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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아니. 너는 나를 빼놓고 3차 자리를 결정하냐? 네가 그러니까 독거노인 소리를 듣는 거야? 그 핫한 곳을 다 놔두고.”
강민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닭다리를 그녀와 해진의 접시 위에 놓아주었다.
“여기가 맛은 있어.”
정우의 말에도 강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이 시간 작은 홀 안에 손님이라곤 이택과 강민, 정우와 집에 있다가 나온 해진뿐이었다. 평소라면 옆에서 대화도 같이 할 주인아주머니는 늦은 시간 때문인지 가게에 딸린 작은 방에서 잠이 드셨나 보다. 정우의 동네 한구석 아는 사람만 찾을 수 있는 작은 슈퍼 옆에 딸린 술집은 대표 안주 없이 스무 가지 정도의 술안주 메뉴가 있었고, 신기하게도 그게 다 비슷한 맛이면서도 중독성이 있었다. 그래서 정우와 해진에겐 꽤나 오래된 단골집이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강민 역시 편안한 표정으로 얼음 통에 놓인 시원한 소주를 마셨다.
“그런데 디자인센터 사람들 무섭더라.”
“응?”
해진이 오늘 회식이 궁금했는지 눈을 반짝였다.
“아니, 사장이 미혼이란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사장이 만나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길 들어서인지 왕 여사부터 막내 소희정까지 눈을, 지금 너처럼 완전 반짝이면서 늙은 사장만 바라보더라고. 소희정은 원래 팀장님한테 관심 있었잖아.”
“늙은 사장?”
해진이 킥킥거렸다.
정우의 이야기를 들은 강민은 노골적으로 태완을 늙은 사장, 또는 늙은 총각 사장이라고 불렀다.
부서회식이 아니고, 이렇게 디자인센터까지 함께하는 회식일 때면 항상 여자들의 시선을 받던 인기 많은 강민이었기에 오늘은 꽤나 서운한 모양이다.
해진과 정우가 의미 있는 눈빛을 교환하며 작게 웃었다.
“야, 니들 그렇게 웃지 마. 지금 내가 질투한다고 생각하면서 웃는 거 다 티 난다.”
“알면 말을 하지 말든가.”
해진의 말에 강민이 뭐라뭐라 중얼거리며 술잔을 비웠다.
이택도 피식 웃으며 자신과 정우의 빈 술잔을 채웠다. 편안한 사람들과 있으니 잠깐 동안은 좀 전의 복잡한 일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다 또 생각나고, 그러면 다시 소주를 마시고…… 그리고 웃고. 내내 정우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그리고 그 표정을 해진은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사장님은 왜 그렇게 오래 남아 계신 거래?”
해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을 하면서도 정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강민 역시 정우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돌렸다.
“아냐.”
정우의 단호한 말에 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택은 그들의 말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넌 왜 안 마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정우가 콜라와 사이다를 섞어 마시는 해진에게 물었다.
“내가 오늘 운전기사 한다. 다들 지금 맛이 간 거 같아서. 나라도 정신 차려야지.”
해진의 말에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눈치였지만, 이택이나 강민이 있어 그녀는 묻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술도 취하지 않는다.
“팀장님은 휴가 때 뭐하셨어요?”
강민의 질문에 이택이 어깨를 으쓱했다.
“보면 팀장님도 비밀이 많아요. 이러다 어느 날 아이 데리고 와서 내 아이야 할지도 몰라.”
그가 장난스럽게 말을 했지만 이택의 표정이 설핏 굳어졌다. 그 모습에 정우가 말을 꺼냈다.
“그럼 좋은 거지. 어차피 팀장님, 나이도 많으신데. 지금 첫 아이 낳는 건 늦은 거거든.”
“하긴. 지금은 초등학교 학부모 되어야 할 연세이시긴 하지.”
강민과 해진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택의 입가에 씁쓸함이 걸렸다.
“그 휴대폰 여자분 찾으시는 거죠?”
웃음을 거둔 강민이 진지하게 물었다.
이택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소주 한 잔을 쓰게 비웠다.
“저한테도 알려 주세요. 제가 정보력 짱인 거 모르세요? 제 정보력이 전국구인 거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알았다.”
절대 빈말을 하지 않는 이택의 대답에 강민이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정우와 해진, 이택과 강민 네 사람은 동료이자 친구이자, 가족 같은 사이였다. 그러려고 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 버렸다. 처음엔 무뚝뚝하던 이택도 조금씩 마음을 연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저만 믿으세요, 팀장님.”
강민이 그의 빈 술잔을 채웠다.
이야기는 또 디자인센터 왕재향 실장으로 이어졌다. 그녀가 영국 유학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도 강민에게 들었고, 그녀의 부모님이 모 기업 영국지사에 근무하고 있다는 것도. 문득 태완과 그렇게 연결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쓰게 웃었다.
“그래서 나는 디자인센터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다고 본다.”
남자가 말이 없다고 누가 말했던가. 강민의 쉴 새 없는, 그렇지만 전혀 듣고 싶지 않은 직원들에 대한 가십에 모두들 집에 갈 채비들을 하고 있었다.
“슬슬 일어나죠. 우리? 귀가 따가워요.”
강민이 앉아 있던 쪽의 귀를 후비며 해진이 말하자 정우와 이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지난번 먹다 만 와인이 있던가. 집에 가면서 편의점에 들러야 하나 싶었다. 맥주집의 허름한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던 정우가 중얼거렸다.

네 사람은 해진의 하늘색 차에 탔다.
“나정은, 술 더 마시지 말고.”
정우의 부족함을 읽은 것인지 운전을 하는 해진의 말에 정우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정은이라 부르는 그녀가 더 친근하게 느껴져 얼굴에 웃음이 스민다.
맨 처음 해진은 정우를 데려다 주고, 그 후에 이택을, 그리고 해진의 집과 십 분 거리인 강민은 아마도 그녀의 집에서 내려 그의 집까지 걸어가라고 할 것이다.
“이따 전화할게. 술은 마시지 말고 내 전화 기다려.”
“응.”
꼭 기다리라는 해진의 표정에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궁금한 것이 많을 것이다.
손을 흔들며 운전석에 앉아 있는 해진만 빼고 모두 차에서 내렸다.
“괜히 서운하다고 편의점에서 헤매면서 더 마시지 말고 그냥 들어가서 자라. 그리고 너 보고서 핑계대고 오늘 늦게 왔으니까 내일 확인하면 결재 다 올라와 있는 거지?”
“내일도 출근하시게요?”
“봐서.”
이택이 픽 웃으며 그녀가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그의 손에는 버릇처럼 담배가 들려 있었다. 정우 역시 당연하다는 듯 그의 담배를 가져왔다.
“끊으세요.”
이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녀가 가면 담배를 피울 것임을 알지만, 정우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안녕히 가세요, 팀장님.”
정우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인사만 하지 말고 말이나 좀 잘 들어라. 이강민 들어오고 나정우랑 둘이 팀으로 더 말 안 듣는 거 알지?”
“제가요?”
“저요?”
믿지 않는다는 투의 정우와 강민이 똑같이 다시 물었다.
“팀장님, 쟤 말 잘 듣게 만드느라고 제가 얼마나 힘든데요. 아직 기개실의 반항아 나정우에 대해 모르시는 거예요. 쟨 조용조용 뒤에서 얼마나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데요. 무서운 여자예요.”
강민은 비밀이라도 말하듯 이택의 귀에 속삭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정우가 그에게 눈을 흘겼다.
“팀장님, 전 대리고 쟨 사원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제가 얼마나…….”
“잠깐!”
정우의 말에 무심하게 귀를 후비며 어둔 주위를 둘러보던 강민이 갑자기 소리를 쳤다.
이유를 묻는 표정으로 모두 그에게 시선을 모았다.
“요즘 아파트 문 앞에서 범죄가 많이 일어난다는데, 지금 새벽이라 나정우 대리님 혼자 올라가도 될지 모르겠어요. 이런 때는 문 앞까지 데려다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택과 정우가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저희 집 옆 아파트에서도 며칠 전 밤에 어떤 여자가…….”
“나 괜찮아.”
아. 며칠 전에 강민이 이야기를 하기는 했었다. 밤에 아파트 주차장에서 강도 사건이 있었다고. 지나던 경비원이 있어 화를 면했지만 위험한 상황이었다며 가스총이나 전기충격기를 사 주겠다며 여러 번 주의를 주던 그였다.
정우가 괜찮다는 듯 웃었다. 평소엔 어두워도 엘리베이터 말고 계단으로 걸어가서 살 좀 빼라던 강민이었다.
“무슨 소리야? 이렇게 무서운 세상에. 그런데 전 갑자기 속이 안 좋아서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강민의 묘한 시선이 이택을 향했다. 그의 시선에 이택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는 정우가 강민을 바라보자 강민이 픽 웃으며 얼른 들어가라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이택과 함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술이 취했나. 왜 저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정우의 말에 이택이 피식 웃었다.
“박 대리하고 할 말이 있나 보지.”
“아.”
이택의 말에 정우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술 취한 강민의 말을 해진이 절대 듣고 싶어 하지 않을 텐데.
흠. 정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사실 가끔 엘리베이터가 무섭긴 했다. 밤이면 누군가 함께 타도, 중간에 타도, 혼자 타도 무서울 때가 있었다.
띠릭.
이택의 휴대폰이 울렸다.
“강민이다. 지금 지하주차장으로 간다고. 난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오라는데.”
“지하주차장 가려면 가로수 공사 때문에 한 바퀴 돌아서 102동 지하로 내려가야 할 텐데.”
“박 대리가 피곤한가.”
이택도 이번에는 좀 의아한 표정이었다.
“피곤한 게 아니라, 술 너무 많이 마셔서 정신이 좀 이상해진 것 같아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이택이 피식 웃으며 그녀가 문 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늦은 시간에 혼자 올려 보내는 거 좀 위험하다고 생각은 했어.”
“차 한 잔 드시고 가라고 하는 거 너무 가식적이죠?”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알긴 아냐? 들어가라.”
“네.”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괜찮으시죠?”
들어가려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확인하듯 그를 살폈다.
“그렇지.”
그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그분.”
“어?”
“결단력 있게 행동하신 거잖아요.”
이택이 피식 웃었다.
“너한테 이야기한 건 실수 같다.”
“네?”
“보통은 말이야. 날 위로할 텐데. 제일 연애 경험 없는 너한테 말하니까 날 위로할 생각은 안 하고 그 여자 편이나 들고.”
“강민이에 비해서 그렇지 저도 많거든요.”
“자랑이다.”
무덤덤한 이택의 표정에 조금 안심이 된다.
“전 그분 응원할 거예요.”
“나는?”
“뭐, 알아서 사시겠죠. 내일도 출근, 모레도 출근, 그렇게 일만 하면서 늙어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돈은 많이 벌 수 있으니까. 가족도 없으실 테니 사회 환원하고 곱게 눈 감으세요.”
진지한 정우의 말에 피식 웃은 이택이 닫힌 문의 도어락 번호를 다시 입력했다.
“비밀번호 좀 바꾸고, 얼른 들어가.”
“잘 될 거예요.”
“들어가라. 피곤하겠다.”
“저 진짜 들어가요. 그런데 내일 진짜 출근하실 거예요?”
“아마도. 너 지금 보고서 안 올려서 자꾸 묻는 거지?”
“올렸습니다. 반송만 말아 주세요. 그리고 주말은 쉬세요. 계속 피곤하셨잖아요.”
“그래.”
물론 그가 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피곤해 보이는 그가 걱정이 되었다.
“자라.”
“네.”
문을 닫고 들어온 정우의 귀에 ‘띵’ 하는 엘리베이터 도착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들어간 것을 확인한 이택이 아마 엘리베이터를 탄 모양이다.
괜찮으실까? 지금 남을 걱정할 때는 아닌데. 피식 웃은 정우가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했던 머릿속은 지금까지의 수다로 충분히 위로받았다.
그러니 남은 것은 스스로를 위한 정리였다.
“지금은 아니라면, 내가 아니라면.”
무슨 의미일까.
지금까지의 엇나가는 행동들은 그런 의미였나.
불을 켜지도 않은 채 바로 정우가 욕실로 들어갔다. 화장을 지우고, 신경질적으로 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어떤 기분인지도 모르겠다.
샤워를 끝낸 정우가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소파에 앉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지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5463.
너무도 익숙한 뒷자리 번호였다. 최태완.
잠시 시선이 머물렀지만, 결국 전화를 무시한 정우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요란하던 휴대폰이 잠잠해질 때쯤 그 번호에 수신거부 설정을 했다. 아직은 그의 전화를 받고 싶지 않다.
설정이 끝나자마자 또다시 카톡이 울렸다.
-자냐?
이번에는 해진이다.
“아니.”
-전화해?
“아니.”
-졸려?
“아니.”
-이런 미친…….
해진의 익숙한 욕과 이모티콘이 화면 한가득 채울 때까지 정우는 웃으며 바쁘게 반짝이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휴대폰 벨소리를 진동으로 바꾸자마자 진동이 요란하게 울렸다.
당연히 해진이다.
-너 무슨 일 있었지? 그 사장이랑?
“뭐, 그냥.”
그녀가 얼버무리자 해진이 코웃음을 쳤다.
-왜? 너 거슬린다고 회사 그만두래? 너 보는 거 지겹대? 자기 스타일과 정반대라 싫대? 이제는 정반대의 스타일과 만나고 싶대?
“그거 네 말이지?”
해진의 깔깔깔 웃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니면 너 좋대? 오 년 만에 만나니까 새롭대? 예전엔 몰랐는데 어린 애가 좋다는 걸 깨달았대?
“비슷해.”
-어?
농담처럼 말을 잇던 해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예전에 내가 아닌 것 같대.”
-그래서 뭐라고 했어?
“그냥 그런 거 이제 싫다고.”
여러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요지는 그거였다.
-흠.
해진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진짜 그래?
“뭐가?”
-진짜 싫으냐고?
“응.”
정우가 휴대폰을 든 채 소파에 누웠다. 눈이 감긴다.
“피곤하다.”
해진이 잠시 무언가 생각하듯 말을 멈추었다.
-있잖아, 정우야. 나는 사람 마음이란 거 정답도 없고,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거 알아. 네가 그 사람 싫다는 것도 자유지만, 좋다고 해도 너 뭐라 할 사람 없어. 그러니까 스스로 강요하지는 마라. 감정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거랑 강요로 감정을 참아내는 거랑은 좀 미묘하게 다르잖아.
정우가 피식 웃었다. 철없는 동생처럼 굴면서도 힘들 때마다 그녈 보듬어 주는 것은 해진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잘하는 거 하지 말고.
“내가 잘하는 거?”
-생각.
정우가 웃었다.
-이번만큼은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 무조건. 그래야 이십 대를 후회 없이 넘기지.
이번만큼은. 해진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올 것 같지 않던 잠이 온다. 그녀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지잉.
전화를 끊자마자 또다시 진동이 울려왔다. 이번엔 대우였다. 술을 마시면 새벽마다 전화를 하는 그였기에 정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4. 마주치다


세상에 월요일이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회식 자리에서의 태완의 말도 안 되는 행동 때문에 며칠 동안 잠을 설친 정우가 목 스트레칭을 하면서 컴퓨터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아침부터 내려온 지시도 많았고 하다 만 일도 있었다. 내일까지 내야 할 보고서와 결재서류까지 따지면 머리 아플 시간도 없다.
인테리어 쪽까지 영역을 넓히면서 기획개발실의 일이 늘었다. 계속 있어 온 가구 분야는 일이 많아도 익숙하지만, 새로운 사업계획안을 만들고, 실행하는 건 어렵고 힘이 든다.
그래도 일이란 게 참 신기하다. 절대 못 해요, 더 이상은 못 해요, 해도 결국 또 맡으면 하게 된다. 세탁기에 빨랫감을 꾹꾹 집어넣으면서도 이 정도를 넣어도 돌아갈까 싶은데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도 결국 제 일을 해내는 그 기계처럼.
물론 빨래처럼 머릿속이 엉키진 하지만.
“나 대리는 할 수 있어.”
강민의 말처럼 백 킬로그램 짐을 들고 다니는 일꾼이 백일 킬로그램 짐은 못 들겠냐는, 이상하게 기분 나쁜 예를 드는 것처럼 백 개에서 하나 늘어난다고 못 할 건 또 없는 것 같다.
또 해야지 월급이 나올 테니까. 아무튼 정우는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역시 바쁘면 잡생각이 줄어든다는 것은 진리다. 정말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멀미가 날 정도로 하루를 일만 하면서 보낸 것 같다.
“야근해야겠지?”
강민의 말에 정우가 눈을 힘주어 감았다 떴다.
“그래야 할 것 같아.”
“요즘 너무 놀았나. ET 휴가 다녀온 후로 일이 더 늘어난 기분이야.”
강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아니고, 너만 그 시간 동안 너무 놀았던 거야. 너 계속 일 만들어서 디자인센터랑 휴게실 놀러 가고, 해진이한테 가고 했잖아.”
“그건 원래도 그랬고. 그럼 야근은 결정된 거네. 그런 의미로 편하게 커피 한 잔 하실래요, 나 대리님?”
“싫어.”
“왜?”
그녀의 단호함에 그가 그녀의 손에 들린 마우스를 빼앗아 갔다. 그러자 놀란 눈으로 잠시 그를 바라보던 정우 역시 그의 손에 있던 마우스를 가져오며 절대 싫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 대리, 너 요즘 이상하게 머리 굴리는 것 같다.”
강민이 팔짱을 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뭐가?”
“너 해진이하고만 무슨 비밀 있지? 정확히는 나한테 숨기는 거.”
“무슨 말이야?”
조금 뜨끔하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녀가 물었다.
“니들 여자들은 그래. 비밀이 있으면 나와 팀장님을 피하곤 했지. 특히 나정우 너는 나와 단둘이 있는 것을 꺼려해. 왜냐하면 나정우는 다른 사람의 비밀은 잘 지켜도 자기 비밀은 잘 못 지키거든. 자기 건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니까. 대수롭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위해서 그냥 무심하게 내뱉지. 너의 연애스타일을 알아. 나는.”
연애 스타일? 확신에 찬 강민의 말에 정우가 픽 웃어 버렸다.
연애는 아니지만 비밀을 가졌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회식자리에서의 태완에 대해 강민에게까지 말을 할 순 없었다. 그렇게 되면 일이 커지니까. 그런데 역시 눈치 하난 빠르다.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자기 여유가 생긴 것도 같다. 결국 그들의 휴식장소인 옥상으로 올라왔다.
그녀는 크게 숨을 내쉬며 옥상 화단 옆에 걸터앉아 사무실에서만 신는 굽 낮은 플랫슈즈를 던지듯 벗어 버렸다. 어깨가 움찔거릴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그녈 감싸긴 했지만 뜨거운 햇빛이 있어 참을 만했다. 그리고 곧 뜨거운 커피가 올 것이니까.
직원들의 복지차원에서 출입금지구역이었던 밋밋한 옥상을 정원화하기 시작했다. 가구회사의 특징을 살려 이곳저곳에 아기자기한 가구를 배치해 놓으며 정성을 들였다. 하지만 결국 정원은 직원들의 흡연 장소가 되어 버렸다. 거기다 겨울엔 강한 바람 때문에 담배 피우러 오는 사람도 드물어 거의 정우와 강민의 차지가 되곤 했다.
해진도 불렀으면 좋겠지만, 아마 지금은 자리를 비울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은 자판기 말고, 고급 커피 한 잔 마시고 싶다. 눈도 호강할 수 있는 그런 거. 기다려. 얼른 사 올 테니까.”
그렇게 강민이 사라지고 질끈 묶었던 머리를 풀고, 다리를 흔들며 하늘을 향한 채 눈을 감았다. 가끔 이런 시간이 좋다. 그럼 야근도 잊고, 머릿속 복잡한 것도 잊고, 그냥 지금 이 순간만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하늘을 향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인기척이 들렸다. 눈 뜨는 것도 귀찮아 커피를 달라는 의미로 정우는 손만 내밀었다.
“커피.”
그녀의 말에 따뜻한 커피가 손에 잡혔다.
빙긋이 웃으며 입을 가져다 대자 진한 커피맛이 느껴졌다.
“나는 단 게 필요…….”
가늘게 눈을 뜬 정우의 앞에 누군가 있었다. 갑자기 뜬 눈에 쏟아지는 하얀 햇볕 때문에 처음엔 누군지 몰랐다.
“?”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느껴진다. 태완이었다.
그녀의 눈살이 자동적으로 찌푸려졌다.
“쉬는 시간?”
태완이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네.”
‘근무시간에 땡땡이에 꽤나 당당하다.’는 그의 말투에 정우는 ‘아, 그렇지.’ 하는 바보 같은 표정은 지어 버렸다. 요즘 최태완의 등장으로 공과 사도 구분이 되질 않는다. 정우가 바람에 날리는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잘 쉬었어?”
그 역시 공과 사를 구분하지는 않는 것 같다.
“네.”
“머리가 복잡해서 생각도 많이 했겠지.”
“…….”
그날 룸에서와 다르게 그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
그가 손가락의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머리? 아, 그제야 풀어진 머리와 벗어 버린 구두가 떠올랐다. 당황한 그녀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 고무줄이 어디 갔지?
“집엔 잘 들어갔나?”
“네.”
그녀의 관심은 이제 고무줄과 한쪽에 떨어져 있는 구두였다. 정확히는 한 발로 콩콩 뛰어 구두를 신어야 한다는 사실에 미간을 모았다. 그래서 그의 질문에 대충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친하면 집 안에도 들이고 하나 보지.”
집 안? 무슨 소리야.
“들켰네요. 잠시 쉬는 시간인데.”
다행히도 넉살 좋게 강민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정우 앞에서 그녈 가리듯 강민이 서서 사람 좋게 웃었다. 그렇게 서 있어 준 강민 덕분에 정우는 벗었던 구두를 주섬주섬 찾아 신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풀었던 머리도 고무줄로 질끈 묶어 버렸다.
“저희 야근할 예정이라 잠깐 쉬는 중입니다.”
땡땡이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 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커피는 어느샌가 태완의 손에 가 있었다. 강민이 그녀에게 그녀 몫의 커피를 내밀었다.
태완이 그녀가 한 모금 마신 커피를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정우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태완은 그녀의 시선에 피식 웃을 뿐이었다.
“혹시 담배 피우러 나오셨어요?”
강민의 물음에 태완은 고개를 저었다.
“담배는 끊었습니다. 잠깐 바람 쐬러 나왔습니다.”
“아. 네.”
그는 갈 생각이 없었고, 정우와 강민 역시 커피는 마시고 내려가야 할 것 같아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기대했던 달콤함 대신 텁텁함만 느껴졌다.
“내 거 마실래? 나 시럽 안 넣었어.”
그녀의 표정을 읽은 것인지 강민이 자신의 커피를 내밀었다.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의 평소보다 과한 친절이 또다시 발휘되고 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시럽을 넣지 않은 카페라떼를 마시고, 강민은 그녀가 원했던 카페모카를 마셨다. 그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맨 안쪽의 정우, 가운데 강민, 그리고 태완이 나란히 서서 그냥 건물만 가득한 삭막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에는 반짝이는 불빛이라도 볼만하지만 낮엔 그저 뿌연 하늘에 회색빛 건물들뿐이었다. 내려가자는 의미로 그녀가 강민의 팔을 툭 쳤다.
왜?
그녀가 눈짓을 하자 강민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시간 나실 때 저희 점심 좀 사 주시죠?”
뜬금없는 강민의 말에 태완이 그가 아닌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러죠.”
정우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강민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그때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사무실이었다.
“네, 나정우입니다.”
전화를 받으며 짧게 고개를 숙인 그녀가 사무실로 향했다.
“나 먼저 내려간다.”
전화를 살짝 떼고 하는 그녀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인지 묘하게 웃는 강민을 놔두고 그녀가 옥상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