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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간격 4화
“너 은근 노안이다.”
안경을 벗은 그녀의 민낯을 처음 본 고선미가 던진 첫마디였다. 숯이 많은 속눈썹 때문인지 타원형의 깊은 눈매가 또렷해 보이자, 얼굴의 윤곽이 선명해 보였다. 볼살이 통통한 여학생들에 비해 날렵한 턱선과 적당히 솟은 광대뼈가 어딘가 모르게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잔뜩 겁에 질려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해 보이는 눈동자가 떼거지로 몰려온 학생들을 쓰윽 살펴보기까지 하는 여유가 있었다.
“맞네, 완전 삭아 보여. 혹시 어디서 몇 년 꿇다 전학 온 거 아닐까?”
“그래도 안경 벗으니까 훨씬 나은데. 개성 있다고 해야 하나.”
설영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키 작은 민지에게 고선미의 날카로운 눈길이 꽂혔다.
“전형적인 미인은 아닌데 분위기 있게 생겼어. 머리를 기르면 남자들이 좋아하는 타입일 것 같아. 왜 있잖아?”
입술을 삐죽거리는 선미의 못마땅함을 알아채지 못하는 그녀의 팔을 누군가 뒤로 잡아챘다.
“민지, 너 미쳤어? 저게 뭐가 개성 있는 얼굴이야?”
“민지 말도 영 틀린 말은 아니야. 원래 마땅히 칭찬할 만한 걸 찾을 수 없을 때, 갖다 붙이는 말이 개성 있다는 거야. 키만 멀대같이 커서는, 몸매도 그렇고, 영 볼품이 없잖아.”
“그러게. 얼굴도 몸매도 안 되는 주제에 뭘 믿고 감히 다비드한테 꼬리를 쳐?”
“얼빵한 게 존나 재수 없게 생겨서는. 지가 뭔데, 자꾸 우리 다비드 조각상 주위에서 얼쩡대는 거야?”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아이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몸매 타령에 설영의 고개가 저절로 아래를 향했다. 후줄근한 체육복을 입고 있으니 한층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제 수업 시간에도 그렇고 오늘까지. 강한에게 두 번이나 안긴 것처럼 보였을 테니 다들 제대로 열 좀 받았을 것이다. 오늘 중으로 뭔가 일이 터지지 않을까,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듣는 사람의 기분은 일절 무시하고, 생각 없이 쏟아져 나오는 말들에 불쾌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순간순간 울컥하고 올라오는 울분을 삭히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무조건 참자. 설영은 파란색 사물함에 꽂혀 있는 이름표를 하나씩 읽으면서 주먹을 아플 정도로 꽉 쥐었다.
고선미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풀고 한 손을 위로 향하자,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여학생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너냐? 다비드한테 대놓고 꼬리 친다는 애가? 시골에서 올라온 촌년 주제에 너 요즘 엄청 재수 없게 굴었던 거 알지? 웬만하면 봐주고 넘어갈까 했는데 오늘은 아주 깝을 제대로 쳤더라.”
한참 어린애한테 제대로 깝쳤다는 말까지 들었다. 새삼스레 모든 원망이 강한을 향했다. 왜 쓸데없이 도와준다고 나서서 이 사달을 만드는 건지. 목 아래로 울컥하고 올라오는 무언가를 가벼운 한숨 소리와 함께 억지로 가라앉혔다. 어린애들 말장난에 흔들려서 날뛰어 봤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조건 참고 보자.
“오해야. 아마도 수학 선생님이 내가 전학생이라 도움이 필요한 학생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 너도 말했다시피 지방에서 올라와서 아직 서울 학교에 완벽하게 적응을 못 해서 말이야. 그래서 안타깝게 생각하셨나 봐. 불행히도 나는 도움을 청한 적도 없는데 말이야…….”
마지막 말은 덧붙이지 말 걸 그랬나? 나름 적당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음에 안 들었는지 선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사납게 변해 가고 있었다.
“뭐? 네까짓 게 선생님을 안 좋아한다고? 그럼 선생님이 혼자 너를 일방적으로 좋아한다는 거야?”
얘가 지금 뭐라는 걸까. 설영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이 한 말을 곱씹어 보았다. 도와줬다는 표현이 어떻게 좋아한다는 것으로 확대 해석이 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어? 그래서 너는 관심도 없는데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너를 짝사랑한다 이거잖아? 네가 그렇게 잘났어?”
이게 말로만 듣던 백치미라는 건가. 말귀 못 알아먹는 유치원생도 아니고. 아니꼽다는 식으로 눈을 치켜뜨는 선미를 상대하자니 그저 한숨만 나왔다. 한숨을 내쉴 때마다 선미의 표정이 험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심하다는 생각에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한숨을 설영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너희들이 오해하는 거야. 어제는 걸어가다가 책가방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것을 선생님이 잡아 주셨고, 오늘은 내가 벌칙을 받느라 다리에 힘이 풀려서 넘어지려는 것을 선생님이 잡아 주신 거야. 두 번 다 넘어질 뻔한 것을 도와주신 거야. 그 대상이 누구라도 결과는 같았을 거야.”
“이게 어디서 구라를 쳐. 결론은 일부러 다비드 앞에서 쇼했다는 거 아냐.”
“내가 오해라고 말했는데…….”
하아. 같은 언어를 쓰는 것 같은데 해석은 듣는 사람 마음대로다. 결론이 날 것 같지 않은 말싸움에 또다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상대방은 이미 트집을 잡겠다고 맘먹고 왔으니 어떤 식으로 대응을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알았어. 내가 쇼를 한 거로 치자. 그럼 앞으로는 수학 선생님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찌그러져 있으면 되는 거지?”
“그럴 줄 알았어. 그래 놓고 뭐, 오해라고? 이게 다비드가 좀 예뻐한다고 어디서 눈을 치켜뜨고 바락바락 대들어?”
선미는 분통이 터져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씩씩거렸다. 지금쯤이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잘못했다 빌며 매달렸어야 옳았다. 여럿이 몰려들면 잔뜩 겁에 질려 납작 엎드릴 줄 알았다. 상대방을 초라하게 만드는 한숨이나 내쉬며,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는 설영의 배짱이 마음에 안 들었다.
“조용히 넘어가 줄라고 했더니 안 되겠네. 너 같은 애는 한 대 맞아야 겁을 집어먹지?”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한 선미가 끝내는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팔을 풀 스윙 하는 동작으로 손바닥에 힘을 싣고자 상체를 오른쪽으로 크게 틀었다. 그녀가 때리려는 모션을 취하는 순간 설영의 동물적인 반사 신경이 위험을 감지했다. 평생 반사 신경 좋다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다. 눈에 뻔히 보이는 동작을 기다렸다 맞고 있기에는 훈련받은 몸이 본능에 너무 충실했다.
상반신을 여유 있게 뒤로 빼면서 거리를 유지하는 순간 아차 싶었다. 운동 신경 좋은 것까지 들켜서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설영은 조용히 바닥으로 철퍼덕 쓰러졌다. 때마침 선미의 손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이었다.
“엄마야!”
“어떡해!”
놀란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오히려 겁에 질렸다. 교실에서 폭력이 오고 가는 것은 심각한 교칙 위반이었다. 겁에 질린 그들의 눈에는 분명 설영은 맞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씨댕이, 어디서 쇼를…….”
손에 닿지도 않았는데, 맞아 쓰러진 것처럼 주저앉은 설영 때문에 선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만 같아서 분한 마음에 머리끄덩이라도 잡고 흔들어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다가서는 그녀를 향해 설영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안경 너머로는 순해 보이기만 했던 눈빛이 일순간 번쩍하고 위험하게 빛을 발했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늘하게 가라앉자 선미는 저도 모르게 한기가 들었다. 겁에 질려 물러나다 동동거리는 아이들에 부딪쳐 발까지 헛디뎠다. 중심을 잡아 주는 아이들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치며 설영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겁에 질렸다는 사실을 들킬세라 목소리에 앙칼지게 힘을 주었다.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 내가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
쿵쾅. 선미의 앙칼진 목소리 뒤로 누군가 교실 문을 발로 차는 소리에 여학생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교복 재킷을 한쪽 어깨에 삐뚜름하게 걸친 민호가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문간에 기대서 있었다. 한쪽 이마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모습은 전형적인 불량 학생의 표본 같았다.
“적당히 했으면 다들 꺼져. 나는 계집애들 칭얼거리는 소리는 딱 질색이야.”
오토바이를 타다 사고를 당해 오늘까지는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한다더니. 녀석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여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수영을 해서 청소년 대표 선수로까지 발탁이 될 정도로 수영에 남다른 재주를 보였던 녀석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말쯤에 그만두었다지만, 오랜 기간 수영을 한 덕분에 딱 벌어진 어깨가 건장해 보였다.
그에 비해 얼굴은 유달리 작고, 남자치고는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넓은 어깨와 작은 얼굴이 주는 오묘한 조화가 여학생들의 섬세한 감수성을 자극했다. 오로지 외모만으로는 기대고 싶은 마음과 돌봐 주고 싶은 보호 본능을 동시에 자극했다. 그렇지만 거친 말투 때문인지 누구 하나 가까이 다가가려 선뜻 용기를 내는 여학생이 없었다.
“저기 민호야, 오해하지 마. 우리는 단지 류설영이…….”
같은 반인 민지가 용기를 내서 앞으로 나섰다.
“빨리 안 꺼져?”
흡사 으르렁대는 소리에 놀란 여학생들이 그를 피해 우르르 앞문으로 몰려갔다.
“잠깐…….”
작고 낮은 저음이었음에도 여학생들은 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움직임을 멈추고 민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잘 들어. 저기 있는 류설영은 내가 이미 찍었어. 내 허락 없이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리면……. 그게 누가 됐던 가만 안 둬. 알아들었으면 꺼져.”
여학생들이 새된 호흡과 더불어 상기된 얼굴로 교실을 빠져나갔다. 아마도 민호가 3학년에 올라와서 가장 길게 한 말일 것이다. 겁먹고 달아나는 여학생들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설영을 돌아보는 눈길에 언뜻 부러움이 서려 있었다.
설마 이상한 의미로 확대 해석 하는 것은 아니겠지. 워낙 매사에 무심하던 녀석이라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의 파급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설영의 존재를 일체 무시해 오던 녀석에게 갑자기 무슨 고약한 심보가 들었을까. 특별한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어 대는 이유를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곤란에 처한 모습을 보니 새삼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라도 했던 걸까. 종잡을 수 없는 변덕에 어떻게 장단을 맞춰야 하는 건지.
“설영아, 괜찮아? 내가 담임 선생님한테 말해 줄까?”
유나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책상 사이를 천천히 걸어오는 그녀의 얼굴에 걱정이 묻어났다. 많이 놀랐는지 딸꾹질을 참느라 목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괜찮아. 공부하는 데 방해됐지?”
바닥에서 가뿐히 일어난 설영이 사물함에 넣어 둔 물병을 꺼내 유나에게 내밀었다.
“미안해. 끅……! 내가. 끅……!”
문가에 여전히 장승처럼 서 있는 민호의 눈치를 보며 유나가 정갈한 손놀림으로 가슴을 몇 번 두들겼다.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린 설영은 물병의 마개를 따서 유나의 손에 안겨 주다시피 넘겨주었다.
“고마워. 어려서부터 놀라면 딸꾹질을 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래? 신기하다. 나는 겁이 많아서 놀라면 항상 울었는데.”
“웃기고 있네. 겁 많은 거 좋아하시네.”
설영의 말에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민호가 교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빈정대는 말을 못 들은 척 설영은 잔잔한 미소를 유지한 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체육복 바지의 허리춤을 만지작거리며 뒤로 손을 돌려 민호가 볼 수 있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퍽이나 겁도 많다. 계속 시끄럽게 굴 거면, 나가서 떠들어.”
발아래로 책가방을 던진 민호가 아래턱으로 교실 밖을 가리켰다. 주저주저하며 유나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기, 내가 뭐 도울 일은 없을까?”
“나는 괜찮은데, 오히려 네가 놀랐나 보다. 미안해서 어쩌지?”
“아니야. 내가 나서면 오히려 네가 더 곤란한 상황에 처할까 봐…….”
시선을 내려뜨리며 유나는 말끝을 흐렸다.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설영은 알 것 같았다.
“신경 쓰지 마. 그래도 누군가 나를 걱정해 줬다니 기분은 좋다. 고마워.”
밝게 웃는 그녀를 유나가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진의를 파악하는 것처럼 눈빛이 조심스러웠다.
“나가란 말 못 들었어?”
민호가 잔뜩 인상을 구기며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발로 찼다. 거친 발길질에 가방이 교실의 한쪽 구석으로 미끄러져 갔다.
“저 자식이…….”
민호에게 한 발 다가서는 설영을 막아선 유나가 가방이 날아간 쪽으로 먼저 몸을 움직였다. 구부정한 자세로 가방을 집어 들고, 바닥을 굴러 더러워진 먼지를 털어 내는데 더 이상 딸꾹질은 하지 않았다. 선미 패거리들보다 훨씬 위협적으로 보이는 민호 앞에서 도리어 차분해 보이는 유나의 태도가 의외였다. 불편하게 한쪽 다리를 끌며 뒷문으로 나가는 유나를 지켜보던 민호는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혼잣말처럼 뭔가를 중얼거렸다.
“김민호, 너 지금 제정신이야? 병원에 있어야 할 녀석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게다가 여기가 너희 집 안방이야? 누구더라 나가라 마라야?”
“조잘조잘. 시끄러워 죽겠네.”
설영이 같은 교실에 등교하고부터는 아예 대놓고 말을 놓는 민호였다. 그동안 익숙해지기라도 한 건지, 이제는 반항적인 말투에도 별다른 거부감조차 들지 않았다. 설영의 볼을 슬쩍 쳐다본 민호가 그대로 지나쳐 맨 뒷줄에 자리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틀은 더 병원 신세를 져야 할 거라더니 의사 허락은 받고 퇴원을 한 건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민호를 따라간 설영도 바로 앞자리의 의자에 마주 보는 자세로 앉았다. 따라온 설영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민호의 이마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러자 이마에 붙은 커다란 반창고도 따라 꿈틀거렸다. 반창고 옆으로 푸르게 멍든 상처 자국을 들여다보던 설영은 자기도 모르게 쯧쯧거리며 혀를 찼다.
“살 만하니까 학교에도 나왔겠지. 나까지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지?”
“하든지 말든지. 저리 비켜. 한숨 잘 거야.”
교실에 들어서면 늘 만사 귀찮다는 식으로 책상에 엎드려 있곤 하던 민호였다. 잘 거라면서도 책상에 엎드리는 대신 민호는 말간 눈을 들어 설영과 시선을 마주쳐 왔다. 비슷한 눈높이에서 시선을 마주하기는 오랜만이었다. 심연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까만 눈동자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언제는 학교에서 눈도 마주치지 말고, 말도 섞지 말라며? 갑자기 왜 남들 앞에서 이상한 말을 하고 그래? 애들이 너랑 나랑 친하다고 오해라도 하면 어쩌려고?”
“…….”
냉랭한 반응에도 설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쓸데없는 오해로 학교생활이 복잡해 죽겠는데, 너까지 보태면 어쩌자는 건데?”
민호가 설영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눈초리로 아래턱을 씰룩대는 것이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학교에 며칠 없었다고 아주 신이 나셨더구만. 스파이 노릇 대신 연애질이나 하고, 완전 살판이 났더라.”
버릇없는 말본새에 책상에 기댄 설영이 앞으로 길게 뻗어 있는 민호의 정강이를 가볍게 찼다. 살짝 건드는 수준이었다. 그렇더라도 정강이의 튀어나온 뼈에 맞았으니 아플 만도 하건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엄살 꽤나 심하던 녀석이었는데. 커져 버린 덩치만큼이나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뒤늦게 깨달은 변화들에 설영의 한쪽 가슴에 씁쓸한 아쉬움이 스쳐 갔다.
“살판난 사람은 너 같은데? 꼬맹이 주제에 아주 맞먹다 못해 이제는 대놓고 기어오른다?”
“누구보고 꼬맹이래? 키도 나보다 훨씬 작으면서. 서류까지 조작해서 나이 속이고 꼰대 짓 하러 학교로 들어왔으면…….”
서류 조작이라는 민감한 단어가 나오자 설영이 재빨리 검지를 들어 민호의 입술 위에 가져다 대었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까칠한 부분이 수염 자국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몇 초의 시간이 걸렸다. 확실히 이제는 예전에 부르던 꼬맹이라는 별명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훌쩍 자라 있었다.
“말을 해도 꼭! 그래서 이 기회에 아예 친구 먹자고?”
행여나 누가 듣기라도 할까 목소리를 낮추는 설영을 보며 민호는 양미간을 좁혔다. 설영의 손이 아예 닿지 못하게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더니 주먹으로 야무지게 손가락이 닿았던 입술을 문질렀다. 비벼 대는 자극에 붉게 변한 입술만큼 볼도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누가 꼰대랑 친구 한대?”
퉁명스러운 대답을 끝으로 민호는 책상 위로 엎드려 표정을 가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거부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몸으로 하고 있었다.
“자식이 귀염성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어서는. 내가 사모님…….”
“제기랄, 아줌마.”
사모님이라는 호칭에 민호는 매번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으르렁대는 소리에 설영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다. 어려서는 신경도 쓰지 않던 호칭이 부쩍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 순간 어색하게 다가왔다. 스스럼없이 부르던 호칭을 격의를 갖춰 부르기 시작하면서 설영은 스스로를 어른으로 규정지었다. 그리고 그 호칭은 보이지 않는 경계선처럼 그들과 설영의 세계를 구분 짓고 있었다.
“그래, 아줌마……. 내가 아줌마 때문에 참는다. 됐지?”
입으로는 툴툴거리고 있지만 설영은 내심 민호와의 대화가 반가웠다. 도통 입을 다물고 대화를 일절 거부하더니, 오늘은 스스럼없이 먼저 말을 걸어오기까지 했다. 이 정도로 길게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의자에서 일어나 아래를 내려다보니 커다란 덩치가 불편하게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왠지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도대체 저 자그마한 머릿속에 무슨 고민을 끌어안고 있는 것일까. 작은 힌트라도 주면 좋을 텐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주변에 벽을 쌓고 자기만의 세계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다.
“너 은근 노안이다.”
안경을 벗은 그녀의 민낯을 처음 본 고선미가 던진 첫마디였다. 숯이 많은 속눈썹 때문인지 타원형의 깊은 눈매가 또렷해 보이자, 얼굴의 윤곽이 선명해 보였다. 볼살이 통통한 여학생들에 비해 날렵한 턱선과 적당히 솟은 광대뼈가 어딘가 모르게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잔뜩 겁에 질려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해 보이는 눈동자가 떼거지로 몰려온 학생들을 쓰윽 살펴보기까지 하는 여유가 있었다.
“맞네, 완전 삭아 보여. 혹시 어디서 몇 년 꿇다 전학 온 거 아닐까?”
“그래도 안경 벗으니까 훨씬 나은데. 개성 있다고 해야 하나.”
설영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키 작은 민지에게 고선미의 날카로운 눈길이 꽂혔다.
“전형적인 미인은 아닌데 분위기 있게 생겼어. 머리를 기르면 남자들이 좋아하는 타입일 것 같아. 왜 있잖아?”
입술을 삐죽거리는 선미의 못마땅함을 알아채지 못하는 그녀의 팔을 누군가 뒤로 잡아챘다.
“민지, 너 미쳤어? 저게 뭐가 개성 있는 얼굴이야?”
“민지 말도 영 틀린 말은 아니야. 원래 마땅히 칭찬할 만한 걸 찾을 수 없을 때, 갖다 붙이는 말이 개성 있다는 거야. 키만 멀대같이 커서는, 몸매도 그렇고, 영 볼품이 없잖아.”
“그러게. 얼굴도 몸매도 안 되는 주제에 뭘 믿고 감히 다비드한테 꼬리를 쳐?”
“얼빵한 게 존나 재수 없게 생겨서는. 지가 뭔데, 자꾸 우리 다비드 조각상 주위에서 얼쩡대는 거야?”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아이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몸매 타령에 설영의 고개가 저절로 아래를 향했다. 후줄근한 체육복을 입고 있으니 한층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제 수업 시간에도 그렇고 오늘까지. 강한에게 두 번이나 안긴 것처럼 보였을 테니 다들 제대로 열 좀 받았을 것이다. 오늘 중으로 뭔가 일이 터지지 않을까,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듣는 사람의 기분은 일절 무시하고, 생각 없이 쏟아져 나오는 말들에 불쾌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순간순간 울컥하고 올라오는 울분을 삭히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무조건 참자. 설영은 파란색 사물함에 꽂혀 있는 이름표를 하나씩 읽으면서 주먹을 아플 정도로 꽉 쥐었다.
고선미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풀고 한 손을 위로 향하자,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여학생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너냐? 다비드한테 대놓고 꼬리 친다는 애가? 시골에서 올라온 촌년 주제에 너 요즘 엄청 재수 없게 굴었던 거 알지? 웬만하면 봐주고 넘어갈까 했는데 오늘은 아주 깝을 제대로 쳤더라.”
한참 어린애한테 제대로 깝쳤다는 말까지 들었다. 새삼스레 모든 원망이 강한을 향했다. 왜 쓸데없이 도와준다고 나서서 이 사달을 만드는 건지. 목 아래로 울컥하고 올라오는 무언가를 가벼운 한숨 소리와 함께 억지로 가라앉혔다. 어린애들 말장난에 흔들려서 날뛰어 봤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조건 참고 보자.
“오해야. 아마도 수학 선생님이 내가 전학생이라 도움이 필요한 학생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 너도 말했다시피 지방에서 올라와서 아직 서울 학교에 완벽하게 적응을 못 해서 말이야. 그래서 안타깝게 생각하셨나 봐. 불행히도 나는 도움을 청한 적도 없는데 말이야…….”
마지막 말은 덧붙이지 말 걸 그랬나? 나름 적당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음에 안 들었는지 선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사납게 변해 가고 있었다.
“뭐? 네까짓 게 선생님을 안 좋아한다고? 그럼 선생님이 혼자 너를 일방적으로 좋아한다는 거야?”
얘가 지금 뭐라는 걸까. 설영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이 한 말을 곱씹어 보았다. 도와줬다는 표현이 어떻게 좋아한다는 것으로 확대 해석이 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어? 그래서 너는 관심도 없는데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너를 짝사랑한다 이거잖아? 네가 그렇게 잘났어?”
이게 말로만 듣던 백치미라는 건가. 말귀 못 알아먹는 유치원생도 아니고. 아니꼽다는 식으로 눈을 치켜뜨는 선미를 상대하자니 그저 한숨만 나왔다. 한숨을 내쉴 때마다 선미의 표정이 험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심하다는 생각에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한숨을 설영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너희들이 오해하는 거야. 어제는 걸어가다가 책가방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것을 선생님이 잡아 주셨고, 오늘은 내가 벌칙을 받느라 다리에 힘이 풀려서 넘어지려는 것을 선생님이 잡아 주신 거야. 두 번 다 넘어질 뻔한 것을 도와주신 거야. 그 대상이 누구라도 결과는 같았을 거야.”
“이게 어디서 구라를 쳐. 결론은 일부러 다비드 앞에서 쇼했다는 거 아냐.”
“내가 오해라고 말했는데…….”
하아. 같은 언어를 쓰는 것 같은데 해석은 듣는 사람 마음대로다. 결론이 날 것 같지 않은 말싸움에 또다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상대방은 이미 트집을 잡겠다고 맘먹고 왔으니 어떤 식으로 대응을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알았어. 내가 쇼를 한 거로 치자. 그럼 앞으로는 수학 선생님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찌그러져 있으면 되는 거지?”
“그럴 줄 알았어. 그래 놓고 뭐, 오해라고? 이게 다비드가 좀 예뻐한다고 어디서 눈을 치켜뜨고 바락바락 대들어?”
선미는 분통이 터져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씩씩거렸다. 지금쯤이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잘못했다 빌며 매달렸어야 옳았다. 여럿이 몰려들면 잔뜩 겁에 질려 납작 엎드릴 줄 알았다. 상대방을 초라하게 만드는 한숨이나 내쉬며,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는 설영의 배짱이 마음에 안 들었다.
“조용히 넘어가 줄라고 했더니 안 되겠네. 너 같은 애는 한 대 맞아야 겁을 집어먹지?”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한 선미가 끝내는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팔을 풀 스윙 하는 동작으로 손바닥에 힘을 싣고자 상체를 오른쪽으로 크게 틀었다. 그녀가 때리려는 모션을 취하는 순간 설영의 동물적인 반사 신경이 위험을 감지했다. 평생 반사 신경 좋다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다. 눈에 뻔히 보이는 동작을 기다렸다 맞고 있기에는 훈련받은 몸이 본능에 너무 충실했다.
상반신을 여유 있게 뒤로 빼면서 거리를 유지하는 순간 아차 싶었다. 운동 신경 좋은 것까지 들켜서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설영은 조용히 바닥으로 철퍼덕 쓰러졌다. 때마침 선미의 손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이었다.
“엄마야!”
“어떡해!”
놀란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오히려 겁에 질렸다. 교실에서 폭력이 오고 가는 것은 심각한 교칙 위반이었다. 겁에 질린 그들의 눈에는 분명 설영은 맞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씨댕이, 어디서 쇼를…….”
손에 닿지도 않았는데, 맞아 쓰러진 것처럼 주저앉은 설영 때문에 선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만 같아서 분한 마음에 머리끄덩이라도 잡고 흔들어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다가서는 그녀를 향해 설영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안경 너머로는 순해 보이기만 했던 눈빛이 일순간 번쩍하고 위험하게 빛을 발했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늘하게 가라앉자 선미는 저도 모르게 한기가 들었다. 겁에 질려 물러나다 동동거리는 아이들에 부딪쳐 발까지 헛디뎠다. 중심을 잡아 주는 아이들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치며 설영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겁에 질렸다는 사실을 들킬세라 목소리에 앙칼지게 힘을 주었다.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 내가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
쿵쾅. 선미의 앙칼진 목소리 뒤로 누군가 교실 문을 발로 차는 소리에 여학생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교복 재킷을 한쪽 어깨에 삐뚜름하게 걸친 민호가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문간에 기대서 있었다. 한쪽 이마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모습은 전형적인 불량 학생의 표본 같았다.
“적당히 했으면 다들 꺼져. 나는 계집애들 칭얼거리는 소리는 딱 질색이야.”
오토바이를 타다 사고를 당해 오늘까지는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한다더니. 녀석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여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수영을 해서 청소년 대표 선수로까지 발탁이 될 정도로 수영에 남다른 재주를 보였던 녀석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말쯤에 그만두었다지만, 오랜 기간 수영을 한 덕분에 딱 벌어진 어깨가 건장해 보였다.
그에 비해 얼굴은 유달리 작고, 남자치고는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넓은 어깨와 작은 얼굴이 주는 오묘한 조화가 여학생들의 섬세한 감수성을 자극했다. 오로지 외모만으로는 기대고 싶은 마음과 돌봐 주고 싶은 보호 본능을 동시에 자극했다. 그렇지만 거친 말투 때문인지 누구 하나 가까이 다가가려 선뜻 용기를 내는 여학생이 없었다.
“저기 민호야, 오해하지 마. 우리는 단지 류설영이…….”
같은 반인 민지가 용기를 내서 앞으로 나섰다.
“빨리 안 꺼져?”
흡사 으르렁대는 소리에 놀란 여학생들이 그를 피해 우르르 앞문으로 몰려갔다.
“잠깐…….”
작고 낮은 저음이었음에도 여학생들은 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움직임을 멈추고 민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잘 들어. 저기 있는 류설영은 내가 이미 찍었어. 내 허락 없이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리면……. 그게 누가 됐던 가만 안 둬. 알아들었으면 꺼져.”
여학생들이 새된 호흡과 더불어 상기된 얼굴로 교실을 빠져나갔다. 아마도 민호가 3학년에 올라와서 가장 길게 한 말일 것이다. 겁먹고 달아나는 여학생들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설영을 돌아보는 눈길에 언뜻 부러움이 서려 있었다.
설마 이상한 의미로 확대 해석 하는 것은 아니겠지. 워낙 매사에 무심하던 녀석이라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의 파급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설영의 존재를 일체 무시해 오던 녀석에게 갑자기 무슨 고약한 심보가 들었을까. 특별한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어 대는 이유를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곤란에 처한 모습을 보니 새삼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라도 했던 걸까. 종잡을 수 없는 변덕에 어떻게 장단을 맞춰야 하는 건지.
“설영아, 괜찮아? 내가 담임 선생님한테 말해 줄까?”
유나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책상 사이를 천천히 걸어오는 그녀의 얼굴에 걱정이 묻어났다. 많이 놀랐는지 딸꾹질을 참느라 목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괜찮아. 공부하는 데 방해됐지?”
바닥에서 가뿐히 일어난 설영이 사물함에 넣어 둔 물병을 꺼내 유나에게 내밀었다.
“미안해. 끅……! 내가. 끅……!”
문가에 여전히 장승처럼 서 있는 민호의 눈치를 보며 유나가 정갈한 손놀림으로 가슴을 몇 번 두들겼다.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린 설영은 물병의 마개를 따서 유나의 손에 안겨 주다시피 넘겨주었다.
“고마워. 어려서부터 놀라면 딸꾹질을 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래? 신기하다. 나는 겁이 많아서 놀라면 항상 울었는데.”
“웃기고 있네. 겁 많은 거 좋아하시네.”
설영의 말에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민호가 교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빈정대는 말을 못 들은 척 설영은 잔잔한 미소를 유지한 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체육복 바지의 허리춤을 만지작거리며 뒤로 손을 돌려 민호가 볼 수 있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퍽이나 겁도 많다. 계속 시끄럽게 굴 거면, 나가서 떠들어.”
발아래로 책가방을 던진 민호가 아래턱으로 교실 밖을 가리켰다. 주저주저하며 유나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기, 내가 뭐 도울 일은 없을까?”
“나는 괜찮은데, 오히려 네가 놀랐나 보다. 미안해서 어쩌지?”
“아니야. 내가 나서면 오히려 네가 더 곤란한 상황에 처할까 봐…….”
시선을 내려뜨리며 유나는 말끝을 흐렸다.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설영은 알 것 같았다.
“신경 쓰지 마. 그래도 누군가 나를 걱정해 줬다니 기분은 좋다. 고마워.”
밝게 웃는 그녀를 유나가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진의를 파악하는 것처럼 눈빛이 조심스러웠다.
“나가란 말 못 들었어?”
민호가 잔뜩 인상을 구기며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발로 찼다. 거친 발길질에 가방이 교실의 한쪽 구석으로 미끄러져 갔다.
“저 자식이…….”
민호에게 한 발 다가서는 설영을 막아선 유나가 가방이 날아간 쪽으로 먼저 몸을 움직였다. 구부정한 자세로 가방을 집어 들고, 바닥을 굴러 더러워진 먼지를 털어 내는데 더 이상 딸꾹질은 하지 않았다. 선미 패거리들보다 훨씬 위협적으로 보이는 민호 앞에서 도리어 차분해 보이는 유나의 태도가 의외였다. 불편하게 한쪽 다리를 끌며 뒷문으로 나가는 유나를 지켜보던 민호는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혼잣말처럼 뭔가를 중얼거렸다.
“김민호, 너 지금 제정신이야? 병원에 있어야 할 녀석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게다가 여기가 너희 집 안방이야? 누구더라 나가라 마라야?”
“조잘조잘. 시끄러워 죽겠네.”
설영이 같은 교실에 등교하고부터는 아예 대놓고 말을 놓는 민호였다. 그동안 익숙해지기라도 한 건지, 이제는 반항적인 말투에도 별다른 거부감조차 들지 않았다. 설영의 볼을 슬쩍 쳐다본 민호가 그대로 지나쳐 맨 뒷줄에 자리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틀은 더 병원 신세를 져야 할 거라더니 의사 허락은 받고 퇴원을 한 건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민호를 따라간 설영도 바로 앞자리의 의자에 마주 보는 자세로 앉았다. 따라온 설영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민호의 이마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러자 이마에 붙은 커다란 반창고도 따라 꿈틀거렸다. 반창고 옆으로 푸르게 멍든 상처 자국을 들여다보던 설영은 자기도 모르게 쯧쯧거리며 혀를 찼다.
“살 만하니까 학교에도 나왔겠지. 나까지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지?”
“하든지 말든지. 저리 비켜. 한숨 잘 거야.”
교실에 들어서면 늘 만사 귀찮다는 식으로 책상에 엎드려 있곤 하던 민호였다. 잘 거라면서도 책상에 엎드리는 대신 민호는 말간 눈을 들어 설영과 시선을 마주쳐 왔다. 비슷한 눈높이에서 시선을 마주하기는 오랜만이었다. 심연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까만 눈동자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언제는 학교에서 눈도 마주치지 말고, 말도 섞지 말라며? 갑자기 왜 남들 앞에서 이상한 말을 하고 그래? 애들이 너랑 나랑 친하다고 오해라도 하면 어쩌려고?”
“…….”
냉랭한 반응에도 설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쓸데없는 오해로 학교생활이 복잡해 죽겠는데, 너까지 보태면 어쩌자는 건데?”
민호가 설영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눈초리로 아래턱을 씰룩대는 것이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학교에 며칠 없었다고 아주 신이 나셨더구만. 스파이 노릇 대신 연애질이나 하고, 완전 살판이 났더라.”
버릇없는 말본새에 책상에 기댄 설영이 앞으로 길게 뻗어 있는 민호의 정강이를 가볍게 찼다. 살짝 건드는 수준이었다. 그렇더라도 정강이의 튀어나온 뼈에 맞았으니 아플 만도 하건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엄살 꽤나 심하던 녀석이었는데. 커져 버린 덩치만큼이나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뒤늦게 깨달은 변화들에 설영의 한쪽 가슴에 씁쓸한 아쉬움이 스쳐 갔다.
“살판난 사람은 너 같은데? 꼬맹이 주제에 아주 맞먹다 못해 이제는 대놓고 기어오른다?”
“누구보고 꼬맹이래? 키도 나보다 훨씬 작으면서. 서류까지 조작해서 나이 속이고 꼰대 짓 하러 학교로 들어왔으면…….”
서류 조작이라는 민감한 단어가 나오자 설영이 재빨리 검지를 들어 민호의 입술 위에 가져다 대었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까칠한 부분이 수염 자국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몇 초의 시간이 걸렸다. 확실히 이제는 예전에 부르던 꼬맹이라는 별명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훌쩍 자라 있었다.
“말을 해도 꼭! 그래서 이 기회에 아예 친구 먹자고?”
행여나 누가 듣기라도 할까 목소리를 낮추는 설영을 보며 민호는 양미간을 좁혔다. 설영의 손이 아예 닿지 못하게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더니 주먹으로 야무지게 손가락이 닿았던 입술을 문질렀다. 비벼 대는 자극에 붉게 변한 입술만큼 볼도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누가 꼰대랑 친구 한대?”
퉁명스러운 대답을 끝으로 민호는 책상 위로 엎드려 표정을 가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거부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몸으로 하고 있었다.
“자식이 귀염성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어서는. 내가 사모님…….”
“제기랄, 아줌마.”
사모님이라는 호칭에 민호는 매번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으르렁대는 소리에 설영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다. 어려서는 신경도 쓰지 않던 호칭이 부쩍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 순간 어색하게 다가왔다. 스스럼없이 부르던 호칭을 격의를 갖춰 부르기 시작하면서 설영은 스스로를 어른으로 규정지었다. 그리고 그 호칭은 보이지 않는 경계선처럼 그들과 설영의 세계를 구분 짓고 있었다.
“그래, 아줌마……. 내가 아줌마 때문에 참는다. 됐지?”
입으로는 툴툴거리고 있지만 설영은 내심 민호와의 대화가 반가웠다. 도통 입을 다물고 대화를 일절 거부하더니, 오늘은 스스럼없이 먼저 말을 걸어오기까지 했다. 이 정도로 길게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의자에서 일어나 아래를 내려다보니 커다란 덩치가 불편하게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왠지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도대체 저 자그마한 머릿속에 무슨 고민을 끌어안고 있는 것일까. 작은 힌트라도 주면 좋을 텐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주변에 벽을 쌓고 자기만의 세계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