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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간격 3화
“너는 정체가 뭐냐?”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애써 태연한 척 굴었던 모습이 흔들렸다. 그래서 오히려 당황하는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당당하게 강한의 눈길을 마주 바라보았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고등학생인데요.”
피식 웃는 강한의 한쪽 입꼬리가 묘하게 틀어졌다. 그로 인해 한쪽 볼에 깊게 보조개가 팼다.
“그런데 왜 내 눈에는 평범하게 보이지가 않을까?”
투명한 눈동자에는 어린 순수한 호기심을 애써 담담하게 마주했다.
“제가 어떻게 보이는데요?”
“글쎄, 아직은 나도 확신이 안 선다. 그래서 지켜보는 거야. 과연 네가 어떤 아이일까 궁금해서.”
“그런 게 왜 궁금하세요? 어려서 친구네 집이 태권도장을 했어요. 엄마가 바쁘셔서 대부분의 시간을 그 집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태권도랑 합기도를 배웠어요. 누구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 외에 다른 모습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지 않나요? 그리고 저는 그런 제 모습이 학교에 알려져 시비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서 감추고 있는 중이구요. 별다른 의미는 없어요. 그냥 전학 온 학교에 잘 적응하고 무사히 졸업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뿐이에요.”
“그렇다면 비싼 사립고등학교는 다니면서, 대학은 왜 가기 싫은데? 따로 하고 싶은 거라도 있는 거야?”
이어지는 질문들. 어서 대화가 끊어지기만을 바라는 설영으로서는 더 이상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어린 여학생으로 보이려면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할까.
“선생님 혹시 식상하게 롤리타 콤플렉스 뭐 이런 건 아니시죠? 그거 엄연한 범법 행위입니다. 게다가 선생님 취향 맞추기에는 저는 좀 많이 어른 같은데요.”
쿡. 예상치 못한 반박인 듯 강한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웃음을 안으로 억지로 삼키는 게 티가 났다.
“어린 녀석이 못하는 말이 없다. 인마, 몸이 다 자랐다고 정신까지 다 자란 것은 아니야.”
강한이 짧은 커트 머리 위를 장난스럽게 톡톡 건드렸다. 개구지게 웃는 얼굴이 무방비한 상태의 순수한 어린아이 같았다. 이렇게 눈까지 활짝 웃는 그를 처음 보았다. 학교에서 봐 왔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다고 해야 할까. 깊게 파인 보조개와 서글서글하게 변해 버린 눈매가 설영이 미처 보지 못했던 또 다른 강한의 모습을 만들어 내었다.
위험하다. 엮기고 싶지 않은 인연이기에 아주 사소한 감정의 교류조차 달갑지 않았다. 가슴속에 이는 파동을 잠재우기 위해 머리카락에 닿는 그의 손을 거칠게 털어 냈다. 웃는 얼굴에 혹한 자신이 못마땅해서 잔뜩 인상을 찌푸리는데 뒤집힌 손바닥 위로 명찰이 놓였다.
“까칠하기는……. 걱정하지 마. 나는 내 나이대의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취향이니까.”
“선생님도 제 취향 아니거든요. 특히 저는 쓸데없이 호기심 많은 남자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
어색하게 변해 가는 표정부터 가다듬었다. 대화를 나눌수록 점점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있다는 생각에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담담한 표정의 설영이 명찰을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내려야 할 정류장까지는 한 정거장이 더 남았지만 상관없었다. 교복에서 올라오는 라면 국물 냄새가 점점 참기 힘들어지던 참이었다.
아무리 여학생들이 꽥꽥거려도 시종일관 무심한 태도를 보이던 그답지 않았다. 제대로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성가시게 되었다. 어디까지 따라올 거냐는 유치한 신경전도 여기까지. 어떠한 자극에도 반응하지 말자.
설영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들의 첫 만남, 어렴풋한 그날의 기억에서 강한과의 만남을 떠올려야 했다. 시내 버스의 하차 벨을 누르며 설영은 손안에 쥐고 있던 이름표를 교복 호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한 설영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강한의 시선은 그녀를 좇았다. 인간관계에 관해서라면 무관심하기로 정평이 나 있던 그가 타인에게 이토록 강렬한 호기심이 생기기는 처음이었다. 하물며 상대는 선생과 학생으로서의 관심조차 거부하는 자그마치 열한 살이나 어린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그렇다고 이성에게 갖는 호기심은 결코 아니었다. 이성적인 관심을 배제한 순수한 호기심. 다른 학생들 앞에서는 여고생 특유의 부끄러움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그 아래 감추고 있는 시니컬한 미소를 강한은 알고 있었다.
매사 무심한 듯 흘려보내는 눈빛 아래 반짝이는 영민함을 놓치지 않았다. 평범한 여학생이라는 그녀의 주장과는 달리 분명 설영에게는 시선을 끌어당기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수줍은 많은 소심한 여학생처럼 행동하지만 설영은 사내아이 같은 털털한 톰보이를 연상시켰다. 강렬했던 첫인상 때문일까. 궁금했다, 그녀의 진짜 본모습이.
다시 만났을 때 그는 그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부드러우면서도 여자치고는 낮게 깔린 저음의 음성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짧게 자른 머리에 유성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 교복에 달려 있는 명찰에 새겨진 이름, 류설영. 무심히 지나치는 그 아이의 눈빛을 보며 확신했다.
‘다시 만나서 반갑다, 류설영.’
설영이 서서히 그를 향해 돌아섰다. 의문이 담긴 시선과 확신이 담긴 시선이 허공에서 그대로 얽히었다. 새까만 눈동자 안에 그를 담는 순간 스파크가 튀는 듯 반짝하고 빛이 났다. 그를 기억해 내려 예리하게 꿈틀대던 눈빛이 순식간에 무심한 가면 뒤로 사라지는 것을 강한은 놓치지 않았다.
‘너 진짜 정체가 뭐냐?’
* * *
계단을 올라가는 설영의 다리 근육이 부들부들 떨렸다. 간신히 난간에 매달려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았다. 빌어먹을 오리걸음.
지난밤에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라면 국물을 쏟은 교복을 세탁기에 넣고 빨았다. 빨래 건조대에 대충 펼쳐 놓으면서도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여분의 교복을 세탁소에 맡겨 둬서 다음 날 등교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불행히도 그 동네 세탁소가 8시에 문을 연다는 사실을 오늘 아침에야 알게 되었다. 세탁소 앞에서 낭패 본 시간을 보충하느라 버스 정류장에서 교문까지 전력 질주를 했다.
당연히 지각, 거기에 체육복을 입고 등교한 설영은 벌칙으로 책가방을 머리에 이고 오리걸음으로 교문에서 본관 건물까지 뒤뚱거리며 걸어와야 했다. 언덕배기를 죽기 살기로 뛰고 오리걸음까지. 그렇다고 이 정도에 다리가 후들거리며 초주검이 될 줄은 몰랐다. 한동안 운동을 게을리했던 것이 단박에 티가 났다.
아침 조회 시간이라서인지 계단 층계에 설영 외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없었다. 첫 수업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조회를 마치고 이동하는 선생님들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서둘러야만 했다.
텅 빈 복도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1교시 시작을 알리는 타임 벨이 요란하게 울려 댔다. 불길한데. 오늘 그녀가 속한 3학년 4반 첫 수업은 수학이었다. 강한을 다시 대면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 한쪽이 껄끄러웠다.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던 마디 굵은 손가락이 떠올랐다. 곱상한 외모와 상반되는 굳은살이 박여 있던 손. 결코 교과서만 만지던 손이 아니었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담임을 맡고 있는 영어 김제니 선생이 복도로 걸어 나왔다. 풍만한 몸매를 강조하려는지 가슴 바로 위까지 열린 블라우스 단추가 어딘가 아슬아슬해 보였다. 또각또각. 작은 키를 만회하려 슬리퍼 대신 신은 하이힐. 그녀가 걸을 때마다 하이힐의 뒤축이 화강석 바닥에 불편한 파열음을 만들고 있었다.
“잘한다, 고3이나 되어서는……. 체육복 입고 등교하면서 지각이나 하고. 책가방은 또 그게 뭐니? 똑바로 못 드니?”
안정을 찾아 가던 설영의 호흡이 다시 거친 바람을 토해 냈다. 최강한 팬클럽이 여기도 있었지. 요즘 들어 담임이 설영을 못마땅해하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피곤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여유 있게 1교시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올 걸 그랬나. 출석부에 빨간 줄 하나 긋는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데. 쓸데없이 성실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계속 그러고 서 있을 거니? 수업 종 울렸는데 안 뛰어?”
설영의 상태는 안중에도 없다는 식으로 담임이 히스테릭하게 손을 옆으로 휙휙 흔들었다. 빨리 시야에서 사라져 달라는 무언의 압박. 아마도 강한을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설영이야말로 그가 나타나기 전에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럼에도 다리에 무거운 추라도 매달아 놓은 것처럼 한 발 앞으로 내딛기가 쉽지 않았다.
“복도 한가운데 서서 뭐 해?”
레몬 캔디의 상큼한 냄새가 연하게 났다. 멀찍이 계단을 뛰어 올라오던 가벼운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은 강한이였다.
“죄송합니다.”
습관처럼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하는 설영의 옆을 강한이 무심하게 지나쳐 갔다. 성큼 앞서가는 강한을 따라 설영도 걸음을 옮기는데 휘청거리는 어깨에서 가방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넘어질 듯 불안하게, 힘겹게 가방을 들어 올리는 설영의 몸이 순간 붕 하고 떠올랐다. 허리와 다리를 감싸 안은 팔이 안기지 않으려 버티는 몸을 단단히 지탱하고 있었다. 대충 접어 올린 소매 아래로 매끈하고 탄력이 넘치는 팔에 굵은 힘줄이 돋아 있었다. 척 보기에도 운동을 많이 한 사람의 팔 근육이었다.
“괜찮습니다. 내려 주세요.”
“너 바보냐? 대충 흉내만 내다 말 것이지. 그 엄청난 거리를 오리걸음으로 걸어오면 하루 종일 어떻게 버틸 생각이야?”
볼멘소리로 내려 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대로 묵살당했다. 설영은 다리를 버둥거렸지만, 단단한 팔에 갇힌 몸은 쉽사리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어머나! 최 선생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담임의 히스테릭한 외침에 학생들이 유리창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뒤를 이어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설영은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버둥댈수록 강한의 품 안으로 더 안길 뿐이라는 것을 그제야 제대로 깨달았다. 제대로 꼬이는구나. 여학생들로도 모자라 이제는 학교 여직원들에게까지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함성과 야유 소리에 설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매달리기는커녕, 오히려 떨어뜨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몸에서 최대한 힘을 뺐다. 여자치고는 키가 크고 몸무게가 나가는 편이라 무게가 꽤나 실렸을 텐데도, 강한은 안정적인 자세로 교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진한 여자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쳐가고 곧이어 교실 특유의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시기 어린 한숨 소리와 야유 섞인 농담. 책상과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나고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느낄 때쯤 두 다리가 바닥에 닿았다. 커다란 손바닥이 설영의 머리를 눌렀다. 쩌렁쩌렁 울려 대는 여학생들의 비명 소리에 관자놀이가 욱신거리고 머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탕탕.
교탁을 두드리는 소리에 강한이 멀어졌음을 깨달았다. 시장통처럼 북적대던 교실이 그 작은 동작 하나만으로 고요한 정적에 휩싸였다.
“좋은 아침! 모두 아침밥 든든하게 먹고 등교했을 거라고 믿는다.”
“네.”
“대답은 잘하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교문에서 본관까지 오리걸음으로 걸어가라는 벌칙 받은 적 있는 사람 손 들어 봐.”
강한의 질문에 학생들이 두서없이 손을 들었다.
“부반장, 네가 대표로 오리걸음으로 이 자리까지 나왔다 들어간다.”
“네, 선생님.”
굵직한 목소리의 남학생이 복도 쪽 맨 끝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머리에 얹고, 오리의 입 모양을 흉내 내며 걸었다.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설영을 가리키더니, 쭈그려 앉은 자세에서 양손으로 귀를 잡고 완전히 일어서지 않으면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몇 발자국 걷지도 않고 다리가 아프다며 엄살을 부리는 통에 학생들 사이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머리를 한차례 얻어맞은 것 같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맥이 탁 풀렸다고 해야 할까. 유리창 너머로 들려오던 야유 섞인 환호성의 의미를 이제야 제대로 이해했다. 내내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더라니. 장난과도 같은 벌칙에 죽자고 덤벼들었으니. 인연이 아닌 학교에 들어오다 보니 하는 일마다 뒤엉키는 느낌이었다.
“류설영, 봤지? 이게 이 학교 벌칙이라는 거다. 고3이면 수업 시간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적당히 몸을 사릴 줄도 알아야지. 반성문은 엉터리면서, 벌칙은 뭘 그렇게 진정성 있게 수행해?”
설영을 힐끗 쳐다보며 강한이 무심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2교시 끝나고 운동장 집합이지? 류설영은 오늘 체력 단련 제대로 했다고 치고, 단체 체조 시간에 빠져도 좋다. 담임 선생님한테는 내가 말해 둘게.”
강한은 어딘가 모르게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일부러 신경을 써 주는 것 같으면서도, 툭툭 내뱉는 무신경한 말투에 감정이 상했다. 내가 바보같이 굴든 말든 자기가 무슨 상관이야. 삐질삐질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는데, 어디선가 달콤한 라벤더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그러고 보니 강한의 셔츠에서는 향긋한 라벤더 향이 났던 것도 같다. 반쯤 넋 나간 표정으로 설영은 칠판의 상단에 있는 날짜를 주시했다.
오늘은 5월 첫째 주 수요일. 마지막으로 체육복을 세탁기에 돌렸던 것이 언제였더라. 쉽게 떠오르지 않는 걸로 봐서 이번 주는 분명히 아니었다. 곱게 다림질된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리며 강한이 교과서를 펼쳐 들었다. 연한 하늘색 셔츠에 물 빠진 청바지가 유난히 청결해 보였다. 일부러 의식해서인지 호흡마저도 단정해 보였다.
젠장. 첫 만남은 기억조차 못 하고, 어제는 라면 국물 냄새, 오늘은 찌든 땀 냄새. 체육관에서 고된 훈련을 하다 보면 남녀 구분 없이 땀에 젖은 몸으로 부대끼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몸에서 나는 시큼한 땀 냄새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훈련 상대가 대부분 남자들이었지만, 운동을 하면서 한 번도 몸에서 나는 냄새에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나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하는 것 따위는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로지 어떻게 공격해야 상대방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을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나보다 덩치가 큰 상대방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온 정신이 집중되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체력으로나 신체 조건에서 우위를 점하는 남자들은 설영에게 있어서 사랑받고 싶은 대상이기보다는 정복해야 할 산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은 묘하게 강한이 신경 쓰였다. 가능하면 엮이고 싶지 않은 인연인데, 자꾸 신경 쓰이는 일들이 늘어만 간다.
설영은 다소곳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괜히 눈이라도 마주쳐서 복잡한 머릿속에 어색한 감정을 더하고 싶지 않았다. 단순하게 머릿속을 비우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 집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체육복을 세탁기에 돌려야지. 그 외에 또 뭐가 필요했더라. 그나저나 병원에 입원한 민호는 언제쯤 퇴원을 하려나.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대자 설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계를 확인하니 무려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강한 때문에 밤에 잠을 설친 데다, 아침에 제대로 굴렀나 보다. 교실에서 정신없이 잠들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덕분에 극도로 저하되었던 체력이 어느 정도 정상 컨디션으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야! 잠깐 좀 따라 나와.”
목소리의 주인은 같은 반 학생인 민지였다. 어제 책가방으로 설영을 곤란에 빠뜨린 아이였다. 대충 감이 왔다. 최강한 팬클럽이 몰려왔구나. 점심시간에나 나타날 줄 알았더니. 그녀가 가는 방향에 따라 고개를 돌려 보니, 곱게 파마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꼬고 있는 여자아이를 중심으로 사물함 앞에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운집해 있었다. 언제 학생들이 빠져나갔는지 교실은 비어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전교생 체조 시간에 맞추어서 다들 운동장에 집합한 모양이었다.
남아 있는 학생을 찾아 빈 교실을 둘러보았다. 얼마 전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쳤다던 박유나가 유일하게 교실에 남아 있었다. 모범생답게 교탁 바로 앞에 앉은 그녀가 제법 걱정이 담긴 눈으로 설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리들 중의 맨 앞에 고선미가 있었다. 눈에 띄게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학부모회 회장을 엄마로 둔 덕에 기세가 당당했다. 서클렌즈를 꼈는지 고양이처럼 새치름한 눈이 다가오는 설영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자느라 벗어 둔 뿔테 안경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은 커다란 뿔테 안경에 가려 보이지 않던 선이 분명한 눈매를 바라보는 선미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설영의 민얼굴을 바라보던 선미가 탁 하고 파마머리를 뒤로 날렸다.
“너는 정체가 뭐냐?”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애써 태연한 척 굴었던 모습이 흔들렸다. 그래서 오히려 당황하는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당당하게 강한의 눈길을 마주 바라보았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고등학생인데요.”
피식 웃는 강한의 한쪽 입꼬리가 묘하게 틀어졌다. 그로 인해 한쪽 볼에 깊게 보조개가 팼다.
“그런데 왜 내 눈에는 평범하게 보이지가 않을까?”
투명한 눈동자에는 어린 순수한 호기심을 애써 담담하게 마주했다.
“제가 어떻게 보이는데요?”
“글쎄, 아직은 나도 확신이 안 선다. 그래서 지켜보는 거야. 과연 네가 어떤 아이일까 궁금해서.”
“그런 게 왜 궁금하세요? 어려서 친구네 집이 태권도장을 했어요. 엄마가 바쁘셔서 대부분의 시간을 그 집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태권도랑 합기도를 배웠어요. 누구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 외에 다른 모습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지 않나요? 그리고 저는 그런 제 모습이 학교에 알려져 시비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서 감추고 있는 중이구요. 별다른 의미는 없어요. 그냥 전학 온 학교에 잘 적응하고 무사히 졸업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뿐이에요.”
“그렇다면 비싼 사립고등학교는 다니면서, 대학은 왜 가기 싫은데? 따로 하고 싶은 거라도 있는 거야?”
이어지는 질문들. 어서 대화가 끊어지기만을 바라는 설영으로서는 더 이상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어린 여학생으로 보이려면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할까.
“선생님 혹시 식상하게 롤리타 콤플렉스 뭐 이런 건 아니시죠? 그거 엄연한 범법 행위입니다. 게다가 선생님 취향 맞추기에는 저는 좀 많이 어른 같은데요.”
쿡. 예상치 못한 반박인 듯 강한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웃음을 안으로 억지로 삼키는 게 티가 났다.
“어린 녀석이 못하는 말이 없다. 인마, 몸이 다 자랐다고 정신까지 다 자란 것은 아니야.”
강한이 짧은 커트 머리 위를 장난스럽게 톡톡 건드렸다. 개구지게 웃는 얼굴이 무방비한 상태의 순수한 어린아이 같았다. 이렇게 눈까지 활짝 웃는 그를 처음 보았다. 학교에서 봐 왔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다고 해야 할까. 깊게 파인 보조개와 서글서글하게 변해 버린 눈매가 설영이 미처 보지 못했던 또 다른 강한의 모습을 만들어 내었다.
위험하다. 엮기고 싶지 않은 인연이기에 아주 사소한 감정의 교류조차 달갑지 않았다. 가슴속에 이는 파동을 잠재우기 위해 머리카락에 닿는 그의 손을 거칠게 털어 냈다. 웃는 얼굴에 혹한 자신이 못마땅해서 잔뜩 인상을 찌푸리는데 뒤집힌 손바닥 위로 명찰이 놓였다.
“까칠하기는……. 걱정하지 마. 나는 내 나이대의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취향이니까.”
“선생님도 제 취향 아니거든요. 특히 저는 쓸데없이 호기심 많은 남자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
어색하게 변해 가는 표정부터 가다듬었다. 대화를 나눌수록 점점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있다는 생각에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담담한 표정의 설영이 명찰을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내려야 할 정류장까지는 한 정거장이 더 남았지만 상관없었다. 교복에서 올라오는 라면 국물 냄새가 점점 참기 힘들어지던 참이었다.
아무리 여학생들이 꽥꽥거려도 시종일관 무심한 태도를 보이던 그답지 않았다. 제대로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성가시게 되었다. 어디까지 따라올 거냐는 유치한 신경전도 여기까지. 어떠한 자극에도 반응하지 말자.
설영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들의 첫 만남, 어렴풋한 그날의 기억에서 강한과의 만남을 떠올려야 했다. 시내 버스의 하차 벨을 누르며 설영은 손안에 쥐고 있던 이름표를 교복 호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한 설영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강한의 시선은 그녀를 좇았다. 인간관계에 관해서라면 무관심하기로 정평이 나 있던 그가 타인에게 이토록 강렬한 호기심이 생기기는 처음이었다. 하물며 상대는 선생과 학생으로서의 관심조차 거부하는 자그마치 열한 살이나 어린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그렇다고 이성에게 갖는 호기심은 결코 아니었다. 이성적인 관심을 배제한 순수한 호기심. 다른 학생들 앞에서는 여고생 특유의 부끄러움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그 아래 감추고 있는 시니컬한 미소를 강한은 알고 있었다.
매사 무심한 듯 흘려보내는 눈빛 아래 반짝이는 영민함을 놓치지 않았다. 평범한 여학생이라는 그녀의 주장과는 달리 분명 설영에게는 시선을 끌어당기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수줍은 많은 소심한 여학생처럼 행동하지만 설영은 사내아이 같은 털털한 톰보이를 연상시켰다. 강렬했던 첫인상 때문일까. 궁금했다, 그녀의 진짜 본모습이.
다시 만났을 때 그는 그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부드러우면서도 여자치고는 낮게 깔린 저음의 음성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짧게 자른 머리에 유성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 교복에 달려 있는 명찰에 새겨진 이름, 류설영. 무심히 지나치는 그 아이의 눈빛을 보며 확신했다.
‘다시 만나서 반갑다, 류설영.’
설영이 서서히 그를 향해 돌아섰다. 의문이 담긴 시선과 확신이 담긴 시선이 허공에서 그대로 얽히었다. 새까만 눈동자 안에 그를 담는 순간 스파크가 튀는 듯 반짝하고 빛이 났다. 그를 기억해 내려 예리하게 꿈틀대던 눈빛이 순식간에 무심한 가면 뒤로 사라지는 것을 강한은 놓치지 않았다.
‘너 진짜 정체가 뭐냐?’
* * *
계단을 올라가는 설영의 다리 근육이 부들부들 떨렸다. 간신히 난간에 매달려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았다. 빌어먹을 오리걸음.
지난밤에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라면 국물을 쏟은 교복을 세탁기에 넣고 빨았다. 빨래 건조대에 대충 펼쳐 놓으면서도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여분의 교복을 세탁소에 맡겨 둬서 다음 날 등교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불행히도 그 동네 세탁소가 8시에 문을 연다는 사실을 오늘 아침에야 알게 되었다. 세탁소 앞에서 낭패 본 시간을 보충하느라 버스 정류장에서 교문까지 전력 질주를 했다.
당연히 지각, 거기에 체육복을 입고 등교한 설영은 벌칙으로 책가방을 머리에 이고 오리걸음으로 교문에서 본관 건물까지 뒤뚱거리며 걸어와야 했다. 언덕배기를 죽기 살기로 뛰고 오리걸음까지. 그렇다고 이 정도에 다리가 후들거리며 초주검이 될 줄은 몰랐다. 한동안 운동을 게을리했던 것이 단박에 티가 났다.
아침 조회 시간이라서인지 계단 층계에 설영 외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없었다. 첫 수업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조회를 마치고 이동하는 선생님들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서둘러야만 했다.
텅 빈 복도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1교시 시작을 알리는 타임 벨이 요란하게 울려 댔다. 불길한데. 오늘 그녀가 속한 3학년 4반 첫 수업은 수학이었다. 강한을 다시 대면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 한쪽이 껄끄러웠다.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던 마디 굵은 손가락이 떠올랐다. 곱상한 외모와 상반되는 굳은살이 박여 있던 손. 결코 교과서만 만지던 손이 아니었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담임을 맡고 있는 영어 김제니 선생이 복도로 걸어 나왔다. 풍만한 몸매를 강조하려는지 가슴 바로 위까지 열린 블라우스 단추가 어딘가 아슬아슬해 보였다. 또각또각. 작은 키를 만회하려 슬리퍼 대신 신은 하이힐. 그녀가 걸을 때마다 하이힐의 뒤축이 화강석 바닥에 불편한 파열음을 만들고 있었다.
“잘한다, 고3이나 되어서는……. 체육복 입고 등교하면서 지각이나 하고. 책가방은 또 그게 뭐니? 똑바로 못 드니?”
안정을 찾아 가던 설영의 호흡이 다시 거친 바람을 토해 냈다. 최강한 팬클럽이 여기도 있었지. 요즘 들어 담임이 설영을 못마땅해하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피곤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여유 있게 1교시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올 걸 그랬나. 출석부에 빨간 줄 하나 긋는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데. 쓸데없이 성실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계속 그러고 서 있을 거니? 수업 종 울렸는데 안 뛰어?”
설영의 상태는 안중에도 없다는 식으로 담임이 히스테릭하게 손을 옆으로 휙휙 흔들었다. 빨리 시야에서 사라져 달라는 무언의 압박. 아마도 강한을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설영이야말로 그가 나타나기 전에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럼에도 다리에 무거운 추라도 매달아 놓은 것처럼 한 발 앞으로 내딛기가 쉽지 않았다.
“복도 한가운데 서서 뭐 해?”
레몬 캔디의 상큼한 냄새가 연하게 났다. 멀찍이 계단을 뛰어 올라오던 가벼운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은 강한이였다.
“죄송합니다.”
습관처럼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하는 설영의 옆을 강한이 무심하게 지나쳐 갔다. 성큼 앞서가는 강한을 따라 설영도 걸음을 옮기는데 휘청거리는 어깨에서 가방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넘어질 듯 불안하게, 힘겹게 가방을 들어 올리는 설영의 몸이 순간 붕 하고 떠올랐다. 허리와 다리를 감싸 안은 팔이 안기지 않으려 버티는 몸을 단단히 지탱하고 있었다. 대충 접어 올린 소매 아래로 매끈하고 탄력이 넘치는 팔에 굵은 힘줄이 돋아 있었다. 척 보기에도 운동을 많이 한 사람의 팔 근육이었다.
“괜찮습니다. 내려 주세요.”
“너 바보냐? 대충 흉내만 내다 말 것이지. 그 엄청난 거리를 오리걸음으로 걸어오면 하루 종일 어떻게 버틸 생각이야?”
볼멘소리로 내려 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대로 묵살당했다. 설영은 다리를 버둥거렸지만, 단단한 팔에 갇힌 몸은 쉽사리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어머나! 최 선생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담임의 히스테릭한 외침에 학생들이 유리창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뒤를 이어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설영은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버둥댈수록 강한의 품 안으로 더 안길 뿐이라는 것을 그제야 제대로 깨달았다. 제대로 꼬이는구나. 여학생들로도 모자라 이제는 학교 여직원들에게까지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함성과 야유 소리에 설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매달리기는커녕, 오히려 떨어뜨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몸에서 최대한 힘을 뺐다. 여자치고는 키가 크고 몸무게가 나가는 편이라 무게가 꽤나 실렸을 텐데도, 강한은 안정적인 자세로 교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진한 여자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쳐가고 곧이어 교실 특유의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시기 어린 한숨 소리와 야유 섞인 농담. 책상과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나고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느낄 때쯤 두 다리가 바닥에 닿았다. 커다란 손바닥이 설영의 머리를 눌렀다. 쩌렁쩌렁 울려 대는 여학생들의 비명 소리에 관자놀이가 욱신거리고 머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탕탕.
교탁을 두드리는 소리에 강한이 멀어졌음을 깨달았다. 시장통처럼 북적대던 교실이 그 작은 동작 하나만으로 고요한 정적에 휩싸였다.
“좋은 아침! 모두 아침밥 든든하게 먹고 등교했을 거라고 믿는다.”
“네.”
“대답은 잘하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교문에서 본관까지 오리걸음으로 걸어가라는 벌칙 받은 적 있는 사람 손 들어 봐.”
강한의 질문에 학생들이 두서없이 손을 들었다.
“부반장, 네가 대표로 오리걸음으로 이 자리까지 나왔다 들어간다.”
“네, 선생님.”
굵직한 목소리의 남학생이 복도 쪽 맨 끝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머리에 얹고, 오리의 입 모양을 흉내 내며 걸었다.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설영을 가리키더니, 쭈그려 앉은 자세에서 양손으로 귀를 잡고 완전히 일어서지 않으면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몇 발자국 걷지도 않고 다리가 아프다며 엄살을 부리는 통에 학생들 사이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머리를 한차례 얻어맞은 것 같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맥이 탁 풀렸다고 해야 할까. 유리창 너머로 들려오던 야유 섞인 환호성의 의미를 이제야 제대로 이해했다. 내내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더라니. 장난과도 같은 벌칙에 죽자고 덤벼들었으니. 인연이 아닌 학교에 들어오다 보니 하는 일마다 뒤엉키는 느낌이었다.
“류설영, 봤지? 이게 이 학교 벌칙이라는 거다. 고3이면 수업 시간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적당히 몸을 사릴 줄도 알아야지. 반성문은 엉터리면서, 벌칙은 뭘 그렇게 진정성 있게 수행해?”
설영을 힐끗 쳐다보며 강한이 무심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2교시 끝나고 운동장 집합이지? 류설영은 오늘 체력 단련 제대로 했다고 치고, 단체 체조 시간에 빠져도 좋다. 담임 선생님한테는 내가 말해 둘게.”
강한은 어딘가 모르게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일부러 신경을 써 주는 것 같으면서도, 툭툭 내뱉는 무신경한 말투에 감정이 상했다. 내가 바보같이 굴든 말든 자기가 무슨 상관이야. 삐질삐질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는데, 어디선가 달콤한 라벤더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그러고 보니 강한의 셔츠에서는 향긋한 라벤더 향이 났던 것도 같다. 반쯤 넋 나간 표정으로 설영은 칠판의 상단에 있는 날짜를 주시했다.
오늘은 5월 첫째 주 수요일. 마지막으로 체육복을 세탁기에 돌렸던 것이 언제였더라. 쉽게 떠오르지 않는 걸로 봐서 이번 주는 분명히 아니었다. 곱게 다림질된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리며 강한이 교과서를 펼쳐 들었다. 연한 하늘색 셔츠에 물 빠진 청바지가 유난히 청결해 보였다. 일부러 의식해서인지 호흡마저도 단정해 보였다.
젠장. 첫 만남은 기억조차 못 하고, 어제는 라면 국물 냄새, 오늘은 찌든 땀 냄새. 체육관에서 고된 훈련을 하다 보면 남녀 구분 없이 땀에 젖은 몸으로 부대끼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몸에서 나는 시큼한 땀 냄새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훈련 상대가 대부분 남자들이었지만, 운동을 하면서 한 번도 몸에서 나는 냄새에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나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하는 것 따위는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로지 어떻게 공격해야 상대방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을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나보다 덩치가 큰 상대방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온 정신이 집중되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체력으로나 신체 조건에서 우위를 점하는 남자들은 설영에게 있어서 사랑받고 싶은 대상이기보다는 정복해야 할 산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은 묘하게 강한이 신경 쓰였다. 가능하면 엮이고 싶지 않은 인연인데, 자꾸 신경 쓰이는 일들이 늘어만 간다.
설영은 다소곳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괜히 눈이라도 마주쳐서 복잡한 머릿속에 어색한 감정을 더하고 싶지 않았다. 단순하게 머릿속을 비우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 집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체육복을 세탁기에 돌려야지. 그 외에 또 뭐가 필요했더라. 그나저나 병원에 입원한 민호는 언제쯤 퇴원을 하려나.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대자 설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계를 확인하니 무려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강한 때문에 밤에 잠을 설친 데다, 아침에 제대로 굴렀나 보다. 교실에서 정신없이 잠들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덕분에 극도로 저하되었던 체력이 어느 정도 정상 컨디션으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야! 잠깐 좀 따라 나와.”
목소리의 주인은 같은 반 학생인 민지였다. 어제 책가방으로 설영을 곤란에 빠뜨린 아이였다. 대충 감이 왔다. 최강한 팬클럽이 몰려왔구나. 점심시간에나 나타날 줄 알았더니. 그녀가 가는 방향에 따라 고개를 돌려 보니, 곱게 파마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꼬고 있는 여자아이를 중심으로 사물함 앞에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운집해 있었다. 언제 학생들이 빠져나갔는지 교실은 비어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전교생 체조 시간에 맞추어서 다들 운동장에 집합한 모양이었다.
남아 있는 학생을 찾아 빈 교실을 둘러보았다. 얼마 전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쳤다던 박유나가 유일하게 교실에 남아 있었다. 모범생답게 교탁 바로 앞에 앉은 그녀가 제법 걱정이 담긴 눈으로 설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리들 중의 맨 앞에 고선미가 있었다. 눈에 띄게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학부모회 회장을 엄마로 둔 덕에 기세가 당당했다. 서클렌즈를 꼈는지 고양이처럼 새치름한 눈이 다가오는 설영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자느라 벗어 둔 뿔테 안경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은 커다란 뿔테 안경에 가려 보이지 않던 선이 분명한 눈매를 바라보는 선미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설영의 민얼굴을 바라보던 선미가 탁 하고 파마머리를 뒤로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