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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간격 6화


“괜찮으세요? 혹시 어디 부러지거나 다치신 건 아니죠? 일어설 수 있으시겠어요? 팔을 움직여 보실래요? 아니, 차라리 움직이지 않는 게 났겠어요. 이럴 게 아니라 제가 구급차를 부를까요?”
두서없이 말을 이어 가는 설영을 보며 피식, 강한이 미소 지었다. 허둥대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설영이 처음으로 열아홉 살의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보였다. 안경도 어딘가로 날아가 버린 모양이었다. 걱정으로 한층 깊어진 눈이 강한의 다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넘어지면서 쓸렸는지 설영의 작지만 앙증맞은 코끝에 빨간 상처 자국이 있었다. 강한이 손가락을 들어 살며시 상처 부위를 건드려 보았다.
팔이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사실을 확인한 설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잡고 일어서라고 내민 손을 강한이 거절했다. 대신 바닥을 짚고 일어선 강한이 손바닥에 묻은 더러운 흙먼지를 털어 냈다. 두 다리로 서서 걸어 다니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크게 다친 기색이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거센 안도감이 드는 한편 여전히 거칠게 뛰고 있는 심장 박동에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자꾸만 나타나서 거침없이 흔들어 대는 강한 때문에 복잡하게 얽혀 드는 마음이 불편하고 어색하기만 했다. 그래서 마음과는 반대로 쌀쌀맞은 말투가 튀어나왔다.
“선생님은 원래 그렇게 웃음이 헤프세요?”
“인마, 이럴 때는 구해 줘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
퉁명스럽게 구는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강한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한 바퀴 돌렸다. 체육복에 찢어진 부위는 없는지, 피가 묻어난 곳은 없는지 주의 깊게 살폈다.
“팔 한번 움직여 봐. 다친 곳 없나 살펴보게.”
설영이 양팔을 올렸다 내리고, 제자리서 껑충껑충 점프를 했다.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강한이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떡였다. 다행히 운전자도 크게 다치지는 않은 듯 바닥으로 넘어진 오토바이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설영이 떨어뜨린 책가방은 오토바이 밑에 깔려 있었다. 오토바이가 구르면서 바퀴에 끌려 들어간 모양이었다. 이로써 오토바이가 정확하게 설영이 서 있던 방향으로 미끄러져 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강한이 설영을 안고 몸을 피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충돌 사고를 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생명에 지장은 없었겠지만, 분명 지금처럼 멀쩡하게 서서 사고 현장을 바라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차도를 벗어나 설영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은 강한이 사람들이 몰려 있는 오토바이 주변으로 다가갔다. 누군가와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강한의 뒷모습을 보며 설영은 놀라 그 자리에 돌덩이처럼 굳어 버렸다.
설영의 책가방을 오토바이 아래에서 끄집어내는 그의 셔츠에 핏자국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바닥을 구르면서 아스팔트의 거칠한 표면에 스쳤는지 팔꿈치 아래 드러난 맨살 위 쓸린 자국에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류설영. 병원에 안 가 봐도 괜찮겠어?”
꽤 아팠을 텐데도 강한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바닥에서 설영이 팔에 손을 대자 인상을 찌푸린 이유를 이제야 확연히 알았다.
“저는 괜찮은데……. 선생님은 병원에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계속 피 나는 것 같은데요.”
강한이 팔을 비틀어 쓸린 자국을 들여다보았다. 피부가 당겨지자, 아픔이 느껴지는지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무래도 그러는 게 좋겠지. 미안해서 어쩐다, 순댓국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다.”
아스팔트 바닥에 쓸려 해지고 더러워진 설영의 가방을 내려다보며 강한이 가볍게 혀를 찼다. 바지 뒤춤으로 손을 넣어 지갑을 꺼낸 그가 오만 원권 지폐 네 장을 꺼냈다.
“택시 타고 들어가. 밥도 사 먹고. 컵라면으로 대충 때울 생각 하지 말고, 제대로 된 밥 사 먹어. 아니면 집에 들어가서 배달 음식이라도 시켜 먹든가. 네 나이에 제대로 안 챙겨 먹으면 나중에 골골할 거라는 내 말 새겨듣는 게 좋을 거다.”
“너무 많은데…….”
“가방도 하나 새로 사야겠는데. 혹시 모르니까 약국에 들러서 근육 진통제도 사 가지고 들어가.”
어정쩡한 자세로 망설이고 있는 설영 대신 강한이 열려진 가방의 호주머니에 돈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가져다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내 핸드폰 번호니까, 저녁에 많이 아프면 연락해. 대신 다른 학생들한테 유출하면 죽는다.”
설영은 멍한 표정으로 번호를 내려다보았다. 기세에 눌렸다고 할까. 완벽한 보호자처럼 구는 강한으로 인해 설영은 진짜 고등학생으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누군가에게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기분이 든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어린 나이부터 뭐든 혼자서 척척 해내는 것에 버릇이 들어 있었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래야만 직성이 풀렸다.
사고의 후유증일까. 밝은 대낮인데도 아득한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꿈인지 경계선이 불분명하게 느껴졌다. 택시를 잡기 위해서 차도를 향해 돌아서는 강한의 셔츠 한 자락을 설영이 잡아당겼다.
“저기, 선생님…….”
“왜? 할 말 있어?”
“그게 아니라…….”
마땅히 하고 싶은 말은 없었다. 순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쫓아오는 그가 귀찮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나쁘지 않네.”
호기심 많은 선생님과 비밀을 간직한 학생. 설영을 향한 강한의 시선에는 나이 어린 학생에 대한 호기심 외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셔츠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설영이 다급하게 셔츠를 놓고 체육복 호주머니 안으로 양손을 찔러 넣었다.
심장의 불규칙한 반응은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낯선 심장의 반응이 생소하기만 했다. 스트레스성 불안 장애가 틀림없다. 아무리 대담한 사람이라도 크게 다칠 뻔한 사건을 겪고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배고픔과 순간적인 공포가 빚어낸 일시적인 충동. 바로 그거다. 일시적인 충동, 심리적 불안감에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기대고 싶다는 충동이 드는 것은 일반적인 반응일 것이다.
다가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드는 강한을 보며 설영은 주먹을 쥐었다. 여전히 한쪽 손이 핸드폰을 힘겹게 감싸고 있었다. 참, 정 비서님에게 전화를 해서 민호의 행방을 물어보려고 했었지. 퇴원 수속은 제대로 마치고 나온 건지도 확인을 해야 하고.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는 순간,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의문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멀리서 다가오는 사이렌 소리에 거짓말처럼 심장이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다행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져만 갈 생각이라는 놈을 이쯤에서 차단할 수 있어서. 밀물이 몰고 올 하얀 포말에 허망하게 사라져 버릴 모래성 같은 것. 굳이 사치스러운 감상 따위로 머릿속을 복잡하게 채울 필요는 없었다. 이 순간만 벗어나면 저절로 없어질 일시적인 감정의 공황 상태 같은 것이었다.

* * *

“담임이 전화했더구나. 무단으로 조퇴를 했다면서? 이런 식으로 선생님들 눈 밖에 나면 좋지 않다고 사모님이 걱정을…….”
설영이 냉장고에서 사과 주스를 꺼냈다. ‘뻥’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자, 유리병을 원형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말을 중간에서 자르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정 비서가 멋쩍은 시선으로 썰렁한 거실을 둘러보았다. 축구를 해도 될 만큼 넓은 공간에 3인용 가죽 소파가 유일한 가구라서 그런지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었다.
“하긴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니. 민호 교통사고 때문에 의원님이 조금 예민해 계시거든. 사모님도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너한테 신경을 많이 쓰고 계셔. 너무 어린 나이에 혼자 밖으로 내보낸 것은 아닌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데리고 있을걸,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하셨어.”
평생을 모신 분을 감싸 주고 싶은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설영은 그저 건조하고 마른 미소를 입가에 유지했다. 민호의 아버지는 이제 겨우 오십 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다음 차기 대선 주자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을 정도로 여당의 실세였다. 투표권이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김형태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정치인 집안의 아들로 정계 진출을 위해 엘리트 코스를 순차적으로 밟은 그는 결혼도 재벌가의 외동딸과 정략적 제휴의 입장으로 받아들였다. 민호의 어머니 역시 야망이 큰 사람이었다. 차기 영부인을 목표로 그림자처럼 남편을 내조하는 데 일생을 바치고 있었다.
정계나 재계 인사들과의 사교 파티, 봉사활동 등의 사회생활로 바쁜 민호의 친엄마를 대신해서 설영의 엄마가 민호를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설영의 엄마와 민호의 엄마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같은 학교만 다녔을 뿐이지, 사는 세계가 달랐던 두 사람은 학창 시절에는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결혼과 동시에 남편을 사고로 잃고 홀로 어린 딸을 키우고 있었던 설영 엄마의 딱한 사정을 듣고, 같은 학교 동창이 다리를 놔 줌으로써 민호와의 오랜 인연이 시작되었다. 보모 역할로 민호의 집에 들어가 생활하게 된 게 설영이 일곱 살이고, 민호가 두 살이 되던 해였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대저택의 뒤편에 설영과 엄마를 위한 작은 숙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같은 저택에 지내면서도 민호의 아버지와 마주한 적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어려서는 아줌마라고 불렀던 사모님도 민호의 방으로 직접 찾아오실 때에야 만날 수가 있었다.
설영의 기억 속에 아줌마는 생일마다 선물로 사 주셨던 도자기 인형처럼 예쁘고 화사한 사람이었다. 예쁘지만 깨질까 무서워 함부로 만질 수 없었던 도자기 인형처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민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설영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표면적으로는 스포츠며 외국어 공부를 위한 과외 선생님과의 스케줄로 민호가 놀 시간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피고용인의 자녀인 설영과 민호가 함께 어울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아줌마의 입장을 존중하려는 엄마의 숨겨진 배려였다. 그 후로 설영은 본채 출입에 제한이 생겼다.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독립심이 커지고, 밖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가장 친한 친구인 해수 아빠가 운영하시는 태권도 학원에서 방과 후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설영이 열여섯 살에서 열일곱 살로 넘어가던 겨울이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눈도 많이 오고, 추웠던 기억이 난다. 몸살감기에 걸렸다고 밤마다 기침을 하던 엄마와 모처럼 만에 나들이를 다녀오던 날이었다. 아빠의 기일을 하루 앞두고, 백화점에 가서 예쁜 드레스를 샀다. 동네 입구 꽃집에서 꽃다발도 미리 주문하고, 제과점에 들러 아빠가 좋아하셨다던 생크림 케이크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에 엄마는 고열에 시달리셨다. 모처럼 만의 나들이에 피곤해 깊이 잠든 설영을 깨우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셨던 모양이었다. 다음 날 오전까지도 해열제만 먹고 버티셨다. 해열제를 먹어도 열이 내려가지 않았다. 병원에 가 보라는 주위의 권유가 있었지만, 간소하게나마 제사 음식을 스스로 장만하시고 싶어 하셨다.
주방 아줌마들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가 좋아하셨다는 나물과 전 종류 위주로 음식을 장만하시던 엄마가 쓰러지신 것은 점심때가 지난 후였다.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실려 가셨던 엄마는 폐렴 판정을 받으셨다. 그리고 며칠을 독하게 앓으시다가 아빠가 계시는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엄마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던 날은 하얀 눈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예쁘게 웃고 있는 엄마의 사진 액자 위로 눈송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쌓여 갔다. 마지막을 함께하는 길에 민호와 아줌마가 동행했다. 엄마의 미소에 쌓이는 눈을 털어 내느라 꽁꽁 얼어붙은 손을 아줌마가 따뜻한 입김으로 녹여 주셨다. 장례식을 찾아온 사람들이 말했다. 아줌마 덕에 너희 엄마는 최고의 의료진들에게 치료받고, 최고급 장례 절차를 밟게 되었다고.
대저택으로 돌아온 설영은 엄마의 빈자리를 처음으로 깨달았다. 밤새 내리는 눈이 달빛에 반사되어 유난히 밝은 밤이었다. 행여나 엄마가 눈 쌓인 마당을 밝고 집으로 돌아오진 않을까 유리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에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반갑게 뛰쳐나갔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띵띵 부은 민호가 얇은 잠옷을 입고 방문 밖에 서 있었다. 그 밤에 엄마를 그리워하던 사람은 설영 혼자만이 아니었다. 추워서 떨고 있는 민호를 이부자리 안으로 밀어 넣고,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울다, 달래다, 지쳐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커튼을 젖히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아줌마가 한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민호와 설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엄마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거라고 착각했었다. ‘엄마’ 하고 부르며 내미는 손길을 외면하지 않았다. 따스한 체온으로 감싸 주고,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그때의 따사로웠던 기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입학하게 될 고등학교 가까이에 거처를 마련했으니, 나가 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원망하지 않았다. 설영이 보고 싶다며 찾아오는 민호를 멀리해 달라는 부탁을 들었을 때도, 알았다며 고분고분하게 순종했다. 아마도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아줌마라고 부르던 호칭이 사모님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
설영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혼자서 해야 하는 일들이 훨씬 더 많아졌을 뿐이었다. 학교에 가고, 수업이 끝나면 체육관에서 운동을 했다. 엄마와의 추억이 깃든 공간이 한 맺히게 그리워도, 남매의 정을 나누며 같이 자랐던 민호가 미치게 보고 싶어도, 이를 악물고 참았다.
눈가가 짓무를 정도로 울며 잠든 날들의 횟수가 줄어들고, 칼날에 베인 듯 시리기만 하던 그리움도 무던해져 갔다. 마음이 공허할수록 공부에 매달렸다. 심장이 약했던 아빠는 검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막연하게나마 아빠의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법대에 진학했다.
법학 대학 3학년 끝 무렵, 사모님의 호출을 받았다. 그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말에 과감하게 휴학계를 제출했다. 준비하던 공부는 잠시 미루기로 했다. 민호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엄마와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가족과 다름없는 아이였다. 단순하게 마음에 진 빚을 덜어 내고자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그래서 후회는 없었다.
“지금 민호는 어디에 있어요?”
정 비서의 시선을 따라 설영도 넓은 거실을 둘러보았다. 임시 거처로 마련해 준 넓은 복층 구조의 아파트에 민호의 흔적은 없었다. 병원에서 퇴원하면서 받아 왔다는 약봉지만 덩그러니 서랍장 위에 놓여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목재 계단의 중간 정도에 흘리고 간 핸드폰 충전기가 그가 이 집에 기거하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아마 본가에 있을 거야. 오늘이 그날이잖니.”
한 달에 딱 한 번, 민호가 부모님과 식사를 하기로 한 날. 집에서 나와 설영과 함께 사는 대신 사모님이 내건 유일한 조건이었다.
“민호는 아직까지 별다른 말은 없었지?”
“네, 아직까지 저한테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에요.”
“민호한테 너는 친누나나 다름없을 정도로 살가운 가족이었으니까. 어찌 보면 친부모보다도 더 가까운 존재였을 거야. 어른들 욕심이 어린 너희들에게 상처만 남겼구나.”
오래된 기억을 헤집는 말에 설영의 마음에 날 선 아픔이 스며들었다. 커다란 저택에 혼자 남겨 두고 온 민호에 대한 죄책감이 여전히 마음 한구석을 괴롭히고 있었다. 설영도 겨우 열일곱 살이었다. 세상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었다. 민호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사모님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찾아오던 민호를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하는 날이 많아질수록, 감정이 풍부하던 아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져 갔다. ‘배신자’라고 울먹이던 어린 민호의 모습을 떠올리자 마음이 천근만근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마에 송골송골하게 맺혀 있던 땀방울이 기어이 턱을 타고 목으로 흘러내렸다. 손등으로 땀을 훔치는 모습을 보던 정 비서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가방을 열었다.
“사실은 사모님 부탁도 있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겸사겸사 들렀어. 생활비는 통장으로 보내지만, 비상금으로 가지고 있다가 필요하면 쓰라고 따로 챙겨 주셨다. 어른이 주시는 것이니 부담 갖지 말고 받으렴.”
설영의 앞으로 내밀어진 봉투가 꽤 두꺼워 보였다. 봉투를 밀어 내는 손길이 단호했다.
“제가 민호 옆에 있고 싶던 이유는 이런 것이 아니었어요.”
“알아. 설영이 너는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살다 보면 돈이라는 게 유용하게 쓰일 때가 있거든.”
봉투는 다시 설영의 앞으로 돌아왔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서는 아직 그녀가 모르는 게 많았다. 그럼에도 돈이 세상에서 어떤 의미로 통용되는지 정도는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돈으로 인해 신분이 결정되는 사회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들만의 세계에서는 돈이 사람의 귀천까지도 좌우했다. 하지만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것도 뼈저리게 배웠다. 돈에 얽매이는 순간 그들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세계. 그들이 세상을 보는 잣대에 그녀를 맞추고 싶지 않았다.