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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간격 5화
“잠이나 자라. 나는 네가 쫓아낸 아이나 찾으러 가야겠다.”
싫어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애처로운 마음이 들어 둥그렇게 솟아 있는 뒤통수를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예전에 가끔 민호가 재워 달라고 어리광을 피우면 이런 식으로 만져 주곤 했던 때가 떠올랐다. 모두가 평온했던 시절. 돌이켜 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때가 아닐까 싶었다. 북적북적 사람 사는 소리가 끊이지 않던 시절. 기분 좋은 회상에 젖어 드는 것도 겨우 잠깐의 여유. 엄마의 얼굴이 떠오르자 묵직한 그리움이 가슴 안쪽을 여지없이 파고들었다.
언제쯤이면 무덤덤해질 수 있을까. 떠올리지 말자. 씩씩해지자고 약속했는데 어기면 안 되지.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재빨리 감정을 추스른 설영이 들리지 않게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거둬들이는데, 민호가 팔을 위로 뻗어 설영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그 애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고개를 팔 안에 묻고 있어서인지 작게 울리는 목소리는 어두운 동굴을 뚫고 나오는 소리처럼 깊은 여운이 있었다.
“누구, 박유나? 내가 알아야 하는 거야?”
대답 대신 민호는 손목을 떨어뜨렸다. 힘없이 내려진 왼쪽 손목을 설영이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무슨 뜻이었을까. 교차점이 없어 보이는 유나라는 아이와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걸까.
“몰라도 돼.”
복도 맞은편 운동장에서 들리던 음악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부터 들리기 시작한 재잘거림이 점차 귓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복도를 내달리는 발소리와 커다란 웃음소리가 함께 뒤엉켰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하기만 하던 공기층이 요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랫소리의 행방을 찾아 고개를 돌린 곳에는 교실 문에 기댄 채 민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유나가 있었다. 설영과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시선을 회피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눈에 담겨 있던 여과되지 못한 애틋함을 설영은 알아챌 수 있었다.
“저리 비켜, 박유나.”
부산스럽게 들이닥치는 아이들에게 휩쓸려 유나가 안으로 떠밀려 들어왔다.
“뭐야, 귀찮게. 그렇지 않아도 비좁아 죽겠는데…….”
“어, 미안해.”
밀고 들어오는 아이들을 피해 한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기는 유나의 움츠린 어깨가 눈에 거슬리던 참이었다. 탕. 의자가 교실 바닥으로 거칠게 넘어지는 소리에 왁자지껄하던 교실이 싸늘한 정적에 감싸였다. 교실로 들어서던 아이들이 움찔하며 일제히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널브러진 의자를 발로 한 번 걷어찬 민호가 서슬 퍼런 기세로 뒷문으로 다가갔다.
바다가 갈리듯 양쪽으로 길을 내어 준 아이들 사이를 걸어가는 민호는 분명 화가 나 있었다. 여학생 두 명 정도는 충분히 드나들 수 있는 교실 입구가 민호 한 사람이 들어서므로 꽉 찬 느낌이었다. 무슨 이유로 입구를 막고 서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건장한 어깨와 반항적인 눈빛에 기가 죽은 아이들이 슬금슬금 그를 피해 앞문으로 모여들었다.
설영은 민호가 왜 화가 났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뿌연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당장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반된 에너지를 뿜어내는 두 아이. 어딘가 묘하게 닮아 있었다. 상처 입은 눈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라 그런 걸까. 같은 연결고리 안에 두 사람을 끼워 넣고 바라보는 설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박유나에 대해 이성적인 관심이라도 생긴 건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인연이라도 닿아 있는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인연일까. 새삼스레 유나라는 아이가 궁금해졌다.
* * *
고등학교 본관을 지나면 교직원 전용 주차장 뒤편으로 작은 쪽문이 있었다. 한 사람이 드나들 정도의 작은 철문은 항상 노란색의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오랜 기간 열리지 않은 듯 자물쇠는 녹이 슬어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주변에 녹색 이끼가 넓게 퍼져 있었다.
쪽문 옆으로 2미터 높이의 벽돌담이 세상으로부터 학교를 가로막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 놓여 있지만 전혀 다른 두 세계. 자유와 규제. 저 담장을 넘어가는 순간 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이 주는 압박감에서도 어느 정도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다.
자신의 키보다 훨씬 더 높은 벽을 뛰어넘기에 앞서 설영은 책가방을 담벼락 반대편으로 집어 던졌다. 작은 골목길 사이로 2미터보다 더 높은 담장을 가진 주택이 맞은편에 있었다.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진 소리를 확인하고 뒤로 돌아갔다. 일정한 거리가 확보되자 힘차게 구르기 시작했다. 탄력을 받은 발로 맨땅을 치고 올라서자마자, 울퉁불퉁한 벽면을 타고 담장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손으로 몸무게를 지탱한 채 무리 없이 점프해서 바닥으로 내려섰다.
예상했던 대로 텅 빈 골목길에는 지나가는 자동차도 없었다. 전체 하교 시간까지는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민호는 2교시 쉬는 시간 이후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설영은 미리 던져둔 책가방의 흔적부터 찾았다.
그런데 골목길 중간 어디쯤에 구르고 있을 줄 알았던 책가방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알싸한 담배 냄새가 난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고개를 돌리자 하얀 연기가 가느다란 흔적을 남기며 공기 중으로 소멸되어 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땡땡이?”
담장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강한이 오른손으로 설영의 남색 책가방을 흔들어 보였다. 반대쪽 손에는 방금까지 태우다 꺼 버린 담배꽁초가 들려 있었다. 정식 조퇴도 아니고 담장을 타고 탈출하다 걸렸으니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선생님은 금연 실패하셨네요.”
언뜻 보기에 188센티는 족히 돼 보이는 신장이었다. 그와 담장의 크기를 비교하는 설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키가 크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신장보다 높은 담장을 쉽사리 넘나들 수는 없었다. 확실히 웨이트 트레이닝만으로 다져진 몸은 아니었다. 계단을 뛰어 올라오던 가벼운 발자국 소리며, 키가 큰 설영을 힘들이지 않고 안아 들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들켰네. 오늘 딱 하루만 나한테 눈감아 주기로 했다.”
가방을 내미는 손은 햇빛에 보기 좋게 그을려 있었다. 단순하게 어제오늘 햇볕에 노출되었다기보다는 오랜 시간 야외 활동을 통해 다져진 색이었다. 무슨 운동을 했을까. 눈가에 남아 있는 상처도 운동을 하다가 생긴 걸까. 코는 왜 부러졌던 걸까. 만남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에 대한 궁금증이 하나둘 늘어났다. 커져만 가는 호기심에 설영은 고개를 흔들며 앞머리를 털어 냈다. 이래저래 달갑지 않다.
“그 딱 하루가 날마다가 아니기를 바라봅니다.”
“그렇게 되는 건가? 긴장해야겠는데, 예상치 못한 강적을 만날 것 같아서.”
무심하게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며 설영은 강한의 손에 있는 가방을 가로챘다. 그러고는 지난번처럼 귀찮게 따라붙을까 봐 멀찌감치 떨어져 빠른 걸음으로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직 대답을 못 들은 것 같은데. 이 시간에 땡땡이치고 어디 좋은 데라도 가는가 보지?”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뒤따르는 발소리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같이 땡땡이치시는 선생님이 그걸 따질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요.”
“너랑 나랑 입장이 같아? 나는 엄연한 조퇴다.”
담을 넘는 조퇴도 있나. 억지스러운 대답을 설영은 무시했다.
“이모랑 같이 살아?”
서류상 보호자로 기재되어 있는 정 비서님을 말하는 것이었다. 같은 집에 10년 넘게 살았으니, 가족이 없는 설영에게는 어찌 보면 가장 가까운 보호자 같은 존재였다. 어느새 옆에서 보조를 맞추고 있는 강한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뇨.”
“그럼 혼자 사는 건가. 혼자 산 지는 얼마나 됐어?”
지금은 딱히 혼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민호랑 같은 공간에서 생활한다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좀 됐어요.”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귀찮아하는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대학은 왜 안 가려고? 따로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물론 대학을 꼭 가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야. 단지 네가 원하는 게 뭔지를 정확하게 알기 전이라면 대학도 하나의 좋은 길잡이가 돼 줄 수 있다고 말해 주고 싶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관심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선의 대답이었다.
“선생님은 계속 따라오실 겁니까?”
“내가 왜 너를 따라간다고 생각해?”
다시 몸을 정면으로 돌리던 설영이 멈칫했다. 강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럼 먼저 가세요.”
설영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더니, 거만하게 아래턱이 앞으로 나왔다.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턱을 앞으로 까딱거리는 폼이 상당히 도전적이었다. 어디 할 테면 해봐라. 땡땡이를 치면서도 당당한 설영을 보고 있자니 강한은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말을 걸 때마다 귀찮다며 인상을 찌푸리는 반응이 재미있어, 더 귀찮게 매달리고 싶어지는 심보는 또 뭘까.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하찮은 사람 취급을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 생각해 보면, 대부분 강한이 사람들의 관심을 끊어 내기 위해 무관심을 표출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설영에게는 묘하게 그를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그보다 한참이나 어린 학생인데도 인생을 다 산 것 같은 시니컬함이 느껴졌다.
움직임이 없는 그를 향해 설영이 양미간을 가운데로 모았다.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인 채 까딱거리는 모습에는 인내심의 한계가 엿보였다. 어차피 큰길로 나가는 방향은 이 길 하나밖에 없었다. 반대편은 뒷산의 산책로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학교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싫든 좋든 설영도 이 길을 따라서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앞장서서 걸어가는 그의 뒤로 터벅거리며 걷는 발소리가 따라왔다. 불만이 가득해서 일부러 바닥을 차고 걸어가고 있었다. 가끔 작은 돌멩이가 날아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척 외면했지만 피식거리며 퍼져 가는 미소를 숨길 수는 없었다.
나뭇가지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땅을 내리밟는 묵직한 발소리가 뒤를 이었다. 손을 높이 뻗어 하늘로 뛰어오르는 그림자가 바닥으로 내려올 때면 여지없이 한숨 소리가 뒤를 잇는다. 일부러 느릿느릿 걷는 강한의 뒤에 좀이 쑤셔 어쩔 줄 몰라 하는 설영이 있었다.
큰길 사거리에 도착하자 강한이 느닷없이 설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부러 약 올리며 천천히 걸어가는 그로 인해 설영은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깡그리 무시하고 지나쳐 가려는데 책가방의 한쪽 끈이 잡아당겨졌다.
“식당에 안 내려온 것 같던데, 점심 안 먹었지?”
“먹었어요.”
어떻게 알았을까 싶다가도 설마 알고서 하는 말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적거리는 점심시간에 교직원에 학생들까지 300명도 넘게 드나드는 식당에 설영이 왔다 갔는지를 확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짓말은 안 통해. 너희 담임 대신으로 내가 오늘 학생 식당 규율 담당이었거든. 나도 점심 건너뛰었더니 배가 고프다.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
“저는 배 안 고파요.”
“무슨 소리야? 얼굴에 배고파 하고 써져 있는데.”
“저는 그냥 집에 가서 먹겠습니다.”
“집에 먹을 것은 있고? 오늘도 편의점 컵라면으로 때울 생각은 아니지? 너처럼 한창 자라는 나이에는…….”
잔소리가 시작되려 하자 설영은 고개를 한차례 흔들었다. 오늘은 편의점 대신 분식집에 갈 생각이었는데, 강한의 집요한 태도로 봐서는 분식집까지 따라올 기세였다.
“순대국밥으로 하겠습니다.”
훗. 여지없이 허를 찌르는 메뉴 선택에 강한은 억지로 웃음을 삼켰다. 은연중에 여고생다운 대답을 기대했었나. 웃음을 참느라 실룩거리는 입 모양을 설영이 한심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짜증이 배인 눈빛을 마주하자, 마침내 큭 하고 웃음이 터져 강한이 먼저 시선을 회피했다. 한참 어린 학생을 상대로 왜 자꾸 유치한 신경전인지. 제어가 되지 않는 웃음을 억지로 삼키기 위해 마른기침과 함께 목청을 가다듬어야 했다.
“흠흠……. 앞장서.”
뭐가 재미있다고 저렇게 실실거리는 건지. 찰거머리처럼 따라붙는 강한을 한 번 노려본 설영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몸을 돌렸다. 강한이 쉽사리 물러설 것 같지는 않으니, 적정선에서 타협안을 찾아봐야지. 큰길 맞은편 4층짜리 건물 1층에 순댓국집 간판이 크게 걸려 있었다. 가장 가까워서이기도 했지만, 음식을 먹느라 마주 앉아 있을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교차로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는 것을 확인한 설영은 도로변으로 한 걸음 내려왔다. 횡단보도 차선에 맞춰 차들이 멈춰 선 것을 확인하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도로 건너편에서 오토바이가 달려오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무리하게 교차로를 건너가려는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설영과 같은 방향으로 차들이 진입하는 차선은 비어 있었다. 그 차선의 멀찍이서 달려오던 자동차가 빨간불이 초록색으로 바뀐 것을 확인하고, 교차로 지점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사거리로 진입했다.
교차 지점에 당도해서야 서로의 존재를 알아챈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속도를 줄였다. 부딪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브레이크를 잡은 오토바이가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회전을 했다. 핸들을 무리하게 옆으로 꺾은 오토바이는 무게 중심을 잃고 옆으로 크게 기울었다. 위태로워 보이던 오토바이가 달려오던 동력을 이기지 못하고 설영이 서 있는 방향으로 급회전을 하면서 미끄러졌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설영은 뒤에서 덮치듯이 감싸 안은 힘에 밀려 그대로 앞으로 굴러 넘어졌다. 어깨에 메고 있던 책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갔다. 한낮의 태양열에 뜨끈하게 달아오른 아스팔트 위로 힘없이 쓰러지는 설영의 몸은 밑에서 받쳐 안은 강한과 함께 몇 바퀴를 굴렀다.
구르면서도 강한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양팔로 등과 허리를 단단하게 받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자동차 경적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 소리에 한동안 얼이 빠져 멍한 상태로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은색의 물체를 통해 반사되는 강한 빛이 강렬하게 눈을 자극했다.
“끙. 너 보기보다 엄청 무겁다. 아무래도 하루에 두 번은 무리인 것 같다.”
속삭임처럼 울림이 있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장난스럽게 비죽대는 한쪽 볼에 깊은 보조개가 패었다. 웃음이 담긴 그윽한 눈빛과 마주한 순간 설영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더니 미친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마주 닿아 있는 가슴을 통해 정상 속도보다 두 배는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의 심장 박동을 들킬 것만 같았다. 당황으로 허둥대기 시작했다. 일어나기 위해 상반신을 꿈틀거리며 손이 햇볕에 그을린 팔을 누르자, 장난스럽게 웃고 있던 강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고통에 찡그린 얼굴을 보며 설영이 더욱 허둥댔다. 급한 마음에 양손을 위로 들어 올리자 가슴에 몸무게가 실려, 헉하며 새된 호흡이 터져 나왔다.
놀란 설영은 이번에는 제대로 땅바닥에 손으로 짚고 몸을 지탱했다. 빛을 반사하는 은색의 물체가 핸드폰 케이스라는 것을 손바닥의 감각을 통해 깨달았다. 차가운 물건의 기운을 받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이나 자라. 나는 네가 쫓아낸 아이나 찾으러 가야겠다.”
싫어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애처로운 마음이 들어 둥그렇게 솟아 있는 뒤통수를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예전에 가끔 민호가 재워 달라고 어리광을 피우면 이런 식으로 만져 주곤 했던 때가 떠올랐다. 모두가 평온했던 시절. 돌이켜 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때가 아닐까 싶었다. 북적북적 사람 사는 소리가 끊이지 않던 시절. 기분 좋은 회상에 젖어 드는 것도 겨우 잠깐의 여유. 엄마의 얼굴이 떠오르자 묵직한 그리움이 가슴 안쪽을 여지없이 파고들었다.
언제쯤이면 무덤덤해질 수 있을까. 떠올리지 말자. 씩씩해지자고 약속했는데 어기면 안 되지.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재빨리 감정을 추스른 설영이 들리지 않게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거둬들이는데, 민호가 팔을 위로 뻗어 설영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그 애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고개를 팔 안에 묻고 있어서인지 작게 울리는 목소리는 어두운 동굴을 뚫고 나오는 소리처럼 깊은 여운이 있었다.
“누구, 박유나? 내가 알아야 하는 거야?”
대답 대신 민호는 손목을 떨어뜨렸다. 힘없이 내려진 왼쪽 손목을 설영이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무슨 뜻이었을까. 교차점이 없어 보이는 유나라는 아이와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걸까.
“몰라도 돼.”
복도 맞은편 운동장에서 들리던 음악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부터 들리기 시작한 재잘거림이 점차 귓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복도를 내달리는 발소리와 커다란 웃음소리가 함께 뒤엉켰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하기만 하던 공기층이 요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랫소리의 행방을 찾아 고개를 돌린 곳에는 교실 문에 기댄 채 민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유나가 있었다. 설영과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시선을 회피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눈에 담겨 있던 여과되지 못한 애틋함을 설영은 알아챌 수 있었다.
“저리 비켜, 박유나.”
부산스럽게 들이닥치는 아이들에게 휩쓸려 유나가 안으로 떠밀려 들어왔다.
“뭐야, 귀찮게. 그렇지 않아도 비좁아 죽겠는데…….”
“어, 미안해.”
밀고 들어오는 아이들을 피해 한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기는 유나의 움츠린 어깨가 눈에 거슬리던 참이었다. 탕. 의자가 교실 바닥으로 거칠게 넘어지는 소리에 왁자지껄하던 교실이 싸늘한 정적에 감싸였다. 교실로 들어서던 아이들이 움찔하며 일제히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널브러진 의자를 발로 한 번 걷어찬 민호가 서슬 퍼런 기세로 뒷문으로 다가갔다.
바다가 갈리듯 양쪽으로 길을 내어 준 아이들 사이를 걸어가는 민호는 분명 화가 나 있었다. 여학생 두 명 정도는 충분히 드나들 수 있는 교실 입구가 민호 한 사람이 들어서므로 꽉 찬 느낌이었다. 무슨 이유로 입구를 막고 서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건장한 어깨와 반항적인 눈빛에 기가 죽은 아이들이 슬금슬금 그를 피해 앞문으로 모여들었다.
설영은 민호가 왜 화가 났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뿌연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당장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반된 에너지를 뿜어내는 두 아이. 어딘가 묘하게 닮아 있었다. 상처 입은 눈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라 그런 걸까. 같은 연결고리 안에 두 사람을 끼워 넣고 바라보는 설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박유나에 대해 이성적인 관심이라도 생긴 건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인연이라도 닿아 있는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인연일까. 새삼스레 유나라는 아이가 궁금해졌다.
* * *
고등학교 본관을 지나면 교직원 전용 주차장 뒤편으로 작은 쪽문이 있었다. 한 사람이 드나들 정도의 작은 철문은 항상 노란색의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오랜 기간 열리지 않은 듯 자물쇠는 녹이 슬어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주변에 녹색 이끼가 넓게 퍼져 있었다.
쪽문 옆으로 2미터 높이의 벽돌담이 세상으로부터 학교를 가로막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 놓여 있지만 전혀 다른 두 세계. 자유와 규제. 저 담장을 넘어가는 순간 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이 주는 압박감에서도 어느 정도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다.
자신의 키보다 훨씬 더 높은 벽을 뛰어넘기에 앞서 설영은 책가방을 담벼락 반대편으로 집어 던졌다. 작은 골목길 사이로 2미터보다 더 높은 담장을 가진 주택이 맞은편에 있었다.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진 소리를 확인하고 뒤로 돌아갔다. 일정한 거리가 확보되자 힘차게 구르기 시작했다. 탄력을 받은 발로 맨땅을 치고 올라서자마자, 울퉁불퉁한 벽면을 타고 담장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손으로 몸무게를 지탱한 채 무리 없이 점프해서 바닥으로 내려섰다.
예상했던 대로 텅 빈 골목길에는 지나가는 자동차도 없었다. 전체 하교 시간까지는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민호는 2교시 쉬는 시간 이후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설영은 미리 던져둔 책가방의 흔적부터 찾았다.
그런데 골목길 중간 어디쯤에 구르고 있을 줄 알았던 책가방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알싸한 담배 냄새가 난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고개를 돌리자 하얀 연기가 가느다란 흔적을 남기며 공기 중으로 소멸되어 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땡땡이?”
담장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강한이 오른손으로 설영의 남색 책가방을 흔들어 보였다. 반대쪽 손에는 방금까지 태우다 꺼 버린 담배꽁초가 들려 있었다. 정식 조퇴도 아니고 담장을 타고 탈출하다 걸렸으니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선생님은 금연 실패하셨네요.”
언뜻 보기에 188센티는 족히 돼 보이는 신장이었다. 그와 담장의 크기를 비교하는 설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키가 크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신장보다 높은 담장을 쉽사리 넘나들 수는 없었다. 확실히 웨이트 트레이닝만으로 다져진 몸은 아니었다. 계단을 뛰어 올라오던 가벼운 발자국 소리며, 키가 큰 설영을 힘들이지 않고 안아 들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들켰네. 오늘 딱 하루만 나한테 눈감아 주기로 했다.”
가방을 내미는 손은 햇빛에 보기 좋게 그을려 있었다. 단순하게 어제오늘 햇볕에 노출되었다기보다는 오랜 시간 야외 활동을 통해 다져진 색이었다. 무슨 운동을 했을까. 눈가에 남아 있는 상처도 운동을 하다가 생긴 걸까. 코는 왜 부러졌던 걸까. 만남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에 대한 궁금증이 하나둘 늘어났다. 커져만 가는 호기심에 설영은 고개를 흔들며 앞머리를 털어 냈다. 이래저래 달갑지 않다.
“그 딱 하루가 날마다가 아니기를 바라봅니다.”
“그렇게 되는 건가? 긴장해야겠는데, 예상치 못한 강적을 만날 것 같아서.”
무심하게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며 설영은 강한의 손에 있는 가방을 가로챘다. 그러고는 지난번처럼 귀찮게 따라붙을까 봐 멀찌감치 떨어져 빠른 걸음으로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직 대답을 못 들은 것 같은데. 이 시간에 땡땡이치고 어디 좋은 데라도 가는가 보지?”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뒤따르는 발소리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같이 땡땡이치시는 선생님이 그걸 따질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요.”
“너랑 나랑 입장이 같아? 나는 엄연한 조퇴다.”
담을 넘는 조퇴도 있나. 억지스러운 대답을 설영은 무시했다.
“이모랑 같이 살아?”
서류상 보호자로 기재되어 있는 정 비서님을 말하는 것이었다. 같은 집에 10년 넘게 살았으니, 가족이 없는 설영에게는 어찌 보면 가장 가까운 보호자 같은 존재였다. 어느새 옆에서 보조를 맞추고 있는 강한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뇨.”
“그럼 혼자 사는 건가. 혼자 산 지는 얼마나 됐어?”
지금은 딱히 혼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민호랑 같은 공간에서 생활한다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좀 됐어요.”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귀찮아하는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대학은 왜 안 가려고? 따로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물론 대학을 꼭 가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야. 단지 네가 원하는 게 뭔지를 정확하게 알기 전이라면 대학도 하나의 좋은 길잡이가 돼 줄 수 있다고 말해 주고 싶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관심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선의 대답이었다.
“선생님은 계속 따라오실 겁니까?”
“내가 왜 너를 따라간다고 생각해?”
다시 몸을 정면으로 돌리던 설영이 멈칫했다. 강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럼 먼저 가세요.”
설영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더니, 거만하게 아래턱이 앞으로 나왔다.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턱을 앞으로 까딱거리는 폼이 상당히 도전적이었다. 어디 할 테면 해봐라. 땡땡이를 치면서도 당당한 설영을 보고 있자니 강한은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말을 걸 때마다 귀찮다며 인상을 찌푸리는 반응이 재미있어, 더 귀찮게 매달리고 싶어지는 심보는 또 뭘까.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하찮은 사람 취급을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 생각해 보면, 대부분 강한이 사람들의 관심을 끊어 내기 위해 무관심을 표출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설영에게는 묘하게 그를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그보다 한참이나 어린 학생인데도 인생을 다 산 것 같은 시니컬함이 느껴졌다.
움직임이 없는 그를 향해 설영이 양미간을 가운데로 모았다.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인 채 까딱거리는 모습에는 인내심의 한계가 엿보였다. 어차피 큰길로 나가는 방향은 이 길 하나밖에 없었다. 반대편은 뒷산의 산책로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학교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싫든 좋든 설영도 이 길을 따라서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앞장서서 걸어가는 그의 뒤로 터벅거리며 걷는 발소리가 따라왔다. 불만이 가득해서 일부러 바닥을 차고 걸어가고 있었다. 가끔 작은 돌멩이가 날아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척 외면했지만 피식거리며 퍼져 가는 미소를 숨길 수는 없었다.
나뭇가지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땅을 내리밟는 묵직한 발소리가 뒤를 이었다. 손을 높이 뻗어 하늘로 뛰어오르는 그림자가 바닥으로 내려올 때면 여지없이 한숨 소리가 뒤를 잇는다. 일부러 느릿느릿 걷는 강한의 뒤에 좀이 쑤셔 어쩔 줄 몰라 하는 설영이 있었다.
큰길 사거리에 도착하자 강한이 느닷없이 설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부러 약 올리며 천천히 걸어가는 그로 인해 설영은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깡그리 무시하고 지나쳐 가려는데 책가방의 한쪽 끈이 잡아당겨졌다.
“식당에 안 내려온 것 같던데, 점심 안 먹었지?”
“먹었어요.”
어떻게 알았을까 싶다가도 설마 알고서 하는 말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적거리는 점심시간에 교직원에 학생들까지 300명도 넘게 드나드는 식당에 설영이 왔다 갔는지를 확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짓말은 안 통해. 너희 담임 대신으로 내가 오늘 학생 식당 규율 담당이었거든. 나도 점심 건너뛰었더니 배가 고프다.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
“저는 배 안 고파요.”
“무슨 소리야? 얼굴에 배고파 하고 써져 있는데.”
“저는 그냥 집에 가서 먹겠습니다.”
“집에 먹을 것은 있고? 오늘도 편의점 컵라면으로 때울 생각은 아니지? 너처럼 한창 자라는 나이에는…….”
잔소리가 시작되려 하자 설영은 고개를 한차례 흔들었다. 오늘은 편의점 대신 분식집에 갈 생각이었는데, 강한의 집요한 태도로 봐서는 분식집까지 따라올 기세였다.
“순대국밥으로 하겠습니다.”
훗. 여지없이 허를 찌르는 메뉴 선택에 강한은 억지로 웃음을 삼켰다. 은연중에 여고생다운 대답을 기대했었나. 웃음을 참느라 실룩거리는 입 모양을 설영이 한심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짜증이 배인 눈빛을 마주하자, 마침내 큭 하고 웃음이 터져 강한이 먼저 시선을 회피했다. 한참 어린 학생을 상대로 왜 자꾸 유치한 신경전인지. 제어가 되지 않는 웃음을 억지로 삼키기 위해 마른기침과 함께 목청을 가다듬어야 했다.
“흠흠……. 앞장서.”
뭐가 재미있다고 저렇게 실실거리는 건지. 찰거머리처럼 따라붙는 강한을 한 번 노려본 설영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몸을 돌렸다. 강한이 쉽사리 물러설 것 같지는 않으니, 적정선에서 타협안을 찾아봐야지. 큰길 맞은편 4층짜리 건물 1층에 순댓국집 간판이 크게 걸려 있었다. 가장 가까워서이기도 했지만, 음식을 먹느라 마주 앉아 있을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교차로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는 것을 확인한 설영은 도로변으로 한 걸음 내려왔다. 횡단보도 차선에 맞춰 차들이 멈춰 선 것을 확인하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도로 건너편에서 오토바이가 달려오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무리하게 교차로를 건너가려는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설영과 같은 방향으로 차들이 진입하는 차선은 비어 있었다. 그 차선의 멀찍이서 달려오던 자동차가 빨간불이 초록색으로 바뀐 것을 확인하고, 교차로 지점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사거리로 진입했다.
교차 지점에 당도해서야 서로의 존재를 알아챈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속도를 줄였다. 부딪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브레이크를 잡은 오토바이가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회전을 했다. 핸들을 무리하게 옆으로 꺾은 오토바이는 무게 중심을 잃고 옆으로 크게 기울었다. 위태로워 보이던 오토바이가 달려오던 동력을 이기지 못하고 설영이 서 있는 방향으로 급회전을 하면서 미끄러졌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설영은 뒤에서 덮치듯이 감싸 안은 힘에 밀려 그대로 앞으로 굴러 넘어졌다. 어깨에 메고 있던 책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갔다. 한낮의 태양열에 뜨끈하게 달아오른 아스팔트 위로 힘없이 쓰러지는 설영의 몸은 밑에서 받쳐 안은 강한과 함께 몇 바퀴를 굴렀다.
구르면서도 강한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양팔로 등과 허리를 단단하게 받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자동차 경적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 소리에 한동안 얼이 빠져 멍한 상태로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은색의 물체를 통해 반사되는 강한 빛이 강렬하게 눈을 자극했다.
“끙. 너 보기보다 엄청 무겁다. 아무래도 하루에 두 번은 무리인 것 같다.”
속삭임처럼 울림이 있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장난스럽게 비죽대는 한쪽 볼에 깊은 보조개가 패었다. 웃음이 담긴 그윽한 눈빛과 마주한 순간 설영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더니 미친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마주 닿아 있는 가슴을 통해 정상 속도보다 두 배는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의 심장 박동을 들킬 것만 같았다. 당황으로 허둥대기 시작했다. 일어나기 위해 상반신을 꿈틀거리며 손이 햇볕에 그을린 팔을 누르자, 장난스럽게 웃고 있던 강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고통에 찡그린 얼굴을 보며 설영이 더욱 허둥댔다. 급한 마음에 양손을 위로 들어 올리자 가슴에 몸무게가 실려, 헉하며 새된 호흡이 터져 나왔다.
놀란 설영은 이번에는 제대로 땅바닥에 손으로 짚고 몸을 지탱했다. 빛을 반사하는 은색의 물체가 핸드폰 케이스라는 것을 손바닥의 감각을 통해 깨달았다. 차가운 물건의 기운을 받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