 곱씹었다.
“그럼 경쟁자가 더 늘겠는데요. 그래도 좀 찔리죠? 나 대리님.”
강민이 빙글거리며 말하자, 태완의 시선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정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야. 정우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은 안 찔리는데…….”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아직은’이라면, 그럼 두 사람 여지가 있다는 거네. 이 박사랑 나 대리가 잘 어울리긴 하지. 그런데…….”
여전히 웃지 않는 태완의 눈치를 보던 양 이사가 농담처럼 말을 꺼내며 분위기를 바꾸려 껄껄거리며 웃었다.
“다른 사람에게도 여지가 있다는 뜻입니까?”
양 이사의 말을 자른 태완의 질문에 미소를 짓던 정우의 시선이 또다시 부딪혔다.
그의 흥미로운 시선, 그리고 강민의 호기심 어린 눈빛도 그녈 향하고 있었다.
아마 그들뿐 아니라 식당 사람들의 시선이 젊은 사장에게, 또 그가 나누는 대화에 집중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안 봐도 빤하다. 힐끗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정우도 느껴지니까.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죠.”
정우가 담담히 웃었다. 그의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가는 것은 그녀만 보았을 것이다. 이상하게 체할 것 같던 가슴속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리고 그사이 강민은 그녀의 식판에 남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아이고, 내 거라도 줄까? 나 대리도 탕수육 좋아하잖아. 예전에 한동안 요 앞 중국집이 탕수육 잘한다고 박해진 대리랑 셋이 일주일에 두세 번씩 갔던 거 기억나는데.”
강민을 귀여운 막내아들 보듯 바라보던 양 이사의 말에 정우가 웃었다. 약간 푼수 같긴 하지만 사람 좋은 양 이사는 그 중국집에서 만나면 대신 계산도 해 주고, 또 요리를 더 시켜 주기도 했었다. 능력과 인간성이 비례하는 얼마 안 되는 상사 중 하나였다.
“지금도 좋아해요.”
정우의 대답에 태완이 피식 웃는 것이 느껴졌다. 양 이사도 정우를 보며 웃었다.
“취향은 쉽게 바뀌질 않겠죠.”
무심한 태완의 말에 정우와 강민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
“나 대리님, 취향이 안 바뀌셔서 계속 연하만 좋아하시는 거예요? 그럼 어릴 때부터 연하를 좋아하신 거예요? 제가 며칠 늦게 태어난 것 아시죠? 알고 보면 저도 연하라고 할 수 있죠.”
‘연하킬러’라고 장난스럽게 덧붙인 강민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말을 잇자 정우가 피식 웃어 버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네 취향이 정말 그거야? 그는 묻고 있었다. 그녀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가슴이 또다시 답답해져 온다.
“점심시간 끝나 가는데요?”
강민이 일어서려고 하자 정우 역시 일어섰다.
“맛있게 드세요.”
그런데 뭔가 찜찜하다. 결국 그 점심의 결론은 나정우는 연하킬러에 결혼을 위해 가리지 않고 선을 본다는 것이었으니까.

“왜 그래? 너.”
짧은 점심시간을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와 커피 대신 현미녹차를 강민에게 내밀며 정우가 물었다.
“뭐가?”
그가 배부른 표정으로 물었다.
“점심시간에 내가 툭 쳤는데도 너 말 끊지 않더라.”
그가 뚱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제?”
“밥 먹으면서.”
뭔 소리냐는 표정으로 강민이 그녀의 책상 위에 놓인 사탕을 씹어 먹으며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네가 날 쳤어? 언제? 밥 먹는 중에? 난 네가 별 반응 없기에 계속하란 뜻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없던 연하 이야기까지 했잖아.”
정우의 얼굴이 난감함이 스쳤다.
도대체 그 다리는 누구 것일까.
젠……장.

3. 사람에 따라 다르다


흠.
강민과 이택 팀장이 플래그숍으로 외근을 나간 사이 해진과 점심을 먹고 돌아왔다. 그런데 박 부장이 나와 있었다.
“오늘 회식은 오랜만에 전원 참석이야. 빠지는 사람 기억할 테니까, 알아서들 해. 꼭 빠지는 사람은 빠져야 하는 이유, 보고서 작성해서 올리고.”
웃으며 엄포를 놓는 박 부장이 커피 한 잔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자 그녀의 미간이 모였다.
책상에 앉은 그녀의 모니터엔 회식 장소를 알리는 김송희의 단체메일 알림이 떠 있었었다. 그녀가 난감한 표정으로 강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외근을 다녀온 그 역시 오늘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오늘 전원 참석하라는 거랑 보고서 작성은 진심일 거야. 원래 그런 말 잘 안 하잖아.”
“왜?”
“박 부장이 사장한테 어필하고 싶어 하잖아. 지금도 충분히 능력 있는 분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한 단계 더 위를 보시는 거지. 그러니까 직원들의 단합도 자신의 능력 중 하나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야. 필히 참석.”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 아파.”
정우가 책상에 엎드렸다. 이대로 그냥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
“왜?”
“몰라.”
그녀의 기운 없는 목소리에 언제나 장난스럽던 강민도 이번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감긴가?”
“몰라.”
흠.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중간에 잠깐 참석했다가 요 며칠 야근한 거 핑계대고 일찍 빠져나가.”
그럴까.
정우가 엎드린 채 고개만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참석은 해야 하잖아. 얼굴도장 꾹 찍으면 내가 기회 봐서 바로 보내 줄게. 끝자리에만 앉아 있어.”
역시 친구뿐이다.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의 말대로 정우는 느지막하게 회식 자리에 도착했다. 고깃집에서 일차를 끝내고 여기가 이차라고 했다.
룸으로 들어서자 이미 시끌벅적한 분위기 때문인지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이다 싶은 생각에 미소를 짓던 그녀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었다. 이미 갔어야 할 태완이 안쪽에 편안히 자리 잡고 있었다.
강민의 정보력도 이제 갔구나 싶은 생각과 함께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피곤함에 그녀는 안쪽에 앉은 태완과 제일 먼 곳, 가장 끝, 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물론 아무 일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한자리에서 그를 마주하는 것은 아직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그래서 피하고 싶었다.
피곤한 표정을 지우며 그녀는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눈인사를 하며 화려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입구에서 박 부장과 마주쳐 인사를 했고, 또 얼굴도장을 찍어야 할 사람을 찾았다.
강민에게 들은 말로는 사장은 직원들의 편안한 분위기를 위해서인지 1차를 시원하게 결제하고 간다고 했다. 그래서 혹시나 싶은 마음에 1차 삼겹살집에서 나와 2차 중반쯤에 회식에 참석했다. 물론 공식적인 이유는 이택 팀장이 지시한 결재만 올리고 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 이택 팀장이 지시한 일도 있었다. 급한 일은 아니었지만, 핑계거리는 그것뿐이었다.
‘네가 언제부터 내가 시킨 일에 그렇게 부지런했는데.’
라는 표정의 이택도 정우의 말에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슬슬 파장하는 분위기라는 강민의 문자를 받고 사무실을 나왔다. 그런데 없다던 태완이 있고, 파장 분위기라는 회식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추가 주문만 이어졌다.
사람들은 화려하고 흥겨운 분위기에 취해서 춤을 추기 위해 내려갈 분위기였다. 게다가 부서회식인 줄 알았는데 다른 부서 사람들도 보이고, 직원들, 특히 여직원들은 모두 태완의 주위에 모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흠. 잠시 눈을 마주친 것도 같다. 어차피 잘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깨를 으쓱하며 피식 웃어 버린 정우는 눈을 돌려 어디선가 독자 행동을 하고 있을 강민을 찾았다.
“난 분명 가신 줄 알았다. 너한테 괜찮다는 문자 보내고 옆방에 좀 다녀왔더니 저기 앉아 계시더라.”
언제 왔는지 강민이 그녀 옆에 앉아 조용히 말했다. 아마 태완을 가리키는 말인 모양이다.
“너 이제 이 박사라고 하지 마. 이런 게 파장 분위기인 줄 처음 알았어.”
복화술로 말하는 정우를 보며 강민 역시 많이 난감해하고 있었다.
“자존심 상한다. 내 정보력에 금이 간 것 같아서.”
“괜찮아. 그래도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아.”
정우가 괜찮다는 표정으로 픽 웃어 버렸다. 분위기도 소란스럽고, 게다가 룸 안이 어둑해서 누가 누군지 잘 모를 것이다. 게다가 저렇게 주위에 여자들이 많은데, 이쪽까지는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또, 만나면 어때, 하는 생각도 조금 있었다. 무난하게 흘러가고, 마주치지 않는 상황과 화려한 분위기가 그녀를 무심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옆방엔 왜?”
“예전에 알던 친구들이 있어서.”
“예전? 여자?”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강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가 눈을 흘겼다.
“또 이상한 여자는 아니지?”
“아니야. 전혀.”
과거 그의 이력을 아는 정우였기에 괜한 걱정이 앞섰다.
“사장님은 연애 안 하십니까?”
저쪽 끝 술에 취한 박 부장의 웃음 섞인 질문에 정우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어둠과 화려한 불빛 사이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녀 말고도 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는 것이다.
언제나 연애란 모든 사람의 관심사인가 보다. 시끌벅적하던 룸이 조용해진 것을 보면.
“해야죠.”
“아. 그럼 아직 상대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다른 쪽에서 질문이 나왔다. 디자인센터 골드미스 왕재향이다. 그녀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리안퍼니쳐는 부엌 및 욕실 인테리어로 그 영역을 넓히면서 디자인을 위해 디자인센터를 따로 두고 있었다. 그곳에서 디자이너를 양성하고, 새로운 제품의 디자인을 개발하고 있었다.
같은 건물에 있지만 두 층을 따로 쓰고 있기 때에 리안퍼니쳐의 직원으로서 동질감도 있지만, 분위기나 소속감 때문에 별개라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특히 디자인센터의 여직원들과 본사에 근무하는 여직원들과는 그 거리감이 조금 더 컸다. 디자인을 한다는 자부심 때문인지, 아니면 평범한 직장인의 옷차림이 아니라 디자이너들만의 세련된 옷차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정우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녀들 사이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은 없습니다.”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여자들의 웅성이는 소리와 왕재향의 굉장히 유혹적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분명 정우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그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미소를 지은 채 여유롭게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어떤 스타일 좋아하세요?”
“어린 여자가 좋으시죠?”
질문들이 이어졌다. 이런 질문이 정말 재미가 있나. 정우가 피곤한 듯 미간을 모았다.
“그럼 모두에게 가능성이 있나요?”
웃음을 머금은 왕재향의 질문이 들려왔다. 어깨를 으쓱한 정우는 강민과 눈빛을 교환했다. 덩치는 크지만 눈치는 웬만한 여자보다 빠르다.
지금 나가?
아니. 사람들 춤추러 가면 나가라. 이 오빠만 믿어.
조금 전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강민이 의지를 불태우듯 눈빛을 반짝였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죠.”
태완의 목소리에 정우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한쪽 입매가 얄밉게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지금 자신의 대답을 따라 한 건가.
정우가 뚱한 표정으로 태완과 신나게 이야길 하는 무리를 바라보다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순간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ET, 이택 팀장이다. 정우가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들어 이택 팀장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살짝 손을 들었다. 이택 역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빈자리를 찾아 앉으려는 이택의 얼굴에 조금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그가 강민만큼 술자리를 좋아하기는 하나, 강민과 다르게 이런 화려한 분위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고 봐야겠지.
그래서인지 그 역시도 자신처럼 빠져나갈 기회만 노리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좀 불편하지 않은 자리라도.
서로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이택과 눈이 마주치자 정우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님 무리에 있던 소희정이 사람들을 지나 이택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디자인센터 소희정이 이택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정우는 알 수 있었다. 정우의 안됐다는 표정으로 장난스럽게 고개를 젓자, 이택도 이 상황이 어이없었는지 픽 웃어 버렸다.
정우가 강민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멀리 있던 태완과 눈이 마주쳤다.
아, 잊고 있었다. 그가 이 룸 안에 함께 있었지.
이택과 장난스럽게 눈빛을 교환하다 그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가장 떨어진 자리이긴 했지만 그래도 룸 안이었기에 그리 멀지는 않았다. 그런데 태완 무리와 정우는 전혀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았다. 태완 주위에선 그에게 관심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의 주윈 항상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다시 보니 저 남잔 그걸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흠.
잠시 생각에 빠졌던 정우가 정신을 차리고 눈치를 살폈다. 박 부장까지 내려가면, 슬슬 춤추러 내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빠져나가는 게 좋겠다 싶었다. 강민의 정신은 이미 밖의 여자들 사이에 있었다. 정우가 강민의 어깨를 툭 치자 그가 지금이 기회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회식 때면 매의 눈을 하고 누구도 갈 수 없게 다른 사람들의 가방을 모두 걸치거나 옷들을 허리에 묶는 박 부장에게 보란 듯이 가방이 아닌 파우치만 들고 조용히 룸을 나왔다. 이미 사람들, 그러니까 여자들의 관심은 젊은 사장, 최태완에게 향해 있었다.
그리고 강민을 비롯한 남자들의 관심은 룸 밖의 춤을 추고 있는 예쁜 여자들에게 가 있을 것이다. 결국 지금 이 순간 정우는 누구에게도 관심 밖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