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비밀의 간격 1화
프롤로그
어느새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공원의 인공 호수에서는 푸른빛의 물줄기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역류했다. 물 밑에 설치된 조명으로 화사한 불빛이 도는 인공 호수를 감싸고, 길게 뻗은 가로등이 공원을 가로지르는 산책로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낮 시간에는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을 즐기던 가족 단위의 방문객으로 붐비던 공원이 해가 기울어 버린 저녁 시간에는 젊은 커플들의 데이트 장소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 이사는 잘 마무리했지?
“알면서 뭘 물어.”
― 성깔머리하고는. 대답을 해도 꼭 저렇게 정 없이 해요. 그래서 기어이 하겠다 이거지?
핸드폰의 블루투스 이어폰 너머로 주변의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묻히지 않게 톤이 올라가는 굵직한 음성에 강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알면서, 왜 자꾸, 물어?”
조깅으로 인해 거칠어진 호흡 때문에 말소리가 부자연스럽게 뚝뚝 끊어졌다.
― 답답해서 그러잖아. 분명 다른 해결 방안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런 데서 아까운 재능 낭비하지 말고, 다른 방도를 찾아보자고. 요즘 같은 물질 만능주의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딨어?
“쓸데없는 소리, 계속할 거면, 끊어, 형.”
― 이게 왜 쓸데없는 소리야. 똑똑한 녀석이 꼭두각시놀음에서 모양새 빠지는 어릿광대를 하겠다는데, 그걸 그냥 보고만 있으라고?
“끊는다.”
신경질적으로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서 뺀 강한은 북적대는 사람들을 피해 공원 안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보통은 동이 틀 무렵의 새벽 공기를 즐기며 달리는 습관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은 이사를 하느라 뒤엉킨 스케줄 탓에 저녁 시간임에도 운동을 나왔다. 그리고 지금은 그 결정을 절실히 후회하는 중이었다.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로 인해 제대로 된 속도를 내지도 못할뿐더러, 귀찮은 상호의 전화 공세에 없던 두통도 생길 지경이었다.
나무의 풍성한 이파리들이 가로등 불빛을 가리는 어두컴컴한 벤치 옆을 지나칠 때였다. 한차례 고성이 오가고, 거친 남자의 욕설에 강한의 미간에 저절로 주름이 잡혔다. 취객끼리 시비가 붙었나. 그 곁을 무심히 지나쳐 가려는데 바닥에 놓인 종이 가방에서 삐죽이 나와 있던 교복이 강한의 발목을 붙잡았다.
달리기를 멈춘 강한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소리의 행방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둑한 벤치 뒤편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덩치가 커다란 남자 두 명과 키가 크고 마른 여자가 대치 중이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는 여자 뒤쪽으로 교복을 입은 두 명의 여학생이 더 있었다. 보아하니 남자들이 학생들에게 치근덕대는 것을 여자가 말리려다가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여자는 심한 욕설에도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제자리에서 머리를 만지는 것에만 집중하던 여자가 처음으로 몸을 움직인 것은 무스탕 재킷을 입은 남자가 여학생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팔을 잡아채려는 남자의 손목을 여자가 운동화를 신은 발로 유연하게 쳐 냈다.
그가 다가가서 말릴 새도 없었다. 무스탕 재킷을 입은 남자가 그대로 반대편 팔을 여자의 얼굴을 향해 날렸다. 한 대 맞고 쓰러지겠다 싶은 아찔한 순간이었다. 여학생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제대로 된 이성을 발휘하는 사람은 오히려 젊은 여자였다. 여자는 상반신을 뒤로 제치며 날아드는 손을 피하더니 곧바로 예상치 못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연약해 보이는 몸 어디에서 그런 파워가 나오는지 실로 놀라웠다. 손에 들고 있는 가느다란 물건을 휙휙 휘저으며 얼굴을 공격해 혼을 빼놓는다 싶더니, 거침없는 돌려차기로 아래턱을 가격했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턱을 맞고 비틀거리는 남자의 복부를 걷어차서 땅으로 쓰러뜨렸다.
쓰러진 동료를 보며 당황하던 또 다른 덩치가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여자에게 덤벼들었다. 워낙 덩치가 커서인지 오히려 몸놀림이 둔해 보이는 남자였다. 멀리서 보기에도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가 주먹부터 휘둘렀다. 다행히 남자의 움직임을 먼저 읽었는지, 여자가 여유 있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의 손목을 가느다란 물건으로 인정사정없이 내려쳤다.
쒸익. 그녀가 손을 휘두를 때마다 공중에서 나는 바람 소리가 섬뜩했다. 연속적으로 가해지는 공격에 비명을 터트리며 그 남자도 힘없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 순간 땅에서 몸을 추스르고 일어서던 무스탕 재킷의 남자가 돌진해 왔다. 바로 앞까지 뻗어 나온 주먹을 여자가 양팔을 교차해서 가두고는 순식간에 몸을 회전시켰다. 팔에 가둔 남자의 팔도 자연스럽게 뒤로 꺾이면서 덩치는 몸의 균형을 잃었다.
무력하게 비틀거리는 종아리와 허벅지가 순차적으로 강한 발길질에 공격당하자, 남자는 고통 어린 비명과 함께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땅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주저앉은 무스탕의 남자를 몸놀림이 둔해 보이던 덩치가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자신들과는 급이 다르다는 것을 제대로 깨달은 모양이었다.
여자가 다가서자 움찔하며 한참을 뒤로 물러섰다. 급기야 그녀와의 사이에 거리를 두며 슬슬 눈치를 보더니 강한이 서 있는 곳과 반대편으로 줄행랑을 쳤다.
환호성을 질러 대는 여학생들을 내버려 두고 여자는 종이 가방을 찾아 강한의 앞으로 달려왔다. 달려오면서 묶었던 머리를 풀었는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반 이상 덮어 버렸다. 궁금했던 가느다란 물건은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틸로 만든 기다란 잣대였다. 길이를 재는 데 사용되는 평범한 잣대가 오늘은 제대로 된 무기 역할을 해 준 것이다.
여자는 흐트러진 숨결로 종이 가방을 집어 들었다. 종이 가방의 겉면에는 유명한 교복 브랜드 마크가 찍혀 있었다. 어느새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는 한쪽으로 빠져나온 교복을 단정하게 안으로 집어넣고, 스틸로 된 자도 교복 아래로 깊숙이 찔러 넣었다.
방금 전에 엄청난 몸싸움을 벌였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태연한 동작이었다. 강한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그녀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돌아섰다. 종이 가방만을 챙겨, 왔던 길을 서둘러 되돌아가는 품새가 그의 존재가 달갑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하얀색 바탕에 초록색 자수 이름표가 떨어져 있었다. 종이 가방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교복과 함께 튕겨져 나온 모양이었다. 명찰을 집어 든 강한은 저만큼 멀어져 가는 여자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 망설였다. 설마 이름표의 주인은 아니겠지.
“저기, 이봐요.”
강한의 부름은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호주머니에 감춘 것 이리 내놔.”
여자의 요구에 여학생들이 쭈뼛거리며 뭔가를 꺼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교복 입고 담배 피울 곳 찾느라, 이런 으슥한 곳으로 찾아들었지?”
“죄송해요.”
“나한테 사과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진짜 큰일 당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은 잊지 마.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도 많지만, 나쁜 사람들도 한가득이야. 가능하면 저런 쌩양아치들이랑은 아예 상종을 안 하는 게 최선이야.”
“네, 잘못했어요.”
“담배는 압수다. 그래도 몰래 숨어 피우는 것을 보니 아직 양심은 남아 있네. 너희들 집에서 기다리는 부모님 계시지?”
“네.”
“너희들 다치면 속상해하실 부모님 생각해서라도, 앞으로는 밝은 길로만 다녀. 지금 너희들한테는 부모님의 사랑과 보호가 간섭처럼 느껴지겠지만, 나 같은 사람은 받고 싶어도 못 받아. 가능하면 담배 같은 해로운 물건은 멀리하고.”
“앞으로는 담배 안 피울게요.”
“잘 생각했어. 잊지 마, 오늘 너희가 보는 부모님의 얼굴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보게 될 가장 젊은 모습이라는 것을 말이야. 나이 들어 가시는 부모님, 속 썩이지 말고 열심히 살아. 알았지?”
부드러우면서도 강단 있는 말투. 여자치고는 낮게 깔린 저음의 목소리는 한번 들으면 쉽게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담담하게 내뱉는 마지막 말에 깃들인 여운이 강한의 마음에 생각지도 못한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CHAPTER 1
좁은 블라인드 틈 사이로 내비치는 밝은 빛의 형체를 쫓아 설영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공기 중에 부유하는 투명한 형체의 입자들이 빛에 갇혀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 한곳에만 집중적으로 뭉쳐 떠도는 것들이 답답해 보였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작은 입자들이 공기 중에서 흩어지며 춤을 춘다. 자유롭게 떠다니는 입자들을 바라보며 설영은 보이지 않게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낮의 태양이 바깥세상에 활기찬 에너지를 제공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담장 너머 세상을 상상하자, 설영의 입매가 옆으로 길게 늘어졌다. 막힌 공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싶다. 따듯한 햇살을 등줄기에 맞으며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마음껏 운동장을 뛰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들썩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 그녀가 속해 있는 세상은 음침하게 내려진 블라인드로 인해 자유는커녕 햇빛 구경조차 마음대로 하기 어려웠다.
“반장. 짝꿍이랑 같이 나와서 이번 문제 풀어 봐.”
옆자리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도 설영은 정신이 딴 곳에 팔려 있는 사람처럼 미동이 없었다. 반장이라 불렸던 여학생이 어깨를 건드리자 그제야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정면을 향했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는 동작으로 여학생들의 찬탄을 끌어낸 수학 선생 최강한이 칠판에 쓰인 함수 문제를 가리켰다.
조급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난 설영은 칠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앞만 보고 걸었다. 책상의 좁은 틈 사이로 갑자기 빠져나온 책가방을 굳이 의식하지 않았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버둥대던 그녀가 강한의 품 안으로 쓰러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순간 교실 안에는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설영은 사춘기 소녀의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녀가 얼굴을 손바닥에 묻고 중얼거리는 소리는 여학생들의 비명 소리에 묻혀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도 않았다. 다만 설영을 품 안에 안고 있던 강한의 귀에는 정확하게 전달이 되었다.
“죽어라, 죽어라 하는구나.”
풋. 설영을 품에 안고 연한 미소를 흘리는 강한으로 인해 교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그녀를 칠판 앞으로 밀어 주고 간신히 여학생들을 진정시킨 강한이 칠판 옆에 한쪽 어깨를 기대었다. 선생님보다는 패션모델이 어울릴 법한 날렵하고 균형 잡힌 몸이었다.
185cm가 훌쩍 넘는 키에 타고난 비율이 예술이었다. 옷으로 감추고 있지만 탄탄해 보이는 가슴 근육은 오랜 시간 운동으로 만들어진 몸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긴 다리를 겹치고 어깨를 비스듬히 벽에 기댄 모습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어느새 복잡한 삼각 함수의 공식을 이용해서 정답을 유추해 낸 반장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설영은 혼자만 뻘쭘하게 칠판 앞에 남아 있었다. 분필로 의미 없는 동그라미만 그려 대고 있는 설영을 보며 강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류설영, 수업 시간에 집중 안 하고 딴생각만 하니깐 방금 배운 문제도 못 풀고 헤매는 거잖아. 고3인데 대학은 안 갈 거야?”
정면을 향한 설영이 핀잔을 듣고 아랫입술을 질끈 깨무는 모습도 바로 옆에 서 있는 강한만이 볼 수 있었다.
“류설영. 대답 안 하지?”
“저는 대학 안 갈 건데요.”
3면 다목적 칠판을 두드리며 강한이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더라도 매시간마다 이런 식이면 곤란해. 오늘 중으로 이 문제 풀어서 반성문이랑 같이 제출하고 집에 간다. 알았어?”
“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한 설영은 뒤로 돌아서기 전에 잠시 주춤거렸다. 뒤통수가 따갑다고 느끼는 것은 결코 그녀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어쩐다. 곤란한 듯 인상을 찌푸리던 설영은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교실 내 모든 여학생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오늘도 조용히 넘어가기는 틀린 건가.
확실히 컨셉을 잘못 잡았다. 분명 출발은 공부도, 외모도 평범한 그저 그런 여학생이었다. 눈에 띄지 않는, 있으나 마나 한 여학생. 갑작스럽게 병가를 낸 수학 선생의 공석을 메우기 위해 강한이 나타나기 한 달 전까지 설영은 유성고등학교에서 바로 그런 존재였다. 조용한 전학생. 언젠가 고3 시절의 추억을 떠올릴 때조차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그런 존재.
그러던 것이 어쩌다 수학 선생의 눈에 내숭 떠는 문제아로 찍혀서 특급관리대상이 되어 버렸는지. 게다가 그 수학 선생은 하필이면 학교 내에서 팬클럽까지 거느리고 있는 최고의 인기남이었다. 이제는 있으나 마나 하기는커녕 까딱 잘못했다가는 전교 왕따 신세로 전락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길다고도 그렇다고 짧다고도 할 수 없는 생을 살아오면서 흔히들 예감이라고 부르는 촉이 생겼다. 처음 그에게 이름을 불린 순간 느꼈던 미묘한 이질감. 흥분으로 살짝 들떠 있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순탄한 만남이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다음 날부터 현실로 나타났다.
수학 시간 다음이 점심시간이었다. 유성고등학교로 등교를 하게 되면서 유일하게 행복을 만끽하는 시간이 점심시간이었다. 재단이 운영하는 사립고등학교인 이곳은 등록금이 비싼 만큼 본관 건물뿐 아니라 부대시설도 훌륭했다. 학교 식당에서는 매 끼니마다 웬만한 레스토랑 수준에 버금가는 식단을 제공하고 있었다. 학생들 입맛과 더불어 영양까지 고려해서 짜인 식단이었다. 집 안에 인스턴트 음식만 가득 채워 둔 설영으로서는 하루의 중요 영양분을 5대 영양소가 고루 갖춰진 유성고 점심 식단을 통해 공급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설영의 입매가 처량하게 내려앉았다. 덕분에 부러움과 질투의 시선이 어느 정도 동정심을 품은 눈빛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유일한 위로라면 위로였다. 반성문까지 써 오라는데 부러워하는 게 이상한 거지. 자리에 앉자마자 교실 내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종이 울렸다. 프로젝터 화면이 꺼지자마자 설영은 머리를 깊숙이 책상에 파묻었다. 양팔로 머리를 감싸는 척, 티 안 나게 양쪽 귀를 틀어막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약았다, 너! 솔직히 털어놔. 일부러 넘어진 거지?”
“어땠어? 가슴이 근육질이던? 혼자만 느끼지 말고 말 좀 해 봐.”
“세상에, 나는 보기만 해도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
“완전 부럽다, 류설영. 뭐라고 말 좀 해 봐. 느낌이 어땠어?”
“계집애. 너 은근히 꼬리 치더라…….”
머리 위로 쏟아지는 질문의 홍수들을 무시하고 팔을 더욱 안쪽으로 감싸 안았다. 충분히 예상했던 질문들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학생들의 재잘대는 소리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뭘 확인받고 싶은 건지. 어차피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도 앞으로 불려 나가는 것은 마찬가지지 않았을까. 충분히 정답을 적어 낼 수 있었지만 모르는 척 행동한 것도 분명 의도적이었다. 중위권 내에서도 하위권에 머물러 있는 성적이니 당연히 답을 모르는 게 정석이었다.
관심 자체가 부담스러워 죽겠는데 일부러 넘어졌냐는 질문은 진짜 억울했다. 안기고 싶은 생각 따위도 없을뿐더러, 재수 없는 수학 선생에게 꼬리를 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발 앞에 놓인 장애물에 걸려 넘어질 것을 먼저 예견한 것도 수학 선생이었고, 어울리지도 않는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서 도움을 주러 나선 것도 엄연히 강한이였다. 결코 달갑지 않은 기사도 정신.
설영이 미리 그의 행동을 예측했더라면 앞으로 넘어지는 것만은 피했을 것이다. 단순하게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받아들이는 아이들에게 이제 와서 억울함을 호소한다고 해도 믿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어중간한 변명보다는 망신을 당해 창피해 죽겠다는 태도로 대답을 회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만 좀 해. 일부러 넘어진 것도 아니잖아. 얘가 어디 그럴 만한 배짱이라도 있는 애니? 다들 점심 먹으러 안 갈 거야? 점심 다음이 체육 시간이야. 체육복 갈아입으려면 빨리 서둘러야 해. 지난 시간에도 늦었다고 벌칙받았잖아. 이번에 또 늦으면 운동장 3바퀴라는 경고, 잊지 않았지?”
그래도 짝꿍이라고 편들어 주는 반장 덕에 와글대던 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반장의 말에 수긍이라도 한 건지, 차츰 하나둘씩 설영의 곁에서 멀어져 갔다. 화제가 수학 선생에서 점심 메뉴로 바뀌고, 학생들이 우르르 뒷문으로 몰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프롤로그
어느새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공원의 인공 호수에서는 푸른빛의 물줄기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역류했다. 물 밑에 설치된 조명으로 화사한 불빛이 도는 인공 호수를 감싸고, 길게 뻗은 가로등이 공원을 가로지르는 산책로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낮 시간에는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을 즐기던 가족 단위의 방문객으로 붐비던 공원이 해가 기울어 버린 저녁 시간에는 젊은 커플들의 데이트 장소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 이사는 잘 마무리했지?
“알면서 뭘 물어.”
― 성깔머리하고는. 대답을 해도 꼭 저렇게 정 없이 해요. 그래서 기어이 하겠다 이거지?
핸드폰의 블루투스 이어폰 너머로 주변의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묻히지 않게 톤이 올라가는 굵직한 음성에 강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알면서, 왜 자꾸, 물어?”
조깅으로 인해 거칠어진 호흡 때문에 말소리가 부자연스럽게 뚝뚝 끊어졌다.
― 답답해서 그러잖아. 분명 다른 해결 방안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런 데서 아까운 재능 낭비하지 말고, 다른 방도를 찾아보자고. 요즘 같은 물질 만능주의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딨어?
“쓸데없는 소리, 계속할 거면, 끊어, 형.”
― 이게 왜 쓸데없는 소리야. 똑똑한 녀석이 꼭두각시놀음에서 모양새 빠지는 어릿광대를 하겠다는데, 그걸 그냥 보고만 있으라고?
“끊는다.”
신경질적으로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서 뺀 강한은 북적대는 사람들을 피해 공원 안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보통은 동이 틀 무렵의 새벽 공기를 즐기며 달리는 습관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은 이사를 하느라 뒤엉킨 스케줄 탓에 저녁 시간임에도 운동을 나왔다. 그리고 지금은 그 결정을 절실히 후회하는 중이었다.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로 인해 제대로 된 속도를 내지도 못할뿐더러, 귀찮은 상호의 전화 공세에 없던 두통도 생길 지경이었다.
나무의 풍성한 이파리들이 가로등 불빛을 가리는 어두컴컴한 벤치 옆을 지나칠 때였다. 한차례 고성이 오가고, 거친 남자의 욕설에 강한의 미간에 저절로 주름이 잡혔다. 취객끼리 시비가 붙었나. 그 곁을 무심히 지나쳐 가려는데 바닥에 놓인 종이 가방에서 삐죽이 나와 있던 교복이 강한의 발목을 붙잡았다.
달리기를 멈춘 강한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소리의 행방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둑한 벤치 뒤편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덩치가 커다란 남자 두 명과 키가 크고 마른 여자가 대치 중이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는 여자 뒤쪽으로 교복을 입은 두 명의 여학생이 더 있었다. 보아하니 남자들이 학생들에게 치근덕대는 것을 여자가 말리려다가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여자는 심한 욕설에도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제자리에서 머리를 만지는 것에만 집중하던 여자가 처음으로 몸을 움직인 것은 무스탕 재킷을 입은 남자가 여학생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팔을 잡아채려는 남자의 손목을 여자가 운동화를 신은 발로 유연하게 쳐 냈다.
그가 다가가서 말릴 새도 없었다. 무스탕 재킷을 입은 남자가 그대로 반대편 팔을 여자의 얼굴을 향해 날렸다. 한 대 맞고 쓰러지겠다 싶은 아찔한 순간이었다. 여학생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제대로 된 이성을 발휘하는 사람은 오히려 젊은 여자였다. 여자는 상반신을 뒤로 제치며 날아드는 손을 피하더니 곧바로 예상치 못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연약해 보이는 몸 어디에서 그런 파워가 나오는지 실로 놀라웠다. 손에 들고 있는 가느다란 물건을 휙휙 휘저으며 얼굴을 공격해 혼을 빼놓는다 싶더니, 거침없는 돌려차기로 아래턱을 가격했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턱을 맞고 비틀거리는 남자의 복부를 걷어차서 땅으로 쓰러뜨렸다.
쓰러진 동료를 보며 당황하던 또 다른 덩치가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여자에게 덤벼들었다. 워낙 덩치가 커서인지 오히려 몸놀림이 둔해 보이는 남자였다. 멀리서 보기에도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가 주먹부터 휘둘렀다. 다행히 남자의 움직임을 먼저 읽었는지, 여자가 여유 있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의 손목을 가느다란 물건으로 인정사정없이 내려쳤다.
쒸익. 그녀가 손을 휘두를 때마다 공중에서 나는 바람 소리가 섬뜩했다. 연속적으로 가해지는 공격에 비명을 터트리며 그 남자도 힘없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 순간 땅에서 몸을 추스르고 일어서던 무스탕 재킷의 남자가 돌진해 왔다. 바로 앞까지 뻗어 나온 주먹을 여자가 양팔을 교차해서 가두고는 순식간에 몸을 회전시켰다. 팔에 가둔 남자의 팔도 자연스럽게 뒤로 꺾이면서 덩치는 몸의 균형을 잃었다.
무력하게 비틀거리는 종아리와 허벅지가 순차적으로 강한 발길질에 공격당하자, 남자는 고통 어린 비명과 함께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땅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주저앉은 무스탕의 남자를 몸놀림이 둔해 보이던 덩치가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자신들과는 급이 다르다는 것을 제대로 깨달은 모양이었다.
여자가 다가서자 움찔하며 한참을 뒤로 물러섰다. 급기야 그녀와의 사이에 거리를 두며 슬슬 눈치를 보더니 강한이 서 있는 곳과 반대편으로 줄행랑을 쳤다.
환호성을 질러 대는 여학생들을 내버려 두고 여자는 종이 가방을 찾아 강한의 앞으로 달려왔다. 달려오면서 묶었던 머리를 풀었는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반 이상 덮어 버렸다. 궁금했던 가느다란 물건은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틸로 만든 기다란 잣대였다. 길이를 재는 데 사용되는 평범한 잣대가 오늘은 제대로 된 무기 역할을 해 준 것이다.
여자는 흐트러진 숨결로 종이 가방을 집어 들었다. 종이 가방의 겉면에는 유명한 교복 브랜드 마크가 찍혀 있었다. 어느새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는 한쪽으로 빠져나온 교복을 단정하게 안으로 집어넣고, 스틸로 된 자도 교복 아래로 깊숙이 찔러 넣었다.
방금 전에 엄청난 몸싸움을 벌였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태연한 동작이었다. 강한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그녀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돌아섰다. 종이 가방만을 챙겨, 왔던 길을 서둘러 되돌아가는 품새가 그의 존재가 달갑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하얀색 바탕에 초록색 자수 이름표가 떨어져 있었다. 종이 가방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교복과 함께 튕겨져 나온 모양이었다. 명찰을 집어 든 강한은 저만큼 멀어져 가는 여자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 망설였다. 설마 이름표의 주인은 아니겠지.
“저기, 이봐요.”
강한의 부름은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호주머니에 감춘 것 이리 내놔.”
여자의 요구에 여학생들이 쭈뼛거리며 뭔가를 꺼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교복 입고 담배 피울 곳 찾느라, 이런 으슥한 곳으로 찾아들었지?”
“죄송해요.”
“나한테 사과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진짜 큰일 당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은 잊지 마.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도 많지만, 나쁜 사람들도 한가득이야. 가능하면 저런 쌩양아치들이랑은 아예 상종을 안 하는 게 최선이야.”
“네, 잘못했어요.”
“담배는 압수다. 그래도 몰래 숨어 피우는 것을 보니 아직 양심은 남아 있네. 너희들 집에서 기다리는 부모님 계시지?”
“네.”
“너희들 다치면 속상해하실 부모님 생각해서라도, 앞으로는 밝은 길로만 다녀. 지금 너희들한테는 부모님의 사랑과 보호가 간섭처럼 느껴지겠지만, 나 같은 사람은 받고 싶어도 못 받아. 가능하면 담배 같은 해로운 물건은 멀리하고.”
“앞으로는 담배 안 피울게요.”
“잘 생각했어. 잊지 마, 오늘 너희가 보는 부모님의 얼굴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보게 될 가장 젊은 모습이라는 것을 말이야. 나이 들어 가시는 부모님, 속 썩이지 말고 열심히 살아. 알았지?”
부드러우면서도 강단 있는 말투. 여자치고는 낮게 깔린 저음의 목소리는 한번 들으면 쉽게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담담하게 내뱉는 마지막 말에 깃들인 여운이 강한의 마음에 생각지도 못한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CHAPTER 1
좁은 블라인드 틈 사이로 내비치는 밝은 빛의 형체를 쫓아 설영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공기 중에 부유하는 투명한 형체의 입자들이 빛에 갇혀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 한곳에만 집중적으로 뭉쳐 떠도는 것들이 답답해 보였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작은 입자들이 공기 중에서 흩어지며 춤을 춘다. 자유롭게 떠다니는 입자들을 바라보며 설영은 보이지 않게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낮의 태양이 바깥세상에 활기찬 에너지를 제공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담장 너머 세상을 상상하자, 설영의 입매가 옆으로 길게 늘어졌다. 막힌 공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싶다. 따듯한 햇살을 등줄기에 맞으며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마음껏 운동장을 뛰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들썩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 그녀가 속해 있는 세상은 음침하게 내려진 블라인드로 인해 자유는커녕 햇빛 구경조차 마음대로 하기 어려웠다.
“반장. 짝꿍이랑 같이 나와서 이번 문제 풀어 봐.”
옆자리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도 설영은 정신이 딴 곳에 팔려 있는 사람처럼 미동이 없었다. 반장이라 불렸던 여학생이 어깨를 건드리자 그제야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정면을 향했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는 동작으로 여학생들의 찬탄을 끌어낸 수학 선생 최강한이 칠판에 쓰인 함수 문제를 가리켰다.
조급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난 설영은 칠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앞만 보고 걸었다. 책상의 좁은 틈 사이로 갑자기 빠져나온 책가방을 굳이 의식하지 않았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버둥대던 그녀가 강한의 품 안으로 쓰러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순간 교실 안에는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설영은 사춘기 소녀의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녀가 얼굴을 손바닥에 묻고 중얼거리는 소리는 여학생들의 비명 소리에 묻혀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도 않았다. 다만 설영을 품 안에 안고 있던 강한의 귀에는 정확하게 전달이 되었다.
“죽어라, 죽어라 하는구나.”
풋. 설영을 품에 안고 연한 미소를 흘리는 강한으로 인해 교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그녀를 칠판 앞으로 밀어 주고 간신히 여학생들을 진정시킨 강한이 칠판 옆에 한쪽 어깨를 기대었다. 선생님보다는 패션모델이 어울릴 법한 날렵하고 균형 잡힌 몸이었다.
185cm가 훌쩍 넘는 키에 타고난 비율이 예술이었다. 옷으로 감추고 있지만 탄탄해 보이는 가슴 근육은 오랜 시간 운동으로 만들어진 몸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긴 다리를 겹치고 어깨를 비스듬히 벽에 기댄 모습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어느새 복잡한 삼각 함수의 공식을 이용해서 정답을 유추해 낸 반장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설영은 혼자만 뻘쭘하게 칠판 앞에 남아 있었다. 분필로 의미 없는 동그라미만 그려 대고 있는 설영을 보며 강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류설영, 수업 시간에 집중 안 하고 딴생각만 하니깐 방금 배운 문제도 못 풀고 헤매는 거잖아. 고3인데 대학은 안 갈 거야?”
정면을 향한 설영이 핀잔을 듣고 아랫입술을 질끈 깨무는 모습도 바로 옆에 서 있는 강한만이 볼 수 있었다.
“류설영. 대답 안 하지?”
“저는 대학 안 갈 건데요.”
3면 다목적 칠판을 두드리며 강한이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더라도 매시간마다 이런 식이면 곤란해. 오늘 중으로 이 문제 풀어서 반성문이랑 같이 제출하고 집에 간다. 알았어?”
“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한 설영은 뒤로 돌아서기 전에 잠시 주춤거렸다. 뒤통수가 따갑다고 느끼는 것은 결코 그녀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어쩐다. 곤란한 듯 인상을 찌푸리던 설영은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교실 내 모든 여학생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오늘도 조용히 넘어가기는 틀린 건가.
확실히 컨셉을 잘못 잡았다. 분명 출발은 공부도, 외모도 평범한 그저 그런 여학생이었다. 눈에 띄지 않는, 있으나 마나 한 여학생. 갑작스럽게 병가를 낸 수학 선생의 공석을 메우기 위해 강한이 나타나기 한 달 전까지 설영은 유성고등학교에서 바로 그런 존재였다. 조용한 전학생. 언젠가 고3 시절의 추억을 떠올릴 때조차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그런 존재.
그러던 것이 어쩌다 수학 선생의 눈에 내숭 떠는 문제아로 찍혀서 특급관리대상이 되어 버렸는지. 게다가 그 수학 선생은 하필이면 학교 내에서 팬클럽까지 거느리고 있는 최고의 인기남이었다. 이제는 있으나 마나 하기는커녕 까딱 잘못했다가는 전교 왕따 신세로 전락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길다고도 그렇다고 짧다고도 할 수 없는 생을 살아오면서 흔히들 예감이라고 부르는 촉이 생겼다. 처음 그에게 이름을 불린 순간 느꼈던 미묘한 이질감. 흥분으로 살짝 들떠 있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순탄한 만남이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다음 날부터 현실로 나타났다.
수학 시간 다음이 점심시간이었다. 유성고등학교로 등교를 하게 되면서 유일하게 행복을 만끽하는 시간이 점심시간이었다. 재단이 운영하는 사립고등학교인 이곳은 등록금이 비싼 만큼 본관 건물뿐 아니라 부대시설도 훌륭했다. 학교 식당에서는 매 끼니마다 웬만한 레스토랑 수준에 버금가는 식단을 제공하고 있었다. 학생들 입맛과 더불어 영양까지 고려해서 짜인 식단이었다. 집 안에 인스턴트 음식만 가득 채워 둔 설영으로서는 하루의 중요 영양분을 5대 영양소가 고루 갖춰진 유성고 점심 식단을 통해 공급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설영의 입매가 처량하게 내려앉았다. 덕분에 부러움과 질투의 시선이 어느 정도 동정심을 품은 눈빛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유일한 위로라면 위로였다. 반성문까지 써 오라는데 부러워하는 게 이상한 거지. 자리에 앉자마자 교실 내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종이 울렸다. 프로젝터 화면이 꺼지자마자 설영은 머리를 깊숙이 책상에 파묻었다. 양팔로 머리를 감싸는 척, 티 안 나게 양쪽 귀를 틀어막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약았다, 너! 솔직히 털어놔. 일부러 넘어진 거지?”
“어땠어? 가슴이 근육질이던? 혼자만 느끼지 말고 말 좀 해 봐.”
“세상에, 나는 보기만 해도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
“완전 부럽다, 류설영. 뭐라고 말 좀 해 봐. 느낌이 어땠어?”
“계집애. 너 은근히 꼬리 치더라…….”
머리 위로 쏟아지는 질문의 홍수들을 무시하고 팔을 더욱 안쪽으로 감싸 안았다. 충분히 예상했던 질문들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학생들의 재잘대는 소리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뭘 확인받고 싶은 건지. 어차피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도 앞으로 불려 나가는 것은 마찬가지지 않았을까. 충분히 정답을 적어 낼 수 있었지만 모르는 척 행동한 것도 분명 의도적이었다. 중위권 내에서도 하위권에 머물러 있는 성적이니 당연히 답을 모르는 게 정석이었다.
관심 자체가 부담스러워 죽겠는데 일부러 넘어졌냐는 질문은 진짜 억울했다. 안기고 싶은 생각 따위도 없을뿐더러, 재수 없는 수학 선생에게 꼬리를 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발 앞에 놓인 장애물에 걸려 넘어질 것을 먼저 예견한 것도 수학 선생이었고, 어울리지도 않는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서 도움을 주러 나선 것도 엄연히 강한이였다. 결코 달갑지 않은 기사도 정신.
설영이 미리 그의 행동을 예측했더라면 앞으로 넘어지는 것만은 피했을 것이다. 단순하게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받아들이는 아이들에게 이제 와서 억울함을 호소한다고 해도 믿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어중간한 변명보다는 망신을 당해 창피해 죽겠다는 태도로 대답을 회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만 좀 해. 일부러 넘어진 것도 아니잖아. 얘가 어디 그럴 만한 배짱이라도 있는 애니? 다들 점심 먹으러 안 갈 거야? 점심 다음이 체육 시간이야. 체육복 갈아입으려면 빨리 서둘러야 해. 지난 시간에도 늦었다고 벌칙받았잖아. 이번에 또 늦으면 운동장 3바퀴라는 경고, 잊지 않았지?”
그래도 짝꿍이라고 편들어 주는 반장 덕에 와글대던 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반장의 말에 수긍이라도 한 건지, 차츰 하나둘씩 설영의 곁에서 멀어져 갔다. 화제가 수학 선생에서 점심 메뉴로 바뀌고, 학생들이 우르르 뒷문으로 몰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