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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간격 2화
왁자지껄 떠들어 대던 학생들이 모두 뒷문으로 빠져나갔다고 생각했을 찰나에 볼펜이 교실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나무 책상을 두드리는 작은 소리에 설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기……. 이거 칠판에 적힌 문제에 대한 문제 풀이랑 정답이야. 오늘 중으로 정답 알아내서 제출하라고 하셨잖아.”
선생님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 외에는 들어 본 적이 없는 청아한 목소리였다. 반으로 곱게 접힌 하얀 종이를 바라보며 설영은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것에 무관심해 보이던 아이가 베풀어 준 뜻밖의 호의. 전교 1등이라며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아이였다. 엄마가 꽤 이름 있는 레스토랑을 운영하신다고 들었던 것도 같았다. 곱상한 외모와 더불어 신비스러운 분위기로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반면에 유나를 향한 여학생들의 반감은 상당했다. 어느 학교에서든지 화제의 중심에 있는 학생은 공공의 적처럼 반감을 사기 쉬운 대상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상하게 눈길이 가던 아이였다.
“고마워. 덕분에 한숨 놨다.”
유나가 종이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웃을 때 입술 끝이 위로 당겨지는 것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그 누군가가 김민호라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약 10초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왜 갑자기 그 녀석이 떠올랐을까.
불편한 듯 한쪽 다리를 끄는 유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설영의 고개가 한쪽으로 갸웃하며 기울어졌다. 다시 고개가 원위치로 돌아왔을 때는 불편한 의구심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웃을 때 입꼬리가 유난스럽게 올라가는 사람이 어디 그 녀석 하나뿐인가.
접힌 종이를 펼치니 단정한 글씨로 써 내려간 숫자와 공식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차분한 성격답게 줄 간격도 일정했다. 문제 풀이를 한번 슬쩍 읽어 보고는 그대로 다시 접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여기까지. 당장은 따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교실에 혼자 남았다는 것을 확인한 설영은 가장 먼저 체육복부터 챙겼다. 지금쯤이면 그녀가 수학 선생의 품에 안겼다는 사실이 전교에 빠르게 퍼지고 있을 것이다. 같은 반 학우들은 상황이 어쩔 수 없었음을 이해해 준다 치더라도,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여학생들에게는 설영이 꼬리 아홉 개 달린 불여우로 둔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강한의 팬클럽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잘 대처해 낼 수 있을까. 팬클럽 회장이라는 고선미와 일당들. 그 아이들의 안하무인 태도를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이미 트집거리는 제공했다. 트러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학생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사라졌다가, 체육 시간에 맞춰서 나타나는 게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교실의 앞문으로 다가간 설영은 문을 살짝 열고 귀를 기울였다. 시끌벅적 떠들어 대는 소리가 뒤쪽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설영은 과학실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 *
서울시 중심부의 아파트 숲을 벗어나 주택가가 즐비한 노른자 땅 위에 세워진 5층짜리 건물 두 개. 유성재단에 의해 운영되는 유성중학교와 유성고등학교 본관이었다. 명망 있는 사립학교로서의 명성에 걸맞게 유럽의 고성을 연상케 하는 운치 있는 건물 외관을 녹음이 짙은 나무가 둘러싸고 있었다.
건물을 지으면서 오래된 나무들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교정 곳곳에서 엿보였다. 두 건물을 사이에 두고 자리한 운동장과 그 주변을 둘러싼 등나무 벤치. 날씨가 풀리면서 앙상하던 가지에 푸른 잎이 무성하게 자라 자연이 주는 쉼터로서의 역할을 그럴싸하게 해 주고 있었다. 녹음이 짙은 교정은 어린 학생들의 정서 함양 측면에서 그럴싸한 플러스알파 효과를 제대로 발휘해 주고 있었다.
등록금이 일반 공립학교에 비해 턱없이 비싸 귀족 학교라 불리는 만큼 등하교 시간에 맞추어 교문 앞에는 고급 세단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TV에서나 주로 볼 수 있던 비싼 외제 차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신기한 풍경이 이곳에서는 평범한 하루의 일과 중 하나였다. 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학생들은 큰길까지 걸어 나가야 했다. 주택가 안쪽에 자리한 정문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걸어서 20분 거리였다.
높은 언덕배기에 위치한 학교까지 걸어오는 등굣길은 가파른 오르막길로 등산로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온통 돌담으로 둘러싸인 주택가라서 그 흔한 편의점 하나가 없었다. 정문에서 번화가까지 나갔다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무려 40분. 한번 학교에 들어오면 누구 하나 쉽사리 나갔다, 다시 들어올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야간 자율 학습을 신청하고 자습실에 남아 공부하는 아이들을 빼놓고는 대부분 하교를 마친 시간이었다. 평지보다 하늘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언덕배기에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초저녁의 하늘은 붉은 잿빛으로 물들어 낮의 파란 하늘보다는 한층 가깝게 느껴졌다.
손을 높게 뻗으면 노을색으로 물들은 회색빛 구름이 손끝에 닿을 것만 같았다. 설영은 제자리에서 몇 번인가 펄쩍거리며 뛰어올랐다. 잡힐 듯 아무것도 잡히지 않자 전력 질주를 다해 언덕배기를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강한이 나타난 후로 평범해야 할 일상이 자꾸만 엉망으로 꼬여 가고 있었다. 하다 하다 별것도 아닌 반성문까지 퇴짜를 맞았다. 논술 학원에 특강까지 나갔다는 해수를 시켜 작성한 반성문이었다. 그런 반성문을 진정성이 없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고, 그 자리에서 A4 용지에 빈틈없이 빽빽하게 새로이 글자들로 채워 놓고 나오는 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반성문에 대한 진정성 여부를 따지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수업 시간에 집중을 안 했다는 이유만으로 반성문을 쓰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라면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같이 반성문을 써야 옳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반성문 대신에 그녀가 받아야 하는 벌칙이 얼마나 공평성과 형평성에 어긋나는 행위인지, 그가 교권을 등에 업고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권위가 얼마나 부당한 행위인지에 대한 고발 형식의 투고문을 작성해서 제출했다.
큰길로 내려오자마자 쫄쫄 굶은 배를 안고 버스 정류장 앞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즐비하게 늘어선 제품들 중에서 무조건 손에 잡히는 컵라면을 골랐다. 시원한 음료수라도 같이 살까 하다 우선은 배부터 채우자는 생각에 계산대로 향했다. 컵라면의 포장을 뜯으면서 영수증도 대충 휴지통에 흘려 버렸다. 익숙한 동작으로 컵라면 용기에 뜨거운 물을 채워 가게 앞 파라솔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면발이 불어나기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책가방은 비어 있는 의자에 대충 던져 놓았다. 그러고는 앉자마자 면발을 한두 번 휘젓고는 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바삭거리는 것이 씹는 맛도 있고 나쁘지만은 않았다.
허겁지겁 반 정도 먹었을까. 컵라면 옆으로 주문한 적도 없는 작은 오렌지 주스 한 병이 놓여졌다.
“또 컵라면이야? 어떻게 너는 볼 때마다 편의점이냐? 캔 맥주와 컵라면이 주식은 아니지? 한창 크는 나이에 이런 인스턴트 음식만 먹으면 나중에 골골할 거다.”
면발 한 무더기를 입 안으로 집어넣고 있을 때였다. 어찌나 놀랐던지 목이 메어 입으로 들어갔던 면발이 도로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더럽게! 굳이 시위하듯 이럴 필요까지는 없잖아. 찝찝하게 한번 뱉은 것을 다시 먹을 건 아니지?”
“사람을 뭘로 보고.”
누구 때문에 점심도 못 먹고 이 고생인데. 억울한 마음에 양 눈썹 사이로 잔뜩 주름이 잡혔다. 사정을 모르는 강한은 인상을 쓴 채 기다란 손가락 하나를 들어서 주름진 이마를 퉁 하고 밀었다. 번개처럼 눈앞에 반짝하고 빛이 났다 사라졌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착각일까. 일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영은 다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두꺼운 뿔테 안경부터 찾았다. 컵라면의 열기로 뿌연 습기가 시야를 가리자 답답한 마음에 잠깐 벗어 두었던 안경이었다. 학교에서는 웬만해선 얼굴에서 떼어 놓지 않던 안경이었는데, 학교를 벗어났다는 생각에 잠시 방심했었다. 테이블 중앙에 얌전히 놓여 있던 안경을 집어 들면서,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부지런히 털어 냈다. 커다란 구닥다리 뿔테 안경과 풍성하게 내려온 앞머리 덕에 순식간에 얼굴의 절반이 가려졌다. 근방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학생이 없는지 조심히 살피면서 휴지통의 위치를 확인했다.
밤늦은 시간 동네 편의점에서 강한과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시내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등하굣길에 만난 적은 없었다. 왜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칠 수 있을 확률은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학교 교정만 벗어나면 그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착각을 했었다.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배가 고파도 참는 건데.
의자에 던져 놓은 책가방을 들어 올리면서 보니 강한이 한쪽 팔을 의자 등받이 위에 두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비닐 포장을 뜯지 않은 담배와 영수증이 들려 있었다. 영수증에는 검은색의 잉크로 담배와 오렌지 주스의 가격이 찍혀 있었다. 설영은 앞에 놓여 있는 주스 병을 그의 앞으로 옮겨 놓았다. 분명하게 의사 표현을 해야만 했다. 어떤 식으로도 엮이고 싶지 않다고.
“저는 오렌지 안 좋아합니다. 선생님이 사신 것은 선생님이 드세요. 그럼, 저는 이만.”
“뭐냐, 류설영. 내가 권력 남용했다고 이런 식으로 항의하는 거야? 알았다, 화난 거 인정. 지금 집으로 갈 거지? 같이 가자.”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들썩이던 몸이 설영의 절규에 멈칫했다.
선이 곧으면서 날렵하게 뻗어 있는 콧날과 숱이 진한 속눈썹이 타원형의 눈매를 뚜렷하게 강조해 주고 수려한 이목구비가 눈에 띄게 비틀렸다. 좌우로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얼굴의 양미간 사이에 주름이 잡히고, 위를 향하던 고운 입매가 한일자로 다물어졌다. 못마땅한 듯 설영을 바라보는 눈매가 평상시보다 깊고 어두웠다.
그 모습이 오히려 차가운 도시적인 이미지에 남성스러운 거친 매력을 더하고 있었다. 잘난 외모가 강조될수록 설영의 불만은 커져 갔다. 남자가 쓸데없이 잘생겨도 너무 잘생겼다. 이러니 여학생들이 이유 없이 열광할 수밖에.
“제발 부탁인데, 선생님은 5분만 더 앉아 있다 일어나 주세요.”
“제대로 화가 난 모양인데…….”
방어적인 태도를 거둬들이지 않는 설영을 보며 강한이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앉아 한쪽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가 초라한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왠지 현실과 동떨어져 보였다. 붉게 변해 가는 노을빛을 배경으로 혼자 화보라도 찍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비록 잡지사 화보 촬영은 아닐지라도 누군가 이 모습을 핸드폰으로 찍고 있을 거라는 것을 설영은 알고 있었다. 순간 샷이라는 게 어떤 각도에서 찍히느냐에 따라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그와 함께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말 많은 여학생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에 충분했다. 행여나 같은 동네에 산다는 둥 그와 인연이 되는 어떠한 화제도 흘러나와서는 안 된다. 하루가 다르게 화제의 중심에 그녀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있는 둥 없는 둥 조용히 1년만 버티다, 조용히 잊혀 가는 게 설영이 유일하게 바라는 바였다.
“선생님, 뭔가 저에 대해 단단히 오해를 하신 것 같아요. 편의점에서 캔 맥주를 샀다고 문제아라고 생각하시나 본데, 요즘 세대들은 호기심에 맥주 정도는 다 마시거든요. 사실 그 맥주 입맛에 맞지도 않아서 달랑 한 입 마시고 버렸어요.”
재미있다는 듯 옅게 퍼져 가는 미소를 보는 설영의 말이 빨라졌다.
“저 말고 관심 갖으셔야 할 진짜 문제 학생들을 찾아보세요. 그러니깐 다시 말해서 저한테는 굳이 신경 안 쓰셔도 된다는 겁니다. 안 믿으시겠지만 저는 상당히 건전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문제아를 바른길로 인도해야지, 하는 사명감까지 가지고 있다니까요. 암튼 저는 소심하고 싶어서…….”
젠장. 소심하다는 표현을 쓴다는 게 말이 잘못 나왔다.
“제 말은 저는 소심해서 선생님 같은 분이 이름을 불러 주시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습니다. 수업 시간에도 집중하고 뭐든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니 학생들 앞에서 더 이상 제 이름 좀 부르지 말아 주세요. 진심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속사포처럼 하고 싶은 말만을 던져 놓고 설영은 버스 정류장을 향해 냅다 뛰었다. 컵라면 용기가 휴지통에 떨어지면서 국물이 튀어 교복 치마를 더럽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출발하는 버스에 무조건 올라탔다. 매일 타고 다니는 버스는 아니었지만, 다행히 그녀가 사는 동네를 거쳐 가는 버스였다. 공원 입구에서 내려 공원을 가로지르면 임시로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로 걸어갈 수 있었다.
하교 시간이 한참 지나서인지 비어 있는 좌석이 꽤 눈에 들어왔다. 습관처럼 맨 뒷좌석에 앉아서 버스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강한이 비어 있는 옆자리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새로 산 담뱃갑을 이리저리 돌리는 손 모양이 초조해 보였다. 열고 싶어 죽겠는데 참고 있느라 애가 타는 모습이었다.
“5분간 앉아 있기로 약속했잖아요.”
“약속한 적은 없지만, 분명 앉아는 있었다. 너는 떠들어 대느라 5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는 것 같지만.”
무사태평한 강한의 반응으로 봐서 협조할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거다.
“하아, 좋아요. 선생님은 이 버스 타고 가세요, 저는 다음 버스로 가겠습니다.”
한탄 섞인 신음을 내뱉으며 설영이 좌석에서 일어나자마자 버스가 출발했다. 어떻게 오늘따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앞좌석으로라도 이동하려는데, 강한이 어깨에 매달린 가방끈을 잡아당겼다. 버스가 출발하는 반동과 강한의 힘에 이끌린 설영은 넘어지듯 자리에 도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정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설영을 강한이 영민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왼쪽 얼굴에 닿아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자 어색함에 아랫입술만 질근질근 깨물었다. 온통 신경이 몰려 있는 왼쪽 볼에 마비가 오는 느낌이 들어, 끝내는 설영이 신경질적으로 강한을 마주했다.
“선생님,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너 싸움 잘하더라.”
설영의 모든 감각 세포가 일순간 긴장했다. 경직되는 얼굴 근육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이 순간 열아홉 살 여고생이 할 수 있는 반응이 무엇일까. 플라스틱 포장을 뜯지 않고 담뱃갑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강인하고 거칠어 보이는 손이었다. 기다란 손가락에 새겨진 굵은 마디를 바라보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뭐라고 대답하지. 이 남자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진의를 파악해야만 했다.
“금연 3일째.”
그녀의 머릿속을 꿰뚫어 보는 듯 강한이 질문에 앞질러 대답을 내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서 연한 레몬 캔디의 향이 나는 것도 같았다.
“학교에서는 마땅히 담배를 피울 만한 장소가 없어서……. 거기다 학생들한테는 담배가 해로운 물건이니 멀리하라고 경고하면서, 내가 피우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생각도 들고.”
임시 교사로 수업 시간에 가르치는 것 빼놓고는 매사 무심하고 슬렁슬렁해서 무시했는데, 그래도 선생으로서의 기본 도리는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가 되었든 달갑지 않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보니 멀리서는 볼 수 없었던 작은 흉터가 눈썹과 눈 밑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곧게 뻗었다고 생각했던 콧등의 중간 부분도 살짝 틀어져 있었다. 꼭 누구한테 맞아서 코뼈가 부러졌다, 다시 자리를 잡으면서 원래 모습에서 틀어진 것만 같았다.
“열다섯 살 때 한 번, 열여덟 살에 한 번.”
꼭 설영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녀의 생각을 그대로 읽어 내는 강한의 예리함을 피해 시선을 다시 담뱃갑으로 돌렸다.
“3일이면 니코틴 금단 증상이 제일 심할 때인데, 담배를 손에 들고 있다는 것은 다시 피우겠다는 뜻이에요?”
“글쎄, 정면 승부라고 하는 편이 낫겠지? 담배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는 거지.”
이상하게 설영은 그의 대답이 대충 허투루 넘어갈 생각 하지 말라는 경고처럼 들렸다.
“이거 네 거 맞지?”
강한이 앞으로 내민 손바닥에는 초록색 명찰이 놓여 있었다. 이거였구나. 교복을 구매하면서 함께 주문했던 이름표. 교복을 찾아오던 날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학교 선생인 그가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못했다.
서늘한 한기에 목뒤의 솜털까지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된통 잘못 걸려들었다. 단순하게 편의점에서 캔 맥주를 사다가 걸려서 찍힌 줄 알았더니. 그동안 그가 보여 왔던 지대한 관심들이 이제야 제대로 납득이 되었다. 얌전한 척, 소심한 척, 내성적인 척, 그 모든 척들이 이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제대로 문제아로 낙인찍혔던 것이다.
왁자지껄 떠들어 대던 학생들이 모두 뒷문으로 빠져나갔다고 생각했을 찰나에 볼펜이 교실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나무 책상을 두드리는 작은 소리에 설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기……. 이거 칠판에 적힌 문제에 대한 문제 풀이랑 정답이야. 오늘 중으로 정답 알아내서 제출하라고 하셨잖아.”
선생님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 외에는 들어 본 적이 없는 청아한 목소리였다. 반으로 곱게 접힌 하얀 종이를 바라보며 설영은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것에 무관심해 보이던 아이가 베풀어 준 뜻밖의 호의. 전교 1등이라며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아이였다. 엄마가 꽤 이름 있는 레스토랑을 운영하신다고 들었던 것도 같았다. 곱상한 외모와 더불어 신비스러운 분위기로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반면에 유나를 향한 여학생들의 반감은 상당했다. 어느 학교에서든지 화제의 중심에 있는 학생은 공공의 적처럼 반감을 사기 쉬운 대상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상하게 눈길이 가던 아이였다.
“고마워. 덕분에 한숨 놨다.”
유나가 종이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웃을 때 입술 끝이 위로 당겨지는 것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그 누군가가 김민호라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약 10초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왜 갑자기 그 녀석이 떠올랐을까.
불편한 듯 한쪽 다리를 끄는 유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설영의 고개가 한쪽으로 갸웃하며 기울어졌다. 다시 고개가 원위치로 돌아왔을 때는 불편한 의구심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웃을 때 입꼬리가 유난스럽게 올라가는 사람이 어디 그 녀석 하나뿐인가.
접힌 종이를 펼치니 단정한 글씨로 써 내려간 숫자와 공식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차분한 성격답게 줄 간격도 일정했다. 문제 풀이를 한번 슬쩍 읽어 보고는 그대로 다시 접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여기까지. 당장은 따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교실에 혼자 남았다는 것을 확인한 설영은 가장 먼저 체육복부터 챙겼다. 지금쯤이면 그녀가 수학 선생의 품에 안겼다는 사실이 전교에 빠르게 퍼지고 있을 것이다. 같은 반 학우들은 상황이 어쩔 수 없었음을 이해해 준다 치더라도,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여학생들에게는 설영이 꼬리 아홉 개 달린 불여우로 둔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강한의 팬클럽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잘 대처해 낼 수 있을까. 팬클럽 회장이라는 고선미와 일당들. 그 아이들의 안하무인 태도를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이미 트집거리는 제공했다. 트러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학생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사라졌다가, 체육 시간에 맞춰서 나타나는 게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교실의 앞문으로 다가간 설영은 문을 살짝 열고 귀를 기울였다. 시끌벅적 떠들어 대는 소리가 뒤쪽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설영은 과학실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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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중심부의 아파트 숲을 벗어나 주택가가 즐비한 노른자 땅 위에 세워진 5층짜리 건물 두 개. 유성재단에 의해 운영되는 유성중학교와 유성고등학교 본관이었다. 명망 있는 사립학교로서의 명성에 걸맞게 유럽의 고성을 연상케 하는 운치 있는 건물 외관을 녹음이 짙은 나무가 둘러싸고 있었다.
건물을 지으면서 오래된 나무들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교정 곳곳에서 엿보였다. 두 건물을 사이에 두고 자리한 운동장과 그 주변을 둘러싼 등나무 벤치. 날씨가 풀리면서 앙상하던 가지에 푸른 잎이 무성하게 자라 자연이 주는 쉼터로서의 역할을 그럴싸하게 해 주고 있었다. 녹음이 짙은 교정은 어린 학생들의 정서 함양 측면에서 그럴싸한 플러스알파 효과를 제대로 발휘해 주고 있었다.
등록금이 일반 공립학교에 비해 턱없이 비싸 귀족 학교라 불리는 만큼 등하교 시간에 맞추어 교문 앞에는 고급 세단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TV에서나 주로 볼 수 있던 비싼 외제 차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신기한 풍경이 이곳에서는 평범한 하루의 일과 중 하나였다. 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학생들은 큰길까지 걸어 나가야 했다. 주택가 안쪽에 자리한 정문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걸어서 20분 거리였다.
높은 언덕배기에 위치한 학교까지 걸어오는 등굣길은 가파른 오르막길로 등산로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온통 돌담으로 둘러싸인 주택가라서 그 흔한 편의점 하나가 없었다. 정문에서 번화가까지 나갔다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무려 40분. 한번 학교에 들어오면 누구 하나 쉽사리 나갔다, 다시 들어올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야간 자율 학습을 신청하고 자습실에 남아 공부하는 아이들을 빼놓고는 대부분 하교를 마친 시간이었다. 평지보다 하늘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언덕배기에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초저녁의 하늘은 붉은 잿빛으로 물들어 낮의 파란 하늘보다는 한층 가깝게 느껴졌다.
손을 높게 뻗으면 노을색으로 물들은 회색빛 구름이 손끝에 닿을 것만 같았다. 설영은 제자리에서 몇 번인가 펄쩍거리며 뛰어올랐다. 잡힐 듯 아무것도 잡히지 않자 전력 질주를 다해 언덕배기를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강한이 나타난 후로 평범해야 할 일상이 자꾸만 엉망으로 꼬여 가고 있었다. 하다 하다 별것도 아닌 반성문까지 퇴짜를 맞았다. 논술 학원에 특강까지 나갔다는 해수를 시켜 작성한 반성문이었다. 그런 반성문을 진정성이 없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고, 그 자리에서 A4 용지에 빈틈없이 빽빽하게 새로이 글자들로 채워 놓고 나오는 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반성문에 대한 진정성 여부를 따지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수업 시간에 집중을 안 했다는 이유만으로 반성문을 쓰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라면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같이 반성문을 써야 옳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반성문 대신에 그녀가 받아야 하는 벌칙이 얼마나 공평성과 형평성에 어긋나는 행위인지, 그가 교권을 등에 업고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권위가 얼마나 부당한 행위인지에 대한 고발 형식의 투고문을 작성해서 제출했다.
큰길로 내려오자마자 쫄쫄 굶은 배를 안고 버스 정류장 앞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즐비하게 늘어선 제품들 중에서 무조건 손에 잡히는 컵라면을 골랐다. 시원한 음료수라도 같이 살까 하다 우선은 배부터 채우자는 생각에 계산대로 향했다. 컵라면의 포장을 뜯으면서 영수증도 대충 휴지통에 흘려 버렸다. 익숙한 동작으로 컵라면 용기에 뜨거운 물을 채워 가게 앞 파라솔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면발이 불어나기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책가방은 비어 있는 의자에 대충 던져 놓았다. 그러고는 앉자마자 면발을 한두 번 휘젓고는 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바삭거리는 것이 씹는 맛도 있고 나쁘지만은 않았다.
허겁지겁 반 정도 먹었을까. 컵라면 옆으로 주문한 적도 없는 작은 오렌지 주스 한 병이 놓여졌다.
“또 컵라면이야? 어떻게 너는 볼 때마다 편의점이냐? 캔 맥주와 컵라면이 주식은 아니지? 한창 크는 나이에 이런 인스턴트 음식만 먹으면 나중에 골골할 거다.”
면발 한 무더기를 입 안으로 집어넣고 있을 때였다. 어찌나 놀랐던지 목이 메어 입으로 들어갔던 면발이 도로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더럽게! 굳이 시위하듯 이럴 필요까지는 없잖아. 찝찝하게 한번 뱉은 것을 다시 먹을 건 아니지?”
“사람을 뭘로 보고.”
누구 때문에 점심도 못 먹고 이 고생인데. 억울한 마음에 양 눈썹 사이로 잔뜩 주름이 잡혔다. 사정을 모르는 강한은 인상을 쓴 채 기다란 손가락 하나를 들어서 주름진 이마를 퉁 하고 밀었다. 번개처럼 눈앞에 반짝하고 빛이 났다 사라졌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착각일까. 일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영은 다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두꺼운 뿔테 안경부터 찾았다. 컵라면의 열기로 뿌연 습기가 시야를 가리자 답답한 마음에 잠깐 벗어 두었던 안경이었다. 학교에서는 웬만해선 얼굴에서 떼어 놓지 않던 안경이었는데, 학교를 벗어났다는 생각에 잠시 방심했었다. 테이블 중앙에 얌전히 놓여 있던 안경을 집어 들면서,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부지런히 털어 냈다. 커다란 구닥다리 뿔테 안경과 풍성하게 내려온 앞머리 덕에 순식간에 얼굴의 절반이 가려졌다. 근방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학생이 없는지 조심히 살피면서 휴지통의 위치를 확인했다.
밤늦은 시간 동네 편의점에서 강한과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시내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등하굣길에 만난 적은 없었다. 왜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칠 수 있을 확률은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학교 교정만 벗어나면 그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착각을 했었다.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배가 고파도 참는 건데.
의자에 던져 놓은 책가방을 들어 올리면서 보니 강한이 한쪽 팔을 의자 등받이 위에 두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비닐 포장을 뜯지 않은 담배와 영수증이 들려 있었다. 영수증에는 검은색의 잉크로 담배와 오렌지 주스의 가격이 찍혀 있었다. 설영은 앞에 놓여 있는 주스 병을 그의 앞으로 옮겨 놓았다. 분명하게 의사 표현을 해야만 했다. 어떤 식으로도 엮이고 싶지 않다고.
“저는 오렌지 안 좋아합니다. 선생님이 사신 것은 선생님이 드세요. 그럼, 저는 이만.”
“뭐냐, 류설영. 내가 권력 남용했다고 이런 식으로 항의하는 거야? 알았다, 화난 거 인정. 지금 집으로 갈 거지? 같이 가자.”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들썩이던 몸이 설영의 절규에 멈칫했다.
선이 곧으면서 날렵하게 뻗어 있는 콧날과 숱이 진한 속눈썹이 타원형의 눈매를 뚜렷하게 강조해 주고 수려한 이목구비가 눈에 띄게 비틀렸다. 좌우로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얼굴의 양미간 사이에 주름이 잡히고, 위를 향하던 고운 입매가 한일자로 다물어졌다. 못마땅한 듯 설영을 바라보는 눈매가 평상시보다 깊고 어두웠다.
그 모습이 오히려 차가운 도시적인 이미지에 남성스러운 거친 매력을 더하고 있었다. 잘난 외모가 강조될수록 설영의 불만은 커져 갔다. 남자가 쓸데없이 잘생겨도 너무 잘생겼다. 이러니 여학생들이 이유 없이 열광할 수밖에.
“제발 부탁인데, 선생님은 5분만 더 앉아 있다 일어나 주세요.”
“제대로 화가 난 모양인데…….”
방어적인 태도를 거둬들이지 않는 설영을 보며 강한이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앉아 한쪽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가 초라한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왠지 현실과 동떨어져 보였다. 붉게 변해 가는 노을빛을 배경으로 혼자 화보라도 찍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비록 잡지사 화보 촬영은 아닐지라도 누군가 이 모습을 핸드폰으로 찍고 있을 거라는 것을 설영은 알고 있었다. 순간 샷이라는 게 어떤 각도에서 찍히느냐에 따라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그와 함께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말 많은 여학생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에 충분했다. 행여나 같은 동네에 산다는 둥 그와 인연이 되는 어떠한 화제도 흘러나와서는 안 된다. 하루가 다르게 화제의 중심에 그녀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있는 둥 없는 둥 조용히 1년만 버티다, 조용히 잊혀 가는 게 설영이 유일하게 바라는 바였다.
“선생님, 뭔가 저에 대해 단단히 오해를 하신 것 같아요. 편의점에서 캔 맥주를 샀다고 문제아라고 생각하시나 본데, 요즘 세대들은 호기심에 맥주 정도는 다 마시거든요. 사실 그 맥주 입맛에 맞지도 않아서 달랑 한 입 마시고 버렸어요.”
재미있다는 듯 옅게 퍼져 가는 미소를 보는 설영의 말이 빨라졌다.
“저 말고 관심 갖으셔야 할 진짜 문제 학생들을 찾아보세요. 그러니깐 다시 말해서 저한테는 굳이 신경 안 쓰셔도 된다는 겁니다. 안 믿으시겠지만 저는 상당히 건전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문제아를 바른길로 인도해야지, 하는 사명감까지 가지고 있다니까요. 암튼 저는 소심하고 싶어서…….”
젠장. 소심하다는 표현을 쓴다는 게 말이 잘못 나왔다.
“제 말은 저는 소심해서 선생님 같은 분이 이름을 불러 주시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습니다. 수업 시간에도 집중하고 뭐든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니 학생들 앞에서 더 이상 제 이름 좀 부르지 말아 주세요. 진심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속사포처럼 하고 싶은 말만을 던져 놓고 설영은 버스 정류장을 향해 냅다 뛰었다. 컵라면 용기가 휴지통에 떨어지면서 국물이 튀어 교복 치마를 더럽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출발하는 버스에 무조건 올라탔다. 매일 타고 다니는 버스는 아니었지만, 다행히 그녀가 사는 동네를 거쳐 가는 버스였다. 공원 입구에서 내려 공원을 가로지르면 임시로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로 걸어갈 수 있었다.
하교 시간이 한참 지나서인지 비어 있는 좌석이 꽤 눈에 들어왔다. 습관처럼 맨 뒷좌석에 앉아서 버스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강한이 비어 있는 옆자리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새로 산 담뱃갑을 이리저리 돌리는 손 모양이 초조해 보였다. 열고 싶어 죽겠는데 참고 있느라 애가 타는 모습이었다.
“5분간 앉아 있기로 약속했잖아요.”
“약속한 적은 없지만, 분명 앉아는 있었다. 너는 떠들어 대느라 5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는 것 같지만.”
무사태평한 강한의 반응으로 봐서 협조할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거다.
“하아, 좋아요. 선생님은 이 버스 타고 가세요, 저는 다음 버스로 가겠습니다.”
한탄 섞인 신음을 내뱉으며 설영이 좌석에서 일어나자마자 버스가 출발했다. 어떻게 오늘따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앞좌석으로라도 이동하려는데, 강한이 어깨에 매달린 가방끈을 잡아당겼다. 버스가 출발하는 반동과 강한의 힘에 이끌린 설영은 넘어지듯 자리에 도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정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설영을 강한이 영민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왼쪽 얼굴에 닿아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자 어색함에 아랫입술만 질근질근 깨물었다. 온통 신경이 몰려 있는 왼쪽 볼에 마비가 오는 느낌이 들어, 끝내는 설영이 신경질적으로 강한을 마주했다.
“선생님,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너 싸움 잘하더라.”
설영의 모든 감각 세포가 일순간 긴장했다. 경직되는 얼굴 근육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이 순간 열아홉 살 여고생이 할 수 있는 반응이 무엇일까. 플라스틱 포장을 뜯지 않고 담뱃갑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강인하고 거칠어 보이는 손이었다. 기다란 손가락에 새겨진 굵은 마디를 바라보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뭐라고 대답하지. 이 남자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진의를 파악해야만 했다.
“금연 3일째.”
그녀의 머릿속을 꿰뚫어 보는 듯 강한이 질문에 앞질러 대답을 내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서 연한 레몬 캔디의 향이 나는 것도 같았다.
“학교에서는 마땅히 담배를 피울 만한 장소가 없어서……. 거기다 학생들한테는 담배가 해로운 물건이니 멀리하라고 경고하면서, 내가 피우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생각도 들고.”
임시 교사로 수업 시간에 가르치는 것 빼놓고는 매사 무심하고 슬렁슬렁해서 무시했는데, 그래도 선생으로서의 기본 도리는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가 되었든 달갑지 않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보니 멀리서는 볼 수 없었던 작은 흉터가 눈썹과 눈 밑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곧게 뻗었다고 생각했던 콧등의 중간 부분도 살짝 틀어져 있었다. 꼭 누구한테 맞아서 코뼈가 부러졌다, 다시 자리를 잡으면서 원래 모습에서 틀어진 것만 같았다.
“열다섯 살 때 한 번, 열여덟 살에 한 번.”
꼭 설영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녀의 생각을 그대로 읽어 내는 강한의 예리함을 피해 시선을 다시 담뱃갑으로 돌렸다.
“3일이면 니코틴 금단 증상이 제일 심할 때인데, 담배를 손에 들고 있다는 것은 다시 피우겠다는 뜻이에요?”
“글쎄, 정면 승부라고 하는 편이 낫겠지? 담배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는 거지.”
이상하게 설영은 그의 대답이 대충 허투루 넘어갈 생각 하지 말라는 경고처럼 들렸다.
“이거 네 거 맞지?”
강한이 앞으로 내민 손바닥에는 초록색 명찰이 놓여 있었다. 이거였구나. 교복을 구매하면서 함께 주문했던 이름표. 교복을 찾아오던 날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학교 선생인 그가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못했다.
서늘한 한기에 목뒤의 솜털까지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된통 잘못 걸려들었다. 단순하게 편의점에서 캔 맥주를 사다가 걸려서 찍힌 줄 알았더니. 그동안 그가 보여 왔던 지대한 관심들이 이제야 제대로 납득이 되었다. 얌전한 척, 소심한 척, 내성적인 척, 그 모든 척들이 이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제대로 문제아로 낙인찍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