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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파우치에서 칫솔을 꺼내 양치를 하고, 화장도 다시 고치고, 화장실에 놓인 가글로 입도 헹구고, 소파에 앉아 주식도 확인하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이제 모두 내려갔겠지 싶어 밖으로 나오니 누군가 복도에서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이택 팀장이었다.
술을 마셨는지,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려는 것인지 손에는 피우지 않은 담배가 들려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택은 피식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안 올 줄 알았다.”
“팀장님이 꼭 참석하라고 하셨다면서요.”
“네가 언제부터 내 말을 들었다고.”
“저 이강민 들어온 이후로 엄청 말 잘 들은 거 모르세요?”
말을 하면서도 정우가 피식 웃었다.
“잘 빠져나오셨네요.”
“다행히 전화가 왔어.”
소희정에게서 잘 빠져나왔다는 듯 이택의 얼굴엔 안도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물론 소희정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의 적극적인 관심이 이택에게는 꽤나 부담스러울 것이다.
이택 팀장은 서른다섯으로 능력도 있고, 여러모로 괜찮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미혼에 준수한 외모까지, 많은 여직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특히 디자인센터 신입인 소희정까지.
아무튼 이택은 그래서인지 이렇게 타 부서와 함께하는 회식 때는 피곤한 룸보다 자꾸 밖으로 도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무식한 부서별 술 배틀이 벌어질 때는 끝까지 남아 있지만. 악랄한 영업개발부, 일명 영개의 고 전무를 이긴 유일한 사람이 기개의 이택이었다.
정우가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담배 끊으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면서 정우는 이택의 손에 들린 담배를 가져와서 구기듯 휴지통에 넣어 버렸다.
“아직 피우지도 않은 거야.”
아쉬운 듯 말을 그렇게 하고 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정우는 자신의 손바닥을 그의 얼굴 앞에 내밀었다.
“전 잠깐 만졌는데 벌써 손에 냄새 밴 거 보세요?”
그녀는 지금도 냄새가 난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너 많이 컸다.”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이택이 장난스럽게 검지로 그녀의 이마를 밀어냈다. 정우가 웃으며 손을 내렸다.
이택은 그녀의 사수였다. 그리고 5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 그녀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상사이고, 선배이자 친오빠 같은 존재였다.
“많이 드셨어요?”
“강민이가 무슨 생각인지 무섭게 권하더라. 그런데 아직 부족한 것 같기도 하고.”
정우가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웃었다.
“그럼 우리끼리 3차 가요. 팀장님?”
그녀 역시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 자리보다 편안한 술이 필요했다.
해진이도 부를까?
“팀장님.”
생각에 잠겼던 이택이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신 거죠?”
무슨 질문인지 이해한 이택이 피식 웃었다.
“괜찮으니까 나왔지.”
그러나 괜찮다고 말하는 이택의 표정은 씁쓸했다. 휴가를 다녀온 이택에게 정우는 차마 묻지 못했다. 좋은 소식이 있었다면 그의 표정이 이렇게 씁쓸하진 않을 테니까.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텅 빈 눈빛이 안타까웠다.
정우가 뭔가 말을 하려고 할 때, 강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뭐하세요? 지금 다들 춤추느라 정신없는데?”
강민이 장난스럽게 몸을 흔들었다.
“우리끼리 나가자는 이야기하는 중이었어. 난 지금 와서 아직 1차 시작도 안 했잖아.”
강민이 고개를 저었다.
“너나 가. 팀장님하고 나는 오늘 여기서 역사를 만들고 갈 테니까. 전혀 영양가 없는 멤버들하고는 진짜 싫다.”
그가 말하는 영양가 없는 멤버는 이택, 정우, 해진, 강민 넷이었다. 항상 마음 편하게 넷이 어울리지만, 전혀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영양가는 없다고 했다. 친하다고 일을 덜 시키는 것도 아니고, 서로 소개팅을 시켜 주는 것도 아니고, 화장 지운 못 볼 꼴만 더 본다는 것이 강민의 의견이었다.
오늘따라 결연한 의지를 비치는 강민의 표정을 보며 정우가 살짝 눈을 흘겼다.
“그럼 넌 빠져. 우리끼리 할 테니까.”
이택이 피식 웃었다.
“잠깐 불빛 좋을 때 사진 하나 찍자. 얼굴 모여.”
그러더니 정우의 옆에 서 긴팔로 휴대폰으로 셀카 준비를 하던 강민이 찰칵 하며 버튼을 눌렀다.
갑자기 웬 사진인가 싶었지만, 종종 밴드에 사진을 올리는 그였기에 다들 그러려니 하곤 했다.
“오호. 잘나왔어.”
강민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휴대폰을 확인하다 정우를 바라보았다.
“참, 너는 얼른 가. 룸에 아무도 없는 거 같더라. 분위기 봐서 연락할 테니 그때 3차를 하든가, 각자 불금을 불태우든가 하자.”
“응.”
정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룸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눈치 빠른 강민이 떠올라 미소를 짓던 정우가 멈칫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조금씩 눈이 익자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일 안쪽 그 자리, 그대로 태완이 앉아 있었다.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고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정우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있다고 도망치듯 바로 룸을 나가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이젠 그녀는 어린애가 아니니까.
정우는 눈으로 자신의 가방을 찾았다. 다행히도 그와는 아주 멀찍이 떨어진 자리였다.
“한 잔 하지.”
그의 낮은 목소리에 정우가 고개를 들었다.
“괜찮습니다.”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그의 표정을 정확히 볼 순 없었다.
그때 가방 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시선을 내린 그녀가 휴대폰을 확인했다.
-갔냐?
강민의 전화였다.
“곧.”
-데려다 줘?
불금을 즐기겠다더니. 정우가 피식 웃었다.
“아닙니다.”
사적인 전화같이 보이고 싶지 않아 모르는 듯 존댓말을 썼다.
-3차 갈래?
“상황 봐서요.”
-누구 옆에 있어?
눈치는 빠르다.
“네, 어디신데요?”
-팀장님하고 담배 피우러 나와서 숙취음료 마시고 있어. 너 택시 타면 그거 봐 주라고 하신다. 솔직히 넌 얼굴이 무긴데, 귀찮아.
“담배 좀 그만 피우세요!”
전화기 속으로 담배 좀 그만 피우시래요, 낄낄거리는 강민의 목소리와 이택의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나와라. 얼른.
“네.”
전화를 끊고 무심코 고개를 돌린 정우가 멈칫했다. 언제 온 것인지 태완이 그녀의 옆에 있었다.
태완은 아무렇지 않게,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그녀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너무 가까이 있는 그에게 놀라긴 했지만 정우는 내색하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그녀가 거절한 술잔을 내려놓았다.

기묘한 긴장과 함께 입술이 마르는 침묵이 이어졌다.
왜 이러고 있지. 그냥 일어나면 그만인데.
정우가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을 들려고 할 때였다.
“먼저 일…….”
또다시 그녀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그의 시선도 그녀의 휴대폰 액정을 향했다.
이택 팀장님이란 글자와 예전 워크숍에서 찍었던 그의 사진이 함께 반짝거렸다.
“비슷하지.”
전화를 받으려던 정우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역시 그녀의 휴대폰을 향하고 있었다. 받지 못한 휴대폰이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
깊게 가라앉은 시선이 마주쳤다.
“오랫동안 가까이 지낸 사람, 그리고 서른다섯쯤.”
이택을 이야기하는 건가.
“대상만 변할 뿐 취향은 변하지 않는 건가.”
평상시처럼 무심하고, 조금은 서늘한 말투였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러나 그녀의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시선이 정우의 이마를 향했다.
정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완은 그녀에게 권했던 술을 가져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권하는 듯했다.
“괜찮습니다, 사장님.”
‘사장님’이란 호칭이 거슬린 것인지 ‘사장님이라’ 중얼거린 태완이 그녀를 힐끗 쳐다보다 술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우유가 필요한가.”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유? 정우가 예전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픽 웃어 버렸다. 그 말이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때는 어쩌면 우유가 필요했을지 모르니까. 강민의 말대로 독거노인 나정우가 아니라 철없던 나정은이었다는 것을 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상하게 요란한 음악소리도 들리지 않는 묘한 침묵이었다. 화려하고 흥겨운 분위기 사이에 둘의 침묵은 무거웠다.
“나정우.”
그가 중얼거렸다.
“저는 돌려 말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하세요.”
이렇게 시간을 끌면서, 그녀에게 장난치듯 못마땅한 눈빛을 보내는 태완은 알지 못했다.
항상 그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고, 그녀를 향하는 시선은 서늘했다.
“하고 싶은 말? 내가 볼 땐 넌 계속 나정우인데, 나정우가 아니라는 표정을 짓고 있어.”
정우가 멈칫했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그녀의 감정을 알아채서가 아니다. 다만 잊어버려도 좋을 과거를 굳이 꺼내려 하는 그의 알 수 없는 의도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정우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무덤덤한 반응에 태완이 또다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것도 같다.
그게 궁금해서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말들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장님께서 보시기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예전에 내가 아니라는 거 보여 주고 싶어 애썼던 것 같기도 해요. 그렇지만…… 결국 그것도 나니까.”
끝말을 흐린 정우가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에게 자신의 뜻이 어떻게 전달될지도 모르겠다.
“사장님.”
눈이 마주쳤다.
“확실한 건 시간이 흘렀다는 거예요.”
무덤덤하게 정우가 고개를 돌려 가방을 들려고 할 때였다.
“그래. 시간이 흐르고 나정우는 자랐고, 변했겠지.”
“혹시 그것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예전의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어쩌면 그의 걱정은 그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 일들이 다시 시작될까 봐 미리 하는 경고 같은 것. 그리고 성격처럼 명확하게 확인하고 싶은 것. 하지만 이제는 그럴 리도, 그럴 수도 없다. 담담한 그녀의 표정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정우의 표정이 심란했던 일을 끝낸 것처럼 가벼워졌다. 오늘이, 지금 이 시간이 지나면 이 숨바꼭질 같던 피곤한 상황들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가 일어서는 그때,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꽉 잡힌 손목이 아파 왔다. 그의 뜨거운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그녀가 굳어진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지금은 아니라면? 내가 아니라면?”
태완의 말에 일어선 정우와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 앉아 있던 그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일까.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때 사장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때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감정 역시 그의 몫으로 남겨둬야 한다.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정우가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자 그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나 잡힌 손목의 힘은 더 강해진 것 같다. 이제는 그가 시선을 내렸다.
‘놔요.’, ‘이러지 말아요.’, 아니면 ‘싫어요.’라는 말들이 필요한 때인가. 그녀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더 이상 나는…….”
그녀가 말을 꺼내려는데 갑자기 문 밖으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황급하게 손목을 뿌리친 정우가 사람들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끝났어요?”
정우가 물었다.
“응. 그런데 왜 다들 서 있어요?”
왕재향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태완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태완과 그녀 사이의 긴장을 촉이 좋다는 왕재향은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제가 가야 해서 사장님께 인사드리는 중이었어요.”
“아.”
그녀는 그제야 표정을 풀고 얼른 태완 옆으로 다가가더니 그를 향해 아주 매력적인 웃음을 웃으며 팔짱을 꼈다.
“태완, 아니 사장님. 그럼 저랑 춤추러 가요.”
외국에서 유학을 했다고 했던가. 분명 태완이라 부른 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교묘하게 실수를 가장해 그녀는 자신과 태완의 관계를 드러내고자 했다. 정우를 향한 의심스러운 눈빛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그녀의 표정이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왕 실장이 사장님께 확실히 반한 모양이야.’라는 농담 섞인 말들과 함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전 이제 가 보겠습니다. 사장님.”
“나정우.”
태완의 낮은 목소리와 따가운 시선을 무시한 채 정우는 서둘러 룸을 나왔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정우야, 나 대리.”
이택이었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팀장님.”
“왜 그래? 왜 전화는 안 받고?”
“이강민은요?”
정우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못 만났어? 사람들이 와서 내려갔어.”
그가 피우던 담배를 끄고 담배꽁초를 휴지통에 던지고는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팀장님, 그럼 저…… 택시 타는 데까지만 데려다 주실래요?”
“그래.”
평소라면 데려다 준다 해도 얼굴이 무기라며 괜찮다고 도망치던 그녀였지만 이택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언제나 그랬으니까.
택시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늘어선 번화가를 지나면 택시 잡기가 수월할 것이라며 이택은 앞서 걷다 다시 그녀에게 보조를 맞춰 주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던 것 같다.
퍼뜩 옆에 걷고 있던 이택이 떠오른 정우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택시를 타기 좋은 곳을 한참 지나쳐 왔다는 것을 알았다.
“아, 택시.”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정우가 도로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택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괜찮아. 좀 더 걷자. 술도 깨고 좋은데.”
이택이 괜찮다는 듯 웃으며 다시 걷기 시작하자 정우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너 강민이가 3차 안 간다고 하니까, 나 인질로 잡고 일부러 데려온 거 아니냐?”
그녀의 마음을 풀어 주려는 듯 이택이 웃었다.
“무슨 일이냐고 안 물으세요?”
“괜히 심각한 표정 짓지 마라. 3차 갈 테니까. 무슨 일이 있긴 해?”
평소와 다르게 능청스럽게 묻는 이택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와 있으니 마음이 편해진다.
“아니요. 없어요. 그리고 자꾸 3차라고 하시는데 전 아직 1차 시작도 안 했어요.”
“그렇게 벼르고 있던 것처럼 말하니까 무섭다. 얼마나 달리고 싶어서 그래?”
전혀 무섭지 않은 표정으로 그가 웃었다.
“미친 듯이요.”
그녀 역시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팀장님은 괜찮으세요?”
“흠. 나도 괜찮다. 특별히 기대를 했던 건 아니었어. 그냥 겸사겸사였지.”
그가 무심하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먼지처럼 하얀 것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었다. 차 막히겠네. 눈발이 날리자 정우는 옷깃을 여미며 그를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넌 눈이 오는데 감흥도 없냐? 첫눈이잖아.”
“차는 막히겠지만 내일 출근 안 하니까 다행이다 정도는 생각해요.”
그가 픽 웃었다.
“혹시 어떤 분이랑 비교하시려는 거면 포기하세요. 그분과 전혀 달라요. 공통점은 이름, 그거 하나뿐이에요.”
“비교 안 한다. 그 여잔 첫눈 좋아하거든. 너처럼 감정이 메마르지 않았어.”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내리는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택은 그를 떠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정우와 그녀의 이름이 같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번 휴가도 그녀를 찾기 위한 것이었지만 별 소득이 없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은 어두운 밤거리를 각자의 생각에 빠져 천천히 걸었다.
첫눈, 첫 키스, 첫사랑…….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처음이라 이름 붙은 것일 뿐.
망할 첫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